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하게 살아 있는 우주 대생명!

 

 

광대한 우주에 어느것 하나 살아 있지 않은 것은 없다.

 

만물은 '하나'에서 나와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하나의 대생명'으로, 하나인 '한얼'에서 나왔기에 어느것도 '한얼' 아닌 것이 없다. 가장 고차원에서 가장 저차원에 이르기까지 결국은 하나인 한얼의 무수한 작용이고 면모들이다.

 

'한얼'은 살아 있는 의식, 사랑과 지혜와 힘으로 충만한 우주의식으로, 이런 '의식'의 흐름과 응결이 곧 '에너지'이며, '에너지'의 흐름이 굳어져 '물질'로 드러나게 된다. 즉, 물질은 곧 에너지이며, 에너지는 의식으로, 물질과 에너지와 의식은 같은 것을 일컫는 다양한 표현일 뿐이다.

 

동양에서는 일찌감치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이지만, 서양의 물질과학에서도 지금은 거의 밝혀지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질량은 곧 에너지'임을 밝힌 이래, 양자역학에 이르러서는 그것은 곧 '의식'이라는 데에까지 인식이 열리고 있는 중이다. 극미한 입자나 파동이 실험자의 의식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이동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입자나 파동이 결국 '의식의 흐름이자 응결'이라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의식은 '살아 있는 그 무엇'이다. 살아 있는 그 무엇이 뭉쳐진 것이기에 입자나 파동 역시 '살아 있는 것들'이다. 그 흐름이 에너지이므로 에너지 역시 '살아 있는 그 무엇'이며, 이런 에너지의 응결이 물질이므로 이 역시 '살아 있는 그 무엇', 곧 '생명'이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살아 있는 '생명'들이다. 사람, 동물, 식물, 광물, 전기, 자기, 기후, 행성... 태양계, 은하계... 우주 전체가 결국 '살아 있는 하나의 대생명'이다.

 

실험을 통해 이미 밝혀진 바 있지만, 우리가 그동안 무생물로 여겨 왔던 '물'만 하더라도,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조화와 부조화... 등 거의 모든 마음 상태를 스스로 지각하고 표현까지 한다는 사실은, 물 이 그냥 단순한 무의식의 존재가 아니라, 사실은 모든 종류의 의식과 소통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의식덩어리'임을 뜻하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발견이다.

 

더구나 물은 사람 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매일 먹는 음식 역시 거의 물로 조리하기에, 이쯤 되면 그냥 무심코 대할게 아니라, 그야말로 지극정성으로 잘 보호하고 관리해야 되는, 그 자체로서 살아 있는 소중한 생명체다. 계곡수인지, 강수인지, 지하수인지, 호수인지에 따라서도 당연히 성분이-의식과 에너지 차원에서- 다를 것이고, 저수조에 모아들이기 전에 어떤 경로를 지나, 어떻게 사용된 적이 있느냐에 따라서도 물마다 포함하고 있는 의식과 에너지의 양상이 모두 다를 것이다.

 

그 물이 산천의 맑은 기운을 담고 있는 청정수라면 모르되, 공장이나 농장에서 나온 폐수 또는 식당이나 목욕탕에서 많은 사람들의 탐욕에 찌든 의식이나 기운을 담고 나온 물이라면, 그 성분을 아무리 정화한다 한들, 그 안에 담긴 의식이나 에너지의 양상까지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음식을 조리할 때도 마찬가지다. 조리하는 사람의 의식이 물의 의식에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니만큼, 음식을 만들 때는 정말로 맑고, 깨끗하고, 건강하고, 긍정적이고, 조화로운 마음으로... 거의 기도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예로부터 정화수라 하여 우리네 할머니들이 장독대에 올려 놓고 기도하던 물, 그리고 신앙이 깊은 절이나 교회당에 올려 놓았던 청수를 마시고 기적같은 효험을 본 사례들은 바로 그런 원리에 의한 것이다.

 

물만이 아니다. '바위'의 경우를 보자. 같은 바위인데도 특별히 사람들이 자주 찾고 수도나 기도터로 사용되어 온 바위는, 종류는 주위의 다른 바위들과 같더라도 그 느낌은 분명히 다르다. 그런 바위들은 방문하는 사람들의 의식의 양상에 따라, 어떤 것은 엄숙하게, 어떤 것은 온화하게, 어떤 것은 음산하게, 심지어 어떤 것은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것은 바위 역시 살아 있는 의식의 응결체로, 주위의 환경이나 사람들의 의식에 반응하고 그런 의식들을 저장하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다보면 어떤 바위는 너무 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저장하여 점점 더 신통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무'도 마찬가지다. 마을 어귀에 있는 오래된 고목나무는 그 자체로 경외감을 자아내며 자연스럽게 마을의 터줏대감 대접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수백 년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마을의 모든 대소사와 나고 죽은 많은 사람들의 의식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치대로, 건물이나 장소는 물론이고, 사람들의 소지품이나 장신구, 각종 생활도구들로부터 시작하여 동물, 식물, 흙, 공기... 등등 결국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살아 있는 의식으로, 사람들의 의식에 반응하고 소통하고 교류하고 저장까지 하는 것, 즉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것이다.

