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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환생론(Reincarnation)
한국에서는 환생이라는 말보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이라는 말이 귀에 익은 것으로 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돌고 돈다는 뜻으로서 죽으면 인간이나 다른 생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거치며, 그가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왔을 때 그가 어떤 행실을 했는가에 따라서 구차한 짐승으로도 태어날 수도 있고 다시 인간으로도 태어날 수 있다는 사상이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돌고 도는 과정을 해탈할 때까지 계속한다고 하며, 천주교에서 천당에 갈 때까지 연옥에서 시간을 보내는 대신 불교에서는 거듭 태어나 좀더 나은 인간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환생은 불교처럼 돌고 도는 윤회(輪廻)가 아니라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영어로 인카네이션(incarnation)을 다시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예수가 형체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형체가 있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인카네이트(incarnate)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죽으면 다시 또 사람으로 태어나는 반복되는 인생을 환생 또는 리인카네이션(re-incarnation)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교의 이론을 생각하면, 사람이 죽으면 일단 심판을 받아 천당에 가거나 지옥으로 가게 된다. 또 천주교의 경우는 지옥에 갈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나 천당에 갈 정도가 못 되면 연옥이라는 곳에 가 있다가 때가 되면 천당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교리이다. 그리스도교 초창기에 중요한 교리로서 환생설을 주장하던 종파가 천당과 지옥을 말하는 종파와의 싸움에서 패배했고, 그들은 지하로 들어갔다. 원래 그리스도교 교리로도 불교의 윤회설과 비슷한 환생설을 주장할 만한 근거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애당초 그리스도교의 초창기 발달과정에서, 즉 서기 250년에서 553년 사이에 환생론(Reincarnation)은 간헐적이기는 했지만 대단한 논쟁의 과제로 대두되었다. 환생론의 대표적인 초기의 학자는 오리겐(Origenes, 185?~254? A.D.)이라는 사람으로서 알렉산드리아 신학교의 교장이었으며, 당시 성서(聖書)를 만드는 데 있어서 제일의 권위를 인정받던 사람이었고, 그의 심오한 지식으로 오리겐 학파라는 것이 생겨 그리스도교계에 대단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중요한 교리의 하나가 환생론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553년에 환생론을 주장하는 교파가 이단으로 결정됨에 따라 결국 환생론을 주장했던 종파는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오리겐이 살아 있을 때에는 오히려 환생설이 지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약 50년 후인 서기 300년경에 이에 대한 반대이론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당시 존경받을 만한 중요한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차차 반대이론을 펴내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올림푸스의 메토디우스(Methodius of Olympus),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Eppiphanius of Salamis), 예루살렘의 교왕 테오필루스(Theophilus), 원정경 성경을 라틴어 불가타판으로 번역한 예로메(Jerome), 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Emperor Justinian I) 같은 사람들이었다. 처음 희랍의 주교로 있던 메토디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Peter)와 함께 반(反)오리겐 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저서들은 거의 없어졌지만, 이들이 주로 관심을 두고 마음에 걸려 했던 점은 잉태하기 전에 이미 영혼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과 이미 죽은 사람의 영혼이 마치 낡은 자동차를 버리고 새 자동차를 사서 가지듯 새 육신에 들어가 다시 태어난다는 점이다. 395년에서 403년 사이에는 전 그리스도교 세계가 온통 환생설 논쟁으로 들끓게 되었다. 그리고 130여 년 동안 잠잠하더니 다시 논쟁이 시작되어 심각하게 되자 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는 543년 직접 참여하여 오리겐이 만든 신학원리의 ‘으뜸 원칙론(On First Principles)’에 대한 ‘아홉 가지 저주’ 항목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553년 ‘콘스탄티노플 제2차 공회(the Second Council of Constantinople)’에서 오리겐 교리에 대하여 15종의 저주항목이 채택되어 결국 오리겐의 성서학설은 이단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던 것이다.
오리겐의 신학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체계적으로 반론을 제기한 것이 아니고 개별적인 요점을 들어 공격하였다. 환생론에 대한 공격으로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었던 항목을 보면 반대의 근거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여기 몇 개 소개해 본다.
(1) 환생론은 크리스천에 대한 구원론(救援論)을 약화시킨다.
(2) 환생론은 육신의 부활론과 상치(相馳)된다.
(3) 환생론은 육신과 영혼의 부자연스러운 분리를 조장하게 된다.
(4) 환생론은 그리스도교의 성서를 너무 추상적인 이론으로 다루었다.
(5) 환생론은 전생과 연결시킬 방법이 없다.
이 내용들을 보면 환생론 때문에 기왕에 주장하던 기본적인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설명하기 곤란하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지, 환생론을 거론하는 근본 자체가 교리의 원칙에 입각하여 옳지 않다는 논리가 아니라는 인상을 면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환생론을 말하는 측의 신학적 또는 철학적 근거의 체계가 명확한 데 반하여, 이를 반대하는 측의 이론은 신학이나 철학적인 뒷받침이 없다는 것이며, 다만 곤란하다는 것 외에는 반대의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필경 이러한 이유로 철학적인 이론을 중요시하고 실천적 경험과 이해하는 지식을 위주로 하는 종파인 그노시스(Gnosis)가 환생론을 받아들였고, 교회에 나와서 무조건 따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즉 신도들의 맹종을 원하는 현재의 주류파 그리스도교는 환생론을 배격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그리스도교적 환생론의 근본사상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우선 오리겐 사상의 근원을 생각해 보면, 그는 물론 성서학자로서 당대의 모든 성서들을 집성하여 얻은 자료에서 이론 면에서 미처 취급하지 않은 미흡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를 보충하고 완성시키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중요한 철학적인 뒷받침을 찾고 있었고, 서로 상반되지 않고 합당하게 융화되는 희랍의 플라톤(Plato) 사상을 도입시켰던 것 같다. 플라톤의 사상은 기원전 4세기 그가 죽고 난 다음에도 제자들에 의하여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후일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까지 정벌 갔을 때 알렉산더 대왕을 위시하여 많은 부하들이 인도의 철학에도 심취되었고, 아쇼카(Ashoka) 같은 사람은 불교인이 되어 자기의 친아들과 딸을 선교사로 실론(Ceylon)에 보내기도 하였으며, 다른 선교사들을 마케도니아, 사이프러스, 이집트에까지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희랍인들이 인도로 가서 불교 철학을 배우면서 살던 때가 있었다. 이 때가 기원전 350년경이며, 소위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라는 것이 시작되는 때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가 자랄 때에는 이미 희랍에 인도의 동양사상도 융합되어 있었고, 환생이나 윤회를 말하는 동양사상도 희랍의 철학사상과 잘 융화된 상태였다. 오리겐이 그리스도교 사상을 접하기 전에 그는 이미 희랍의 철학에 능숙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에서 모자라는 점을 플라톤의 사상에서 도입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믿고 있는 것 같다.
오리겐 사상의 기본을 설명하면, 존체(存體-being)란 애초에 사고(思考-thought level)나 관념작용(觀念作用-ideation)을 하는 순수한 의식(意識) 또는 그런 마음만 존재했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나 천사나 하늘에 있는 존체들은 모두 육신(肉身)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존체는 오직 관념으로서만 존재했다. 하나님이란 순수한 지능을 말하며, 순수한 지능을 가진 창조주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플라톤 철학에서 나오는 말이고 성경에는 없는 것이지만, 성경의 다른 이야기와 상치되지는 않기 때문에 오리겐은 이 논리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아진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으면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하나님에 대하여 냉담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나님과 멀어짐으로써 존체는 혼(魂-soul)으로 격하하게 되었고, 이 혼이 애초의 위치에서 일단 떠난 후 계속하여 더욱 멀어져 결국 육신(肉身)을 취해야 하는 경지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장 상위에 존재하는 존체가 정신적이라면, 가장 하위에 속한 위치는 육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결국 인간으로 격하하게 되었다는 이론이다. 오리겐은 이러한 플라톤의 철학사상을 성경 창세기와 융화시키는 작업을 하였다. 그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실제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로 보는 대신 상징적인 이야기로 취급하는 방법으로 합리화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실제로 지구의 어느 구석에서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으로 일어난 일로 취급하였다. 따라서 그는 육신이 없는 영(靈)의 존체상태로 에덴이라는 상징적인 장소에서 있었던 일을 육신이 있는 물질적인 존체상태로 지구의 어느 장소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로 이야기를 만듦으로써 오히려 설명이 어려워지도록 못을 박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오리겐은 인간이 죄를 짓게 된 것은 자발적인 행위였으며 그 결과로 하나님과 어느 정도 멀어지게 되었다는 이론을 그리스도교의 기본관념으로 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리겐은 하나님에게 죄를 짓는 이야기가 소개되었다면, 죄를 사하고 하나님과 다시 가까워지는 이야기도 소개되었어야 마땅하다고 믿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중요한 본질 중에 사랑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이 죄를 사하는 업(嶪)을 행하고, 그 대가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원위치인 영(靈)의 존체로 돌아가 다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어야 옳다고 믿은 것이다. 그 일환으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적절한 시기에 지상에 보낸 것이라 하였다. 성경에서 말하는 말씀이 바로 구세주 그리스도였고, 하나님과 멀어질 수 없는 그리스도는 중재역과 참하나님의 형상을 육신으로 보여 주기 위한 두 가지 목적으로 세상에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감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광명이 각 개인의 인생에 비취게 함으로써 재빨리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며, 육신에 얽매인 상태에서 떠나고, 하나님과 형통(亨通)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의 위력이 너무 거대하여 종국에 가서는 사탄(Satan)을 포함한 모든 존체가 하나님에게 흡수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했기 때문에 육신을 창조해야 했던 일이 언젠가는 끝날 때가 있을 것이며, 그 때에는 하늘에 있는 존체나 인간의 혼이나 모두 순수한 상태가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해지고 더 이상 육신이 필요치 않게 되며, 그 날이 올 때까지는 인간의 육신이 죽은 다음 혼은 다른 육신을 찾아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그리고 물질이란 유명무실해지기 때문에 창조라는 말의 의미가 사라지게 되며,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결별된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었고, 이것이 으뜸 원칙론(On First Principles)의 골자였다. 그리하여 고린도전서 15장 28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라는 말이 실천될 것이라고 설파했다. 또 그는 부활과 승천 대목에 와서 육신은 반드시 썩어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이것이 예수의 육신이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믿는 반대파의 신경을 심하게 건드리게 되었고, 인간이 영적 존체로서 하나님 나라로 환원하게 된다는 오리겐의 사상은 후세기에 들어와서 많은 반발을 사는 과정을 밟게 되었으며, 급기야 이단으로 낙인이 찍혀 이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참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정신세계의 석학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은 학자적인 관점에서 똑같은 이론을 설파하였다. 그래서 캠벨은 예수가 부활하여 승천할 때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는 혼이나 영이 올라갔다는 말은 되어도 육신 자체가 함께 올라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주장하면서 오리겐의 사상에 완전히 동감을 표하였다. 그리고 캠벨은 희랍의 오르페우스(Orpheus) 신화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오르페우스 신은 물고기를 낚는 어부였다고 ‘그리스도교의 물고기 상징’의 대목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잠깐 논제의 범위를 벗어나 오르페우스 신화에 대하여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지나가기로 하자.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와 병행되기 때문에 대단한 흥미가 있으리라 생각되어서이다. 오르페우스는 뮤즈(Muse)의 아들이다. 참고로 뮤즈의 형용사형은 뮤직(music)이다. 이는 물론 음악이란 뜻이다. 왜냐하면 음악의 기초이론을 뮤즈가 만들었기 때문이고, 그 도표를 프랙티카 뮤지카(Practica Musica)라고 부르며, 가포리우스(Gaphorius)가 1493년에 정리하여 그림을 만들었다. 여기에 아홉 개의 음정표와 9 음정표의 사이음이 표시되어 있다. 9의 근(根)은 3이다. 즉 3이란 삼위일체를 상징하고, 오르페우스는 어버이 신 아폴로(Apollo)를 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오르페우스가 살고 있던 트라스(Thrace)라는 곳은 디오니소스(Dyonisos) 신을 섬기는 곳이었고, 디오니소스와 아폴로는 서로 상극이 되는 신이었다. 그리하여 디오니소스의 사주로 그를 섬기던 마에나드(Maenads)라는 야성적인 여인들은 술에 만취되고 광란을 제식으로 삼는 바커스(Bacchus) 잔치에서 오르페우스를 잡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그를 갈기갈기 찢어 강에 버리게 된다. 오르페우스가 십자가에 매달린 그림을 보면 예수의 십자가형 그대로이고, 그 위에 부활하는 상징인 달과 일곱 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이 이야기를 예수 이야기와 비교하면 디오니소스가 지배하는 트라스라는 곳은 로마가 지배하던 팔레스타인에 비유할 수 있고, 로마의 태양신과 야훼 하나님 대신 디오니소스와 아폴로 신을 비교할 수 있으며, 다른 신을 믿기 때문에 오르페우스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훨씬 깊은 삶의 세상과 죽음의 세상 등 복잡한 경지로 들어가게 되지만, 여기서는 이 정도로 이야기를 그친다. 이 오르페우스 신화의 이야기는 물론 예수보다도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며, 호머가 쓴 ‘일리아드(Iliad)’나 ‘오디세이(Odyssey)’ 시대보다도 먼저 생긴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도 이 사상을 깊이 다루었으며 신플라톤(Neo-Platonism) 사상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던 내용이었다. 따라서 그 유명한 단테(Dante Alighieri)의 ‘신곡(神曲)’ 테마는 바로 오르페우스가 말하는 내용이 적용되는 것이다. 또 이 이야기는 헤르메스(Hermes)와 연결되어 이집트와 유대인 사회로 들어오게 되며, 계속하여 그리스도교 안으로 자리잡게 된다. 바티칸의 보르지오(Borgio) 관에 가면 핀투리키오(Pinturicchio)가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다. 그 중 하나는 여신 이시스(Isis)가 의자에 앉아 두 제자 모세와 헤르메스를 앞에 놓고 가르치고 있는 그림이다. 헤르메스는 상징적인 면을 뜻하고, 모세(Moses)는 실질적이고 역사적인 면을 상징하는 제자였다. 그리스도교가 애초 자라면서 약 3백 년 정도 평행적으로 함께 자란 신앙이 있었다. 이것을 헤르메스 신앙이라고 부르고, 그들이 사용하는 성전을 ‘코르푸스 헤르메디쿰(Corpus Hermedicum)’이라고 부른다. 이 계통의 믿음은 위에서 말한 오리겐의 사상과 잘 융합되었고, 지금도 ‘골든 도온(Golden Dawn)’, ‘로시크루시안(장미십자-Rosicrucian)’, ‘알케미스트(alchemist)’, ‘카발리스트(Kabalists)’, ‘헤르메티시스트(Hermeticists)’, ‘프리메이슨(Freemasonry)’ 등 비밀조직의 기본사상으로 되어 있고, 이들에 의하여 지하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여 내려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프리메이슨의 단원은 반드시 천주교나 개신교나 이슬람교나 불교나 힌두교에 관계없이 신(神)을 믿어야 하는 것이 기본조건으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모세의 계열로 발전된 유대교나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는 헤르메스 계열인 골든 도온, 로시크루시안 등과 모두 서로 통하는 신앙이며, 힌두교나 불교도 그노시스와 마찬가지의 종교철학이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리스도 교회는 3세기에서 6세기 사이 환생론을 믿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데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환경에서 대부분의 환생론자들은 묵묵히 교회를 나가면서 남몰래 비밀조직에 가담하게 되어,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지하조직들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 중 교회 안에서 환생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이들은 지금의 보스니아(Bosnia)와 불가리아(Bulgaria) 지역에 많이 남아 있어, 7세기에 ‘폴리시안(Paulicians)’이란 종파와 10세기에 ‘보고밀(Bogomils)’이라는 그들 나름대로의 종파를 만드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환생론을 내세우는 조직은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웠지만, 지하로 들어간 조직들은 오늘도 건강하게 계속되고 있으며, 특히 근래에 와서 ‘신시대 운동’ 또는 ‘뉴에이지(New Age)’ 운동으로 다시 지상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하고 있는 실정이다. 개인적으로 환생론자로 널리 알려진 사람들을 참고로 열거하면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Fran?ois Voltaire),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hopenhauer), 미국의 정치가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독일의 시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Honor? de Balzac), 미국 시인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영국 소설가 헉슬리(Aldous Huxley),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W.B. Yeats), 영국 소설가 키플링(Rudyard Kipling), 독일 시인 실러(Friedrich Schiller), 프랑스 소설가 유고(Victor Hugo), 스위스 심리학자 융(Carl Jung) 등 무수한 예를 들 수 있다. 또 20세기 초에 지하종교철학 활동으로 유명한 러시아 출신 마담 블라바트스키(Madam Helena P. Blavatsky)는 환생론이란 것을 악기에 비유하여 “그리스도교에서 잃어버린 코드”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약 80년 후 가톨릭 내에서 마르틴 루터처럼 정면으로 가톨릭 당국에 도전했던 사람이 있었다. 16세기에 와서 1백 년 동안 가톨릭은 단지 25명밖에 불태워 죽인 사람이 없었는데, 그 중 하나가 지오다노 브루노(Giodano Bruno, 1548~1600)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약관 24세에 도미니칸 수도원의 수사가 되었으며, 16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그는 프랑스의 헨리 3세를 가르친 선생이기도 했고, 툴루스 대학(University of Toulouse)에서 철학강의도 하였으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 주변에 있던 문학 예술인들과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었다. 그의 꿈은 철학을 통하여 가톨릭과 개신교를 다시 합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가톨릭과 신교 양편에서 그를 파문시키는 형을 받을 정도로 오히려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의 이론, 즉 지구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고 다만 무한으로 많은 천체 중의 하나일 뿐이며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상에 동의하였다. 또 4세기 아리우스(Arius)의 신학론을 옳다고 변론하기도 하였고, 환생론을 믿어 인간은 죽은 다음에 다시 다른 육신으로 혼이 들어가 지구에 태어나며, 경우에 따라서는 지구로 돌아오지 않고 다른 천체로 가 그 곳에 사는 인간에 해당되는 육신을 가진 존체로 태어날 수도 있다고 주장한 죄로 결국 로마의 광장에서 불태워져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환생론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환생사상과 함께 인간의 혼은 지구로 돌아오기 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존체가 될 수 있다고도 믿었고, 종교는 성광(聖光-divine light)이 혼을 흡수하여 격상시켜 하나님 자체로 바꾸는 한 방편이라고 믿었으며, 이렇게 되기 위해 인간은 말세가 와서 세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도 개인의 수련에 의하여 아무 때고 가능한 일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불교에서 누구나 해탈하면 언제고 자신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 말과 맞먹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브루노는 구원을 받는 일은 교회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어떻게 믿음을 실천하는가에 달려 있으며, 죽음이란 다만 분리와 재결합의 과정일 뿐이라 하였다.
삼위일체론과 단성론(콥트 동방정교)
우리는 기독교 사상을 생각하면 십자가, 예수, 성모 마리아, 삼위일체 같은 것들이 동시에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여기서의 논제는 삼위일체이다. 즉,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신(聖神)을 하나로 보는 관념이다. 그러면 이 관념은 하나님이나 예수가 그렇다고 말했거나 성경에 그렇게 씌어져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필자가 알기로는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가 처음 삼위일체(Trinitas)란 용어를 사용하였고,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집트의 젊은 '디콘(집사-deacon)'2으로 나중에 성인의 칭호를 얻게 되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초안하여 소위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를 만들어 기초를 굳게 만든 것으로 안다. 그러니까 이러한 교리는 분명 사람이 만든 것이다. 그것도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한결같이 그렇다고 느껴져 만장일치로 채택한 것도 아니다. 역사를 뒤져보면 이 관념 때문에 논쟁이 대단히 심하였고, 하마터면 대부분의 세계 크리스천들이 삼위일체 대신 단성론을 믿을 뻔하였다. 이상하게도 대세가 꼬여 삼위일체를 주장하던 사람들이 요행으로 승리했던 것을 오랜 시간이 흐른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당연시하고, 처음부터 삼위일체라는 관념이 있었던 것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 그렇기 때문에 그리 된 거라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세속적으로 말하면 교묘한 정치놀음 때문이라고도 해석할 수도 있다. 일성론(一聖論) 또는 단성론(單聖論-Monophysitism)이라고 부르는 논리에는 간단하게 예수가 신으로서 인간의 육신에 들어와 태어났다는 이론과 인간으로 태어나서 신의 영(靈)이 들어 왔다는 이론이 있다. 그러나 이 두 이론의 공통점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동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신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즉 야훼 또는 여호와를 믿는 것이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종속이라는 관념이다.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콥트 교회(Coptic Church)와 그리스도 교회 역사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註 2 : 디콘(deacon)이란 직위는 성공회나 천주교에서는 부제(副祭) 또는 보제(補祭)라 부르며, 감리교, 장로교 등 개신교에서는 집사(執事)로 부르고 있다고 사전에 나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초창기에 있었던 이 직책을 현 사회에서의 집사라는 직책과 혼동할 수 있기에 그대로 디콘이라 불렀다. 빌립보서 1장 1절에 보면 “감독들과 집사들”이라는 표현이 있다. 감독은 주교(bishop)를 말하고 집사는 디콘(deacon)을 뜻했다. 여기서 주교라 함은 교왕 또는 교황까지도 포함한 신분이었으며, 당시는 추기경이나 대주교 같은 직책은 없었다. 따라서 디콘은 거의 주교와 동등하다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뜻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콥트(Copt)교
콥트라는 어휘는 이집트라는 뜻이다. 지금은 이집트가 회교도 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시리아에 있는 안티오크(Antioch)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체제를 갖춘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 발생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집트의 그리스도교 역사는 그리스도교 전체의 역사와 거의 동시의 역사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세기에 로마 통치 아래 팔레스타인의 수도였던 시자리아(Caesarea) 교구의 교구장 유세비우스(Eusebius)가 쓴 교회사에 의하면, 사도 마가(Saint Mark)가 서기 41년에서 44년 사이에 이집트에 와서 약 20년 동안 살다 알렉산드리아로 나가 선교를 하고 복음서를 썼다고 나와 있다. 마가에 의하여 처음 전도된 사람은 아니아누스(Anianus)라는 신기료 장수인데, 마가가 순교한 다음 알렉산드리아 지방 주교로 마가의 뒤를 잇게 되었고 그 전통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하니, 정통성을 따지면 어느 종파보다 뒤지지 않겠으나 우리는 콥트교에 대하여 거의 듣는 바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왜 그럴까? 물론 교세가 약한 것이 그 이유이겠지만, 교세가 강해지지 못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야곱’교회(Jacobite Church), ‘아르메니아’교회(Armenian Church)와 함께 삼위일체가 아닌 단성론(單聖論-Monophysitism) 사상의 하나인 유사본질(類似本質-Homoiousion) 중의 한 이론을 애초에 내세웠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완전한 인간이며 그 인간된 육체에 성령이 들어가 두 개의 존체(存體)가 융화되어 하나의 완전한 존체를 형성했다고 믿고 있어 로마를 위주로 한 주류 크리스천 교회에서 이단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 그 원인일 수도 있다. (콥트 교에서는 전혀 단성론을 주장한 일이 없었고 다만 5세기에 오해를 받았던가, 아니면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했던 일에 반하여 종교를 우위로 하여 정치를 흡수하려는 로마 파의 정치적 이유로 단성론 파로 억지 취급 당했다고 말하고 있다.)
여하튼 콥트교가 시작된 곳이 상(上)이집트였고, 그들의 성경책이 파피루스 종이에 콥트어로 기록된 것이 발견되었는데, 서기 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에 의하여 만들어진 희랍어 성경, ‘프로토캐논(Proto-Canon, 原正經)’보다 훨씬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고대 이집트는 태양신을 믿는 곳이기는 했어도 항상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친절을 베푼 곳이었다. 예수가 갓 태어나 아주 어렸을 적에, 즉 헤롯 왕이 예수를 잡아 죽이려 했을 때 예수를 받아 준 곳이 이집트였을 뿐 아니라 파라오는 예수의 가족을 아주 귀하게 대접해 주었다. 그리고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이 죽고 부활하는 이야기라든가 사람이 죽을 때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그리스도교 이전에 이미 익숙한 믿음이었기에 그리스도교가 쉽게 이집트 사회에 흡수되었던 것 같다.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이 당시에는 그리스도교라는 것이 없었고, 다만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던 예수의 제자들이나 그들의 제자들이 각각 예수의 행적이나 말을 따라 그의 사상을 전파하는 무형의 신앙이었으므로 안티오크에서 시작된 크리스천이라는 용어가 아주 희귀하게 사용되고 있는 정도였다. 그리하여 마가복음을 쓴 마가의 선교활동으로 활발해진 이 곳에서 그의 제자들은 2세기에 이미 알렉산드리아에 디다스칼리아(Didascalia)라고 부르는 그리스도교 교리학교(敎理學校)를 역사상 처음으로 창설하였다. 이 때는 아직도 박해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상당한 종교의 자유가 있어 안티오크, 로마 시,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과 함께 크리스천들이 집중되었던 곳이다. 특히 알렉산드리아는 지금의 뉴욕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세계에서 가장 상업이 발달한 중심지였다. 이 교리학교에서 클레멘트(Clement)나 오리겐 같은 성직자와 학자들이 나와 다신주의(多神主義)였던 헬라 철학(Hellenistic philosophy) 학자들과 논쟁을 벌일 수 있었으며, 이 교리학교에서 그리스도교의 신학과 교리가 체계를 잡게 되었다. 디다스칼리아의 창시자이며 초대 학장이었던 판티누스(Pantaenus, ?~190 A.D.)라는 이집트 사람은 이집트의 상형문자 대신 희랍 알파벳으로 표기하도록 하는 운동을 벌인 장본인이기도 하고, 콥트어로 된 성경을 희랍어로 번역하였으며, 학교에서는 희랍어로 강의를 하여 왕조시대의 이집트와 희랍에 의한 헬라(희랍) 문화권과의 교량역할을 톡톡히 한 사람이었다. 그 때는 헬라(희랍)권의 알렉산더 대왕이 로마를 포함하여 이집트를 정복한 지 4백여 년이 지난 후이고, 다시 로마가 득세하여 그 통치하에 있었으나 월등한 헬라 문화의 영향으로 소위 ‘그레코-로마(Greco-Roman) 시대’라고 부르던 때였다. 그러나 헬라 문화나 로마의 문화는 거의 동일한 다신을 믿는 사회였다. 이것은 아폴로, 제우스 등 우리가 희랍 신화나 로마의 신화로 익히 들어 잘 아는 터이다.
디다스칼리아 신학교는 그리스도교가 형성되는 과정 중 신학적인 면에서 완전히 그 기초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재목이 된다. 2대 학장이었던 클레멘트(Clement)는 희랍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을 융화하려는 노력을 했던 학자였고, 그 후임이 된 오리겐(Origenes)은 소위 오리겐 학파를 형성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 자신은 성경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기본이 되었던 6개국 대역 성경, 즉 ‘육조경(Hexapla)’이라는 책을 만들어 희랍어와 히브리어로 된 성서들을 발원하였으며, 신·구약 각 성서를 해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제자로 유명한 이름을 들면 대표적으로 헤라클라스(Heraclas)와 디디무스(Didymus)를 들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디다스칼리아 학교 출신으로 물론 오리겐의 제자이다. 헤라클라스는 성 마가의 지위를 말하는 교황(敎皇)이 된다. 이 교황은 지금 바티칸에서 ‘성 베드로’의 지위를 대표하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보다 훨씬 먼저 만들어진 교황이며, 단성론계 그리스도교의 교황 시조인 것이다. 반면 장님이던 디디무스는 단성론을 주장했던 안티오크 계통인 소위 아리안(Arian)파에 대항하여 가장 격렬하게 투쟁했던 삼위일체론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의 제자 아타나시우스(Saint Athanasius)는 이집트인으로 젊은 시절 알렉산드리아 교구에서 디콘(dean)직을 맡고 있을 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관하였던 325년의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삼위일체론을 근거로 한 교리를 작성한 장본인이었다. 그 후에도 계속하여 종교회의에서 주도권을 갖고 논쟁을 하던 사람들도 거의 디다스칼리아에서 공부했거나, 그 출신의 제자들이었다.
서기 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크리스천의 박해를 끝내고, 그리스도교를 허용한다는 소위 ‘밀란의 칙령(the Edict of Milan)’을 공표하고 나서부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지상으로 나와 비약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문제는 그 동안 지하에서 서로 연락도 별로 없이 너무 광범한 선교활동을 한 때문인지는 몰라도 각양각색의 그리스도교가 존재하고 있었고, 이 중에서도 가장 문제화된 점은 소위 ‘동일본질(同一本質-Homoousion)’과 ‘유사본질(類似本質-Homoiousion)’ 교리의 대립이었다. 이 문제는 하도 심각하여 그냥 놔두었다가는 시민전쟁까지 일어날 염려가 있을 정도였다. 유사본질론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유사할 뿐이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고, 동일본질론의 주장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는 하나이고 본질적으로도 동일하다는 이론이었다.
예수가 사형당하면서 시작된 크리스천들에 대한 박해는 날로 심해져 64년경 네로 황제 때에는 극을 달했었다. 이때 베드로도 처형당했다. 여기서 크리스천에 대한 박해라 하였지만, 그들이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고문을 당하고 심지어 사자에게 물려 죽게 된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천을 잡아가기는 했어도 그 자체가 죄목이 아니라, 명목상의 죄는 잡혀간 크리스천들이 로마 황제와 로마의 신들을 섬기는 제단에 향을 바치지 않는 것이 직접적인 죄목이었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서 잘 아는 네로 황제가 콜로세움 광장에서 사자에게 물려 죽도록 처형을 한 크리스천들은 여기서 말하는 콥트 계통 신자들이 대부분이었었다. 이들은 순교자였다. 이렇게 순교한 사람들을 순교자, 즉 영어로 ‘myrtyrs’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증인’이란 어원에서 나온 것이다. 1세기에는 주로 로마 정부에 의하여 크리스천들이 박해를 받았으나 시간이 흘러 2세기, 3세기로 가면서 점차적으로 경찰이나 군인들보다는 시민들로 구성된 깡패 같은 불량배들에 의해 박해를 받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250~300년경 데시우스(Decius)와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 때에 다시 정부가 앞장 서 박해를 하기 시작하였다. 303년의 대박해(the Great Persecution)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토록 오래 박해를 하였지만 크리스천들의 신앙심을 없애기는커녕 점점 더 강하게 하는 결과가 되었고, 이 때쯤에는 이미 정부 고관과 상류사회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신앙이 만연되어 박해의 명목이 점차 희미해져 무의미하게 되었다. 이때 가장 강력하게 반발했던 지방이 바로 이집트 지역이었다. 로마 시에서는 아직 크리스천들이 지하에서 몰래 모임을 갖고 있을 때, 이집트는 공공연히 교회를 세우고 로마 당국이 지켜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미사를 집전했다. 이들을 모두 잡아가면 그 교회당은 다른 교인들로 다시 메워지곤 하였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매우 잔인하여 284년에 대량학살을 했기 때문에 그 해를 박해 원년으로 하는 콥트 순교달력(Anno Martyri)이 탄생할 정도였으며, 이들은 지금도 이 달력을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이 점점 증가하여 급기야 306년에는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황제 자신이 크리스천이 되어 그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입장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당시의 로마는 네 명의 황제가 분할하여 통치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 중의 하나로 306년에 황제가 되었으며, 처음 한 일이 크리스천에 대한 박해를 금지하도록 한 일이었다. 그 후 점차 그는 세력을 펴 다시 로마를 거의 통일할 정도로 일인자가 되었으며, 그가 다른 황제와 전쟁을 할 때 그의 군사들의 방패에 ‘치-로(Chi-Rho)’의 상징을 페인트로 그리도록 하였다. ‘치-로’는 희랍어로 ‘그리스도’라는 어휘의 첫 글자를 딴 것으로 마치 ‘P’자의 아래쪽 꽁지에 ‘X’자를 덧붙여 쓴 것 같은, 흔히 라바룸(Labarum)이란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하는 표식이다. 이것이 맨 처음 만들어진 십자가 표식이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표식을 내걸고 전쟁을 한 결과 매번 승리를 하자, 그는 자기가 예수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편에서 승리하도록 만들어 준다고 확신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이유로 비록 자기 자신은 임종 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교를 더욱 신장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313년에 전 로마제국에 칙령을 내려 그리스도교를 허용하고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면서 그리스도 교회에 막대한 돈까지 주어 교회를 짓도록 했다. 이로부터 수십 년 동안 사회는 안정과 평화를 갖게 되었고, 이 때부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당당하게 토지와 건물을 살 수 있었으며, 공공연히 교회당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유명한 ‘밀란의 칙령(Edict of Milan)’ 덕분이었다. 그러나 당시 동방(현 중동지방)에서는 아리우스(Arius)가 주창하는 단성론(單聖論-Monophysitism)이 급격하게 퍼져 교회가 온통 분쟁의 도가니에 들어갔다. 항간의 이야기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예수처럼 요단 강에서 세례받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이러한 문제 때문에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는 것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는 임종이 가까웠을 때 병상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여하튼 이러한 상황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우선 교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25년에 니케아(Nicea)에 각 종파의 주교들이 모아 이를 해결하자고 종교회의를 연 것이 바로 유명한 ‘니케아 종교회의’였고, 이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는 교리의 통일과 성경을 만드는 일이었다.
교리문제는 위에서 잠깐 말한 것처럼 크게 나누면 동일본질과 유사본질로 나눌 수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이보다 더욱 복잡했다. 니케아 종교회의는 325년부터 787년의 마지막 회의까지 모두 일곱 차례의 회의를 했는데, 첫째 회의인 니케아에서는 아리우스(Arianism)주의를 추방시켰다. 아리우스주의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동격이거나 동질이 될 수 없고 아버지 하나님에게 종속되며, 아버지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이지만 예수는 아버지가 만든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이론이다. 두 번째 회의인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유티케스주의(Eutychianism)와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유티케스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의 인성(人性)과 신으로서의 신성(神性)이 혼합되어 인간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라는 것이며,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에서 인간의 원죄를 속죄해 줄 능력이 없다는 이론이었다.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예수가 인간과 신의 두 가지 본질을 모두 소유하고 있었으나 이 둘은 서로 별개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신봉한다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일이며, 다만 신성을 가진 예수만 하나님으로 모셔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여기에서는 유티케스주의가 제거되었다. 세 번째 회의인 431년의 에페소(Ephesus) 회의에서는 네스토리우스주의가 다시 논의되었는데, 이번에는 성모 마리아의 본질문제였다. 그들의 주장은 성모 마리아는 인간으로서의 예수 육체를 낳은 어머니이지 하나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하나님을 수태한 이)는 될 수 없다는 것이 그 요점이었다. 여기에서도 알렉산드리아 교왕 키릴로스(Cyril)와 알렉산드리아의 대학자 디오스코루스(Dioscorus)의 활약으로 네스토리우스파를 제거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이들은 분리하여 네스토리안 교회(Nestorian Church)를 따로 차리게 된다. 한편 승승장구하던 알렉산드리아파는 자기네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축(軸)이라고 믿게 되었고, 이 경향은 사촌이었던 알렉산드리아 교왕 키릴로스가 죽자 뒤를 이어 교왕이 된 디오스코루스의 시대에 와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의 마음대로 계속 개가를 올리고 있는 동안에 로마 시를 위시한 다른 지역에서는 점차 알렉산드리아의 독재성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고 있던 것을 별로 개의치 않았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유티케스주의를 몰아낼 때 로마 교황 레오 1세가 교리문제에 대하여 자기의 의견을 피력한 서한을 헤게모니를 장악한 알렉산드리아파들이 회의에서 읽지도 않고 묵살했던 일부터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하여 불만이 많은 반대파들이 데모 등의 방법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일이 자주 생기자, 디오스코루스 교왕은 깡패까지 동원하여 군중을 해산시키고 폭력행위를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마치 군사정권 때 학생들 데모광경을 연상하면 될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449년에 ‘에페소 강도 교회회의(Robber Synod of Ephesus)’가 열리게 되었다. 아직 알렉산드리아파가 원하는 교리가 완전히 그리스도교 안에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여기서 알렉산드리아 교왕 디오스코루스는 예수는 인간으로서의 본질 하나만 갖고 있었으며, 성령이 그의 육신에 강림한 후에야 구세주로서 두 가지의 본질을 갖게 되었기에, 성령의 본질은 말씀이신 하나님 자체에게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이론을 회의에서 통과시키려 하였다. 물론 이것은 단성론자의 이론이다.
449년 에페소 회의에서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에 의해 파문당했던 유티케스는 약 3백 명의 군인과 승려를 데리고 와서 그때 단상을 차지하고 있던 에페소의 주교 스테펜에게 황제의 적이라고 외치며 완력으로 회의장을 점령하였다. 회의의 의장자리를 맡고 있던 디오스코루스는 유티케스에게 변호의 기회를 준다고 단상을 맡기고, 디오스코루스파와 함께 다만 지난번 회의기록만 읽는 것으로 회의를 끝냈다. 그리고는 반대파에게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고 회의장에 참석한 127명의 주교들에게 종이를 돌려 강압적으로 서명토록 하여 디오스코루스의 유사본질인 단성론 교리안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협박에 의하여 서명은 했지만 그 중 중요한 몇 사람들은 로마 교황에게 탄원을 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이 편지들을 전달하는 사람들 역시 디오스코루스 편이어서 편지가 전달되지 않은 것이 나중에 발견되었다. 유티케스는 먼저 파문되긴 했지만 디오스코루스와 함께 유사본질론을 주장하기는 마찬가지였고, 이들은 삼위일체론의 근거가 되는 동일본질론파에 대한 일종의 공동전선을 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알렉산드리아파들이 독점적으로 종교회의를 진행하는 일은 동로마제국인 비잔틴(Byzantium)제국에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황제가 몇 번 바뀌면서 450년에는 마시안(Marcian)이 황제가 되었다. 그는 디오스코루스에게 에베소에서 있었던 종교회의에서 정당치 않은 일이 일어났으니 그에 대한 상황설명을 요구하고, 칼케돈(Chalcedon) 회의에서 다시 논의하자는 편지를 보냈다. 이 회의는 451년에 열렸다. 이번에는 서부 로마에서 절대다수의 주교들을 소집하여 보내 수적으로 압도하도록 만들었으며, 군대까지 동원하여 디오스코루스를 가택연금 해 버렸고, 회의가 끝난 다음에는 흑해 남쪽에 있는 강그라(Gangra)라는 작은 섬에 귀양까지 보내 버렸다. 당연히 지금까지 결정되었던 모든 사항이 몽땅 뒤집어지게 되어 우리가 지금 당연시하는 삼위일체 교리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성 마가(St. Mark)의 후계들인 알렉산드리아 계통 크리스천들은 크리스텐돔에서 헤게모니를 잃게 되었으며, 이들은 다시 둘로 갈라져 한 쪽은 비잔틴제국에 충성을 하여 멜키데(Melkite)파라 불리고, 다른 한 쪽은 자기네들이 주장해 온 교리를 고수하여 지금도 이집트, 에티오피아 등지에 있는 콥트(Copt)파 크리스천이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이집트에서는 조직적으로 이들 크리스천들을 박해하고 살인을 해도 모두들 외면을 하고 있는 것이 실상이다. 여기서 참고로 말해 두자면 현재 이집트에 가면 콥트교가 또 갈라져서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콥트와 단성론을 주장하는 콥트 두 가지가 있다.
어쨌든 이러한 파란만장한 경로를 통하여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탄생하였다. 그러면 삼위일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말하기는 간단하지만 이해하기는 그리 간단한 내용이 아닌 것 같다. 필자가 알고 있는 삼위일체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우선 성경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이나 어휘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나 성부, 성자, 성신, 다시 말해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와 그리고 성스러운 신령 세 개체(位)는 세 명의 신령이 아니고 하나의 하나님인 성스러운 신령 속에 있는 세 명의 개체(person)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 명은 별도로 존재하면서 항상 함께 존재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과 동일한 같은 개체가 아니고, 아들이란 개체는 성스러운 신령과 동일한 같은 개체가 아니며, 성스러운 신령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같은 개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 개의 개체는 같지만 같지 않고, 같지 않지만 같다. 만일 이 세 개체 중에 한 개체라도 제거하면 하나님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고, 시편 90장 2절에 표현한 바와 같이 “영원에서 영원까지” 삼위일체는 항상 존재해 왔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장 1절과 14절에 예수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하나님이 육신이 되었다 하여 예수가 하나님이라 하였고, 빌립보서 1장 2절에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님이라 하였으며, 사도행전 5장 3절과 4절에 성령, 즉 성신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하나뿐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을 하니 아버지와 아들은 다른 개체라는 것이 증명되며, 사도행전 13장 2절에 성령이 말을 하니 성령도 별개의 개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 개체 속에 존재하는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단(異端)과 그노시스(Gnosis)
서기 66년에서 74년까지의 1차 유대인 봉기는 마사다의 비참한 전투로 일단 끝난다. 그러나 60여 년 후인 132년에서 135년 사이에 유대인들은 다시 봉기를 한다. 이것을 2차 봉기라고 부르자. 그 결과 유대인들은 아예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여 소아시아(Asia Minor) 지방을 비롯하여 희랍, 로마, 고올(Gaul: 프랑스), 영국, 북아프리카에까지 흩어지게 된다. 그리고 예루살렘 자체는 로마인들의 도시로 변하게 되며, 1차 봉기 때부터 예루살렘 지방에서 유대인과 크리스천에 관한 사건은 모두 함구령이 내려져 그 후 약 2백 년 동안 기록이 없게 된다. 여하튼 이렇게 세계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 중에는 ‘에비오나이트(Ebionites:에비온파)’라고 불리는 한 갈래의 크리스천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예수를 인간 선지자로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나름대로 교리를 만들어 그 교세가 점점 커졌고, 그리스도교 안에서 하나의 큰 세력을 차지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도교 안에서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교리학교 디다스칼리아(Didascalia) 대학의 2대 학장이었던 클레멘트(Clement)의 화합노력에도 불구하고 성(聖) 이레니우스(St. Irenaeus)는 이들을 이단(異端)으로 매김하여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성 이레니우스는 2세기 전반에 고올(Gaul), 즉 리옹(Bishop of Lyon)의 교역장이었으며, 그리스도교 안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그의 가장 큰 업적이 바로 그노시스 종파를 이단으로 만든 일이었다. 이러한 박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종파는 계속 인기를 얻어 교세가 증가일로에 있었으며, 에비오나이트를 위시한 유대인들은 예수 당시의 생생한 경험담을 통한 많은 지식이 직접 여러 형태로 전해 내려오는 것을 토대로 했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내용도 예수 시대에 일어났던 전설이나 전해 오는 이야기들 중에서 원하는 내용만 추려, 특허를 내듯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관계자들이 모여 합의를 본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주류파의 속마음은 예수의 메시지를 중심으로 교리를 만드는 것이었고, 그러한 위치를 공고히 해야 하는 토대가 중요했기에, 그와 상반되는 그노시스의 교리는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주류파들은 자기네들이 주장하는 바와 조금이라도 다를 때에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없애 버렸기 때문에 이단들이 주장하는 교리를 쉽게 들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단이 믿는 바를 대중에게 알려 주면 자기네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리기 때문이며, 그나마 알려진 약간의 이야기는 대부분 조작되고 둔갑되어 누가 보아도 이치에 맞지 않는 이론으로 만들어 선전용으로 소개되는 정도였다. 여하튼 예수는 어떤 사람에게는 완전한 하나님으로 소개되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인간이 신이 된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또 어떤 사람에게는 마호메트나 부처님처럼 인간으로서 선지자이고 예언자가 된 것으로 비쳤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인간의 주관적 관점의 차이에서부터 종교가 갈라지고 종파가 생겨 서로 싸움을 하고 살육하는 피의 역사를 창조하게 된다.
이단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이단을 몇 개 소개해 보자.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입신한 다음 136년에서 165년까지 로마 시에서 활약한 발렌티누스(Valentinus)란 사람이 있었다. 발렌티누스는 당시 대단히 영향력 있었던 사람으로 문하에 프톨레마이오스(Ptolemy) 같은 학자를 배출한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의 ‘숨겨진 가르침(Secret Teachings)’을 엮은 자료를 갖고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로마 당국에 바치기를 거부하고, 개인의 그노시스(Gnosis), 즉 그의 비밀지식(秘密知識)은 이 세상의 어떤 권위보다 으뜸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당연히 그의 이런 주장이 이레니우스의 분통을 터뜨리게 한 것은 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또 이단으로 유명한 사람으로 마시옹(Marcion)을 들 수 있다. 이 사람은 주교(主敎)로서 당시 선박왕으로 불리는 대부호였으며, 140년경 로마로 이주하였으나 4년 후 파문을 당한 사람이다. 그는 율법과 사랑을 완전히 별개의 관념으로 여겼으며, 이를 성경에 반영시키려고 노력했다. 당연히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마시옹파(Marcionites)’라 하여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마시옹은 현재 우리가 아는 신약성경을 어떤 책으로 구성할 것인지 그 명단을 만든 사람이다. 또 다른 유명한 이단으로 바실리데스(Basilides)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히브리어 문서와 크리스천 복음서에 대단히 박식했던 성서학자로 알렉산드리아에서 120년에서 130년 사이에 복음서에 대한 책만도 최소 25권 이상을 썼다고 한다. 그는 이집트와 희랍 철학에 깊이 심취되어 있었으며, 그가 정통파 크리스천들의 심기를 가장 건드린 것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사기였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여기 소개한 이단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두각을 나타냈던 종파들의 대표적인 소개일 뿐이다.
이단이 가장 심했던 지역으로는 단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첫째로 꼽아야 한다.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로마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고 가장 인텔리가 많은 문화도시였으며 풍성한 경제력과 함께 다양한 코스모폴리탄 도시였다. 또 이 곳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있었던 두 차례에 걸친 유대인들의 반란으로 고향을 떠난 난민들이 정착하기 쉬웠고, 그들의 신앙에 관계없이 환영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곳에는 여러 가지의 신앙이 자리잡고 있었고 포교의 중심이 되는 것이 거의 전통처럼 될 정도였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여러 종류의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곳에 모이게 되었으며, 비교적 좁은 지역에서 서로 비교·경쟁하면서 각광을 받고 커지게 된 것이 그리스도교 정교회파 다음으로 그노시스였다. 이들은 이단으로 박해를 받아 지하에서 활동하며 연명을 해 왔으며, 1945년에 그들이 사용하던 복음서가 발견되었지만 주류 그리스도교 사회의 관념에 상반되는 점들이 있어 그 주류파의 위세에 눌려 별로 내놓고 이야기를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행히 종교의 자유라는 법적 보호가 있어 옛날처럼 이단이라고 태워 죽이지 않기 때문에 진실을 찾으려는 사람들이나 그노시스 방식의 신앙에 이미 관심을 갖고 심취해 있는 사람들 사이에 그 내용이 교환되고 읽혀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노시스
‘낙 하마디’의 문서는 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지만 ‘도마의 복음서’를 중히 여겼고, 이를 기본으로 한 신앙이 꽃을 피운 것은 13세기 초까지 지금의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사이에 있는 ‘랑그도크(Languedoc)’라는 지방에서였다. 지금도 랑그도크라는 프랑스의 주(州)가 있지만, 그 당시는 랑그도크가 하나의 독립국으로서 지금의 랑그도크 주보다 훨씬 큰 지역이었고, 이 곳은 문화·경제와 더불어 그노시스 종교의 중심지로 이미 커졌을 뿐 아니라 전 유럽으로 퍼지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바티칸의 교황은 십자군을 보내 그노시스주의를 믿는 카타르를 멸종시키는 대학살을 자행했던 것이다. 당시 랑그도크의 수도를 알비(Albi)라 불렀고, 알비 사람들을 알비젠시안(Albigensians)이라고 불러, 여기에 보낸 십자군 원정을 ‘알비젠시안 십자군(Albigensian Crusade)’이라고 이름을 짓게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사람들을 카타르(Cathars), 카타레(Cathares) 또는 카타리(Catharis)라고도 불렀는데 결국 모두 같은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근원을 따지자면 앞의 ‘성경 속의 유대인 부족’이란 장에서 잠깐 설명했듯이 에세네 부족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질로트의 열성분자 또는 극렬분자들의 조직인 아사신(Assassin)은 여러 세기 후에 크리스천이라기보다는 모슬렘 쪽으로 흡수된 점으로 보아 그 근원이 같음을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 계열이 사도 도마(Thomas)를 중심으로 그리스도교 쪽에 남아 그들의 그리스도교적 신관이라 할 만한 교리를 다듬어 성숙해졌을 때, 먼저 크리스천 세계의 주도권을 차지한 로마 가톨릭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멸종되었다는 말을 이미 하였다. 역시 도마의 본격적인 가르침은 마가와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이들의 교리는 이미 70년대에 원고장인 팔레스타인에서 성숙되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것은 예수와 그의 가족이 있었다는 풍문이 있을 정도로 예수와 가까웠던 질로트 사람들이 마사다 전투에서 전원 자결하기 직전 지도자 엘르아살(Eleazar)이 한 연설에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 우리가 아는 성경에 담겨진 내용보다는 카타르의 교리가 훨씬 더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성경에서 예수와 그리 관계가 좋지 못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만 소개되었고, 예수와 가까웠던 에세네 부족이 삭제된 이유에 대해 앞뒤가 맞는 상황들이 추론 가능해진다. 즉 예수의 가르침, 그리스도 신앙을 유대인이 아닌 로마인을 상대로 포교하기 위하여, 예수를 모함하여 죽도록 만든 책임자를 로마인 대신 미운 사두개인과 이들을 따른 바리새인들에게 뒤집어씌웠다는 가설이 이해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소위 정통 그리스도교는 로마인들을 위한 안성맞춤식으로 교리를 이리저리 마름질하였고, 정작 예수의 사상을 그대로 유지한 사람들은 많은 호응을 얻게 되었으나 결국 로마 교황의 철퇴를 맞고 이단이 되어 전멸하였다고 추리할 수 있다.
여하튼 이들의 믿음을 요약하여 살펴보면, 아마도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윤회설(輪廻設)과 여성적 신성(女性的 神性)을 인정하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카타르의 성직자들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여기서 성직자란 천주교나 개신교에서 신부나 목사처럼 성품을 받거나 흔히 말하는 식으로 주님의 부름에 의하여 목자의 임무를 받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가 된 존재가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 회중에서처럼 모임에서 존경받는 원로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주교의 조직을 인정하지 않았고, 교회에 나감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사상을 거부하고, 대신 개인적으로 얻는 천기(天機)의 경험과 지식에 의한 구원을 가장 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천기의 지식을 그노시스(Gnosis)라 불렀다. 그노시스라는 말은 희랍어로 지식이란 뜻이다. 그래서 이들은 교리(敎理)나 신경(信經)보다 지식(知識)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으며, 때문에 각자 수련을 쌓아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는 것이 신앙의 골자였다. 이 사람들은 다른 크리스천과 마찬가지로 선과 악, 영과 육신, 높음과 낮음의 대립을 믿는 이원론자(二元論者)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이원론은 정통 크리스천들이 생각하는 이원론에 비하여 훨씬 깊은 사고(思考)를 하고 있었다. 즉, 인간이란 영(靈)들이 전쟁 때 사용하는 검(劍)에 해당하며, 아무도 그 손을 보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싸움은 빛과 어둠, 영과 물질, 선과 악 사이의 영원히 화합될 수 없는 두 원칙이 창조 전체의 과정에서 행해지는 전쟁인 것이다. 정통 그리스도교의 이론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있고 그와 적대관계에 있는 사탄이 있으며 그 사탄은 종국적으로 하나님에 비하여 열등하다고 하는 데 비하여, 카타르는 대등한 두 개의 신이 있다고 믿는다. 즉, 선과 악 중에서 선(善)의 신은 육신이 없는 형체로서 순수한 영(靈)의 실체이고 근본이며 물질에 더렵혀지지 않은 신이다. 그는 사랑(love)의 신이고, 그 사랑이란 권세와 공존할 수 없다. 반면에 물질을 창조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권세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 만물을 의미하는 물질의 창조는 본질적으로 악(惡)이다. 따라서 모든 물질을 악으로 보며, 그렇기 때문에 우주 자체가 욕심으로 채워진 신(神), 즉 악의 신이 만든 작품인 것이고, 이 신을 카타르는 ‘렉스 문디(Rex Mundi)’, 즉 ‘세상의 왕’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 정통 그리스도교에서는 윤리적 이원론(Ethical dualism)을 가르치고 있다. 즉, 악(惡)은 그 근원이 사탄에게 있다. 하지만 인간 자체, 즉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악이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적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에 반하여 카타르는 우주의 시각으로 보는 이원론(Cosmological dualism)을 말한다. 즉, 실존 자체가 완전히 이원론에 입각한 것이다. 이것이 카타르의 기본자세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카타르 종파에 따라 다양한 차이가 있다. 어떤 종파는 지구에 인간이 태어나는 목적이 물질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고, 영구히 연결된 권세의 본질과 단절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며, 이러한 인생의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비로소 사랑의 본질과 결합되어 융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카타르 종파는 인생의 목적이 물질을 되찾아 그 물질을 영적화하여 변환시키는 일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중요한 점은 카타르에게는 정해진 교의(敎義-dogma)나 교리(敎理-doctrine)나 신학(神學-theology)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다만 엉성하게 주어진 방향과 도의적으로 지켜야 할 일반적인 태도 정도를 서로 가르치며 지킬 뿐 신앙생활하는 방법이나 교리의 해설은 완전히 각자의 생각에 맡긴다. 이러한 점은 위치(witch)를 말하는 위카(Wicca) 믿음이나 이와 대등한 우리나라의 무속(巫俗)과 큰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본다. 무속의 경우는 한국에 살고 있는 분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위카의 경우는 카타르와 마찬가지로 서로 원칙에서는 스칸디나비아에 가든, 영국에 가든, 프랑스에 가든, 미국에 가든지 간에 모두 공통점만 갖고 있을 정도이며, 실행 면에서는 원칙은 역시 서로 동일하지만 자세한 내용에서 많은 차이를 갖고 있으며, 조직 없는 조직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조직은 열 세 명이 한 조로 한 단위를 만들고 그 안에 지도자 한 명이 포함된다. 이를 ‘코븐(Coven)’이라고 부르며, 만일 열 세 명이 넘을 때에는 분가를 하게 된다. 이 숫자는 예수와 열 두 제자와도 일치되는 숫자이다. 그리고 다른 코븐과 유기적인 연락도 없다. 근래에 와서 인터넷 따위의 통신수단이 발달됨으로써 상호간 친목의 수단으로 연락할 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자기 이론과 방식이 비슷한 코븐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여행을 하기도 하며, 몇 사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새로운 코븐을 차리기도 한다. 필경 카타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물질의 창조원칙론에서도 로마 가톨릭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단적인 면이 있었다. 왜냐하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나니” 하는 그 말씀의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악의 신이며 탐욕으로 가득 찬 약탈의 하나님인데, 이러한 하나님을 대표하여 인간 세상에 나타난 것이 예수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마땅히 죽었어야 옳다고 믿는 것이 카타르의 이론이다. 또 카타르는 물질이란 본질적으로 악이기 때문에, 예수가 물질인 육신으로 태어났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인 신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었다. 어떤 카타르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신이라면 순수한 영(靈)의 존재로서 형체가 없는 허상(虛像)이었어야 하며, 그렇다면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극단적인 견해를 갖는 사람도 있었다. 여하튼 일반적으로 카타르는 예수가 다른 여느 사람과 전혀 차이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사랑의 신(神)에 대한 말씀을 가르친 대변자에 불과하였고, 인간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고 믿었다. 그러기에 예수와 십자가 이야기는 하나도 신비롭지도 않고, 성스럽거나 기적적이지도 않다는 판단이었다.
