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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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3- Revolution을 보고
2003. 11. 19
매트릭스 3의 개봉과 상영(11월 5일, 전 세계 동시개봉)은 11월 8일에 있은 조화로운 은하적 정렬(Harmonic Concordance)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모닉 컨코던스는 우주적인 축제일입니다. 우리의 은하계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그것이 우주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지구 인류의 의식 성장이 가지는 우주적인 영향력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지구는 하늘과 한짝(天地)입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천지의 조화를 의미합니다. 하모닉 컨코던스의 본질적 의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류의 대중의식의 비약적 성장을 가져오게 할 막대한 양의 우주적 기운의 조림입니다. 1987년의 하모닉 컨버젼스가 새벽에 비추는 여명이라면 금번 하모닉 컨코던스는 밝은 대낮의 태양 빛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지금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마음의 밭을 갈고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일에 다같이 동참해야 할 때죠.
영화 매트릭스가 인류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첫째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설정하여 여러분이 느끼고 있는 현실세계는 가상의 매트릭스라는 것, 하나의 의식 격자임을 자각케 하고 있습니다. 매트릭스는 가상현실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용어로서 현실세계에 있는 진아(상위자아)가 자신의 체험을 확대하기 위하여 펼쳐놓은 게임판을 상징합니다. 게임판에 너무 몰두하여 자신의 본래 모습을 망각하고 깊은 잠에 빠진 인류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둘째로 진실과 신뢰와 열정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인류가 지닌 첫 번째 진실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자신들의 신성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Neo가 매트릭스 안에서 누리는 삶 이상의 것을 자각하고 내면의 그리스도 자아(眞我)를 깨달아 감으로써 자신의 본래의 면목을 회복하는 모습을 그리듯이 Neo는 인간존재의 자기 정체성을 자각한 신인(神人)으로서의 진실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Trinity는 네오의 신성에 대한 자각과 사명적 깨달음을 믿고 지지해주는 깊은 신뢰를 보여줍니다.
기적은 표현된 사랑입니다. 진실과 신뢰를 믿는 사람은 언제나 열정의 깃발을 내리지 않죠. 인류의 구원에 대한 모피어스의 열정은 네오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진실과 신뢰와 열정의 꽃은 희망이며 기대한 바 목적을 완성하는 것은 그 결실입니다. 진실은 우리시대의 주제어입니다. 眞實이란 단어를 보세요. "참된 열매", 가을 바람을 어떤 사람은 선선(仙仙)하다하고 어떤 사람은 쌀쌀(殺殺)하다고 하지요. 가을의 기운을 숙살(익힐 숙,죽일 살)기운이라 합니다. 숙살기운은 잘 익혀서 열매를 맺게도 하고 낙엽이 되어 떨어지게도 합니다. 인간의 결실을 맺는 우주의 가을 시대에 가을 바람에 따라 열매를 맺고 낙엽이 되어 떨어지듯, 인류도 참된 자는 그 열매를 맺어 수명이 길이 창성 할 것이요 거짓된 자는 말라 떨어져 길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매트릭스 안에서의 게임도 역시 진실게임으로, 자신이 신성의 3차원적 표현임을 자각해 가는 체험의 게임입니다.
이 영화에서 인류의 구원에 대한 네오의 진실과 네오에 대한 트리니티의 죽음을 초월한 신뢰, 어떤 어려운 절망적인 상태에서도 그 믿음을 내리지 않는 모피어스의 열정이 느껴지시나요.
그것은 셋째로 신성한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네오와 트리니티가 나누는 사랑은 신성합니다. 신성(神聖)하다는 말의 의미를 영적으로 새겨보세요.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신성하다는 것은 신령(神靈)스럽고 성스럽다는 것입니다. 신령스럽다는 것은 모든 만물의 근원인 神과 그 작용력인 靈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신은 존재이고 영은 작용력입니다. 체(體)와 용(用)의 관계죠. 신령스럽다는 것은 존재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거니와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령스럽게 존재한다는 것은 사물의 본질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한다는 말이고 신령스러운 관계란 가장 본질적인 영역에서 서로 교류가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령스러운 상태와 관계는 존재의 균형, 존재의 하모니입니다.
성스럽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것은 존재의 근원에 다가가 그곳에서 발산하는 빛의 모습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존재의 근원에서 발산하는 빛의 아름다움, 그 눈부신 모습을 성스럽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스럽다는 것은 신령한 존재의 모습이 겉으로 표현되어 나타내는 작용력에 대한 형용어입니다.
그러면 성스런 관계란 어떤 것을 말하나요. 성스러운 관계는 그러한 존재의 광휘를 나타내며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의 광휘를 발산할 수 있도록 고양되고 활성화된 서로의 영향력을 그 관계의 본질로 합니다. 성스런 관계의 발산하는 빛의 광휘가 서로 겹쳐지면서 주변에 더욱 찬란한 빛을 뿌리는 광경이 눈앞에 나타나나요. 그 빛이 상대방에 상호침투하면서 상대를 더욱 빛나게 하는 그 작용력이 보이나요. 성스런 관계란 이런 것을 말합니다. 그로 인하여 내가 빛나며 나로 인하여 그가 빛나는 관계, 그리하여 서로의 존재의 심연에 찬란한 기쁨의 황홀경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심오한 관계를 성스러운 관계라 하는 것입니다.
