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수행
글 수 461
| ||
작성자 : 문성호 | ||
Ⅱ. 오르빈도 1. 스리 오르빈도와 18인의 싯다 스리 오르빈도는 인류의 신성한 변형의 위대함을 올바르게 이해한 몇 안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인도의 푼디트들과 정통 종교지도자들이 육체는 불멸한다는 싯다들의 글을 상상의 산물로 간주했던 반면에 스리 오르빈도는 40년 동안 싯다들의 상태를 깨닫기 위해서 노력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오르빈도는 전통적인 18인의 싯다의 반열에 들어서기를 원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티루물라와 라마링가와 오르빈도와 마더(오르빈도의 수제자)가 경험한 변형은 같은 성격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으리라 본다. 그러므로 오르빈도가 당시에 이야기한 것은 18인의 싯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평가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스리 오르빈도가 영감을 통해 비젼을 경험하는 과정은 <신성한 삶(The Life Divine)>과 <요가의 통합(The Synthesis of Yoga)>에 잘 나타나 있고 자아가 변형되어가는 과정은 <요가에 대해서(Letters on Yoga)>와 서사시 <사비트리(Savitri)>에 드러나 있다. 특히 <요가에 대해서>와 <사비트리>는 여러 단계의 변형과 그러한 변형의 과정에 따르는 어려움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오르빈도는 육체의 불멸을 인간 진화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인류가 진화하는 과정 중에서 거쳐가야 할 다음 단계로 보았다. 영원불멸은 영적인 변형의 결과였다. 영적인 변형의 과정에서 최고의 절정은 하나의 신성한 초월의식이 의식의 낮은 단계로 하강하여 심지어 물질의 비의식 단계까지 하강하는 것이다. 이 경험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 오르빈도가 묘사해 놓은 것을 보면 18인의 싯다와 라마링가가 앞장에서 적어놓은 경험과 놀라우리만치 흡사하다. 특히 “황금의 가루”와 “황금의 몸”에 관한 언급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인류에 대한 오르빈도의 깊은 사랑, 물질세계에 제시한 방향과 행동도 싯다들과 비슷하다. 2. 요기 렐레와의 만남 1907년 12월 30일 정치 활동을 하는 와중에 오르빈도는 요기 비쉬누 바스카 렐레와 만났다. 오르빈도가 요가 수행자를 만나고자 했던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렐레를 만난 오르빈도는 이렇게 말했다. “요가수행을 하고자 하는 것은 제가 해야 할 일과 독립을 위해서입니다. 결코 산야사(세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나 니르바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두 사람은 3일을 한 곳에서 같이 지냈다. 렐레가 오르빈도에게 말했다. “앉아서 명상을 하면서 생각은 하지 말고 그저 당신의 마음을 바라만 보시오. 바라보고 있노라면 생각이 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볼 것입니다. 생각이 들어오면 마음에서 멀리 내던져 버려 마음이 완전히 고요해질 수 있게 하십시오.” 후에 오르빈도는 이때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처음엔 굉장히 강렬한 경험과 의식의 빠른 변화가 되풀이되었다. 그 의식은 내가 결코 의도하지 않았고 평소 가지고 있던 개념과는 정반대의 의식이었다. 그 의식으로 아주 투명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세상은 절대자 브라흐마의 초월적인 편재성 속에 있는 텅 빈 형상이 영화의 화면처럼 펼쳐진 것이었다.” “자아(self)가 스며들어 있는 광대한 공간 속에서 보면 육체는 단지 떠도는 껍질처럼 느껴진다.” “나는 갑자기 생각을 초월하여 정신활동이나 생명활동에 물들지 않은 상태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에고도 없으며 소위 실제라는 세계도 없었다. 