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생각에 얽매이면 참됨에 어긋나서 혼침함이 좋지 않느니라.

    계념 괴진 혼침 불호
    繫念 乖眞 昏沈 不好

    우리가 모든 집착심을 놓아 버리면 대도가 현전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번뇌망상은 그만두고, 대도 중도 부처라는 등의 생각에 조금이라도 생각이 얽매이면 바로 진리와는 어긋나므로, 중도도 깨져 버리고 부처도 죽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부처라는 생각과 중도라는 생각, 참되다는 생각 등 어떤 생각이든지 이런 생각이 추호라도 마음에 남는다면 근본은 모두 깨지고 맙니다. 이처럼 생각에 얽매이지 말라 했다 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멍텅구리처럼 앉아만 있으면 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생각에 얽매여도 병이고, 혼침해도 병이므로, 이 모두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37. 좋지 않으면 신기를 괴롭히거늘 어찌 성기고 친함을 쓸 건가.

    불호노신 하용소친
    不好勞神 何用疎親

    쓸데없이 정신을 쓰지 말아라, 정신을 쓰면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어찌 성김과 친함을 쓸까보냐'하는 것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김이란 멀리한다는 뜻이니 세간법과 악을 버림이고, 친함이란 가까이한다는 뜻으로서 세간법과 악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하려 하지도 말며, 세간법을 버리고 불법(佛法)을 취하려고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리하여 양변 변견을 버리지도 취하지도 않을 때, 우리가 무상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38. 일승으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육진을 미워하지 말라.

    욕취일승 물오육진
    欲趣一乘 勿惡六塵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일승(一乘)이란 무상대도를 말합니다. 무상대도를 성취하려거든 객관의 대상인 육진을 버리지 말며 미워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진을 이대로가 전체로 진여대용이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육진이지만, 아는 사람에게는 육진이 아니라 진여대용(眞如大用)의 육용(六用)이라는 것입니다. 중생이 집착심을 가지면 육진이 되고 눈 밝은 사람이 바로 쓰면 육용(六用)으로서 진여의 대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진을 버리고서 어찌 무상대도를 구할 수 있겠느냐고 하는 말입니다.


39.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도리어 정각과 동일함이라

    육진 불오 환동정각
    六塵 不惡 還同正覺

    진여대용인 육진을 미워하지 않으면 바로 정각(正覺)이라는 말입니다. 육진을 버리고 정각을 성취하려는 사람은 마치 동쪽으로 가려고 하면서 서쪽으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육진을 바로 보라는 것입니다.          


40. 지혜로운 이는 함이 없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얽매이도다.

    지자 무위 우인 자박
    智者 無爲 愚人 自縛

    지혜있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도가 현전하여 버릴래야 버릴 것이 없고 취할래야 취할 것이 없는데,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잘 모르는 사람은 공연히 취하려고 애쓰며 버리려고 고생을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근본 대법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취사심에 묶여서 엎어지고 자빠지며 지옥으로 갔다 극락으로 갔다 하며 온갖 전도(顚倒)를 거듭합니다. 그러면 '본래 스스로 함이 없다(本自無爲)'고 하여 손도 꼼짝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고 할런지 모르지만, 이것도 무위법에 떨어진 것이 됩니다. '함이 없다(無爲)'고 했지만 실제는 함이 없는 것을 찾아 볼 수도 없고 중도를 깨쳐도 중도도 찾아볼 수 없는 구경에서 하는 말이지, '함이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41. 법은 다른 법이 없거늘 망령되이 스스로 애착하여

    법무이법 망자애착
    法無異法 妄自愛着

   법은 다른 법이 없어서 중생이 생각하고 집착할 특별한 법이 없는데, 공연히 스스로 애착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세법을 버리고 불교를 해야겠다, 교학을 버리고 참선을 해야겠다, 반대로 참선하면 무슨 소용있나, 교(敎)나하지 하는 것 등이 모두 애착입니다. 그러므로 쓸데없이 선이니, 교니, 중생이니,  부처니, 마구니니 하는 분별들은 모두 망견인 변견으로서 애착심입니다. 그러니 그 모두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42.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그릇됨이 아니랴.