왜 聖하다고 하지 않고 聖스럽다고 표현할까요. 성하다는 것은 멈춤 상태지만 성스럽다는 것은 작용하고 있는 진행상태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聖은 존재의 자기표현이며 관계의 진행상태입니다. 항상 생동하는 살아 움직이며 에너지를 발산하는, 그리하여 주변을 밝게 비추는 존재의 진행상태를 성스럽다고 표현하는 것이죠. 그러니 그것은 한순간도 멈출 수 없습니다. 마치 심장의 박동이 한순간의 쉼도 없이 진행되듯이 성스런 관계도 그와 같은 거죠. 끊임없이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 순간 순간 존재의 기쁨으로 충만하여 광휘로운 빛을 발하는 영혼의 불꽃놀이가 바로 성스러운 관계의 표현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관계가 성스러운 관계로 되게 하세요.
매트릭스가 인류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넷째로 평화입니다.
시력을 잃은 네오의 심안으로 보니 모든 것이 빛으로 보였습니다. 시온도, 스미스도, 기계도시도. 인류의 평화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성의 빛으로 하나라는 인식에 기초하여 모든 것을 나를 대하듯이 늘 아끼고 사랑하여 인보상조(隣保相助)의 미덕으로 밉고 고움이 없이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道의 무한대한 진리에 있음을 인류는 깨달아야합니다. 모든 것을 신성의 빛으로 본다면 어떻게 그 존재를 학대하거나 업신여기며 소홀히 대할 수 있겠습니까?
"The war is over!"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인류의 전쟁은 본질에 있어서 내면의 전쟁이었습니다. 매트릭스에서도 기계(음)와 인간(양)의 전쟁은 네오(진아)와 스미스(에고)의 대립으로 종결됩니다. 스미스가 샤티에게 이야기하죠. "나도 알고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다" ego 또한 알고 보면 그렇게 나쁜 것만이 아닙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에고는 시스템(육체)의 관리자로서 충실히 복무하여 왔습니다. 여러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치가보아, 상처를 입을 것 같아 여러가지 방어기제를 펼치는 것이죠.
인간의 에고를 다루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에고와 대립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에고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에고는 사물의 정황을 살피고 판단하여 시스템(육체)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이런저런 판단과 심판을 내립니다. 그 판단과 하나가 되세요. 판단은 분리의식에 기초하여 생기는 것이죠. 판단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판단하는 자기 자신도 그 판단의 대상에 포함시킨다는 것입니다. 판단 받는 대상의 자리에 나를 가져가는 겁니다. 판단과 하나가 되어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의식은 내면을 향합니다. 그 순간 그 곳에는 판단하는 나(ego)와 판단 받는 대상이 사라집니다. 스미스는 네오를 네오라 부르지 않고 "미스터 엔더슨" 이라고 부릅니다. 스미스는 네오의 진실(신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네오가 빛으로 화하는 순간 스미스 또한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근원의 질문에 신성으로 자신을 자각하는 존재는 더 이상 에고가 없습니다. 에고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마음은 오직 靈과 통하여야 만화도제(萬化度濟)에 이바지 할 수 있습니다. "도즉아(道卽我) 아즉도(我卽道)의 경지에서 마음과 靈을 통일하여 만화도제에 이바지하는 것"이 우리 인류의 궁극적인 종착점이자 새로운 세계의 출발점입니다.
진실(네오), 신뢰(트리니티), 열정(모피어스)의 3인조는 불패입니다. 우리 인류가 진실과 신뢰, 열정을 모토로 삼아 신성한 사랑 안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때 거기에 에고가 붙을 자리는 없으며 마음은 진실로 인간의 신성에 복무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에고는 쟁투의 문제가 아니라 변형의 문제입니다. 모든 것에서 신성을 보고자하는 자발적인 의지인 사랑은 납을 황금으로 만드는 변형의 연금술입니다.
매트릭스가 인류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다섯째로 균형에 대한 것입니다.
조화로운 파동의 통일 원칙은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거나 조작하지 않고 또 그들이 여러분의 방식, 여러분의 진실, 여러분의 생활을 따르기를 구하지 않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균형입니다. 연방제 방식의 통일방안이 합리적인 이유를 아시겠나요. 하모닉 컨코던스에서도 달과 태양이 해왕성과 T자 모양을 이루는데 이것은 음(달) 양(태양)이 균형을 이루는 것을 상징합니다. 영어 알파벳 T자는 20번째로 수비학에서 2수는 이원성을 뜻하죠. T자의 받침에 해당하는 해왕성은 점성학적 원리로 용융, 수용성, 바다를 의미하듯이 이원성을 균형잡는 열쇠는 바다와 같이 모든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허용성, 수용성에 있습니다.
어떤 상황과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늘 다음의 세가지를 고려하세요.
첫째는 이 상황과 이 사람으로부터 내게 주어지는 교훈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세요. 지구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은 언제나 교훈을 싣고 옵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결코 우연이 없습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는 말을 기억하시죠. 사물의 이면을 본다는 것은 바로 그 사사물물의 배후에 흐르는 영적 진실을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내적 진실에 접속할 때만이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외부가 아니라 내면에요. 주어지는 상황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여 "이런 일이 왜 나에게 발생하는가?"라며 매사에 부정적인 의식을 투사하는 사람은 그 어둠의 질곡으로부터 빠져나오기가 힘들 거예요. 어두운 곳에 처한 사람이 찾는 것은 빛입니다. 교훈은 벌어지는 상황의 빛입니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세요. 그리고 늘 기억하세요. 자기 자신이 자기 운명의 주인임을. 모든 상황의 창조자임을. 100 %...