이러한 상태는 인지되는 것을 오직 부동의 감각으로 주시했을 때 그리고 참된 실체 없이 물현된 그림자들의 텅 빈 형상의 세계를 순수한 고요로 채웠을 때 다다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분리된 다수도 없고 마찬가지로 통합된 '하나‘도 없다. 여기에는 형상도 없으며 관계성도 없으며 투명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생각할 수도 없으며 완전무결하며 최상의 실제이며 유일한 실제인 바로 ”그것“이 절대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것은 결코 머리로 깨닫는 것도 아니며 저 위 어디엔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관념의 세계가 아니다. 이것은 실재한다. 실재하는 유일한 실체이다. 공간으로 이루어진 물질세계는 아니지만 이 물질세계의 외관에 스며들어 있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넘쳐나고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하게 존재한다. 그 자체 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들어설 여지가 없이 실질적이고 실재적이고 실체적인 것 외에는 허용하지 않는다. 이 경험으로 인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침묵과 무한한 해방감과 자유를 느낄 수 있었다.” 오르빈도는 “니르비칼파 사마디” 상태에 들어갔다. 이 상태는 베단타와 힌두의 경전에서 말하는 “그것”과도 같은 상태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니르바나”나 “해방”, 그리고 전 세계의 신비전통에서 추구하는 목적지이다. 또한 이 상태는 오랜 시간동안 끈질긴 노력을 하더라도 도달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좀더 고차원의 경험을 하기 위한 시작일 뿐이라는 점이다. 오르빈도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니르바나 상태가 완화되기 전까지 나는 밤낮으로 그 상태 속에서 살았다. 결국 그것은 위로부터 오는 더욱 위대한 상위의 거대한 의식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세상을 환영이라는 측면으로 바라보게 되면 환영이라는 것은 단지 작은 표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작은 표면 이면에는 광대한 신성의 실체가 있고 표면을 넘어서면 지고한 신성의 실체가 있으며, 처음에는 그저 영화의 화면이나 그림자처럼 보이는 모든 것의 핵심에는 강렬한 신성의 실체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해서 다시 속박되거나 지고한 경험으로부터 추락해서 축소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진리가 끊임없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유로워진 나의 의식 안의 니르바나는 나의 깨달음의 시작, 즉 완전한 것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니르바나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이루어야 할 유일한 깨달음도 궁극의 목표도 아니다.” “니르바나는 더 이상 추구할 것이 없는 궁극이 아니다. 인류가 하위의 본성을 통과하는 진화의 길이 끝나고 상위차원의 진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3. “신비”를 추구하며 알리포르 감옥에서 석방되고 난 오르빈도는 다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알리포르 감옥에서 겪은 경험을 통해 오르빈도는 “마음을 넘어선 의식”에 도달해서 존재의 여러 측면인 각각의 진실(평화, 사랑, 아름다움, 권능, 지식, 의지 등)을 전체적으로 경험했다. 그러나 그 각각은 또한 서로 독립적이었다. 그러나 이 의식의 한 역시 뚜렷하게 보였다. 이 의식 안에서는 진실을 경험하되 한 번에 한 가지만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볼 수 ldT다. 그러나 자신의 관점에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마음을 넘어선 의식은 자체의 한계로 인하여 존재를 여러 측면으로 나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가 하위 멘탈계로 하강하면 할수록 존재의 측면은 더욱 세분화된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영혼과 천국에 대한 진실이 아니라 육체와 이 땅에 대한 진실이다. 