   장심용심 기비대착
   將心用心 豈非大錯

    '쓸데없이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고 있으니 어찌 크게 잘못됨이      아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알고 보면 우리가 성불하려고 애를 쓰고, 참선하려고 애를 쓰고, 경을 배우려고 애를 쓰는 것 전부가 마치 머리위에 머리 하나를 더 얹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대도는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서 그 진여광명이 일체에 현성(現成)해 있으므로, 우리가 피할래야 피할 수 없고 숨을래야 숨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 마음으로 잡으려 하고 성취하려고 하면 점점 더 멀어지기 때문에 이것이 가장 잘못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바로 깨치면 그만입니다만, 그러나 깨쳤다는 생각도 병입니다. 더구나 깨치지 않았다면 참으로 집착심을  떠날 수 없는 것이므로, 깨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뜨지 않고서는 광명을 볼 수 없듯이 깨치지 못하면 밤낮으로 현저한 이 진여광명을 절대로 볼 수 없습니다.


43.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깨치면 좋음과 미움이 없거니

    미생적란 오무호오
    迷生寂亂 悟無好惡        

   미혹할 때는 고요함과 혼란함이 생기나 깨치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 하는 감정은 취사심이므로 미혹할 때는 집착심이 있지만 깨치면 취사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44. 모든 상대적인 두 견해는 자못 짐작하기 때문이로다.

    일체이변 양유짐작
    一切二邊 良由斟酌

    모든 치우친 두 가지 견해, 즉 양변을 다 버려야만 무상대도인 일승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우리가 쓸데없는 생각과 계교심을 일으켜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진다는 것입니다. 본래 법에는 양변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마음으로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는 분별을 내는 것을 짐작(斟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짐작인 취사심만 버리면 전체가 현전하여 대도(大道) 아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45. 꿈 속의 허깨비와 헛꽃을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

    몽환공화 하로파착
    夢幻空華 何勞把捉

    '꿈 속의 허깨비와 헛꽃'은 일체의 변견을 말합니다. 성불하려는 것도 꿈 속의 불사(佛事)이니, 성불한다는 것도 중생 제도한다든지 하는 것도 모두 꿈이며 헛꽃이라는 것입니다.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생각과 불법이니 세법이니 하는 것도 다 놓아 버려야 하는데, 왜 이를 잡으려고 애를 쓰느냐 하는 것입니다.

46.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 버려라.

    득실시비 일시방각
    得失是非 一時放却

    잘잘못과 옳고 그름 모두가 변견이니, 이러한 양변을 완전히 버리면 중도가 현전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47. 눈에 만약 졸음이 없으면 모든 꿈 저절로 없어지고

    안약불수 제몽자제
    眼若不睡 諸夢自除

    누구든지 잠을 자지 아니하면 꿈은 없는 것입니다. 꿈은 누구든지 잠을 자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48. 마음이 다르지 않으면 만법이 한결같느니라.

   심약불이 만법일여
   心若不異 萬法一如

   마음에 다른 생각인 차별심 분별심을 내지 않으면 만법이 여여(如如)한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만법이 본래 여여한데 우리가 여여하지 않다고 인식하는 것은 바로 마음에 분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법이 본래 여여한 것을 우리가 억지로 여여치 않게 할 수도 없는 것이면, 여여치 않은 것을 여여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만법이 본래 한결 같아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한데도 그것을 보지 못함은 중생의 마음 속에 분별심이 있기 때문이므로, 마음 가운데서 분별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전혀 분별심이 없으면 '만법이 한결같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49. 한결같음은 본체가 현모하여 올연히 인연을 잊어서

    일여체현 올이망연
    一如體玄 兀爾忘緣  

   '일체 만법이 여여한다'는 것은 그 본체가 현묘하기 때문입니다. 현모한 본체는 석가가 아무리 알았다 해도 실제로 알 수는 없으며, 달마가 전했다 해도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 '석가도 알지 못하거니 가섭이 어찌 전할 수 있을건가(釋迦猶未會어니 迦葉豈能傳가)'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정말 알 수도 없고 전할 수도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그럼 석가가 깨치고 가섭에게 전했다고 하는 것도 거짓말인가?
   그러나 참으로 알 수 없는 가운데서 분명히 알고, 전할 수 없는 가운데서 분명히 전하는 것이 불교의 묘법이니, 이것이 참으로 현묘한 이치라는 것입니다.
   '올연히 일체 인연을 다 잊었다'고 하는 그 인연이란 생멸인연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 생멸인연이든 불생멸인연이든, 세간법이든 출세간법이든 모든 인연을 다 잊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50. 만법이 다 현전함에 돌아감이 자연스럽도다.