또 카타르는 십자가 자체와 십자가 순교의 의미를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여기는 점에 대해서 완전히 부정적인 태도였다. 예수의 십자가 순교는 그리스도적 교리와 상관 없이 일어난 우연발생적 일이라는 해석이 그 하나이고, 예수라는 예언자가 죽임을 당해야 했던 환경이 극악스러웠다고 해서 믿음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해석이 또 다른 하나의 이유이며, 또 로마에서 너무나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생긴 일종의 반감도 작용했을 법했다. 그리고 십자가에 대해서는, 십자가를 전쟁터의 군인들이 사용하고 예수의 십자가 순교를 의미하는 데 사용한다는 것은 물질세계의 주(主)인 ‘렉스 문디(Rex Mundi)’를 상징하는 표상(表象)이며, 진정한 속죄를 통해 구원을 받는 신학이론(神學理論)에 상반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예수가 영생(永生)의 존재였다면 사랑(Love)의 신 ‘아모르(Amor)’의 대변자였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 아모르(Amor) 신에게 욕을 보이거나 변절을 하거나 누를 끼쳐 권세로 변형시킬 때 그 이름은 로마(Roma)가 된다고 하였다. 즉, 아모르를 거꾸로 읽으면 로마가 된다. 그리하여 카타르가 로마의 호화롭고 웅장한 교회를 볼 때 그들은 그것이 바로 ‘렉스 문디’ 세상의 권위를 대표한다고 만천하에 명백하게 증언하여 과시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카타르는 십자가를 섬기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세례나 성찬식 같은 성사(聖事)를 거절했다.
카타르는 이렇게 미묘하고 복잡하며 어떤 면에서는 철학적인 신학을 갈구하면서도, 그들의 일반적인 행위는 유연하고 다른 사람들의 해석을 이해하면서 함께 토론하는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로마 교황 치하(治下)에서 사람들이 교회의 신경(信經)에 집착하는 광신도가 되어 감정에 치우친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것과 크게 대조되었다. 중세기 로마 교황 치하의 가톨릭 신도들의 광신적 태도는 십자군의 행실에서 잘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성숙치 못한 사람들은 카타르들이 모이는 장소를 깊은 지식을 갖고 있는 철학자라고도 할 수 있고 동양식으로 말하면 도사(道士)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자기의 신관(神觀)을 토론하는 매우 격이 높은 인텔리들의 집합장소로 여겼으므로, 유명한 도사와 같은 유식한 사람들이 가는 모임장소에 참여하여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것이 신앙을 키우는 방법이었다. 마치 신앙강좌에 참여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카타르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들이 주장하는 교리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카타르의 자유롭고 계급주의가 아닌 신앙생활방식에 호감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돈 좀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열심히 바치는 십일조가 알지도 못하는 원거리의 바티칸에 제공되며 그 돈이 호화스러운 궁전 같은 교회에 의해 낭비된다는 생각으로 정통 교회에 등을 돌린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수도생활을 택하게 되었고, 실제 전 유럽의 수도사들 중 약 30%가 랑그도크 출신이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정통 가톨릭의 엄격한 형식적 제식(祭式)과 율법을 어기는 자들에 대한 비난과 협박에 지쳐 일종의 피난처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카타르는 심오한 신학적 이론을 폈는가 하면, 이들은 매우 실질적인 생활을 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인간이 자식을 번식시킨다는 일은 사랑의 본질에 의한 것이 아니라 ‘렉스 문디’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좋지 않은 일로 여겼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금욕생활을 권장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 중에는 ‘콘솔라멘툼(Consolamentum)’이라 하여 금욕생활을 하나의 성사(聖事)로 여긴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성직자들 외에 보통 남자나 여자들은 가정을 차리고 가정생활을 다 끝낸 후, 대개 임종이 가까웠을 때 콘솔라멘툼, 즉 금욕을 선언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죽을 때가 다 되어서 금욕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고 이는 형식적 치레였기에 실질적인 사람들이었다고 좋게 보는 것이다. 그런데 자식의 번식을 나쁘게 보기에 성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들은 그 해결책으로 피임과 낙태방법을 사용하였다. 로마 가톨릭이 이들을 이단으로 판정을 내렸을 때 이 사람들이 항문성교 등 비자연적인 성교행위를 하는 죄악을 저지른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카타르 자신들이 동성애를 철저하게 터부(taboo)시 했던 기록밖에 없어, 동성애자들이 주로 행하는 항문성교는 가톨릭이 카타르를 모함하기 위한 선전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만약 낙태나 피임을 비자연적인 성교행위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그런대로 납득은 할 수 있는 일이다. 낙태에 관해서는 지금도 바티칸이 허락하지 않는 사항임을 감안할 때 중세기인 그 당시 얼마나 이를 터부시 했을까 하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카타르를 외적으로 보면 그들은 검소한 생활을 고매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그들은 검소한 생활을 극단적으로 마치 경쟁하듯 하였으며, 교회를 경멸하여 야외에서 모임을 갖거나 집이나 동네 공회당이나 심지어는 외양간 같은 창고에서 모였다. 또 그들은 참선(參禪)을 많이 하였고 약간의 생선을 먹는 정도의 채식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수도사들이 원거리 여행을 할 때에는 항상 두 사람 이상이 짝을 지어 다녔다. 이런 것을 보고 외부 사람들이 카타르는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소문을 퍼뜨렸을 가능성도 있고, 이런 이야기를 듣고 바티칸에서 그렇게 정의를 내린 것일 수도 있다. 여하튼 이 사람들은 13세기 전반에 있었던 로마 교황의 대토벌 십자군 작전으로 거의 전멸되다시피 하였고, 심산의 동굴 같은 곳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한 소수의 몇 사람에 의하여 후세에 그들의 사상이 전해졌으며, 이러한 지하의 어려운 환경에서 계속되었던 신앙이니 만치 여러 가지 형태로 종파가 나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현재 알려진 이들의 종파를 몇 개 열거하면 ‘발덴시안(Waldensians)’, ‘후사이트(Hussites)’, ‘애더마이트(Adamites)’, ‘자유정신의 형제들(Brethren of the Free Spirit)’, ‘아나밥티스트(Anabaptists)’, ‘카미사드(Camisards)’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프리메이슨(Freemason)과 깊은 연관을 갖게 되고, 신비의 신앙으로 그림자 뒤에서 존재해 오고 있다. (66%)
에세네의 사상
한국에서는 환생이라는 말보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이라는 말이 귀에 익은 것으로 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돌고 돈다는 뜻으로서 죽으면 인간이나 다른 생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거치며, 그가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왔을 때 그가 어떤 행실을 했는가에 따라서 구차한 짐승으로도 태어날 수도 있고 다시 인간으로도 태어날 수 있다는 사상이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돌고 도는 과정을 해탈할 때까지 계속한다고 하며, 천주교에서 천당에 갈 때까지 연옥에서 시간을 보내는 대신 불교에서는 거듭 태어나 좀더 나은 인간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환생은 불교처럼 돌고 도는 윤회(輪廻)가 아니라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영어로 인카네이션(incarnation)을 다시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예수가 형체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형체가 있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인카네이트(incarnate)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죽으면 다시 또 사람으로 태어나는 반복되는 인생을 환생 또는 리인카네이션(re-incarnation)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교의 이론을 생각하면, 사람이 죽으면 일단 심판을 받아 천당에 가거나 지옥으로 가게 된다. 또 천주교의 경우는 지옥에 갈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나 천당에 갈 정도가 못 되면 연옥이라는 곳에 가 있다가 때가 되면 천당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교리이다. 그리스도교 초창기에 중요한 교리로서 환생설을 주장하던 종파가 천당과 지옥을 말하는 종파와의 싸움에서 패배했고, 그들은 지하로 들어갔다. 원래 그리스도교 교리로도 불교의 윤회설과 비슷한 환생설을 주장할 만한 근거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애당초 그리스도교의 초창기 발달과정에서, 즉 서기 250년에서 553년 사이에 환생론(Reincarnation)은 간헐적이기는 했지만 대단한 논쟁의 과제로 대두되었다. 환생론의 대표적인 초기의 학자는 오리겐(Origenes, 185?~254? A.D.)이라는 사람으로서 알렉산드리아 신학교의 교장이었으며, 당시 성서(聖書)를 만드는 데 있어서 제일의 권위를 인정받던 사람이었고, 그의 심오한 지식으로 오리겐 학파라는 것이 생겨 그리스도교계에 대단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중요한 교리의 하나가 환생론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553년에 환생론을 주장하는 교파가 이단으로 결정됨에 따라 결국 환생론을 주장했던 종파는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오리겐이 살아 있을 때에는 오히려 환생설이 지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약 50년 후인 서기 300년경에 이에 대한 반대이론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당시 존경받을 만한 중요한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차차 반대이론을 펴내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올림푸스의 메토디우스(Methodius of Olympus),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Eppiphanius of Salamis), 예루살렘의 교왕 테오필루스(Theophilus), 원정경 성경을 라틴어 불가타판으로 번역한 예로메(Jerome), 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Emperor Justinian I) 같은 사람들이었다. 처음 희랍의 주교로 있던 메토디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Peter)와 함께 반(反)오리겐 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저서들은 거의 없어졌지만, 이들이 주로 관심을 두고 마음에 걸려 했던 점은 잉태하기 전에 이미 영혼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과 이미 죽은 사람의 영혼이 마치 낡은 자동차를 버리고 새 자동차를 사서 가지듯 새 육신에 들어가 다시 태어난다는 점이다. 395년에서 403년 사이에는 전 그리스도교 세계가 온통 환생설 논쟁으로 들끓게 되었다. 그리고 130여 년 동안 잠잠하더니 다시 논쟁이 시작되어 심각하게 되자 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는 543년 직접 참여하여 오리겐이 만든 신학원리의 ‘으뜸 원칙론(On First Principles)’에 대한 ‘아홉 가지 저주’ 항목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553년 ‘콘스탄티노플 제2차 공회(the Second Council of Constantinople)’에서 오리겐 교리에 대하여 15종의 저주항목이 채택되어 결국 오리겐의 성서학설은 이단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던 것이다.
오리겐의 신학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체계적으로 반론을 제기한 것이 아니고 개별적인 요점을 들어 공격하였다. 환생론에 대한 공격으로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었던 항목을 보면 반대의 근거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여기 몇 개 소개해 본다.
(1) 환생론은 크리스천에 대한 구원론(救援論)을 약화시킨다.
(2) 환생론은 육신의 부활론과 상치(相馳)된다.
(3) 환생론은 육신과 영혼의 부자연스러운 분리를 조장하게 된다.
(4) 환생론은 그리스도교의 성서를 너무 추상적인 이론으로 다루었다.
(5) 환생론은 전생과 연결시킬 방법이 없다.
이 내용들을 보면 환생론 때문에 기왕에 주장하던 기본적인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설명하기 곤란하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지, 환생론을 거론하는 근본 자체가 교리의 원칙에 입각하여 옳지 않다는 논리가 아니라는 인상을 면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환생론을 말하는 측의 신학적 또는 철학적 근거의 체계가 명확한 데 반하여, 이를 반대하는 측의 이론은 신학이나 철학적인 뒷받침이 없다는 것이며, 다만 곤란하다는 것 외에는 반대의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필경 이러한 이유로 철학적인 이론을 중요시하고 실천적 경험과 이해하는 지식을 위주로 하는 종파인 그노시스(Gnosis)가 환생론을 받아들였고, 교회에 나와서 무조건 따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즉 신도들의 맹종을 원하는 현재의 주류파 그리스도교는 환생론을 배격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그리스도교적 환생론의 근본사상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우선 오리겐 사상의 근원을 생각해 보면, 그는 물론 성서학자로서 당대의 모든 성서들을 집성하여 얻은 자료에서 이론 면에서 미처 취급하지 않은 미흡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를 보충하고 완성시키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중요한 철학적인 뒷받침을 찾고 있었고, 서로 상반되지 않고 합당하게 융화되는 희랍의 플라톤(Plato) 사상을 도입시켰던 것 같다. 플라톤의 사상은 기원전 4세기 그가 죽고 난 다음에도 제자들에 의하여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후일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까지 정벌 갔을 때 알렉산더 대왕을 위시하여 많은 부하들이 인도의 철학에도 심취되었고, 아쇼카(Ashoka) 같은 사람은 불교인이 되어 자기의 친아들과 딸을 선교사로 실론(Ceylon)에 보내기도 하였으며, 다른 선교사들을 마케도니아, 사이프러스, 이집트에까지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희랍인들이 인도로 가서 불교 철학을 배우면서 살던 때가 있었다. 이 때가 기원전 350년경이며, 소위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라는 것이 시작되는 때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가 자랄 때에는 이미 희랍에 인도의 동양사상도 융합되어 있었고, 환생이나 윤회를 말하는 동양사상도 희랍의 철학사상과 잘 융화된 상태였다. 오리겐이 그리스도교 사상을 접하기 전에 그는 이미 희랍의 철학에 능숙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에서 모자라는 점을 플라톤의 사상에서 도입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믿고 있는 것 같다.
오리겐 사상의 기본을 설명하면, 존체(存體-being)란 애초에 사고(思考-thought level)나 관념작용(觀念作用-ideation)을 하는 순수한 의식(意識) 또는 그런 마음만 존재했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나 천사나 하늘에 있는 존체들은 모두 육신(肉身)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존체는 오직 관념으로서만 존재했다. 하나님이란 순수한 지능을 말하며, 순수한 지능을 가진 창조주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플라톤 철학에서 나오는 말이고 성경에는 없는 것이지만, 성경의 다른 이야기와 상치되지는 않기 때문에 오리겐은 이 논리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아진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으면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하나님에 대하여 냉담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나님과 멀어짐으로써 존체는 혼(魂-soul)으로 격하하게 되었고, 이 혼이 애초의 위치에서 일단 떠난 후 계속하여 더욱 멀어져 결국 육신(肉身)을 취해야 하는 경지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장 상위에 존재하는 존체가 정신적이라면, 가장 하위에 속한 위치는 육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결국 인간으로 격하하게 되었다는 이론이다. 오리겐은 이러한 플라톤의 철학사상을 성경 창세기와 융화시키는 작업을 하였다. 그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실제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로 보는 대신 상징적인 이야기로 취급하는 방법으로 합리화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실제로 지구의 어느 구석에서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으로 일어난 일로 취급하였다. 따라서 그는 육신이 없는 영(靈)의 존체상태로 에덴이라는 상징적인 장소에서 있었던 일을 육신이 있는 물질적인 존체상태로 지구의 어느 장소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로 이야기를 만듦으로써 오히려 설명이 어려워지도록 못을 박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오리겐은 인간이 죄를 짓게 된 것은 자발적인 행위였으며 그 결과로 하나님과 어느 정도 멀어지게 되었다는 이론을 그리스도교의 기본관념으로 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리겐은 하나님에게 죄를 짓는 이야기가 소개되었다면, 죄를 사하고 하나님과 다시 가까워지는 이야기도 소개되었어야 마땅하다고 믿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중요한 본질 중에 사랑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이 죄를 사하는 업(嶪)을 행하고, 그 대가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원위치인 영(靈)의 존체로 돌아가 다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어야 옳다고 믿은 것이다. 그 일환으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적절한 시기에 지상에 보낸 것이라 하였다. 성경에서 말하는 말씀이 바로 구세주 그리스도였고, 하나님과 멀어질 수 없는 그리스도는 중재역과 참하나님의 형상을 육신으로 보여 주기 위한 두 가지 목적으로 세상에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감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광명이 각 개인의 인생에 비취게 함으로써 재빨리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며, 육신에 얽매인 상태에서 떠나고, 하나님과 형통(亨通)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의 위력이 너무 거대하여 종국에 가서는 사탄(Satan)을 포함한 모든 존체가 하나님에게 흡수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했기 때문에 육신을 창조해야 했던 일이 언젠가는 끝날 때가 있을 것이며, 그 때에는 하늘에 있는 존체나 인간의 혼이나 모두 순수한 상태가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해지고 더 이상 육신이 필요치 않게 되며, 그 날이 올 때까지는 인간의 육신이 죽은 다음 혼은 다른 육신을 찾아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그리고 물질이란 유명무실해지기 때문에 창조라는 말의 의미가 사라지게 되며,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결별된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었고, 이것이 으뜸 원칙론(On First Principles)의 골자였다. 그리하여 고린도전서 15장 28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라는 말이 실천될 것이라고 설파했다. 또 그는 부활과 승천 대목에 와서 육신은 반드시 썩어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이것이 예수의 육신이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믿는 반대파의 신경을 심하게 건드리게 되었고, 인간이 영적 존체로서 하나님 나라로 환원하게 된다는 오리겐의 사상은 후세기에 들어와서 많은 반발을 사는 과정을 밟게 되었으며, 급기야 이단으로 낙인이 찍혀 이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참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정신세계의 석학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은 학자적인 관점에서 똑같은 이론을 설파하였다. 그래서 캠벨은 예수가 부활하여 승천할 때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는 혼이나 영이 올라갔다는 말은 되어도 육신 자체가 함께 올라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주장하면서 오리겐의 사상에 완전히 동감을 표하였다. 그리고 캠벨은 희랍의 오르페우스(Orpheus) 신화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오르페우스 신은 물고기를 낚는 어부였다고 ‘그리스도교의 물고기 상징’의 대목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잠깐 논제의 범위를 벗어나 오르페우스 신화에 대하여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지나가기로 하자.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와 병행되기 때문에 대단한 흥미가 있으리라 생각되어서이다. 오르페우스는 뮤즈(Muse)의 아들이다. 참고로 뮤즈의 형용사형은 뮤직(music)이다. 이는 물론 음악이란 뜻이다. 왜냐하면 음악의 기초이론을 뮤즈가 만들었기 때문이고, 그 도표를 프랙티카 뮤지카(Practica Musica)라고 부르며, 가포리우스(Gaphorius)가 1493년에 정리하여 그림을 만들었다. 여기에 아홉 개의 음정표와 9 음정표의 사이음이 표시되어 있다. 9의 근(根)은 3이다. 즉 3이란 삼위일체를 상징하고, 오르페우스는 어버이 신 아폴로(Apollo)를 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오르페우스가 살고 있던 트라스(Thrace)라는 곳은 디오니소스(Dyonisos) 신을 섬기는 곳이었고, 디오니소스와 아폴로는 서로 상극이 되는 신이었다. 그리하여 디오니소스의 사주로 그를 섬기던 마에나드(Maenads)라는 야성적인 여인들은 술에 만취되고 광란을 제식으로 삼는 바커스(Bacchus) 잔치에서 오르페우스를 잡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그를 갈기갈기 찢어 강에 버리게 된다. 오르페우스가 십자가에 매달린 그림을 보면 예수의 십자가형 그대로이고, 그 위에 부활하는 상징인 달과 일곱 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이 이야기를 예수 이야기와 비교하면 디오니소스가 지배하는 트라스라는 곳은 로마가 지배하던 팔레스타인에 비유할 수 있고, 로마의 태양신과 야훼 하나님 대신 디오니소스와 아폴로 신을 비교할 수 있으며, 다른 신을 믿기 때문에 오르페우스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훨씬 깊은 삶의 세상과 죽음의 세상 등 복잡한 경지로 들어가게 되지만, 여기서는 이 정도로 이야기를 그친다. 이 오르페우스 신화의 이야기는 물론 예수보다도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며, 호머가 쓴 ‘일리아드(Iliad)’나 ‘오디세이(Odyssey)’ 시대보다도 먼저 생긴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도 이 사상을 깊이 다루었으며 신플라톤(Neo-Platonism) 사상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던 내용이었다. 따라서 그 유명한 단테(Dante Alighieri)의 ‘신곡(神曲)’ 테마는 바로 오르페우스가 말하는 내용이 적용되는 것이다. 또 이 이야기는 헤르메스(Hermes)와 연결되어 이집트와 유대인 사회로 들어오게 되며, 계속하여 그리스도교 안으로 자리잡게 된다. 바티칸의 보르지오(Borgio) 관에 가면 핀투리키오(Pinturicchio)가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다. 그 중 하나는 여신 이시스(Isis)가 의자에 앉아 두 제자 모세와 헤르메스를 앞에 놓고 가르치고 있는 그림이다. 헤르메스는 상징적인 면을 뜻하고, 모세(Moses)는 실질적이고 역사적인 면을 상징하는 제자였다. 그리스도교가 애초 자라면서 약 3백 년 정도 평행적으로 함께 자란 신앙이 있었다. 이것을 헤르메스 신앙이라고 부르고, 그들이 사용하는 성전을 ‘코르푸스 헤르메디쿰(Corpus Hermedicum)’이라고 부른다. 이 계통의 믿음은 위에서 말한 오리겐의 사상과 잘 융합되었고, 지금도 ‘골든 도온(Golden Dawn)’, ‘로시크루시안(장미십자-Rosicrucian)’, ‘알케미스트(alchemist)’, ‘카발리스트(Kabalists)’, ‘헤르메티시스트(Hermeticists)’, ‘프리메이슨(Freemasonry)’ 등 비밀조직의 기본사상으로 되어 있고, 이들에 의하여 지하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여 내려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프리메이슨의 단원은 반드시 천주교나 개신교나 이슬람교나 불교나 힌두교에 관계없이 신(神)을 믿어야 하는 것이 기본조건으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모세의 계열로 발전된 유대교나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는 헤르메스 계열인 골든 도온, 로시크루시안 등과 모두 서로 통하는 신앙이며, 힌두교나 불교도 그노시스와 마찬가지의 종교철학이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리스도 교회는 3세기에서 6세기 사이 환생론을 믿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데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환경에서 대부분의 환생론자들은 묵묵히 교회를 나가면서 남몰래 비밀조직에 가담하게 되어,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지하조직들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 중 교회 안에서 환생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이들은 지금의 보스니아(Bosnia)와 불가리아(Bulgaria) 지역에 많이 남아 있어, 7세기에 ‘폴리시안(Paulicians)’이란 종파와 10세기에 ‘보고밀(Bogomils)’이라는 그들 나름대로의 종파를 만드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환생론을 내세우는 조직은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웠지만, 지하로 들어간 조직들은 오늘도 건강하게 계속되고 있으며, 특히 근래에 와서 ‘신시대 운동’ 또는 ‘뉴에이지(New Age)’ 운동으로 다시 지상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하고 있는 실정이다. 개인적으로 환생론자로 널리 알려진 사람들을 참고로 열거하면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Fran?ois Voltaire),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hopenhauer), 미국의 정치가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독일의 시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Honor? de Balzac), 미국 시인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영국 소설가 헉슬리(Aldous Huxley),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W.B. Yeats), 영국 소설가 키플링(Rudyard Kipling), 독일 시인 실러(Friedrich Schiller), 프랑스 소설가 유고(Victor Hugo), 스위스 심리학자 융(Carl Jung) 등 무수한 예를 들 수 있다. 또 20세기 초에 지하종교철학 활동으로 유명한 러시아 출신 마담 블라바트스키(Madam Helena P. Blavatsky)는 환생론이란 것을 악기에 비유하여 “그리스도교에서 잃어버린 코드”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약 80년 후 가톨릭 내에서 마르틴 루터처럼 정면으로 가톨릭 당국에 도전했던 사람이 있었다. 16세기에 와서 1백 년 동안 가톨릭은 단지 25명밖에 불태워 죽인 사람이 없었는데, 그 중 하나가 지오다노 브루노(Giodano Bruno, 1548~1600)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약관 24세에 도미니칸 수도원의 수사가 되었으며, 16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그는 프랑스의 헨리 3세를 가르친 선생이기도 했고, 툴루스 대학(University of Toulouse)에서 철학강의도 하였으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 주변에 있던 문학 예술인들과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었다. 그의 꿈은 철학을 통하여 가톨릭과 개신교를 다시 합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가톨릭과 신교 양편에서 그를 파문시키는 형을 받을 정도로 오히려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의 이론, 즉 지구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고 다만 무한으로 많은 천체 중의 하나일 뿐이며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상에 동의하였다. 또 4세기 아리우스(Arius)의 신학론을 옳다고 변론하기도 하였고, 환생론을 믿어 인간은 죽은 다음에 다시 다른 육신으로 혼이 들어가 지구에 태어나며, 경우에 따라서는 지구로 돌아오지 않고 다른 천체로 가 그 곳에 사는 인간에 해당되는 육신을 가진 존체로 태어날 수도 있다고 주장한 죄로 결국 로마의 광장에서 불태워져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환생론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환생사상과 함께 인간의 혼은 지구로 돌아오기 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존체가 될 수 있다고도 믿었고, 종교는 성광(聖光-divine light)이 혼을 흡수하여 격상시켜 하나님 자체로 바꾸는 한 방편이라고 믿었으며, 이렇게 되기 위해 인간은 말세가 와서 세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도 개인의 수련에 의하여 아무 때고 가능한 일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불교에서 누구나 해탈하면 언제고 자신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 말과 맞먹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브루노는 구원을 받는 일은 교회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어떻게 믿음을 실천하는가에 달려 있으며, 죽음이란 다만 분리와 재결합의 과정일 뿐이라 하였다.
삼위일체론과 단성론(콥트 동방정교)
우리는 기독교 사상을 생각하면 십자가, 예수, 성모 마리아, 삼위일체 같은 것들이 동시에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여기서의 논제는 삼위일체이다. 즉,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신(聖神)을 하나로 보는 관념이다. 그러면 이 관념은 하나님이나 예수가 그렇다고 말했거나 성경에 그렇게 씌어져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필자가 알기로는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가 처음 삼위일체(Trinitas)란 용어를 사용하였고,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집트의 젊은 '디콘(집사-deacon)'2으로 나중에 성인의 칭호를 얻게 되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초안하여 소위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를 만들어 기초를 굳게 만든 것으로 안다. 그러니까 이러한 교리는 분명 사람이 만든 것이다. 그것도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한결같이 그렇다고 느껴져 만장일치로 채택한 것도 아니다. 역사를 뒤져보면 이 관념 때문에 논쟁이 대단히 심하였고, 하마터면 대부분의 세계 크리스천들이 삼위일체 대신 단성론을 믿을 뻔하였다. 이상하게도 대세가 꼬여 삼위일체를 주장하던 사람들이 요행으로 승리했던 것을 오랜 시간이 흐른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당연시하고, 처음부터 삼위일체라는 관념이 있었던 것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 그렇기 때문에 그리 된 거라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세속적으로 말하면 교묘한 정치놀음 때문이라고도 해석할 수도 있다. 일성론(一聖論) 또는 단성론(單聖論-Monophysitism)이라고 부르는 논리에는 간단하게 예수가 신으로서 인간의 육신에 들어와 태어났다는 이론과 인간으로 태어나서 신의 영(靈)이 들어 왔다는 이론이 있다. 그러나 이 두 이론의 공통점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동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신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즉 야훼 또는 여호와를 믿는 것이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종속이라는 관념이다.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콥트 교회(Coptic Church)와 그리스도 교회 역사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註 2 : 디콘(deacon)이란 직위는 성공회나 천주교에서는 부제(副祭) 또는 보제(補祭)라 부르며, 감리교, 장로교 등 개신교에서는 집사(執事)로 부르고 있다고 사전에 나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초창기에 있었던 이 직책을 현 사회에서의 집사라는 직책과 혼동할 수 있기에 그대로 디콘이라 불렀다. 빌립보서 1장 1절에 보면 “감독들과 집사들”이라는 표현이 있다. 감독은 주교(bishop)를 말하고 집사는 디콘(deacon)을 뜻했다. 여기서 주교라 함은 교왕 또는 교황까지도 포함한 신분이었으며, 당시는 추기경이나 대주교 같은 직책은 없었다. 따라서 디콘은 거의 주교와 동등하다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뜻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콥트(Copt)교
콥트라는 어휘는 이집트라는 뜻이다. 지금은 이집트가 회교도 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시리아에 있는 안티오크(Antioch)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체제를 갖춘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 발생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집트의 그리스도교 역사는 그리스도교 전체의 역사와 거의 동시의 역사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세기에 로마 통치 아래 팔레스타인의 수도였던 시자리아(Caesarea) 교구의 교구장 유세비우스(Eusebius)가 쓴 교회사에 의하면, 사도 마가(Saint Mark)가 서기 41년에서 44년 사이에 이집트에 와서 약 20년 동안 살다 알렉산드리아로 나가 선교를 하고 복음서를 썼다고 나와 있다. 마가에 의하여 처음 전도된 사람은 아니아누스(Anianus)라는 신기료 장수인데, 마가가 순교한 다음 알렉산드리아 지방 주교로 마가의 뒤를 잇게 되었고 그 전통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하니, 정통성을 따지면 어느 종파보다 뒤지지 않겠으나 우리는 콥트교에 대하여 거의 듣는 바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왜 그럴까? 물론 교세가 약한 것이 그 이유이겠지만, 교세가 강해지지 못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야곱’교회(Jacobite Church), ‘아르메니아’교회(Armenian Church)와 함께 삼위일체가 아닌 단성론(單聖論-Monophysitism) 사상의 하나인 유사본질(類似本質-Homoiousion) 중의 한 이론을 애초에 내세웠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완전한 인간이며 그 인간된 육체에 성령이 들어가 두 개의 존체(存體)가 융화되어 하나의 완전한 존체를 형성했다고 믿고 있어 로마를 위주로 한 주류 크리스천 교회에서 이단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 그 원인일 수도 있다. (콥트 교에서는 전혀 단성론을 주장한 일이 없었고 다만 5세기에 오해를 받았던가, 아니면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했던 일에 반하여 종교를 우위로 하여 정치를 흡수하려는 로마 파의 정치적 이유로 단성론 파로 억지 취급 당했다고 말하고 있다.)
여하튼 콥트교가 시작된 곳이 상(上)이집트였고, 그들의 성경책이 파피루스 종이에 콥트어로 기록된 것이 발견되었는데, 서기 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에 의하여 만들어진 희랍어 성경, ‘프로토캐논(Proto-Canon, 原正經)’보다 훨씬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고대 이집트는 태양신을 믿는 곳이기는 했어도 항상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친절을 베푼 곳이었다. 예수가 갓 태어나 아주 어렸을 적에, 즉 헤롯 왕이 예수를 잡아 죽이려 했을 때 예수를 받아 준 곳이 이집트였을 뿐 아니라 파라오는 예수의 가족을 아주 귀하게 대접해 주었다. 그리고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이 죽고 부활하는 이야기라든가 사람이 죽을 때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그리스도교 이전에 이미 익숙한 믿음이었기에 그리스도교가 쉽게 이집트 사회에 흡수되었던 것 같다.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이 당시에는 그리스도교라는 것이 없었고, 다만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던 예수의 제자들이나 그들의 제자들이 각각 예수의 행적이나 말을 따라 그의 사상을 전파하는 무형의 신앙이었으므로 안티오크에서 시작된 크리스천이라는 용어가 아주 희귀하게 사용되고 있는 정도였다. 그리하여 마가복음을 쓴 마가의 선교활동으로 활발해진 이 곳에서 그의 제자들은 2세기에 이미 알렉산드리아에 디다스칼리아(Didascalia)라고 부르는 그리스도교 교리학교(敎理學校)를 역사상 처음으로 창설하였다. 이 때는 아직도 박해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상당한 종교의 자유가 있어 안티오크, 로마 시,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과 함께 크리스천들이 집중되었던 곳이다. 특히 알렉산드리아는 지금의 뉴욕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세계에서 가장 상업이 발달한 중심지였다. 이 교리학교에서 클레멘트(Clement)나 오리겐 같은 성직자와 학자들이 나와 다신주의(多神主義)였던 헬라 철학(Hellenistic philosophy) 학자들과 논쟁을 벌일 수 있었으며, 이 교리학교에서 그리스도교의 신학과 교리가 체계를 잡게 되었다. 디다스칼리아의 창시자이며 초대 학장이었던 판티누스(Pantaenus, ?~190 A.D.)라는 이집트 사람은 이집트의 상형문자 대신 희랍 알파벳으로 표기하도록 하는 운동을 벌인 장본인이기도 하고, 콥트어로 된 성경을 희랍어로 번역하였으며, 학교에서는 희랍어로 강의를 하여 왕조시대의 이집트와 희랍에 의한 헬라(희랍) 문화권과의 교량역할을 톡톡히 한 사람이었다. 그 때는 헬라(희랍)권의 알렉산더 대왕이 로마를 포함하여 이집트를 정복한 지 4백여 년이 지난 후이고, 다시 로마가 득세하여 그 통치하에 있었으나 월등한 헬라 문화의 영향으로 소위 ‘그레코-로마(Greco-Roman) 시대’라고 부르던 때였다. 그러나 헬라 문화나 로마의 문화는 거의 동일한 다신을 믿는 사회였다. 이것은 아폴로, 제우스 등 우리가 희랍 신화나 로마의 신화로 익히 들어 잘 아는 터이다.
디다스칼리아 신학교는 그리스도교가 형성되는 과정 중 신학적인 면에서 완전히 그 기초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재목이 된다. 2대 학장이었던 클레멘트(Clement)는 희랍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을 융화하려는 노력을 했던 학자였고, 그 후임이 된 오리겐(Origenes)은 소위 오리겐 학파를 형성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 자신은 성경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기본이 되었던 6개국 대역 성경, 즉 ‘육조경(Hexapla)’이라는 책을 만들어 희랍어와 히브리어로 된 성서들을 발원하였으며, 신·구약 각 성서를 해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제자로 유명한 이름을 들면 대표적으로 헤라클라스(Heraclas)와 디디무스(Didymus)를 들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디다스칼리아 학교 출신으로 물론 오리겐의 제자이다. 헤라클라스는 성 마가의 지위를 말하는 교황(敎皇)이 된다. 이 교황은 지금 바티칸에서 ‘성 베드로’의 지위를 대표하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보다 훨씬 먼저 만들어진 교황이며, 단성론계 그리스도교의 교황 시조인 것이다. 반면 장님이던 디디무스는 단성론을 주장했던 안티오크 계통인 소위 아리안(Arian)파에 대항하여 가장 격렬하게 투쟁했던 삼위일체론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의 제자 아타나시우스(Saint Athanasius)는 이집트인으로 젊은 시절 알렉산드리아 교구에서 디콘(dean)직을 맡고 있을 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관하였던 325년의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삼위일체론을 근거로 한 교리를 작성한 장본인이었다. 그 후에도 계속하여 종교회의에서 주도권을 갖고 논쟁을 하던 사람들도 거의 디다스칼리아에서 공부했거나, 그 출신의 제자들이었다.
서기 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크리스천의 박해를 끝내고, 그리스도교를 허용한다는 소위 ‘밀란의 칙령(the Edict of Milan)’을 공표하고 나서부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지상으로 나와 비약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문제는 그 동안 지하에서 서로 연락도 별로 없이 너무 광범한 선교활동을 한 때문인지는 몰라도 각양각색의 그리스도교가 존재하고 있었고, 이 중에서도 가장 문제화된 점은 소위 ‘동일본질(同一本質-Homoousion)’과 ‘유사본질(類似本質-Homoiousion)’ 교리의 대립이었다. 이 문제는 하도 심각하여 그냥 놔두었다가는 시민전쟁까지 일어날 염려가 있을 정도였다. 유사본질론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유사할 뿐이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고, 동일본질론의 주장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는 하나이고 본질적으로도 동일하다는 이론이었다.
예수가 사형당하면서 시작된 크리스천들에 대한 박해는 날로 심해져 64년경 네로 황제 때에는 극을 달했었다. 이때 베드로도 처형당했다. 여기서 크리스천에 대한 박해라 하였지만, 그들이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고문을 당하고 심지어 사자에게 물려 죽게 된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천을 잡아가기는 했어도 그 자체가 죄목이 아니라, 명목상의 죄는 잡혀간 크리스천들이 로마 황제와 로마의 신들을 섬기는 제단에 향을 바치지 않는 것이 직접적인 죄목이었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서 잘 아는 네로 황제가 콜로세움 광장에서 사자에게 물려 죽도록 처형을 한 크리스천들은 여기서 말하는 콥트 계통 신자들이 대부분이었었다. 이들은 순교자였다. 이렇게 순교한 사람들을 순교자, 즉 영어로 ‘myrtyrs’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증인’이란 어원에서 나온 것이다. 1세기에는 주로 로마 정부에 의하여 크리스천들이 박해를 받았으나 시간이 흘러 2세기, 3세기로 가면서 점차적으로 경찰이나 군인들보다는 시민들로 구성된 깡패 같은 불량배들에 의해 박해를 받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250~300년경 데시우스(Decius)와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 때에 다시 정부가 앞장 서 박해를 하기 시작하였다. 303년의 대박해(the Great Persecution)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토록 오래 박해를 하였지만 크리스천들의 신앙심을 없애기는커녕 점점 더 강하게 하는 결과가 되었고, 이 때쯤에는 이미 정부 고관과 상류사회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신앙이 만연되어 박해의 명목이 점차 희미해져 무의미하게 되었다. 이때 가장 강력하게 반발했던 지방이 바로 이집트 지역이었다. 로마 시에서는 아직 크리스천들이 지하에서 몰래 모임을 갖고 있을 때, 이집트는 공공연히 교회를 세우고 로마 당국이 지켜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미사를 집전했다. 이들을 모두 잡아가면 그 교회당은 다른 교인들로 다시 메워지곤 하였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매우 잔인하여 284년에 대량학살을 했기 때문에 그 해를 박해 원년으로 하는 콥트 순교달력(Anno Martyri)이 탄생할 정도였으며, 이들은 지금도 이 달력을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이 점점 증가하여 급기야 306년에는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황제 자신이 크리스천이 되어 그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입장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당시의 로마는 네 명의 황제가 분할하여 통치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 중의 하나로 306년에 황제가 되었으며, 처음 한 일이 크리스천에 대한 박해를 금지하도록 한 일이었다. 그 후 점차 그는 세력을 펴 다시 로마를 거의 통일할 정도로 일인자가 되었으며, 그가 다른 황제와 전쟁을 할 때 그의 군사들의 방패에 ‘치-로(Chi-Rho)’의 상징을 페인트로 그리도록 하였다. ‘치-로’는 희랍어로 ‘그리스도’라는 어휘의 첫 글자를 딴 것으로 마치 ‘P’자의 아래쪽 꽁지에 ‘X’자를 덧붙여 쓴 것 같은, 흔히 라바룸(Labarum)이란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하는 표식이다. 이것이 맨 처음 만들어진 십자가 표식이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표식을 내걸고 전쟁을 한 결과 매번 승리를 하자, 그는 자기가 예수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편에서 승리하도록 만들어 준다고 확신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이유로 비록 자기 자신은 임종 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교를 더욱 신장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313년에 전 로마제국에 칙령을 내려 그리스도교를 허용하고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면서 그리스도 교회에 막대한 돈까지 주어 교회를 짓도록 했다. 이로부터 수십 년 동안 사회는 안정과 평화를 갖게 되었고, 이 때부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당당하게 토지와 건물을 살 수 있었으며, 공공연히 교회당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유명한 ‘밀란의 칙령(Edict of Milan)’ 덕분이었다. 그러나 당시 동방(현 중동지방)에서는 아리우스(Arius)가 주창하는 단성론(單聖論-Monophysitism)이 급격하게 퍼져 교회가 온통 분쟁의 도가니에 들어갔다. 항간의 이야기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예수처럼 요단 강에서 세례받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이러한 문제 때문에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는 것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는 임종이 가까웠을 때 병상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여하튼 이러한 상황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우선 교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25년에 니케아(Nicea)에 각 종파의 주교들이 모아 이를 해결하자고 종교회의를 연 것이 바로 유명한 ‘니케아 종교회의’였고, 이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는 교리의 통일과 성경을 만드는 일이었다.
교리문제는 위에서 잠깐 말한 것처럼 크게 나누면 동일본질과 유사본질로 나눌 수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이보다 더욱 복잡했다. 니케아 종교회의는 325년부터 787년의 마지막 회의까지 모두 일곱 차례의 회의를 했는데, 첫째 회의인 니케아에서는 아리우스(Arianism)주의를 추방시켰다. 아리우스주의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동격이거나 동질이 될 수 없고 아버지 하나님에게 종속되며, 아버지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이지만 예수는 아버지가 만든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이론이다. 두 번째 회의인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유티케스주의(Eutychianism)와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유티케스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의 인성(人性)과 신으로서의 신성(神性)이 혼합되어 인간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라는 것이며,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에서 인간의 원죄를 속죄해 줄 능력이 없다는 이론이었다.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예수가 인간과 신의 두 가지 본질을 모두 소유하고 있었으나 이 둘은 서로 별개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신봉한다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일이며, 다만 신성을 가진 예수만 하나님으로 모셔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여기에서는 유티케스주의가 제거되었다. 세 번째 회의인 431년의 에페소(Ephesus) 회의에서는 네스토리우스주의가 다시 논의되었는데, 이번에는 성모 마리아의 본질문제였다. 그들의 주장은 성모 마리아는 인간으로서의 예수 육체를 낳은 어머니이지 하나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하나님을 수태한 이)는 될 수 없다는 것이 그 요점이었다. 여기에서도 알렉산드리아 교왕 키릴로스(Cyril)와 알렉산드리아의 대학자 디오스코루스(Dioscorus)의 활약으로 네스토리우스파를 제거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이들은 분리하여 네스토리안 교회(Nestorian Church)를 따로 차리게 된다. 한편 승승장구하던 알렉산드리아파는 자기네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축(軸)이라고 믿게 되었고, 이 경향은 사촌이었던 알렉산드리아 교왕 키릴로스가 죽자 뒤를 이어 교왕이 된 디오스코루스의 시대에 와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의 마음대로 계속 개가를 올리고 있는 동안에 로마 시를 위시한 다른 지역에서는 점차 알렉산드리아의 독재성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고 있던 것을 별로 개의치 않았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유티케스주의를 몰아낼 때 로마 교황 레오 1세가 교리문제에 대하여 자기의 의견을 피력한 서한을 헤게모니를 장악한 알렉산드리아파들이 회의에서 읽지도 않고 묵살했던 일부터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하여 불만이 많은 반대파들이 데모 등의 방법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일이 자주 생기자, 디오스코루스 교왕은 깡패까지 동원하여 군중을 해산시키고 폭력행위를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마치 군사정권 때 학생들 데모광경을 연상하면 될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449년에 ‘에페소 강도 교회회의(Robber Synod of Ephesus)’가 열리게 되었다. 아직 알렉산드리아파가 원하는 교리가 완전히 그리스도교 안에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여기서 알렉산드리아 교왕 디오스코루스는 예수는 인간으로서의 본질 하나만 갖고 있었으며, 성령이 그의 육신에 강림한 후에야 구세주로서 두 가지의 본질을 갖게 되었기에, 성령의 본질은 말씀이신 하나님 자체에게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이론을 회의에서 통과시키려 하였다. 물론 이것은 단성론자의 이론이다.
449년 에페소 회의에서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에 의해 파문당했던 유티케스는 약 3백 명의 군인과 승려를 데리고 와서 그때 단상을 차지하고 있던 에페소의 주교 스테펜에게 황제의 적이라고 외치며 완력으로 회의장을 점령하였다. 회의의 의장자리를 맡고 있던 디오스코루스는 유티케스에게 변호의 기회를 준다고 단상을 맡기고, 디오스코루스파와 함께 다만 지난번 회의기록만 읽는 것으로 회의를 끝냈다. 그리고는 반대파에게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고 회의장에 참석한 127명의 주교들에게 종이를 돌려 강압적으로 서명토록 하여 디오스코루스의 유사본질인 단성론 교리안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협박에 의하여 서명은 했지만 그 중 중요한 몇 사람들은 로마 교황에게 탄원을 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이 편지들을 전달하는 사람들 역시 디오스코루스 편이어서 편지가 전달되지 않은 것이 나중에 발견되었다. 유티케스는 먼저 파문되긴 했지만 디오스코루스와 함께 유사본질론을 주장하기는 마찬가지였고, 이들은 삼위일체론의 근거가 되는 동일본질론파에 대한 일종의 공동전선을 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알렉산드리아파들이 독점적으로 종교회의를 진행하는 일은 동로마제국인 비잔틴(Byzantium)제국에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황제가 몇 번 바뀌면서 450년에는 마시안(Marcian)이 황제가 되었다. 그는 디오스코루스에게 에베소에서 있었던 종교회의에서 정당치 않은 일이 일어났으니 그에 대한 상황설명을 요구하고, 칼케돈(Chalcedon) 회의에서 다시 논의하자는 편지를 보냈다. 이 회의는 451년에 열렸다. 이번에는 서부 로마에서 절대다수의 주교들을 소집하여 보내 수적으로 압도하도록 만들었으며, 군대까지 동원하여 디오스코루스를 가택연금 해 버렸고, 회의가 끝난 다음에는 흑해 남쪽에 있는 강그라(Gangra)라는 작은 섬에 귀양까지 보내 버렸다. 당연히 지금까지 결정되었던 모든 사항이 몽땅 뒤집어지게 되어 우리가 지금 당연시하는 삼위일체 교리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성 마가(St. Mark)의 후계들인 알렉산드리아 계통 크리스천들은 크리스텐돔에서 헤게모니를 잃게 되었으며, 이들은 다시 둘로 갈라져 한 쪽은 비잔틴제국에 충성을 하여 멜키데(Melkite)파라 불리고, 다른 한 쪽은 자기네들이 주장해 온 교리를 고수하여 지금도 이집트, 에티오피아 등지에 있는 콥트(Copt)파 크리스천이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이집트에서는 조직적으로 이들 크리스천들을 박해하고 살인을 해도 모두들 외면을 하고 있는 것이 실상이다. 여기서 참고로 말해 두자면 현재 이집트에 가면 콥트교가 또 갈라져서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콥트와 단성론을 주장하는 콥트 두 가지가 있다.
어쨌든 이러한 파란만장한 경로를 통하여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탄생하였다. 그러면 삼위일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말하기는 간단하지만 이해하기는 그리 간단한 내용이 아닌 것 같다. 필자가 알고 있는 삼위일체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우선 성경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이나 어휘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나 성부, 성자, 성신, 다시 말해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와 그리고 성스러운 신령 세 개체(位)는 세 명의 신령이 아니고 하나의 하나님인 성스러운 신령 속에 있는 세 명의 개체(person)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 명은 별도로 존재하면서 항상 함께 존재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과 동일한 같은 개체가 아니고, 아들이란 개체는 성스러운 신령과 동일한 같은 개체가 아니며, 성스러운 신령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같은 개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 개의 개체는 같지만 같지 않고, 같지 않지만 같다. 만일 이 세 개체 중에 한 개체라도 제거하면 하나님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고, 시편 90장 2절에 표현한 바와 같이 “영원에서 영원까지” 삼위일체는 항상 존재해 왔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장 1절과 14절에 예수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하나님이 육신이 되었다 하여 예수가 하나님이라 하였고, 빌립보서 1장 2절에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님이라 하였으며, 사도행전 5장 3절과 4절에 성령, 즉 성신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하나뿐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을 하니 아버지와 아들은 다른 개체라는 것이 증명되며, 사도행전 13장 2절에 성령이 말을 하니 성령도 별개의 개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 개체 속에 존재하는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단(異端)과 그노시스(Gnosis)
서기 66년에서 74년까지의 1차 유대인 봉기는 마사다의 비참한 전투로 일단 끝난다. 그러나 60여 년 후인 132년에서 135년 사이에 유대인들은 다시 봉기를 한다. 이것을 2차 봉기라고 부르자. 그 결과 유대인들은 아예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여 소아시아(Asia Minor) 지방을 비롯하여 희랍, 로마, 고올(Gaul: 프랑스), 영국, 북아프리카에까지 흩어지게 된다. 그리고 예루살렘 자체는 로마인들의 도시로 변하게 되며, 1차 봉기 때부터 예루살렘 지방에서 유대인과 크리스천에 관한 사건은 모두 함구령이 내려져 그 후 약 2백 년 동안 기록이 없게 된다. 여하튼 이렇게 세계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 중에는 ‘에비오나이트(Ebionites:에비온파)’라고 불리는 한 갈래의 크리스천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예수를 인간 선지자로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나름대로 교리를 만들어 그 교세가 점점 커졌고, 그리스도교 안에서 하나의 큰 세력을 차지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도교 안에서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교리학교 디다스칼리아(Didascalia) 대학의 2대 학장이었던 클레멘트(Clement)의 화합노력에도 불구하고 성(聖) 이레니우스(St. Irenaeus)는 이들을 이단(異端)으로 매김하여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성 이레니우스는 2세기 전반에 고올(Gaul), 즉 리옹(Bishop of Lyon)의 교역장이었으며, 그리스도교 안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그의 가장 큰 업적이 바로 그노시스 종파를 이단으로 만든 일이었다. 이러한 박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종파는 계속 인기를 얻어 교세가 증가일로에 있었으며, 에비오나이트를 위시한 유대인들은 예수 당시의 생생한 경험담을 통한 많은 지식이 직접 여러 형태로 전해 내려오는 것을 토대로 했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내용도 예수 시대에 일어났던 전설이나 전해 오는 이야기들 중에서 원하는 내용만 추려, 특허를 내듯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관계자들이 모여 합의를 본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주류파의 속마음은 예수의 메시지를 중심으로 교리를 만드는 것이었고, 그러한 위치를 공고히 해야 하는 토대가 중요했기에, 그와 상반되는 그노시스의 교리는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주류파들은 자기네들이 주장하는 바와 조금이라도 다를 때에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없애 버렸기 때문에 이단들이 주장하는 교리를 쉽게 들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단이 믿는 바를 대중에게 알려 주면 자기네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리기 때문이며, 그나마 알려진 약간의 이야기는 대부분 조작되고 둔갑되어 누가 보아도 이치에 맞지 않는 이론으로 만들어 선전용으로 소개되는 정도였다. 여하튼 예수는 어떤 사람에게는 완전한 하나님으로 소개되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인간이 신이 된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또 어떤 사람에게는 마호메트나 부처님처럼 인간으로서 선지자이고 예언자가 된 것으로 비쳤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인간의 주관적 관점의 차이에서부터 종교가 갈라지고 종파가 생겨 서로 싸움을 하고 살육하는 피의 역사를 창조하게 된다.
이단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이단을 몇 개 소개해 보자.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입신한 다음 136년에서 165년까지 로마 시에서 활약한 발렌티누스(Valentinus)란 사람이 있었다. 발렌티누스는 당시 대단히 영향력 있었던 사람으로 문하에 프톨레마이오스(Ptolemy) 같은 학자를 배출한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의 ‘숨겨진 가르침(Secret Teachings)’을 엮은 자료를 갖고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로마 당국에 바치기를 거부하고, 개인의 그노시스(Gnosis), 즉 그의 비밀지식(秘密知識)은 이 세상의 어떤 권위보다 으뜸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당연히 그의 이런 주장이 이레니우스의 분통을 터뜨리게 한 것은 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또 이단으로 유명한 사람으로 마시옹(Marcion)을 들 수 있다. 이 사람은 주교(主敎)로서 당시 선박왕으로 불리는 대부호였으며, 140년경 로마로 이주하였으나 4년 후 파문을 당한 사람이다. 그는 율법과 사랑을 완전히 별개의 관념으로 여겼으며, 이를 성경에 반영시키려고 노력했다. 당연히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마시옹파(Marcionites)’라 하여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마시옹은 현재 우리가 아는 신약성경을 어떤 책으로 구성할 것인지 그 명단을 만든 사람이다. 또 다른 유명한 이단으로 바실리데스(Basilides)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히브리어 문서와 크리스천 복음서에 대단히 박식했던 성서학자로 알렉산드리아에서 120년에서 130년 사이에 복음서에 대한 책만도 최소 25권 이상을 썼다고 한다. 그는 이집트와 희랍 철학에 깊이 심취되어 있었으며, 그가 정통파 크리스천들의 심기를 가장 건드린 것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사기였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여기 소개한 이단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두각을 나타냈던 종파들의 대표적인 소개일 뿐이다.
이단이 가장 심했던 지역으로는 단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첫째로 꼽아야 한다.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로마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고 가장 인텔리가 많은 문화도시였으며 풍성한 경제력과 함께 다양한 코스모폴리탄 도시였다. 또 이 곳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있었던 두 차례에 걸친 유대인들의 반란으로 고향을 떠난 난민들이 정착하기 쉬웠고, 그들의 신앙에 관계없이 환영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곳에는 여러 가지의 신앙이 자리잡고 있었고 포교의 중심이 되는 것이 거의 전통처럼 될 정도였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여러 종류의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곳에 모이게 되었으며, 비교적 좁은 지역에서 서로 비교·경쟁하면서 각광을 받고 커지게 된 것이 그리스도교 정교회파 다음으로 그노시스였다. 이들은 이단으로 박해를 받아 지하에서 활동하며 연명을 해 왔으며, 1945년에 그들이 사용하던 복음서가 발견되었지만 주류 그리스도교 사회의 관념에 상반되는 점들이 있어 그 주류파의 위세에 눌려 별로 내놓고 이야기를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행히 종교의 자유라는 법적 보호가 있어 옛날처럼 이단이라고 태워 죽이지 않기 때문에 진실을 찾으려는 사람들이나 그노시스 방식의 신앙에 이미 관심을 갖고 심취해 있는 사람들 사이에 그 내용이 교환되고 읽혀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노시스
‘낙 하마디’의 문서는 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지만 ‘도마의 복음서’를 중히 여겼고, 이를 기본으로 한 신앙이 꽃을 피운 것은 13세기 초까지 지금의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사이에 있는 ‘랑그도크(Languedoc)’라는 지방에서였다. 지금도 랑그도크라는 프랑스의 주(州)가 있지만, 그 당시는 랑그도크가 하나의 독립국으로서 지금의 랑그도크 주보다 훨씬 큰 지역이었고, 이 곳은 문화·경제와 더불어 그노시스 종교의 중심지로 이미 커졌을 뿐 아니라 전 유럽으로 퍼지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바티칸의 교황은 십자군을 보내 그노시스주의를 믿는 카타르를 멸종시키는 대학살을 자행했던 것이다. 당시 랑그도크의 수도를 알비(Albi)라 불렀고, 알비 사람들을 알비젠시안(Albigensians)이라고 불러, 여기에 보낸 십자군 원정을 ‘알비젠시안 십자군(Albigensian Crusade)’이라고 이름을 짓게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사람들을 카타르(Cathars), 카타레(Cathares) 또는 카타리(Catharis)라고도 불렀는데 결국 모두 같은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근원을 따지자면 앞의 ‘성경 속의 유대인 부족’이란 장에서 잠깐 설명했듯이 에세네 부족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질로트의 열성분자 또는 극렬분자들의 조직인 아사신(Assassin)은 여러 세기 후에 크리스천이라기보다는 모슬렘 쪽으로 흡수된 점으로 보아 그 근원이 같음을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 계열이 사도 도마(Thomas)를 중심으로 그리스도교 쪽에 남아 그들의 그리스도교적 신관이라 할 만한 교리를 다듬어 성숙해졌을 때, 먼저 크리스천 세계의 주도권을 차지한 로마 가톨릭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멸종되었다는 말을 이미 하였다. 역시 도마의 본격적인 가르침은 마가와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이들의 교리는 이미 70년대에 원고장인 팔레스타인에서 성숙되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것은 예수와 그의 가족이 있었다는 풍문이 있을 정도로 예수와 가까웠던 질로트 사람들이 마사다 전투에서 전원 자결하기 직전 지도자 엘르아살(Eleazar)이 한 연설에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 우리가 아는 성경에 담겨진 내용보다는 카타르의 교리가 훨씬 더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성경에서 예수와 그리 관계가 좋지 못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만 소개되었고, 예수와 가까웠던 에세네 부족이 삭제된 이유에 대해 앞뒤가 맞는 상황들이 추론 가능해진다. 즉 예수의 가르침, 그리스도 신앙을 유대인이 아닌 로마인을 상대로 포교하기 위하여, 예수를 모함하여 죽도록 만든 책임자를 로마인 대신 미운 사두개인과 이들을 따른 바리새인들에게 뒤집어씌웠다는 가설이 이해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소위 정통 그리스도교는 로마인들을 위한 안성맞춤식으로 교리를 이리저리 마름질하였고, 정작 예수의 사상을 그대로 유지한 사람들은 많은 호응을 얻게 되었으나 결국 로마 교황의 철퇴를 맞고 이단이 되어 전멸하였다고 추리할 수 있다.