둘째는 지금 이 상황에서 이 사람(들)과 내가 맡은 역할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서로 어떤 배역을 맡아 연기하고 있나요. 이것을 단지 빛과 어둠의 역할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역할에 행해지는 구체적인 작용을 보세요. 이것을 자세히 탐구할 필요는 없으며 단지 우리는 우리 모두의 최고의 선을 위하여 각자 제 위치에서 제 노릇을 하고있다는 것을 자각하시라는 겁니다. 필멸하는 존재인 에고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이 문제 투성이지만 영생하는 영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은 하나의 과정이며, 하나의 멋진 체험이고 모두가 적절한 것입니다.
영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면 하나의 통찰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으로서 듣고 말하고 행하세요. 자신이 靈임을 아세요. 몸은 마음의 표현이며 마음은 영의 조력자입니다. 마음은 영의 충실한 복무자가 되어야합니다. 심령(心靈)은 통일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영으로부터 분리되어(이것은 단지 환상이지만) 자기복제의 과정을 가지는 것이 바로 설계자의 통제를 벗어난 스미스 요원처럼 자기만의 허망한 아성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변혁의 시기에 영력이 깃들지 않고 모두를 위한 최고선에 복무하지 않는 그 어떤 선천(先天)의 낡은 재리(財利)나 명리(名利), 관념도 새로운 지구에 가지고 갈 수 없을 겁니다. 빛(Light)은 가벼움(light)입니다. 선천의 낡은 무거운 에고의 짐을 내려놓은 자만이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게 될 겁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주의 존귀한 정수로 지어집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후천선경(後天仙境)은 인류가 쌓은 대인 대의(大仁 大義)의 귀감과 영적 유산으로 건설될 겁니다.
셋째는 이 상황에서 내가 취하는 태도로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항상 진실과 신뢰, 열정을 선택하세요. 상황 자체에는 선악이 없습니다. 선악은 인간이 부여한 가치판단의 선택이죠. 그러면 무엇이 선인가요. 중용에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라 했죠. 천명즉 하느님의 영을 반영하여 말하고 행하는 것이 인간의 善입니다. 천명과 함께 하는 삶이 의로운 삶이죠. 道也者는 天所命而 人以行之者也라, 하늘이 명한 바를 인간이 행하는 것이 인도(人道)이며 인륜지도입니다.
진실과 신뢰와 열정은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모든 상황에서 사랑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 상황에 내재한 빛과 그 사람의 내면의 신성을 보고자하는 자각적인 의지를 견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느낌이 아닌 거죠. 사랑은 선택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빛을 보고자하는 선택.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은 우리의 능력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선택이 지금 우리를 여기에 있게 한 것이죠.
중간지대에 갇힌 네오는 동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트리니티는 그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거라며 네오에 대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여줍니다. 진아를 깨달아 가는 여러분의 여정에서도 주변에 도움을 주고 기꺼이 도움을 받으세요.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느끼세요. 그 사람이 무엇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지를 보면 그 사람의 의식상태(진화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을 것임을 이해하시고 또한 다른 사람이 여러분의 수호천사가 되는 기회도 있을 수 있음을 이해하세요.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사랑과 원조는 여러분의 빛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기꺼이 봉사하려는 의지와 열정의 정도에 따라서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매트릭스가 인류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여섯째로 하나됨에 대한 것입니다.
네오는 스미스(ego)가 점령한 베인과 싸우는 과정에 눈을 멀게 됩니다. 이것이 그렇게도 2000년 전 갈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고 그곳에 못 박힌 예수를 연상시키는지요. 영화에서도 나중에 스미스와의 결투신에서 스미스는 네오를 조롱하며 "눈먼 구세주라"칭하죠. 예수아 벤 요셉은 인류의 죄업을 대속하고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인세에 온 이유는 그게 아니죠. 그는 말하기를 "내가 인세에 온 이유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왔노라. 내가 한 모든 일은 너희들이 할 수 있다!" 부활의 의미가 단지 죽은 육체가 사흘만에 깨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죠? 사람이 죽었다 살아나는 것은 옛 도인들도 종종 보여주었던 법방입니다. 시해법으로 천국의 묘법을 본받아 인세에 그것을 베풀고자 하다가 김봉곡에게 시체를 불태워짐으로써 그 뜻을 이루지 못했던 진묵대사나, 길에 놓인 거대한 구렁이를 치우려고 자신의 몸을 벗고 구렁이 몸에 들어가 그것을 옮기는 사이에 잘 생긴 달마의 몸을 탐낸 수도자에게 그 몸을 빼앗긴 달마대사가 그러한 예죠.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속한 구세주의 상징이 아닙니다. 인간의 카르마는 그 누구도 대신하여 풀어줄 수 없습니다. 하느님도요. 그런 법이 이 우주에 없어요. 영화에서 중간지대에 갇힌 네오에게 라마는 카르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죠. "카르마란 자신이 여기에서 하기 위한 존재의 이유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필요 없는 프로그램은 삭제된다고 말합니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이 지구에 그저 아무런 이유 없이 고통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니죠. 지금 시기 여러분이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축복과 은총 속에서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자 영화를 보세요. 