 

옛날엔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고, 고기잡이를 나갈 땐 풍어제를 지냈는데, 실제로 그런 행사를 하는 경우와 하지 않는 경우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비와 바람과 바다와 물고기가 모두 살아 있는 의식체가 아니라면 가능하지 않을 현상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우주 대생명'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가?

 

인식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야만스러워지고 있지는 않은가? 문명이란 이름으로 도처에서 '환경파괴'를 자행해 왔는데, 이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환경살해'라고 해야 옳다. 환경이란 결국 '살아 있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자연환경만이 아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해 주고 있는 가축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얼마전 TV에서 방영된 장면을 보면 참으로 잔혹하다 못해 인간에 대한 회의감마저 들 정도다. 닭이건, 돼지건, 소건... 거의 움직이지조차 못할 정도의 좁디 좁은 칸막이 속에서 평생을 갇힌 채로, 그냥 알 낳는 기계, 강제로 살찌우는 기계로 살다가, 마치 물건처럼 잔인하게 도살되고 폐기처분되는...

 

그런데 그 결과는 고스란히 우리에게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가축들이 평생을 갇혀 살면서 쌓인 스트레스와 원망과 불만, 죽어가는 순간에 가졌던 공포와 분노는 그대로 그들의 육신에 저장된 채 사람들의 식탁에 오른다는 사실... 생명들도 파괴되고, 자신들도 파괴된다는 사실을...

 

TV에서는 이런 장면들도 자주 보여준다. 출연자들이 나와서 살아 있는 낙지를 씹어먹는다든지... 살아 있는 물고기를 회를 뜨거나.. 뜨거운 물이나 불에 집어넣어 산채로 요리를 하는... 그러면서 서로 경쟁적으로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이... 그동안 불쌍한 생명들은 몸부림치며 죽어가고...

 

생각해보라! 당신이 산채로 씹어먹힌다든지, 혹은 뜨거운 불이나, 펄펄 끓는 물에 산채로 넣어 태워지거나 삶겨진다면?? 그 생물들의 입장도 조금도 다르지 않다. 사람과 다르지 않은 의식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엄연한 생명들이다. 물과 바위, 나무도 의식을 가진 생명들인데, 하물며 사람과 가까운 동물들의 의식은 그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오히려 아마존이나 아프리카 오지에 사는 사람들이 훨씬 나았다. 그들은 나무 한그루를 베어도 기도하고, 가축 한마리를 잡아도 그 영혼을 위한 의식을 치뤄주었다. 산채로 요리하지 않았고,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서 빨리 숨통을 멎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사람만이 아니라, 들판에 사는 야수들도 그렇게 한다.

 

그런데 소위 21세기를 살아가는 문명인이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

 

문명인이 아니다! 겁데기만 문명일 뿐, 실은 야만이고 무지이다. 아마존이나 아프리카 원주민들보다 못한... 나아가 들판의 야수들만도 못한...

 

그 옛날 고대인들은 우주를 하나의 대생명으로 여겨 경외할 줄 알았고, 신성한 마음으로 만물을 대하는 지혜를 갖고 있었는데, 시대가 흐르면서 사람들의 의식은 오히려 퇴보해 온 것이다.

 

이제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기에서 우리는 가장 먼저 '생명에 대한 인식'부터 바로 가져야 한다. 우주 전체가 그대로 하나의 대생명임을... 모든 존재는 살아 있는 의식체임을... 만물은 존귀하고 신성한 것임을...

 

그런 바탕 위에서 비로소 새 정치를 논하고, 새 경제를 논하고, 새 문화, 새 세상을 논해야 맞다. 가장 먼저 '생명의 의미'로부터 출발해야 제대로 그 방향이 잡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논하는 어떠한 말들도 진정성 없는 공허한 담론에 지나지 않는다.

 

새 시대는 생명의 의미에 대한 바른 관점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강 병 천

 

 

출처: http://cafe.daum.net/sinmunmyung/hNoN/147 (태얼랑의복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