여하튼 이들의 믿음을 요약하여 살펴보면, 아마도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윤회설(輪廻設)과 여성적 신성(女性的 神性)을 인정하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카타르의 성직자들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여기서 성직자란 천주교나 개신교에서 신부나 목사처럼 성품을 받거나 흔히 말하는 식으로 주님의 부름에 의하여 목자의 임무를 받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가 된 존재가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 회중에서처럼 모임에서 존경받는 원로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주교의 조직을 인정하지 않았고, 교회에 나감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사상을 거부하고, 대신 개인적으로 얻는 천기(天機)의 경험과 지식에 의한 구원을 가장 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천기의 지식을 그노시스(Gnosis)라 불렀다. 그노시스라는 말은 희랍어로 지식이란 뜻이다. 그래서 이들은 교리(敎理)나 신경(信經)보다 지식(知識)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으며, 때문에 각자 수련을 쌓아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는 것이 신앙의 골자였다. 이 사람들은 다른 크리스천과 마찬가지로 선과 악, 영과 육신, 높음과 낮음의 대립을 믿는 이원론자(二元論者)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이원론은 정통 크리스천들이 생각하는 이원론에 비하여 훨씬 깊은 사고(思考)를 하고 있었다. 즉, 인간이란 영(靈)들이 전쟁 때 사용하는 검(劍)에 해당하며, 아무도 그 손을 보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싸움은 빛과 어둠, 영과 물질, 선과 악 사이의 영원히 화합될 수 없는 두 원칙이 창조 전체의 과정에서 행해지는 전쟁인 것이다. 정통 그리스도교의 이론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있고 그와 적대관계에 있는 사탄이 있으며 그 사탄은 종국적으로 하나님에 비하여 열등하다고 하는 데 비하여, 카타르는 대등한 두 개의 신이 있다고 믿는다. 즉, 선과 악 중에서 선(善)의 신은 육신이 없는 형체로서 순수한 영(靈)의 실체이고 근본이며 물질에 더렵혀지지 않은 신이다. 그는 사랑(love)의 신이고, 그 사랑이란 권세와 공존할 수 없다. 반면에 물질을 창조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권세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 만물을 의미하는 물질의 창조는 본질적으로 악(惡)이다. 따라서 모든 물질을 악으로 보며, 그렇기 때문에 우주 자체가 욕심으로 채워진 신(神), 즉 악의 신이 만든 작품인 것이고, 이 신을 카타르는 ‘렉스 문디(Rex Mundi)’, 즉 ‘세상의 왕’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 정통 그리스도교에서는 윤리적 이원론(Ethical dualism)을 가르치고 있다. 즉, 악(惡)은 그 근원이 사탄에게 있다. 하지만 인간 자체, 즉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악이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적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에 반하여 카타르는 우주의 시각으로 보는 이원론(Cosmological dualism)을 말한다. 즉, 실존 자체가 완전히 이원론에 입각한 것이다. 이것이 카타르의 기본자세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카타르 종파에 따라 다양한 차이가 있다. 어떤 종파는 지구에 인간이 태어나는 목적이 물질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고, 영구히 연결된 권세의 본질과 단절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며, 이러한 인생의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비로소 사랑의 본질과 결합되어 융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카타르 종파는 인생의 목적이 물질을 되찾아 그 물질을 영적화하여 변환시키는 일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중요한 점은 카타르에게는 정해진 교의(敎義-dogma)나 교리(敎理-doctrine)나 신학(神學-theology)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다만 엉성하게 주어진 방향과 도의적으로 지켜야 할 일반적인 태도 정도를 서로 가르치며 지킬 뿐 신앙생활하는 방법이나 교리의 해설은 완전히 각자의 생각에 맡긴다. 이러한 점은 위치(witch)를 말하는 위카(Wicca) 믿음이나 이와 대등한 우리나라의 무속(巫俗)과 큰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본다. 무속의 경우는 한국에 살고 있는 분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위카의 경우는 카타르와 마찬가지로 서로 원칙에서는 스칸디나비아에 가든, 영국에 가든, 프랑스에 가든, 미국에 가든지 간에 모두 공통점만 갖고 있을 정도이며, 실행 면에서는 원칙은 역시 서로 동일하지만 자세한 내용에서 많은 차이를 갖고 있으며, 조직 없는 조직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조직은 열 세 명이 한 조로 한 단위를 만들고 그 안에 지도자 한 명이 포함된다. 이를 ‘코븐(Coven)’이라고 부르며, 만일 열 세 명이 넘을 때에는 분가를 하게 된다. 이 숫자는 예수와 열 두 제자와도 일치되는 숫자이다. 그리고 다른 코븐과 유기적인 연락도 없다. 근래에 와서 인터넷 따위의 통신수단이 발달됨으로써 상호간 친목의 수단으로 연락할 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자기 이론과 방식이 비슷한 코븐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여행을 하기도 하며, 몇 사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새로운 코븐을 차리기도 한다. 필경 카타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물질의 창조원칙론에서도 로마 가톨릭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단적인 면이 있었다. 왜냐하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나니” 하는 그 말씀의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악의 신이며 탐욕으로 가득 찬 약탈의 하나님인데, 이러한 하나님을 대표하여 인간 세상에 나타난 것이 예수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마땅히 죽었어야 옳다고 믿는 것이 카타르의 이론이다. 또 카타르는 물질이란 본질적으로 악이기 때문에, 예수가 물질인 육신으로 태어났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인 신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었다. 어떤 카타르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신이라면 순수한 영(靈)의 존재로서 형체가 없는 허상(虛像)이었어야 하며, 그렇다면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극단적인 견해를 갖는 사람도 있었다. 여하튼 일반적으로 카타르는 예수가 다른 여느 사람과 전혀 차이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사랑의 신(神)에 대한 말씀을 가르친 대변자에 불과하였고, 인간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고 믿었다. 그러기에 예수와 십자가 이야기는 하나도 신비롭지도 않고, 성스럽거나 기적적이지도 않다는 판단이었다.
또 카타르는 십자가 자체와 십자가 순교의 의미를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여기는 점에 대해서 완전히 부정적인 태도였다. 예수의 십자가 순교는 그리스도적 교리와 상관 없이 일어난 우연발생적 일이라는 해석이 그 하나이고, 예수라는 예언자가 죽임을 당해야 했던 환경이 극악스러웠다고 해서 믿음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해석이 또 다른 하나의 이유이며, 또 로마에서 너무나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생긴 일종의 반감도 작용했을 법했다. 그리고 십자가에 대해서는, 십자가를 전쟁터의 군인들이 사용하고 예수의 십자가 순교를 의미하는 데 사용한다는 것은 물질세계의 주(主)인 ‘렉스 문디(Rex Mundi)’를 상징하는 표상(表象)이며, 진정한 속죄를 통해 구원을 받는 신학이론(神學理論)에 상반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예수가 영생(永生)의 존재였다면 사랑(Love)의 신 ‘아모르(Amor)’의 대변자였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 아모르(Amor) 신에게 욕을 보이거나 변절을 하거나 누를 끼쳐 권세로 변형시킬 때 그 이름은 로마(Roma)가 된다고 하였다. 즉, 아모르를 거꾸로 읽으면 로마가 된다. 그리하여 카타르가 로마의 호화롭고 웅장한 교회를 볼 때 그들은 그것이 바로 ‘렉스 문디’ 세상의 권위를 대표한다고 만천하에 명백하게 증언하여 과시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카타르는 십자가를 섬기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세례나 성찬식 같은 성사(聖事)를 거절했다.
카타르는 이렇게 미묘하고 복잡하며 어떤 면에서는 철학적인 신학을 갈구하면서도, 그들의 일반적인 행위는 유연하고 다른 사람들의 해석을 이해하면서 함께 토론하는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로마 교황 치하(治下)에서 사람들이 교회의 신경(信經)에 집착하는 광신도가 되어 감정에 치우친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것과 크게 대조되었다. 중세기 로마 교황 치하의 가톨릭 신도들의 광신적 태도는 십자군의 행실에서 잘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성숙치 못한 사람들은 카타르들이 모이는 장소를 깊은 지식을 갖고 있는 철학자라고도 할 수 있고 동양식으로 말하면 도사(道士)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자기의 신관(神觀)을 토론하는 매우 격이 높은 인텔리들의 집합장소로 여겼으므로, 유명한 도사와 같은 유식한 사람들이 가는 모임장소에 참여하여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것이 신앙을 키우는 방법이었다. 마치 신앙강좌에 참여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카타르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들이 주장하는 교리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카타르의 자유롭고 계급주의가 아닌 신앙생활방식에 호감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돈 좀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열심히 바치는 십일조가 알지도 못하는 원거리의 바티칸에 제공되며 그 돈이 호화스러운 궁전 같은 교회에 의해 낭비된다는 생각으로 정통 교회에 등을 돌린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수도생활을 택하게 되었고, 실제 전 유럽의 수도사들 중 약 30%가 랑그도크 출신이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정통 가톨릭의 엄격한 형식적 제식(祭式)과 율법을 어기는 자들에 대한 비난과 협박에 지쳐 일종의 피난처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카타르는 심오한 신학적 이론을 폈는가 하면, 이들은 매우 실질적인 생활을 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인간이 자식을 번식시킨다는 일은 사랑의 본질에 의한 것이 아니라 ‘렉스 문디’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좋지 않은 일로 여겼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금욕생활을 권장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 중에는 ‘콘솔라멘툼(Consolamentum)’이라 하여 금욕생활을 하나의 성사(聖事)로 여긴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성직자들 외에 보통 남자나 여자들은 가정을 차리고 가정생활을 다 끝낸 후, 대개 임종이 가까웠을 때 콘솔라멘툼, 즉 금욕을 선언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죽을 때가 다 되어서 금욕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고 이는 형식적 치레였기에 실질적인 사람들이었다고 좋게 보는 것이다. 그런데 자식의 번식을 나쁘게 보기에 성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들은 그 해결책으로 피임과 낙태방법을 사용하였다. 로마 가톨릭이 이들을 이단으로 판정을 내렸을 때 이 사람들이 항문성교 등 비자연적인 성교행위를 하는 죄악을 저지른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카타르 자신들이 동성애를 철저하게 터부(taboo)시 했던 기록밖에 없어, 동성애자들이 주로 행하는 항문성교는 가톨릭이 카타르를 모함하기 위한 선전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만약 낙태나 피임을 비자연적인 성교행위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그런대로 납득은 할 수 있는 일이다. 낙태에 관해서는 지금도 바티칸이 허락하지 않는 사항임을 감안할 때 중세기인 그 당시 얼마나 이를 터부시 했을까 하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카타르를 외적으로 보면 그들은 검소한 생활을 고매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그들은 검소한 생활을 극단적으로 마치 경쟁하듯 하였으며, 교회를 경멸하여 야외에서 모임을 갖거나 집이나 동네 공회당이나 심지어는 외양간 같은 창고에서 모였다. 또 그들은 참선(參禪)을 많이 하였고 약간의 생선을 먹는 정도의 채식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수도사들이 원거리 여행을 할 때에는 항상 두 사람 이상이 짝을 지어 다녔다. 이런 것을 보고 외부 사람들이 카타르는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소문을 퍼뜨렸을 가능성도 있고, 이런 이야기를 듣고 바티칸에서 그렇게 정의를 내린 것일 수도 있다. 여하튼 이 사람들은 13세기 전반에 있었던 로마 교황의 대토벌 십자군 작전으로 거의 전멸되다시피 하였고, 심산의 동굴 같은 곳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한 소수의 몇 사람에 의하여 후세에 그들의 사상이 전해졌으며, 이러한 지하의 어려운 환경에서 계속되었던 신앙이니 만치 여러 가지 형태로 종파가 나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현재 알려진 이들의 종파를 몇 개 열거하면 ‘발덴시안(Waldensians)’, ‘후사이트(Hussites)’, ‘애더마이트(Adamites)’, ‘자유정신의 형제들(Brethren of the Free Spirit)’, ‘아나밥티스트(Anabaptists)’, ‘카미사드(Camisards)’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프리메이슨(Freemason)과 깊은 연관을 갖게 되고, 신비의 신앙으로 그림자 뒤에서 존재해 오고 있다. (66%)
에세네의 사상
2009.05.10 10:00:37 (*.131.66.250)
영국의 그리스도교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일이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시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죽은 지 4년 후인 36년 산헤드린 의회는 한국의 반공법과 같은 반유대인법을 제정하여 예수의 일당을 잡아죽이기 시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가족은 물론 그를 따르던 제자들도 모두 피신을 해야 했었다. 이때 물론 각자 뿔뿔이 헤어졌겠지만, 아리마태아 요셉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마르다(Martha), 예수의 이모, 클레오파스의 마리아, 예수가 가장 사랑하였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예수가 재생시켜 주었다는 나자로 등 여럿을 데리고 영국 고울(Gaul)이란 지방으로 피난을 시켰던 것이다. 고울이란 지방은 켈트 민족이 사는 지방이었으며, 후에 아더 왕(King Arthur)의 전설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홀리 그레일이 이 곳에 보존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와 예수와 은밀히 연결되는 곳이다. 여하튼 이들은 이 곳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빌립, 누가, 바울 같은 사도들이 줄지어 이 곳을 다녀갔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지해야 할 일은 예수를 누구보다도 잘 알 만한 가족들, 특히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 야고보(James) 같은 사람들과 베드로나 바울 같은 사도들과의 사이가 교리문제로 좋지 못했던 것이다. 로마 가톨릭은 베드로의 가르침을 따랐다 하여 교황이란 직위가 베드로의 후계자를 말하는 것이고, 개신교는 어디까지나 로마 가톨릭의 교리를 중심으로 논쟁을 벌여 갈려 나간 하나의 종파이기 때문에 아직도 베드로 계열 크리스천 교회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이에 반하여 동방정교회는 성 안드레(St. Andrew)의 가르침을 따른다 하여, 미사집전 때 신부가 행하는 제식(祭式-rite)이 거의 반대로 되어 있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예를 들면 가톨릭에서는 모두 의자에 앉아 미사를 드리는 반면에 정교회는 서서 드린다. 또 가톨릭에서는 모두들 주님의 상(床)에 둘러 모였다고 해서 신부가 신도들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는 데 반하여 정교회는 신도들을 인도한다는 뜻에서 신부는 신도들에게 등을 대고 제단을 향해 팔을 벌리는 것 등 거의 매사가 반대이다. 이제 2천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누가 옳고 그른지 구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예수의 형제 야고보도 포교활동을 다른 어떤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벌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한 번도 만나 보지도 못했던 바울과 교리문제 때문에 논쟁을 벌여야 했었다. 야고보는 유대인 안에 머물렀고, 바울은 안티오크로 가 유대인 밖의 사람을 상대로 포교를 하지 않았나 한다. 만약 예수를 누가 더 잘 알 것인가라고 질문을 한다면 한 가족인 야고보를 생각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승자이고, 야고보는 예수의 말들을 전해 주는 야고보서 하나만이 신약에 채택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잠깐 성 안드레(Andrew)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원래 안드레라는 이름 자체가 희랍어 안드로스(andros)에서 왔다. 그리고 그 뜻은 남성(男性) 또는 남성다움을 의미하며, 희랍의 아카이아(Achaea)에 있다는 파트라스(Patras)라는 태양신의 칭호였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사도 안드레가 ‘비잔틴 교황’ 체제를 만들고 난 후 이 곳에서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서(西)로마의 중심인 로마에서 교황을 만들어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하였기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대결상태에 있었던 동방의 크리스천들은 동(東)로마, 즉 비잔틴제국을 중심으로 교황을 만들었고, 이 교황을 사도 안드레의 후계자라고 불렀으며, 또 이들은 안드레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이었고 처음 메시아를 알아본 사람도 안드레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안드레가 순교를 당할 때 그도 역시 십자가형을 받았는데, 그 십자가는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처럼 수직으로 반듯한 것이 아니고 'X'자 형의 십자가였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십자가’가 예수의 십자가와 마찬가지이지만 그를 빨리 죽이기 위해 거꾸로 세웠다는 십자가와 비교하면 이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그래서 ‘X’자로 된 십자가를 ‘안드레의 십자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X’형 십자가의 근원을 따져 보면, 심령을 관장한다는 ‘오르브(orb)’, 즉 천체(天體)를 상징하는 공(球)에 있는 ‘태양의 십자가(solar cross)’라고도 하고, 태양신 미트라(Mithras)를 말하는 ‘솔 인빅투스의 십자가’라고도 하는 전통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있기 훨씬 전부터 유럽 전체에 깔려 있던 신앙이었다. 그래서 ‘노스(Norse)’ 지방의 바이킹이 스코틀랜드에 침입했을 때 이 십자가를 사용했으며, 이것을 ‘워탄의 십자가(Cross of Wotan)’라고 이 사람들은 불렀고, 이 때문에 스코틀랜드나 웨일즈 국기에 ‘X’자 십자가 만들어지게 된 것을 비롯하여 많은 나라의 국기가 ‘X’자를 바탕으로 하게 된 연유인 것이다. 그리고 안드레가 순교당했다는 ‘파트라스(Patras)’라고 하는 절(寺)은 태양 아버지 신의 상징인 그의 남근상(男根像)을 모신 곳이었으며, ‘파트라스’라는 어휘는 ‘바데르, 베드라, 베드로(Pater, Petra, Peter)’라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변형되어 불려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런 단어들의 어원은 남성(男性)을 말하는 ‘안드레’의 어원과 같은 것이라는 말이 된다.
여하튼 예수의 식구들이 지금의 영국에서 포교활동을 하여 영국은 영국대로 그리스도교가 시작되어, 서기 196년에 로마인들이 크리스천화한 것보다 훨씬 오래 전에 그리스도교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영국 사람들도 최초의 그리스도교가 시작된 곳이 영국이라고 자부할 정도이다. 그리하여 영국은 성모 마리아의 무덤에 ‘성 마리아(St. Mary's Chapel 또는 Our Lady's Dowry)’라고 부르는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여기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성모 마리아 무덤에 지었다는 ‘도르민톤스(Chapel of Dormintons)’ 교회에 비하여 영국 것이 진짜라고 하면서 물적 증거가 있다고 할 정도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교는 켈트 민족에 한하는 이야기이다. 필경 성공회 계통 사람들한테 영국의 그리스도교 역사를 물어 보면, 6세기에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에 의하여 남부 영국에서부터 시작했다고 대답할 확률이 많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의 경우이다. 그리고 이 로마 가톨릭이 헨리 8세 때 와서 교황권에서 이탈하여 성공회를 만들게 되고, 이를 영국 교회라 불러 쉽게 혼동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대살육전(大殺戮戰)
십자군 원정
주위환경과 조건
역사에서 일어난 일은 항상 사건이 일어나는 원인과 조건이 주어져 있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군의 원정이 전 유럽에서 노도와 같이 일어나게 된 동기를 고찰해 보는 것은 우리가 역사를 의미 있게 배우는 일이라 생각한다. 4세기경부터 유럽 천하는 크리스천 세계가 되었고, 그 결과는 모든 민중을 거의 광신도가 되도록 만들었으며, 그로부터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14~15세기경까지의 기간을 역사가들은 ‘암흑시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모두 잘 알다시피 유럽의 역사는 항상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러나 11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은 비교적 평화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경제가 안정되어 사람들이 의식주의 필수요건을 벗어나 다른 곳에 돈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돈의 여유가 생긴다는 것은 경제활동이 활발해진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교에 관련된 생활만이 의미 있는 생활의 전부로 믿었던 열성 신자들은 평생 한 번이라도 성지인 예루살렘을 방문해 보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었으니, 지금으로 말하면 관광객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러한 원거리 여행이 성행하면서 관광사업은 물론이고, 무역이 발달하게 되고, 문화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예술이 발전되고, 심지어는 은행업까지 발달하게 되었다. 예술과 문화가 발달한다는 것은 엄격한 종교정치(宗敎政治-theocracy)를 하는 교회 당국에게는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넣어 두자. 이렇게 경제활동이 활발해지게 되면 자연 부자가 생기게 마련이고, 이 부자들은 더욱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돈의 힘으로 정치를 좌우하려는 심기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도 염두에 두고, 이를 재벌정치(財閥政治-plutocracy)라고 부른다고 알아 두자. 종교정치는 물론 로마의 교황이 관장하는 일이었지만, 재벌정치는 그 당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이 조정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돈을 벌겠다는 일편단심으로 이탈리아에는 여러 개의 도시국가가 형성되었다. 베니스(Venice), 제노아(Genoa), 피사(Pisa) 등등이 있었다. 특히 베니스는 그 대표적인 국가였고, 이들은 성지를 비롯한 지금의 중동지역과의 사이에 육로와 해로를 통하여 교역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탈리아와 희랍의 항구가 발달하게 되고, 여러 개의 지점을 가진 국제은행이 이 때부터 태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은 해군 함정 겸 상선, 말하자면 장사하는 해군을 만들어 7~8세기에 이미 모슬렘에게 점령되었던 지중해 중앙에 있는 시칠리아와 크레타 섬을 되찾아 지중해의 해상권을 차지할 정도였다. 한편 태평세대를 맞으면서 영주(領主) 또는 기사(騎士) 같은 귀족들은 할 일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전쟁에서 군사력을 가진 사람들이 세력을 갖고 그들의 존재의식을 충족하여 당당히 민중 앞에 그들의 중요성을 과시할 수 있었던 존재가치를 저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전쟁으로 죽는 귀족이 없어짐에 따라 그런 귀족들의 인구 역시 불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모두 귀한 사람이기 때문에 장성하여 분가할 때에는 땅과 저택과 많은 부하들을 먹여 살릴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는데 그럴 땅과 자산이 모자랐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전쟁을 하여 사회에서의 가치관을 높이기를 원했고, 전쟁을 통하여 새로운 영토를 확립할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국왕은 국왕대로 고민이 생기게 되었다. 영주와 귀족들의 숫자가 많다 보니 서로 세력싸움이 끊일 날이 없었고, 상대적으로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합세하여 국왕의 자산과 권력을 탐하여 이에 도전하는 압력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중앙정부의 통치자라 할 수 있는 왕은 강력한 중앙집권제도를 유지하기 어려워지게 되었기에, 이러한 현안을 타개하기 위해 왕도 전쟁을 원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도미노처럼 전달되어 결국 교황도 그의 권한에 도전을 받는 불안한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교황은 자기의 직위를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하여 어떤 조치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 결과 1075년 교황 그레고리 7세는 영적인 권한은 세속적인 권한보다 상위에 있다는 원칙(Investiture Controversy)을 발표하여, 자기가 국왕들보다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물론 말이나 이론만 가지고 자기의 지위를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교황도 국왕들을 만족시키고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쟁이 필요한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리스도 교회는 1054년에 동과 서로 갈라져 동로마인 비잔틴제국에는 동방교회, 서로마였던 소위 신성로마라고 부른 지금의 유럽은 가톨릭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그래서 로마 교황은 교리적으로 동로마를 정복하는 길을 모색했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당면한 문제는 신성 상위론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라도 같은 입장에 있는 동방교회와 공동 투쟁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 당시의 사회조건이었다.
이러한 정황하에 성지 예루살렘이 모슬렘에게 점령당하여 순례자들은 순례의 길이 막혔고, 상업인들은 장삿길이 막히게 되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한 모슬렘들은 성지점령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계속 서쪽을 향하여 점령해 오고 있어, 어차피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도 군대를 출정시켜야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비잔틴제국의 황제는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신성로마의 도움이 필요했다. 유럽 각국에서의 정책결정은 당연히 교회와 한마음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1095년 11월 27일 프랑스의 클레르몽이란 곳에서 열린 종교회의(Council of Clermont)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Pope Urban II.)는 절대적인 성원 아래 성지회복을 위한 십자군 창설을 공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종교에 의한 세계전쟁이 일어나 향후 2백여 년 동안 계속되었고, 대부분의 유럽은 처절한 피에 잠기는 살육전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교황은 많은 젊은이들이 십자군 대열에 자진 참여하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달콤한 조건을 제시하였다. 즉, 십자군으로 출정하면 모든 죄를 사해 줄 뿐 아니라 죽은 후에 천당에 가는 것을 보장하며, 출정기간 중에 얻은 전리품은 모두 사유재산으로 인정한다고 하면서,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이 준 땅을 되찾는 데 동참하라고 호소하였다. 한편 십자군 소집에 응하는 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신앙적으로 천당행이 약속될 뿐 아니라 성지순례도 하고,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국왕들은 쉽게 많은 젊은이들을 규합할 수 있었고, 이들은 의기양양하게 출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왕들은 장거리 출정에 군대를 동원하여 보낼 재력이 없었다. 그 결과 국왕들은 국왕대로 재벌가에게서 돈을 빌리게 되었으며, 출정하는 군인들은 대개 자비로 출정하도록 하였다. 농사꾼이나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던 십자군 지원병들이 예루살렘까지 갈 노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들이 갖고 있었던 것은 무식한 두뇌에 가득 찬 신앙심과 부자가 되어 보겠다는 욕심뿐이었다. 그리하여 재벌들은 이들에게 돈을 꾸어 주고 후일 이자와 함께 되갚도록 해 주었고, 모든 일을 쉽게 달성하기 위해 교황은 약탈을 허용했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군대의 지휘자로 출정한 왕들은 제대로 조직이나 훈련이 된 군대를 가지지 못했고, 전투에 서투르면서도 서로 더 많은 땅을 차지하여 국왕들 사이에 선취권을 획득하려는 욕심과 상호간의 질투 때문에 별로 전쟁의 효과를 보지 못했다. 한편 일반 군인들 역시 단순하고 무식하여 하나님을 믿는 열성만 있었고, 하늘에서 하나님이 직접 지휘를 하기 때문에 지상의 군대 지휘자라는 것은 필요도 없는 존재로, 가기만 하면 승리는 저절로 될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다만 의기충천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한 살생(殺生)을 흠뻑 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며, 그 외에는 전리품을 긁어모을 일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을 평가하여 어떤 크리스천들은 신앙 없는 두뇌를 가진 모슬렘과 두뇌 없이 신앙만 가진 크리스천과의 싸움이었다고 비유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성지로 가는 도중 무방비상태의 작은 촌락이나 어쩌다 큰 도읍지를 점령하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방화와 약탈과 때려부수는 것이 전부일 정도여서, 필경 그들은 하나님의 가호를 톡톡히 받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들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도살했을 뿐 아니라 시체를 구어 먹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금은 세월이 바뀌어 사람이 사람 고기 먹는 것을 종교적으로 죄악시 하고, 도의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믿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사람 고기를 먹은 예는 십자군이라는 크리스천들 이외에 다른 곳에서 찾기 힘들 것이다. 이 십자군들은 사람 고기 먹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우선 하나님의 적이라 생각되는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 받는 일이고, 그렇게 죽인 사람을 먹기까지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최상의 속죄를 받는 일이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의 증인들 기록(Fulcher of Chartres)에 의하면 십자군들은 어린아이나 여자들의 고기를 더 맛있다고 선호했다 하며, 어떤 사람들은 급해서 채 익지도 않은 생고기를 그냥 먹기도 했다 한다.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의 타이어맨(Dr. Christopher Tyerman)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모슬렘들은 무사이면서 동시에 철학자였고 시인이었으며, 이에 비하면 십자군 기사들은 야만적이고 미신을 무척 심하게 믿고 있었다는 십자군과 모슬렘을 비교한 증언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비잔틴제국에서는 십자군이 같은 크리스천으로서 동로마를 도와 주는 것으로 생각하여 비잔틴제국의 황제가 십자군들을 환영하였으나, 십자군들은 일단 성안에 들어가자 이들을 이단이라며 모슬렘과 마찬가지로 적으로 간주하여 닥치는 대로 죽여 버렸다. 참으로 세상이 야릇하게 되었다. 동방 크리스천들은 믿는 방식을 약간 다르지만 서쪽에서 온 십자군들을 같은 크리스천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이들은 신앙이 크게 다른 회교도 밑에서는 계속 종교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서방 크리스천 밑에서는 신앙은 고사하고 목숨도 유지할 수 없게 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 때부터 지금까지도 이들은 모슬렘과 오히려 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서방교회인 로마 가톨릭과는 자리도 함께 하지 않는 풍습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왼뺨을 대면 바른 뺨을 대라” 하는 따위의 성경말씀을 생각하면서 크리스천의 역사를 음미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독자 중에는 혹시 요즈음 로마 가톨릭과 동방교회가 다시 합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혼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 믿는다. 그들이 말하는 동방교회는 동방정교회가 아니라 동방 천주교이다. 동방 가톨릭은 물론 여러 종파가 있으나 대개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과 동맹관계를 맺고 함께 싸웠던 종파들이다. 물로 이들은 교리 면에서 많은 차이를 갖고 있으나 같은 점도 많아 동방정교회와는 근본적으로 많은 차이가 난다는 것을 잠깐 소개해 두며, 따라서 동로마인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킨 것은 회교도나 북방의 침입 때문이 아니라 믿었던 크리스천들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아 두기 바란다.
그리고 위에서 재벌정치라는 말을 소개하였다. 이탈리아 중요 도시에 건립되었던 도시국가들은 해군력을 길러 자체의 잘 훈련된 군대가 있었지만, 이들은 돈을 버는 것이 첫째 목적이었기에 막대한 돈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해로·육로로 교역도 많이 하였지만, 순례자들이 통행하는 길목 중요한 도읍에 은행지점을 각각 차렸을 뿐 아니라, 많은 국왕들에게 출정하는 군사비 조로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 주기도 했었고,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이 출정 군인들에게 개인적으로 직접 융자도 해 주었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 다국적기업과 IMF, 월드뱅크 등등의 형태로 세계를 주름잡는 재벌정치와 비교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직접 자기네 자신들의 기사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 기사단을 템플라 기사단(Order of Knights Templar)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가톨릭 안에는 많은 종단(宗團-order)이 있다. 예를 들면 콜럼버스 기사단(Order of Knights of Columbus), 예수회(Jesuit Order), 도미니칸 수도회(Dominican Order), 프란체스코 수도회(Franciscan Order) 등등 대단히 많은 종단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바티칸 산하의 조직체들이다. 따라서 템플라 기사단도 이와 마찬가지의 한 종단이었다. 위에 열거한 종단은 물론 가톨릭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개신교에는 하나의 종파처럼 활동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여하튼 템플라 기사단은 솔로몬과 헤롯의 성터에서 많은 금은보화를 찾아 엄청난 부자가 되기도 하였지만, 원래 돈이 많은 부류가 더욱더 큰 돈을 벌게 되는 법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도 국가들이 이들에게서 돈을 빌려 많은 외채(外債)가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엄청난 외채 때문에 국고가 탕진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는 교황과 짜고 템플라 기사단을 불법화시키고 모두 체포했다는 이야기를 ‘레네-르-샤토’를 소개할 때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아사신’과도 내통하여 순례자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관광사업으로도 짭짤한 돈을 벌었다고 하였다. 또 당시 경제의 중심지이고 부자가 사는 곳으로 유명했던 베니스는 세계 재벌정치의 본거지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북쪽의 노르만이 1196년 희랍을 침공했을 때 비잔틴의 황제 알렉시우스(Alexius)는 베니스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베니스는 도움의 조건으로 비잔틴 지역인 소아시아, 즉 지금의 중동지역과의 교역을 위한 통행세를 면제해 달라고 하였다. 그 결과 이 때부터 수백 년간 베니스 상인들은 세금 없이 교역을 하여 그 세력이 크게 신장하게 되었고, 드디어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연안국들의 경제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때 이미 국제 재벌가들은 세계를 거의 장악했었는데, 결국 프랑스에서 템플라 기사단을 모두 잡아죽이고 가톨릭 교회의 탄압으로 인해 재벌에 의한 세계정복이 천 년 가까이 지연되었던 것이다.
에피소드
십자군의 목적을 한마디로 말하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던 모슬렘인 터키 사람들을 축출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1099년 7월 7일 예루살렘의 왕(King of Jerusalem)이라고 불리게 되는 프랑스계 고드프르아-디-불롱(Godefroi de Bouillon)이라는 왕의 통솔하에 십자군이 예루살렘 성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터키 사람들은 쫓겨나고 이집트계 모슬렘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성안은 모슬렘, 유대교인, 크리스천들이 서로 존중하면서 화목하게 잘 살고 있는 중이었다. 그 실(實)통치자 격인 모슬렘은 크리스천들이 신앙생활 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도와주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평화가 목적이 아니고 영토와 전리품을 목적으로 했던 십자군은 이러한 현실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성밖에 진을 친 이들은 오래 시간을 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성밖에는 물이 없어 우선 음료수 문제가 시급했으며, 군량미도 떨어졌을 뿐 아니라 성을 공격하기 위해 성벽의 높이와 같은 지렛대 모양의 목조 기계를 건설할 만한 나무가 부근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난문제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던 십자군 부대의 종교책임자 아다마(Adamar) 주교는 자기에게 성령으로 보이는 어떤 것이 있었다고 하면서, 7월 8일 금요일부터 2만 명이나 되는 십자군들을 아무 무기도 없이 맨발로 찬송가를 부르면서 성 밑에 운집하도록 하고 주교는 장시간 설교를 하였다. 만약 이때 모슬렘 군대가 공격을 가했다면 십자군들은 전멸되었을 것이지만, 종교행사로 여겨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이때 십자군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기도를 하고 예수가 산상수훈을 했듯이 아다마 주교가 설교를 하는 동안 성벽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무너질 줄로 믿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계속하여 기도를 하고 있었지만 성벽이 무너지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여러 날 동안 반복하여 이런 일을 계속하는 것을 보고 모슬렘들이 방심을 한 틈을 타, 7월 15일 갑자기 무장한 십자군들은 성안으로 들이닥쳐 성을 점령하고 보이는 대로 모슬렘이건 유대인이건 크리스천이건 무조건 도살하였다. 입성한 날이 금요일이었다. 나머지 모스크 안에서 진을 치고 있는 모슬렘과 숨어 있는 모슬렘에게 만일 요구하는 금품을 내놓고 모스크 안에서 금요일 기도를 드리는 모슬렘은 생명을 보장한다고 하였다. 이 말을 믿은 모슬렘들은 귀금속을 모아 바치고 모두 피난처인 모스크 안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아침에 십자군들은 이들을 모두 죽이기 시작하였다. 그날 밤이 되었을 때에는 모스크 내부 바닥은 죽은 사람들의 피가 발목을 넘칠 정도였으며, 십자군들은 밤새 찬송가를 부르고 손뼉을 치며 주님을 외치면서 예수가 부활 전까지 누워 있었다는 성묘(聖墓) 앞에서 기도를 드렸다. 마치 어떤 교회에서 방언을 하며 손뼉 치고 찬송가 부르며 울면서 기도드리는 장면과 비슷했던 것 같다. 십자군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서 특별한 은총을 받게 된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때 모슬렘들이 당했던 일이 하도 억울하여 성전(聖戰), ‘지하드(Jihad)’라는 말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며, 그렇게 몰살을 당했던 모스크가 요즈음 말썽 많은 ‘골든 마운트(Golden Mount)’의 거대한 금빛 돔(dome)이 있는 ‘알 아크사(Al Aqsa)’ 모스크 자리에 있던 건물이었다. 이러한 역사가 있기에 모슬렘에게는 골든 마운트의 모스크가 각별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3차 십자군 때의 일이다. 영국의 왕 리처드 1세(King Richard I., 1157~1199)가 1191년 현재 이스라엘 하이파 동북방 16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당시의 큰 도시였던 에커(Acre)라는 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성을 포위한 지 2년째 될 때였다. 예루살렘에 가기 위해서는 이 성을 함락시켜야 했다. 성을 지키고 있던 회교도의 살라딘(Saladin) 왕은 식량이 다 떨어져 항복할 의사로 리처드와 협상을 하기 시작하였다. 리처드 왕은 강력한 자세로 2천 명의 십자군 포로들을 돌려 줄 것과 돈 20만 디나를 지불할 것, 성안의 백성들은 옷가지만 등에 지고 성을 떠날 것,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보배인 예수가 처형될 때 사용했다는 십자가를 내놓을 것을 조건으로 걸었으며, 교환조건으로 모슬렘 포로들을 되돌려 보내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성안에 있던 성민들은 옷만 갖고 빈손으로 떠났다. 이들이 장사진을 이루면서 떠나는 광경이 십자군의 기록에 매우 인상 깊게 표현되었다 한다. 십자군 기사들은 회교도들의 위엄과 근엄함에 기가 질려 “저들은 운이 나빠 패하기는 했지만 절대로 항복한 것은 아니다”라고 평했다 한다. 그리하여 리처드 왕도 이들을 존경하여 군인들에게 떠나는 성민들에게 욕하거나 돌을 던지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 당시의 전쟁은 중국의 삼국지 이야기 이상으로 재미있다. 모슬렘과 크리스천들이 전쟁을 하면서도 모슬렘 왕 살라딘은 적장인 영국군의 리처드 왕이나 프랑스군의 필립 2세 왕에게 맛있는 과일을 선사하였으며, 높은 지위에 있는 포로를 잡았을 때에는 절대로 죽이지 않고 대신 몸값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천들도 영국 웨일즈 지방 켈트 민족의 특기인 거대한 활(포병의 기원)은 크리스천간에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교황이 특명을 내려 최소 십자군 시대에는 이것이 행해졌었다. 그리하여 살라딘은 그 요구조건을 세 번에 걸쳐 시행하겠다 하고 리처드의 동의를 얻어 8월 11일에 첫번째로 포로들의 명단과 금액 등을 우선 갖고 왔다. 약속한 대로 숫자는 모두 맞았으나 기대했던 고위급 포로가 이에 포함되지 않자 리처드는 첫번째 송환에 고위급 포로들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살라딘은 이를 거절하여 다시 아무런 교환 없이 대결상태가 다시 계속되었다. 아흐레나 기다리던 리처드는 그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8월 20일 2천7백 명이나 되는 모슬렘 포로들을 모두 쇠고랑을 채워 성밖에 나열시켜 놓고, 성안의 모슬렘들이 내려다보는 앞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여 버렸다(이에 대하여 어떤 기록은 군인 포로뿐이라고 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부녀자와 어린아이들도 포함되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십자군 사이에는 포로였던 모슬렘들이 보석을 삼켜 버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십자군들은 이들 시체의 배를 갈라 보석을 찾느라 시신들이 난장판이 되었다. 리처드 왕의 이러한 잔인성은 수백 년이 지난 후에도 모슬렘 민족들에게 전설이 되어 내려와, 지금도 우는 아이에게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리처드 왕이 너를 데리러 온다”라고 상습적으로 말할 정도였다. 한편 이러한 일에 놀란 살라딘은 곧 부근의 군대를 동원하여 배치시켰으나 때는 이미 늦어 살상을 막을 수 없었고, 격분한 살라딘은 자기의 1천6백 명 십자군 포로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그리고 십자가도 이때 없애버려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풍문에 의하면 그 십자가는 다마스커스의 모스크를 짓는 데 입구 위의 재목으로 사용했다는 말도 있다.
또 다른 유명한 에피소드는 프랑스에 은둔자라는 별명을 가진 베드로(Peter the Hermit)라는 중(monk)이 있었다. 이 사람은 ‘무일푼의 월터(Walter the Penniless)’라는 동조자를 얻어 1096년 여름 지금의 독일과 프랑스 지역에서 나귀를 타고 커다란 십자가를 들고 다니면서, 무자비한 모슬렘을 쳐 없애야 한다는 십자군 의용군 모집유세를 하여 주로 무식한 농사꾼들로 구성된 십자군을 만들게 되었다. 원래 광신도가 되면 그 잔학성이 무서운 것은 사실이지만, 광신도가 무식하면 할수록 그 정도는 상상을 초월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처음 도착한 곳은 헝가리 지역으로, 이 곳은 이미 동방정교 계통 크리스천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었다. 당시의 십자군의 적은 물론 모슬렘이 주적이었지만, 로마 가톨릭 아닌 모든 크리스천들도 적으로 간주되어 갓난아이들까지 죽여 없애 뿌리를 뽑는 길만이 올바른 크리스천의 길이라고 교회는 가르쳤고, 신도들은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물론 이 때는 이슬람이 파죽지세로 퍼지면서 과거 크리스천 영역이었던 곳을 점령하였고, 이들은 십자군처럼 크리스천들을 죽이는 대신 모슬렘으로 개종시키는 데 더 열중하였다. 그리고 끝내 개종을 않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사회적 제약은 있었으나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여 교회도 갖고 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도 해 주었다. 그런데 처음 헝가리에 도착한 베드로의 십자군은 그 길로 헝가리인 4만 명을 학살하였으며, 그 여세를 몰아 발칸 반도인 베오그라드로 향하였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살해당한 시체가 즐비하고, 약탈과 방화로 일관하였으며, 베드로와 월터는 오만하여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십자군들은 잘 짜여진 군대로서의 조직이라기보다 오합지졸 광신자들로 구성된 폭도들에 불과하였고, 십자군들이 이처럼 야만적이고 굶주린 이리처럼 사람을 죽이고 죽은 시체의 고기를 먹고 약탈하기 때문에, 많은 십자군들이 도중에서 낙오되든가 숫자가 별로 많지 않았을 때에는 지방 주민들에게 살해되기도 했다. 이러한 십자군들이 드디어 터키의 정규군과 대적했을 때에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때 월터의 군대는 모두 포로가 되어 먼저 자기네들이 행했던 바대로 하나씩 살해를 당했으며, 베드로의 군대도 역시 거의 몰살당하고 자신과 부하 몇만 목숨을 건져 도망하여 다른 십자군에 편성되어 종군하다가 1099년 예루살렘 탈환의 일원이 되었고, 1115년 벨지움에서 생을 마쳤다 한다.
카타르(Cathar) 멸종작전
위에서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출정한 십자군이 진로에 있던 동방교회의 크리스천들을 이단이라고 죽일 수 있는 대로 죽였다는 설명을 했다. 그러나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에 가는 길에 이단이 있을 때에 그들을 학살했지만, 이단을 없애기 위해 일부러 군대를 이동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카타르 토벌을 위한 십자군은 같은 크리스천이면서 이단이라는 이유로 로마 교황이 명하여 십자군을 일으킨 예이다. 여기서 카타르라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그노시스(Gnosis)’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1209년에 교황 이노센트 3세는 기병대와 보병으로 구성된 3만의 십자군 병력으로 랑그도크(Languedoc) 지방에 가서 카타르의 뿌리를 뽑아 없애라는 출전명령을 내렸다. 이 지방은 한국에서 영남지방, 호남지방 하는 식으로 프랑스의 남부, 마르세유 항구 서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남한의 약 절반 정도 되는 산악지대이다. 질풍처럼 들이닥친 이 십자군들은 도착하는 길로 농작물과 건물을 모두 불사르고 사람들을 보이는 대로 모두 죽여 버렸다. 당시 십자군 조직에는 공산군의 정치보위부 장교나 군종 신부처럼 교황을 대표하는 성직자가 있어 십자군의 행동지침을 지시했는데,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교황에게 어떻게 이단과 이단이 아닌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지 질문을 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교황은, “모두 죽여라.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은 알아서 구별하실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따라서 당연히 전군에 무차별 살해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으며, 이 성직자는 후에 교황에게 보고하는 서한에, “신분이나 나이 또는 남녀 구별 없이 모두 죽이고 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썼다고 한다. 역사가들은 이 ‘카타르 토벌작전’이 근대 유럽 역사상 첫번째 인종말살사건으로 보고 있다. 이리하여 카타르 토벌작전은 십자군의 직접적인 토벌이 1244년까지 35년이나 계속되었고, 그 후에도 계속되어 약 40년에 걸친 인종말살작전이 자행되었다. 그러니까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 시간과 비슷한 기간 동안에 전 국토에 있는 카타르는 보이는 대로 죽여 없앴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 배치된 십자군들은 다른 십자군들과 마찬가지로 원죄를 포함한 모든 죄를 사해 주는 것과 동시에 죽은 다음에 천당 가는 것을 보장하며, 약탈한 모든 전리품을 개인 자산으로 인정해 주었으며, 그 대가로 4개월 복무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군 병사의 입장으로 보면 4개월간 군복무를 하면 허가받은 강도질에다 천당까지 간다니 그런 후한 하나님이 또 어디 있으며, 그런 수지맞는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고 예루살렘 행의 십자군에 비하면 적군이라고 대적할 군대도 별로 없고 모두 민간인인 부락에 가서 약탈하고 죽이는 것이 임무라니 얼마나 안전한 군복무였을까? 필경 동네 신부나 주교에게 뇌물을 많이 바치고 카타르 토벌군에 지원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시의 랑그도크 지역은 지금처럼 프랑스의 일부가 아니었고, 프랑스보다는 오히려 스페인과 가까운 언어와 문화와 정치적 유사점을 갖고 있었으며, ‘레옹(L?on)’, ‘아라공(Arag?n)’, ‘카스틸(Castile)’과 함께 하나의 독립국이었다. 그리고 비잔틴 문화권을 제외한 당시 크리스천계 유럽지역에서 가장 문화가 발달되어 희랍, 아랍, 히브리 철학을 즐겨 배우고 있던 곳이었으며, 이에 비하면 십자군들의 고향인 북유럽 사람들은 야만에 해당할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랑그도크 사람들은 낭만을 즐기는 문화생활에 심취되었고, 마음에 여유와 포용성이 많았으며, 이해심이 많아 종교의 자유와 상대의 신앙을 존경하는 사회풍토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에, 무식한 북쪽 사람들은 거의 맹신으로 광신자가 되어 물불을 가리지 못하고 마치 귀신에 홀린 사람모양 날뛰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식한 사람들이 광신도가 되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텅 빈 이 사람들의 머리 속에 진리라고 무엇을 하나 집어넣어 주면 세상에 그것만이 진리인 줄 알고 안하무인 격으로 날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청소년들을 정신교육시켜 전선에 보내면 가장 용감한 군인이 되는 것이고, 한국의 옛말에 “무식한 놈 사람 잡는다”라는 속담이 얼마나 진리를 알리는 소리인가 새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 지방에도 로마 가톨릭이 있기는 했지만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고, 특히 부패한 교회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별로 인기가 없어 어떤 성당은 사람이 없어서 30년 동안이나 미사를 드리지 못한 곳도 이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이 지역이 그렇게 문화가 발달되었던 이유는 랑그도크 지역 부근에 마르세유라는 유명한 항구가 있어 그 곳을 통하여 많은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역시 피레네(Pyrenees) 건너편 스페인을 통하여 세계 다른 지역과 문화교류가 빈번했었다. 그런 이유로 카타르 중에 유명한 예술인이나 과학자, 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북쪽의 상류 사람들은 랑그도크를 항상 선망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반면에 랑그도크 사람들은 안일주의에 사로잡혀 인생을 즐기고 인생의 철학적인 의미를 고찰하는 일에 몰두하여 북쪽에서 일어나는 일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아, 십자군이 무기를 갖고 쳐들어올 것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정신문명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십자군이 출동하기 약 반세기 전인 1145년 로마 가톨릭에서 교리학자로 유명했던 성 베르나드(St. Bernard)가 ‘카타리’라는 이단들에게 진정한 크리스천이란 어떤 것인지 옳게 가르치겠다는 생각으로 ‘랑그도크’로 간 일이 있었다. 그가 도착하여 놀란 것은 카타르의 이단적인 교리라는 것보다 오히려 자기가 속해 있는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이 얼마나 극심했나를 알게 된 것이었고, 또 다른 중요한 점은 그가 도착하여 카타르를 교육시키는 설교는 고사하고 오히려 자신이 그들의 설교에 감동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는, “카타르의 설교는 우리의 어떤 설교보다 훨씬 더 크리스천적이며, 그들의 신앙적 양심은 순수한 것이다”라고 공언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종교관이나 생활방식이 얼마나 심오하고 매력적인가를 단편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며, 철두철미했던 정통 가톨릭의 지도자 격이었던 베르나드 같은 사람이 이 정도였다면 생각 있는 일반 신도들은 어떠했을까 하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로마의 교황청에서 볼 때에는 랑그도크란 지방이 눈엣가시처럼 보인 여러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랑그도크 지역이 문화가 발달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 윤택하여 다른 곳 사람들이 항상 동경하는 지역으로 대두되었고, 자기네보다 격이 다른 기독교가 있었을 뿐 아니라 이것이 점점 인기를 끌어 확장일로에 있어 그냥 놓아두면 자기네들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가톨릭에서 볼 때에는 추호도 수용할 수 없는 이단적 교리였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필경 교황으로서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들의 뿌리를 뽑아 없애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을 것으로 믿는다. 실로 120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카타르계 그리스도교는 지금의 독일지방, 플랑드르(Flanders) 지방, 샹파뉴(Champagne) 지방에 깊이 뿌리를 내렸으며 계속 다른 지방으로 번지고 있어, 로마에서는 ‘남쪽에서 오는 문둥이 유행병’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리고 이 유행병의 중심지가 랑그도크 지방에 있는 알비(Albi)라는 도시였으며, 로마에서는 주로 “알비 사람”이라 하여 “알비젠시안(Albigensians)”이라고 흔히 불렀다. 알비(Albi)라는 말은 카타르어로 요정(妖精-elf 또는 ylbi 또는 elbe)이란 뜻이고, 젠스(-gens)는 혈통이란 뜻이다. 다시 말해서 요정의 핏줄을 없애 버리는 출정(出征)이란 뜻으로 알비젠시안 십자군(Albigensian Crusade)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었다. 또 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카타르(Cathars), 카타레(Cathares) 또는 카타리(Cathari)라고 각기 다른 이름을 사용하였으나 이는 모두 같은 뜻이다. 둘째로는 정치적으로 북쪽의 영주들은 남쪽의 기름진 땅과 지중해 연안의 번영하는 경제상을 무척 탐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남쪽 지중해 연안 땅을 소유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곳에 카타르라는 이단 종교가 생겨, 이 지역에 쳐들어가 땅을 차지하는 좋은 구실도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황이나 영주들에게는 다만 화약을 터뜨릴 뇌관만이 필요하였다. 그러던 중 드디어 때는 왔다. 1208년 1월 14일 주(駐)랑그도크 교황 사절이었던 디 카스텔노(Pierre de Castelnau)라는 사람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살인범은 교회의 성직자에게 불만이 많은 사람으로 카타르와는 무관한 사람이었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는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서슴지 않고 카타르의 소행이라고 단정하여 공표하고, 즉시 십자군 조직을 명령했다. 이번의 토벌작전은 과거 백여 년 동안 이미 간헐적으로 카타르를 박해하던 것과는 달리 완전히 뿌리를 뽑아 다시는 카타르 같은 이단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결심이었다. 이 십자군의 총책임은 시토(C?teaux)의 대수도원장이 맡아 지원병을 모집하였고, 군대의 사령은 몽포(Simon de Montfort)라는 영국계 프랑스 귀족이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토벌작전으로 유럽의 중세기 역사상 가장 발달했던 문명을 파괴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또 이 토벌작전에 참가한 사람 중 스페인의 광신도로 유명한 구즈망(Dominic Guzm?n)이란 사람도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이단을 광적으로 증오했던 사람이며, 1216년 자기의 이름을 따 ‘도미니칸(Dominicans)’이라는 수도원을 차린 사람이고, 후에(1478경) 이 도미니칸 수도승들이 중심이 되어 소위 ‘홀리 인퀴지션(the Holy Inquisition)’이라는 유명한 이단사냥이 이루어져 또 다른 피비린내 나는 유혈극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도미니칸 사제단은 17세기에 인도 고아(Goa)에서도 자기네의 것과 조금 다른 그리스도교를 믿는다고 철저하게 크리스천들을 잡아죽였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 그리스도교 역사상 항상 그러했듯이, 이들 알비젠시안 십자군들의 적은 카타르 신앙인뿐이 아니었다. 랑그도크에는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귀족들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트렝카벨(Trencavel)이나 툴루스(Toulouse) 같은 가문으로, 이 지방에 살던 많은 유대인들과 친분이 대단히 두터운 사이였다. 이런 가문들은 십자군의 토벌대상이 되었고, 따라서 그 동안 이런 사람들의 덕으로 유대인들이 보호를 받고 안일한 생활을 하던 것이 끝나게 되었다.
한편 1218년에 총사령관 몽포는 툴루스 가문의 요새를 포위하고 공격하다 전사하게 된다. 그러나 잠깐 주춤했을 뿐 토벌은 그 이후에도 사반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243년에는 조직된 저항세력을 모두 토벌하게 되어 카타르의 모든 도시, 마을, 본거지를 점령하였으며, 다만 원거리에 있는 자연요새를 방패로 하여 반항하는 미세한 조직 몇 개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마사다와 비슷한 ‘몽세거(Monts?gur)’라는 자연요새로, 마치 수많은 산봉우리 중에 우뚝 솟은 범주와 같이 생긴 곳에서 10개월 동안 수없이 거듭된 공격에 버티고 있었던 것이 카타르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몽세거는 1244년 3월에 함락되었고, 이것으로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카타르라는 것이 남부 프랑스에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라두리(Emmanuel Le Roy Ladurie)라는 사람은 몽세거가 함락된 지 반세기 후에 생존한 카타르인을 찾아 수집한 여러 가지 책을 종합하여 그들의 연대기와 활동 등을 묘사한 ‘몽테일루(Montaillou)’라는 책을 썼는데,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였다. 그리고 토벌작전이 끝난 후에도 살아 남은 사람들은 극도로 작은 숫자이지만 자기들의 교리를 지키면서 동굴 속에서 살았고 산발적이지만 얼마 동안 게릴라전을 계속하기도 하였으며, 레네-르-샤토(Rennes-le-Ch?teau) 같은 곳을 기반으로 하여 비밀리에 카타르의 신앙을 꾸준히 지켜 왔다. 그리하여 많은 학자들이 카타르의 사상을 추적하여 그로부터 분파한 가지들을 찾아 많은 글을 썼다. 즉, 발덴시안(Waldensians), 후사이트(Hussites), 애더마이트(Adamites), 자유정신의 형제들(Brethren of the Free Spirit), 아나밥티스트(Anabaptists), 카미사드(Camisards) 등을 열거할 수 있으며, 이들은 영국에도 피난 가서 18세기 초 런던에 많은 지파가 있었던 기록이 있다.