기계와 인간의 전쟁은 그동안 있어왔던 지배와 피지배, 빛과 어둠의 대립, 수많은 은하전쟁을 상징합니다. 수많은 윤회과정 속에서 전쟁의 시기에 태어나는 것과 전쟁이 끝나고 평화와 번영이 도래할 바로 그 시점에서 태어나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선언하였듯이 전쟁은 끝났습니다! 선천의 상극시대가 끝나고 상생의 후천 선경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언어와 문화, 민족, 인종, 종교적 신념의 차이를 넘어 전 인류는 하느님의 아들과 딸들로서 영적으로 한가족이라는 거대한 하나됨(Neo=One)의 대세를 능가할 세력이나 기운은 더 이상 없습니다. 예수님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우리의 이웃 나라들과 우리의 이웃 문화들과 그들의 종교전통을 사랑하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존경하라는 뜻으로 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 인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같이 백인종, 흑인종, 아시아인, 중동인이 함께 모여 동터오는 아름다운 지구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상징은 무도한 인간들에게 화가 난 하느님을 위하여 인류를 대신하여 그 죄 값을 치룬 성자 예수의 처절한 죽음인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용서와 화해의 귀감입니다. "주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나이다." 마스터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예수아는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서도 진정 기쁨 속에 머물렀음을, 하느님에게로 가는 황홀경에 있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여러분이 십자가를 볼 때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는 예수의 이미지를 더 이상 그리지 마세요. 그를 십자가에서 내려놓으세요. 그는 교회의 십자가에 매달려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흔히 잘 말씀하시죠.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야!" 그래요. 예수아 벤 요셉은 2000년 전의 그가 아닙니다. 더욱 찬란한 빛과 장대한 존재가 되어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영화에서 기계제국에서 눈이 먼채 두팔을 벌리고 있는 네오의 모습은 십자가 형을 당하는 예수를 연상시킵니다. 네오는 인간과 기계와의 전쟁에서 십자가를 지고 스미스와 한판 대결을 벌입니다. 시속에 책임을 진다는 뜻으로 "십자가를 진다"고 합니다. (혹자는 총대를 맨다고 하죠. 내가 너희들을 대신하여 총을 들고 싸움을 하겠다는 뜻 같습니다. 결말은 장렬한 전사 아니면 남을 죽이는 것이겠죠. win-win은 어디에 있나요? 합덕(合德)과 조화(調化)에 있습니다. 서로 싸우지 않고 통일하는데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죠. 남북의 통일, 영육의 통일, 심령의 통일..)
십자가의 상징은 용서와 화해, 끝없는 사랑이며,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의 이유에 대한 책임입니다. 가을은 義의 계절이죠. 한방에서도 씨앗을 仁이라 하고 열매는 義라 합니다. 決斷卽義(결단즉의)라, 결단은 결심, 결실입니다. 인간사 매사가 결단한 연후에 변화의 도리가 있습니다. 변화를 구하는 자는 결단을 하여야 합니다.
우주의 섭리가 사랑의 섭리에서 법의 섭리로 구현되어 왔고 이제 다시 義의 섭리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義의 섭리는 책임의 섭리입니다. 봄에 뿌려진 씨앗의 책임은 가을에 열매를 맺는 것이죠? 가을에 풍성한 결실을 맺는 씨앗이라야 그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죠. 인간 씨종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시기 인간이 완전한 의식을 회복하고 참다운 인간, 완성된 도인이 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운명이며 근본적인 의미에서 존재의 이유입니다. 심령을 통일하여 만화도제에 이바지하는 것이 인간존재의 사명입니다. 애벌레의 운명이 나비가 되는 것이듯이 우리 인류의 운명은 지상신선(地上神仙)을 실현하는 것이죠. 나비가 될 것인가 실패한 번데기로 남을 것인가는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에 대하여 생각해보세요. 영화의 끝 부분에 평화가 찾아오고 모든 것이 정화된 이후에 세라피가 오라클에게 묻죠. "이렇게 될 줄 아셨습니까?" 오라클은 "나는 알지 못했다 다만 믿었을 뿐이다."라고 답변합니다.
"한마음을 정(定)한 바엔 이익(利益)과 손해(損害)와 사(邪)와 정(正)과 편벽(偏僻)과 의지(依支)로써 바꾸어 고치고 변(變)하여 옮기며 어긋나 차이(差異)가 생기는 일이 없어야 하며 하나를 둘이라 않고 셋을 셋이라 않고 저것을 이것이라 않고 앞을 뒤라 안하며 만고(萬古)를 통(通)하되 사시(四時)와 주야(晝夜)의 어김이 없는 것과 같이 하고 만겁(萬劫)을 경과(經過)하되 강하(江河)와 산악(山岳)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이 하고 기약(期約)이 있어 이르는 것과 같이 하고 한도(限度)가 있어 정(定)한 것과 같이 하여 나아가고 또 나아가며 정성(精誠)하고 또 정성(精誠)하여 기대(企待)한 바 목적(目的)에 도달(到達)케 하는 것을 신(信)이라 한다."
믿음은 산악이 유구한 것과 같이 강하의 쉼 없는 흐름과 같이, 아! 무이구곡의 바위에 새겨진 逝者如斯(서자여사)라는 금언과 같이 변함 없이 나아가고 또 나아가며 정성하고 또 정성하여 기대한 바 목적에 도달케 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맹목적인 믿음은 사상누각과 같습니다. 진실에 대한 자각을 토대로 한 믿음은 온전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확신이라고 하죠. 스미스는 네오에게 왜 자신을 그렇게 희생하면서까지 포기하지 않는가라고 묻습니다. 네오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이 나의 선택이다!" 일견 혼란스러워 보이는 이 시기에 자기완성과 지상천국건설의 대의에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언제나 사랑과 진실을 선택하세요!
마음과 영이 통하는 첩경은 진심(眞心)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고래로 진실로 마음을 간직하기란 죽기보다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무자기(無自欺)"는 진실 된 인간의 금과옥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디서 무슨 일을 하시더라도 "영적 수행"을 생활의 중심에 두세요!
어디서 무엇을 보고 대하더라도 그 내면의 신성을 보세요!
합덕(合德)과 조화(調化)를 생활의 신조로 삼으세요!
지금은 그럴 때랍니다. 깨달음은 전염병과 같이 번져갑니다. 지수함수적으로요.