그리고 인간이 필요로 하는 힘이 하나 더 있다. 인간의 속성을 지배하는, 아래의 차원으로 하강하여 존재를 세분하는 힘에 대항할 수 있는 권능이다. 오르빈도는 이 아래에서 진실한 삶을 살 수 있는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저 너머 침묵의 세계나 고상한 환희가 넘치는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삶도 요가의 한 분야이다.” 오르빈도는 말했다. “마음이 인간속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마음의 작용으로 인간의 제도를 무한히 변화시켜 나가지만 제도를 통해서 결함이 표출될 뿐이다... 아래로 잡아당기는 것을 저항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극복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힘이 필요하다.” 오르빈도는 이 숨겨진 힘을 “비전” 또는 “지고한 의식”이라고 표현했다. 1910년 오르빈도는 칸데르나고르에서 그동안 찾아오던 “비전”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발견을 할 수 있었던 상황에 대해서 말한 적은 없다. 그러나 후일 오르빈도가 쓴 바에 따르면 그와 같은 여건은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었다. 오르빈도는 지옥과 같은 상황을 겪어 지나와야 했다. 왜냐하면 아래로 추락해 보지 않으면 결코 높이 날 수 없기 때문이다. “각자가 이룬 영적인 진화의 단계에서 지고한 의식의 권능과 빛을 하위의 속성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활동 속으로 불어넣어야 한다.” 신성이 인간 본성을 변화시키면서 우리에게 하강한다 해도 인간 본성은 상위차원으로 힘들게 올라가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화를 막는 모든 장애를 제거하면서 변하는 것이다. 공포와 욕망과 고통과 왜곡으로 물들어 있는 잠재의식을 정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인간 의식의 가장 낮은 단계는 잠재의식이다. 이 잠재의식은 물질계에서 삶을 살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물질계의 삶에는 질병과 죽음을 비롯한 일상의 습관도 포함하고 있다. 칸데르나고르에서 스리 오르빈도는 물질적인 잠재의식의 가장 깊은 단계에 도달했다. “엠프리레나(신성)에 몰두하고자 했었지만 길은 거기에 없었다. 오히려 우리 주변에 펼쳐진 모든 것들(고통, 슬픔, 좌절, 욕망...)을 철저하게 경험해서 그 반대의 극에 다다라야만 했다.” (그때 신성의 상태에 있게 된다) “동시에 오르빈도는 ‘거대한 색깔의 파도’가 흰빛과 뒤섞여 있는, 마음을 넘어선 영역의 한계까지 다다랐다.” 또한 여기에 대응하는 아래에 있는 검은 바위에도 닿았다. “쓰레기와 진창의 공포 한가운데서 나는 깊고 그리고 길게 파헤치고 있었다. 이렇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가지 않은 곳으로 가라. 아무도 파헤친 적이 없는 곳을 깊이 파라. 그대가 굳건한 주춧돌을 발견할 때까지. 그리하여 열쇠가 없는 문을 두드릴 때까지“ 오르빈도는 소멸하지 않는 물질 의식의 심연의 밑바닥을 발견했을 때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는 다른 시간과 공간 속으로 뚫고 들어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놀라우리만치 장엄한 빛의 장관을 가렸다.” “밤과 낮의 원대한 반전. 세상은 그와 같은 변화를 소중히 생각한다.” “하나의 계획안에서 높은 것은 낮은 것과 만난다.” 오르빈도는 몸의 모든 세포의 빛을 경험하면서 모든 물질의 토대인 지고의 빛을 뚫고 들어갔다. 변형의 “비밀”은 이것이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상위에 있는 의식은 하위에 있는 의식의 또 다른 면이다. “만약 무한의 궁극에 다다르고 싶다면 유한의 궁극을 지나가야 한다.” “황홀감에 넘치는 천국은 완벽한 지상을 꿈꾼다. 슬픔에 차 있는 땅은 완벽한 천국을 꿈꾼다. 공포심으로 최면이 걸린 그 둘은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다.“ 4. 황금의 지고함 지고함에 대해서 묘사해 놓은 것을 보면 18인의 싯다가 소루바 사마디에 대해서 묘사한 회상록과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황금의 몸”을 가지고 “황금의 사마디”에 대해서 이야기한 라마링가의 경험과도 비슷하다. 