지혜의 소리
글 수 1,249
여러분의 세계에서, 이 드물게 얻어지는 결정determination이
'성스러운 깨달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몇몇의 위대한 영적 마스터들이 이 결정에 도달하였으며 그 지식을
그들의 사도(제자)들에게 전수하였습니다.
이 사도들의 대다수는 그들의 뒤죽 박죽된 생각 속에서
이 가르침을 잃어 버렸고
그리하여,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제대로 전승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리하여, '깨달음enlightment'은 전혀 정확하지 않은
거짓된 개념이 되어 버렸습니다.
ㅡ 은하연합의 메시지에서
♡ ♤ ♡ ♡ ♡ ♡ ♡ ♡ ♡ ♡ ♡ ♡ ♡ ♡ ♡ ♡ ♡ ♤ ♡
바울은 예수의 모든 역할이 그를 믿는 신앙인들을 그들의 죄 의식과 비참함,
그리고 사탄의 힘으로부터 해방시킨 그의 죽음에 그 핵심이 있다고 가르쳤다.
사실상 바울이 서신에 쓴 한 마디 말이 예수의 실제적인 가르침을 의미하는것은 아니며,
그는 심지어 그의 비유 가운데 어느 하나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대신 그는 단지 자기 자신의 철학과 사상만을 전개시키고 있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을 분노의 자식들,
즉 하느님의 진노를 받기 쉬운 자녀로서 그 성격을 규정시키는 경향이 있다(에베소서 2장 3절).
모든 사람들은(예외없이)희망도 없고 하느님도 없이(에베소서 2장 12절)
버림받았다(예컨대, 로마서 5장 18절, 고린도전서 15장 18절).
왜냐하면 사탄이(예이없이)
모든 사람들에 대한 지배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로마서 3장 9절, 갈라디아서 3장 22절, 골로새서 2장 14절).
천벌의 의미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모클레스 Damocles의 칼처럼 따라다닌다. (예컨대 로마서 5장 16절).
따라서 인류의 교사로서 바울은 그의 <위협적인 소식>을 <즐거운 소식>으로 만들었으며
<오직 그>만이 구원의 길을 보여 줄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물론 그러한 태도로 모든 사람이 죽음에 대한 본질적 견해에 이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태도는 죽음을 마치 죄의 해결책인양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 속에서도 바울의 기독교에서와 같은 죽음의 공포에 대한 그 같은 교화를 발견할 수가 없다.
바울 때문에 기독교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기독교도들이 두려움의 멍에 밑에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는 종교가 되었다.
그 종교는 이미 친절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예수의 하느님의 개념에서 벗어나
바울의 말에 의해 생성된 진노한 구약의 하느님이라는 미숙함으로 되돌아갔다.
핵심은 바울이 정확히 명시한 말,
즉 구원받기 위해 인간 개개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가장 가슴에 와 닿게 된다. (로마서 3장 24절, 3 장 28절, 9장 11절, 9장 16절 ; 고린도 전서 1장 29절 ; 갈라디아서 2장 16절 참조).
바울에 따르면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2장 8~9절)
따라서 바울의 교리는 구원을 하느님을 위한 일방적인 일로 만든다.
즉 사람들은 지상에서 제한된 능력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로마서 3장 24절, 4장 16절;
에베소서 2장 5절, 2장 8~9절 ; 디모데후서 1장 9절 ; 디도서 3장 5~7절 참조)
여기서 바울이 말한 것은 물론 매우 그럴 듯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편리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회에 가입하기만 하면 구원은 <자동적으로>보장받는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은 삶의 목표에 도달하는 데는 하등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기독교도들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희생적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사람들이 이러한 <교회>에 참가하여 <회비>를 지불하기만 하면(이상하기도 하여라!)
영원한 천국에 자리를 확보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히 그러한 가르침은 많은 지지자들을 끌어들였고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결국 안전하고도 편안하게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을 믿기란 훨씬 더 쉬운 일이다.
단지 개종하는 행위에 의해 속죄되었고 구원받았으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완벽하게 새사람이 된다.
이러한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의 역할이 경시된 구원행위를 위해 개인 각자가 시도하는
모든 노력은 심지어 죽을 죄가 되기도 한다.