하나됨의 축복 속으로...
2003. 11. 19
매트릭스 3의 개봉과 상영(11월 5일, 전 세계 동시개봉)은 11월 8일에 있은 조화로운 은하적 정렬(Harmonic Concordance)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모닉 컨코던스는 우주적인 축제일입니다. 우리의 은하계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그것이 우주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지구 인류의 의식 성장이 가지는 우주적인 영향력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지구는 하늘과 한짝(天地)입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천지의 조화를 의미합니다. 하모닉 컨코던스의 본질적 의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류의 대중의식의 비약적 성장을 가져오게 할 막대한 양의 우주적 기운의 조림입니다. 1987년의 하모닉 컨버젼스가 새벽에 비추는 여명이라면 금번 하모닉 컨코던스는 밝은 대낮의 태양 빛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지금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 마음의 밭을 갈고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일에 다같이 동참해야 할 때죠.
영화 매트릭스가 인류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첫째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설정하여 여러분이 느끼고 있는 현실세계는 가상의 매트릭스라는 것, 하나의 의식 격자임을 자각케 하고 있습니다. 매트릭스는 가상현실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용어로서 현실세계에 있는 진아(상위자아)가 자신의 체험을 확대하기 위하여 펼쳐놓은 게임판을 상징합니다. 게임판에 너무 몰두하여 자신의 본래 모습을 망각하고 깊은 잠에 빠진 인류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둘째로 진실과 신뢰와 열정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인류가 지닌 첫 번째 진실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자신들의 신성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Neo가 매트릭스 안에서 누리는 삶 이상의 것을 자각하고 내면의 그리스도 자아(眞我)를 깨달아 감으로써 자신의 본래의 면목을 회복하는 모습을 그리듯이 Neo는 인간존재의 자기 정체성을 자각한 신인(神人)으로서의 진실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Trinity는 네오의 신성에 대한 자각과 사명적 깨달음을 믿고 지지해주는 깊은 신뢰를 보여줍니다.
기적은 표현된 사랑입니다. 진실과 신뢰를 믿는 사람은 언제나 열정의 깃발을 내리지 않죠. 인류의 구원에 대한 모피어스의 열정은 네오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진실과 신뢰와 열정의 꽃은 희망이며 기대한 바 목적을 완성하는 것은 그 결실입니다. 진실은 우리시대의 주제어입니다. 眞實이란 단어를 보세요. "참된 열매", 가을 바람을 어떤 사람은 선선(仙仙)하다하고 어떤 사람은 쌀쌀(殺殺)하다고 하지요. 가을의 기운을 숙살(익힐 숙,죽일 살)기운이라 합니다. 숙살기운은 잘 익혀서 열매를 맺게도 하고 낙엽이 되어 떨어지게도 합니다. 인간의 결실을 맺는 우주의 가을 시대에 가을 바람에 따라 열매를 맺고 낙엽이 되어 떨어지듯, 인류도 참된 자는 그 열매를 맺어 수명이 길이 창성 할 것이요 거짓된 자는 말라 떨어져 길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매트릭스 안에서의 게임도 역시 진실게임으로, 자신이 신성의 3차원적 표현임을 자각해 가는 체험의 게임입니다.
이 영화에서 인류의 구원에 대한 네오의 진실과 네오에 대한 트리니티의 죽음을 초월한 신뢰, 어떤 어려운 절망적인 상태에서도 그 믿음을 내리지 않는 모피어스의 열정이 느껴지시나요.
그것은 셋째로 신성한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네오와 트리니티가 나누는 사랑은 신성합니다. 신성(神聖)하다는 말의 의미를 영적으로 새겨보세요.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신성하다는 것은 신령(神靈)스럽고 성스럽다는 것입니다. 신령스럽다는 것은 모든 만물의 근원인 神과 그 작용력인 靈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신은 존재이고 영은 작용력입니다. 체(體)와 용(用)의 관계죠. 신령스럽다는 것은 존재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거니와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신령스럽게 존재한다는 것은 사물의 본질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한다는 말이고 신령스러운 관계란 가장 본질적인 영역에서 서로 교류가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령스러운 상태와 관계는 존재의 균형, 존재의 하모니입니다.
성스럽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것은 존재의 근원에 다가가 그곳에서 발산하는 빛의 모습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존재의 근원에서 발산하는 빛의 아름다움, 그 눈부신 모습을 성스럽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스럽다는 것은 신령한 존재의 모습이 겉으로 표현되어 나타내는 작용력에 대한 형용어입니다.
그러면 성스런 관계란 어떤 것을 말하나요. 성스러운 관계는 그러한 존재의 광휘를 나타내며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의 광휘를 발산할 수 있도록 고양되고 활성화된 서로의 영향력을 그 관계의 본질로 합니다. 성스런 관계의 발산하는 빛의 광휘가 서로 겹쳐지면서 주변에 더욱 찬란한 빛을 뿌리는 광경이 눈앞에 나타나나요. 그 빛이 상대방에 상호침투하면서 상대를 더욱 빛나게 하는 그 작용력이 보이나요. 성스런 관계란 이런 것을 말합니다. 그로 인하여 내가 빛나며 나로 인하여 그가 빛나는 관계, 그리하여 서로의 존재의 심연에 찬란한 기쁨의 황홀경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심오한 관계를 성스러운 관계라 하는 것입니다.