마녀사냥
북미주에서는 매년 10월 31일 ‘핼러윈(Halloween)’이라 하여, 특히 여자 아이들이 마귀할멈으로 변장하여 집집마다 다니며 캔디 동냥을 한다. 이 마녀(魔女)들은 길고 검은 옷을 입고 창이 넓은 고깔모자를 쓰며 코는 크나큰 매부리코를 하고 긴 빗자루를 들고 다닌다. 이것이 일반이 알고 있는 마녀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만들어 낸 마녀상일 뿐이지 진짜 마녀와는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는, 완전히 창작해 낸 마녀이며,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도 교회가 이미 심어 놓은 마녀상을 영화 제작하는 사람들이 반영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진짜 마녀는 어떻게 생겼는가? 진짜 마녀는 앞집 옆집 아주머니나 우리 집 어머니나 이모 삼촌 등 아무런 표가 없는 자연스런 보통사람들일 뿐이다. 그 사람들이 만약 다른 점이 있다면, 그리스도교 교회는 갈지언정 진실로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점뿐이다. 한국의 경우에 비유하여 이야기한다면, 무당이나 점치는 사람, 산소 자리 보는 사람, 토정비결 보는 사람, 불공드리는 사람, 제사 지내는 사람, 산신령에게 아기 낳게 해달라고 비는 사람, 부적 붙이는 사람, 손금이나 관상 보는 사람, 점치는 사람 등등 모두가 마녀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마녀라 하여 마녀는 여자로 생각하지만, 이는 여자가 많았다 뿐이지 반드시 여자만이 마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마녀의 근본에 대하여 설명을 좀 해보자. 마녀를 영어로 ‘위치(Witch)’라고 부른다. 우리말로 가장 가까운 유사 단어는 무속인(巫俗人)이라 하면 될 것 같다. 이 단어의 어원은 켈트(Celt)어로서 남자는 위차(Wicca), 여자를 위체(Wicce)라고 불렀던 것이 영어로 옮겨지면서 음을 따 위치(Witch)로 표기된 것이다. 이것은 영어권에서의 이야기이며, 아이슬란드 등 다른 지역에서도 vita, vitki, vizkr, wischard, guiscart 따위로 부르고 있었으며, 결국 발음이나 뜻은 모두 비슷하여 같은 내용을 내포하였던 것이다. 위치들은 지식층이었고 현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영어에서 현명하다는 말을 ‘wise’ 또는 ‘wisdom’이라 하고, 재치 있는 것을 ‘wit’라 하는데, 그 어원은 모두 켈트어 ‘wic’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영국계 성(姓)으로 ‘Whittaker’라는 이름이 있다. 이 성은 Witakarlege에서 왔고, 그 어원은 wizard나 witch에서 온 이름이다. 여하튼 켈트 민족은 현재 영국의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와 프랑스의 브리통(Briton)에 사는 민족으로서 앵글로색슨족인 잉글리시 민족에게 점령당하여 살고 있는 피지배민족이고, 그런 이유로 지금도 이 사람들은 영국인에 대하여 대단한 적개심을 갖고 있다. 켈트족은 한때 지금의 중서부 유럽을 장악하여 지배한 경험도 있는 민족으로 고대 때부터 남녀평등사회를 유지하였고, 특히 여자들의 특수성을 높이 평가하여 존중하고 있던 사회였다. 어떤 사람들은 모계사회였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실제로는 여자들이 남자의 상위(上位)에서 지배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같은 지역에서 드루이드교(Druidism)이라 하여 대개 남자들이 드루이드(Druid)라고 부르는 제사장이 되었고, 사회의 정치·종교의 지도자가 되어 같은 사회에서 공존하고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이 사람들도 파간(Pagan), 토속종교를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역시 마녀로 취급되었었다. 위치들이 사회활동에서 주로 관심을 가진 면은 여신을 섬기면서 여자들의 본분인 애를 낳는 일, 즉 산파(産婆)로서 해산하는 일을 도우며, 어린아이와 산모의 건강을 위시하여 모든 질병을 고치는 의사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한방의(韓方醫)가 했던 일을 그 곳에서는 위치들이 담당했던 것이다. 또 이들은 병을 고치기 위하여 점성학을 잘 알아야 했다. 왜냐하면 태어난 시와 장소에 따라서 체질이 정해지고, 그 체질에 따라서 특정한 병에 걸리기 쉬운 사람이 있으므로 육체의 기능에 따라 강하고 약한 점을 가려내 진단에 도움도 되고 예방도 미리 할 수 있었던 것이고, 점성학을 잘 알면 사람의 점도 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사주팔자나 점치고 손금 보는 것이 사회에 깊이 뿌리를 박아 없애기 어려운 것이나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 바로 위치의 신앙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모두 잡아죽이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못나도 남자는 여자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그리스도교의 남권우월주의 사상을 들여오면서 의사역할을 모두 남자가 떠맡게 되었고, 여자들이 병을 고치는 것은 마땅히 마녀이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런 여자들은 불태워 죽여 마땅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불과 백수십 년 전까지도 서양에서 의사가 되려면 점성학 공부부터 시작한 것이다. 여하튼 유럽은 기독교화되면서 엄청난 피의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위치가 틀림없다는 증명이 있어서 죽인 것이 아니었다. 밉거나 이상하거나 하면 모두 위치로 몰아 붙이고 죽여 버렸다. 특히 가장 심하게 마녀사냥을 하던 15세기에서 18세기 초까지는 교회가 돈 버는 방편으로 마녀를 만들었다. 애당초 1184년 교황 루시우스 3세(Lucius III.)가 마녀를 없애야 한다고 시작된 것이 1484년 12월 5일 교황 이노센트 8세(Pope Innocent VIII.)가 위치들을 더욱 샅샅이 잡아 뿌리를 뽑으라는 칙령을 내린 후부터 극에 달하였고, 특히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전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마치 열병이 퍼지듯 광란적으로 퍼져 나갔다. 그는 칙령에서 “가톨릭 신앙을 통하여 구원받는 일은 마다하고 교회를 이탈하여 주문을 외우고 해코지를 하며, 미신과 부적을 만들어 마귀를 부르고, 마귀와 교접(交接)하는 남녀가 많이 있다…”라는 식으로 시작해서, 위치들은 유아와 동물들에게 질병과 고통을 주어 살해하고 곡식도 못 자라게 만들 뿐 아니라 남자는 아내와, 여자는 남편과 성교를 기피함으로써 성기능을 저하시키고 잉태를 못하게 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혼음(混淫)과 난음(亂淫)을 하여 신성을 모독하고 있다고 그들의 죄상을 열거하였다. 이 칙서는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 덕으로 전 유럽에 인쇄되어 전달되었고, 동시에 독일의 성서학자이며 교리 전문가인 크래머(Heinrich Kramer)와 스프렝거(Jakob Sprenger)를 시켜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라는 마녀사냥 지침서까지 만들어 전 유럽에 보급되도록 하였다.
위치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85% 정도가 여자였기 때문에 위치 하면 여자를 생각하게 되는데, 대개는 어느 사람이 위치 같다라는 밀고로 잡혀 들어가게 된다. 밀고를 받을 때에는 그 사람이 마녀라는 증거는 필요치 않았다. 다만 그런 의심이 간다고 하면 충분했던 것이며, 다만 보충참고자료로 왜 그렇게 믿게 되었는지 정보를 제공받았던 것이다. 일단 잡힌 용의자는 자기가 위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러니까 무죄가 증명될 때까지는 유죄였던 것이다. 그런데 증명하는 방법이 기가 막힌다. 무조건 자기가 위치가 아니라고 하면, 위치라고 고백할 때까지 계속 고문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도 아니라고 부인을 할 때에는 사실인지 아닌지 증명하는 실험을 하게 된다. 즉, 사지를 꽁꽁 묶어서 강이나 호수나 바다의 물에 빠뜨린다. 그리고 만약 몸이 물에 가라앉으면 위치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인데, 물에 가라앉을 때에는 숨을 쉴 수 없어 죽은 다음의 일이기 때문에 증명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고, 물에 뜨면 위치라는 것이 증명되어 불에 태워 죽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 앙심으로 밀고만 하게 되면 빠져 나올 길 없이 죽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인퀴지터(Inquisitor)라고 부르는 마녀사냥꾼은 마을에 다니면서 수소문하고 협잡까지 하여 그럴싸한 사람을 잡아들이는 것이 그의 임무였고 그의 사업이었다. 일단 마녀로 입건이 되면 그 때부터 그 마녀를 잡아간 사람이나 고문한 사람들의 임금을 마녀 자신이 지불해야 되었다. 지금도 지불내역이 실린 상세한 장부기록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마녀로 확정되어 화형을 당하게 되면 그녀의 재산은 모두 몰수하여 그 자산의 3분의 1은 교황청으로 가고, 3분의 1은 지방 관청과 교회에서 갖고, 나머지 3분의 1은 마녀사냥꾼 몫이었다. 그래서 마녀사냥꾼은 그야말로 돈벌이하러 나섰던 것이고, 교회도 이렇게 하여 많은 돈을 빼앗아 모두 부자가 되었다. 1343년에는 아마 교황청에 가야 할 돈이 제대로 입금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교황 클레멘트 6세는 플로렌스(Florence)와 루카(Lucca)에 군대를 보내 자기네 몫을 완력으로 가져가기도 하였다. 이런 것이 비난이 높아지자 1630년에 신성(神聖)로마 황제가 자산차압을 못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예를 들어 반버그(Banberg)란 한 마을의 경우는 1620년대에 연평균 100명 정도 마녀를 잡아내던 것이 1630년에는 25명으로 줄고, 1631년에는 한 명도 없는 통계가 나왔다. 다시 말해서 생기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마녀를 만들 이유가 상실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녀사냥이 한창일 때의 사회상은 남자보다 여자 인구가 훨씬 많았었다. 그 이유는 남자들은 십자군, 질병 등 많은 전쟁으로 인해 죽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철저한 일부일처주의의 사회에서 결혼 못한 잉여 여자들이 미혼으로 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또 대부분 이 여자들은 생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었다. 철저한 남존여비 사회에서 미혼 여자가 나서서 돈을 벌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자연히 그들이 주로 나서는 일은 임신한 여자들이 출산하는 일을 돕는다든가, 특히 아이들이나 여자들의 병을 관리하는 일, 점치는 일 등 대개 가정 여자들 사회를 통하여 돈을 버는 방법을 취했고, 독신으로 늙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또 남편 없는 독신 여자들을 겁탈하려는 못된 남성들이 많은 사회에서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행동을 조심해야 했기 때문에 이들의 생활방식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이기 쉬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먼저 희생자가 되었다. 또 마녀사냥꾼들은 어린아이들을 무척 미워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10~12살 정도의 어린이들도 많이 희생을 당했기 때문이다. 1629년에는 뷔츠버그(W?rzburg)에서 7살짜리 어린이들도 죽여 가장 어린 나이의 마녀가 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단 마녀라는 의심으로 잡아가게 되면 옷을 완전히 벗겨 나체로 만든다. 왜냐하면 마녀가 죽인 어린아이의 살갗으로 물레질하여 천을 짜 옷을 해 입을 가능성이 있고, 마녀들이 그런 옷을 입고 있으면 마술을 피울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다음에는 모두 면도질하여 몸에 털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성경의 ‘삼손(Samson)’ 이야기에서처럼 털이라는 것은 신비한 힘을 갖고 있다고 믿어 마녀들도 털이 있으면 무서운 위력을 발생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며, 마귀와 사귄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서이다. 흉터나 사마귀 따위는 물론 마귀와 사귄 증거가 되는 것이며, 특히 ‘마귀 젖꼭지’나 ‘마녀의 젖꼭지’라고 부르는 것을 즐겨 찾았는데, 이것은 질에 있는 음핵을 말했던 것으로 여자가 음핵이 좀 크면 이들은 쾌재를 불렀던 것이다. 음핵이 큰 이유는 마귀가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 젖을 빨듯 빠는 곳이기 때문에 그들의 젖꼭지라는 이치였다. 그리고 남자 관리들이 몸을 깨끗이 씻어 주었는데, 특히 살이 접힌 곳이나 구멍이 있는 곳은 철저하게 청소를 했다. 그것은 마녀들이 세례받지 않은 갓난아이를 태워 만든 가루를 몸에 뿌려 마술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이런 깊숙한 곳에 가루가 묻어 남아 있기 쉽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러한 수속을 거친 다음에는 자백을 받는 일이 시작된다. ‘마녀의 망치’라는 마녀사냥 지침서에 의하면 본인이 자발적으로 고백하지 않는 한 마녀를 처벌할 수 없다고 되어 있었다. 물론 대단히 양심적이고 사리에 맞는 법이었다. 따라서 ‘인퀴지터’에게는 몸에 있는 증거만으로는 불충분하여 자백을 받아 내야 했다. 자백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자백은 마귀와 성교를 했다는 고백과 위치의 제사잔치(祭祀-Sabbath))에 참석했다는 고백이다. ‘마녀의 망치’ 책에 마귀와 어떻게 성교를 하고 느낌이 어떤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고, 마녀들의 잔치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어 조사관들은 고문을 하면서 이랬지?, 저랬지? 하고 질문하고 용의자는 다만 “네, 네”라고만 대답하면 긍정으로 되어 자백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책의 설명에 의하면 공정한 자백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한 번 자백을 하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서 다시 같은 질문을 했다. 그때 먼젓번과 같은 내용의 자백을 받게 되면 완전히 자유의사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고백한 자백이 되기 때문에 고문에 의한 자백이 아니었다는 증명이 되었다. 이 절차가 끝나면 시중 관리에게 이관되어 마을 광장에서 불태워 죽이는 수속만 남게 되는 것이다.
마귀와 성교를 했다는 증거로 조사관들이 조서를 꾸민 내용은 가관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마귀의 성기길이가 한 자(尺) 반 이상으로 매우 크다고 했는가 하면, 절반은 살이고 절반은 쇠라고도 했고, 또 공통적으로 얼음처럼 차다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마녀의 망치’에 그렇다고 설명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통이 원활하지 못했던 그 시절이었지만 전 유럽에 걸쳐 마녀의 고백에 공통점이 많게 나타난 것이다. 내용은 극악하고 해괴망측할수록 좋았던 모양이다. 1591년 하녀로 일하던 폰테인(Fran?oise Fontine)이란 여인은 마귀의 성기가 굵고 돌멩이처럼 딱딱하고 차서 성교를 할 때 무척 고통스러웠고, 마귀가 떠날 때엔 여러 번 키스를 하면서 유방과 아래 성기를 만지작거렸다고 하였는가 하면, 비슷한 시기에 비아릿츠라는 지방에서 잡힌 열 다섯 살 난 마리그란(Marie de Marigrane)이란 여자는 마귀가 여러 여자들을 모아 놓고 돌아가며 차례로 성교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고 하면서 예쁜 여자는 앞으로 성교하고 못생긴 여자는 뒤로 성교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였다. 또 어떤 경우는 마귀의 성기가 뱀의 혓바닥처럼 여러 갈래로 되어 있어 성교를 할 때에는 한 갈래는 질로 들어가고, 하나는 항문으로, 또 하나는 입으로 들어 가 동시에 성교가 이루어진다고도 하였다.
그 다음에는 마녀잔치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자세한 표현이다. 크리스천들이 모두 잠자고 있는 동안에 마녀들은 방방곡곡에서 숲 속에 있는 잔치마당으로 날아간다는 것이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234년 교황 그레고리 9세에게 보낸 한 서한에 표현된 내용이다. 이것은 위치들을 불태우기 전의 일이며 이 경우에는 남자 위치의 이야기이다. “나는 처음으로 위치 잔치에 가게 되었다. 그 곳에는 여러 형태의 짐승으로 둔갑한 마귀들이 많이 있었는데, 처음 본 것은 큰 거위 만한 두꺼비였다. 참가자들 중 어떤 이는 거위의 주둥이에 키스하고 어떤 이는 항문에 키스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지나가는데, 이번에는 눈이 아주 시커멓고 비쩍 말라 뼈다귀와 가죽밖에 없는 어떤 남자가 와서 나에게 키스를 하였다. 그는 얼음처럼 차가웠으며, 그와 키스를 하면서 나는 천주교 신앙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잔칫상이 있는 곳에 도달하여 먹고 마시고 노래와 춤을 추며 놀다 어느 고양이와 함께 한 동상 뒤로 가서 먼저 고양이의 똥구멍에 키스를 하고 따라온 다른 마귀에게도 키스를 해 주며 놀았다. … 마지막에는 환하게 불을 켜고 모두 어울려서 혼음을 하고 밤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라고 하였고, 남성 성기는 구멍이 있는 곳이면 아무 곳이나 집어넣고 누런 색깔의 정액을 사정하며, 그 누런 정액은 몽정한 것을 모아 그리된 것이라 설명했다고 한다. 또 하나 다른 예는 처음 마녀 소굴에 입단할 때에는 밤중에 여러 남녀들이 위치와 함께 모여 뱀으로 둔갑을 하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뱀과 음란한 쾌락을 갖는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이러한 엄청난 이야기들은, 사실은 마녀라고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그들을 마녀로 창작해 내는 사람들의 환상적인 공상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야기였다. 현대 과학의 심리학적 견해로 본다면 마녀사냥꾼들이나 조사관들이나 이를 지휘했던 고위 지도자들 자신들이 실은 가학쾌락(加虐快樂)하는 사디스트들이었고 변태성욕자들로 진단이 내려지지 않을까 한다. 그들은 마녀사냥을 몹시 즐겼을 것이다. 그런데 마녀잡이에 가장 앞섰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도덕관념이 가장 투철한 교회의 성직자들이었다. 모든 조사를 끝내고 종교재판으로 판결까지 끝낸 다음 사형 단계에서 일반 재판부로 넘겨 죽이는 일은 교회가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이들 성직자들은 불타 죽어 시체를 걷을 때까지 계속 참관인으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처음 교황이 칙령을 내려 마녀들의 뿌리를 뽑으라 했을 당시에는 유럽 전체가 고문을 정상적인 수사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관리들의 수사능력은 거의 백발백중 틀림없는 효과를 과시했다. 왜냐하면 용의자로 잡혀 들어가기만 하면 고문으로 거의 모두 자백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영국 왕이 고문을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었다. 그래서 영국의 마녀사냥꾼들이 만들어 낸 것이 잭나이프처럼 나무 자루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바늘이었다. 피부에 감각이 없는 곳이 있다면 마녀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약 7cm 정도 길이의 바늘로 피부 이곳 저곳을 찔러 보는 것이다. 그래서 아프다고 소리 지르지 않으면 마녀가 틀림없으니 그런 곳을 발견할 때까지 몸 전체를 찔러 보는 방법을 영국에서는 사용했고, 사냥 담당자 외의 사람이 오면 자루 속에 바늘을 감추고 다만 나무토막으로 눌러 보는 척했다. 여하튼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중에 사망한 사람만도 백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것은 고문이 아니고 다만 담당자가 속였을 뿐이다. 대체적으로 영국의 역사상 그 때까지는 고문이 간혹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합법적으로 정당화되지는 않았었다. 한편 바티칸 교황청에서는 일반적으로 고문을 격려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교황 이노센트 4세는 1252년 “만일 인간이 만든 법을 어긴 죄로 고문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법을 어긴 사람들을 고문하는 것은 더욱 당연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라 하여, 전 유럽에서 성직자들이 교회 주변의 불량자들을 잡아 고문을 하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영국 왕이 고문 못하도록 한다는 소식을 들은 교황 클레멘트 5세는 대노하여 영국 왕 에드워드 2세에게,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귀하는 귀하 국토의 법률에 반하여 고문을 불허한다고 하는데, 어느 나라 건 교회법(Canon Law)을 어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즉시 당사자들이 고문을 실행할 수 있도록 귀하에게 명령합니다. … 귀하의 이단적(異端的) 행위로 인하여 귀하 자신의 영혼이 이미 위험한 위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결국 영국 왕은 이에 굴복하여 영국에서도 고문이 널리 자행되기 시작했다. 교황청의 이러한 고문 지지는 베카리아(Cesare Beccaria), 볼테르(Voltaire), 제퍼슨(Jefferson) 같은 사회 지도자들의 반대소리가 높아지자, 1816년 교황 피우스 7세가 드디어 고문중지칙령을 내리게 되어 공식적으로 천주교 교회의 고문 찬양주의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또 교회는 산 사람만 잡는 것이 아니었다. 죽은 사람도 무덤까지 파헤쳐 시체나 남은 뼈를 시내에 돌려 모두들 구경하게 하고 나서 광장에서 불태우는 사형식을 거행했다. 플로렌스의 한 부호 제랄도라는 사람은 죽은 지 65년이 지난 다음에 한 자손에 의해 그가 죽을 때 병상에서 이단이었다는 고백을 했다는 말이 우연히 나온 것이 발단이 되어 무덤을 파서 처형했을 뿐 아니라 그 자손이 갖고 있던 전 재산을 몰수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그 당시 부동산을 사고 팔 때 매매계약서에 ‘이단조항’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부동산을 산 후에라도 혹시 전 주인이 이단이라는 것이 발각되어 재산을 몰수당할 때에는 부동산을 판 전 주인이 물어준다는 조항이었다.
마녀사냥꾼, 인퀴지터들은 일반적으로 주교 같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임명하였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녀사냥 자체가 교황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5백 년 이상의 긴 기간 동안 줄곧 교회가 앞장서서 직접 간접으로 지휘를 하였으며, 성직자들은 동시에 정신적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의 정신상태를 구성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여 선동적으로 마녀들을 고발하도록 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공산치하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반동분자라고 고소하여 사형당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 그 100배의 열성으로 동네 사람들을 고발했다고 상상해 보라. 그리고 고문에 관하여도 성직자들이 제일 앞장서서 극악스러운 방법을 고안해 내고 실행하도록 사촉을 하였다. 폰 주페(Frederic von Supe)라는 한 예수회 신부는 “마귀 법사들을 무엇 하러 그렇게 열심히 뒤지고 있습니까? 예수회 신부들한테 부탁해서 고문하라고 하라. 만약 부인하면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고문하면 결국 고백을 할 것이다. 그래도 고백을 않으면 마귀를 쫓아 보내는 안수를 하고 털이란 털은 모두 면도해 없애고 다시 고문해 보라. 고백 않고는 못 견딜 것이다”라고 했는가 하면, 쟝 보뎅이라는 배심관은 “아무리 미약한 불에 마녀들을 굽고 그슬러 고통을 최대로 주어도 지옥에서 영원한 불 속에 앉아 받는 영원한 고통에 비하면 너무나 편안하게 죽는 것이다. 불로 타 죽는 일은 아무리 오래 걸린다 해도 한 시간이면 족하기 때문에 그들이 받는 고통은 너무 짧은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마녀사냥 물결 속에서 가끔 양심적인 사람이 없지 않아 있었던 모양이다. 마녀사냥꾼들의 권세는 대단하였다. 모든 조사가 끝나서 마녀를 지방 행정관서에 넘길 때에는 그 나름대로 형식적이지만 식을 갖추어 진행하였다. 즉, 인수인계를 하면서 “원하는 바 세상의 재판소에서는 가능한 한 죄인의 형을 가볍게 하여 땅에 피를 흘리는 일이나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고 인퀴지터가 낭독한다. 그런데 이 말을 합당하게 받아들여 1521년에 베니스의 한 상원의원이 명하여 브레시아(Brescia)에서 마녀를 죽이지 못하게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교황 레오 10세는 노발대발하여 특별 칙령을 내렸다. “성스러운 교회법에도 저촉되는 일이고 도의적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부도덕한 일이며 현 법령에도 위반되는 일을 전문적 지식이 없는 한 개인이 감히 주의 뜻을 받아 행하는 우리의 사형명령을 거역할 수 있단 말인가. …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다만 명령을 받들어 사형을 집행할 따름이다…”라 하고, 이어서 교황은 “이 명령에 대한 탄원이란 있을 수 없다”라고 칙령을 끝맺었다.
결국 크리스천이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나 위치들이 여신(女神)을 섬기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 비크리스천들의 생각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위치는 잔 다르크(Jeanne d'Arc)였고, 가장 유명한 천주교의 성녀(聖女)도 잔 다르크였다. 잔 다르크는 어느 언덕 위에 있는 고목에 가서 항상 기도를 드렸고, 어느 샘물에서 나오는 물을 성수로 여겼었다. 여기서 그녀가 좋아하는 성인들이 나타났고 천사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재판한 가톨릭 교회는 마귀와 여신들을 만난 위치였다고 판단하여 1431년 5월 31일 그녀를 불태워 죽였고, 24년 후 다시 종교재판하여 크리스천으로 둔갑시켰으며, 1920년에 와서 베네딕트 15세 교황에 의하여 성녀(聖女)로 시성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 고목 있는 곳에 사당을 세우고 그 샘물터를 성소(聖所)로 여겨 사람들이 물을 떠가고 있는데, 누가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그 고목은 성황당(城隍堂)도 될 수 있고 마리아가 나타난 성스러운 곳도 될 수 있는 것이며, 샘물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84%)
종교개혁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일이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시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죽은 지 4년 후인 36년 산헤드린 의회는 한국의 반공법과 같은 반유대인법을 제정하여 예수의 일당을 잡아죽이기 시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가족은 물론 그를 따르던 제자들도 모두 피신을 해야 했었다. 이때 물론 각자 뿔뿔이 헤어졌겠지만, 아리마태아 요셉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마르다(Martha), 예수의 이모, 클레오파스의 마리아, 예수가 가장 사랑하였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예수가 재생시켜 주었다는 나자로 등 여럿을 데리고 영국 고울(Gaul)이란 지방으로 피난을 시켰던 것이다. 고울이란 지방은 켈트 민족이 사는 지방이었으며, 후에 아더 왕(King Arthur)의 전설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홀리 그레일이 이 곳에 보존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와 예수와 은밀히 연결되는 곳이다. 여하튼 이들은 이 곳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빌립, 누가, 바울 같은 사도들이 줄지어 이 곳을 다녀갔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지해야 할 일은 예수를 누구보다도 잘 알 만한 가족들, 특히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 야고보(James) 같은 사람들과 베드로나 바울 같은 사도들과의 사이가 교리문제로 좋지 못했던 것이다. 로마 가톨릭은 베드로의 가르침을 따랐다 하여 교황이란 직위가 베드로의 후계자를 말하는 것이고, 개신교는 어디까지나 로마 가톨릭의 교리를 중심으로 논쟁을 벌여 갈려 나간 하나의 종파이기 때문에 아직도 베드로 계열 크리스천 교회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이에 반하여 동방정교회는 성 안드레(St. Andrew)의 가르침을 따른다 하여, 미사집전 때 신부가 행하는 제식(祭式-rite)이 거의 반대로 되어 있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다. 예를 들면 가톨릭에서는 모두 의자에 앉아 미사를 드리는 반면에 정교회는 서서 드린다. 또 가톨릭에서는 모두들 주님의 상(床)에 둘러 모였다고 해서 신부가 신도들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는 데 반하여 정교회는 신도들을 인도한다는 뜻에서 신부는 신도들에게 등을 대고 제단을 향해 팔을 벌리는 것 등 거의 매사가 반대이다. 이제 2천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누가 옳고 그른지 구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예수의 형제 야고보도 포교활동을 다른 어떤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벌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한 번도 만나 보지도 못했던 바울과 교리문제 때문에 논쟁을 벌여야 했었다. 야고보는 유대인 안에 머물렀고, 바울은 안티오크로 가 유대인 밖의 사람을 상대로 포교를 하지 않았나 한다. 만약 예수를 누가 더 잘 알 것인가라고 질문을 한다면 한 가족인 야고보를 생각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이 승자이고, 야고보는 예수의 말들을 전해 주는 야고보서 하나만이 신약에 채택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잠깐 성 안드레(Andrew)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원래 안드레라는 이름 자체가 희랍어 안드로스(andros)에서 왔다. 그리고 그 뜻은 남성(男性) 또는 남성다움을 의미하며, 희랍의 아카이아(Achaea)에 있다는 파트라스(Patras)라는 태양신의 칭호였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사도 안드레가 ‘비잔틴 교황’ 체제를 만들고 난 후 이 곳에서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서(西)로마의 중심인 로마에서 교황을 만들어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하였기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대결상태에 있었던 동방의 크리스천들은 동(東)로마, 즉 비잔틴제국을 중심으로 교황을 만들었고, 이 교황을 사도 안드레의 후계자라고 불렀으며, 또 이들은 안드레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이었고 처음 메시아를 알아본 사람도 안드레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안드레가 순교를 당할 때 그도 역시 십자가형을 받았는데, 그 십자가는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처럼 수직으로 반듯한 것이 아니고 'X'자 형의 십자가였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십자가’가 예수의 십자가와 마찬가지이지만 그를 빨리 죽이기 위해 거꾸로 세웠다는 십자가와 비교하면 이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그래서 ‘X’자로 된 십자가를 ‘안드레의 십자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X’형 십자가의 근원을 따져 보면, 심령을 관장한다는 ‘오르브(orb)’, 즉 천체(天體)를 상징하는 공(球)에 있는 ‘태양의 십자가(solar cross)’라고도 하고, 태양신 미트라(Mithras)를 말하는 ‘솔 인빅투스의 십자가’라고도 하는 전통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있기 훨씬 전부터 유럽 전체에 깔려 있던 신앙이었다. 그래서 ‘노스(Norse)’ 지방의 바이킹이 스코틀랜드에 침입했을 때 이 십자가를 사용했으며, 이것을 ‘워탄의 십자가(Cross of Wotan)’라고 이 사람들은 불렀고, 이 때문에 스코틀랜드나 웨일즈 국기에 ‘X’자 십자가 만들어지게 된 것을 비롯하여 많은 나라의 국기가 ‘X’자를 바탕으로 하게 된 연유인 것이다. 그리고 안드레가 순교당했다는 ‘파트라스(Patras)’라고 하는 절(寺)은 태양 아버지 신의 상징인 그의 남근상(男根像)을 모신 곳이었으며, ‘파트라스’라는 어휘는 ‘바데르, 베드라, 베드로(Pater, Petra, Peter)’라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변형되어 불려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런 단어들의 어원은 남성(男性)을 말하는 ‘안드레’의 어원과 같은 것이라는 말이 된다.
여하튼 예수의 식구들이 지금의 영국에서 포교활동을 하여 영국은 영국대로 그리스도교가 시작되어, 서기 196년에 로마인들이 크리스천화한 것보다 훨씬 오래 전에 그리스도교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영국 사람들도 최초의 그리스도교가 시작된 곳이 영국이라고 자부할 정도이다. 그리하여 영국은 성모 마리아의 무덤에 ‘성 마리아(St. Mary's Chapel 또는 Our Lady's Dowry)’라고 부르는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여기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성모 마리아 무덤에 지었다는 ‘도르민톤스(Chapel of Dormintons)’ 교회에 비하여 영국 것이 진짜라고 하면서 물적 증거가 있다고 할 정도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교는 켈트 민족에 한하는 이야기이다. 필경 성공회 계통 사람들한테 영국의 그리스도교 역사를 물어 보면, 6세기에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에 의하여 남부 영국에서부터 시작했다고 대답할 확률이 많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의 경우이다. 그리고 이 로마 가톨릭이 헨리 8세 때 와서 교황권에서 이탈하여 성공회를 만들게 되고, 이를 영국 교회라 불러 쉽게 혼동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대살육전(大殺戮戰)
십자군 원정
주위환경과 조건
역사에서 일어난 일은 항상 사건이 일어나는 원인과 조건이 주어져 있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군의 원정이 전 유럽에서 노도와 같이 일어나게 된 동기를 고찰해 보는 것은 우리가 역사를 의미 있게 배우는 일이라 생각한다. 4세기경부터 유럽 천하는 크리스천 세계가 되었고, 그 결과는 모든 민중을 거의 광신도가 되도록 만들었으며, 그로부터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14~15세기경까지의 기간을 역사가들은 ‘암흑시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모두 잘 알다시피 유럽의 역사는 항상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러나 11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은 비교적 평화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경제가 안정되어 사람들이 의식주의 필수요건을 벗어나 다른 곳에 돈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돈의 여유가 생긴다는 것은 경제활동이 활발해진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교에 관련된 생활만이 의미 있는 생활의 전부로 믿었던 열성 신자들은 평생 한 번이라도 성지인 예루살렘을 방문해 보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었으니, 지금으로 말하면 관광객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러한 원거리 여행이 성행하면서 관광사업은 물론이고, 무역이 발달하게 되고, 문화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예술이 발전되고, 심지어는 은행업까지 발달하게 되었다. 예술과 문화가 발달한다는 것은 엄격한 종교정치(宗敎政治-theocracy)를 하는 교회 당국에게는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넣어 두자. 이렇게 경제활동이 활발해지게 되면 자연 부자가 생기게 마련이고, 이 부자들은 더욱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돈의 힘으로 정치를 좌우하려는 심기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도 염두에 두고, 이를 재벌정치(財閥政治-plutocracy)라고 부른다고 알아 두자. 종교정치는 물론 로마의 교황이 관장하는 일이었지만, 재벌정치는 그 당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이 조정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돈을 벌겠다는 일편단심으로 이탈리아에는 여러 개의 도시국가가 형성되었다. 베니스(Venice), 제노아(Genoa), 피사(Pisa) 등등이 있었다. 특히 베니스는 그 대표적인 국가였고, 이들은 성지를 비롯한 지금의 중동지역과의 사이에 육로와 해로를 통하여 교역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탈리아와 희랍의 항구가 발달하게 되고, 여러 개의 지점을 가진 국제은행이 이 때부터 태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은 해군 함정 겸 상선, 말하자면 장사하는 해군을 만들어 7~8세기에 이미 모슬렘에게 점령되었던 지중해 중앙에 있는 시칠리아와 크레타 섬을 되찾아 지중해의 해상권을 차지할 정도였다. 한편 태평세대를 맞으면서 영주(領主) 또는 기사(騎士) 같은 귀족들은 할 일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전쟁에서 군사력을 가진 사람들이 세력을 갖고 그들의 존재의식을 충족하여 당당히 민중 앞에 그들의 중요성을 과시할 수 있었던 존재가치를 저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전쟁으로 죽는 귀족이 없어짐에 따라 그런 귀족들의 인구 역시 불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모두 귀한 사람이기 때문에 장성하여 분가할 때에는 땅과 저택과 많은 부하들을 먹여 살릴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는데 그럴 땅과 자산이 모자랐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전쟁을 하여 사회에서의 가치관을 높이기를 원했고, 전쟁을 통하여 새로운 영토를 확립할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국왕은 국왕대로 고민이 생기게 되었다. 영주와 귀족들의 숫자가 많다 보니 서로 세력싸움이 끊일 날이 없었고, 상대적으로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합세하여 국왕의 자산과 권력을 탐하여 이에 도전하는 압력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중앙정부의 통치자라 할 수 있는 왕은 강력한 중앙집권제도를 유지하기 어려워지게 되었기에, 이러한 현안을 타개하기 위해 왕도 전쟁을 원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도미노처럼 전달되어 결국 교황도 그의 권한에 도전을 받는 불안한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교황은 자기의 직위를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하여 어떤 조치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 결과 1075년 교황 그레고리 7세는 영적인 권한은 세속적인 권한보다 상위에 있다는 원칙(Investiture Controversy)을 발표하여, 자기가 국왕들보다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물론 말이나 이론만 가지고 자기의 지위를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교황도 국왕들을 만족시키고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쟁이 필요한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리스도 교회는 1054년에 동과 서로 갈라져 동로마인 비잔틴제국에는 동방교회, 서로마였던 소위 신성로마라고 부른 지금의 유럽은 가톨릭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그래서 로마 교황은 교리적으로 동로마를 정복하는 길을 모색했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당면한 문제는 신성 상위론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라도 같은 입장에 있는 동방교회와 공동 투쟁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 당시의 사회조건이었다.
이러한 정황하에 성지 예루살렘이 모슬렘에게 점령당하여 순례자들은 순례의 길이 막혔고, 상업인들은 장삿길이 막히게 되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한 모슬렘들은 성지점령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계속 서쪽을 향하여 점령해 오고 있어, 어차피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도 군대를 출정시켜야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비잔틴제국의 황제는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신성로마의 도움이 필요했다. 유럽 각국에서의 정책결정은 당연히 교회와 한마음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1095년 11월 27일 프랑스의 클레르몽이란 곳에서 열린 종교회의(Council of Clermont)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Pope Urban II.)는 절대적인 성원 아래 성지회복을 위한 십자군 창설을 공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종교에 의한 세계전쟁이 일어나 향후 2백여 년 동안 계속되었고, 대부분의 유럽은 처절한 피에 잠기는 살육전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교황은 많은 젊은이들이 십자군 대열에 자진 참여하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달콤한 조건을 제시하였다. 즉, 십자군으로 출정하면 모든 죄를 사해 줄 뿐 아니라 죽은 후에 천당에 가는 것을 보장하며, 출정기간 중에 얻은 전리품은 모두 사유재산으로 인정한다고 하면서,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이 준 땅을 되찾는 데 동참하라고 호소하였다. 한편 십자군 소집에 응하는 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신앙적으로 천당행이 약속될 뿐 아니라 성지순례도 하고,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국왕들은 쉽게 많은 젊은이들을 규합할 수 있었고, 이들은 의기양양하게 출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왕들은 장거리 출정에 군대를 동원하여 보낼 재력이 없었다. 그 결과 국왕들은 국왕대로 재벌가에게서 돈을 빌리게 되었으며, 출정하는 군인들은 대개 자비로 출정하도록 하였다. 농사꾼이나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던 십자군 지원병들이 예루살렘까지 갈 노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들이 갖고 있었던 것은 무식한 두뇌에 가득 찬 신앙심과 부자가 되어 보겠다는 욕심뿐이었다. 그리하여 재벌들은 이들에게 돈을 꾸어 주고 후일 이자와 함께 되갚도록 해 주었고, 모든 일을 쉽게 달성하기 위해 교황은 약탈을 허용했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군대의 지휘자로 출정한 왕들은 제대로 조직이나 훈련이 된 군대를 가지지 못했고, 전투에 서투르면서도 서로 더 많은 땅을 차지하여 국왕들 사이에 선취권을 획득하려는 욕심과 상호간의 질투 때문에 별로 전쟁의 효과를 보지 못했다. 한편 일반 군인들 역시 단순하고 무식하여 하나님을 믿는 열성만 있었고, 하늘에서 하나님이 직접 지휘를 하기 때문에 지상의 군대 지휘자라는 것은 필요도 없는 존재로, 가기만 하면 승리는 저절로 될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다만 의기충천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한 살생(殺生)을 흠뻑 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며, 그 외에는 전리품을 긁어모을 일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을 평가하여 어떤 크리스천들은 신앙 없는 두뇌를 가진 모슬렘과 두뇌 없이 신앙만 가진 크리스천과의 싸움이었다고 비유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성지로 가는 도중 무방비상태의 작은 촌락이나 어쩌다 큰 도읍지를 점령하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방화와 약탈과 때려부수는 것이 전부일 정도여서, 필경 그들은 하나님의 가호를 톡톡히 받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들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도살했을 뿐 아니라 시체를 구어 먹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금은 세월이 바뀌어 사람이 사람 고기 먹는 것을 종교적으로 죄악시 하고, 도의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믿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사람 고기를 먹은 예는 십자군이라는 크리스천들 이외에 다른 곳에서 찾기 힘들 것이다. 이 십자군들은 사람 고기 먹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우선 하나님의 적이라 생각되는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 받는 일이고, 그렇게 죽인 사람을 먹기까지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최상의 속죄를 받는 일이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의 증인들 기록(Fulcher of Chartres)에 의하면 십자군들은 어린아이나 여자들의 고기를 더 맛있다고 선호했다 하며, 어떤 사람들은 급해서 채 익지도 않은 생고기를 그냥 먹기도 했다 한다.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의 타이어맨(Dr. Christopher Tyerman)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모슬렘들은 무사이면서 동시에 철학자였고 시인이었으며, 이에 비하면 십자군 기사들은 야만적이고 미신을 무척 심하게 믿고 있었다는 십자군과 모슬렘을 비교한 증언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비잔틴제국에서는 십자군이 같은 크리스천으로서 동로마를 도와 주는 것으로 생각하여 비잔틴제국의 황제가 십자군들을 환영하였으나, 십자군들은 일단 성안에 들어가자 이들을 이단이라며 모슬렘과 마찬가지로 적으로 간주하여 닥치는 대로 죽여 버렸다. 참으로 세상이 야릇하게 되었다. 동방 크리스천들은 믿는 방식을 약간 다르지만 서쪽에서 온 십자군들을 같은 크리스천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이들은 신앙이 크게 다른 회교도 밑에서는 계속 종교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서방 크리스천 밑에서는 신앙은 고사하고 목숨도 유지할 수 없게 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 때부터 지금까지도 이들은 모슬렘과 오히려 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서방교회인 로마 가톨릭과는 자리도 함께 하지 않는 풍습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왼뺨을 대면 바른 뺨을 대라” 하는 따위의 성경말씀을 생각하면서 크리스천의 역사를 음미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독자 중에는 혹시 요즈음 로마 가톨릭과 동방교회가 다시 합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혼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 믿는다. 그들이 말하는 동방교회는 동방정교회가 아니라 동방 천주교이다. 동방 가톨릭은 물론 여러 종파가 있으나 대개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과 동맹관계를 맺고 함께 싸웠던 종파들이다. 물로 이들은 교리 면에서 많은 차이를 갖고 있으나 같은 점도 많아 동방정교회와는 근본적으로 많은 차이가 난다는 것을 잠깐 소개해 두며, 따라서 동로마인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킨 것은 회교도나 북방의 침입 때문이 아니라 믿었던 크리스천들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아 두기 바란다.
그리고 위에서 재벌정치라는 말을 소개하였다. 이탈리아 중요 도시에 건립되었던 도시국가들은 해군력을 길러 자체의 잘 훈련된 군대가 있었지만, 이들은 돈을 버는 것이 첫째 목적이었기에 막대한 돈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해로·육로로 교역도 많이 하였지만, 순례자들이 통행하는 길목 중요한 도읍에 은행지점을 각각 차렸을 뿐 아니라, 많은 국왕들에게 출정하는 군사비 조로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 주기도 했었고,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이 출정 군인들에게 개인적으로 직접 융자도 해 주었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 다국적기업과 IMF, 월드뱅크 등등의 형태로 세계를 주름잡는 재벌정치와 비교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직접 자기네 자신들의 기사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 기사단을 템플라 기사단(Order of Knights Templar)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가톨릭 안에는 많은 종단(宗團-order)이 있다. 예를 들면 콜럼버스 기사단(Order of Knights of Columbus), 예수회(Jesuit Order), 도미니칸 수도회(Dominican Order), 프란체스코 수도회(Franciscan Order) 등등 대단히 많은 종단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바티칸 산하의 조직체들이다. 따라서 템플라 기사단도 이와 마찬가지의 한 종단이었다. 위에 열거한 종단은 물론 가톨릭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개신교에는 하나의 종파처럼 활동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여하튼 템플라 기사단은 솔로몬과 헤롯의 성터에서 많은 금은보화를 찾아 엄청난 부자가 되기도 하였지만, 원래 돈이 많은 부류가 더욱더 큰 돈을 벌게 되는 법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도 국가들이 이들에게서 돈을 빌려 많은 외채(外債)가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엄청난 외채 때문에 국고가 탕진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는 교황과 짜고 템플라 기사단을 불법화시키고 모두 체포했다는 이야기를 ‘레네-르-샤토’를 소개할 때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아사신’과도 내통하여 순례자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관광사업으로도 짭짤한 돈을 벌었다고 하였다. 또 당시 경제의 중심지이고 부자가 사는 곳으로 유명했던 베니스는 세계 재벌정치의 본거지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북쪽의 노르만이 1196년 희랍을 침공했을 때 비잔틴의 황제 알렉시우스(Alexius)는 베니스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베니스는 도움의 조건으로 비잔틴 지역인 소아시아, 즉 지금의 중동지역과의 교역을 위한 통행세를 면제해 달라고 하였다. 그 결과 이 때부터 수백 년간 베니스 상인들은 세금 없이 교역을 하여 그 세력이 크게 신장하게 되었고, 드디어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연안국들의 경제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때 이미 국제 재벌가들은 세계를 거의 장악했었는데, 결국 프랑스에서 템플라 기사단을 모두 잡아죽이고 가톨릭 교회의 탄압으로 인해 재벌에 의한 세계정복이 천 년 가까이 지연되었던 것이다.
에피소드
십자군의 목적을 한마디로 말하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던 모슬렘인 터키 사람들을 축출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1099년 7월 7일 예루살렘의 왕(King of Jerusalem)이라고 불리게 되는 프랑스계 고드프르아-디-불롱(Godefroi de Bouillon)이라는 왕의 통솔하에 십자군이 예루살렘 성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터키 사람들은 쫓겨나고 이집트계 모슬렘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성안은 모슬렘, 유대교인, 크리스천들이 서로 존중하면서 화목하게 잘 살고 있는 중이었다. 그 실(實)통치자 격인 모슬렘은 크리스천들이 신앙생활 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도와주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평화가 목적이 아니고 영토와 전리품을 목적으로 했던 십자군은 이러한 현실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성밖에 진을 친 이들은 오래 시간을 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성밖에는 물이 없어 우선 음료수 문제가 시급했으며, 군량미도 떨어졌을 뿐 아니라 성을 공격하기 위해 성벽의 높이와 같은 지렛대 모양의 목조 기계를 건설할 만한 나무가 부근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난문제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던 십자군 부대의 종교책임자 아다마(Adamar) 주교는 자기에게 성령으로 보이는 어떤 것이 있었다고 하면서, 7월 8일 금요일부터 2만 명이나 되는 십자군들을 아무 무기도 없이 맨발로 찬송가를 부르면서 성 밑에 운집하도록 하고 주교는 장시간 설교를 하였다. 만약 이때 모슬렘 군대가 공격을 가했다면 십자군들은 전멸되었을 것이지만, 종교행사로 여겨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이때 십자군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기도를 하고 예수가 산상수훈을 했듯이 아다마 주교가 설교를 하는 동안 성벽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무너질 줄로 믿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계속하여 기도를 하고 있었지만 성벽이 무너지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여러 날 동안 반복하여 이런 일을 계속하는 것을 보고 모슬렘들이 방심을 한 틈을 타, 7월 15일 갑자기 무장한 십자군들은 성안으로 들이닥쳐 성을 점령하고 보이는 대로 모슬렘이건 유대인이건 크리스천이건 무조건 도살하였다. 입성한 날이 금요일이었다. 나머지 모스크 안에서 진을 치고 있는 모슬렘과 숨어 있는 모슬렘에게 만일 요구하는 금품을 내놓고 모스크 안에서 금요일 기도를 드리는 모슬렘은 생명을 보장한다고 하였다. 이 말을 믿은 모슬렘들은 귀금속을 모아 바치고 모두 피난처인 모스크 안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아침에 십자군들은 이들을 모두 죽이기 시작하였다. 그날 밤이 되었을 때에는 모스크 내부 바닥은 죽은 사람들의 피가 발목을 넘칠 정도였으며, 십자군들은 밤새 찬송가를 부르고 손뼉을 치며 주님을 외치면서 예수가 부활 전까지 누워 있었다는 성묘(聖墓) 앞에서 기도를 드렸다. 마치 어떤 교회에서 방언을 하며 손뼉 치고 찬송가 부르며 울면서 기도드리는 장면과 비슷했던 것 같다. 십자군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서 특별한 은총을 받게 된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때 모슬렘들이 당했던 일이 하도 억울하여 성전(聖戰), ‘지하드(Jihad)’라는 말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며, 그렇게 몰살을 당했던 모스크가 요즈음 말썽 많은 ‘골든 마운트(Golden Mount)’의 거대한 금빛 돔(dome)이 있는 ‘알 아크사(Al Aqsa)’ 모스크 자리에 있던 건물이었다. 이러한 역사가 있기에 모슬렘에게는 골든 마운트의 모스크가 각별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3차 십자군 때의 일이다. 영국의 왕 리처드 1세(King Richard I., 1157~1199)가 1191년 현재 이스라엘 하이파 동북방 16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당시의 큰 도시였던 에커(Acre)라는 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성을 포위한 지 2년째 될 때였다. 예루살렘에 가기 위해서는 이 성을 함락시켜야 했다. 성을 지키고 있던 회교도의 살라딘(Saladin) 왕은 식량이 다 떨어져 항복할 의사로 리처드와 협상을 하기 시작하였다. 리처드 왕은 강력한 자세로 2천 명의 십자군 포로들을 돌려 줄 것과 돈 20만 디나를 지불할 것, 성안의 백성들은 옷가지만 등에 지고 성을 떠날 것,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보배인 예수가 처형될 때 사용했다는 십자가를 내놓을 것을 조건으로 걸었으며, 교환조건으로 모슬렘 포로들을 되돌려 보내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성안에 있던 성민들은 옷만 갖고 빈손으로 떠났다. 이들이 장사진을 이루면서 떠나는 광경이 십자군의 기록에 매우 인상 깊게 표현되었다 한다. 십자군 기사들은 회교도들의 위엄과 근엄함에 기가 질려 “저들은 운이 나빠 패하기는 했지만 절대로 항복한 것은 아니다”라고 평했다 한다. 그리하여 리처드 왕도 이들을 존경하여 군인들에게 떠나는 성민들에게 욕하거나 돌을 던지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 당시의 전쟁은 중국의 삼국지 이야기 이상으로 재미있다. 모슬렘과 크리스천들이 전쟁을 하면서도 모슬렘 왕 살라딘은 적장인 영국군의 리처드 왕이나 프랑스군의 필립 2세 왕에게 맛있는 과일을 선사하였으며, 높은 지위에 있는 포로를 잡았을 때에는 절대로 죽이지 않고 대신 몸값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천들도 영국 웨일즈 지방 켈트 민족의 특기인 거대한 활(포병의 기원)은 크리스천간에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교황이 특명을 내려 최소 십자군 시대에는 이것이 행해졌었다. 그리하여 살라딘은 그 요구조건을 세 번에 걸쳐 시행하겠다 하고 리처드의 동의를 얻어 8월 11일에 첫번째로 포로들의 명단과 금액 등을 우선 갖고 왔다. 약속한 대로 숫자는 모두 맞았으나 기대했던 고위급 포로가 이에 포함되지 않자 리처드는 첫번째 송환에 고위급 포로들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살라딘은 이를 거절하여 다시 아무런 교환 없이 대결상태가 다시 계속되었다. 아흐레나 기다리던 리처드는 그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8월 20일 2천7백 명이나 되는 모슬렘 포로들을 모두 쇠고랑을 채워 성밖에 나열시켜 놓고, 성안의 모슬렘들이 내려다보는 앞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여 버렸다(이에 대하여 어떤 기록은 군인 포로뿐이라고 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부녀자와 어린아이들도 포함되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십자군 사이에는 포로였던 모슬렘들이 보석을 삼켜 버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십자군들은 이들 시체의 배를 갈라 보석을 찾느라 시신들이 난장판이 되었다. 리처드 왕의 이러한 잔인성은 수백 년이 지난 후에도 모슬렘 민족들에게 전설이 되어 내려와, 지금도 우는 아이에게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리처드 왕이 너를 데리러 온다”라고 상습적으로 말할 정도였다. 한편 이러한 일에 놀란 살라딘은 곧 부근의 군대를 동원하여 배치시켰으나 때는 이미 늦어 살상을 막을 수 없었고, 격분한 살라딘은 자기의 1천6백 명 십자군 포로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그리고 십자가도 이때 없애버려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풍문에 의하면 그 십자가는 다마스커스의 모스크를 짓는 데 입구 위의 재목으로 사용했다는 말도 있다.
또 다른 유명한 에피소드는 프랑스에 은둔자라는 별명을 가진 베드로(Peter the Hermit)라는 중(monk)이 있었다. 이 사람은 ‘무일푼의 월터(Walter the Penniless)’라는 동조자를 얻어 1096년 여름 지금의 독일과 프랑스 지역에서 나귀를 타고 커다란 십자가를 들고 다니면서, 무자비한 모슬렘을 쳐 없애야 한다는 십자군 의용군 모집유세를 하여 주로 무식한 농사꾼들로 구성된 십자군을 만들게 되었다. 원래 광신도가 되면 그 잔학성이 무서운 것은 사실이지만, 광신도가 무식하면 할수록 그 정도는 상상을 초월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처음 도착한 곳은 헝가리 지역으로, 이 곳은 이미 동방정교 계통 크리스천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었다. 당시의 십자군의 적은 물론 모슬렘이 주적이었지만, 로마 가톨릭 아닌 모든 크리스천들도 적으로 간주되어 갓난아이들까지 죽여 없애 뿌리를 뽑는 길만이 올바른 크리스천의 길이라고 교회는 가르쳤고, 신도들은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물론 이 때는 이슬람이 파죽지세로 퍼지면서 과거 크리스천 영역이었던 곳을 점령하였고, 이들은 십자군처럼 크리스천들을 죽이는 대신 모슬렘으로 개종시키는 데 더 열중하였다. 그리고 끝내 개종을 않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사회적 제약은 있었으나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여 교회도 갖고 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도 해 주었다. 그런데 처음 헝가리에 도착한 베드로의 십자군은 그 길로 헝가리인 4만 명을 학살하였으며, 그 여세를 몰아 발칸 반도인 베오그라드로 향하였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살해당한 시체가 즐비하고, 약탈과 방화로 일관하였으며, 베드로와 월터는 오만하여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십자군들은 잘 짜여진 군대로서의 조직이라기보다 오합지졸 광신자들로 구성된 폭도들에 불과하였고, 십자군들이 이처럼 야만적이고 굶주린 이리처럼 사람을 죽이고 죽은 시체의 고기를 먹고 약탈하기 때문에, 많은 십자군들이 도중에서 낙오되든가 숫자가 별로 많지 않았을 때에는 지방 주민들에게 살해되기도 했다. 이러한 십자군들이 드디어 터키의 정규군과 대적했을 때에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때 월터의 군대는 모두 포로가 되어 먼저 자기네들이 행했던 바대로 하나씩 살해를 당했으며, 베드로의 군대도 역시 거의 몰살당하고 자신과 부하 몇만 목숨을 건져 도망하여 다른 십자군에 편성되어 종군하다가 1099년 예루살렘 탈환의 일원이 되었고, 1115년 벨지움에서 생을 마쳤다 한다.
카타르(Cathar) 멸종작전
위에서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 출정한 십자군이 진로에 있던 동방교회의 크리스천들을 이단이라고 죽일 수 있는 대로 죽였다는 설명을 했다. 그러나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에 가는 길에 이단이 있을 때에 그들을 학살했지만, 이단을 없애기 위해 일부러 군대를 이동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카타르 토벌을 위한 십자군은 같은 크리스천이면서 이단이라는 이유로 로마 교황이 명하여 십자군을 일으킨 예이다. 여기서 카타르라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그노시스(Gnosis)’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1209년에 교황 이노센트 3세는 기병대와 보병으로 구성된 3만의 십자군 병력으로 랑그도크(Languedoc) 지방에 가서 카타르의 뿌리를 뽑아 없애라는 출전명령을 내렸다. 이 지방은 한국에서 영남지방, 호남지방 하는 식으로 프랑스의 남부, 마르세유 항구 서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남한의 약 절반 정도 되는 산악지대이다. 질풍처럼 들이닥친 이 십자군들은 도착하는 길로 농작물과 건물을 모두 불사르고 사람들을 보이는 대로 모두 죽여 버렸다. 당시 십자군 조직에는 공산군의 정치보위부 장교나 군종 신부처럼 교황을 대표하는 성직자가 있어 십자군의 행동지침을 지시했는데,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교황에게 어떻게 이단과 이단이 아닌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지 질문을 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교황은, “모두 죽여라.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은 알아서 구별하실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따라서 당연히 전군에 무차별 살해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으며, 이 성직자는 후에 교황에게 보고하는 서한에, “신분이나 나이 또는 남녀 구별 없이 모두 죽이고 있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썼다고 한다. 역사가들은 이 ‘카타르 토벌작전’이 근대 유럽 역사상 첫번째 인종말살사건으로 보고 있다. 이리하여 카타르 토벌작전은 십자군의 직접적인 토벌이 1244년까지 35년이나 계속되었고, 그 후에도 계속되어 약 40년에 걸친 인종말살작전이 자행되었다. 그러니까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 시간과 비슷한 기간 동안에 전 국토에 있는 카타르는 보이는 대로 죽여 없앴다는 말이 된다.