반대로 모든 사람이 아무리 그들의 삶을 모범적이고 선하게 산다 해도 만약
그들이 십자가 위의 희생을 전적으로 그들 개인의 구원을 이루는 것으로 깊이 인식하지 못한다면
버림받게 된다고 이 기르침은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위대함과 독특함이 이 가르침의 진리와 더불어 지탱되거나
쓰러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자세히 조사해 보면 이런 생각은
예수의 실제 사상과는 너무 동떨어지 거짓말임을 알 수 있다.
복음 안에서는 소위 구원에 대한 기독교교리에 대해서는 암시조차 없다.
예수의 메시지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산상수훈> 안에나 또는
주기도문이나 예수의 전통적인 비유 안에도 없다!
실제로 그런 구원이 그토록 중요했다면, 예수는 그의 <희생적인 죽음>이 인류의 구원을
의미한다는 약간의 암시만이라도 주었을 것이다.
아무리 사실에 대해 의도적으로 억제를 한다 해도 그의 살아 있는 윤리를 다가릴 수는 없었을것이다.
예수는 그의 메시지나 길에대한 학계의 이론들을 뒷받침할 만한
어떤 이론도 제시한 바가 없다 ㅡ 그는 단지 자신의 가르침대로 살았을 뿐이다. !
관용, 편견 없이 남을 받아들이는 것, 주고 나누어 가지는 것, 다른 사람의 짐을 대신 짊어질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서 무한한 사랑의 행위와 이웃을 위한 봉사 ㅡ 이런것이 바로
예수가 구원으로 보여 준 길인 것이다!
ㅡ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고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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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진리를 왜곡한것이 바울뿐이었으리
교황청은 윤회설을 말살하였고 로마는 자신들의 정치의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 교리를 조작했으며 어둠의 비밀세력들이 그러했다.
이 외에 성경은 4번씩이나 번역되면서 본질과 달라졌고
나운몽 목사는 정정해야할곳이 무려 1 만군데가 된다고 하였다.
이런책이기에 이렇게 왜곡되고 본래의 진리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졌기에
은하연합에서 마스터들은 이러한 것이 어디가 잘못되었는가 원문과
비교하며 몹시도 바로잡아 주고 싶어한다고 하였다.
이러했기에 증산님께서 신약을 불태울만 했던것이고
신약은 사라져야할 책이며 노스트라다무스도 그 때 영적 황금시대가
되면 이러한 책들 -신, 구약은 소각되고
더 이상 없을것이라고 예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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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을 조종하던 이들은 여러분을 고립시키는 연구를 했음에도 불구
하고, 여러분의 그 힘을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향후 멀리까지 영향력을 미칠 교육 프로그램을
여러분께 소개할 시간입니다.
상승한 마스터들이 이 과제를 감독할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 각자에게 비밀 통치자들이 존속하는 사회적 신념들을
얼마나 왜곡시켜 놓았는지 몹시도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이 거짓말들을
새로운 원문과 새로운 가르침을 제공함으로써
거짓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진리로 바꿔놓기를 원합니다.
친애하는 하나의 여러분! 그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케 할 것입니다.
물리적 창조계에서 여러분의 자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함으로써요.
ㅡ 은하연합의 메시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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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고 있는 사람이 깨어나면,
새로운 지혜의 책이 있어야만 합니다.
어린 시절에 사용했던 책들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갖고 다닙니까?
이 비유를 이해하면, 새로운 인간에 대한 낡은 경전 가르침들의 위치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신은 어제의 에너지 속에서 주어진 명령들이 오늘날도 유통되거나
영원히 사용되기를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사실, 이 때문에 이 모든 채널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대한 영적인 변화를 원하지만,
영적인 매뉴얼들은 변치 않고 있다는 것이 이치에 합당한가요?
글쓴이 : 산새님
♡ ♤ ♡ ♡ ♡ ♡ ♤ ♡
물소리님 :
바울 서신들 중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등 이른바 '목회서신'이라는 것은
바울이 쓰지 않은 것들이라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지요.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등을 쓴 진짜 바울은 영지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해
"하느님 안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자유인도 노예도 없다"고 할 정도였는데,
이를 반박할 목적으로 그런 사상과 반대되는 남존여비의 목회서신이 바울 것이라며 등장하게 된 것이라 봅니다. 08.02.18 17:25
'성스러운 깨달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몇몇의 위대한 영적 마스터들이 이 결정에 도달하였으며 그 지식을
그들의 사도(제자)들에게 전수하였습니다.