왜 聖하다고 하지 않고 聖스럽다고 표현할까요. 성하다는 것은 멈춤 상태지만 성스럽다는 것은 작용하고 있는 진행상태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聖은 존재의 자기표현이며 관계의 진행상태입니다. 항상 생동하는 살아 움직이며 에너지를 발산하는, 그리하여 주변을 밝게 비추는 존재의 진행상태를 성스럽다고 표현하는 것이죠. 그러니 그것은 한순간도 멈출 수 없습니다. 마치 심장의 박동이 한순간의 쉼도 없이 진행되듯이 성스런 관계도 그와 같은 거죠. 끊임없이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 순간 순간 존재의 기쁨으로 충만하여 광휘로운 빛을 발하는 영혼의 불꽃놀이가 바로 성스러운 관계의 표현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관계가 성스러운 관계로 되게 하세요.
매트릭스가 인류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넷째로 평화입니다.
시력을 잃은 네오의 심안으로 보니 모든 것이 빛으로 보였습니다. 시온도, 스미스도, 기계도시도. 인류의 평화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성의 빛으로 하나라는 인식에 기초하여 모든 것을 나를 대하듯이 늘 아끼고 사랑하여 인보상조(隣保相助)의 미덕으로 밉고 고움이 없이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道의 무한대한 진리에 있음을 인류는 깨달아야합니다. 모든 것을 신성의 빛으로 본다면 어떻게 그 존재를 학대하거나 업신여기며 소홀히 대할 수 있겠습니까?
"The war is over!"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인류의 전쟁은 본질에 있어서 내면의 전쟁이었습니다. 매트릭스에서도 기계(음)와 인간(양)의 전쟁은 네오(진아)와 스미스(에고)의 대립으로 종결됩니다. 스미스가 샤티에게 이야기하죠. "나도 알고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다" ego 또한 알고 보면 그렇게 나쁜 것만이 아닙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에고는 시스템(육체)의 관리자로서 충실히 복무하여 왔습니다. 여러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치가보아, 상처를 입을 것 같아 여러가지 방어기제를 펼치는 것이죠.
인간의 에고를 다루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에고와 대립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에고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에고는 사물의 정황을 살피고 판단하여 시스템(육체)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이런저런 판단과 심판을 내립니다. 그 판단과 하나가 되세요. 판단은 분리의식에 기초하여 생기는 것이죠. 판단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판단하는 자기 자신도 그 판단의 대상에 포함시킨다는 것입니다. 판단 받는 대상의 자리에 나를 가져가는 겁니다. 판단과 하나가 되어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의식은 내면을 향합니다. 그 순간 그 곳에는 판단하는 나(ego)와 판단 받는 대상이 사라집니다. 스미스는 네오를 네오라 부르지 않고 "미스터 엔더슨" 이라고 부릅니다. 스미스는 네오의 진실(신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네오가 빛으로 화하는 순간 스미스 또한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근원의 질문에 신성으로 자신을 자각하는 존재는 더 이상 에고가 없습니다. 에고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마음은 오직 靈과 통하여야 만화도제(萬化度濟)에 이바지 할 수 있습니다. "도즉아(道卽我) 아즉도(我卽道)의 경지에서 마음과 靈을 통일하여 만화도제에 이바지하는 것"이 우리 인류의 궁극적인 종착점이자 새로운 세계의 출발점입니다.
진실(네오), 신뢰(트리니티), 열정(모피어스)의 3인조는 불패입니다. 우리 인류가 진실과 신뢰, 열정을 모토로 삼아 신성한 사랑 안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때 거기에 에고가 붙을 자리는 없으며 마음은 진실로 인간의 신성에 복무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에고는 쟁투의 문제가 아니라 변형의 문제입니다. 모든 것에서 신성을 보고자하는 자발적인 의지인 사랑은 납을 황금으로 만드는 변형의 연금술입니다.
매트릭스가 인류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다섯째로 균형에 대한 것입니다.
조화로운 파동의 통일 원칙은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거나 조작하지 않고 또 그들이 여러분의 방식, 여러분의 진실, 여러분의 생활을 따르기를 구하지 않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균형입니다. 연방제 방식의 통일방안이 합리적인 이유를 아시겠나요. 하모닉 컨코던스에서도 달과 태양이 해왕성과 T자 모양을 이루는데 이것은 음(달) 양(태양)이 균형을 이루는 것을 상징합니다. 영어 알파벳 T자는 20번째로 수비학에서 2수는 이원성을 뜻하죠. T자의 받침에 해당하는 해왕성은 점성학적 원리로 용융, 수용성, 바다를 의미하듯이 이원성을 균형잡는 열쇠는 바다와 같이 모든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허용성, 수용성에 있습니다.
어떤 상황과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늘 다음의 세가지를 고려하세요.
첫째는 이 상황과 이 사람으로부터 내게 주어지는 교훈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세요. 지구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은 언제나 교훈을 싣고 옵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결코 우연이 없습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는 말을 기억하시죠. 사물의 이면을 본다는 것은 바로 그 사사물물의 배후에 흐르는 영적 진실을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내적 진실에 접속할 때만이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외부가 아니라 내면에요. 주어지는 상황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여 "이런 일이 왜 나에게 발생하는가?"라며 매사에 부정적인 의식을 투사하는 사람은 그 어둠의 질곡으로부터 빠져나오기가 힘들 거예요. 어두운 곳에 처한 사람이 찾는 것은 빛입니다. 교훈은 벌어지는 상황의 빛입니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세요. 그리고 늘 기억하세요. 자기 자신이 자기 운명의 주인임을. 모든 상황의 창조자임을. 100 %...