여기에 배치된 십자군들은 다른 십자군들과 마찬가지로 원죄를 포함한 모든 죄를 사해 주는 것과 동시에 죽은 다음에 천당 가는 것을 보장하며, 약탈한 모든 전리품을 개인 자산으로 인정해 주었으며, 그 대가로 4개월 복무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군 병사의 입장으로 보면 4개월간 군복무를 하면 허가받은 강도질에다 천당까지 간다니 그런 후한 하나님이 또 어디 있으며, 그런 수지맞는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고 예루살렘 행의 십자군에 비하면 적군이라고 대적할 군대도 별로 없고 모두 민간인인 부락에 가서 약탈하고 죽이는 것이 임무라니 얼마나 안전한 군복무였을까? 필경 동네 신부나 주교에게 뇌물을 많이 바치고 카타르 토벌군에 지원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시의 랑그도크 지역은 지금처럼 프랑스의 일부가 아니었고, 프랑스보다는 오히려 스페인과 가까운 언어와 문화와 정치적 유사점을 갖고 있었으며, ‘레옹(L?on)’, ‘아라공(Arag?n)’, ‘카스틸(Castile)’과 함께 하나의 독립국이었다. 그리고 비잔틴 문화권을 제외한 당시 크리스천계 유럽지역에서 가장 문화가 발달되어 희랍, 아랍, 히브리 철학을 즐겨 배우고 있던 곳이었으며, 이에 비하면 십자군들의 고향인 북유럽 사람들은 야만에 해당할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랑그도크 사람들은 낭만을 즐기는 문화생활에 심취되었고, 마음에 여유와 포용성이 많았으며, 이해심이 많아 종교의 자유와 상대의 신앙을 존경하는 사회풍토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에, 무식한 북쪽 사람들은 거의 맹신으로 광신자가 되어 물불을 가리지 못하고 마치 귀신에 홀린 사람모양 날뛰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식한 사람들이 광신도가 되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텅 빈 이 사람들의 머리 속에 진리라고 무엇을 하나 집어넣어 주면 세상에 그것만이 진리인 줄 알고 안하무인 격으로 날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청소년들을 정신교육시켜 전선에 보내면 가장 용감한 군인이 되는 것이고, 한국의 옛말에 “무식한 놈 사람 잡는다”라는 속담이 얼마나 진리를 알리는 소리인가 새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 지방에도 로마 가톨릭이 있기는 했지만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고, 특히 부패한 교회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별로 인기가 없어 어떤 성당은 사람이 없어서 30년 동안이나 미사를 드리지 못한 곳도 이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이 지역이 그렇게 문화가 발달되었던 이유는 랑그도크 지역 부근에 마르세유라는 유명한 항구가 있어 그 곳을 통하여 많은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역시 피레네(Pyrenees) 건너편 스페인을 통하여 세계 다른 지역과 문화교류가 빈번했었다. 그런 이유로 카타르 중에 유명한 예술인이나 과학자, 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북쪽의 상류 사람들은 랑그도크를 항상 선망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반면에 랑그도크 사람들은 안일주의에 사로잡혀 인생을 즐기고 인생의 철학적인 의미를 고찰하는 일에 몰두하여 북쪽에서 일어나는 일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아, 십자군이 무기를 갖고 쳐들어올 것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정신문명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십자군이 출동하기 약 반세기 전인 1145년 로마 가톨릭에서 교리학자로 유명했던 성 베르나드(St. Bernard)가 ‘카타리’라는 이단들에게 진정한 크리스천이란 어떤 것인지 옳게 가르치겠다는 생각으로 ‘랑그도크’로 간 일이 있었다. 그가 도착하여 놀란 것은 카타르의 이단적인 교리라는 것보다 오히려 자기가 속해 있는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이 얼마나 극심했나를 알게 된 것이었고, 또 다른 중요한 점은 그가 도착하여 카타르를 교육시키는 설교는 고사하고 오히려 자신이 그들의 설교에 감동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는, “카타르의 설교는 우리의 어떤 설교보다 훨씬 더 크리스천적이며, 그들의 신앙적 양심은 순수한 것이다”라고 공언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종교관이나 생활방식이 얼마나 심오하고 매력적인가를 단편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며, 철두철미했던 정통 가톨릭의 지도자 격이었던 베르나드 같은 사람이 이 정도였다면 생각 있는 일반 신도들은 어떠했을까 하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로마의 교황청에서 볼 때에는 랑그도크란 지방이 눈엣가시처럼 보인 여러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랑그도크 지역이 문화가 발달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 윤택하여 다른 곳 사람들이 항상 동경하는 지역으로 대두되었고, 자기네보다 격이 다른 기독교가 있었을 뿐 아니라 이것이 점점 인기를 끌어 확장일로에 있어 그냥 놓아두면 자기네들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가톨릭에서 볼 때에는 추호도 수용할 수 없는 이단적 교리였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필경 교황으로서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들의 뿌리를 뽑아 없애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을 것으로 믿는다. 실로 120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카타르계 그리스도교는 지금의 독일지방, 플랑드르(Flanders) 지방, 샹파뉴(Champagne) 지방에 깊이 뿌리를 내렸으며 계속 다른 지방으로 번지고 있어, 로마에서는 ‘남쪽에서 오는 문둥이 유행병’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리고 이 유행병의 중심지가 랑그도크 지방에 있는 알비(Albi)라는 도시였으며, 로마에서는 주로 “알비 사람”이라 하여 “알비젠시안(Albigensians)”이라고 흔히 불렀다. 알비(Albi)라는 말은 카타르어로 요정(妖精-elf 또는 ylbi 또는 elbe)이란 뜻이고, 젠스(-gens)는 혈통이란 뜻이다. 다시 말해서 요정의 핏줄을 없애 버리는 출정(出征)이란 뜻으로 알비젠시안 십자군(Albigensian Crusade)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었다. 또 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카타르(Cathars), 카타레(Cathares) 또는 카타리(Cathari)라고 각기 다른 이름을 사용하였으나 이는 모두 같은 뜻이다. 둘째로는 정치적으로 북쪽의 영주들은 남쪽의 기름진 땅과 지중해 연안의 번영하는 경제상을 무척 탐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남쪽 지중해 연안 땅을 소유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곳에 카타르라는 이단 종교가 생겨, 이 지역에 쳐들어가 땅을 차지하는 좋은 구실도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황이나 영주들에게는 다만 화약을 터뜨릴 뇌관만이 필요하였다. 그러던 중 드디어 때는 왔다. 1208년 1월 14일 주(駐)랑그도크 교황 사절이었던 디 카스텔노(Pierre de Castelnau)라는 사람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살인범은 교회의 성직자에게 불만이 많은 사람으로 카타르와는 무관한 사람이었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는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서슴지 않고 카타르의 소행이라고 단정하여 공표하고, 즉시 십자군 조직을 명령했다. 이번의 토벌작전은 과거 백여 년 동안 이미 간헐적으로 카타르를 박해하던 것과는 달리 완전히 뿌리를 뽑아 다시는 카타르 같은 이단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결심이었다. 이 십자군의 총책임은 시토(C?teaux)의 대수도원장이 맡아 지원병을 모집하였고, 군대의 사령은 몽포(Simon de Montfort)라는 영국계 프랑스 귀족이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토벌작전으로 유럽의 중세기 역사상 가장 발달했던 문명을 파괴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또 이 토벌작전에 참가한 사람 중 스페인의 광신도로 유명한 구즈망(Dominic Guzm?n)이란 사람도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이단을 광적으로 증오했던 사람이며, 1216년 자기의 이름을 따 ‘도미니칸(Dominicans)’이라는 수도원을 차린 사람이고, 후에(1478경) 이 도미니칸 수도승들이 중심이 되어 소위 ‘홀리 인퀴지션(the Holy Inquisition)’이라는 유명한 이단사냥이 이루어져 또 다른 피비린내 나는 유혈극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도미니칸 사제단은 17세기에 인도 고아(Goa)에서도 자기네의 것과 조금 다른 그리스도교를 믿는다고 철저하게 크리스천들을 잡아죽였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 그리스도교 역사상 항상 그러했듯이, 이들 알비젠시안 십자군들의 적은 카타르 신앙인뿐이 아니었다. 랑그도크에는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귀족들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트렝카벨(Trencavel)이나 툴루스(Toulouse) 같은 가문으로, 이 지방에 살던 많은 유대인들과 친분이 대단히 두터운 사이였다. 이런 가문들은 십자군의 토벌대상이 되었고, 따라서 그 동안 이런 사람들의 덕으로 유대인들이 보호를 받고 안일한 생활을 하던 것이 끝나게 되었다.
한편 1218년에 총사령관 몽포는 툴루스 가문의 요새를 포위하고 공격하다 전사하게 된다. 그러나 잠깐 주춤했을 뿐 토벌은 그 이후에도 사반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243년에는 조직된 저항세력을 모두 토벌하게 되어 카타르의 모든 도시, 마을, 본거지를 점령하였으며, 다만 원거리에 있는 자연요새를 방패로 하여 반항하는 미세한 조직 몇 개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마사다와 비슷한 ‘몽세거(Monts?gur)’라는 자연요새로, 마치 수많은 산봉우리 중에 우뚝 솟은 범주와 같이 생긴 곳에서 10개월 동안 수없이 거듭된 공격에 버티고 있었던 것이 카타르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몽세거는 1244년 3월에 함락되었고, 이것으로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카타르라는 것이 남부 프랑스에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라두리(Emmanuel Le Roy Ladurie)라는 사람은 몽세거가 함락된 지 반세기 후에 생존한 카타르인을 찾아 수집한 여러 가지 책을 종합하여 그들의 연대기와 활동 등을 묘사한 ‘몽테일루(Montaillou)’라는 책을 썼는데,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였다. 그리고 토벌작전이 끝난 후에도 살아 남은 사람들은 극도로 작은 숫자이지만 자기들의 교리를 지키면서 동굴 속에서 살았고 산발적이지만 얼마 동안 게릴라전을 계속하기도 하였으며, 레네-르-샤토(Rennes-le-Ch?teau) 같은 곳을 기반으로 하여 비밀리에 카타르의 신앙을 꾸준히 지켜 왔다. 그리하여 많은 학자들이 카타르의 사상을 추적하여 그로부터 분파한 가지들을 찾아 많은 글을 썼다. 즉, 발덴시안(Waldensians), 후사이트(Hussites), 애더마이트(Adamites), 자유정신의 형제들(Brethren of the Free Spirit), 아나밥티스트(Anabaptists), 카미사드(Camisards) 등을 열거할 수 있으며, 이들은 영국에도 피난 가서 18세기 초 런던에 많은 지파가 있었던 기록이 있다.
마녀사냥
북미주에서는 매년 10월 31일 ‘핼러윈(Halloween)’이라 하여, 특히 여자 아이들이 마귀할멈으로 변장하여 집집마다 다니며 캔디 동냥을 한다. 이 마녀(魔女)들은 길고 검은 옷을 입고 창이 넓은 고깔모자를 쓰며 코는 크나큰 매부리코를 하고 긴 빗자루를 들고 다닌다. 이것이 일반이 알고 있는 마녀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만들어 낸 마녀상일 뿐이지 진짜 마녀와는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는, 완전히 창작해 낸 마녀이며,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도 교회가 이미 심어 놓은 마녀상을 영화 제작하는 사람들이 반영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진짜 마녀는 어떻게 생겼는가? 진짜 마녀는 앞집 옆집 아주머니나 우리 집 어머니나 이모 삼촌 등 아무런 표가 없는 자연스런 보통사람들일 뿐이다. 그 사람들이 만약 다른 점이 있다면, 그리스도교 교회는 갈지언정 진실로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점뿐이다. 한국의 경우에 비유하여 이야기한다면, 무당이나 점치는 사람, 산소 자리 보는 사람, 토정비결 보는 사람, 불공드리는 사람, 제사 지내는 사람, 산신령에게 아기 낳게 해달라고 비는 사람, 부적 붙이는 사람, 손금이나 관상 보는 사람, 점치는 사람 등등 모두가 마녀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마녀라 하여 마녀는 여자로 생각하지만, 이는 여자가 많았다 뿐이지 반드시 여자만이 마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마녀의 근본에 대하여 설명을 좀 해보자. 마녀를 영어로 ‘위치(Witch)’라고 부른다. 우리말로 가장 가까운 유사 단어는 무속인(巫俗人)이라 하면 될 것 같다. 이 단어의 어원은 켈트(Celt)어로서 남자는 위차(Wicca), 여자를 위체(Wicce)라고 불렀던 것이 영어로 옮겨지면서 음을 따 위치(Witch)로 표기된 것이다. 이것은 영어권에서의 이야기이며, 아이슬란드 등 다른 지역에서도 vita, vitki, vizkr, wischard, guiscart 따위로 부르고 있었으며, 결국 발음이나 뜻은 모두 비슷하여 같은 내용을 내포하였던 것이다. 위치들은 지식층이었고 현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영어에서 현명하다는 말을 ‘wise’ 또는 ‘wisdom’이라 하고, 재치 있는 것을 ‘wit’라 하는데, 그 어원은 모두 켈트어 ‘wic’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영국계 성(姓)으로 ‘Whittaker’라는 이름이 있다. 이 성은 Witakarlege에서 왔고, 그 어원은 wizard나 witch에서 온 이름이다. 여하튼 켈트 민족은 현재 영국의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와 프랑스의 브리통(Briton)에 사는 민족으로서 앵글로색슨족인 잉글리시 민족에게 점령당하여 살고 있는 피지배민족이고, 그런 이유로 지금도 이 사람들은 영국인에 대하여 대단한 적개심을 갖고 있다. 켈트족은 한때 지금의 중서부 유럽을 장악하여 지배한 경험도 있는 민족으로 고대 때부터 남녀평등사회를 유지하였고, 특히 여자들의 특수성을 높이 평가하여 존중하고 있던 사회였다. 어떤 사람들은 모계사회였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실제로는 여자들이 남자의 상위(上位)에서 지배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같은 지역에서 드루이드교(Druidism)이라 하여 대개 남자들이 드루이드(Druid)라고 부르는 제사장이 되었고, 사회의 정치·종교의 지도자가 되어 같은 사회에서 공존하고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이 사람들도 파간(Pagan), 토속종교를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역시 마녀로 취급되었었다. 위치들이 사회활동에서 주로 관심을 가진 면은 여신을 섬기면서 여자들의 본분인 애를 낳는 일, 즉 산파(産婆)로서 해산하는 일을 도우며, 어린아이와 산모의 건강을 위시하여 모든 질병을 고치는 의사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한방의(韓方醫)가 했던 일을 그 곳에서는 위치들이 담당했던 것이다. 또 이들은 병을 고치기 위하여 점성학을 잘 알아야 했다. 왜냐하면 태어난 시와 장소에 따라서 체질이 정해지고, 그 체질에 따라서 특정한 병에 걸리기 쉬운 사람이 있으므로 육체의 기능에 따라 강하고 약한 점을 가려내 진단에 도움도 되고 예방도 미리 할 수 있었던 것이고, 점성학을 잘 알면 사람의 점도 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사주팔자나 점치고 손금 보는 것이 사회에 깊이 뿌리를 박아 없애기 어려운 것이나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 바로 위치의 신앙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모두 잡아죽이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못나도 남자는 여자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그리스도교의 남권우월주의 사상을 들여오면서 의사역할을 모두 남자가 떠맡게 되었고, 여자들이 병을 고치는 것은 마땅히 마녀이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런 여자들은 불태워 죽여 마땅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불과 백수십 년 전까지도 서양에서 의사가 되려면 점성학 공부부터 시작한 것이다. 여하튼 유럽은 기독교화되면서 엄청난 피의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위치가 틀림없다는 증명이 있어서 죽인 것이 아니었다. 밉거나 이상하거나 하면 모두 위치로 몰아 붙이고 죽여 버렸다. 특히 가장 심하게 마녀사냥을 하던 15세기에서 18세기 초까지는 교회가 돈 버는 방편으로 마녀를 만들었다. 애당초 1184년 교황 루시우스 3세(Lucius III.)가 마녀를 없애야 한다고 시작된 것이 1484년 12월 5일 교황 이노센트 8세(Pope Innocent VIII.)가 위치들을 더욱 샅샅이 잡아 뿌리를 뽑으라는 칙령을 내린 후부터 극에 달하였고, 특히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전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마치 열병이 퍼지듯 광란적으로 퍼져 나갔다. 그는 칙령에서 “가톨릭 신앙을 통하여 구원받는 일은 마다하고 교회를 이탈하여 주문을 외우고 해코지를 하며, 미신과 부적을 만들어 마귀를 부르고, 마귀와 교접(交接)하는 남녀가 많이 있다…”라는 식으로 시작해서, 위치들은 유아와 동물들에게 질병과 고통을 주어 살해하고 곡식도 못 자라게 만들 뿐 아니라 남자는 아내와, 여자는 남편과 성교를 기피함으로써 성기능을 저하시키고 잉태를 못하게 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혼음(混淫)과 난음(亂淫)을 하여 신성을 모독하고 있다고 그들의 죄상을 열거하였다. 이 칙서는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 덕으로 전 유럽에 인쇄되어 전달되었고, 동시에 독일의 성서학자이며 교리 전문가인 크래머(Heinrich Kramer)와 스프렝거(Jakob Sprenger)를 시켜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라는 마녀사냥 지침서까지 만들어 전 유럽에 보급되도록 하였다.
위치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85% 정도가 여자였기 때문에 위치 하면 여자를 생각하게 되는데, 대개는 어느 사람이 위치 같다라는 밀고로 잡혀 들어가게 된다. 밀고를 받을 때에는 그 사람이 마녀라는 증거는 필요치 않았다. 다만 그런 의심이 간다고 하면 충분했던 것이며, 다만 보충참고자료로 왜 그렇게 믿게 되었는지 정보를 제공받았던 것이다. 일단 잡힌 용의자는 자기가 위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러니까 무죄가 증명될 때까지는 유죄였던 것이다. 그런데 증명하는 방법이 기가 막힌다. 무조건 자기가 위치가 아니라고 하면, 위치라고 고백할 때까지 계속 고문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도 아니라고 부인을 할 때에는 사실인지 아닌지 증명하는 실험을 하게 된다. 즉, 사지를 꽁꽁 묶어서 강이나 호수나 바다의 물에 빠뜨린다. 그리고 만약 몸이 물에 가라앉으면 위치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인데, 물에 가라앉을 때에는 숨을 쉴 수 없어 죽은 다음의 일이기 때문에 증명해도 소용이 없는 일이고, 물에 뜨면 위치라는 것이 증명되어 불에 태워 죽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 앙심으로 밀고만 하게 되면 빠져 나올 길 없이 죽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인퀴지터(Inquisitor)라고 부르는 마녀사냥꾼은 마을에 다니면서 수소문하고 협잡까지 하여 그럴싸한 사람을 잡아들이는 것이 그의 임무였고 그의 사업이었다. 일단 마녀로 입건이 되면 그 때부터 그 마녀를 잡아간 사람이나 고문한 사람들의 임금을 마녀 자신이 지불해야 되었다. 지금도 지불내역이 실린 상세한 장부기록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마녀로 확정되어 화형을 당하게 되면 그녀의 재산은 모두 몰수하여 그 자산의 3분의 1은 교황청으로 가고, 3분의 1은 지방 관청과 교회에서 갖고, 나머지 3분의 1은 마녀사냥꾼 몫이었다. 그래서 마녀사냥꾼은 그야말로 돈벌이하러 나섰던 것이고, 교회도 이렇게 하여 많은 돈을 빼앗아 모두 부자가 되었다. 1343년에는 아마 교황청에 가야 할 돈이 제대로 입금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교황 클레멘트 6세는 플로렌스(Florence)와 루카(Lucca)에 군대를 보내 자기네 몫을 완력으로 가져가기도 하였다. 이런 것이 비난이 높아지자 1630년에 신성(神聖)로마 황제가 자산차압을 못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예를 들어 반버그(Banberg)란 한 마을의 경우는 1620년대에 연평균 100명 정도 마녀를 잡아내던 것이 1630년에는 25명으로 줄고, 1631년에는 한 명도 없는 통계가 나왔다. 다시 말해서 생기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마녀를 만들 이유가 상실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녀사냥이 한창일 때의 사회상은 남자보다 여자 인구가 훨씬 많았었다. 그 이유는 남자들은 십자군, 질병 등 많은 전쟁으로 인해 죽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철저한 일부일처주의의 사회에서 결혼 못한 잉여 여자들이 미혼으로 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또 대부분 이 여자들은 생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었다. 철저한 남존여비 사회에서 미혼 여자가 나서서 돈을 벌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자연히 그들이 주로 나서는 일은 임신한 여자들이 출산하는 일을 돕는다든가, 특히 아이들이나 여자들의 병을 관리하는 일, 점치는 일 등 대개 가정 여자들 사회를 통하여 돈을 버는 방법을 취했고, 독신으로 늙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또 남편 없는 독신 여자들을 겁탈하려는 못된 남성들이 많은 사회에서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행동을 조심해야 했기 때문에 이들의 생활방식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이기 쉬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먼저 희생자가 되었다. 또 마녀사냥꾼들은 어린아이들을 무척 미워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10~12살 정도의 어린이들도 많이 희생을 당했기 때문이다. 1629년에는 뷔츠버그(W?rzburg)에서 7살짜리 어린이들도 죽여 가장 어린 나이의 마녀가 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단 마녀라는 의심으로 잡아가게 되면 옷을 완전히 벗겨 나체로 만든다. 왜냐하면 마녀가 죽인 어린아이의 살갗으로 물레질하여 천을 짜 옷을 해 입을 가능성이 있고, 마녀들이 그런 옷을 입고 있으면 마술을 피울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다음에는 모두 면도질하여 몸에 털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성경의 ‘삼손(Samson)’ 이야기에서처럼 털이라는 것은 신비한 힘을 갖고 있다고 믿어 마녀들도 털이 있으면 무서운 위력을 발생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며, 마귀와 사귄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서이다. 흉터나 사마귀 따위는 물론 마귀와 사귄 증거가 되는 것이며, 특히 ‘마귀 젖꼭지’나 ‘마녀의 젖꼭지’라고 부르는 것을 즐겨 찾았는데, 이것은 질에 있는 음핵을 말했던 것으로 여자가 음핵이 좀 크면 이들은 쾌재를 불렀던 것이다. 음핵이 큰 이유는 마귀가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 젖을 빨듯 빠는 곳이기 때문에 그들의 젖꼭지라는 이치였다. 그리고 남자 관리들이 몸을 깨끗이 씻어 주었는데, 특히 살이 접힌 곳이나 구멍이 있는 곳은 철저하게 청소를 했다. 그것은 마녀들이 세례받지 않은 갓난아이를 태워 만든 가루를 몸에 뿌려 마술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이런 깊숙한 곳에 가루가 묻어 남아 있기 쉽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러한 수속을 거친 다음에는 자백을 받는 일이 시작된다. ‘마녀의 망치’라는 마녀사냥 지침서에 의하면 본인이 자발적으로 고백하지 않는 한 마녀를 처벌할 수 없다고 되어 있었다. 물론 대단히 양심적이고 사리에 맞는 법이었다. 따라서 ‘인퀴지터’에게는 몸에 있는 증거만으로는 불충분하여 자백을 받아 내야 했다. 자백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자백은 마귀와 성교를 했다는 고백과 위치의 제사잔치(祭祀-Sabbath))에 참석했다는 고백이다. ‘마녀의 망치’ 책에 마귀와 어떻게 성교를 하고 느낌이 어떤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고, 마녀들의 잔치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어 조사관들은 고문을 하면서 이랬지?, 저랬지? 하고 질문하고 용의자는 다만 “네, 네”라고만 대답하면 긍정으로 되어 자백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책의 설명에 의하면 공정한 자백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한 번 자백을 하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서 다시 같은 질문을 했다. 그때 먼젓번과 같은 내용의 자백을 받게 되면 완전히 자유의사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고백한 자백이 되기 때문에 고문에 의한 자백이 아니었다는 증명이 되었다. 이 절차가 끝나면 시중 관리에게 이관되어 마을 광장에서 불태워 죽이는 수속만 남게 되는 것이다.
마귀와 성교를 했다는 증거로 조사관들이 조서를 꾸민 내용은 가관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마귀의 성기길이가 한 자(尺) 반 이상으로 매우 크다고 했는가 하면, 절반은 살이고 절반은 쇠라고도 했고, 또 공통적으로 얼음처럼 차다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마녀의 망치’에 그렇다고 설명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통이 원활하지 못했던 그 시절이었지만 전 유럽에 걸쳐 마녀의 고백에 공통점이 많게 나타난 것이다. 내용은 극악하고 해괴망측할수록 좋았던 모양이다. 1591년 하녀로 일하던 폰테인(Fran?oise Fontine)이란 여인은 마귀의 성기가 굵고 돌멩이처럼 딱딱하고 차서 성교를 할 때 무척 고통스러웠고, 마귀가 떠날 때엔 여러 번 키스를 하면서 유방과 아래 성기를 만지작거렸다고 하였는가 하면, 비슷한 시기에 비아릿츠라는 지방에서 잡힌 열 다섯 살 난 마리그란(Marie de Marigrane)이란 여자는 마귀가 여러 여자들을 모아 놓고 돌아가며 차례로 성교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고 하면서 예쁜 여자는 앞으로 성교하고 못생긴 여자는 뒤로 성교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였다. 또 어떤 경우는 마귀의 성기가 뱀의 혓바닥처럼 여러 갈래로 되어 있어 성교를 할 때에는 한 갈래는 질로 들어가고, 하나는 항문으로, 또 하나는 입으로 들어 가 동시에 성교가 이루어진다고도 하였다.
그 다음에는 마녀잔치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자세한 표현이다. 크리스천들이 모두 잠자고 있는 동안에 마녀들은 방방곡곡에서 숲 속에 있는 잔치마당으로 날아간다는 것이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234년 교황 그레고리 9세에게 보낸 한 서한에 표현된 내용이다. 이것은 위치들을 불태우기 전의 일이며 이 경우에는 남자 위치의 이야기이다. “나는 처음으로 위치 잔치에 가게 되었다. 그 곳에는 여러 형태의 짐승으로 둔갑한 마귀들이 많이 있었는데, 처음 본 것은 큰 거위 만한 두꺼비였다. 참가자들 중 어떤 이는 거위의 주둥이에 키스하고 어떤 이는 항문에 키스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지나가는데, 이번에는 눈이 아주 시커멓고 비쩍 말라 뼈다귀와 가죽밖에 없는 어떤 남자가 와서 나에게 키스를 하였다. 그는 얼음처럼 차가웠으며, 그와 키스를 하면서 나는 천주교 신앙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잔칫상이 있는 곳에 도달하여 먹고 마시고 노래와 춤을 추며 놀다 어느 고양이와 함께 한 동상 뒤로 가서 먼저 고양이의 똥구멍에 키스를 하고 따라온 다른 마귀에게도 키스를 해 주며 놀았다. … 마지막에는 환하게 불을 켜고 모두 어울려서 혼음을 하고 밤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라고 하였고, 남성 성기는 구멍이 있는 곳이면 아무 곳이나 집어넣고 누런 색깔의 정액을 사정하며, 그 누런 정액은 몽정한 것을 모아 그리된 것이라 설명했다고 한다. 또 하나 다른 예는 처음 마녀 소굴에 입단할 때에는 밤중에 여러 남녀들이 위치와 함께 모여 뱀으로 둔갑을 하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뱀과 음란한 쾌락을 갖는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이러한 엄청난 이야기들은, 사실은 마녀라고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그들을 마녀로 창작해 내는 사람들의 환상적인 공상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야기였다. 현대 과학의 심리학적 견해로 본다면 마녀사냥꾼들이나 조사관들이나 이를 지휘했던 고위 지도자들 자신들이 실은 가학쾌락(加虐快樂)하는 사디스트들이었고 변태성욕자들로 진단이 내려지지 않을까 한다. 그들은 마녀사냥을 몹시 즐겼을 것이다. 그런데 마녀잡이에 가장 앞섰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도덕관념이 가장 투철한 교회의 성직자들이었다. 모든 조사를 끝내고 종교재판으로 판결까지 끝낸 다음 사형 단계에서 일반 재판부로 넘겨 죽이는 일은 교회가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이들 성직자들은 불타 죽어 시체를 걷을 때까지 계속 참관인으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처음 교황이 칙령을 내려 마녀들의 뿌리를 뽑으라 했을 당시에는 유럽 전체가 고문을 정상적인 수사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관리들의 수사능력은 거의 백발백중 틀림없는 효과를 과시했다. 왜냐하면 용의자로 잡혀 들어가기만 하면 고문으로 거의 모두 자백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영국 왕이 고문을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었다. 그래서 영국의 마녀사냥꾼들이 만들어 낸 것이 잭나이프처럼 나무 자루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바늘이었다. 피부에 감각이 없는 곳이 있다면 마녀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약 7cm 정도 길이의 바늘로 피부 이곳 저곳을 찔러 보는 것이다. 그래서 아프다고 소리 지르지 않으면 마녀가 틀림없으니 그런 곳을 발견할 때까지 몸 전체를 찔러 보는 방법을 영국에서는 사용했고, 사냥 담당자 외의 사람이 오면 자루 속에 바늘을 감추고 다만 나무토막으로 눌러 보는 척했다. 여하튼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중에 사망한 사람만도 백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것은 고문이 아니고 다만 담당자가 속였을 뿐이다. 대체적으로 영국의 역사상 그 때까지는 고문이 간혹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합법적으로 정당화되지는 않았었다. 한편 바티칸 교황청에서는 일반적으로 고문을 격려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교황 이노센트 4세는 1252년 “만일 인간이 만든 법을 어긴 죄로 고문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법을 어긴 사람들을 고문하는 것은 더욱 당연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라 하여, 전 유럽에서 성직자들이 교회 주변의 불량자들을 잡아 고문을 하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영국 왕이 고문 못하도록 한다는 소식을 들은 교황 클레멘트 5세는 대노하여 영국 왕 에드워드 2세에게,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귀하는 귀하 국토의 법률에 반하여 고문을 불허한다고 하는데, 어느 나라 건 교회법(Canon Law)을 어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즉시 당사자들이 고문을 실행할 수 있도록 귀하에게 명령합니다. … 귀하의 이단적(異端的) 행위로 인하여 귀하 자신의 영혼이 이미 위험한 위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결국 영국 왕은 이에 굴복하여 영국에서도 고문이 널리 자행되기 시작했다. 교황청의 이러한 고문 지지는 베카리아(Cesare Beccaria), 볼테르(Voltaire), 제퍼슨(Jefferson) 같은 사회 지도자들의 반대소리가 높아지자, 1816년 교황 피우스 7세가 드디어 고문중지칙령을 내리게 되어 공식적으로 천주교 교회의 고문 찬양주의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또 교회는 산 사람만 잡는 것이 아니었다. 죽은 사람도 무덤까지 파헤쳐 시체나 남은 뼈를 시내에 돌려 모두들 구경하게 하고 나서 광장에서 불태우는 사형식을 거행했다. 플로렌스의 한 부호 제랄도라는 사람은 죽은 지 65년이 지난 다음에 한 자손에 의해 그가 죽을 때 병상에서 이단이었다는 고백을 했다는 말이 우연히 나온 것이 발단이 되어 무덤을 파서 처형했을 뿐 아니라 그 자손이 갖고 있던 전 재산을 몰수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그 당시 부동산을 사고 팔 때 매매계약서에 ‘이단조항’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부동산을 산 후에라도 혹시 전 주인이 이단이라는 것이 발각되어 재산을 몰수당할 때에는 부동산을 판 전 주인이 물어준다는 조항이었다.
마녀사냥꾼, 인퀴지터들은 일반적으로 주교 같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임명하였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녀사냥 자체가 교황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5백 년 이상의 긴 기간 동안 줄곧 교회가 앞장서서 직접 간접으로 지휘를 하였으며, 성직자들은 동시에 정신적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의 정신상태를 구성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여 선동적으로 마녀들을 고발하도록 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공산치하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반동분자라고 고소하여 사형당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 그 100배의 열성으로 동네 사람들을 고발했다고 상상해 보라. 그리고 고문에 관하여도 성직자들이 제일 앞장서서 극악스러운 방법을 고안해 내고 실행하도록 사촉을 하였다. 폰 주페(Frederic von Supe)라는 한 예수회 신부는 “마귀 법사들을 무엇 하러 그렇게 열심히 뒤지고 있습니까? 예수회 신부들한테 부탁해서 고문하라고 하라. 만약 부인하면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고문하면 결국 고백을 할 것이다. 그래도 고백을 않으면 마귀를 쫓아 보내는 안수를 하고 털이란 털은 모두 면도해 없애고 다시 고문해 보라. 고백 않고는 못 견딜 것이다”라고 했는가 하면, 쟝 보뎅이라는 배심관은 “아무리 미약한 불에 마녀들을 굽고 그슬러 고통을 최대로 주어도 지옥에서 영원한 불 속에 앉아 받는 영원한 고통에 비하면 너무나 편안하게 죽는 것이다. 불로 타 죽는 일은 아무리 오래 걸린다 해도 한 시간이면 족하기 때문에 그들이 받는 고통은 너무 짧은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마녀사냥 물결 속에서 가끔 양심적인 사람이 없지 않아 있었던 모양이다. 마녀사냥꾼들의 권세는 대단하였다. 모든 조사가 끝나서 마녀를 지방 행정관서에 넘길 때에는 그 나름대로 형식적이지만 식을 갖추어 진행하였다. 즉, 인수인계를 하면서 “원하는 바 세상의 재판소에서는 가능한 한 죄인의 형을 가볍게 하여 땅에 피를 흘리는 일이나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고 인퀴지터가 낭독한다. 그런데 이 말을 합당하게 받아들여 1521년에 베니스의 한 상원의원이 명하여 브레시아(Brescia)에서 마녀를 죽이지 못하게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교황 레오 10세는 노발대발하여 특별 칙령을 내렸다. “성스러운 교회법에도 저촉되는 일이고 도의적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부도덕한 일이며 현 법령에도 위반되는 일을 전문적 지식이 없는 한 개인이 감히 주의 뜻을 받아 행하는 우리의 사형명령을 거역할 수 있단 말인가. …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다만 명령을 받들어 사형을 집행할 따름이다…”라 하고, 이어서 교황은 “이 명령에 대한 탄원이란 있을 수 없다”라고 칙령을 끝맺었다.
결국 크리스천이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나 위치들이 여신(女神)을 섬기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 비크리스천들의 생각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위치는 잔 다르크(Jeanne d'Arc)였고, 가장 유명한 천주교의 성녀(聖女)도 잔 다르크였다. 잔 다르크는 어느 언덕 위에 있는 고목에 가서 항상 기도를 드렸고, 어느 샘물에서 나오는 물을 성수로 여겼었다. 여기서 그녀가 좋아하는 성인들이 나타났고 천사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재판한 가톨릭 교회는 마귀와 여신들을 만난 위치였다고 판단하여 1431년 5월 31일 그녀를 불태워 죽였고, 24년 후 다시 종교재판하여 크리스천으로 둔갑시켰으며, 1920년에 와서 베네딕트 15세 교황에 의하여 성녀(聖女)로 시성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 고목 있는 곳에 사당을 세우고 그 샘물터를 성소(聖所)로 여겨 사람들이 물을 떠가고 있는데, 누가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그 고목은 성황당(城隍堂)도 될 수 있고 마리아가 나타난 성스러운 곳도 될 수 있는 것이며, 샘물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84%)
종교개혁
2009.05.11 08:52:31 (*.131.66.250)
종교개혁
우리는 종교사를 정치적인 안목으로 쳐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그 집권세력에 반항하여 혁명을 일으켜 또 하나의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게 된 소위 종교개혁이란 것이 일어나게 된 것이 어제의 일이라 생각한다면, 십자군의 전쟁으로 세계를 휩쓸던 사건은 그제의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을 논하자면 십자군 폭풍의 끄트머리인 1300년대 초로 올라가서 역사를 다듬어 관찰해 보고 싶다.
약 2백 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으로 프리메이슨 조직의 가장 중요한 종단이었던 ‘템플라 기사단(Knights Templar)’은 회교도 세계의 마찬가지 조직이었던 ‘아사신(Assassin)’이란 종단과 손잡고 크리스천들의 안전한 성지순례를 보장하는 일종의 관광사업을 하면서 역사상 처음 생긴 다국적기업인 국제은행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특히 옛 솔로몬 왕의 사원과 헤롯 왕의 사원에서 엄청난 보물을 찾아내어 당시의 세계 금융을 독차지하다시피 하였고, 각 나라 정부에게도 많은 돈을 꾸어 주어 명실공히 당시의 서구 세계를 조정할 수 있는 세력조직이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의 세계은행과 IMF, 그리고 전 유럽에 걸친 시중 은행역할까지 도맡아 했던 것이다. 이때 프랑스는 십자군 전쟁에 가장 큰 군대를 동원했을 뿐 아니라 다른 사소한 전쟁으로 인하여 ‘템플라 기사단’에 막대한 빚을 지기도 했지만, 또한 프랑스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이기도 하였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1285년에 왕이 된 프랑스의 필립 4세는 대단한 권모술수가였다. 막대한 빚 때문에 국고수입을 늘리기 위해 교회에도 세금을 부과하려 하였고, 이에 신경이 자극된 교황은 교황대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면서 교회가 피해를 보는 것을 방지하려 하였다. 당시의 교황이었던 보니파세 8세(Pope Boniface VIII.)가 막 파문선고를 내리려 하는 순간 필립 왕은 작은 군대를 보내 교황을 납치하였었고, 드디어 그를 독살하여 죽였으며, 그 뒤를 이은 베네딕트 11세(Benedict XI.)도 동조하지 않자 1년도 못 되어 없애 버렸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드는 보르도의 대주교(Archibishop of Bordeaux)를 교황에 앉혀 클레멘트 5세(Clement V.)라 부르고 세계를 주무르려 하였다. 처음 사업으로 고안해 낸 것이 템플라 기사단을 없애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협의할 일이 있다고 속임수를 써서 템플라 기사단의 총수 다 몰레이(Jacque de Moley)를 파리로 불러, 그의 일당을 프랑스 전체에서 일시에 체포했다는 이야기를 ‘레네-르-샤토’의 장에서 설명하였다. 이때 프랑스에서 아직 잡히지 않은 템플라 기사단원들이 대거 피난을 가 가장 크게 정착한 곳이 스코틀랜드였다. 이것이 프리메이슨의 스코티시 라이트(Scottish Rite)가 생기게 된 연유이다. 프리메이슨에 대한 이야기는 “그림자 정부” 정치편이란 책에서 자세히 설명되었음을 알린다. 여하튼 이 사건은 역사상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물론 이 때까지도 프리메이슨과 바티칸과의 사이는 애증관계를 번갈아 가면서 교묘하게 진행되었으나 일반적으로 교황 직속의 종교군단 격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대체적으로 좋은 유대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부터는 완전한 적대관계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프리메이슨의 보복은 물론 클레멘트 교황과 필립 왕의 요절뿐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형편이다. 프랑스는 그 값을 프랑스 혁명으로 치렀고, 바티칸은 종교혁명으로 일단 날개가 잘리듯 쪼개졌으며, 20세기에 와서 바티칸 내부가 차차 썩기 시작하였고, 21세기에 들어선 오늘에 와서는 가톨릭의 외형마저 침공을 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려면 많은 기본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설명을 피하기로 하고, 미래에 기회가 닿으면 그 때나 책으로 소개해 볼까 한다.
이것이 하나의 관점이고, 또 다른 계통의 관심사는 인도, 페르시아를 통해 들어온 수학(數學)에서의 ‘제로(zero)’, 즉 ‘영(零)에 대한 관념’이 그리스도교 치하에서 불법으로 취급되어 입 밖에 내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의 토대이며 누구나 학교에 가면 배우고 있는 수학이라는 것은 슈메르에서 개발되어 인도와 페르시아에서는 이를 심오한 철학으로 취급하였으나, 희랍에서부터 금지된 것이 그리스도교 치하에 들어가면서 영(零)을 말하는 사람은 이단으로 취급당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 물론 장대에 묶여 불에 타 죽게 되는 것이었다. 영이란 관념이 없으면 수학을 어느 차원 이상으로 발전시킬 수 없는 일이며, 현재 천체물리학(astrophysics)에서 가장 중요한 관념이고, 이 관념 없이는 블랙홀(Black Hole)의 신비도 다룰 수 없다. 영(零)의 관념은 수학의 기본뿐 아니라 철학, 과학, 종교의 근본이 되는 사상이며, 영을 이해한다면 신(神)의 존재관념 자체가 문제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이를 금지해 왔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뉴턴(Isaac Newton)이 지구의 중력(重力)에 대한 이론을 펼치면서 교회는 더 이상 이를 금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함구하기 시작했다. 영의 의미와 역사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고자 하는 독자에게는 사이프(Charles Seife)의 ‘ZERO, The Biography of a Dangerous Idea’라는 책을 권고한다. 그러나 지하에서 이 관념을 꾸준히 계승해 온 무리들이 프리메이슨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분열난맥(分裂亂脈)의 학설, 즉 ‘카오스 학설(Theory of Chaos)’ 역시 프리메이슨들이 세상사를 취급하는 데 있어서 사용하는 절대적인 철학이다. 근대 프리메이슨의 창시자라고까지 숭앙을 받는 앨버트 파이크(Albert Pike) 장군은 마치 프리메이슨의 성경과 같은 그의 저서 ‘The Morals and Dogma’ 표지에 “Ordo Ab Chao”라고 표어판을 장식하였다. 이 말은 영어로 풀이하면 “Order of Chaos”, 다시 말해서 프리메이슨은 분열, 난맥, 혼잡을 초래하는 종단(宗團)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뜻을 하나의 표어로 사용한 것이다. 수학(數學)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카오스 학설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애초에 하나로 형성되어 있던 덩어리가 두서없이 분열되어 가다 어느 시점에 가서는 다시 하나로 통합된다는 아직 이해가 쉽지 않은 수학적인 학설이다. 이 학설의 실제 응용장소가 지구상의 인간사회이다. 다시 말해서 관현악단의 지휘자가 각양각색의 음질과 고저를 갖는 각각 다른 악기를 가진 악단을 지휘하듯, 지구상의 인간세계를 각양각색의 악기처럼 분리해 놓고 이를 관현악단처럼 만들어 오케스트레이트(orchestrate)하는 것이며, 이들이 어지럽게 혼란을 일으키다가 프리메이슨이 지휘봉을 들었을 때 통일되어 훌륭한 화음을 가진 하나의 음악으로 통일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제작품인 개신교 신종파는 끊임없이 분열되어 가고 있으면서도 당장 눈앞의 적인 가톨릭에 대항해서는 연합전선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15·16세기에는 침체되었던 프리메이슨의 세력이 지하에서 재정리되고 유럽 각지에 프리메이슨이 번창하였고,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자유로운 사상, 개혁적인 사상이 프리메이슨 로지(lodge)에서 토론되고 있었으며, 회원들은 그들이 목적한 대로 귀족이나 사회 저명인사들로 구성되어 갔다. 당연히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마음은 가톨릭 교황의 막강한 세력에 의한 사회적인 또는 국가적인 모순과 부작용에 의구심과 반항심이 불어나고 있을 때가 되었다. 그리고 때마침 구텐베르크(Johann Gutenberg)의 인쇄기술이 보급됨에 따라 당시의 형편으로서는 거대한 매스컴의 도구를 얻게 된 셈이었다. 인쇄기술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이유는 성경을 쉽게 많이 보급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바티칸에 대한 거대한 봉기를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무르익었고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것이었다.
필자의 한 지인 중에 가톨릭 신자로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필자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박식했다고 할 만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필자를 거듭난 가톨릭 신자로 만들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한 사람 중의 하나이기도 하였는데, 그가 필자를 설복(說伏)시키기 위해 마르틴 루터에 대하여 설명한 이야기는 이렇다. 프리메이슨의 중추를 이루고 있던 유대인들은 바티칸을 파괴시키기 위한 과정의 첫 과업으로 종교개혁을 꾸미는 데 앞에 내세울 이상적인 인물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발굴한 사람이 마르틴 루터였다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적격인물로 결정된 이유는 명석한 두뇌를 갖고 있는 승려로서 천주교의 교리에 모순이 많음을 터득하고는 괴로움에 젖어 동네에 나와 술을 많이 마셨고, 울분이 속으로 사무쳤는지 입이 걸어 욕지거리를 마구 해대는 천(賤)한 끼가 있었으며, 여자를 좋아하는 타락한 승려였기 때문에 그 약점을 이용하여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입이 얼마나 거칠었는가는 그의 저서에서도 유감없이 나타난다.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이란 책에서도 거침없이 유대인들을 지탄했는가 하면, 죽기 1년 전에 쓴 ‘마귀에 의하여 만들어진 로마 교황에 대항하여’라는 저서에서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욕들이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결국 수녀원에서 도망 나온 수녀와 결혼도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에 대항하여 반기를 든 초창기에는 유대인들을 몹시도 옹호하고 나왔다. 그는 “유대인들은 우리의 주님인 예수와 혈연관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만약 피와 살이 섞였다는 사실이 중요한 인자라면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친애하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고하니, 만일 당신네들이 나를 이단이라고 손가락질하는 데 싫증이 났다면, 이제부터 나를 유대인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 저주하십시오”라고 자신이 유대인이 된 듯 격렬하게 유대인들을 옹호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가 유대인들에게 완전히 속아 이용당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유대인들을 저주하는 글을 쓰게 된다.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The Jews and Their Lies)’이란 이 책은 불행히도 새 책방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고, 다만 지하서점에서만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혹시 누가 소장하고 있던 책이 헌 책방에 나오면 가능할지 모르겠다.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의회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확인하기 위해 뒤져보았더니 그 책은 없고 이 책에 대하여 반격하는 글은 두어 개 있었다. 그리고 미국 이슬람 교회에서 주관하는 웹 사이트 www.abbc.com/luther/index.htm 또는 www.fordham.edu/halsall/source/luther-jews.html에 들어가면 책 전체는 아니지만 발췌한 내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티칸이 관대해서 종교개혁을 허용한 것은 아닌 듯싶다. 그리고 여느 때 같으면 마르틴 루터 같은 사람은 불태워 죽였을 터인데도 그가 죽지 않고 살아 개혁에 성공했다는 것은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 죽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 정황을 좀 살펴보자. 루터가 개혁운동을 한창 할 때는 1517년, 그가 33살 때부터 41세가 될 때까지 약 8년 정도를 전성시기로 잡을 수 있고, 그는 1546년 62세로 생을 마쳤다. 가톨릭으로서 볼 때에는 마르틴 루터처럼 교회에 손해를 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 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1642년 갈릴레오 갈릴레이(Gallileo Gallilei)가 다만 지구가 둥글다고 진실을 말한 이유로 그를 불태워 죽일 정도로 가톨릭은 엄했었고 용서나 관용이라는 것을 찾아보기 어려운 처지였다. 그렇다면 루터와 갈릴레이를 비교해 볼 때 과연 누구의 죄가 더 심한 죄이고, 누구의 영향에 더 신경을 써야 했을까? 나의 생각으로는 마르틴 루터는 여러 번 불태웠어도 교황은 시원치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마르틴 루터가 심지어 교황이라는 것은 마귀의 산물이라고 규정짓고 오만가지 욕설을 퍼부은 책을 써 퍼뜨릴 정도였는데도 그를 용서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믿어진다. 그리고 1600년에도 지오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라는 명석한 승려가 여러 그리스도교적 문헌을 읽고 결국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사람이 죽으면 다른 육체에 영(靈)이 들어가 다시 태어난다는 환생사상(還生思想-reincarnation)을 포함하고 있다는 주장을 했다고 그도 불태워 죽였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실력자가 루터를 감싸고 바티칸이 루터를 죽이지 못하게 할 수 있었으며, 또 루터의 주장을 성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 한 국가의 왕이나 영주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가톨릭의 힘이 미치는 판도 전체에 걸쳐 가톨릭이 어쩔 수 없는, 가톨릭과 대적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어떤 조직적인 막강한 힘이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면 이런 막강한 힘을 가진 조직이 무엇인가? 프리메이슨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프리메이슨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현재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완전히 프리메이슨에 사로잡혀 그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결론을 짓는 이유는 다른 기회에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프리메이슨과 바티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이해한다는 것에 무리가 있을 줄 믿는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많은 기본적인 예비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믿어지며, 그 설명을 하자면 책 하나 갖고도 설명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이런 말이 믿어지지 않는 독자가 있다면 관대한 마음으로 하나의 가설로 우선 받아 주기 바란다.
교 황
교황이라고 하면 당연히 바티칸 시에 있는 로마 천주교의 교황을 말한다. 콥트교에도 교황이 있지만 너무 미약하고 역사적으로 영향을 미친 일이 별로 없을 뿐 아니라 대부분 그런 교황이 있는 것 자체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앞의 장에서 이미 여러 번 설명한 바와 같이 애당초 세계(당시는 현 유럽과 소아시아를 말했음)를 다섯 개의 교역(敎域)으로 나누고 각 교역마다 총책임자가 있어 이들이 교직(敎職-patriarch)이라고 한국 사전에는 표현되었지만, 필자는 이 책에서 교왕(敎王)이라고 표현하였다. 왜냐하면 한국 사전대로 따른다면 바티칸의 교황도 교직이라 불러야 할 것인데, 실제로 교직이라 하면 전혀 다른 인상을 주기 때문에 교왕이라 하였고, 그 중 바티칸의 교왕만 교황이라고 특별히 부르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바티칸의 교왕이 나중에 로마제국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 세상에서 가장 큰 세력을 차지하게 된 반면에 다른 교역들은 모슬렘에게 점령되어 별로 세력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장에서 소개하고 싶은 사연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지상의 최고 책임자로 있는 교황은 하나님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실수를 할 수 없는 완벽한 인간이라는 것을 니케아 종교회의 때 시성(諡聖)하였다는 것이다. 시성(諡聖)이란 말은 ‘캐논(canon)’을 우리말로 표현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캐논화한다고 하면 교황청에서 심사숙고를 거쳐 성장의 명부에 올린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성인(聖人-Saint)이라는 칭호를 붙이려면 보통 100년 정도 관찰을 하여 틀림없다고 인정될 때 시성(canonize)하는 것이 통례라 한다. 이렇게 조심을 거듭한 심사숙고 끝에 결정했기 때문에 일단 한 번 시성하면 절대로 잘못될 수도 없으며 변경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애당초 만든 성경도 ‘프로토캐논(Protocanon)’, ‘듀트로캐논(Deutrocanon)’이라 하여 원본을 시성하여 성스러울 뿐 아니라 틀림없는 것이니 고치거나 변조시킬 수 없다는 뜻도 된다. 이와 비슷하게 교황의 권위도 마찬가지로 실수할 수도 없고 틀릴 수도 없는 신성한 사람이라고 시성하였다. 따라서 그는 완벽한 인간이고 준(準)신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 4세기에 이미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8세기에 와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Donation of Constantine)’이란 책을 내놓고 교황의 신성을 강조했는가 하면, 11세기에 와서도 교황 그레고리 7세(Pope Gregory VII., 재위 1073~1085)는 교황만이 황제나 왕들에게 관(冠)을 씌워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다 했고, 세상의 모든 통치자들은 자기의 영적 통치 밑에 속해야 한다면서 27개 조항의 문서를 만들어 공포하였다. 그 중의 몇 개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 로마 교회(천주교)는 세상의 끝날까지 잘못이나 실수를 절대로 하지도 않을 것이며 할 수도 없다.
* 교황은 아무도 심판할 수 없다.
* 교황만이 왕자들로 하여금 발에 키스하도록 할 수 있다.
* 정당하게 선출된 교황은 베드로의 공적(功績)으로 당연히 성인(聖人)의 칭호를 가져야 한다.
여기서 자동으로 성인이 되는 것은 수용되지 않았으나 발에 키스하는 것은 제도화되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야말로 표본이 되고 성스럽다고 생각되는 교황도 많았지만 실망스러운 교황도 많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어째서 모든 면에서 섬겨야 할 표본이 되는 교황 이야기는 여기서 하지 않는가라고 질문할 독자들이 많이 있을 줄 안다. 그 이유는 사람이란 자랑스럽고 좋은 것은 앞세워서 이야기하는 것을 즐겨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과장하고 거짓말까지 덧붙여서 말하기까지도 한다. 그래서 좋은 이야기는 이미 많이 사회에 소개되어 있기에 여기서는 자랑스럽지 않은 이야기를 몇 가지 소개해 보는 것이다. 필경 지금까지 교황에 대하여 가장 비판적인 사람은 마르틴 루터였을 것이다. 그의 험악스러운 독설은 너무나 유명하다. 예를 들어 루터는 줄리우스 2세(Julius II.)를 흡혈귀(blood drinker)라 하고 적(敵)그리스도라고 부를 정도였고, 얼마 전에 죽은 뉴욕의 마틴(Fr. Malachi Martin) 신부도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적그리스도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성 베드로의 왕국(St. Peter's Kingdom)’이란 책을 쓴 가톨릭 신자인 팩커(Jerrold Packer) 씨는 현재 교황 주변에 있는 추기경들은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존경되는 사람들이라 격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 나타나는 평가를 참고해야 옳지 않을까 한다. 교황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서기 32년의 성 베드로부터 따지면, 현 요한 바오로 2세는 265대 교황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교황들의 배경을 보면 그야말로 다양하다. 아주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아주 부자도 있었고, 어마어마하게 유식한 학자가 있었는가 하면 일자무식의 교황도 있었으며, 그레고리 9세처럼 여든 여섯의 노령 교황이 있었는가 하면 베네딕트 9세처럼 열 여덟의 청소년이 있기도 할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사생활도 엄청난 폭이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는 것을 고려하면서 읽어 주기 바란다.
교황선출을 둘러싼 선거전
현재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출되기 전에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고, 심지어는 전임자인 요한 바오로 1세가 취임한 지 한 달 만에 살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졌었다(살해당했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증명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상황적인 판단에 의해 추측할 뿐이다). 현대의 교황을 사실상의 세계통치자로 여기지 않는 상태에서 그러할진대, 각국의 왕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하는 중세기에 교황을 선출하는 장면은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기 바란다. 특히 교황이 죽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해야 했던 막간에는 당연히 절정을 이루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래서 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들이 모이는 곳을 ‘콩클레이브(conclave)’라고 부르는데, 이 콩클레이브란 어휘는 ‘열쇠와 함께’라는 뜻이라 한다. 1200년대에 처음으로 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들이 새 교황을 선출할 때까지 그들이 있는 거처를 자물쇠로 잠가 버렸다는 것이다. 트롤로프(T.A. Trollope)가 쓴 ‘교황의 콩클레이브(The Papal Conclave)’란 책에 의하면, 이탈리아와 유럽 각지에 있는 파벌들이 막대한 돈을 갖고 와서 표 사기 작전을 하였고, 흔히 그 뒤에서 은행가들이 막대한 돈을 갖고 지금으로 말하면 로비스트들을 바티칸에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추기경회의는 가장 부패하기 쉬운 곳이었다. 처음 교황이 선거제도로 선출된 것은 1241년의 일이라 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레데릭 2세(Frederick II.)와 교황 그레고리 9세가 한창 세력다툼이 심할 때 교황이 죽어 버렸다. 이때 로마제국의 상원의원인 오르시니(Matteo Orsini)는 로마의 추기경 10명이 재빨리 교황을 선출하기를 원하였다. 그는 아주 낡은 옛 사원 셉티조니움(Septizonium)이라는 곳에 늙은 추기경들을 모셔 놓고, 군인들은 추기경들의 손과 발을 함께 묶어 매질을 하고 욕을 보이고, 들창문을 모두 막아 버리고 부서진 가구로 장식된 케케묵은 감옥 같은 방에 가두고는 작은 창살 사이로 밥을 들여 주면서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교황으로 선출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이들이 굽히지 않고 말을 듣지 않자, 오르시니는 이들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명하며 천장의 구멍을 통하여 오줌과 똥을 싸도록 하였다. 이런 극심한 악취 속에서 영국의 추기경이 죽게 되었다. 군인들은 재빨리 그를 나무관에 넣어 그 방에 방치해 두고 다른 추기경들이 어서 결정하도록 촉구하였다. 결국 두 달이 지난 다음에 그들은 사비나의 고드프리(Godfrey)를 선출하여 셀레스틴 4세(Celestine IV.)라고 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르시니는 만족하였고, 추기경들은 각각 자기 본고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셀레스틴은 그 동안 받은 고통 때문에 불과 16일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1241년 11월 10일부터 1243년 6월 25일까지 교황이 없는 공백기간이 생기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절의 교황과 창녀들
르네상스 시절의 교황들은 지금의 정치가들보다 이해심 많고 관대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의 창녀업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세금을 부과하고 관리·통제까지 했었다. 한 통계에 의하면 1490년 로마 시의 인구가 10만 정도였는데 창녀의 인구는 6천8백 명이었으며, 이들은 주로 순례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인텔리 여자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로마의 창녀들은 일본이나 한국의 기생처럼 하나의 사회계급으로 학식과 예능에 능숙하여 긍지를 갖고 명예로 여길 정도였으며, 이들은 정해진 특정 지역에 살고 있었다고 한 역사가는 설명하였다. 당시의 교황은 로마의 민간정부를 완전히 관장하였으며, 지방의 법률까지 제정할 정도였다. 역사가 카바네(Augustin Cabanes)와 로도카나치(Emmanuel Rodocanachi)의 설명에 의하면,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 재위 1471~1484)는 창녀들에게 정식으로 세금을 부과하였고, 교황 알렉산더 6세(Alexander VI., 재위 1492~1503)는 1496년 6월 23일 법령을 발표하고 그 법령에 따라 건물 여러 채를 창녀들에게 세를 주고 창녀업을 하도록 장려했다 하며, 이렇게 교회의 방침으로 번영하는 유흥업은 약 백 년 정도 계속되었다 한다.
교황 줄리우스 2세(Julius II., 재위 1503~1513)는 1510년 7월 2일 칙령을 내려 바티칸 성 근처의 창녀집 운영을 금하는 대신 로마 시의 특정 지역을 설정하여 창녀촌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교황 레오 10세(Leo X., 재위 1513~1521)와 교황 클레멘트 7세(Clement VII., 재위 1523~1534)는 창녀가 죽을 때 유산의 4분의 1을 산타 마리아 막달레나 수녀원에 기증한다는 조건으로 창녀집 운영을 허락했다고 한다.