    만법 제관 귀복자연
    萬法 齊觀 歸復自然

    '만법제관(萬法齊觀)'이란 일체만법을 환히 다 본다는 뜻으로 흔히 해석하지만, 일체만법이 모두 다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돌아감이 자연스럽다'고 해서 그냥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아니니, 그렇게 되면 천연외도(天然外道)가 되고 맙니다. 귀복(歸復)이란 반본환원(返本還源)의 뜻으로서 자성청정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 분별심만 다 버린다면 이 자성청정심에 돌아가는데, 그 돌아감이 아무런 조작이 없으며 힘들지 아니하여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51. 그 까닭을 없이 하여 견주어 비할 바가 없음이라

    민가소이 불가방비
    泯其所以 不可方比

   그러면 그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러나 그 이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부사의해탈경계(不思議解脫境界)이기 때문에 말로써도 표현할 수 없고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비교해서 이렇다 저렇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52.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지동무동 동지무지
    止動無動 動止無止

   움직임과 그침은 상대법으로서 여기서는 먼저 이 두 상대법을 서로 긍정한 다음에 두 법을 부정하였습니다(照而遮). 그치면서 움직인다(止而動) 함은 그침과 움직임이 서로 긍정하면서 두법이 융통자재하게 살아나는 동시에 움직임이 없음(無動)을 말하였고, 움직이면서 그친다(動而止) 함은 움직임과 그침이 서로 긍정하면서 두 법이 상통(相通)하는 동시에 그침이 없음(無止)  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움직임과 그침의 양변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다시 두 법을 긍정하여 서로 융통자재하게 쓸 수 있는 중도정의(中道正義)를 여기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치면서 움직임(止動)과 움직이면서 그침(動止)은 두 법이 서로 비춰서(雙照) 살아남(常照)을 말하고, 움직임이 없고(無動)  그침이 없다(無止)함은 두 법을 함께 막아(雙照) 없애 버림으로써(常寂) 비치면서 항상 고요하고(照而常寂) 고요하면 항상 비치는(寂而常照) 중도 법계의 이치를 그대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먼저 비춰서 막고(照而遮) 뒤에 막아서 비춘다(遮而照)는 순서만 달리하였을 뿐, 막음과 비춤을 함께 한(遮照同時) 중도 정의는 다름이 없습니다. 결국 움직임은 그침에 즉(卽)한 움직임이므로 움직임이 없는 것이며, 그침은 움직임에 즉(卽)한 그침이므로 그침이 없어서, 움직임과 그침이 함께 융토자재하면서 동시에 두 상대법이  없어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움직임은 그침 가운데 움직임이며(靜中動), 그침은 움직임 가운데 그침이어서(動中靜) 움직임과 그침의 두 상대법이 함께 없어지면서 함께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53.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거니 하나인들 어찌 있을건가.

    양기불성 일하유이
    兩旣不成 一何有爾

   움직임과 그침이 상대법이기 때문에 움직임과 그침을 모두 버리면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않는데, 하나가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까지도 없어져야 둘이 없어진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둘이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인들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54. 구경하고 궁극하여서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음이요.

    구경궁극  부존궤칙
    究竟窮極 不存軌則

   양변을 완전히 떠나서 중도를 성취하면 거기서는 중도라 할 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구경하고 궁극한 법으로서 어떠한 정해진 법칙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칙이 없다 해서 단멸(斷滅)에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으며, 모날 수도 있고 둥굴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전한 진여대용이 자유자재하고 호호탕탕하여 법을 마음대로 쓰는 입장에서 하는 말입니다.


55. 마음에 계합하여 평등케 되어 짓고 짓는 바가 함께 쉬도다.