오르빈도의 수제자인 마더는 처음으로 이를 경험하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권능과 따뜻함과 황금이 이 경험에 대한 인상이다. 이것은 액체처럼 유동적인 것이 아니라 작열하는 황금빛 가루와 같다. 이것들 각각은 (입자로 불릴 수도 없으며 또한 조각으로도 불릴 수 없으며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수학적인 개념의 ‘점’이 아니라면 점이라고 할 수도 없다) 생동감 있게 살아 있는 금이다. 따뜻한 금가루, 이것은 빛난다고 할 수도 없으며 어둡다고 할 수도 없으며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빛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저 아주 작은 금가루가 무수히 많을 뿐이다. 금가루들이 내 눈과 내 얼굴에 닿았다. 그리고 엄청난 힘과 충만감과 모든 힘의 완벽한 균형을 통한 절대적인 평정을 느꼈다. 금가루는 풍부하고 충만했으며 굉장히 빠르게 움직였다.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한정 빨랐다. 동시에 평화와 완벽한 균형 그 자체였다.” “... 그것은 완전한 부동심을 준다. 그것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지상의 모든 진화의 최초의 근원이고 진화를 유지시킨다... 그 의식 상태에서는 (황금빛 금가루의) 활동력이 육체의 세포들을 개개의 형태로 형성하도록 집중시키는 힘을 능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와 같은 묘사는 다음에 나오는, 싯다의 가장 함축성 있는 문장을 상기시킨다. “고요하라. 그리고 깨달으라. 내가 신이라는 것을.” 부동성은 초월적 힘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1910년 프랑스 작가 폴 리차드가 폰디체리에 왔다. 그는 1914년 다시 방문해서 오르빈도에게 철학적인 내용의 월간지를 2개 국어로 출간해 보자고 제안했다. 월간지의 제목은 ‘아르야(Arya)'나 ’위대한 통합에 대한 재고(Review of the Grand Synthesis)'가 어떻겠느냐고 덧붙였다. 1914년에서 1920년 사이에 오르빈도는 이 월간지를 발행하면서도 거의 5천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저술했다. 오르빈도는 쉬지 않고 몇 권의 책을 저술했다. 이러한 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르빈도에게 인간 진화에 관한 철학적인 비전의 토대를 제공한 <신성한 삶(The Life Divine)>과 자신이 체험한 통합적인 요가에 대해 묘사하고 다른 요가 수행과 비교한 <요가의 통합(The synthesis of Yoga)>. 이와 함께 <기타에 관한 에세이(Essays on the Gita)>는 지고한 의식의 하강에 관해서 오르빈도가 체험한 비전의 빛으로 바가바드를 해석해 놓은 것이다. <베다의 비전(The Secret of the Veda)>, <인간 단일성의 이상(The Ideal of Human Unity)>, <인간의 주기(The Human Cycle)>는 다가올 미래의 인간사회를 예측해서 쓴 글이다. 오르빈도는 쏟아지는 영감 속에서 책에 대한 아이디어가 쉽게 떠오른다고 했다. “나는 애써서 글을 쓰지는 않는다. 단지 상위의 권능이 나를 통해 글을 쓰도록 맡긴다. 그리고 그 상위의 권능이 그처럼 나를 통해 무언가를 전달하지 않을 때는 글을 쓰지 않는다. 예전에 머리를 위주로 살던 시절, 요가를 알게 되어 시와 산문을 쓰기 전에는 무언가를 억지로 하려고 했었다.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 ‘아르야’를 저술할 때나 편지를 쓸 때나 답장을 쓸 때 나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고요한 마음에서 나온다. 나는 상위에서 내려와 형상화될 준비가 된 것은 무엇이든지 글로 옮긴다.” 1920년 오르빈도는 펜을 내려 놓았다. 아르야의 마지막 판이 출간되었다. 그 후 30년 동안 쓴 글은 어마어마한 양의 편지와 23813행에 달하는 서사시 <사비트리(Savitri)>가 거의 전부다. 서사시 <사비트리>는 인간의 진화에 대한 오르빈도의 비전과 잠재의식과 비의식으로 인해 겪은 고통, 그리고 의식의 높은 영역의 경험에 대해서 생생하게 옮겨 놓은 것이다. 5. 