교황에 따라서 창녀지역이 옮겨지기도 하고 늘었다 줄었다 변형되기도 하였다. 또 어떤 경우는 면허를 받는 데 연수입의 1할을 지불하는 경우도 있었는가 하면, 벌금을 부가하든가 역마차를 타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때도 있는 등 창녀에 대한 처우는 참으로 다양했었다. 교황 피우스 4세(Pius IV., 재위 1559~1565)의 경우는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는 교회 근처에 살지 못하며, 일곱 살 미만의 여자 아이가 거리에서 꽃 파는 것을 금하는 칙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여기서 꽃 판다는 것은 자기 몸을 판다는 비유로 표현한 것이다. 또 창녀들에게는 통금시간도 만들어 어느 시간이 지나면 길거리에 걸어 다니지 못하도록 하였고, 이를 어기는 여자는 매질하는 형벌을 주었다. 한 번은 니나라고 하는 창녀가 잡혀 끌려가는데, 이 여자는 하도 인기가 높은 여자라 구경 나온 사람들이 장사진을 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창녀집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이를 통제하는 조치도 취한 기록이 있다. 교황 피우스 5세(Pius V., 재위 1566~1572)는 창녀촌의 경계에 담을 쌓도록 명령하였다. 이는 10년 전에 교황 바오로 4세가 유대인 마을에 담을 쌓도록 하여 그들의 통행을 감시하고 통제한 것을 그대로 본뜬 것이었다. 그리하여 1569년 10월 19일에 첫 돌을 놓고, 한 달 후에 성이 완성되자 대문을 두 개만 만들어 놓고 창녀나 창녀들을 찾는 손님들의 통행을 관리했다고 한다. 교황 피우스 5세는 사순절 때에는 전 40일 동안 창녀동네 성문을 닫아 영업을 못하게 하였다. 그러고 나서 굶는 사람이 생기자 이를 측은하게 생각하여 문 닫는 날은 일당을 대신 지불해 주기도 했다. 르네상스 시대 전반에 걸쳐 창녀업은 허락된 직업이었으며, 그들은 크리스마스 때 길거리에 나와 대행진을 하는 풍습도 만들어 인기가 높았고 구경꾼들이 아주 많았다고 전해진다.
교황과 여자관계
교황 알렉산더 6세(Alexander VI., 재위 1492~1503)는 칙령으로 대서양을 절반으로 갈라 신대륙은 스페인에, 아프리카는 포르투갈에게 각각 주었다. 그가 교황이 되기 전에는 보르지아(Rodrigo Borgia) 추기경이라 불렸는데, 그가 아직 추기경으로 57세 때인 1489년에 열 다섯 살 난 지울리아 파르네세(Giulia Farnese, 1474~1524)라는 여자를 애첩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오르시노 오르시니라는 남자와 이미 결혼한 기혼녀였다. 챔벌린이라는 교황청 역사가에 의하면, 그녀의 머리는 매우 아름답고 길어 바티칸의 대리석 마루에 닿을 정도라고 표현하였고, 그녀의 남편은 참으로 좋은 사람으로 한 눈이 멀었지만 다른 한 눈으로 윙크를 잘하는 남자였다고 평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더 교황이 애인이 있었다는 것은 주변에서 잘 알려진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를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뜻으로 라 벨라(La Bella)라고 불렀다. 이 일은 누구나 아는 비밀이었기 때문에 한 교회의 최고 성직자는 애첩을 맞이하면서 마치 결혼식처럼 행사를 교회 안에서 가질 정도로 대담했다고 한다. 당시 교황의 의전(儀典) 책임자로 있던 독일 사람 부르카르트(Johann Burchard)가 쓴 일기장이 지금도 남아 있어 그 당시의 정황을 묘사해 주었다. 그 내용에 보면, 1941년 교회의 최고위 성직자가 애첩들과 마치 결혼식 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공개적으로 식을 거행했다고 하였으며, 이러한 타락이 만연되어 절제생활을 하고 있는 수도원에도 번질까 두려워한다고 하면서 이미 주변의 수녀원들은 창녀집으로 전락했다고 기술하였다.
지울리아 파르네세는 알렉산더 교황의 열 세 살 난 딸 루크레지아 보르지아(Lucrezia Borgia)의 결혼식에 다른 150명의 여자들과 함께 참석했다고 하며, 결혼식에서 지울리아 파르네세는 전혀 샘내거나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줄곧 명랑한 자세로 있었다 한다. 결혼식의 일환으로 신부(新婦)가 긴 웨딩가운을 입고 교황 본관에 안내되어 들어가면서 150명의 다른 여자들이 따라 들어갔다. 이 방에는 교황이 황좌(皇座)에 앉아 있고 그 옆에 11명의 추기경들이 있었으며, 결혼식에 온 남자 축하객들은 약 한 시간 동안 출입이 금지되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 안에 들어간 여자들은 교황의 딸과 가까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교황 앞에서 무릎을 꿇은 사람이 없었으며, 후에 교황의 아들이 무릎을 꿇고 교황의 발에 키스를 한 후에야 다른 여자들이 따라서 교황 신발에 달린 십자가에 키스를 하였고, 예식이 절반 진행된 다음에야 남자 하객들이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결혼식 잔치는 성대하였다. 교황은 50개의 단지에 약 100파운드 정도 되는 아주 고급 캔디를 마련하고 손님들에게 집어 주었다. 교황은 특히 예쁜 여자들 젖가슴 속에 주님의 은총을 받으라 하면서 캔디를 깊이 집어넣어 주는 것을 즐겨 하였고 여자들은 이를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지울리아 파르네세는 교황과의 사이에 아들 둘을 낳았다. 그녀는 이 사실을 숨기지 않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곤 하였으며, 그 중 하나는 후일에 이노센트 10세(Innocent X., 재위 1644~1655) 교황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오라버니 알레산드로 파르네세(Alessandro Farnese)는 추기경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치맛바람 추기경(Petticoat Cardinal)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사람도 후에 바오로 3세(Paul III., 재위 1534~1549) 교황이 된다. 지울리아 파르네세는 종교적인 그림으로 그녀의 초상화가 여러 개 그려졌으며, 그 중 유명한 것은 라파엘(Raphael)이 그린 ‘변용(變容-Transfiguration)’이라 하겠다. 그리고 지금도 성 베드로 광장에는 그녀의 대리석 조각상이 있다. 원래는 나체로 되어 있던 것을 3백 년이 지난 후 피우스 9세 교황(Pius IX., 재위 1846~1878) 때 하도 말이 많아 금속판으로 그럴듯하게 몸 가리개를 만들어 붙이고 대리석과 조화되도록 페인트칠을 하였다. 또 그녀는 핀투리키오(Pinturicchio)라는 화가가 성모 마리아 상을 그리는 데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한다.
교황청은 친족특혜의 본고장
교황의 권세가 한창일 때 교황들은 추기경 같은 높은 벼슬을 자기 친족에게 주는 일이 허다하였다. 이유는 권세도 권세지만 돈이 많이 생기는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교황 알렉산더 6세에게 불평한 한 서신에 “…교황의 조카들을 모두 만족시키려면 교황청 10개는 있어야 하겠습니다…”라 씌어져 있다. 물론 공식적으로 교황은 결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식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교황 형제의 자식에게 좋은 자리를 주곤 하였지만, 많은 경우 조카라는 사람들이 사실은 교황의 친자식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교황청 부근에서는 조카라는 말이 은근히 유행하였다. ‘조카’라는 어휘는 이탈리어로 ‘니포테(nipote)’라 하는데, 이 말이 영어로 와서 ‘네포티즘(nepotism)’, 즉 친족특혜라는 단어가 된 것이다.
교황 스티븐 7세
교황 스티븐 7세(Stephen VII., 재위 896~897)는 죽은 교황을 심판하여 사형선고를 내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전 교황인 포르모수스(Formosus, 891~896) 교황이 신성로마 황제를 선택하여 봉임한 일에 옳지 못한 일이 있었다고 생각해, 묻힌 지 이미 11개월이 된 그의 시체를 파서 썩은 시체에 교황의 법의를 입혀 황좌(皇座)에 앉혀 놓고 자기가 직접 재판을 시작하였다. 이때 학자들은 이 일을 ‘사체의 종교재판(The Cadaveric Synod)’이라 하여 훌륭한 일로 여길 정도였다. 스티븐 교황은 다 썩어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시체를 화난 얼굴로 째려 보며, “당신은 어째서 신성한 교황청을 모욕하였는가?”라고 질문하였다. 그러자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십대 청년인 디콘이, “그것은 제가 악마였기 때문이지요”라고 대답했다. 아마도 전 교황의 혼이 젊은 디콘의 육체 속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판결은 그의 교황임명 자체를 무효로 만들고, 곧 군인이 시체에 다가서서 은혜를 줄 때 사용하던 세 손가락을 잘라 버리고 교황 법복을 벗겼으며, 나머지 시신은 바티칸 시에 흐르는 티베라 강에 던져 버렸다. 그러고 나서 교황 스티븐 7세 자신은 얼마 안 되어 목매어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교황 ‘요한 12세’
교황 요한 12세(John XII., 재위 955~963)은 로마의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20대에 교황이 된 사람이다. 그는 난봉꾼으로 그의 엽색 행각은 문란하다는 정평이 있던 당시의 로마 사회에도 사람들이 놀랄 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항상 가까워야 했을 신성로마제국의 오토(Otto) 황제와 사이가 좋지 않아 그를 타도하기 위해 악명 높은 몽고와 사라센에 연합군을 형성하자는 제의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이런 일이 있자 그와 적대관계를 가진 오토 신성로마 황제와 주교, 추기경들이 그를 입건하여 재판하게 되었다. 죄목은 마구간에서 디콘(deacon)을 서품해 주기도 했고, 뇌물을 받고 추기경, 디콘, 신부 등을 서품해 주어 신성을 모독했으며, 사냥에 나가서 자기의 대부와 같은 베네딕트라는 사람을 눈멀게 하였고, 요한이라는 추기경을 거세시켜 준다고 엉터리 수술을 하여 얼마 후 그가 죽게 된 원인을 만들었으며, 레이니어라는 사람의 미망인과 그의 첩 스테파나라는 여자, 아나라는 이름의 과부, 본인의 질녀와 간음을 했다는 것 등등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죄목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하여 로마의 재판소에 출두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 결과 오토 황제는 레오 8세를 교황으로 대신 앉히고 전쟁 때문에 북쪽으로 출정나갔다. 오토가 떠나자 요한은 로마로 돌아와 바티칸을 점령하고, 다시 황위에 앉아 자기를 재판했던 사람들을 잡아 종교재판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한 명은 혀를 뽑아 버렸고, 한 명은 손을 잘라 버렸으며, 또 한 명은 코와 손가락을 잘라 버려 복수를 했다.
그가 황위에 앉은 지 8년째 되는 해였다. 어느 날 그가 어느 유부녀 집에 찾아가 간음을 하고 있는 도중에 남편이 돌아왔다. 남편은 화가 나서 망치로 교황의 머리를 내리쳐 며칠 후 드디어 교황은 죽게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그가 간음을 하고 있는 도중에 심장마비가 와 8일 후에 죽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여하튼 그가 간음하다 죽은 것임에는 틀림없다. 때마침 전쟁에서 틈을 내어 돌아온 오토는 스티븐 교황처럼 시체를 파내지는 않았다고 한다.
칼뱅주의
한국의 개신교는 미국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많이 받았다. 마치 미국 개신교와 한뿌리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할 정도이다. 그래서 한국의 개신교를 쳐다보기 전에 미국의 개신교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프리메이슨(Freemasonry)과 청교도(Puritans)라는 두 개의 줄기를 갖고 있는 나라이다. 프리메이슨의 정신적인 지주는 간단하게 헤르메스(Hermeticists), 골든 도온(Golden Dawn), 로시크루시안(Rosicrucians), 알케미(Alchemists), 카발라(Kabalists) 등의 신앙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유신론자(有神論者)들이기는 하지만, 믿음의 본질에서 크리스천과는 정면으로 대치되며 지하에 숨어 있어 보이지도 않는 세계적 조직체이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사(活動史)는 정치적인 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일반 사람들은 이러한 내용을 이해는 고사하고 그런 것이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미국 대통령은 프리메이슨이었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들도 거의 프리메이슨들이며, 이러한 현실은 그들의 큰 조직과 활동의 결정판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프리메이슨에 관한 내용은 ‘그림자 정부’라는 책을 통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한편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건국사(建國史)를 말할 때 청교도(淸敎徒-Puritan)가 개척한 나라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것도 옳은 이야기이다. 미국이라는 땅을 발견하고 터전을 마련한 것은 프리메이슨이지만, 이 땅에 처음 집단으로 와서 개척하고 백인 종자를 퍼뜨리기 시작한 사람들은 칼뱅주의계 개신교인 청교도 신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프리메이슨들은 지하에서 회원 이외에는 비밀로 되어 있어 외부 사람들이 모르게 미국사회를 지도해 온 상황에 반하여, 청교도들은 외적으로 눈에 보이게 미국 사람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칼뱅(John Calvin, 본명: Jean Chauvin)은 16세기 프랑스 사람으로서 장성하여 활동할 때에는 프랑스의 탄압에서 도피하여 스위스 제네바에 자리를 잡았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장로교(長老敎)의 기초를 만든 사람이다. 그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반대하였으며, 제네바의 성서적 폭군이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엄격한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즐거워서 춤을 추는 것도 범죄로 취급하여 벌을 준 사람이었다. 그의 추종자 중에는 녹스(John Knox)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주 광폭하다 할 정도로 격렬한 선교자로 자기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크리스천들이 크리스천답지 못하다 믿어, 크리스천들은 모두 칼뱅주의를 따라야 한다고 성공회로부터 일종의 종교개혁을 하려고 했고, 실제로 스코틀랜드에 장로교를 세운 사람이다. 거의 고행(苦行)생활을 해야 할 정도로 엄격했던 장로교는 철저한 가톨릭 신자였던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Mary, Queen of Scotland)이 영국 왕이 되자 녹스의 장로교와 정면으로 충돌하여 투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메리 여왕은 얼마 안 되어 처형당했기 때문에 장로교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장로교는 영국 시민전쟁 때 크롬웰(Oliver Cromwell)을 지지하고 그를 교인으로 만들었다. 전쟁에 승리한 크롬웰은 찰스 1세 왕을 교수형에 처하고, 크리스천들이 호화스럽게 즐기는 크리스마스를 불법화시켰으며, 영국 전체에 화려한 색깔과 아름다운 것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 금지하도록 하였다. 다시 말해서 칼뱅주의 장로교가 통치하는 영국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잔인하고 견디기 어려운 암흑세월이 다행히도 얼마 안 가 스튜어트 왕가에 의하여 다시 왕정이 되면서 세상이 바뀌게 되었다. 그 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던 대부분의 영국 사람들은 장로교 사람들을 몹시 증오하게 되어 일종의 보복이 시작되었고 많은 장로교인들이 처형되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장로교인들, 즉 청교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대서양 건너 새 천지로 가게 되었고, 그들은 매사추세츠에 정착하여 자기네들의 자치국가를 건설했던 것이다. 당시는 영국 치하의 식민지(colony)라고 불렀지만, 실제로는 자기네들이 삼권을 갖고 매사추세츠를 정치했다. 현재 우리가 아는 미국 독립 이전에 존재하던 주들은 모두 이런 형식으로 조직되었던 것이 독립전쟁을 통해 각각의 주로 변모하게 되었으며, 그런 이유로 미국을 합중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청교도가 이주해 온 것이 1630년의 일이었고, 1620년에 바다를 건너와 플리무스(Plymouth)에 자리잡은 필그림(Pilgrim)의 뒤를 따라온 두 번째의 집단이민부류가 된 것이다. 필그림도 종교의 자유를 위해 신세계에 왔지만, 필그림은 성공회의 일원으로 플리무스에 정착하여 자신들의 신앙에 충실하며 조용히 산 사람들이었다. 결국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자신들만의 교회를 갖고 자기네들의 교리를 따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던 처지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왔으나, 이들은 자기네들이 받았던 서러움을 망각하고 신대륙에서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유럽에서 이미 끝난 마녀사냥을 시작하여, 이단이기 때문에 마녀이고 마녀이기 때문에 이단이란 식으로 사람들을 잡아 처벌을 했다.
예를 들어 1657년 10월 14일자로 보스턴 법정에서 공표된 한 법조문을 보면 아래와 같다.
“첫번째로 잡힌 남자 퀘이커는 귀를 하나 자르고 자비로 형무소에 보낼 것이며, 두 번째로 잡히면 나머지 귀를 마저 자른다. 그리고 첫번째로 잡힌 퀘이커 여자는 심한 채찍형을 가할 것이며, 두 번째에도 같은 벌을 준다. 그리고 세 번째 잡히는 경우에는 남녀 구별 없이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혀에 구멍을 뚫고 형무소에서 노동을 하게 되며, 모든 수감비용을 지불할 때까지 형무소 노동을 하도록 한다.”
퀘이커 교도들은 다른 종파와 달리 특이한 옷을 입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귀가 잘린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머리를 길게 길렀고, 귀가 있던 자리에 난 구멍을 막기 위해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다녔다. 또 퀘이커들은 행동에서도 차이가 났다. 그들은 십일조를 유대인들의 제도라고 지키지 않았으며, 성경의 가르침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다고 절대 싸우지 않았다. 물론 인사할 때 모자를 벗지 않았다. 청교도들이 퀘이커라는 말을 인용한 법을 제정한 이유는 필경 이때 영국에서 많은 퀘이커들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1656년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때부터 불과 4년 동안에 수많은 퀘이커들이 완전 나체로 공중 앞에서 채찍 매를 맞았으며, 번화한 길거리에 설치한 목판에 손목과 머리가 채워지는 형벌, 발을 쇠고랑에 채워 길가에 놓아두는 형벌 또는 목과 발뒤꿈치를 불인두로 지져 병신을 만드는 형벌 등을 받았다. 그리고 역사가 매콜리(Thomas Macaulay)에 의하면, 초기에는 사형시키는 방법으로 곰에게 잡혀 먹히게 하는 수법을 썼다 한다. 즉, 소위 죄인이라는 사람을 묶어 놓고, 잡아서 얼마 동안 굶긴 곰에게 잡아먹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얼마 안 가 취소되었다. 그 방법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즐긴다는 점이 그들의 마음을 바꾸게 했다고 설명했다. 또 뉴헤이븐(New Haven)에서 있었던 벌주는 현장의 한 목격자가 기술한 기록에 의하면, 요란하게 북을 쳐 많은 사람들이 모이도록 하고 목판에 채워진 죄수의 웃통을 벗기고는 벌겋게 달군 인두로 이단(Heresie)라는 뜻으로 ‘H’자를 살 깊숙이 지져 글을 새겼다고 했다. 그리고 일요일에 술 마신 사람은 가축 가운데 하루 종일 앉아 있게 하였고, 간통하다 들킨 여자들은 등에 커다랗게 간통(Adultery)이란 뜻의 첫 글자 ‘A’자를 약 70cm 정도의 크기로 써 붙이고 정한 기간 동안 다녀야 했으며, 처음에는 복잡한 길거리에 만들어 놓은 단 위에 올라서서 여러 시간 동안 오가는 사람들이 쳐다보고 욕할 수 있도록 서 있어야 했다. 1692년은 개까지 위치라고 사형시킨 해로 유명하다. 가장 유명했던 곳은 매사추세츠 주 살렘(Salem)이란 곳으로 지금은 위치박해 박물관을 만들어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을 정도이며, 안도버(Andover)라는 곳은 두 마리의 개와 남자 위치 한 명과 여자 위치(魔女) 세 명을 사형시켰던 곳이다. 안도버의 한 진실한 청교도는 자기 부인이 이상한 병에 걸려 의사가 아무리 노력해도 병이 낫는 기세가 없자, 어떤 위치가 해코지를 하고 있다고 믿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지랄병 있는 열 두 살 먹은 여자 아이 두 명을 지명하였다. 그리고는 지랄할 때 사람이 건드려서 조용해진다면 위치라는 것이 증명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얼마 안되어 40명이나 위치라고 잡아들였다. 한 번 누가 위치라고 지목을 하면 위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어떻든 거의 백발백중 마녀잡이는 진범을 잡게 되었다. 이때 당시 안도버의 재판관으로 있던 전 주지사의 아들 브래드스트리트(Justice Dudley Bradstreet)라는 판사는 이러한 엉터리 유죄판결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급기야는 이 판사도 위치로 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동생 존이란 사람은 그의 개가 동네 사람을 물은 일이 있어 그 사람도 개를 정신 나가게 만들어 사람들을 해치게 하는 위치라 하였고, 또 다른 사람의 개도 마귀에 걸렸다고 잡아들였다. 판사와 그의 동생은 변명할 길이 없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이런 말을 듣자마자 일찌감치 다른 주로 도망가 버려 생명을 구할 수 있었으나 두 마리의 개들은 마귀에 홀린 개로 잡혀 목매다는 교수형을 받게 되었다 한다. 그 중에는 위치로 입건되었으나 혹독한 고문에도 자백을 않고 죽은 사람들도 몇 있었다. 이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자백을 하지 않는 한 위치로 판정을 내릴 수 없었고, 만일 위치로 판결이 나면 재산은 모두 차압당하기 때문에 남은 재산이라도 후대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자백을 끝까지 않고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1692년에서 1693년까지 1년 사이에 150명이 위치로 입건되었으며, 그 중 20명이 사형당하고 4명은 고문으로 옥중 사망하였다 한다. 그로부터 4년 후에 자기들의 무고죄를 뉘우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 중 배심원으로 있던 앤(Anne Putman)이란 여자는 “불행한 때에 우리는 사탄이 덮쳐 완전히 헛것을 보게 된 것이다”라고 간증했다 한다. 그러니까 아마도 가장 진실한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적그리스도였고, 이들이 오히려 진실한 크리스천들을 마귀라고 죽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혹시 이렇게 거꾸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지금 한국에는 없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한다. 이 사람들이 가장 엄한 죄인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은 다만 자기네 것과 색다른 종교를 믿었을 뿐이었다. 이것이 초창기의 장로교라는 교회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드디어 1711년에 매사추세츠에서는 신령에 의한 증거는 증거로 채택하지 못하는 법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미 위치라고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3분의 2가 판결이 번복되었으며, 지금부터 약 40여 년 전인 1957년에야 전원 판결이 뒤집혀 위치로 낙인이 찍혔던 사람들의 후예들이 명예회복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미치광이 같은 광신자들이 죄 없는 사람들을 모함하여 살인했다는 것이 번복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로 확정됨으로써 한 가지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는 이들의 극성스러운 난동에 끌려 다니던 정부와 사법부가 독립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며, 이로써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기 시작한 근원이 된 것이다. 필자가 34~35년 전 지금 살고 있는 이 곳에 정착했을 때만 해도 일요일에는 구멍가게 외에는 모두 문을 닫았으며, 술은 물론 살 수 없었고, 일요일은 ‘주님의 날(Lord's Day)’이라고 일요일 날짜로 쓴 수표는 받기를 꺼려했다. 왜냐하면 수표 발행한 사람이 ‘주님의 법령(Lord's Act)’에 근거하여 무효라고 하면 문제가 복잡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곳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로는 그 당시부터 30여 년 전에는 일요일에 땔감이 없어 집에서 장작을 팬 것도 경찰이 와서 잡아갔다고 할 정도였다.
똑같은 칼뱅주의자들인 청교도들은 홀란드에도 집단이민하여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의 지나치게 엄격한 신앙생활과 방식을 전 사회에 표준으로 삼으려는 과격한 노력이 패배할 때에는 반사작용으로 핍박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홀란드의 청교도들은 북미주 대신 대거 남아프리카로 이주하였다. 이들의 사고방식으로 이루어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고 불리는, 얼마 전까지도 악명 높았던 20세기의 인종차별정책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은 모두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뿐이 아니다. 칼뱅주의 기본정신은 미국 개신교 전반과 아일랜드계 천주교의 얀센주의자(Jansenists) 등을 통하여 실질적으로 전 미국인의 일상생활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그리하여 프리메이슨의 헤르메스 사상(hermetic philosophy), 자연신론(deitism), 영지주의(靈智主義-spiritualism) 같은 것들은 깊이 사색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이 있었으나, 이들은 내색을 않고 항상 지하조직으로 활약하면서, 대부분 표면적으로는 교회에 나가는 훌륭한 교인의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는 칼뱅주의가 자연적으로 만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미국에서의 칼뱅주의는 애당초 발상의 중심지였던 스위스, 스코틀랜드, 홀란드보다 더욱 엄격한 칼뱅주의 사회가 된 것이다. 지금 미국의 정치판도에 소위 극우분자로 불리는 종교계는 단연코 칼뱅주의자들이며, 이들은 애초부터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반대했던 사람들이었고, 다행히도 프리메이슨의 힘에 의하여 종교와 정치가 분리는 되었지만 이들은 기회 있는 대로 정치계를 장악하여 칼뱅주의 기독교 사상으로 미국사회를 만들려는 움직임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뷰캐넌(Pat Buchanan)을 지지했고, 조지 부시(George W. Bush)를 지지하여 그의 권력형태를 자기네들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고 있다. 지금도 그들의 투쟁은 많이 후퇴는 했지만 학교에서 성경에 의한 교육을 되살리려고 하고 있으며, 낙태반대를 통한 교회의 권력신장 등, 이러한 투쟁의 저변에서는 프리메이슨과 종교계의 투쟁이 지속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미국의 건국정신에는 항상 하나님이 소개되는 것이다.
한국은 이제 표면적으로는 개신교 국가처럼 보일 정도로 개신교가 거대해졌다. 다른 장에서도 언급했지만, 한국의 개신교는 미국의 영향이 절대적이라 했다. 물론 캐나다도 작용했다 하지만, 미국이나 캐나다나 종교적인 판도는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칼뱅주의의 기초로 성장한 미국 교회의 한국 교회에 대한 영향은 지대하다. 어떤 면에서는 한국 교회를 보는 것이 미국의 전(前) 세대를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예를 들면 한국의 목사들이나 진실한 신자들은 술·담배를 하지 않는다. 마치 술·담배를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러나 이렇듯 술·담배를 않는 것은 미국에서는 이미 왔다 간 옛날 이야기이다. 미국에서는 1920년부터 1933년까지 13년간 소위 프로히비션(Prohibition)이라고 하여 술 마시고 파는 것을 불법화했던 일이 있었다. 이는 너무 많은 미국의 남자들이 술주정뱅이가 되어 봉급을 받아 술 마시는 데 사용하느라 집에서는 식량을 살 돈이 없어 굶는 일이 허다했고, 많은 술 취한 남자들이 집에 와서 부인이나 자식들에게 폭행하는 예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매사추세츠 주의 목사들 40%가 알코올 중독자로 죽었을 정도라니 그 심각성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목사들이 심방을 다닌다며 이 집 저 집을 다니는 것이 술 얻어먹으러 다니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사회가 술독에 빠졌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다 못한 가정주부들이 궐기를 하여 성직자들을 제치고 교회의 신도들을 이용하여 정치력을 행사하였으며, 이러한 압력에 굴복한 정치가들이 결국 주류판매금지령을 만들어 헌법에 삽입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금주법은 완전 실패하여, 누구나 술 마시고 싶은 사람들은 언제고 술을 마실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여자 음주인구를 증가시켰으며, 술장사는 조직폭력단의 전매품이 되어 경찰의 부패와 함께 버젓이 술이 사회에 범람하게 되었다. 미국의 마피아니 알 카포네(Al Capone)니 하는 갱단이 모두 이때 생긴 것이다. 그리하여 13년 후 사회의 비판이 너무 심하여 결국 법이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 금주법으로 성공한 것이 있는데, 교회 목사들이 술을 끊게 된 점이다. 이것이 한국으로 전해져 아직도 한국의 목사들은 술을 금하고 있으나, 실상 미국에서는 이제는 다 잊어버린 까마득한 옛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니까 미국의 1920년대 교회상을 한국은 아직도 고수하고 있다는 결론이다. (91%)
그리스도교의 도덕관념
우리는 종교사를 정치적인 안목으로 쳐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그 집권세력에 반항하여 혁명을 일으켜 또 하나의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게 된 소위 종교개혁이란 것이 일어나게 된 것이 어제의 일이라 생각한다면, 십자군의 전쟁으로 세계를 휩쓸던 사건은 그제의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을 논하자면 십자군 폭풍의 끄트머리인 1300년대 초로 올라가서 역사를 다듬어 관찰해 보고 싶다.
약 2백 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으로 프리메이슨 조직의 가장 중요한 종단이었던 ‘템플라 기사단(Knights Templar)’은 회교도 세계의 마찬가지 조직이었던 ‘아사신(Assassin)’이란 종단과 손잡고 크리스천들의 안전한 성지순례를 보장하는 일종의 관광사업을 하면서 역사상 처음 생긴 다국적기업인 국제은행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특히 옛 솔로몬 왕의 사원과 헤롯 왕의 사원에서 엄청난 보물을 찾아내어 당시의 세계 금융을 독차지하다시피 하였고, 각 나라 정부에게도 많은 돈을 꾸어 주어 명실공히 당시의 서구 세계를 조정할 수 있는 세력조직이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의 세계은행과 IMF, 그리고 전 유럽에 걸친 시중 은행역할까지 도맡아 했던 것이다. 이때 프랑스는 십자군 전쟁에 가장 큰 군대를 동원했을 뿐 아니라 다른 사소한 전쟁으로 인하여 ‘템플라 기사단’에 막대한 빚을 지기도 했지만, 또한 프랑스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이기도 하였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1285년에 왕이 된 프랑스의 필립 4세는 대단한 권모술수가였다. 막대한 빚 때문에 국고수입을 늘리기 위해 교회에도 세금을 부과하려 하였고, 이에 신경이 자극된 교황은 교황대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면서 교회가 피해를 보는 것을 방지하려 하였다. 당시의 교황이었던 보니파세 8세(Pope Boniface VIII.)가 막 파문선고를 내리려 하는 순간 필립 왕은 작은 군대를 보내 교황을 납치하였었고, 드디어 그를 독살하여 죽였으며, 그 뒤를 이은 베네딕트 11세(Benedict XI.)도 동조하지 않자 1년도 못 되어 없애 버렸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드는 보르도의 대주교(Archibishop of Bordeaux)를 교황에 앉혀 클레멘트 5세(Clement V.)라 부르고 세계를 주무르려 하였다. 처음 사업으로 고안해 낸 것이 템플라 기사단을 없애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협의할 일이 있다고 속임수를 써서 템플라 기사단의 총수 다 몰레이(Jacque de Moley)를 파리로 불러, 그의 일당을 프랑스 전체에서 일시에 체포했다는 이야기를 ‘레네-르-샤토’의 장에서 설명하였다. 이때 프랑스에서 아직 잡히지 않은 템플라 기사단원들이 대거 피난을 가 가장 크게 정착한 곳이 스코틀랜드였다. 이것이 프리메이슨의 스코티시 라이트(Scottish Rite)가 생기게 된 연유이다. 프리메이슨에 대한 이야기는 “그림자 정부” 정치편이란 책에서 자세히 설명되었음을 알린다. 여하튼 이 사건은 역사상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물론 이 때까지도 프리메이슨과 바티칸과의 사이는 애증관계를 번갈아 가면서 교묘하게 진행되었으나 일반적으로 교황 직속의 종교군단 격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대체적으로 좋은 유대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부터는 완전한 적대관계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프리메이슨의 보복은 물론 클레멘트 교황과 필립 왕의 요절뿐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형편이다. 프랑스는 그 값을 프랑스 혁명으로 치렀고, 바티칸은 종교혁명으로 일단 날개가 잘리듯 쪼개졌으며, 20세기에 와서 바티칸 내부가 차차 썩기 시작하였고, 21세기에 들어선 오늘에 와서는 가톨릭의 외형마저 침공을 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려면 많은 기본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설명을 피하기로 하고, 미래에 기회가 닿으면 그 때나 책으로 소개해 볼까 한다.
이것이 하나의 관점이고, 또 다른 계통의 관심사는 인도, 페르시아를 통해 들어온 수학(數學)에서의 ‘제로(zero)’, 즉 ‘영(零)에 대한 관념’이 그리스도교 치하에서 불법으로 취급되어 입 밖에 내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의 토대이며 누구나 학교에 가면 배우고 있는 수학이라는 것은 슈메르에서 개발되어 인도와 페르시아에서는 이를 심오한 철학으로 취급하였으나, 희랍에서부터 금지된 것이 그리스도교 치하에 들어가면서 영(零)을 말하는 사람은 이단으로 취급당하게 되었고, 그 결과는 물론 장대에 묶여 불에 타 죽게 되는 것이었다. 영이란 관념이 없으면 수학을 어느 차원 이상으로 발전시킬 수 없는 일이며, 현재 천체물리학(astrophysics)에서 가장 중요한 관념이고, 이 관념 없이는 블랙홀(Black Hole)의 신비도 다룰 수 없다. 영(零)의 관념은 수학의 기본뿐 아니라 철학, 과학, 종교의 근본이 되는 사상이며, 영을 이해한다면 신(神)의 존재관념 자체가 문제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이를 금지해 왔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뉴턴(Isaac Newton)이 지구의 중력(重力)에 대한 이론을 펼치면서 교회는 더 이상 이를 금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함구하기 시작했다. 영의 의미와 역사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고자 하는 독자에게는 사이프(Charles Seife)의 ‘ZERO, The Biography of a Dangerous Idea’라는 책을 권고한다. 그러나 지하에서 이 관념을 꾸준히 계승해 온 무리들이 프리메이슨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분열난맥(分裂亂脈)의 학설, 즉 ‘카오스 학설(Theory of Chaos)’ 역시 프리메이슨들이 세상사를 취급하는 데 있어서 사용하는 절대적인 철학이다. 근대 프리메이슨의 창시자라고까지 숭앙을 받는 앨버트 파이크(Albert Pike) 장군은 마치 프리메이슨의 성경과 같은 그의 저서 ‘The Morals and Dogma’ 표지에 “Ordo Ab Chao”라고 표어판을 장식하였다. 이 말은 영어로 풀이하면 “Order of Chaos”, 다시 말해서 프리메이슨은 분열, 난맥, 혼잡을 초래하는 종단(宗團)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뜻을 하나의 표어로 사용한 것이다. 수학(數學)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카오스 학설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애초에 하나로 형성되어 있던 덩어리가 두서없이 분열되어 가다 어느 시점에 가서는 다시 하나로 통합된다는 아직 이해가 쉽지 않은 수학적인 학설이다. 이 학설의 실제 응용장소가 지구상의 인간사회이다. 다시 말해서 관현악단의 지휘자가 각양각색의 음질과 고저를 갖는 각각 다른 악기를 가진 악단을 지휘하듯, 지구상의 인간세계를 각양각색의 악기처럼 분리해 놓고 이를 관현악단처럼 만들어 오케스트레이트(orchestrate)하는 것이며, 이들이 어지럽게 혼란을 일으키다가 프리메이슨이 지휘봉을 들었을 때 통일되어 훌륭한 화음을 가진 하나의 음악으로 통일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제작품인 개신교 신종파는 끊임없이 분열되어 가고 있으면서도 당장 눈앞의 적인 가톨릭에 대항해서는 연합전선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15·16세기에는 침체되었던 프리메이슨의 세력이 지하에서 재정리되고 유럽 각지에 프리메이슨이 번창하였고,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자유로운 사상, 개혁적인 사상이 프리메이슨 로지(lodge)에서 토론되고 있었으며, 회원들은 그들이 목적한 대로 귀족이나 사회 저명인사들로 구성되어 갔다. 당연히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마음은 가톨릭 교황의 막강한 세력에 의한 사회적인 또는 국가적인 모순과 부작용에 의구심과 반항심이 불어나고 있을 때가 되었다. 그리고 때마침 구텐베르크(Johann Gutenberg)의 인쇄기술이 보급됨에 따라 당시의 형편으로서는 거대한 매스컴의 도구를 얻게 된 셈이었다. 인쇄기술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이유는 성경을 쉽게 많이 보급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바티칸에 대한 거대한 봉기를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무르익었고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것이었다.
필자의 한 지인 중에 가톨릭 신자로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필자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박식했다고 할 만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필자를 거듭난 가톨릭 신자로 만들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한 사람 중의 하나이기도 하였는데, 그가 필자를 설복(說伏)시키기 위해 마르틴 루터에 대하여 설명한 이야기는 이렇다. 프리메이슨의 중추를 이루고 있던 유대인들은 바티칸을 파괴시키기 위한 과정의 첫 과업으로 종교개혁을 꾸미는 데 앞에 내세울 이상적인 인물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발굴한 사람이 마르틴 루터였다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적격인물로 결정된 이유는 명석한 두뇌를 갖고 있는 승려로서 천주교의 교리에 모순이 많음을 터득하고는 괴로움에 젖어 동네에 나와 술을 많이 마셨고, 울분이 속으로 사무쳤는지 입이 걸어 욕지거리를 마구 해대는 천(賤)한 끼가 있었으며, 여자를 좋아하는 타락한 승려였기 때문에 그 약점을 이용하여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입이 얼마나 거칠었는가는 그의 저서에서도 유감없이 나타난다.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이란 책에서도 거침없이 유대인들을 지탄했는가 하면, 죽기 1년 전에 쓴 ‘마귀에 의하여 만들어진 로마 교황에 대항하여’라는 저서에서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욕들이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결국 수녀원에서 도망 나온 수녀와 결혼도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에 대항하여 반기를 든 초창기에는 유대인들을 몹시도 옹호하고 나왔다. 그는 “유대인들은 우리의 주님인 예수와 혈연관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만약 피와 살이 섞였다는 사실이 중요한 인자라면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친애하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고하니, 만일 당신네들이 나를 이단이라고 손가락질하는 데 싫증이 났다면, 이제부터 나를 유대인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 저주하십시오”라고 자신이 유대인이 된 듯 격렬하게 유대인들을 옹호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가 유대인들에게 완전히 속아 이용당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유대인들을 저주하는 글을 쓰게 된다.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The Jews and Their Lies)’이란 이 책은 불행히도 새 책방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고, 다만 지하서점에서만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혹시 누가 소장하고 있던 책이 헌 책방에 나오면 가능할지 모르겠다.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의회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확인하기 위해 뒤져보았더니 그 책은 없고 이 책에 대하여 반격하는 글은 두어 개 있었다. 그리고 미국 이슬람 교회에서 주관하는 웹 사이트 www.abbc.com/luther/index.htm 또는 www.fordham.edu/halsall/source/luther-jews.html에 들어가면 책 전체는 아니지만 발췌한 내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티칸이 관대해서 종교개혁을 허용한 것은 아닌 듯싶다. 그리고 여느 때 같으면 마르틴 루터 같은 사람은 불태워 죽였을 터인데도 그가 죽지 않고 살아 개혁에 성공했다는 것은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 죽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 정황을 좀 살펴보자. 루터가 개혁운동을 한창 할 때는 1517년, 그가 33살 때부터 41세가 될 때까지 약 8년 정도를 전성시기로 잡을 수 있고, 그는 1546년 62세로 생을 마쳤다. 가톨릭으로서 볼 때에는 마르틴 루터처럼 교회에 손해를 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 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1642년 갈릴레오 갈릴레이(Gallileo Gallilei)가 다만 지구가 둥글다고 진실을 말한 이유로 그를 불태워 죽일 정도로 가톨릭은 엄했었고 용서나 관용이라는 것을 찾아보기 어려운 처지였다. 그렇다면 루터와 갈릴레이를 비교해 볼 때 과연 누구의 죄가 더 심한 죄이고, 누구의 영향에 더 신경을 써야 했을까? 나의 생각으로는 마르틴 루터는 여러 번 불태웠어도 교황은 시원치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마르틴 루터가 심지어 교황이라는 것은 마귀의 산물이라고 규정짓고 오만가지 욕설을 퍼부은 책을 써 퍼뜨릴 정도였는데도 그를 용서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믿어진다. 그리고 1600년에도 지오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라는 명석한 승려가 여러 그리스도교적 문헌을 읽고 결국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사람이 죽으면 다른 육체에 영(靈)이 들어가 다시 태어난다는 환생사상(還生思想-reincarnation)을 포함하고 있다는 주장을 했다고 그도 불태워 죽였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실력자가 루터를 감싸고 바티칸이 루터를 죽이지 못하게 할 수 있었으며, 또 루터의 주장을 성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 한 국가의 왕이나 영주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가톨릭의 힘이 미치는 판도 전체에 걸쳐 가톨릭이 어쩔 수 없는, 가톨릭과 대적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어떤 조직적인 막강한 힘이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면 이런 막강한 힘을 가진 조직이 무엇인가? 프리메이슨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프리메이슨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현재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완전히 프리메이슨에 사로잡혀 그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결론을 짓는 이유는 다른 기회에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프리메이슨과 바티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이해한다는 것에 무리가 있을 줄 믿는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많은 기본적인 예비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믿어지며, 그 설명을 하자면 책 하나 갖고도 설명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이런 말이 믿어지지 않는 독자가 있다면 관대한 마음으로 하나의 가설로 우선 받아 주기 바란다.
교 황
교황이라고 하면 당연히 바티칸 시에 있는 로마 천주교의 교황을 말한다. 콥트교에도 교황이 있지만 너무 미약하고 역사적으로 영향을 미친 일이 별로 없을 뿐 아니라 대부분 그런 교황이 있는 것 자체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앞의 장에서 이미 여러 번 설명한 바와 같이 애당초 세계(당시는 현 유럽과 소아시아를 말했음)를 다섯 개의 교역(敎域)으로 나누고 각 교역마다 총책임자가 있어 이들이 교직(敎職-patriarch)이라고 한국 사전에는 표현되었지만, 필자는 이 책에서 교왕(敎王)이라고 표현하였다. 왜냐하면 한국 사전대로 따른다면 바티칸의 교황도 교직이라 불러야 할 것인데, 실제로 교직이라 하면 전혀 다른 인상을 주기 때문에 교왕이라 하였고, 그 중 바티칸의 교왕만 교황이라고 특별히 부르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바티칸의 교왕이 나중에 로마제국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 세상에서 가장 큰 세력을 차지하게 된 반면에 다른 교역들은 모슬렘에게 점령되어 별로 세력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장에서 소개하고 싶은 사연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지상의 최고 책임자로 있는 교황은 하나님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실수를 할 수 없는 완벽한 인간이라는 것을 니케아 종교회의 때 시성(諡聖)하였다는 것이다. 시성(諡聖)이란 말은 ‘캐논(canon)’을 우리말로 표현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캐논화한다고 하면 교황청에서 심사숙고를 거쳐 성장의 명부에 올린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성인(聖人-Saint)이라는 칭호를 붙이려면 보통 100년 정도 관찰을 하여 틀림없다고 인정될 때 시성(canonize)하는 것이 통례라 한다. 이렇게 조심을 거듭한 심사숙고 끝에 결정했기 때문에 일단 한 번 시성하면 절대로 잘못될 수도 없으며 변경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애당초 만든 성경도 ‘프로토캐논(Protocanon)’, ‘듀트로캐논(Deutrocanon)’이라 하여 원본을 시성하여 성스러울 뿐 아니라 틀림없는 것이니 고치거나 변조시킬 수 없다는 뜻도 된다. 이와 비슷하게 교황의 권위도 마찬가지로 실수할 수도 없고 틀릴 수도 없는 신성한 사람이라고 시성하였다. 따라서 그는 완벽한 인간이고 준(準)신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 4세기에 이미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8세기에 와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Donation of Constantine)’이란 책을 내놓고 교황의 신성을 강조했는가 하면, 11세기에 와서도 교황 그레고리 7세(Pope Gregory VII., 재위 1073~1085)는 교황만이 황제나 왕들에게 관(冠)을 씌워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다 했고, 세상의 모든 통치자들은 자기의 영적 통치 밑에 속해야 한다면서 27개 조항의 문서를 만들어 공포하였다. 그 중의 몇 개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 로마 교회(천주교)는 세상의 끝날까지 잘못이나 실수를 절대로 하지도 않을 것이며 할 수도 없다.
* 교황은 아무도 심판할 수 없다.
* 교황만이 왕자들로 하여금 발에 키스하도록 할 수 있다.
* 정당하게 선출된 교황은 베드로의 공적(功績)으로 당연히 성인(聖人)의 칭호를 가져야 한다.
여기서 자동으로 성인이 되는 것은 수용되지 않았으나 발에 키스하는 것은 제도화되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야말로 표본이 되고 성스럽다고 생각되는 교황도 많았지만 실망스러운 교황도 많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어째서 모든 면에서 섬겨야 할 표본이 되는 교황 이야기는 여기서 하지 않는가라고 질문할 독자들이 많이 있을 줄 안다. 그 이유는 사람이란 자랑스럽고 좋은 것은 앞세워서 이야기하는 것을 즐겨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과장하고 거짓말까지 덧붙여서 말하기까지도 한다. 그래서 좋은 이야기는 이미 많이 사회에 소개되어 있기에 여기서는 자랑스럽지 않은 이야기를 몇 가지 소개해 보는 것이다. 필경 지금까지 교황에 대하여 가장 비판적인 사람은 마르틴 루터였을 것이다. 그의 험악스러운 독설은 너무나 유명하다. 예를 들어 루터는 줄리우스 2세(Julius II.)를 흡혈귀(blood drinker)라 하고 적(敵)그리스도라고 부를 정도였고, 얼마 전에 죽은 뉴욕의 마틴(Fr. Malachi Martin) 신부도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적그리스도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성 베드로의 왕국(St. Peter's Kingdom)’이란 책을 쓴 가톨릭 신자인 팩커(Jerrold Packer) 씨는 현재 교황 주변에 있는 추기경들은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존경되는 사람들이라 격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 나타나는 평가를 참고해야 옳지 않을까 한다. 교황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서기 32년의 성 베드로부터 따지면, 현 요한 바오로 2세는 265대 교황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교황들의 배경을 보면 그야말로 다양하다. 아주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아주 부자도 있었고, 어마어마하게 유식한 학자가 있었는가 하면 일자무식의 교황도 있었으며, 그레고리 9세처럼 여든 여섯의 노령 교황이 있었는가 하면 베네딕트 9세처럼 열 여덟의 청소년이 있기도 할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사생활도 엄청난 폭이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는 것을 고려하면서 읽어 주기 바란다.
교황선출을 둘러싼 선거전
현재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출되기 전에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고, 심지어는 전임자인 요한 바오로 1세가 취임한 지 한 달 만에 살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졌었다(살해당했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증명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상황적인 판단에 의해 추측할 뿐이다). 현대의 교황을 사실상의 세계통치자로 여기지 않는 상태에서 그러할진대, 각국의 왕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하는 중세기에 교황을 선출하는 장면은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기 바란다. 특히 교황이 죽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해야 했던 막간에는 당연히 절정을 이루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래서 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들이 모이는 곳을 ‘콩클레이브(conclave)’라고 부르는데, 이 콩클레이브란 어휘는 ‘열쇠와 함께’라는 뜻이라 한다. 1200년대에 처음으로 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들이 새 교황을 선출할 때까지 그들이 있는 거처를 자물쇠로 잠가 버렸다는 것이다. 트롤로프(T.A. Trollope)가 쓴 ‘교황의 콩클레이브(The Papal Conclave)’란 책에 의하면, 이탈리아와 유럽 각지에 있는 파벌들이 막대한 돈을 갖고 와서 표 사기 작전을 하였고, 흔히 그 뒤에서 은행가들이 막대한 돈을 갖고 지금으로 말하면 로비스트들을 바티칸에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추기경회의는 가장 부패하기 쉬운 곳이었다. 처음 교황이 선거제도로 선출된 것은 1241년의 일이라 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레데릭 2세(Frederick II.)와 교황 그레고리 9세가 한창 세력다툼이 심할 때 교황이 죽어 버렸다. 이때 로마제국의 상원의원인 오르시니(Matteo Orsini)는 로마의 추기경 10명이 재빨리 교황을 선출하기를 원하였다. 그는 아주 낡은 옛 사원 셉티조니움(Septizonium)이라는 곳에 늙은 추기경들을 모셔 놓고, 군인들은 추기경들의 손과 발을 함께 묶어 매질을 하고 욕을 보이고, 들창문을 모두 막아 버리고 부서진 가구로 장식된 케케묵은 감옥 같은 방에 가두고는 작은 창살 사이로 밥을 들여 주면서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교황으로 선출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이들이 굽히지 않고 말을 듣지 않자, 오르시니는 이들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명하며 천장의 구멍을 통하여 오줌과 똥을 싸도록 하였다. 이런 극심한 악취 속에서 영국의 추기경이 죽게 되었다. 군인들은 재빨리 그를 나무관에 넣어 그 방에 방치해 두고 다른 추기경들이 어서 결정하도록 촉구하였다. 결국 두 달이 지난 다음에 그들은 사비나의 고드프리(Godfrey)를 선출하여 셀레스틴 4세(Celestine IV.)라고 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르시니는 만족하였고, 추기경들은 각각 자기 본고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셀레스틴은 그 동안 받은 고통 때문에 불과 16일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1241년 11월 10일부터 1243년 6월 25일까지 교황이 없는 공백기간이 생기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절의 교황과 창녀들
르네상스 시절의 교황들은 지금의 정치가들보다 이해심 많고 관대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의 창녀업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세금을 부과하고 관리·통제까지 했었다. 한 통계에 의하면 1490년 로마 시의 인구가 10만 정도였는데 창녀의 인구는 6천8백 명이었으며, 이들은 주로 순례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인텔리 여자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로마의 창녀들은 일본이나 한국의 기생처럼 하나의 사회계급으로 학식과 예능에 능숙하여 긍지를 갖고 명예로 여길 정도였으며, 이들은 정해진 특정 지역에 살고 있었다고 한 역사가는 설명하였다. 당시의 교황은 로마의 민간정부를 완전히 관장하였으며, 지방의 법률까지 제정할 정도였다. 역사가 카바네(Augustin Cabanes)와 로도카나치(Emmanuel Rodocanachi)의 설명에 의하면,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 재위 1471~1484)는 창녀들에게 정식으로 세금을 부과하였고, 교황 알렉산더 6세(Alexander VI., 재위 1492~1503)는 1496년 6월 23일 법령을 발표하고 그 법령에 따라 건물 여러 채를 창녀들에게 세를 주고 창녀업을 하도록 장려했다 하며, 이렇게 교회의 방침으로 번영하는 유흥업은 약 백 년 정도 계속되었다 한다.
교황 줄리우스 2세(Julius II., 재위 1503~1513)는 1510년 7월 2일 칙령을 내려 바티칸 성 근처의 창녀집 운영을 금하는 대신 로마 시의 특정 지역을 설정하여 창녀촌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교황 레오 10세(Leo X., 재위 1513~1521)와 교황 클레멘트 7세(Clement VII., 재위 1523~1534)는 창녀가 죽을 때 유산의 4분의 1을 산타 마리아 막달레나 수녀원에 기증한다는 조건으로 창녀집 운영을 허락했다고 한다.
교황에 따라서 창녀지역이 옮겨지기도 하고 늘었다 줄었다 변형되기도 하였다. 또 어떤 경우는 면허를 받는 데 연수입의 1할을 지불하는 경우도 있었는가 하면, 벌금을 부가하든가 역마차를 타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때도 있는 등 창녀에 대한 처우는 참으로 다양했었다. 교황 피우스 4세(Pius IV., 재위 1559~1565)의 경우는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는 교회 근처에 살지 못하며, 일곱 살 미만의 여자 아이가 거리에서 꽃 파는 것을 금하는 칙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여기서 꽃 판다는 것은 자기 몸을 판다는 비유로 표현한 것이다. 또 창녀들에게는 통금시간도 만들어 어느 시간이 지나면 길거리에 걸어 다니지 못하도록 하였고, 이를 어기는 여자는 매질하는 형벌을 주었다. 한 번은 니나라고 하는 창녀가 잡혀 끌려가는데, 이 여자는 하도 인기가 높은 여자라 구경 나온 사람들이 장사진을 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창녀집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이를 통제하는 조치도 취한 기록이 있다. 교황 피우스 5세(Pius V., 재위 1566~1572)는 창녀촌의 경계에 담을 쌓도록 명령하였다. 이는 10년 전에 교황 바오로 4세가 유대인 마을에 담을 쌓도록 하여 그들의 통행을 감시하고 통제한 것을 그대로 본뜬 것이었다. 그리하여 1569년 10월 19일에 첫 돌을 놓고, 한 달 후에 성이 완성되자 대문을 두 개만 만들어 놓고 창녀나 창녀들을 찾는 손님들의 통행을 관리했다고 한다. 교황 피우스 5세는 사순절 때에는 전 40일 동안 창녀동네 성문을 닫아 영업을 못하게 하였다. 그러고 나서 굶는 사람이 생기자 이를 측은하게 생각하여 문 닫는 날은 일당을 대신 지불해 주기도 했다. 르네상스 시대 전반에 걸쳐 창녀업은 허락된 직업이었으며, 그들은 크리스마스 때 길거리에 나와 대행진을 하는 풍습도 만들어 인기가 높았고 구경꾼들이 아주 많았다고 전해진다.
교황과 여자관계
교황 알렉산더 6세(Alexander VI., 재위 1492~1503)는 칙령으로 대서양을 절반으로 갈라 신대륙은 스페인에, 아프리카는 포르투갈에게 각각 주었다. 그가 교황이 되기 전에는 보르지아(Rodrigo Borgia) 추기경이라 불렸는데, 그가 아직 추기경으로 57세 때인 1489년에 열 다섯 살 난 지울리아 파르네세(Giulia Farnese, 1474~1524)라는 여자를 애첩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오르시노 오르시니라는 남자와 이미 결혼한 기혼녀였다. 챔벌린이라는 교황청 역사가에 의하면, 그녀의 머리는 매우 아름답고 길어 바티칸의 대리석 마루에 닿을 정도라고 표현하였고, 그녀의 남편은 참으로 좋은 사람으로 한 눈이 멀었지만 다른 한 눈으로 윙크를 잘하는 남자였다고 평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더 교황이 애인이 있었다는 것은 주변에서 잘 알려진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를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뜻으로 라 벨라(La Bella)라고 불렀다. 이 일은 누구나 아는 비밀이었기 때문에 한 교회의 최고 성직자는 애첩을 맞이하면서 마치 결혼식처럼 행사를 교회 안에서 가질 정도로 대담했다고 한다. 당시 교황의 의전(儀典) 책임자로 있던 독일 사람 부르카르트(Johann Burchard)가 쓴 일기장이 지금도 남아 있어 그 당시의 정황을 묘사해 주었다. 그 내용에 보면, 1941년 교회의 최고위 성직자가 애첩들과 마치 결혼식 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공개적으로 식을 거행했다고 하였으며, 이러한 타락이 만연되어 절제생활을 하고 있는 수도원에도 번질까 두려워한다고 하면서 이미 주변의 수녀원들은 창녀집으로 전락했다고 기술하였다.
지울리아 파르네세는 알렉산더 교황의 열 세 살 난 딸 루크레지아 보르지아(Lucrezia Borgia)의 결혼식에 다른 150명의 여자들과 함께 참석했다고 하며, 결혼식에서 지울리아 파르네세는 전혀 샘내거나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줄곧 명랑한 자세로 있었다 한다. 결혼식의 일환으로 신부(新婦)가 긴 웨딩가운을 입고 교황 본관에 안내되어 들어가면서 150명의 다른 여자들이 따라 들어갔다. 이 방에는 교황이 황좌(皇座)에 앉아 있고 그 옆에 11명의 추기경들이 있었으며, 결혼식에 온 남자 축하객들은 약 한 시간 동안 출입이 금지되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 안에 들어간 여자들은 교황의 딸과 가까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교황 앞에서 무릎을 꿇은 사람이 없었으며, 후에 교황의 아들이 무릎을 꿇고 교황의 발에 키스를 한 후에야 다른 여자들이 따라서 교황 신발에 달린 십자가에 키스를 하였고, 예식이 절반 진행된 다음에야 남자 하객들이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결혼식 잔치는 성대하였다. 교황은 50개의 단지에 약 100파운드 정도 되는 아주 고급 캔디를 마련하고 손님들에게 집어 주었다. 교황은 특히 예쁜 여자들 젖가슴 속에 주님의 은총을 받으라 하면서 캔디를 깊이 집어넣어 주는 것을 즐겨 하였고 여자들은 이를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지울리아 파르네세는 교황과의 사이에 아들 둘을 낳았다. 그녀는 이 사실을 숨기지 않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곤 하였으며, 그 중 하나는 후일에 이노센트 10세(Innocent X., 재위 1644~1655) 교황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오라버니 알레산드로 파르네세(Alessandro Farnese)는 추기경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치맛바람 추기경(Petticoat Cardinal)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사람도 후에 바오로 3세(Paul III., 재위 1534~1549) 교황이 된다. 지울리아 파르네세는 종교적인 그림으로 그녀의 초상화가 여러 개 그려졌으며, 그 중 유명한 것은 라파엘(Raphael)이 그린 ‘변용(變容-Transfiguration)’이라 하겠다. 그리고 지금도 성 베드로 광장에는 그녀의 대리석 조각상이 있다. 원래는 나체로 되어 있던 것을 3백 년이 지난 후 피우스 9세 교황(Pius IX., 재위 1846~1878) 때 하도 말이 많아 금속판으로 그럴듯하게 몸 가리개를 만들어 붙이고 대리석과 조화되도록 페인트칠을 하였다. 또 그녀는 핀투리키오(Pinturicchio)라는 화가가 성모 마리아 상을 그리는 데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한다.