둘째는 지금 이 상황에서 이 사람(들)과 내가 맡은 역할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서로 어떤 배역을 맡아 연기하고 있나요. 이것을 단지 빛과 어둠의 역할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역할에 행해지는 구체적인 작용을 보세요. 이것을 자세히 탐구할 필요는 없으며 단지 우리는 우리 모두의 최고의 선을 위하여 각자 제 위치에서 제 노릇을 하고있다는 것을 자각하시라는 겁니다. 필멸하는 존재인 에고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이 문제 투성이지만 영생하는 영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은 하나의 과정이며, 하나의 멋진 체험이고 모두가 적절한 것입니다.
영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면 하나의 통찰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으로서 듣고 말하고 행하세요. 자신이 靈임을 아세요. 몸은 마음의 표현이며 마음은 영의 조력자입니다. 마음은 영의 충실한 복무자가 되어야합니다. 심령(心靈)은 통일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영으로부터 분리되어(이것은 단지 환상이지만) 자기복제의 과정을 가지는 것이 바로 설계자의 통제를 벗어난 스미스 요원처럼 자기만의 허망한 아성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변혁의 시기에 영력이 깃들지 않고 모두를 위한 최고선에 복무하지 않는 그 어떤 선천(先天)의 낡은 재리(財利)나 명리(名利), 관념도 새로운 지구에 가지고 갈 수 없을 겁니다. 빛(Light)은 가벼움(light)입니다. 선천의 낡은 무거운 에고의 짐을 내려놓은 자만이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게 될 겁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주의 존귀한 정수로 지어집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후천선경(後天仙境)은 인류가 쌓은 대인 대의(大仁 大義)의 귀감과 영적 유산으로 건설될 겁니다.
셋째는 이 상황에서 내가 취하는 태도로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항상 진실과 신뢰, 열정을 선택하세요. 상황 자체에는 선악이 없습니다. 선악은 인간이 부여한 가치판단의 선택이죠. 그러면 무엇이 선인가요. 중용에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라 했죠. 천명즉 하느님의 영을 반영하여 말하고 행하는 것이 인간의 善입니다. 천명과 함께 하는 삶이 의로운 삶이죠. 道也者는 天所命而 人以行之者也라, 하늘이 명한 바를 인간이 행하는 것이 인도(人道)이며 인륜지도입니다.
진실과 신뢰와 열정은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모든 상황에서 사랑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 상황에 내재한 빛과 그 사람의 내면의 신성을 보고자하는 자각적인 의지를 견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느낌이 아닌 거죠. 사랑은 선택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빛을 보고자하는 선택.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은 우리의 능력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선택이 지금 우리를 여기에 있게 한 것이죠.
중간지대에 갇힌 네오는 동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트리니티는 그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거라며 네오에 대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여줍니다. 진아를 깨달아 가는 여러분의 여정에서도 주변에 도움을 주고 기꺼이 도움을 받으세요.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느끼세요. 그 사람이 무엇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지를 보면 그 사람의 의식상태(진화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을 것임을 이해하시고 또한 다른 사람이 여러분의 수호천사가 되는 기회도 있을 수 있음을 이해하세요.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사랑과 원조는 여러분의 빛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기꺼이 봉사하려는 의지와 열정의 정도에 따라서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매트릭스가 인류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여섯째로 하나됨에 대한 것입니다.
네오는 스미스(ego)가 점령한 베인과 싸우는 과정에 눈을 멀게 됩니다. 이것이 그렇게도 2000년 전 갈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고 그곳에 못 박힌 예수를 연상시키는지요. 영화에서도 나중에 스미스와의 결투신에서 스미스는 네오를 조롱하며 "눈먼 구세주라"칭하죠. 예수아 벤 요셉은 인류의 죄업을 대속하고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인세에 온 이유는 그게 아니죠. 그는 말하기를 "내가 인세에 온 이유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왔노라. 내가 한 모든 일은 너희들이 할 수 있다!" 부활의 의미가 단지 죽은 육체가 사흘만에 깨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죠? 사람이 죽었다 살아나는 것은 옛 도인들도 종종 보여주었던 법방입니다. 시해법으로 천국의 묘법을 본받아 인세에 그것을 베풀고자 하다가 김봉곡에게 시체를 불태워짐으로써 그 뜻을 이루지 못했던 진묵대사나, 길에 놓인 거대한 구렁이를 치우려고 자신의 몸을 벗고 구렁이 몸에 들어가 그것을 옮기는 사이에 잘 생긴 달마의 몸을 탐낸 수도자에게 그 몸을 빼앗긴 달마대사가 그러한 예죠.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속한 구세주의 상징이 아닙니다. 인간의 카르마는 그 누구도 대신하여 풀어줄 수 없습니다. 하느님도요. 그런 법이 이 우주에 없어요. 영화에서 중간지대에 갇힌 네오에게 라마는 카르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죠. "카르마란 자신이 여기에서 하기 위한 존재의 이유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필요 없는 프로그램은 삭제된다고 말합니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이 지구에 그저 아무런 이유 없이 고통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니죠. 지금 시기 여러분이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축복과 은총 속에서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자 영화를 보세요. 