변형의 기로 오르빈도는 인류가 진화의 기로에 있는 것을 보았다. “만약 지상에서 영적으로 펼쳐지는 것이 우리가 물질계에 탄생하는 진정한 이유라면, 그리고 본질적으로 자연계에서 전개되어 온 것이 의식의 진화라면 현재의 인간은 진화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다. 현재의 인간은 너무나 부족하게 스피리트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 그 자체는 굉장히 제한된 형태와 수단이다. 마음이란 의식의 중간 영역이기 때문에 정신적 존재는 단지 과도기적 존재일 뿐이다. 마음 작용은 단지 과도기적 작용일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류가 마음 작용을 넘어설 수 없다면 인류는 마음 작용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음을 넘어선 초인(superman)들이 나타나서 창조를 이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인류가 자신의 마음을 초월할 수 있다면 마음을 넘어선 초인의 상태에 도달하거나 적어도 마음 작용과 삶과 몸을 통해 자연에 현현해 있는 스피리트의 진화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오르빈도의 말에 따른다면 우리는 “변형의 기로”에 서있는 것이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기로인데 “질료 안에서 생명이 나타나듯이, 생명 안에서 마음이 나타나는 것과 같은 중대한 기로인 것이다.” 그러나 질료 안에 생명이 나타날 때와는 다르게 인간은 “우리 자신의 진화를 위해 협력”할 수 있다. 그러나 오르빈도는 인간의 의지로 변형을 가져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점점 더 상위의 신성한 의지에 내맡겨야 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마음과 활력과 물질적인 본성이 지니고 있는 한계는 너무나 크다. 육체에 관해서 오르빈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적인 전통에서는 육체를 영적으로 승화하거나 변형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로 여겼고 영혼을 세속적인 본성에 묶고 신성 속에서 영적인 달성을 이루거나 개개의 존재가 신성 속으로 녹아 들어가서 승화하는 것을 막고 있는 무거운 추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육체의 역할에 대한 개념이 이 지장을 무지의 영역으로 보거나 지상에서의 삶이 결국에는 구원을 받아서 철수할 것으로 본다면 사드하나(영적훈련)를 설명하는데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지상에서 신성한 삶을 성취하고 세속적인 본성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자체를 지상에서 스피리트를 구체화시키는 통합적인 목표의 일부분으로 본다면 사드하나를 설명하는 데는 부적절한 표현이다. 만약 우리 존재가 완전히 변형되고자 한다면 우리 몸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의 몸이 변하지 않는다면 이 지상에서 신성한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고한 빛으로 변형된 질료(물질)는 의식적인 의지에 반을을 하게 되고 스피리트의 특성들을 현현시킬 것이다. 즉, 영속성, 유연성(순응성), 부드러움(온화), 아름다움, 밝음의 정도, 지복, 이와 더불어 육체의 중요한 생리학적인 변화도 있을 수 있다. “변형이라 함은 오로지 물질적으로만 배열된 모든 신체조직이 각각의 다양한 진동을 가지는 집중된 에너지로 대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신체 기관을 대신해서 의식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의식의 에너지 센터들이 생긴다. 더 이상 위장, 심장, 폐, 그리고 혈액의 순환도 없어진다. 이런 모든 것은 사라지고 이러한 기관을 상징하는 진동의 작용이 이를 대신한다.” 육체는 “영혼을 운반하는 보잘것없는 체”가 아니라 “의지에 따른 집중된 에너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의식의 변화는 가장 중요한 요소 즉, 원인이 되며 육체의 변형은 종속적인 요소 즉, 결과가 될 것이다.” (오컬트다이제스트 제3호, p.33~43) |
오~
올해 들어 읽어본 글 중 최상의 글이군요~
가슴이 뻥 둟리는 글입니다^^
피닉스님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