    계심평등 소작 구식
    契心平等 昭作 俱息

   내 마음이 일체에 평등하면 조금도 차별 망견을 찾아볼 수 없고 여여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산이 물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물이 산 위로 솟아 올라도는 것이 아니라, 산은 산 그대로 높고 물은 물 그대로 깊은데, 그 가운데 일체가 평등하고 여여부동함을 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짓고 짓는 바가 함께 쉰다'고 표현하고 있으니 바로 일체 변견을 다 쉬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56. 여우 같은 의심이 다하여 맑아지면 바른 믿음이 고루 발라지면

    호의 정진 정신 조직    
    狐疑 淨盡 正信 調直

    자기의 일체 변견과 망견을 다 버리면 의심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믿음이 화살같이 곧게 서 버렸다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正信)이란 신(信) 해(解) 오(悟) 증(證)의 전체를 통한 데서 나오는 믿음이며, 처음 발심하는 신심(信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경을 성취하면 바른 믿음이라 하든 정각(正覺)이라 하든 여기서는 뭐라 해도 상관 없으니, 이것이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은 수행의 지위가 낮고 정각은 수행의 지위가 높은 것으로 생각할는지 모르겠으나, 근본을 바로 성취한 사람을 믿음이라, 각(覺)이라, 부처라, 중생이라, 조사라, 무어라 해고 상관 없습니다. 실제에 있어서는 변견을 여의고 중도를 바로 성취했느냐 못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지, 이름은 무엇이라 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57. 일체가 머물지 아니하여 기억할 아무 것도 없도다.

    일체물류 무가기억
    一切不留 無可記檍

    객관적으로 일체가 머물지 못한다거나 주관적으로 일체를 머물게 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떤 머물 것이 있고 머물지 못할 것이 있는 것처럼 됩니다. 때문에 여기에는 능(能) 소(所)가 붙으므로 바른 해석이 되질 않습니다.    여기서는 바른 믿음이 곧고 발라서 진여자성이 현전해 있기 때문에 일체가 머물지 못하고 또한 일체를 머물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었을 기억할래야 할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부처도 조사도 찾아 볼 수 없는데 무슨 기억을 할 수 있겠냐는 뜻입니다.


58. 허허로이 밝아 스스로 비추나니 애써 마음 쓸 일 아니로다.

    허명자조 불로심력
   虛明自照 不勞心力

   허(虛)란 일체가 끊어진 쌍차(雙遮)를 의미하고, 명(明)이란 일체를 비추어 다 살아나는 것으로서, 즉 쌍조(雙照)를 말합니다. 허(虛)가 명(明)을 비추고 명(明)이 허(虛)를 비춰서 부정과 긍정이 동시(遮照同時)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본래 갖추어진 자성의 묘한 작용이므로 마음의 힘으로써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59. 생각으로 헤아릴 곳 아님이라 의식과 망정으론 측량키 어렵도다.

     비사량처 식정 난측
    非思量處 識情 難測

    대도는 사량(思量)으로는 알 수 없고 깨쳐야만 안다는 것입니다. 보통 중생의 사량은 거친 사량(추思量)이라 하고, 성인의 사량은 제팔 아뢰야식의 미세사량(微細思量)이라 하는데 거친 사량은 그만 두고, 미세사량으로도 대도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십지(十地) 등각(等覺)의 성인도 허허로이 밝게 스스로 비추는 무상대도는 알 수 없고, 구경각을 성취한 묘각(妙覺)만이 그러한 무상대도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바로 진여법계라 한다는 것입니다.


60. 바로 깨친 진여의 법계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음이라

     진여법계 무타무자
    眞如法界 無他無自

    여기서부터는 [신심명(信心銘)]의 총결산입니다. 모든 병폐를 털어버리면 진여법계가 현전한다는 것입니다. 진여법계란 일심법계(一心法界)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견성이라고 합니다. 그 진여법계의 내용은 남도 없고 나도 없어서 모든 상대, 곧 일체를 초월하여 양변을 완전히 떠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현실이란 상대로 되어 있는데, 그 현상계를 해탈하여 진여법계 일심법계인 자성을 보게 되면, 남도 없고 나도 없는 절대 경지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상대법이 끊어진 쌍차(雙遮)의 경계이며 진여법계 일심법계인 것입니다.


61. 재빨리 상응코저 하거든 둘 아님을 말할 뿐이로다.