이 사도들의 대다수는 그들의 뒤죽 박죽된 생각 속에서
이 가르침을 잃어 버렸고
그리하여,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제대로 전승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리하여, '깨달음enlightment'은 전혀 정확하지 않은
거짓된 개념이 되어 버렸습니다.
ㅡ 은하연합의 메시지에서
♡ ♤ ♡ ♡ ♡ ♡ ♡ ♡ ♡ ♡ ♡ ♡ ♡ ♡ ♡ ♡ ♡ ♤ ♡
바울은 예수의 모든 역할이 그를 믿는 신앙인들을 그들의 죄 의식과 비참함,
그리고 사탄의 힘으로부터 해방시킨 그의 죽음에 그 핵심이 있다고 가르쳤다.
사실상 바울이 서신에 쓴 한 마디 말이 예수의 실제적인 가르침을 의미하는것은 아니며,
그는 심지어 그의 비유 가운데 어느 하나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대신 그는 단지 자기 자신의 철학과 사상만을 전개시키고 있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을 분노의 자식들,
즉 하느님의 진노를 받기 쉬운 자녀로서 그 성격을 규정시키는 경향이 있다(에베소서 2장 3절).
모든 사람들은(예외없이)희망도 없고 하느님도 없이(에베소서 2장 12절)
버림받았다(예컨대, 로마서 5장 18절, 고린도전서 15장 18절).
왜냐하면 사탄이(예이없이)
모든 사람들에 대한 지배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로마서 3장 9절, 갈라디아서 3장 22절, 골로새서 2장 14절).
천벌의 의미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모클레스 Damocles의 칼처럼 따라다닌다. (예컨대 로마서 5장 16절).
따라서 인류의 교사로서 바울은 그의 <위협적인 소식>을 <즐거운 소식>으로 만들었으며
<오직 그>만이 구원의 길을 보여 줄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물론 그러한 태도로 모든 사람이 죽음에 대한 본질적 견해에 이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태도는 죽음을 마치 죄의 해결책인양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 속에서도 바울의 기독교에서와 같은 죽음의 공포에 대한 그 같은 교화를 발견할 수가 없다.
바울 때문에 기독교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기독교도들이 두려움의 멍에 밑에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는 종교가 되었다.
그 종교는 이미 친절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예수의 하느님의 개념에서 벗어나
바울의 말에 의해 생성된 진노한 구약의 하느님이라는 미숙함으로 되돌아갔다.
핵심은 바울이 정확히 명시한 말,
즉 구원받기 위해 인간 개개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가장 가슴에 와 닿게 된다. (로마서 3장 24절, 3 장 28절, 9장 11절, 9장 16절 ; 고린도 전서 1장 29절 ; 갈라디아서 2장 16절 참조).
바울에 따르면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2장 8~9절)
따라서 바울의 교리는 구원을 하느님을 위한 일방적인 일로 만든다.
즉 사람들은 지상에서 제한된 능력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로마서 3장 24절, 4장 16절;
에베소서 2장 5절, 2장 8~9절 ; 디모데후서 1장 9절 ; 디도서 3장 5~7절 참조)
여기서 바울이 말한 것은 물론 매우 그럴 듯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편리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회에 가입하기만 하면 구원은 <자동적으로>보장받는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은 삶의 목표에 도달하는 데는 하등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기독교도들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희생적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사람들이 이러한 <교회>에 참가하여 <회비>를 지불하기만 하면(이상하기도 하여라!)
영원한 천국에 자리를 확보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히 그러한 가르침은 많은 지지자들을 끌어들였고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결국 안전하고도 편안하게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을 믿기란 훨씬 더 쉬운 일이다.
단지 개종하는 행위에 의해 속죄되었고 구원받았으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완벽하게 새사람이 된다.
이러한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의 역할이 경시된 구원행위를 위해 개인 각자가 시도하는
모든 노력은 심지어 죽을 죄가 되기도 한다.
반대로 모든 사람이 아무리 그들의 삶을 모범적이고 선하게 산다 해도 만약
그들이 십자가 위의 희생을 전적으로 그들 개인의 구원을 이루는 것으로 깊이 인식하지 못한다면
버림받게 된다고 이 기르침은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위대함과 독특함이 이 가르침의 진리와 더불어 지탱되거나
쓰러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자세히 조사해 보면 이런 생각은
예수의 실제 사상과는 너무 동떨어지 거짓말임을 알 수 있다.