교황청은 친족특혜의 본고장
교황의 권세가 한창일 때 교황들은 추기경 같은 높은 벼슬을 자기 친족에게 주는 일이 허다하였다. 이유는 권세도 권세지만 돈이 많이 생기는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교황 알렉산더 6세에게 불평한 한 서신에 “…교황의 조카들을 모두 만족시키려면 교황청 10개는 있어야 하겠습니다…”라 씌어져 있다. 물론 공식적으로 교황은 결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식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교황 형제의 자식에게 좋은 자리를 주곤 하였지만, 많은 경우 조카라는 사람들이 사실은 교황의 친자식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교황청 부근에서는 조카라는 말이 은근히 유행하였다. ‘조카’라는 어휘는 이탈리어로 ‘니포테(nipote)’라 하는데, 이 말이 영어로 와서 ‘네포티즘(nepotism)’, 즉 친족특혜라는 단어가 된 것이다.
교황 스티븐 7세
교황 스티븐 7세(Stephen VII., 재위 896~897)는 죽은 교황을 심판하여 사형선고를 내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전 교황인 포르모수스(Formosus, 891~896) 교황이 신성로마 황제를 선택하여 봉임한 일에 옳지 못한 일이 있었다고 생각해, 묻힌 지 이미 11개월이 된 그의 시체를 파서 썩은 시체에 교황의 법의를 입혀 황좌(皇座)에 앉혀 놓고 자기가 직접 재판을 시작하였다. 이때 학자들은 이 일을 ‘사체의 종교재판(The Cadaveric Synod)’이라 하여 훌륭한 일로 여길 정도였다. 스티븐 교황은 다 썩어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시체를 화난 얼굴로 째려 보며, “당신은 어째서 신성한 교황청을 모욕하였는가?”라고 질문하였다. 그러자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십대 청년인 디콘이, “그것은 제가 악마였기 때문이지요”라고 대답했다. 아마도 전 교황의 혼이 젊은 디콘의 육체 속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판결은 그의 교황임명 자체를 무효로 만들고, 곧 군인이 시체에 다가서서 은혜를 줄 때 사용하던 세 손가락을 잘라 버리고 교황 법복을 벗겼으며, 나머지 시신은 바티칸 시에 흐르는 티베라 강에 던져 버렸다. 그러고 나서 교황 스티븐 7세 자신은 얼마 안 되어 목매어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교황 ‘요한 12세’
교황 요한 12세(John XII., 재위 955~963)은 로마의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20대에 교황이 된 사람이다. 그는 난봉꾼으로 그의 엽색 행각은 문란하다는 정평이 있던 당시의 로마 사회에도 사람들이 놀랄 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항상 가까워야 했을 신성로마제국의 오토(Otto) 황제와 사이가 좋지 않아 그를 타도하기 위해 악명 높은 몽고와 사라센에 연합군을 형성하자는 제의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이런 일이 있자 그와 적대관계를 가진 오토 신성로마 황제와 주교, 추기경들이 그를 입건하여 재판하게 되었다. 죄목은 마구간에서 디콘(deacon)을 서품해 주기도 했고, 뇌물을 받고 추기경, 디콘, 신부 등을 서품해 주어 신성을 모독했으며, 사냥에 나가서 자기의 대부와 같은 베네딕트라는 사람을 눈멀게 하였고, 요한이라는 추기경을 거세시켜 준다고 엉터리 수술을 하여 얼마 후 그가 죽게 된 원인을 만들었으며, 레이니어라는 사람의 미망인과 그의 첩 스테파나라는 여자, 아나라는 이름의 과부, 본인의 질녀와 간음을 했다는 것 등등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죄목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하여 로마의 재판소에 출두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 결과 오토 황제는 레오 8세를 교황으로 대신 앉히고 전쟁 때문에 북쪽으로 출정나갔다. 오토가 떠나자 요한은 로마로 돌아와 바티칸을 점령하고, 다시 황위에 앉아 자기를 재판했던 사람들을 잡아 종교재판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한 명은 혀를 뽑아 버렸고, 한 명은 손을 잘라 버렸으며, 또 한 명은 코와 손가락을 잘라 버려 복수를 했다.
그가 황위에 앉은 지 8년째 되는 해였다. 어느 날 그가 어느 유부녀 집에 찾아가 간음을 하고 있는 도중에 남편이 돌아왔다. 남편은 화가 나서 망치로 교황의 머리를 내리쳐 며칠 후 드디어 교황은 죽게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그가 간음을 하고 있는 도중에 심장마비가 와 8일 후에 죽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여하튼 그가 간음하다 죽은 것임에는 틀림없다. 때마침 전쟁에서 틈을 내어 돌아온 오토는 스티븐 교황처럼 시체를 파내지는 않았다고 한다.
칼뱅주의
한국의 개신교는 미국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많이 받았다. 마치 미국 개신교와 한뿌리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할 정도이다. 그래서 한국의 개신교를 쳐다보기 전에 미국의 개신교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프리메이슨(Freemasonry)과 청교도(Puritans)라는 두 개의 줄기를 갖고 있는 나라이다. 프리메이슨의 정신적인 지주는 간단하게 헤르메스(Hermeticists), 골든 도온(Golden Dawn), 로시크루시안(Rosicrucians), 알케미(Alchemists), 카발라(Kabalists) 등의 신앙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유신론자(有神論者)들이기는 하지만, 믿음의 본질에서 크리스천과는 정면으로 대치되며 지하에 숨어 있어 보이지도 않는 세계적 조직체이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사(活動史)는 정치적인 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일반 사람들은 이러한 내용을 이해는 고사하고 그런 것이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미국 대통령은 프리메이슨이었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들도 거의 프리메이슨들이며, 이러한 현실은 그들의 큰 조직과 활동의 결정판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프리메이슨에 관한 내용은 ‘그림자 정부’라는 책을 통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한편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건국사(建國史)를 말할 때 청교도(淸敎徒-Puritan)가 개척한 나라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것도 옳은 이야기이다. 미국이라는 땅을 발견하고 터전을 마련한 것은 프리메이슨이지만, 이 땅에 처음 집단으로 와서 개척하고 백인 종자를 퍼뜨리기 시작한 사람들은 칼뱅주의계 개신교인 청교도 신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프리메이슨들은 지하에서 회원 이외에는 비밀로 되어 있어 외부 사람들이 모르게 미국사회를 지도해 온 상황에 반하여, 청교도들은 외적으로 눈에 보이게 미국 사람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칼뱅(John Calvin, 본명: Jean Chauvin)은 16세기 프랑스 사람으로서 장성하여 활동할 때에는 프랑스의 탄압에서 도피하여 스위스 제네바에 자리를 잡았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장로교(長老敎)의 기초를 만든 사람이다. 그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반대하였으며, 제네바의 성서적 폭군이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엄격한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즐거워서 춤을 추는 것도 범죄로 취급하여 벌을 준 사람이었다. 그의 추종자 중에는 녹스(John Knox)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주 광폭하다 할 정도로 격렬한 선교자로 자기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크리스천들이 크리스천답지 못하다 믿어, 크리스천들은 모두 칼뱅주의를 따라야 한다고 성공회로부터 일종의 종교개혁을 하려고 했고, 실제로 스코틀랜드에 장로교를 세운 사람이다. 거의 고행(苦行)생활을 해야 할 정도로 엄격했던 장로교는 철저한 가톨릭 신자였던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Mary, Queen of Scotland)이 영국 왕이 되자 녹스의 장로교와 정면으로 충돌하여 투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메리 여왕은 얼마 안 되어 처형당했기 때문에 장로교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장로교는 영국 시민전쟁 때 크롬웰(Oliver Cromwell)을 지지하고 그를 교인으로 만들었다. 전쟁에 승리한 크롬웰은 찰스 1세 왕을 교수형에 처하고, 크리스천들이 호화스럽게 즐기는 크리스마스를 불법화시켰으며, 영국 전체에 화려한 색깔과 아름다운 것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 금지하도록 하였다. 다시 말해서 칼뱅주의 장로교가 통치하는 영국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잔인하고 견디기 어려운 암흑세월이 다행히도 얼마 안 가 스튜어트 왕가에 의하여 다시 왕정이 되면서 세상이 바뀌게 되었다. 그 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던 대부분의 영국 사람들은 장로교 사람들을 몹시 증오하게 되어 일종의 보복이 시작되었고 많은 장로교인들이 처형되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장로교인들, 즉 청교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대서양 건너 새 천지로 가게 되었고, 그들은 매사추세츠에 정착하여 자기네들의 자치국가를 건설했던 것이다. 당시는 영국 치하의 식민지(colony)라고 불렀지만, 실제로는 자기네들이 삼권을 갖고 매사추세츠를 정치했다. 현재 우리가 아는 미국 독립 이전에 존재하던 주들은 모두 이런 형식으로 조직되었던 것이 독립전쟁을 통해 각각의 주로 변모하게 되었으며, 그런 이유로 미국을 합중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청교도가 이주해 온 것이 1630년의 일이었고, 1620년에 바다를 건너와 플리무스(Plymouth)에 자리잡은 필그림(Pilgrim)의 뒤를 따라온 두 번째의 집단이민부류가 된 것이다. 필그림도 종교의 자유를 위해 신세계에 왔지만, 필그림은 성공회의 일원으로 플리무스에 정착하여 자신들의 신앙에 충실하며 조용히 산 사람들이었다. 결국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자신들만의 교회를 갖고 자기네들의 교리를 따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던 처지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왔으나, 이들은 자기네들이 받았던 서러움을 망각하고 신대륙에서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유럽에서 이미 끝난 마녀사냥을 시작하여, 이단이기 때문에 마녀이고 마녀이기 때문에 이단이란 식으로 사람들을 잡아 처벌을 했다.
예를 들어 1657년 10월 14일자로 보스턴 법정에서 공표된 한 법조문을 보면 아래와 같다.
“첫번째로 잡힌 남자 퀘이커는 귀를 하나 자르고 자비로 형무소에 보낼 것이며, 두 번째로 잡히면 나머지 귀를 마저 자른다. 그리고 첫번째로 잡힌 퀘이커 여자는 심한 채찍형을 가할 것이며, 두 번째에도 같은 벌을 준다. 그리고 세 번째 잡히는 경우에는 남녀 구별 없이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혀에 구멍을 뚫고 형무소에서 노동을 하게 되며, 모든 수감비용을 지불할 때까지 형무소 노동을 하도록 한다.”
퀘이커 교도들은 다른 종파와 달리 특이한 옷을 입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귀가 잘린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머리를 길게 길렀고, 귀가 있던 자리에 난 구멍을 막기 위해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다녔다. 또 퀘이커들은 행동에서도 차이가 났다. 그들은 십일조를 유대인들의 제도라고 지키지 않았으며, 성경의 가르침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다고 절대 싸우지 않았다. 물론 인사할 때 모자를 벗지 않았다. 청교도들이 퀘이커라는 말을 인용한 법을 제정한 이유는 필경 이때 영국에서 많은 퀘이커들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1656년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때부터 불과 4년 동안에 수많은 퀘이커들이 완전 나체로 공중 앞에서 채찍 매를 맞았으며, 번화한 길거리에 설치한 목판에 손목과 머리가 채워지는 형벌, 발을 쇠고랑에 채워 길가에 놓아두는 형벌 또는 목과 발뒤꿈치를 불인두로 지져 병신을 만드는 형벌 등을 받았다. 그리고 역사가 매콜리(Thomas Macaulay)에 의하면, 초기에는 사형시키는 방법으로 곰에게 잡혀 먹히게 하는 수법을 썼다 한다. 즉, 소위 죄인이라는 사람을 묶어 놓고, 잡아서 얼마 동안 굶긴 곰에게 잡아먹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얼마 안 가 취소되었다. 그 방법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즐긴다는 점이 그들의 마음을 바꾸게 했다고 설명했다. 또 뉴헤이븐(New Haven)에서 있었던 벌주는 현장의 한 목격자가 기술한 기록에 의하면, 요란하게 북을 쳐 많은 사람들이 모이도록 하고 목판에 채워진 죄수의 웃통을 벗기고는 벌겋게 달군 인두로 이단(Heresie)라는 뜻으로 ‘H’자를 살 깊숙이 지져 글을 새겼다고 했다. 그리고 일요일에 술 마신 사람은 가축 가운데 하루 종일 앉아 있게 하였고, 간통하다 들킨 여자들은 등에 커다랗게 간통(Adultery)이란 뜻의 첫 글자 ‘A’자를 약 70cm 정도의 크기로 써 붙이고 정한 기간 동안 다녀야 했으며, 처음에는 복잡한 길거리에 만들어 놓은 단 위에 올라서서 여러 시간 동안 오가는 사람들이 쳐다보고 욕할 수 있도록 서 있어야 했다. 1692년은 개까지 위치라고 사형시킨 해로 유명하다. 가장 유명했던 곳은 매사추세츠 주 살렘(Salem)이란 곳으로 지금은 위치박해 박물관을 만들어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을 정도이며, 안도버(Andover)라는 곳은 두 마리의 개와 남자 위치 한 명과 여자 위치(魔女) 세 명을 사형시켰던 곳이다. 안도버의 한 진실한 청교도는 자기 부인이 이상한 병에 걸려 의사가 아무리 노력해도 병이 낫는 기세가 없자, 어떤 위치가 해코지를 하고 있다고 믿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지랄병 있는 열 두 살 먹은 여자 아이 두 명을 지명하였다. 그리고는 지랄할 때 사람이 건드려서 조용해진다면 위치라는 것이 증명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얼마 안되어 40명이나 위치라고 잡아들였다. 한 번 누가 위치라고 지목을 하면 위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어떻든 거의 백발백중 마녀잡이는 진범을 잡게 되었다. 이때 당시 안도버의 재판관으로 있던 전 주지사의 아들 브래드스트리트(Justice Dudley Bradstreet)라는 판사는 이러한 엉터리 유죄판결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급기야는 이 판사도 위치로 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동생 존이란 사람은 그의 개가 동네 사람을 물은 일이 있어 그 사람도 개를 정신 나가게 만들어 사람들을 해치게 하는 위치라 하였고, 또 다른 사람의 개도 마귀에 걸렸다고 잡아들였다. 판사와 그의 동생은 변명할 길이 없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이런 말을 듣자마자 일찌감치 다른 주로 도망가 버려 생명을 구할 수 있었으나 두 마리의 개들은 마귀에 홀린 개로 잡혀 목매다는 교수형을 받게 되었다 한다. 그 중에는 위치로 입건되었으나 혹독한 고문에도 자백을 않고 죽은 사람들도 몇 있었다. 이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자백을 하지 않는 한 위치로 판정을 내릴 수 없었고, 만일 위치로 판결이 나면 재산은 모두 차압당하기 때문에 남은 재산이라도 후대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자백을 끝까지 않고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1692년에서 1693년까지 1년 사이에 150명이 위치로 입건되었으며, 그 중 20명이 사형당하고 4명은 고문으로 옥중 사망하였다 한다. 그로부터 4년 후에 자기들의 무고죄를 뉘우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 중 배심원으로 있던 앤(Anne Putman)이란 여자는 “불행한 때에 우리는 사탄이 덮쳐 완전히 헛것을 보게 된 것이다”라고 간증했다 한다. 그러니까 아마도 가장 진실한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적그리스도였고, 이들이 오히려 진실한 크리스천들을 마귀라고 죽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혹시 이렇게 거꾸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지금 한국에는 없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한다. 이 사람들이 가장 엄한 죄인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은 다만 자기네 것과 색다른 종교를 믿었을 뿐이었다. 이것이 초창기의 장로교라는 교회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드디어 1711년에 매사추세츠에서는 신령에 의한 증거는 증거로 채택하지 못하는 법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미 위치라고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3분의 2가 판결이 번복되었으며, 지금부터 약 40여 년 전인 1957년에야 전원 판결이 뒤집혀 위치로 낙인이 찍혔던 사람들의 후예들이 명예회복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미치광이 같은 광신자들이 죄 없는 사람들을 모함하여 살인했다는 것이 번복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로 확정됨으로써 한 가지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는 이들의 극성스러운 난동에 끌려 다니던 정부와 사법부가 독립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며, 이로써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기 시작한 근원이 된 것이다. 필자가 34~35년 전 지금 살고 있는 이 곳에 정착했을 때만 해도 일요일에는 구멍가게 외에는 모두 문을 닫았으며, 술은 물론 살 수 없었고, 일요일은 ‘주님의 날(Lord's Day)’이라고 일요일 날짜로 쓴 수표는 받기를 꺼려했다. 왜냐하면 수표 발행한 사람이 ‘주님의 법령(Lord's Act)’에 근거하여 무효라고 하면 문제가 복잡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곳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로는 그 당시부터 30여 년 전에는 일요일에 땔감이 없어 집에서 장작을 팬 것도 경찰이 와서 잡아갔다고 할 정도였다.
똑같은 칼뱅주의자들인 청교도들은 홀란드에도 집단이민하여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의 지나치게 엄격한 신앙생활과 방식을 전 사회에 표준으로 삼으려는 과격한 노력이 패배할 때에는 반사작용으로 핍박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홀란드의 청교도들은 북미주 대신 대거 남아프리카로 이주하였다. 이들의 사고방식으로 이루어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라고 불리는, 얼마 전까지도 악명 높았던 20세기의 인종차별정책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은 모두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뿐이 아니다. 칼뱅주의 기본정신은 미국 개신교 전반과 아일랜드계 천주교의 얀센주의자(Jansenists) 등을 통하여 실질적으로 전 미국인의 일상생활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그리하여 프리메이슨의 헤르메스 사상(hermetic philosophy), 자연신론(deitism), 영지주의(靈智主義-spiritualism) 같은 것들은 깊이 사색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이 있었으나, 이들은 내색을 않고 항상 지하조직으로 활약하면서, 대부분 표면적으로는 교회에 나가는 훌륭한 교인의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는 칼뱅주의가 자연적으로 만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미국에서의 칼뱅주의는 애당초 발상의 중심지였던 스위스, 스코틀랜드, 홀란드보다 더욱 엄격한 칼뱅주의 사회가 된 것이다. 지금 미국의 정치판도에 소위 극우분자로 불리는 종교계는 단연코 칼뱅주의자들이며, 이들은 애초부터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반대했던 사람들이었고, 다행히도 프리메이슨의 힘에 의하여 종교와 정치가 분리는 되었지만 이들은 기회 있는 대로 정치계를 장악하여 칼뱅주의 기독교 사상으로 미국사회를 만들려는 움직임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뷰캐넌(Pat Buchanan)을 지지했고, 조지 부시(George W. Bush)를 지지하여 그의 권력형태를 자기네들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고 있다. 지금도 그들의 투쟁은 많이 후퇴는 했지만 학교에서 성경에 의한 교육을 되살리려고 하고 있으며, 낙태반대를 통한 교회의 권력신장 등, 이러한 투쟁의 저변에서는 프리메이슨과 종교계의 투쟁이 지속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미국의 건국정신에는 항상 하나님이 소개되는 것이다.
한국은 이제 표면적으로는 개신교 국가처럼 보일 정도로 개신교가 거대해졌다. 다른 장에서도 언급했지만, 한국의 개신교는 미국의 영향이 절대적이라 했다. 물론 캐나다도 작용했다 하지만, 미국이나 캐나다나 종교적인 판도는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칼뱅주의의 기초로 성장한 미국 교회의 한국 교회에 대한 영향은 지대하다. 어떤 면에서는 한국 교회를 보는 것이 미국의 전(前) 세대를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예를 들면 한국의 목사들이나 진실한 신자들은 술·담배를 하지 않는다. 마치 술·담배를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러나 이렇듯 술·담배를 않는 것은 미국에서는 이미 왔다 간 옛날 이야기이다. 미국에서는 1920년부터 1933년까지 13년간 소위 프로히비션(Prohibition)이라고 하여 술 마시고 파는 것을 불법화했던 일이 있었다. 이는 너무 많은 미국의 남자들이 술주정뱅이가 되어 봉급을 받아 술 마시는 데 사용하느라 집에서는 식량을 살 돈이 없어 굶는 일이 허다했고, 많은 술 취한 남자들이 집에 와서 부인이나 자식들에게 폭행하는 예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매사추세츠 주의 목사들 40%가 알코올 중독자로 죽었을 정도라니 그 심각성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목사들이 심방을 다닌다며 이 집 저 집을 다니는 것이 술 얻어먹으러 다니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사회가 술독에 빠졌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다 못한 가정주부들이 궐기를 하여 성직자들을 제치고 교회의 신도들을 이용하여 정치력을 행사하였으며, 이러한 압력에 굴복한 정치가들이 결국 주류판매금지령을 만들어 헌법에 삽입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금주법은 완전 실패하여, 누구나 술 마시고 싶은 사람들은 언제고 술을 마실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여자 음주인구를 증가시켰으며, 술장사는 조직폭력단의 전매품이 되어 경찰의 부패와 함께 버젓이 술이 사회에 범람하게 되었다. 미국의 마피아니 알 카포네(Al Capone)니 하는 갱단이 모두 이때 생긴 것이다. 그리하여 13년 후 사회의 비판이 너무 심하여 결국 법이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 금주법으로 성공한 것이 있는데, 교회 목사들이 술을 끊게 된 점이다. 이것이 한국으로 전해져 아직도 한국의 목사들은 술을 금하고 있으나, 실상 미국에서는 이제는 다 잊어버린 까마득한 옛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니까 미국의 1920년대 교회상을 한국은 아직도 고수하고 있다는 결론이다. (91%)
그리스도교의 도덕관념
2009.05.11 12:18:48 (*.131.66.250)
그리스도교의 도덕관념
그리스도교의 도덕관념은 사랑이 그 으뜸 되는 정신이라고 한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십계명에는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훔치지 말고, 거짓증언하지 말고, 남의 부인이나 재물을 탐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러한 율법을 바탕으로 형성된 서양의 도덕관념을 우리는 소위 ‘유대-그리스도교 도덕관념(Judeo-Christian morality)’이라 부르고 있다. 중세기에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세계통일 꿈이 최소한 유럽에서는 거의 달성되었었다. 그리고 지금도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세력은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역시 ‘유대-그리스도교’의 도덕관념이다. 한국도 옛날 공자의 삼강오륜(三綱五倫) 등 유교사상이 도덕의 밑거름이 되었으나, 근세에 들어와 그리스도교가 큰 세력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한국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과거 우리 조상이 거울로 삼아 왔던 유교의 도덕관념은 마치 얻어 온 자식 같은 대접을 받는 정도로 물러선 기분이 든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의 도덕관념은 회교도 국가를 제외한 전세계의 물결을 타고 있고, 세계화를 지향하는 한국사회에 지상(地上)의 세력이라 할 ‘유대-그리스도교’의 종교관을 선두로 하여 정치·경제를 무기로 한 막강한 문화적 세력으로 한국을 덮치고 있고, 한국의 사회인들은 이에 도취되어 미친 듯 받아들여 변천되어 가고 있는 것이 현재의 실상이 아닌가 한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은 도덕관념이 없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할 정도가 되었다. 이런 이야기는 필자 자신이 여러 번 들어온 이야기이다. 크리스천들은 그들의 도덕만이 완전하다고 믿으며, 크리스천이 되면 도덕적인 사람으로 변한다고 믿는 듯하다. 필자와 가까운 한 친구 부부는 부인이 집사이고 본인은 장로인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그렇게 친한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필자가 교회에 다니지 않기 때문에 신용할 수가 없어 속말을 할 수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항상 주도권 때문에 바람 잘 날이 없이 싸움질하는 교인집단의 일원이 오히려 나보고 신용할 수 없다니 기가 찬 일이라 생각하고 일소에 부친 일이 있었다. 필자는 이런 일을 여러 번 당했다. 또 친지 중에 필자가 기독교인이라면 참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는지, 전도하다 실패하고 나서 교회에 안 나간다고 화를 낸 친지도 여럿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회에 나가자고 한다. 기독교인들이 자부하는 도덕관념은 보통 이런 정도라고 믿어진다. 그래서 크리스천의 도덕이 어디에서 왔으며 그 바탕이 무엇인가 고찰해 보는 것은 몹시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되어 한 번 따져 보기로 했다. 크리스천의 도덕이라 하는 근본관념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나는 마땅히 성경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만일 크리스천의 경전에서 도덕의 지침을 찾을 수 없다면 크리스천의 것이 아니며, 크리스천들이 내세울 도덕관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대강 찾아본 결론을 아래에 열거해 본다.
살상을 즐기고 원하는 하나님
창세기 22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죽여 번제로 바치라 하였다. 번제라는 것은 레위기 1장에 설명하기를 흠 없는 수컷 또는 남자를, 그러니까 어린아이를 죽여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가죽껍질을 벗겨 버리고 난 다음 토막을 내어 그 고기를 구어 몽땅 제단에 바치는 것이다. 번제를 바치는 자세한 절차는 레위기 4장 7~34절에 나와 있고, 또 출애굽기 30장 28절, 역대상 16장 40절에 번제 이야기가 나오며, 창세기 8장 21절에는 하나님이 그 기분 좋은 냄새를 맡는다 하였다. 그 냄새가 기분이 좋으니 즐겼다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신약의 히브리서 9장 11~14절에 흠 없는 예수가 자진 희생물로 바쳤으니 사람들은 염소나 황소보다 훨씬 더 값진 희생물을 바쳐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계속하여 26절까지 설명하기를 거의 모든 것을 피를 뿌려 깨끗하게 해야 된다고 하면서, 피를 흘리지 않고는 용서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용서를 받으려면 죽여야 된다는 것이며, 짐승보다는 더욱 귀중한 생명을 가진 사람을 죽이는 것이 더욱 큰 가치가 있다고 설명한 것이다.
우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장 중요한 이삭을 죽여 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은, 살인을 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내린 하나님으로서 아무리 시험을 한 것뿐이라지만 너무 잔인한 처사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또 이 말을 듣고 실행에 옮기려 했던 아브라함은 실제로 죽이지는 않았지만, 천사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죽였을 것 아닌가? 문제는 아브라함이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하나님이 하라 했다고 실천에 옮기는 그의 정신상태이다. 왜 그가 실천에 옮기려 했는가는 그 당시의 풍습이나 사회조건으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생각 않고 일을 진행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란 존체는 피를 좋아하고 죽은 시체가 불에 타는 냄새를 좋아한다 하였으며, 그런 것을 보아야만 용서를 해 준다고 하였다. 그러니 예루살렘을 빼앗겠다고 쳐들어간 십자군들이 적군의 시체를 통돼지 굽듯 불에 굽고 내장을 꺼내 구어 먹은 것은 어쩌면 크리스천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더 비약시키면 재미있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북미에서도 종종 연쇄살인범이 살인동기를 진술할 때 신(神)이 시켜서 했다고 하곤 한다. 대개 이렇게 말하는 살인범들은 정신상태감정을 받아 본의가 아니라는 판단으로 형이 가벼워지든가, 형무소 대신 병원으로 가게 된다. 이렇게 논리를 전개시키면 필경 크리스천들은 그것은 그 때의 일이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줄 안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이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하나님이 각각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고 본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그 때나 지금이나 미래에도 같은 하나님일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진리이고 전지전능하며, 진리는 시간과 공간에 상관 없이 불변이라는 논리를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잔인한 하나님
모세의 출애굽 때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 군대의 추격을 받았다 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 군인들을 홍해의 갈라진 물 속으로 유인하여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수장을 해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전지전능하다는 하나님은 여러 가지 기적 같은 일을 이집트인들 앞에서 보였다. 그렇다면 이집트 군대의 생명에 관계없이, 즉 예를 들면 잠시 그들의 눈을 멀게 한다든가, 구름의 장막으로 앞을 볼 수 없게 한다든가, 신기루처럼 이집트 군대에게 거짓 이스라엘 군상을 보여 주어 마치 그들이 다른 쪽으로 가는 것처럼 만들어 엉뚱한 곳으로 인도하는 방법 또는 사무엘상 19장 24절에 다윗을 죽이러 온 사울 왕을 벌거벗겨 놓고 예언을 하도록 만들었던 것처럼 하여 얼마든지 인명에 해를 끼치지 않고 하나님의 위력을 과시하여 모세의 일행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집트인들이 자신을 신봉하도록 그들 눈앞에서 기적을 행하여 자기가 진정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인자하다는 하나님은 이집트 군인들을 한 명도 예외 없이 깡그리 죽여 버렸다. 지금 사람들은 미국이 원자탄을 1945년 8월에 일본에 떨어뜨려 무고한 민간인을 그렇게 많이 죽인 것이 필요에 의한 것이었냐는 질책을 하고 있다. 1945년 봄에 일본은 이미 무조건 항복의 의사를 미국에 전했지만, 미국은 이를 거절하고 계속 전쟁을 한 일도 있었다. 그것은 미국이 단순히 준비된 원자탄을 사용해 보고 싶은 심정으로 항복도 수락 않고 일본에 투하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고의적으로 필요 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인륜에 대한 범죄라 한다면, 하나님도 인륜에 대한 범죄자라고 재판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크리스천의 세계는 이스라엘 민족인 유대인을 죽인 독일 나치는 인륜에 대한 범죄로 천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무기를 개발해 놓고 한 번 실제로 실험해 보기 위한 호기심으로 수십만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미국 사람이나, 중국의 남경(南京) 같은 곳에서 역시 수십만의 죄 없는 인명을 학살한 일본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떳떳하다고 보아서 힘있는 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일까?
또 다윗은 사울 왕의 사위가 되기 위한 값으로 블레셋 남자의 포피(包皮-foreskins, 註: 한글 NIV 성경에는 양피, 즉 양의 가죽이라고 단어를 바꾸어 번역하였음, 사무엘상 18장 24~27절) 1백 개를 얻기 위해 블레셋 남자를 그 두 배인 2백 명이나 죽이고, 그들의 자지를 모두 잘라 사울 왕에게 바쳤다. 성경은 블레셋 사람들의 생명은 전혀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기고, 다윗의 용맹만 칭찬한 것 같다. 필경 이 대목을 읽는 크리스천들은 다윗의 용맹에만 관심이 있고 무고한 블레셋 사람들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으리라. 때문에 유대인들이 아랍 사람들을 아무리 죽여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잘한 일로 칭찬받을 일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현재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개죽음은 관심사가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 죽는 일에만 분한 열을 올리는 것인가? 또한 테러에 희생된 미국인만이 참사람이고,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죽어가는 아프간의 민간인 희생자들은 죽어 마땅한 인간들인가?
그리고 민수기 31장 13~18절을 보자. 모세는 하나님이 지시한 대로 미디안 사람들을 벌주기 위하여 산하의 1만 2천 명의 군대로 미디안을 침공하도록 명령하였다. 군사작전은 대성공하여 미디안의 왕을 다섯이나 죽이고 남자란 남자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였으며, 대단한 전리품을 잔뜩 갖고 돌아왔다. 그러나 모세는 수하 장군들이 여자들은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대노하였다. 모세는 명령하기를 다음부터는 숫처녀는 죽이지 말고 너희들이 갖고 남자 맛을 본 여자들은 모두 죽이라고 하였다. 요즈음 유고슬로비아의 대통령 밀로세비치(Slovodan Milosevic)를 ‘인륜에 대한 범죄’란 죄목으로 전범재판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밀로세비치는 십계명이라고 부르는 세상에서 가장 으뜸 되는 도덕경을 소개했다는 모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너무나 인도주의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하나님이 돌보고 선택했다는 이스라엘과 유대 민족은 가장 하나님의 마음을 잘 헤아려 전 인류의 모범을 보였어야 그리스도교의 가치관이 돋보이고 존경하여 따를 가치가 있게 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성경을 뒤져보면 이들 유대 민족과 크리스천의 적대관계에 있는 쪽에서는 오히려 전쟁에서 이들을 필요 이상 죽이지 않고 포로로 삼았다. 그러나 다윗 같은 하나님의 가장 모범적인 인간모델이나 십자군 등등 하나님의 종도(宗徒)들은 자산이 될 가치가 있는 가축은 살렸어도 인간이라는 것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여 버리는 일을 항상 계속하고 있었다. 그것도 피해자의 입장에서 침략을 당했을 때 원한으로 그런 것이 아니고, 가만히 있고 평화롭게 잘 사는 옆 나라에 쳐들어가 이런 극에 달하는 잔인성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사무엘상 27장, 30장 등을 읽어 보면 잘 설명되어 있다. 과연 크리스천들이 섬기는 그 하나님의 종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런 행동을 계속 반복하는 것일까? 이러한 배경을 볼 때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크리스천이 평화를 사랑했는가, 아니면 크리스천들이 악마이며 지옥에나 갈 사람들이라고 하는 크리스천의 적이 평화를 사랑했는가를 성경 속에서 증거를 찾아 비교해 보기 바란다.
약탈(掠奪)을 지시하는 하나님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근에 굶주렸을 때 따뜻하게 받아 주고 땅까지 주어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던 이집트는 은혜의 나라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은혜를 고마워했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나중에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성경에서의 기록이다. 이를 기정사실(역사적으로는 그런 기록이 없다 하지만)로 해도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죽이지는 않았다. 이에 대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인들에게 치른 대가는 어떠했는가? 또 이들은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미국의 부자나 옛날 한국의 양반들이 갖고 있던 개인적인 노예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연인으로 남의 나라인 이집트에서 동등한 자격으로 살아오던 도중, 새로 왕이 된 파라오의 결정으로 공사감독을 두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라오의 곡식을 저장해 둘 도성 비돔(Pithom)과 라암셋(Ramses)을 짓도록 강제노동(출애굽기 1장 11절)을 시켰다고 하였다. 이 사람들은 이집트 사람들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한 집에서 농토도 갖고 있었고 가축도 갖고 있었으며 자유로이 자기 자산을 처리할 수 있는 처지에 있었으니(출애굽기 10장 26절, 12장 5~7절), 노예였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표현으로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전 이집트에 사는 모든 가정의 첫번째 아들자식을 죽일 것이라고 경고를 할 때, 이집트 사람들과 구별을 할 수 없었기에 특정한 제사의 절차를 따라 죽인 양의 피를 문지방에 바르면 그 표적으로 그 집에는 사람을 죽이러 들어가지 않겠다고(출애굽기 12장 13절)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갈했던 것이다. 또 출애굽기 3장 22절을 보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인들은 저마다 이웃 여인과 자기 집에 사는 여인에게서 은붙이와 금붙이와 옷을 얻어 낼 것이고 너희는 그것으로 아들과 딸들을 치장하리라. 이렇게 너희는 이집트를 털리라.” 여기서 이웃 여인과 집에 사는 여인이라는 것은 이집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노예라면 어떻게 이집트 사람들과 섞여 살고 있었는가? 더군다나 노예집 안에서 이집트 여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필경 노예라는 유대인들이 이집트 여인을 하녀로 집에 고용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소리로 들린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노예는 사실상 우리가 생각하는 노예가 아니라는 증거이며, 살림살이도 이집트인 못지않게 잘 살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결국 현재 한국의 청년들이 나이가 되면 강제로 군대에 나가 나라를 위한다는 구실로 일정 기간 노동을 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비슷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리고 현재 크리스천화된 한국이란 나라가 옛날 이집트 왕처럼 현명한 사람이라고 외국 사람을 재상이나 총리로 시킬 만한 아량이 과연 있을 것인가? 요셉 덕분에 굶어 죽지 않고 이집트에 와서 살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에 천만번 고맙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들이 떠날 때에는 이집트 사람들에게서 공갈·협박으로 금과 은을 약탈해(출애굽기 11장 2절) 갔다. 영어로 ‘plunder’ 또는 ‘spoil’, 즉 약탈하고 이집트를 망친다는 말을 사용하였으며, 우리말로 ‘턴다’는 것은 강도나 도둑이 재물을 약탈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시키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주선으로 먼 길을 떠날 것이니 노자를 마련하기 위해 그리 약탈하도록 해 주었다는 사연이다. 그러나 금과 은을 팔고 그 돈으로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마련하지 않는 한 쇠붙이가 어떻게 노자에 보탬이 된다고 하나님은 약탈을 하도록 만들었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빼앗은 금은보화로 자기네 자식들을 치장했다고 했다. 이것은 피난길에 노자로 쓰라고 한 것이 아니다. 다만 금이나 은이 귀중하고 값비싼 물건이기에 이스라엘 민족이 부자가 되고 이집트인들이 가난해지라고 약탈을 하나님이 시킨 것이다. 그래서 이 금의 일부를 거출하여 시내 산 밑에서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 아닌가? 물론 하나님은 이렇게 노획한 금은이 어떻게 쓰여질 것인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자기가 선택한 인민에게 깡패나 날강도의 행실을 가르쳐 준 것이다. 그런데 후에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받았다는 십계명에는 약탈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 두 가지 하나님의 언행을 비교해 보면, 분명 약탈이나 겁탈 같은 것을 하지 말라는 내용은 자기네끼리 하지 말라는 것이지 다른 민족에게는 얼마든지 하라는 설명으로밖에 해설할 길이 없다.
전쟁을 위해 세상에 온 예수
앞의 다른 장에서도 잠깐 소개했듯이 마태복음 10장 34절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라고 한 구절이나, 누가복음 22장 36절에 검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 한 것을 참고해 보자. 예수가 잡혀갈 때 시몬 베드로는 검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그 검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점만 보아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는 것보다 로마 치하에서 유대 민족의 독립을 취하려 했던 혁명투사였다는 논리가 더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성경을 만든 사람들이 어쩌다 위와 같은 문구를 삭제하는 일을 게을리 했나 생각해 본다. 이런 문구가 성경에 남아 있다는 것 자체는 다만 실수로 보이기 때문이고, 이 때문에 성경을 지상(至上)의 책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설명하기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아는 함석헌 선생의 풀이를 한 번 음미해 보자. 그는 “이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이란 의미가 아니다. 이는 무기를 사용한다는 뜻이 아니고 생각의 논쟁을 한다는 뜻이다. 예수는 원칙적으로 평화를 사랑하였다. 우리가 성경을 똑바로 이해한다면 예수가 완력을 사용하는 일을 권장한 적이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예수가 잡혀갈 때 그와 함께 있던 베드로는 그를 잡으러 온 산헤드린(공회) 소속의 한 경찰관을 내리쳐 그의 귀를 자른 내용이 마태복음 26장 51절에 명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예수와 함께 있던 베드로만 검을 갖고 있었을까? 필경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은 거의 모두가 칼을 갖고 있었고, 다만 베드로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예수가 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고 한 것은 상징적이 아니고 실제로 칼을 사서 몸에 지니고 다니라는 말이 틀림없다. 만일 예수가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했고 상징적인 검을 가지라고 가르쳤다면 우선 그의 가장 신임하는 제자인 베드로가 칼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되며, 필경 개인 의사로 칼을 갖고 있다가 예수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사용한 것을 보았을 때 호되게 나무랐어야 옳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전혀 없다. 물론 판단은 각자의 양식에 달려 있는 일이다. 앞의 ‘예수의 과업은 과연 무엇이었는가?’의 장을 다시 음미해 보기 바란다.
원주민을 쫓아내는 불공평한 하나님과 이상한 이치의 하나님
모세가 지휘하여 이집트를 떠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기름진 땅을 주기 위해 하나님은 가나안에서 이미 오랫동안 정착하여 살던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의 자식들인 가나안 사람, 헷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 사람, 여부스 사람들을 쫓아 내몰았다. 이 사람들의 조상인 함은 자기 아버지 노아가 술에 취해 나체가 되어 잠자는 것을 목격하고 다른 형제들에게 이를 알린 죄로 대대손손 두 형제의 노예가 되었다 한다. 이브와 아담이 사과를 먹었다는 죄로 인류가 영원히 원죄를 졌다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이지만,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왜 벌거벗었는지 그 망령된 행동은 탓하지 않고, 어쩌다 방에 들어가 아버지가 벗은 채로 잠자는 것을 본 것이 그렇게도 큰 죄가 된다는 논리는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 자체가 납득이 안 가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성기를 다른 남자에게 보인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창세기 24장 2절에는 ‘환도뼈’라는 말이 나온다. 어떤 성경은 사타구니(thigh)에 손을 넣으라고도 되어 있기도 하다. 이것은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들이 새로 만들어진 도덕관념으로 정확한 말을 피해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표현은 셰익스피어도 마찬가지로 사용하였다. 즉, 자지를 환도뼈라고 말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큰 맹세를 하게 되면 굳은 약속을 한다는 뜻으로 상대방의 자지를 잡고 요즈음 사람들 악수하는 식으로 흔드는 것이 풍습이었다. 여신(女神)이 으뜸이었던 사회에서는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여자의 상징인 보지(yoni)를 섬겼고, 남신(男神)을 섬기던 유대인 사회에서는 남자를 상징하는 자지(phallus)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약속을 할 때에는 맹세의 뜻으로 상대의 자지를 잡고 흔들게 되었고,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이 아브라함에게 맹세한다는 뜻으로 환도뼈에 손을 넣었다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의 분신인 아들에게 하체를 보였다는 일이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되는 일이련만, 일을 그렇게 꾸민 것이다. 참고로 사무엘상 7장 4절에 바알과 아스다롯이란 말이 나오는데, 바알(Baal)은 남근상(男根像)을 말하고 아스다롯(Ashtoreth)은 여근상(女根像)을 말한다. 그리고 민수기 25장 1~3절에는 여자들은 바알을 갖고, 남자들은 아스다롯을 갖고 음행했다는 이야기도 나오며, 물론 다른 장에서도 많이 소개된다. 이것은 고대 유대인들이 남녀 성기를 모두 숭배했었다는 증거인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엄격한 면을 보여 준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였다. 이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많이 하나님을 배반했는가 따져 보기 바란다.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은 여러 차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를 숭앙하지 않고 다른 우상을 섬긴다든가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다. 유명한 아론은 하나님의 제사를 집전하는 대제사장으로, 모세가 산에 올라간 사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그래도 이 사람은 벌은커녕 계속 제사장 노릇을 하도록 하나님은 관대했다. 아론이 하나님에게 진 죄를 우연히 아버지의 나체를 본 것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그들은 매번 용서를 받았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몹시도 인자했고 도에 넘치게 참을성이 많았다. 이런 점으로 보아 어쩌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하나님이지 한국인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며, 이스라엘 사람을 위해 한국 민족을 망치고, 유대인의 노예로 삼으려는 하나님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였다 해서 오랫동안 크리스천에게 박해를 받아 왔다. 이것은 사람이 박해한 것이지 하나님이 박해한 것은 아니다. 성경에도 종종 유대인들은 하나님에게 벌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어찌했든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고, 결국 하나님은 그들만의 이익을 보살펴 준 것이 성경에 소개되었다. 필경 이런 논쟁은 크리스천의 안목에서 볼 때에는 인간의 판단능력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니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할 것이 뻔하다. 그러나 성경 속에 나오는 인간들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내용은 그 사람들 자체의 판단력을 갖고 하나님과 말을 주고받았으며, 하나님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와 하나님의 대화만 읽어 보아도 모세가 이성과 판단력을 갖고 하나님에게 질문하고 요구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유여하를 물론하고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각자 개인의 하나님으로 삼을지 말지 하는 판가름에서 무조건 믿어라 하는 것은 어패가 있어 보인다.
과거 신분이 노예였든 아니든 하나님이 가나안에 살던 사람들을 인간으로 취급을 했다면 삶의 터전을 빼앗고 미지의 땅으로 내쫓은 것은,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2천 년 가까이 살고 있던 원주민을 쫓고 제 땅이라고 총칼로 차지한 오늘의 이스라엘 형편과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이 예전에 했던 일을 또다시 반복하는 처참한 행위가 아닌가 한다. 만약 이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크리스천이 있다면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라. 만약 수백 년 동안 일본에 살던 한 부족이 백제의 후손이라면서, 신라 때문에 오랫동안 타향살이를 했으나 이제는 자기네 땅이 필요하다며 경상도에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던 사람들을 무조건 총칼의 힘으로 쫓아내거나 학살해 버리고, 경상도 사람들이 경기도나 강원도에서 피난살이를 하게 되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니 정당하다고 할 것인가? 물론 얼토당토않고 가능성 없는 예라고 일소에 부칠 수 있겠지만, 옛날 가나안에 살던 사람들이 모세가 데리고 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땅을 빼앗긴 일이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난데없이 나타난 유대인들에게 땅을 빼앗긴 것도 모두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처럼 좋은 하나님이 다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쫓겨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악마의 하나님이지, 어떻게 이런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 생각할 수 있다고 크리스천들은 생각하는가? 남의 재산을 탐내지 말고 훔치지 말라는 하나님이 왜 이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몽땅 빼앗아 버리는가? 이것은 조금 훔치거나 탐내는 정도를 훨씬 초과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일 뿐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가?
그리고 출애굽기에는 노예관리에 대한 자세한 율법을 설명하였다. 노예라는 존재는 역사상 세계 각지에 있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것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노예라는 것이 세계 각지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귀 익게 알려진 노예 이야기는 미국 남부의 노예 이야기이고, 그 때문에 미국에서 남북이 갈라져 전쟁까지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틀림없이 남부에서는 노예제도를 계속하려 했다. 그런데 그 노예제도의 정당성을 가장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던 무리가 바로 미국에서 가장 큰 종파인 남침례교라는 개신교였다. 이들이 노예제도의 정당성을 주장했던 근원은 무엇이었는가라고 질문한다면, 바로 성경이었다는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모두 잘 아는 일이다. 반면에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적 근원은 무엇이었는가? 물론 그것도 성경이다.
1994년 봄 르완다의 후투(Hutu) 민족은 불과 한 달여 만에 약 80만 명의 툿시(Tutsi)인들을 만도(蠻刀, machete)로 도살하였다. 이때 국영방송 RTLM은 시민들은 모두 적극 참여하여 한 명이라도 더 툿시족 사람을 잡아죽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항상 정의의 편에 서며 그 하나님은 드디어 툿시에게 격하여 후투를 돕고 있으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툿시를 죽이라고 홍보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라는 예는 역사적으로 무궁무진하게 많은 이야기이다. 2차 대전 때 독일군이나 미·영 제국도 마찬가지로 모두 십자가를 섬기면서 싸웠고, 코소보에서도, 사라예보에서도 모두 같은 하나님을 앞세우고 서로 사람을 죽였다.
하나님은 공평하지도 못한 것 같다. 예를 들자면 한이 없는 일이겠지만,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다윗과 솔로몬이다. 다윗은 용맹하기로 유명했고, 솔로몬은 현명하기로 유명했다. 이 두 사람은 물론 하나님이 유대 민족의 지도자로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 모두에게 용맹과 지식을 함께 주어 동등한 위인으로 만들어 주었다면 더욱 이상적이었을 텐데 하나님을 그리하지 않았다. 물론 이 사람들의 재능은 하나님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신론자로 천벌을 받을 레닌이나 스탈린이나 모택동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지도 않았는데 무척이나 현명하여 그 많은 인구를 다스렸다. 2000년 가을에 출마한 조지 W. 부시도 하나님이 대통령에 출마하라고 시켜서 출마했다고 교회에서 간증을 했다. 또 어떤 교회는 열을 올려 모금운동을 오랫동안 해서 저금한 돈으로 교회건물을 지었는데, 하나님이 교회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마치 사람들은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알아서 그냥 준 것처럼 말이다. 또 부자가 된 어떤 이는 교회에 잘 나가고 열심히 믿었더니 하나님이 그렇게 돈을 벌도록 해 주었다고도 한다. 또 어떤 친구는 높은 건물에서 밧줄에 걸려 땅으로 떨어지는 도중 기적적으로 그 밧줄에 다시 걸려 공중에 매달려 구조대가 가서 그를 살릴 수 있었다. 그는 곧 하나님에게 목숨을 건져 주어서 고맙다고 기도를 드렸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자기를 구해 주었다고 말하고 다녔다. 필자는 그 친구가 진실로 그렇게 믿는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기적에 가깝도록 이상하게도 그를 밧줄에 걸어 건물 밖으로 내동댕이쳐 떨어지게 만든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필자에게는 참으로 신기해 보이는 것이다. 또 어려운 역경에 부닥치면 운이 나쁘다든가 노력을 덜해서 그렇다 생각 않고 하나님이 시험을 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따라서 현명한 지혜와 행운은 하나님의 독점물(獨占物)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 현명하고 부자가 되는 경우는 크리스천들의 뇌리에는 등록이 안 되는 미지의 사실인 것 같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자고 작정하면 모든 것이 선택되어 필요하고 원하는 내용만 머리에 입력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신앙을 가지면 정신병자가 될 확률이 적어지는가 보다.
성경적 결혼관과 일부일처주의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결혼도덕은 일부일처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원칙은 어디에서 왔는지 분명치 않다. 그리스도교의 원리라면 일반적으로 당연히 성경에 씌어져 있는 글을 기본으로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다시 말해서 이 원칙이 성경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경에는 일부일처, 일부다처, 일처다부 또는 금욕생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결혼, 간음, 사통(私通-fornication)이란 단어는 있어도 그에 대한 지침이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결혼조건은 간단하다. 당사자인 남녀가 증인 앞에서 하나님이 두 사람을 결혼으로 결합시켜 주는 것을 수락한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선언하고 육신의 결합이 있게 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결혼조건이 성립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남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사랑과 같은 아가페(agape) 사랑을 부인에게 주어야 하며(에베소서 5장 25절), 부인은 박애사상에 의한 자선적 사랑(philandros)을 남편에게 주어야 한다고 하였으며(요한 1서 4장 19절), 남편은 부인을 억지로 복종케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또 레위기 20장 11~16절에 아버지의 부인과 동침하는 사람, 며느리와 동침하는 자, 동성인 다른 남자와 동침하는 자, 모녀와 동침하는 자, 짐승과 성교하는 남자나 여자는 죽여야 한다 하였고, 이어서 17~21절에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딸과 성교를 하거나 월경 중인 여자와 성교하면 사람들이 모인 앞에서 능지처참(slay)시킬 것이라 하였고, 고모나 이모와 동침하지 말 것이며 또는 삼촌이나 외삼촌의 부인과 동침하지 말 것이며, 형제의 부인과 결혼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사촌과 결혼하지 말라는 말은 없다. 사촌이라는 것은 아버지나 어머니 형제의 자식이다. 그리고 남자들끼리 동성애하여 성교하는 것은 죄악이지만, 여자끼리의 동성애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짐승과의 관계까지 설명하면서도 레즈비언에 대한 언급은 없는 것이 허락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잊어버린 것인지 알 길이 없지만, 여하튼 성경으로는 합법적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누가 해설하여 남자가 안 되니 여자도 안 된다고 한다면, 사람이 감히 하나님 역을 하는 일이니 그 자체가 죄악이 아닌가 한다. 성경에서 정의하는 결혼은 하나님의 법에 따르는 것이지 국가의 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국법을 어겨 벌을 받거나 결혼이 허락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교회에서 사촌간의 결혼을 반대하거나 죄악시 할 수 없다는 이론이 나올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죄악이라 하지 않은 것을 교회가 죄악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국법을 따를 것인가, 성경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 필경 성경을 따라야 할 줄 안다. 디모데전서 4장 처음에 보면 후일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이 없어지고 마귀의 가르침을 좇아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할 것이라 하면서,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받는 음식은 모두 좋은 것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결혼하는 것을 막지 않았으니 감히 누가 사촌간의 혼인을 막을 것이며, 만일 막는 자가 있다면 그는 마귀의 가르침을 쫓는 사람들일 것이니 크리스천들이 과연 따를 일인가? 이렇게 해설을 하다 보면 정부가 만든 국법은 마귀의 법이니 그리스도를 믿는 교인들은 국법에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가톨릭은 일부다처주의를 묵인하고 있었다. 인정은 하지 않았지만 반대도 하지 않았으며, 정식 부인인 본부인 이외에 다른 여자에게서 출생한 자식들도 자식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563년 트렌트 공회(Council of Trent)에서 본부인의 자식만 인정하도록 하였으며, 아들만 유산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고, 여자들에게 원치 않는 남자라도 상대자가 없으면 억지로라도 결혼하도록 거의 강압적인 교회정책을 쓰게 되었다. 기독교를 한국에 주로 소개한 미국의 경우는 1856년 공화당의 당 정책으로 일부일처주의가 채택되었으며, 1862년 링컨 대통령 때 일부다처주의를 불법화했다.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나 야곱을 위시하여 여러 사람이 둘 이상의 부인을 가진 경우를 많이 소개하였다. 그래서 몰몬이나 회교도들의 일부는 일부다처주의를 고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우리가 알고 있는 일부일처주의는 성경에 의한 것이 아님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성도덕
창세기 38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증손자이며, 야곱의 아들인 유다(Judah)는 ‘엘(Er)’, ‘오난(Onan)’, ‘셀라(Shelah)’ 삼 형제의 아들을 두었다. 유다는 엘을 장가보냈으나 엘은 하나님에게 미움을 사 일찍 죽었다. 그래서 당시의 풍습을 따라 둘째 아들 오난에게 과부가 된 형수와 동침하여 형을 위하여 자식을 낳도록 하는 것이 시동생의 의무라고 하면서 그리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오난은 그렇게 탄생하는 자식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잠자리를 함께 하여 성교는 하되 질외사정을 하곤 하였다. 그의 이런 행동을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일로 여겨, 하나님은 오난도 죽여 버렸다. 그리하여 유다는 아직 어린 막내 셀라 하나만 남게 되었으나, 이번에 잘못하다가는 셀라마저 죽을 것 같아 셀라가 좀더 커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래서 유다는 며느리 다말(Tamar)에게 친정에 가서 과부로 살면서 셀라가 좀더 커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면서,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 버렸다. 얼마간 세월이 흘러 유다는 자기 부인이 죽어 홀아비가 되었으며, 어느 날 유다는 며느리의 친정 마을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다말은 셀라가 이제는 시아버지의 약속대로 많이 컸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주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서, 시아버지라도 홀려 동침을 해서 자식을 낳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사원의 창녀차림을 하고 동네 어귀에서 유다가 오기를 기다려 창녀행세를 하면서 유다를 유혹하였다. 유다는 당연히 창녀로 생각하고 몸값을 흥정하였다. 그는 몸값으로 후에 새끼 양이 나오면 그것을 주겠다고 하였고, 다말은 이를 수락하면서 그 때까지 담보물로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맡겨 놓으라 하여 유다는 이에 응하고 동침을 하였다. 후에 새끼 양이 나와 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친구를 보냈으나, 친구는 그 동네에 사원창녀라는 것이 있지도 않으며, 괴이한 일이라고 허탕치고 그냥 돌아오게 되었다. 한편 유다는 자기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분명 과부로서 수절을 하지 못했으니 그 죄로 불태워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며느리에게 오라고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이를 모두 계산에 넣고 있던 며느리 다말은 전갈 온 사람에게 자기와 동침한 사람의 물건을 담보로 갖고 있는 것이 있다고 도장과 지팡이를 주어 돌려보냈다. 이를 받은 유다는 그 때에야 모든 내막을 이해하고, 며느리가 자기보다 더 옳았음을 인정하고 용서를 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일이 현재의 도덕관념으로 수락될 수 있는 일인가? 그러면 왜 이런 이야기를 성경에 집어넣었을까 생각해 보자. 이것은 도덕과 예절관념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위의 이야기는 예절로는 시아버지가 옳았고, 도덕적으로는 며느리가 시아버지보다 더 옳았다는 내용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예절과 도덕관념으로 볼 때 이를 어떻게 판단해야 옳을 것인가? 이를 판단함에 있어서 크리스천들은 인간적인 판단력을 발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일의 진행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일이고, 인간의 지능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옳고 그름의 이치를 따질 수 없다는 것이 기본조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는 자체를 인간의 판단력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위의 성경 이야기도 인간의 판단이 금물이라면 무조건 그대로 옳다고 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옳고 그른 도덕관념은 사탄의 것인가? 크리스천들은 형제가 죽었을 때 과부가 된 형수나 제수와 동침하여 자식을 낳도록 하는 것이 크리스천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아닌가? 또 자식 없이 과부가 된 여자들도 당연히 시숙과 동침을 해야 옳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일을 거절한다면 크리스천이 됨을 포기하든가 아니면 성경을 부정해야 할 것 아닌가?