    요급상응 유언불이
    要急相應 唯言不二

    앞에서 '진여법계는 남도 없고 나도 없다'고 하니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그런 세계라고 생각할런지 모르나 진여법계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 대자유의 세계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3차원의 차별세계를 완전히 초월하면 차별이 다한 4차원의 부사의경계(不思議境界)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여법계이며 '둘 아님을 말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둘 아니란 말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있음(有)과 없음(無)이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립되어 서로 통하지 못하는 상대세계를 초월하고 절대세계에 들어가면 모든 상대를 극복하여 융합해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나와 남이 없다 하니 아무 것도 없이 텅텅 빈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나와 남이 없을 뿐입니다. 따라서 남이 곧 나이고 내가 바로 남으로서, 나와 남이 하나로 통하는 절대법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62. 둘 아님은 모두가 같아서 포용하지 않음이 없나니

    불이 개동 무불포용
   不二 皆同 無不包容

   서로 상극되는 물과 불을 예로 들어 봅시다. 물과 불이 상대적으로 있을 때는 서로 통하지 않지만, 참으로 쌍차(雙遮)하여 물과 불을 초월하면 물이 곧 불이고 불이 바로 물이 되어 버립니다. 보통의 논리로는 전혀 말이 안되는 듯도 하지만, 여기에 와서는 물과 불이 둘 아닌 가운데 물 속에서 불을 보고 불 속에서 물을 퍼내게 되니, 이러한 세계가 참으로 진여법계라는 의미입니다.
   둘이 아닌 세계, 즉 물도 불도 아닌 세계는 물 속에 불이 있고, 불 속에 물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체 만물이 원용무애하고 탕탕자재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포용하지 않음이 없다'한 것이니 쌍조(雙照)입니다. 즉 그 세계에서는 일체 만물의 대립은 다 없어지고 거기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 없게 됩니다. 이와 같이 둘이 아닌 진여법계를 깨치지 못하면 서로서로 대립이 되어 포섭이 되지 않고 싸움만 하게 됩니다. 쌍차(雙遮)란 모든 것을 버리는 세계면, 쌍조(雙照)란 모든 것을 용합하는 세계입니다.


63. 시방의 지혜로운 이들은 모두 이 종취로 들어 옴이라

    시방지자  개입차종
   十方智者 皆入此宗

    시방세계의 모든 지혜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 종취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모든 있음과 없음의 차별세계를 떠나면 절대세계인 둘 아닌 세계(不二世界)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 종취에 들어 간다'한 것은 바로 '둘 아닌 세계'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대립을 버리면 모든 것이 융합한 세계에 들어가는데 그곳이 곧 둘 아닌 세계, 진여의 세계, 쌍조의 세계인 것입니다.


64. 종취란 짧거나 긴 것이 아니니 한 생각이 만년이요

    종비촉연 일념만년
    宗非促延 一念萬年

    이러한 종취는 짧거나 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촉(促)이란 짧은 것, 연(延)이란 긴 것입니다. 이 진여법계의 종취는 시간적으로 짧거나 길지도 않다는 것으로서 한 생각 이대로가 만년이며 만년 이대로가 한 생각입니다. 즉 무량원겁(無量遠劫)이 한 생각이며 한 생각이 무량원겁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짧은 것도 없고 긴 것도 없다 하니,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긴 것이 짧은 것이고 짧은 것이 긴 것이라는 뜻으로서, 한 생각이 만년이며 만년이 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짧고 긴 것이 아니라'함은 쌍차(雙遮)이며, '한 생각이 만년이라는 것은 쌍조(雙照)를 말합니다. 우리가 진여자성을 깨쳐서  대도를 성취하면 시간의 길고 짧음이  다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한 생각이 만년'이라고 해서 한 생각과 만년이 따로 있는 줄 알면 큰 잘못입니다. 그것은 시간 공간이 끊어진데서 하는 말이므로 '한 생각'도 찾아볼 수 없고 '만년'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65. 있거나 있지 않음이 없어서 시방이 바로 눈 앞이로다.

    무재부재 시방목정
    無在不在 十方目前

   시방(十方)은 먼 곳을 말하고 목전(目前)은 가까운 곳을 말합니다. 공간적으로 멀고 가까움이 서로 융합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탈하여 둘 아닌 진여세계로 들어가면 시간적으로 길고 짧음이, 공간적으로 멀고 가까움이 없어서 한 생각이 만년이고 만년이 한 생각이며,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어서 시방이 목전이고 목전이 시방입니다. 여기서는 멀고 가까움이 통하여 원융무애한 둘 아닌 세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있음도 없고 없음도 없다'는 것은 쌍차를 말하며, '시방이 눈 앞이라'함은 쌍조를 말합니다.