복음 안에서는 소위 구원에 대한 기독교교리에 대해서는 암시조차 없다.
예수의 메시지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산상수훈> 안에나 또는
주기도문이나 예수의 전통적인 비유 안에도 없다!
실제로 그런 구원이 그토록 중요했다면, 예수는 그의 <희생적인 죽음>이 인류의 구원을
의미한다는 약간의 암시만이라도 주었을 것이다.
아무리 사실에 대해 의도적으로 억제를 한다 해도 그의 살아 있는 윤리를 다가릴 수는 없었을것이다.
예수는 그의 메시지나 길에대한 학계의 이론들을 뒷받침할 만한
어떤 이론도 제시한 바가 없다 ㅡ 그는 단지 자신의 가르침대로 살았을 뿐이다. !
관용, 편견 없이 남을 받아들이는 것, 주고 나누어 가지는 것, 다른 사람의 짐을 대신 짊어질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서 무한한 사랑의 행위와 이웃을 위한 봉사 ㅡ 이런것이 바로
예수가 구원으로 보여 준 길인 것이다!
ㅡ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 고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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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진리를 왜곡한것이 바울뿐이었으리
교황청은 윤회설을 말살하였고 로마는 자신들의 정치의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 교리를 조작했으며 어둠의 비밀세력들이 그러했다.
이 외에 성경은 4번씩이나 번역되면서 본질과 달라졌고
나운몽 목사는 정정해야할곳이 무려 1 만군데가 된다고 하였다.
이런책이기에 이렇게 왜곡되고 본래의 진리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졌기에
은하연합에서 마스터들은 이러한 것이 어디가 잘못되었는가 원문과
비교하며 몹시도 바로잡아 주고 싶어한다고 하였다.
이러했기에 증산님께서 신약을 불태울만 했던것이고
신약은 사라져야할 책이며 노스트라다무스도 그 때 영적 황금시대가
되면 이러한 책들 -신, 구약은 소각되고
더 이상 없을것이라고 예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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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을 조종하던 이들은 여러분을 고립시키는 연구를 했음에도 불구
하고, 여러분의 그 힘을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향후 멀리까지 영향력을 미칠 교육 프로그램을
여러분께 소개할 시간입니다.
상승한 마스터들이 이 과제를 감독할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 각자에게 비밀 통치자들이 존속하는 사회적 신념들을
얼마나 왜곡시켜 놓았는지 몹시도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그들은 이 거짓말들을
새로운 원문과 새로운 가르침을 제공함으로써
거짓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진리로 바꿔놓기를 원합니다.
친애하는 하나의 여러분! 그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케 할 것입니다.
물리적 창조계에서 여러분의 자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함으로써요.
ㅡ 은하연합의 메시지에서
♡ ♤ ♡ ♡ ♡ ♡ ♡ ♡ ♡ ♡ ♡ ♡ ♡ ♡ ♡ ♡ ♡ ♤ ♡
잠자고 있는 사람이 깨어나면,
새로운 지혜의 책이 있어야만 합니다.
어린 시절에 사용했던 책들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갖고 다닙니까?
이 비유를 이해하면, 새로운 인간에 대한 낡은 경전 가르침들의 위치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신은 어제의 에너지 속에서 주어진 명령들이 오늘날도 유통되거나
영원히 사용되기를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사실, 이 때문에 이 모든 채널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대한 영적인 변화를 원하지만,
영적인 매뉴얼들은 변치 않고 있다는 것이 이치에 합당한가요?
글쓴이 : 산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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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님 :
바울 서신들 중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등 이른바 '목회서신'이라는 것은
바울이 쓰지 않은 것들이라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지요.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등을 쓴 진짜 바울은 영지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해
"하느님 안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자유인도 노예도 없다"고 할 정도였는데,
이를 반박할 목적으로 그런 사상과 반대되는 남존여비의 목회서신이 바울 것이라며 등장하게 된 것이라 봅니다. 08.02.18 17:25
예수와 같은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면 사도 바울(사울)이라는 자가 자신을 신격화하여 후세에 자신을 모시는 종교를 창설할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것임에도 무슨 이유로 그러한 사태를 지켜만 보고 있었는지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만약 예수가 사도 바울의 행위를 예견하고 지켜보았다면 반드시 무슨 조차를 취하던가 아니면 신통력(?)을 부려 기독교가 비뚤어지지 않도록 모종의 역할을 했어야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기독교가 이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