기계와 인간의 전쟁은 그동안 있어왔던 지배와 피지배, 빛과 어둠의 대립, 수많은 은하전쟁을 상징합니다. 수많은 윤회과정 속에서 전쟁의 시기에 태어나는 것과 전쟁이 끝나고 평화와 번영이 도래할 바로 그 시점에서 태어나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선언하였듯이 전쟁은 끝났습니다! 선천의 상극시대가 끝나고 상생의 후천 선경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언어와 문화, 민족, 인종, 종교적 신념의 차이를 넘어 전 인류는 하느님의 아들과 딸들로서 영적으로 한가족이라는 거대한 하나됨(Neo=One)의 대세를 능가할 세력이나 기운은 더 이상 없습니다. 예수님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우리의 이웃 나라들과 우리의 이웃 문화들과 그들의 종교전통을 사랑하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존경하라는 뜻으로 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 인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같이 백인종, 흑인종, 아시아인, 중동인이 함께 모여 동터오는 아름다운 지구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상징은 무도한 인간들에게 화가 난 하느님을 위하여 인류를 대신하여 그 죄 값을 치룬 성자 예수의 처절한 죽음인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용서와 화해의 귀감입니다. "주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나이다." 마스터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예수아는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서도 진정 기쁨 속에 머물렀음을, 하느님에게로 가는 황홀경에 있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여러분이 십자가를 볼 때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는 예수의 이미지를 더 이상 그리지 마세요. 그를 십자가에서 내려놓으세요. 그는 교회의 십자가에 매달려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흔히 잘 말씀하시죠.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야!" 그래요. 예수아 벤 요셉은 2000년 전의 그가 아닙니다. 더욱 찬란한 빛과 장대한 존재가 되어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영화에서 기계제국에서 눈이 먼채 두팔을 벌리고 있는 네오의 모습은 십자가 형을 당하는 예수를 연상시킵니다. 네오는 인간과 기계와의 전쟁에서 십자가를 지고 스미스와 한판 대결을 벌입니다. 시속에 책임을 진다는 뜻으로 "십자가를 진다"고 합니다. (혹자는 총대를 맨다고 하죠. 내가 너희들을 대신하여 총을 들고 싸움을 하겠다는 뜻 같습니다. 결말은 장렬한 전사 아니면 남을 죽이는 것이겠죠. win-win은 어디에 있나요? 합덕(合德)과 조화(調化)에 있습니다. 서로 싸우지 않고 통일하는데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죠. 남북의 통일, 영육의 통일, 심령의 통일..)
십자가의 상징은 용서와 화해, 끝없는 사랑이며,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의 이유에 대한 책임입니다. 가을은 義의 계절이죠. 한방에서도 씨앗을 仁이라 하고 열매는 義라 합니다. 決斷卽義(결단즉의)라, 결단은 결심, 결실입니다. 인간사 매사가 결단한 연후에 변화의 도리가 있습니다. 변화를 구하는 자는 결단을 하여야 합니다.
우주의 섭리가 사랑의 섭리에서 법의 섭리로 구현되어 왔고 이제 다시 義의 섭리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義의 섭리는 책임의 섭리입니다. 봄에 뿌려진 씨앗의 책임은 가을에 열매를 맺는 것이죠? 가을에 풍성한 결실을 맺는 씨앗이라야 그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죠. 인간 씨종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시기 인간이 완전한 의식을 회복하고 참다운 인간, 완성된 도인이 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운명이며 근본적인 의미에서 존재의 이유입니다. 심령을 통일하여 만화도제에 이바지하는 것이 인간존재의 사명입니다. 애벌레의 운명이 나비가 되는 것이듯이 우리 인류의 운명은 지상신선(地上神仙)을 실현하는 것이죠. 나비가 될 것인가 실패한 번데기로 남을 것인가는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에 대하여 생각해보세요. 영화의 끝 부분에 평화가 찾아오고 모든 것이 정화된 이후에 세라피가 오라클에게 묻죠. "이렇게 될 줄 아셨습니까?" 오라클은 "나는 알지 못했다 다만 믿었을 뿐이다."라고 답변합니다.
"한마음을 정(定)한 바엔 이익(利益)과 손해(損害)와 사(邪)와 정(正)과 편벽(偏僻)과 의지(依支)로써 바꾸어 고치고 변(變)하여 옮기며 어긋나 차이(差異)가 생기는 일이 없어야 하며 하나를 둘이라 않고 셋을 셋이라 않고 저것을 이것이라 않고 앞을 뒤라 안하며 만고(萬古)를 통(通)하되 사시(四時)와 주야(晝夜)의 어김이 없는 것과 같이 하고 만겁(萬劫)을 경과(經過)하되 강하(江河)와 산악(山岳)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이 하고 기약(期約)이 있어 이르는 것과 같이 하고 한도(限度)가 있어 정(定)한 것과 같이 하여 나아가고 또 나아가며 정성(精誠)하고 또 정성(精誠)하여 기대(企待)한 바 목적(目的)에 도달(到達)케 하는 것을 신(信)이라 한다."
믿음은 산악이 유구한 것과 같이 강하의 쉼 없는 흐름과 같이, 아! 무이구곡의 바위에 새겨진 逝者如斯(서자여사)라는 금언과 같이 변함 없이 나아가고 또 나아가며 정성하고 또 정성하여 기대한 바 목적에 도달케 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맹목적인 믿음은 사상누각과 같습니다. 진실에 대한 자각을 토대로 한 믿음은 온전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확신이라고 하죠. 스미스는 네오에게 왜 자신을 그렇게 희생하면서까지 포기하지 않는가라고 묻습니다. 네오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것이 나의 선택이다!" 일견 혼란스러워 보이는 이 시기에 자기완성과 지상천국건설의 대의에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언제나 사랑과 진실을 선택하세요!
마음과 영이 통하는 첩경은 진심(眞心)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고래로 진실로 마음을 간직하기란 죽기보다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무자기(無自欺)"는 진실 된 인간의 금과옥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디서 무슨 일을 하시더라도 "영적 수행"을 생활의 중심에 두세요!
어디서 무엇을 보고 대하더라도 그 내면의 신성을 보세요!
합덕(合德)과 조화(調化)를 생활의 신조로 삼으세요!
지금은 그럴 때랍니다. 깨달음은 전염병과 같이 번져갑니다. 지수함수적으로요.
하나됨의 축복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