66.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아서 상대적인 경계 모두 끊어지고

    극소동대 망절경계
    極小同大 忘絶境界

    어떻게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을수 있는가? 이는 조그마한 좁쌀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간다는 의미인데, 시방세계 속에 좁쌀이 들어간다는 말은 알기 쉽지만, 좁쌀 속에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간다 하면 상식적으로 우스운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원융무애하여 상대가 끊어진 세계는 조그마한 좁쌀 속에 삼천대천세계가 들어가고도 남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상대적인 경계가 끊어져 한계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계가 있으면 작은 좁쌀에도 한계가 있고 시방세계도 한계가 있으니 작은 좁쌀속에 어떻게 큰 시방세계가 들어갈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기는 한계가 없으므로 조그마한 좁쌀 속에 큰 시방세계가 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좁쌀이 큰 시방세계로서, 온 시방세계가 좁쌀 속에 모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크고    작은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경계가 있다면 좁쌀 속에 어찌 시방세계가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67.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아서 그 끝과 겉을 볼 수 없음이라

   극대동소 불견변표
   極大同小 不見邊表

   지극히 커도 작은 것과 동일하여, 가도 없고 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이 큰 것과 같다'함과 '지극히 큰 것이 작은 것과 같다'함은 쌍조(雙照)를 말한 것이며, '경계가 끊어졌다'함과 '끝과 겉을 볼 수 없다'함은 쌍차를 말한 것으로 모두 양변을 여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쌍차쌍조(雙遮雙照)가 되면 둘 아닌 세계(不二世界)에 들어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68.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니

    유즉시무 무즉시유
    有卽是無 無卽是有

    있음과 없음이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이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있음과 없음이 가장 통하기 어려우나 진여법계에서는 모든 것이 원융하여 무애자재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69. 만약 이 같지 않다면 반드시 지켜서는 안되느니라

    약불여차 불필수수
    若不如此 不必須守


    있음과 없음이 둘이 아닌 진여법계를 우리가 실제로 바로 깨치면,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인 둘 아닌 세계로 바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하기 전에는 불법(佛法)이라 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70.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니

    일즉일체 일체즉일
    一卽一切 一切卽一

   하나는 작은 하나이며 일체는 커다란 전체입니다. 진여법계에서는 하나가 곧 많음이고 많음이 바로 하나로서 하나와 많음이 서로서로 통하여,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정체가 바로 하나라는 것입니다.


71. 다만 능히 이렇게만 된다면 마치지 못할까 뭘 걱정하랴.

   단능여시 하려불필
   但能如是 何慮不畢

   일체 진리를 깨치고 나면 일체 원리를 모두 성취하여 버렸다는 말이니, 결국 이것은 우리의 자성자리, 곧 법계실상(法界實相)을 얘기한 것입니다.    

  
72. 믿는 마음은 둘 아니요 둘 아님이 믿는 마음이니

    신심불이  불이신심
    信心不二 不二信心

   그러면 이 진여법계를 무엇으로 깨치느냐 하면 바로 신심(信心)이라는 것입니다. 이 신심(信心)은 범부에서부터 부처가 될 때까지 모두가 신심(信心)뿐인 것이니, 이는 신(信) 해(解) 오(悟) 증(證)을 함께 겸한 신심(信心)입니다. 그러므로 신심은 불법진여의 근본으로서 그것은 둘이 아니며, 모든 것이 원융하여 쌍조가 되어서 '둘 아님이 신심(信心)'이라 하였습니다. '둘 아님이 신심(信心)'이니 거기서는 아무 상대도 없고 무애자재만 남게 됩니다.


73.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과거 미래 현재가 아니로다.

    언어도단 비거래금
    言語道斷 非去來今

    그 깊고 오묘한 도리는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말이나 문자로써 설명할 수 없고, 과거 미래 현재의 삼세(三世)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언어의 길이 끊겼다'하니 벙어리의 세계냐고 할지 모르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상대적인 언어의 길은 끊겼지만 원융무애한 진여법계에서는 언어의 길이 끊어졌다고 해도 한마디 한마디가 무한한 진리로서 모든 것이 다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 '삼세가 없다'하지만 삼세가 끊어진 곳에 삼세가 분명하여 과거 속에 미래가 있고 미래속에 과거가 있으며. 현재 속에 과거가 있고 현재 속에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아닌 동시에 과거 속에 미래가 미래 속에 현재가 원융하여 무애자재한 진여법계가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