다윗의 아들 암논은 배다른 누이 다말을 강간했다. 이런 일을 알게 된 다말의 오라버니 압살론은 앙심을 품고 나중에 암논을 죽이게 된다. 그러나 다윗은 이 일을 처음부터 잘 알면서도 암논을 탓하지 않았고, 그 결과 세월이 흐른 후 압살론이 암논을 죽이는 비극을 낳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오히려 형제를 죽인 압살론을 아들이기 때문에 사랑하면서도 벌을 주려 했던 일이 있었다. 이는 성경적 도덕관념으로 여자가 강간당하는 것은 남자의 죄가 아니며, 비록 오누이 사이라도 남자의 성욕을 만족시켜 줄 의무가 있지만, 형제를 죽이는 것은 죄가 된다는 해설이 되지 않을까? 만약 강간을 죄악시했다면 왜 다윗이 암논을 나무라든가 처벌하지 않았는가? 분명히 그 때에도 오누이간에는 강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도덕관념이 있었기에 압살론이 그런 도덕적 이론 아래 분노하였고, 그 때문에 암논을 죽였다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는 암논에게 잘못이 없었고, 때문에 다윗은 이를 불문에 부쳤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가 하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지붕에 장막을 치고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자기 아버지의 후궁 열 명과 동침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전쟁터에서 여자를 전리품으로 갖는 것을 장려할 정도였다. 남녀노소는 물론 다 죽이지만, 그 중에 혹시 처녀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발견하면 아내로 삼든 노리개로 사용하든 각 병정의 자유에 맡긴다고 신명기 21장 10~14절에 설명했고, 이것은 그저 좋다고 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엄격한 율법이었다. 이런 구약에 나오는 옛날 옛적의 일을 개화된 지금 세상에 와서 따지냐고 반박할 크리스천이 있겠지만, 문제는 그 하나님은 그 때나 지금이나 같은 하나님이고, 만일 그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개화되었다면 그것은 전지전능한 진리의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그 하나님이 진리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당시에 있던 십일조는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교회의 목사나 성직자들이 돈이 좋아서 십일조를 아직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니길 바란다.
하나님의 심사(心思-heart)를 그대로 닮았다는 다윗은 음탕했고 난봉꾼이었다. 그의 정식 부인과 애첩이 몇 명 있었는지는 계산하기도 너무 복잡한 일이다. 심지어는 남의 부인까지 빼앗고 그 남편을 전쟁터에 보내 일부러 실수 없이 전사하도록 지휘관에게 명령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또 다윗의 아들 솔로몬도 난봉꾼이었으나 마음속에 거리낌이 없었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성경은 다루었다. 오랜 후에 하나님은 모세라는 사람을 통해 십계명이란 것을 마련하여 남의 재물이나 남의 부인을 탐내지 말고 간음을 하지 말라는 훈령을 내렸다. 그러나 세상 인류 누구보다도 모범이 되었어야 할 다윗, 솔로몬 또는 모세 자신은 별로 모범이 될 인간이 못되는 것 같다.
또 하나님이 가르친 형벌은 무지막지하기도 하고, 장난기가 섞인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시집간 여자가 첫날밤에 처녀막 파열로 요에 피를 흘리지 않으면 처녀가 아니었다는 증거가 되며, 신부의 아버지가 처녀였음을 증명하지 못할 때에는 그 여자를 돌로 쳐죽여야 한다고 신명기 22장 13~20절에 설명하였다. 돌로 쳐죽이는 형벌은 사형시키는 방법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방법일 것이다. 교수형이나 기요틴이나 전기의자나 다른 모든 방법에 비하여 제일 오래 고통을 겪다 죽는 방법으로서 어떻게 인자하다는 하나님이 이런 극악한 형벌을 택했을까 의문이다. 그리고 에스겔 4장 12~13장을 보면, “너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똥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보리떡처럼 구워 먹어라”라고 하나님이 말하였다. 그런데 요즈음 성경은 사람 똥으로 불을 피워 사람들 보는 앞에서 보리떡처럼 구워 먹으라고 말을 바꿔 번역하였다. 아마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들이 너무했다고 생각하여 살짝 말을 바꾼 것 같다. 만약 이것이 장난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가학성 변태증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기(詐欺)와 배반이 정의(正義)로 되는 도덕관념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소와 야곱의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야곱은 에소의 발꿈치를 잡고 뒤따라 나왔다 하여 동생이 되었다. 간사한 야곱은 사냥 나갔다 돌아온 형 에소가 몹시 배고파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아들로서 정당히 먹을 권리가 있는 음식을 안 주고 그 음식값으로 형의 출생권을 사게 된다. 필경 에소는 농담조로 생각하고 형이 된 출생권을 팔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야곱은 노력이나 희생이 전혀 없이 귀중한 형의 권리를 탈취하게 되었다는 그리스도교적 교훈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눈먼 아버지 이삭을 속여 에소로 변장을 하고,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일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여 형 대신에 축복을 받았다. 이것은 완전히 교활한 사기행위였다. 그러나 성경은 야곱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었다. 여기서 크리스천들이 교훈을 받지 않는다면 성경에 이 글을 넣은 목적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따라서 성경을 믿는 사람은 야곱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창세기 34장에는 야곱의 딸 디나가 가나안 땅의 추장 세켐(Shechem)에게 강간을 당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세켐은 자기 아버지 하몰과 함께 야곱을 찾아와 결혼승낙을 청하면서, 종족은 다르지만 서로 화목하게 살면서 서로의 딸과 아들들이 혼인하도록 하자는 관대한 제의를 했다. 현대의 도덕관념으로는 백 번 정당한 이야기이다. 그 때는 가나안이란 지방의 원주민은 히위족인 세켐의 사람들이었고, 외지에서 들어온 이방인의 입장에 있던 야곱의 식구들은 이러한 제의를 고맙게 생각해야 했을 터인데, 야곱의 아들들은 오히려 자기네의 풍습인 할례를 히위족들이 모두 따라야 한다는 무리한 요구를 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세켐 부자들은 이것도 승낙하였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은 세켐의 사람들을 안심시켜 놓고 급습하여 아무 관계도 없는 히위 원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이는 완전한 배반행위였고,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였으며, 우리의 상식으로는 천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벌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앞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독일인이나 아랍인 따위 수백, 수천만 명을 산 채로 학살해도 좋다는 하나님의 교훈이라고 보아야 할 것 아닌가? 히위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 따르는 할례제도도 따르겠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닥치는 대로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을 다만 히위 민족이라고 죽여 버렸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겠다고 교인이 되었다 한들, 제아무리 크리스천이라고 한들, 이스라엘 유대 민족이 와서 약탈하고 학살하여 내쫓아도 하나님은 거들떠도 안 보고 그들만 축복해 줄 것이라는 결론이 아닌가?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땅을 몽땅 빼앗고, 한국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내 형제자매들을 다만 한국 사람이란 이유로 학살했을 때도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그 유대인만 축복하는 하나님을 숭배할 것인가?
결론
위에서 대강 성경에 소개한 성서적 도덕관념에 해당하는 예문들을 몇몇 살펴보았다. 그리고 참고로 다른 몇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우선 미국 오리건 주에 있는 리버럴 대학(Liberal University)의 총장으로 있었고 사회학, 특히 윤리가 전공분야였던 웨이크먼(T.B. Wakeman) 씨는 “성경 속에는 ‘도덕’이라는 단어나 도덕이란 관념은 존재도 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도덕을 찾는다는 것은 마치 가장 밑바닥에 깔린 원래의 지층 속에서 사람 뼈를 찾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 하였으며, 19세기 말 미국속세연합(the American Secular Union)의 회장을 오래 했으며 당시 가장 유명했던 자유사상가인 렘스버그(John E. Remsburg)는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악과 범죄를 타당한 것으로 여긴 책이 바로 성경이라고 정의하였다. 성경에서 당연시하고 정당화하는 조목을 그는 아래와 같이 열거하였다.
?? 거짓말과 속임수(lying and deception)
?? 사기(cheating)
?? 도둑질과 강도질(theft and robbery)
?? 살인(murder)
?? 침략전쟁(wars of conquest)
?? 인간제물 봉헌(human sacrifices)
?? 사람고기 먹기(cannibalism)
?? 마술(魔術-witchcraft)
?? 노예제도(slavery)
?? 일부다처주의(polygamy)
?? 간통과 매음(賣淫)(adultery and prostitution)
?? 외설(猥褻-obscenity)
?? 방종(放縱-intemperance)
?? 부랑패류(浮浪悖類-vagrance)
?? 몰지각(沒知覺-ignorance)
?? 여자에 대한 부당한 행위(injustice to woman)
?? 어린이에 대한 몰인정(unkindness to children)
?? 동물에 대한 잔인성(cruelty to animals)
?? 포악한 학정(tyranny)
?? 무자비(無慈悲)와 박해(intolerance and persecution)
여기 열거한 조목 이외에 다른 나쁜 일이 또 무엇이 있을까? 마치 성경은 나쁜 짓의 사전처럼 보인다. 그는 계속하여 설명하였다. 대부분의 성경은 2천 년 전 또는 그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거친 인간사를 적은 책이라 할 수 있다. 그 안에는 옳고 그른 원칙에 대하서는 어느 정도 기술되어 있으나, 자세한 도리(道理)의 내용에 들어가서는 황막해진다. 그들은 무지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현재 역시도 무지한 사람들이 종교에 빠져 열심히 믿게 되고, 그래서 광신자가 된 이들은 거의 부도덕한 사람이 된다. 유대 민족은 하나님의 괴상한 기호(嗜好)에 의하여 선택된 민족이라고 믿고 있으며, 바로 이러한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강도질이나 사기, 살인 따위를 비롯하여 타민족을 노예화시키는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믿게 만든 것이다. 사람의 무지(無知)와 신앙(信仰), 주로 이 두 가지 중요한 이유로 사람들은 부도덕스런 행위를 거침없이 자행하게 되고, 영적인 안내자라 하는 그들의 예언자나 성직자들의 몰상식한 의견이 그들이 쓴 책에 그대로 표현되는 것이다. 악(惡)과 범죄(犯罪)를 다룬 성경의 내용을 보면 대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악과 범죄적 행위를 저주하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마땅히 추천하고 칭찬할 일이다.
2. 사람들이 악과 범죄를 저지르는 대목이 많이 나온다. 이에 대하여는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로 취급하여 잘했다, 못했다는 평가 없이 그저 서술만 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성경은 그 가치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3. 성경에서 악과 범죄를 행하도록 권장하고 인도한 내용은 무수하게 많다. 이러한 내용만으로도 성경은 인간에게 도덕을 제시하는 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충분한 이유가 서는 것이다.
참 고 서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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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AD POPES: E.R. Cham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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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HOPS VS. THE POPE: Rev. Charles E. Cough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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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TANNICA ENCYCLOPA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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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FE AND TIMES OF COTTON MATHER: Kenneth Silve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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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NCARNATION - The Missing Link in Christianity: Elizabeth Clare Prophet.
THE RETURN OF THE GODS: Erich von Daniken.
A REVIEW OF HISTORICAL JESUS CHRIST AND EARLY CHRISTIANITY: G.C.H. Nullens.
THE SECOND MESSIAH: Christopher Knight & Robert Lomas.
THE SECOND TREATISE OF THE GREAT SETH: translated by Roger A. Bullard and Joseph A. Gibbons.
SECRET TEACHINGS OF JESUS - Four Gnostic Gospels: Marvin W. Me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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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T OLD-TIME RELIGION: editied by Jordan Maxwell.
TRANSFORMATIONS OF MYTH THROUGH TIME: Joseph Campbell.
THE TREATISE ON THE RESSURECTION: translated by Malcolm L. Peel.
THE VIRGIN BIRTH AND CHILDHOOD MYSTERIES OF JESUS: James Still.
WOMEN'S ENCYCLOPAEDIA OF MYTHS AND SECRETS: Barbara G. Walker.
ZERO - The Biography of a Dangerous Idea: Charles Se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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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텐돔 안의 교회들
예루살렘의 사도들 The Apoastolic Church
로마제국 Roman Empire
아르메니아 왕국 Kingdom of Armenia
로 마 Rome
안티오크 Antioch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와 가톨릭교 Armenians Apostolic and Catholic
로마 가톨릭교 Roman Catholic Church
시리아-안티오크 가톨릭교와 정교회 Syrian Antiochene Catholic and orthodox
마로나이트 가톨릭 Maronites Catholic
말란카리스 인도 가톨릭교와 정교회 Malankarese India Catholic and Orthodox
멜키테
(안티오크계로 시작하여 현재 비잔틴 제식을 따르고 있음) Melkites
콥트 가톨릭교와 정교회 Copts Catholic and Orthodox
에티오피아 가톨릭교와 정교회 Ethiopians Catholic and Orthodox
페르시아제국 Persian Empire
셀루시아 테시폰 Seleucia Ctesiphon
동방교회 사도 가루디아 가톨릭교 Church of the East
Apostolic Chaldeans Catholic 말라바리스 인도 가톨릭교
Malabarese India Catholic 카파도시아 영향 카파도시아 및 시리아 영향
콘스탄티노플 -
- 4세기 로마 수도 비잔틴 교회, 가톨릭 교회
및 정교회 희랍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루테니아 가톨릭교 유크라이나 가톨릭 교회
및 정교회 멜키테 가톨릭 교회
및 정교회 로마니아 가톨릭 교회
및 정교회 비엘로러시아 가톨릭 교회 및 정교회 세르비아 정교회 불가리아 정교회 기 타
콥트 가톨릭교와 정교회
Copts Catholic and Orthodox
에티오피아 가톨릭교와 정교회
Ethiopians Catholic
and Orthodox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근원
아브라함 모 세 예 수 모하메드
이 삭 야 곱 이시마엘 케 다 다 윗 에 서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부인 사라) (이집트인 부인 하가) (이스라엘의 열 두 아들-부족) (레위의 후손) (유다의 후손)
~ 1850 B.C. ~ 1300 B.C. ~ 600 A.D.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근원
드리는 말씀
대강 몇 가지 제목을 추려 보았습니다. 책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는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즐겁게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본 스크립트를 숙고하신 결과 출판을 거절하실 경우 하기 주소로 반송해 주시기 바랍니다.
Nuri Tzoweh (최 누리)
28-1445 Craigflower Rd., Victoria, B.C. Canada V9A 7C4
Tel. 0011-250-360-0649 Fax. 0011-250-360-1864
E-mail nurit@pacificcoast.net
● 제목을 우선 “교회에서 쉬쉬하는 그리스도교의 근본 개념”이라
● 내용은 그리스도교가 태어난 근원, 즉 당시의 사회상, 토속종교, 유대인들 의 입장,
다시 말해서 “Zoroasta"같은 그리스도교와 이론이 거의 동일한 그리스도교 이전의 종교,
이미 존재하고 있던 다른 토속 신앙의 영향,
예를 들면 뱀과 사탄, 일요일, 세례, 지팡이와 막대, 부활절, 태양신과 불, 사탄, 사과, Adam과 Eve 등등
● 예수에 관한 분석, 즉 생일과 크리스마스 ; 고향이 나사렛 었는가 ; 결혼했는가 ; 자식이 있는가 ; 진짜로 십자가에 못박혔는가 ; 성모 마리아는 정말로 처녀? ; 예수의 아버지는 요셉 ?
● 삼위일체 교리가 어떻게 해서 생겼나 ;
그리스도교의 단성론 종파와 변천사, 교리의 분쟁사, 그리스도교의 환생론
● Gnosis 와 Essenees 사상 ; 예수의 시체가 안장되었다는 Rennes-le-Chateau ; 예수 가족의 뒷 이야기
● 성경의 역사 - 어떻게 성경이 만들어 졌나 ? ; 낙 하마디, 사해의 문서 ; 베드로 복음서 ; 도마 복음서 ; 도마의 비밀복음서 ; 등등
● 교황에 대한 추문이랄가
● 십자군 ; 마녀사냥 ; Chathar / Gnosis파 토벌작전
● 그리스도교의 도덕관념
p 18
이것은 크리스천이라는 것이 생기기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그림이고 믿음이다. 아니, 이집트가 생기기도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미리 배웠단 말인가? 아니면 크리스천들이 이 사람들에게서 배웠다고 해야 옳을까?
p43
하나님의 후손인 한국인들은 모두 함께 생각해 볼 일이라 생각한다.
p50
에세네(Essenes)라는 말 자체가 희랍어로 병을 고치는 사람이란 뜻의 ‘엣세노이(essenoi)’라는 말에서 지어진 것이며, 이 말은 예수를 위시하여 에세네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로 같은 뜻의 ‘아사야(asayya)’라는 말이 희랍어로 번역되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풀이를 하고 있다.
p68
“신과 동격인 내가 허락한 자이고, 내가 허락을 받은 자이고, 그것이 바로 나 장본인이요. 그것은 나의 아버지가 자기의 소유물을 나에게 준 것이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은 예수가 살로메의 침실에서 주고받은 대화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왜 예수는 여자 혼자 있는 살로메의 방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예수가 성공하여 정말로 유대인의 왕이 되어 헤롯 왕의 용상에 대신 앉았다면 예수의 부인은 과연 몇 명이나 되었을까?
p137
거리에 있는 자연 요새를 방패로 하여 반항하는 미세한 조직 몇 개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마사다’와 비슷한 ‘몽세거(Monts?gur)’라는 자연 요새로 마치 수많은 산봉우리 중에 우뚝 솟은 범주와 같이 생긴 곳에서 10개월 동안 수없이 거듭된 공격에 버티고 있었던 것이 ‘카타르’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몽세거’는 1244년 3월에 함락되었고 이것으로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카타르’라는 것이 남부 프랑스에서 존재하는 것이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라두리(Emmanuel Le Roy Ladurie)라는 사람은 ‘몽세거’가 함락된 지 반세기 후에 생존한 ’카타르‘를 찾아 수집한 여러 가지 책을 종합하여 그들의 연대기와 활동 등을 묘사한 ‘몽테일루(Montaillou)’라는 책은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였다. 그러나 토벌 작전이 끝난 후에도 살아 남은 ‘카타르’는 극도로 작은 숫자이지만, 자기들의 교리를 지키면서 동굴 속에서 살면서 산발적이지만 얼마 동안 게릴라전을 계속하였고, ‘레네-르-샤토(Rennes-le-Ch?teau)’같은 곳을 기반으로 하여 비밀히 ‘카타르’의 신앙을 꾸준히 지켜 왔다. 그리하여 많은 학자들이 ‘카타르’의 사상을 추적하여 그로부터 분파한 가지들을 찾아 많은 글을 썼다. 즉, ‘발덴시안(Waldensians)’, ‘훗사이트(Hussites)’, ‘아담마이트(Adamites)’, ‘자유정신의 형제들(Brethren of the Free Spirit)’, ‘아나밥티스트(Anabaptists)’, ‘카미사아드(Camisards)’ 등을 열거할 수 있으며, 이들은 영국에도 피란 와서 18세기 초 런던에 많은 지파가 있었던 기록이 있다.
p146
사실을 이해한다는 것에 무리가 있을 줄 믿는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많은 기본적인 예비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믿어지며, 그 설명을 하자면 책 한 권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이런 말이 믿어지지 않는 독자가 있다면, 관대한 마음으로 하나의 가설로 우선 받아주기 바란다.
End-
그리스도교의 도덕관념은 사랑이 그 으뜸 되는 정신이라고 한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십계명에는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훔치지 말고, 거짓증언하지 말고, 남의 부인이나 재물을 탐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러한 율법을 바탕으로 형성된 서양의 도덕관념을 우리는 소위 ‘유대-그리스도교 도덕관념(Judeo-Christian morality)’이라 부르고 있다. 중세기에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세계통일 꿈이 최소한 유럽에서는 거의 달성되었었다. 그리고 지금도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세력은 (최소한 표면상으로는) 역시 ‘유대-그리스도교’의 도덕관념이다. 한국도 옛날 공자의 삼강오륜(三綱五倫) 등 유교사상이 도덕의 밑거름이 되었으나, 근세에 들어와 그리스도교가 큰 세력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한국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과거 우리 조상이 거울로 삼아 왔던 유교의 도덕관념은 마치 얻어 온 자식 같은 대접을 받는 정도로 물러선 기분이 든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의 도덕관념은 회교도 국가를 제외한 전세계의 물결을 타고 있고, 세계화를 지향하는 한국사회에 지상(地上)의 세력이라 할 ‘유대-그리스도교’의 종교관을 선두로 하여 정치·경제를 무기로 한 막강한 문화적 세력으로 한국을 덮치고 있고, 한국의 사회인들은 이에 도취되어 미친 듯 받아들여 변천되어 가고 있는 것이 현재의 실상이 아닌가 한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은 도덕관념이 없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할 정도가 되었다. 이런 이야기는 필자 자신이 여러 번 들어온 이야기이다. 크리스천들은 그들의 도덕만이 완전하다고 믿으며, 크리스천이 되면 도덕적인 사람으로 변한다고 믿는 듯하다. 필자와 가까운 한 친구 부부는 부인이 집사이고 본인은 장로인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그렇게 친한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필자가 교회에 다니지 않기 때문에 신용할 수가 없어 속말을 할 수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항상 주도권 때문에 바람 잘 날이 없이 싸움질하는 교인집단의 일원이 오히려 나보고 신용할 수 없다니 기가 찬 일이라 생각하고 일소에 부친 일이 있었다. 필자는 이런 일을 여러 번 당했다. 또 친지 중에 필자가 기독교인이라면 참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는지, 전도하다 실패하고 나서 교회에 안 나간다고 화를 낸 친지도 여럿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회에 나가자고 한다. 기독교인들이 자부하는 도덕관념은 보통 이런 정도라고 믿어진다. 그래서 크리스천의 도덕이 어디에서 왔으며 그 바탕이 무엇인가 고찰해 보는 것은 몹시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되어 한 번 따져 보기로 했다. 크리스천의 도덕이라 하는 근본관념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나는 마땅히 성경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만일 크리스천의 경전에서 도덕의 지침을 찾을 수 없다면 크리스천의 것이 아니며, 크리스천들이 내세울 도덕관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대강 찾아본 결론을 아래에 열거해 본다.
살상을 즐기고 원하는 하나님
창세기 22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죽여 번제로 바치라 하였다. 번제라는 것은 레위기 1장에 설명하기를 흠 없는 수컷 또는 남자를, 그러니까 어린아이를 죽여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가죽껍질을 벗겨 버리고 난 다음 토막을 내어 그 고기를 구어 몽땅 제단에 바치는 것이다. 번제를 바치는 자세한 절차는 레위기 4장 7~34절에 나와 있고, 또 출애굽기 30장 28절, 역대상 16장 40절에 번제 이야기가 나오며, 창세기 8장 21절에는 하나님이 그 기분 좋은 냄새를 맡는다 하였다. 그 냄새가 기분이 좋으니 즐겼다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신약의 히브리서 9장 11~14절에 흠 없는 예수가 자진 희생물로 바쳤으니 사람들은 염소나 황소보다 훨씬 더 값진 희생물을 바쳐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계속하여 26절까지 설명하기를 거의 모든 것을 피를 뿌려 깨끗하게 해야 된다고 하면서, 피를 흘리지 않고는 용서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용서를 받으려면 죽여야 된다는 것이며, 짐승보다는 더욱 귀중한 생명을 가진 사람을 죽이는 것이 더욱 큰 가치가 있다고 설명한 것이다.
우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장 중요한 이삭을 죽여 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은, 살인을 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내린 하나님으로서 아무리 시험을 한 것뿐이라지만 너무 잔인한 처사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또 이 말을 듣고 실행에 옮기려 했던 아브라함은 실제로 죽이지는 않았지만, 천사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죽였을 것 아닌가? 문제는 아브라함이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하나님이 하라 했다고 실천에 옮기는 그의 정신상태이다. 왜 그가 실천에 옮기려 했는가는 그 당시의 풍습이나 사회조건으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생각 않고 일을 진행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란 존체는 피를 좋아하고 죽은 시체가 불에 타는 냄새를 좋아한다 하였으며, 그런 것을 보아야만 용서를 해 준다고 하였다. 그러니 예루살렘을 빼앗겠다고 쳐들어간 십자군들이 적군의 시체를 통돼지 굽듯 불에 굽고 내장을 꺼내 구어 먹은 것은 어쩌면 크리스천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더 비약시키면 재미있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북미에서도 종종 연쇄살인범이 살인동기를 진술할 때 신(神)이 시켜서 했다고 하곤 한다. 대개 이렇게 말하는 살인범들은 정신상태감정을 받아 본의가 아니라는 판단으로 형이 가벼워지든가, 형무소 대신 병원으로 가게 된다. 이렇게 논리를 전개시키면 필경 크리스천들은 그것은 그 때의 일이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줄 안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이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하나님이 각각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고 본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그 때나 지금이나 미래에도 같은 하나님일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진리이고 전지전능하며, 진리는 시간과 공간에 상관 없이 불변이라는 논리를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잔인한 하나님
모세의 출애굽 때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 군대의 추격을 받았다 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 군인들을 홍해의 갈라진 물 속으로 유인하여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수장을 해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전지전능하다는 하나님은 여러 가지 기적 같은 일을 이집트인들 앞에서 보였다. 그렇다면 이집트 군대의 생명에 관계없이, 즉 예를 들면 잠시 그들의 눈을 멀게 한다든가, 구름의 장막으로 앞을 볼 수 없게 한다든가, 신기루처럼 이집트 군대에게 거짓 이스라엘 군상을 보여 주어 마치 그들이 다른 쪽으로 가는 것처럼 만들어 엉뚱한 곳으로 인도하는 방법 또는 사무엘상 19장 24절에 다윗을 죽이러 온 사울 왕을 벌거벗겨 놓고 예언을 하도록 만들었던 것처럼 하여 얼마든지 인명에 해를 끼치지 않고 하나님의 위력을 과시하여 모세의 일행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집트인들이 자신을 신봉하도록 그들 눈앞에서 기적을 행하여 자기가 진정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인자하다는 하나님은 이집트 군인들을 한 명도 예외 없이 깡그리 죽여 버렸다. 지금 사람들은 미국이 원자탄을 1945년 8월에 일본에 떨어뜨려 무고한 민간인을 그렇게 많이 죽인 것이 필요에 의한 것이었냐는 질책을 하고 있다. 1945년 봄에 일본은 이미 무조건 항복의 의사를 미국에 전했지만, 미국은 이를 거절하고 계속 전쟁을 한 일도 있었다. 그것은 미국이 단순히 준비된 원자탄을 사용해 보고 싶은 심정으로 항복도 수락 않고 일본에 투하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고의적으로 필요 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인륜에 대한 범죄라 한다면, 하나님도 인륜에 대한 범죄자라고 재판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크리스천의 세계는 이스라엘 민족인 유대인을 죽인 독일 나치는 인륜에 대한 범죄로 천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무기를 개발해 놓고 한 번 실제로 실험해 보기 위한 호기심으로 수십만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미국 사람이나, 중국의 남경(南京) 같은 곳에서 역시 수십만의 죄 없는 인명을 학살한 일본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떳떳하다고 보아서 힘있는 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일까?
또 다윗은 사울 왕의 사위가 되기 위한 값으로 블레셋 남자의 포피(包皮-foreskins, 註: 한글 NIV 성경에는 양피, 즉 양의 가죽이라고 단어를 바꾸어 번역하였음, 사무엘상 18장 24~27절) 1백 개를 얻기 위해 블레셋 남자를 그 두 배인 2백 명이나 죽이고, 그들의 자지를 모두 잘라 사울 왕에게 바쳤다. 성경은 블레셋 사람들의 생명은 전혀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기고, 다윗의 용맹만 칭찬한 것 같다. 필경 이 대목을 읽는 크리스천들은 다윗의 용맹에만 관심이 있고 무고한 블레셋 사람들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으리라. 때문에 유대인들이 아랍 사람들을 아무리 죽여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잘한 일로 칭찬받을 일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현재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개죽음은 관심사가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 죽는 일에만 분한 열을 올리는 것인가? 또한 테러에 희생된 미국인만이 참사람이고,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죽어가는 아프간의 민간인 희생자들은 죽어 마땅한 인간들인가?
그리고 민수기 31장 13~18절을 보자. 모세는 하나님이 지시한 대로 미디안 사람들을 벌주기 위하여 산하의 1만 2천 명의 군대로 미디안을 침공하도록 명령하였다. 군사작전은 대성공하여 미디안의 왕을 다섯이나 죽이고 남자란 남자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였으며, 대단한 전리품을 잔뜩 갖고 돌아왔다. 그러나 모세는 수하 장군들이 여자들은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대노하였다. 모세는 명령하기를 다음부터는 숫처녀는 죽이지 말고 너희들이 갖고 남자 맛을 본 여자들은 모두 죽이라고 하였다. 요즈음 유고슬로비아의 대통령 밀로세비치(Slovodan Milosevic)를 ‘인륜에 대한 범죄’란 죄목으로 전범재판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밀로세비치는 십계명이라고 부르는 세상에서 가장 으뜸 되는 도덕경을 소개했다는 모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너무나 인도주의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하나님이 돌보고 선택했다는 이스라엘과 유대 민족은 가장 하나님의 마음을 잘 헤아려 전 인류의 모범을 보였어야 그리스도교의 가치관이 돋보이고 존경하여 따를 가치가 있게 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성경을 뒤져보면 이들 유대 민족과 크리스천의 적대관계에 있는 쪽에서는 오히려 전쟁에서 이들을 필요 이상 죽이지 않고 포로로 삼았다. 그러나 다윗 같은 하나님의 가장 모범적인 인간모델이나 십자군 등등 하나님의 종도(宗徒)들은 자산이 될 가치가 있는 가축은 살렸어도 인간이라는 것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여 버리는 일을 항상 계속하고 있었다. 그것도 피해자의 입장에서 침략을 당했을 때 원한으로 그런 것이 아니고, 가만히 있고 평화롭게 잘 사는 옆 나라에 쳐들어가 이런 극에 달하는 잔인성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사무엘상 27장, 30장 등을 읽어 보면 잘 설명되어 있다. 과연 크리스천들이 섬기는 그 하나님의 종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런 행동을 계속 반복하는 것일까? 이러한 배경을 볼 때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크리스천이 평화를 사랑했는가, 아니면 크리스천들이 악마이며 지옥에나 갈 사람들이라고 하는 크리스천의 적이 평화를 사랑했는가를 성경 속에서 증거를 찾아 비교해 보기 바란다.
약탈(掠奪)을 지시하는 하나님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근에 굶주렸을 때 따뜻하게 받아 주고 땅까지 주어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던 이집트는 은혜의 나라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은혜를 고마워했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나중에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성경에서의 기록이다. 이를 기정사실(역사적으로는 그런 기록이 없다 하지만)로 해도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죽이지는 않았다. 이에 대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인들에게 치른 대가는 어떠했는가? 또 이들은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미국의 부자나 옛날 한국의 양반들이 갖고 있던 개인적인 노예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연인으로 남의 나라인 이집트에서 동등한 자격으로 살아오던 도중, 새로 왕이 된 파라오의 결정으로 공사감독을 두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라오의 곡식을 저장해 둘 도성 비돔(Pithom)과 라암셋(Ramses)을 짓도록 강제노동(출애굽기 1장 11절)을 시켰다고 하였다. 이 사람들은 이집트 사람들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한 집에서 농토도 갖고 있었고 가축도 갖고 있었으며 자유로이 자기 자산을 처리할 수 있는 처지에 있었으니(출애굽기 10장 26절, 12장 5~7절), 노예였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표현으로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전 이집트에 사는 모든 가정의 첫번째 아들자식을 죽일 것이라고 경고를 할 때, 이집트 사람들과 구별을 할 수 없었기에 특정한 제사의 절차를 따라 죽인 양의 피를 문지방에 바르면 그 표적으로 그 집에는 사람을 죽이러 들어가지 않겠다고(출애굽기 12장 13절)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갈했던 것이다. 또 출애굽기 3장 22절을 보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인들은 저마다 이웃 여인과 자기 집에 사는 여인에게서 은붙이와 금붙이와 옷을 얻어 낼 것이고 너희는 그것으로 아들과 딸들을 치장하리라. 이렇게 너희는 이집트를 털리라.” 여기서 이웃 여인과 집에 사는 여인이라는 것은 이집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노예라면 어떻게 이집트 사람들과 섞여 살고 있었는가? 더군다나 노예집 안에서 이집트 여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필경 노예라는 유대인들이 이집트 여인을 하녀로 집에 고용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소리로 들린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노예는 사실상 우리가 생각하는 노예가 아니라는 증거이며, 살림살이도 이집트인 못지않게 잘 살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결국 현재 한국의 청년들이 나이가 되면 강제로 군대에 나가 나라를 위한다는 구실로 일정 기간 노동을 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비슷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리고 현재 크리스천화된 한국이란 나라가 옛날 이집트 왕처럼 현명한 사람이라고 외국 사람을 재상이나 총리로 시킬 만한 아량이 과연 있을 것인가? 요셉 덕분에 굶어 죽지 않고 이집트에 와서 살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에 천만번 고맙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들이 떠날 때에는 이집트 사람들에게서 공갈·협박으로 금과 은을 약탈해(출애굽기 11장 2절) 갔다. 영어로 ‘plunder’ 또는 ‘spoil’, 즉 약탈하고 이집트를 망친다는 말을 사용하였으며, 우리말로 ‘턴다’는 것은 강도나 도둑이 재물을 약탈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시키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주선으로 먼 길을 떠날 것이니 노자를 마련하기 위해 그리 약탈하도록 해 주었다는 사연이다. 그러나 금과 은을 팔고 그 돈으로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마련하지 않는 한 쇠붙이가 어떻게 노자에 보탬이 된다고 하나님은 약탈을 하도록 만들었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빼앗은 금은보화로 자기네 자식들을 치장했다고 했다. 이것은 피난길에 노자로 쓰라고 한 것이 아니다. 다만 금이나 은이 귀중하고 값비싼 물건이기에 이스라엘 민족이 부자가 되고 이집트인들이 가난해지라고 약탈을 하나님이 시킨 것이다. 그래서 이 금의 일부를 거출하여 시내 산 밑에서 아론과 함께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 아닌가? 물론 하나님은 이렇게 노획한 금은이 어떻게 쓰여질 것인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자기가 선택한 인민에게 깡패나 날강도의 행실을 가르쳐 준 것이다. 그런데 후에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받았다는 십계명에는 약탈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 두 가지 하나님의 언행을 비교해 보면, 분명 약탈이나 겁탈 같은 것을 하지 말라는 내용은 자기네끼리 하지 말라는 것이지 다른 민족에게는 얼마든지 하라는 설명으로밖에 해설할 길이 없다.
전쟁을 위해 세상에 온 예수
앞의 다른 장에서도 잠깐 소개했듯이 마태복음 10장 34절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라고 한 구절이나, 누가복음 22장 36절에 검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 한 것을 참고해 보자. 예수가 잡혀갈 때 시몬 베드로는 검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그 검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점만 보아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는 것보다 로마 치하에서 유대 민족의 독립을 취하려 했던 혁명투사였다는 논리가 더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성경을 만든 사람들이 어쩌다 위와 같은 문구를 삭제하는 일을 게을리 했나 생각해 본다. 이런 문구가 성경에 남아 있다는 것 자체는 다만 실수로 보이기 때문이고, 이 때문에 성경을 지상(至上)의 책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설명하기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아는 함석헌 선생의 풀이를 한 번 음미해 보자. 그는 “이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이란 의미가 아니다. 이는 무기를 사용한다는 뜻이 아니고 생각의 논쟁을 한다는 뜻이다. 예수는 원칙적으로 평화를 사랑하였다. 우리가 성경을 똑바로 이해한다면 예수가 완력을 사용하는 일을 권장한 적이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예수가 잡혀갈 때 그와 함께 있던 베드로는 그를 잡으러 온 산헤드린(공회) 소속의 한 경찰관을 내리쳐 그의 귀를 자른 내용이 마태복음 26장 51절에 명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예수와 함께 있던 베드로만 검을 갖고 있었을까? 필경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은 거의 모두가 칼을 갖고 있었고, 다만 베드로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예수가 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고 한 것은 상징적이 아니고 실제로 칼을 사서 몸에 지니고 다니라는 말이 틀림없다. 만일 예수가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했고 상징적인 검을 가지라고 가르쳤다면 우선 그의 가장 신임하는 제자인 베드로가 칼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되며, 필경 개인 의사로 칼을 갖고 있다가 예수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사용한 것을 보았을 때 호되게 나무랐어야 옳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전혀 없다. 물론 판단은 각자의 양식에 달려 있는 일이다. 앞의 ‘예수의 과업은 과연 무엇이었는가?’의 장을 다시 음미해 보기 바란다.
원주민을 쫓아내는 불공평한 하나님과 이상한 이치의 하나님
모세가 지휘하여 이집트를 떠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기름진 땅을 주기 위해 하나님은 가나안에서 이미 오랫동안 정착하여 살던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의 자식들인 가나안 사람, 헷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 사람, 여부스 사람들을 쫓아 내몰았다. 이 사람들의 조상인 함은 자기 아버지 노아가 술에 취해 나체가 되어 잠자는 것을 목격하고 다른 형제들에게 이를 알린 죄로 대대손손 두 형제의 노예가 되었다 한다. 이브와 아담이 사과를 먹었다는 죄로 인류가 영원히 원죄를 졌다는 것도 이상한 이야기이지만,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왜 벌거벗었는지 그 망령된 행동은 탓하지 않고, 어쩌다 방에 들어가 아버지가 벗은 채로 잠자는 것을 본 것이 그렇게도 큰 죄가 된다는 논리는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 자체가 납득이 안 가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성기를 다른 남자에게 보인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창세기 24장 2절에는 ‘환도뼈’라는 말이 나온다. 어떤 성경은 사타구니(thigh)에 손을 넣으라고도 되어 있기도 하다. 이것은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들이 새로 만들어진 도덕관념으로 정확한 말을 피해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표현은 셰익스피어도 마찬가지로 사용하였다. 즉, 자지를 환도뼈라고 말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큰 맹세를 하게 되면 굳은 약속을 한다는 뜻으로 상대방의 자지를 잡고 요즈음 사람들 악수하는 식으로 흔드는 것이 풍습이었다. 여신(女神)이 으뜸이었던 사회에서는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여자의 상징인 보지(yoni)를 섬겼고, 남신(男神)을 섬기던 유대인 사회에서는 남자를 상징하는 자지(phallus)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약속을 할 때에는 맹세의 뜻으로 상대의 자지를 잡고 흔들게 되었고,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이 아브라함에게 맹세한다는 뜻으로 환도뼈에 손을 넣었다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의 분신인 아들에게 하체를 보였다는 일이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되는 일이련만, 일을 그렇게 꾸민 것이다. 참고로 사무엘상 7장 4절에 바알과 아스다롯이란 말이 나오는데, 바알(Baal)은 남근상(男根像)을 말하고 아스다롯(Ashtoreth)은 여근상(女根像)을 말한다. 그리고 민수기 25장 1~3절에는 여자들은 바알을 갖고, 남자들은 아스다롯을 갖고 음행했다는 이야기도 나오며, 물론 다른 장에서도 많이 소개된다. 이것은 고대 유대인들이 남녀 성기를 모두 숭배했었다는 증거인 것이다. 여하튼 이렇게 엄격한 면을 보여 준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였다. 이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많이 하나님을 배반했는가 따져 보기 바란다.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은 여러 차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를 숭앙하지 않고 다른 우상을 섬긴다든가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다. 유명한 아론은 하나님의 제사를 집전하는 대제사장으로, 모세가 산에 올라간 사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그래도 이 사람은 벌은커녕 계속 제사장 노릇을 하도록 하나님은 관대했다. 아론이 하나님에게 진 죄를 우연히 아버지의 나체를 본 것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그들은 매번 용서를 받았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몹시도 인자했고 도에 넘치게 참을성이 많았다. 이런 점으로 보아 어쩌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하나님이지 한국인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며, 이스라엘 사람을 위해 한국 민족을 망치고, 유대인의 노예로 삼으려는 하나님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였다 해서 오랫동안 크리스천에게 박해를 받아 왔다. 이것은 사람이 박해한 것이지 하나님이 박해한 것은 아니다. 성경에도 종종 유대인들은 하나님에게 벌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어찌했든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고, 결국 하나님은 그들만의 이익을 보살펴 준 것이 성경에 소개되었다. 필경 이런 논쟁은 크리스천의 안목에서 볼 때에는 인간의 판단능력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니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할 것이 뻔하다. 그러나 성경 속에 나오는 인간들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내용은 그 사람들 자체의 판단력을 갖고 하나님과 말을 주고받았으며, 하나님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와 하나님의 대화만 읽어 보아도 모세가 이성과 판단력을 갖고 하나님에게 질문하고 요구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유여하를 물론하고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각자 개인의 하나님으로 삼을지 말지 하는 판가름에서 무조건 믿어라 하는 것은 어패가 있어 보인다.
과거 신분이 노예였든 아니든 하나님이 가나안에 살던 사람들을 인간으로 취급을 했다면 삶의 터전을 빼앗고 미지의 땅으로 내쫓은 것은,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2천 년 가까이 살고 있던 원주민을 쫓고 제 땅이라고 총칼로 차지한 오늘의 이스라엘 형편과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이 예전에 했던 일을 또다시 반복하는 처참한 행위가 아닌가 한다. 만약 이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크리스천이 있다면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라. 만약 수백 년 동안 일본에 살던 한 부족이 백제의 후손이라면서, 신라 때문에 오랫동안 타향살이를 했으나 이제는 자기네 땅이 필요하다며 경상도에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던 사람들을 무조건 총칼의 힘으로 쫓아내거나 학살해 버리고, 경상도 사람들이 경기도나 강원도에서 피난살이를 하게 되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니 정당하다고 할 것인가? 물론 얼토당토않고 가능성 없는 예라고 일소에 부칠 수 있겠지만, 옛날 가나안에 살던 사람들이 모세가 데리고 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땅을 빼앗긴 일이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난데없이 나타난 유대인들에게 땅을 빼앗긴 것도 모두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처럼 좋은 하나님이 다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쫓겨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악마의 하나님이지, 어떻게 이런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 생각할 수 있다고 크리스천들은 생각하는가? 남의 재산을 탐내지 말고 훔치지 말라는 하나님이 왜 이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몽땅 빼앗아 버리는가? 이것은 조금 훔치거나 탐내는 정도를 훨씬 초과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일 뿐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가?
그리고 출애굽기에는 노예관리에 대한 자세한 율법을 설명하였다. 노예라는 존재는 역사상 세계 각지에 있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것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노예라는 것이 세계 각지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귀 익게 알려진 노예 이야기는 미국 남부의 노예 이야기이고, 그 때문에 미국에서 남북이 갈라져 전쟁까지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틀림없이 남부에서는 노예제도를 계속하려 했다. 그런데 그 노예제도의 정당성을 가장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던 무리가 바로 미국에서 가장 큰 종파인 남침례교라는 개신교였다. 이들이 노예제도의 정당성을 주장했던 근원은 무엇이었는가라고 질문한다면, 바로 성경이었다는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모두 잘 아는 일이다. 반면에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적 근원은 무엇이었는가? 물론 그것도 성경이다.
1994년 봄 르완다의 후투(Hutu) 민족은 불과 한 달여 만에 약 80만 명의 툿시(Tutsi)인들을 만도(蠻刀, machete)로 도살하였다. 이때 국영방송 RTLM은 시민들은 모두 적극 참여하여 한 명이라도 더 툿시족 사람을 잡아죽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항상 정의의 편에 서며 그 하나님은 드디어 툿시에게 격하여 후투를 돕고 있으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툿시를 죽이라고 홍보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라는 예는 역사적으로 무궁무진하게 많은 이야기이다. 2차 대전 때 독일군이나 미·영 제국도 마찬가지로 모두 십자가를 섬기면서 싸웠고, 코소보에서도, 사라예보에서도 모두 같은 하나님을 앞세우고 서로 사람을 죽였다.
하나님은 공평하지도 못한 것 같다. 예를 들자면 한이 없는 일이겠지만,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다윗과 솔로몬이다. 다윗은 용맹하기로 유명했고, 솔로몬은 현명하기로 유명했다. 이 두 사람은 물론 하나님이 유대 민족의 지도자로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 모두에게 용맹과 지식을 함께 주어 동등한 위인으로 만들어 주었다면 더욱 이상적이었을 텐데 하나님을 그리하지 않았다. 물론 이 사람들의 재능은 하나님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신론자로 천벌을 받을 레닌이나 스탈린이나 모택동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지도 않았는데 무척이나 현명하여 그 많은 인구를 다스렸다. 2000년 가을에 출마한 조지 W. 부시도 하나님이 대통령에 출마하라고 시켜서 출마했다고 교회에서 간증을 했다. 또 어떤 교회는 열을 올려 모금운동을 오랫동안 해서 저금한 돈으로 교회건물을 지었는데, 하나님이 교회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마치 사람들은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알아서 그냥 준 것처럼 말이다. 또 부자가 된 어떤 이는 교회에 잘 나가고 열심히 믿었더니 하나님이 그렇게 돈을 벌도록 해 주었다고도 한다. 또 어떤 친구는 높은 건물에서 밧줄에 걸려 땅으로 떨어지는 도중 기적적으로 그 밧줄에 다시 걸려 공중에 매달려 구조대가 가서 그를 살릴 수 있었다. 그는 곧 하나님에게 목숨을 건져 주어서 고맙다고 기도를 드렸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자기를 구해 주었다고 말하고 다녔다. 필자는 그 친구가 진실로 그렇게 믿는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기적에 가깝도록 이상하게도 그를 밧줄에 걸어 건물 밖으로 내동댕이쳐 떨어지게 만든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필자에게는 참으로 신기해 보이는 것이다. 또 어려운 역경에 부닥치면 운이 나쁘다든가 노력을 덜해서 그렇다 생각 않고 하나님이 시험을 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따라서 현명한 지혜와 행운은 하나님의 독점물(獨占物)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 현명하고 부자가 되는 경우는 크리스천들의 뇌리에는 등록이 안 되는 미지의 사실인 것 같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자고 작정하면 모든 것이 선택되어 필요하고 원하는 내용만 머리에 입력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신앙을 가지면 정신병자가 될 확률이 적어지는가 보다.
성경적 결혼관과 일부일처주의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결혼도덕은 일부일처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원칙은 어디에서 왔는지 분명치 않다. 그리스도교의 원리라면 일반적으로 당연히 성경에 씌어져 있는 글을 기본으로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다시 말해서 이 원칙이 성경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경에는 일부일처, 일부다처, 일처다부 또는 금욕생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결혼, 간음, 사통(私通-fornication)이란 단어는 있어도 그에 대한 지침이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결혼조건은 간단하다. 당사자인 남녀가 증인 앞에서 하나님이 두 사람을 결혼으로 결합시켜 주는 것을 수락한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선언하고 육신의 결합이 있게 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결혼조건이 성립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남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사랑과 같은 아가페(agape) 사랑을 부인에게 주어야 하며(에베소서 5장 25절), 부인은 박애사상에 의한 자선적 사랑(philandros)을 남편에게 주어야 한다고 하였으며(요한 1서 4장 19절), 남편은 부인을 억지로 복종케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또 레위기 20장 11~16절에 아버지의 부인과 동침하는 사람, 며느리와 동침하는 자, 동성인 다른 남자와 동침하는 자, 모녀와 동침하는 자, 짐승과 성교하는 남자나 여자는 죽여야 한다 하였고, 이어서 17~21절에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딸과 성교를 하거나 월경 중인 여자와 성교하면 사람들이 모인 앞에서 능지처참(slay)시킬 것이라 하였고, 고모나 이모와 동침하지 말 것이며 또는 삼촌이나 외삼촌의 부인과 동침하지 말 것이며, 형제의 부인과 결혼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사촌과 결혼하지 말라는 말은 없다. 사촌이라는 것은 아버지나 어머니 형제의 자식이다. 그리고 남자들끼리 동성애하여 성교하는 것은 죄악이지만, 여자끼리의 동성애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짐승과의 관계까지 설명하면서도 레즈비언에 대한 언급은 없는 것이 허락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잊어버린 것인지 알 길이 없지만, 여하튼 성경으로는 합법적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일 누가 해설하여 남자가 안 되니 여자도 안 된다고 한다면, 사람이 감히 하나님 역을 하는 일이니 그 자체가 죄악이 아닌가 한다. 성경에서 정의하는 결혼은 하나님의 법에 따르는 것이지 국가의 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국법을 어겨 벌을 받거나 결혼이 허락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교회에서 사촌간의 결혼을 반대하거나 죄악시 할 수 없다는 이론이 나올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죄악이라 하지 않은 것을 교회가 죄악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국법을 따를 것인가, 성경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 필경 성경을 따라야 할 줄 안다. 디모데전서 4장 처음에 보면 후일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이 없어지고 마귀의 가르침을 좇아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할 것이라 하면서,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받는 음식은 모두 좋은 것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결혼하는 것을 막지 않았으니 감히 누가 사촌간의 혼인을 막을 것이며, 만일 막는 자가 있다면 그는 마귀의 가르침을 쫓는 사람들일 것이니 크리스천들이 과연 따를 일인가? 이렇게 해설을 하다 보면 정부가 만든 국법은 마귀의 법이니 그리스도를 믿는 교인들은 국법에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가톨릭은 일부다처주의를 묵인하고 있었다. 인정은 하지 않았지만 반대도 하지 않았으며, 정식 부인인 본부인 이외에 다른 여자에게서 출생한 자식들도 자식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563년 트렌트 공회(Council of Trent)에서 본부인의 자식만 인정하도록 하였으며, 아들만 유산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고, 여자들에게 원치 않는 남자라도 상대자가 없으면 억지로라도 결혼하도록 거의 강압적인 교회정책을 쓰게 되었다. 기독교를 한국에 주로 소개한 미국의 경우는 1856년 공화당의 당 정책으로 일부일처주의가 채택되었으며, 1862년 링컨 대통령 때 일부다처주의를 불법화했다.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나 야곱을 위시하여 여러 사람이 둘 이상의 부인을 가진 경우를 많이 소개하였다. 그래서 몰몬이나 회교도들의 일부는 일부다처주의를 고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우리가 알고 있는 일부일처주의는 성경에 의한 것이 아님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성도덕
창세기 38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증손자이며, 야곱의 아들인 유다(Judah)는 ‘엘(Er)’, ‘오난(Onan)’, ‘셀라(Shelah)’ 삼 형제의 아들을 두었다. 유다는 엘을 장가보냈으나 엘은 하나님에게 미움을 사 일찍 죽었다. 그래서 당시의 풍습을 따라 둘째 아들 오난에게 과부가 된 형수와 동침하여 형을 위하여 자식을 낳도록 하는 것이 시동생의 의무라고 하면서 그리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오난은 그렇게 탄생하는 자식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잠자리를 함께 하여 성교는 하되 질외사정을 하곤 하였다. 그의 이런 행동을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일로 여겨, 하나님은 오난도 죽여 버렸다. 그리하여 유다는 아직 어린 막내 셀라 하나만 남게 되었으나, 이번에 잘못하다가는 셀라마저 죽을 것 같아 셀라가 좀더 커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래서 유다는 며느리 다말(Tamar)에게 친정에 가서 과부로 살면서 셀라가 좀더 커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면서, 다말을 친정으로 보내 버렸다. 얼마간 세월이 흘러 유다는 자기 부인이 죽어 홀아비가 되었으며, 어느 날 유다는 며느리의 친정 마을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다말은 셀라가 이제는 시아버지의 약속대로 많이 컸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주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서, 시아버지라도 홀려 동침을 해서 자식을 낳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사원의 창녀차림을 하고 동네 어귀에서 유다가 오기를 기다려 창녀행세를 하면서 유다를 유혹하였다. 유다는 당연히 창녀로 생각하고 몸값을 흥정하였다. 그는 몸값으로 후에 새끼 양이 나오면 그것을 주겠다고 하였고, 다말은 이를 수락하면서 그 때까지 담보물로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맡겨 놓으라 하여 유다는 이에 응하고 동침을 하였다. 후에 새끼 양이 나와 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친구를 보냈으나, 친구는 그 동네에 사원창녀라는 것이 있지도 않으며, 괴이한 일이라고 허탕치고 그냥 돌아오게 되었다. 한편 유다는 자기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분명 과부로서 수절을 하지 못했으니 그 죄로 불태워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며느리에게 오라고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이를 모두 계산에 넣고 있던 며느리 다말은 전갈 온 사람에게 자기와 동침한 사람의 물건을 담보로 갖고 있는 것이 있다고 도장과 지팡이를 주어 돌려보냈다. 이를 받은 유다는 그 때에야 모든 내막을 이해하고, 며느리가 자기보다 더 옳았음을 인정하고 용서를 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일이 현재의 도덕관념으로 수락될 수 있는 일인가? 그러면 왜 이런 이야기를 성경에 집어넣었을까 생각해 보자. 이것은 도덕과 예절관념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위의 이야기는 예절로는 시아버지가 옳았고, 도덕적으로는 며느리가 시아버지보다 더 옳았다는 내용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예절과 도덕관념으로 볼 때 이를 어떻게 판단해야 옳을 것인가? 이를 판단함에 있어서 크리스천들은 인간적인 판단력을 발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일의 진행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일이고, 인간의 지능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옳고 그름의 이치를 따질 수 없다는 것이 기본조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는 자체를 인간의 판단력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위의 성경 이야기도 인간의 판단이 금물이라면 무조건 그대로 옳다고 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옳고 그른 도덕관념은 사탄의 것인가? 크리스천들은 형제가 죽었을 때 과부가 된 형수나 제수와 동침하여 자식을 낳도록 하는 것이 크리스천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아닌가? 또 자식 없이 과부가 된 여자들도 당연히 시숙과 동침을 해야 옳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일을 거절한다면 크리스천이 됨을 포기하든가 아니면 성경을 부정해야 할 것 아닌가?
다윗의 아들 암논은 배다른 누이 다말을 강간했다. 이런 일을 알게 된 다말의 오라버니 압살론은 앙심을 품고 나중에 암논을 죽이게 된다. 그러나 다윗은 이 일을 처음부터 잘 알면서도 암논을 탓하지 않았고, 그 결과 세월이 흐른 후 압살론이 암논을 죽이는 비극을 낳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오히려 형제를 죽인 압살론을 아들이기 때문에 사랑하면서도 벌을 주려 했던 일이 있었다. 이는 성경적 도덕관념으로 여자가 강간당하는 것은 남자의 죄가 아니며, 비록 오누이 사이라도 남자의 성욕을 만족시켜 줄 의무가 있지만, 형제를 죽이는 것은 죄가 된다는 해설이 되지 않을까? 만약 강간을 죄악시했다면 왜 다윗이 암논을 나무라든가 처벌하지 않았는가? 분명히 그 때에도 오누이간에는 강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도덕관념이 있었기에 압살론이 그런 도덕적 이론 아래 분노하였고, 그 때문에 암논을 죽였다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는 암논에게 잘못이 없었고, 때문에 다윗은 이를 불문에 부쳤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가 하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지붕에 장막을 치고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자기 아버지의 후궁 열 명과 동침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전쟁터에서 여자를 전리품으로 갖는 것을 장려할 정도였다. 남녀노소는 물론 다 죽이지만, 그 중에 혹시 처녀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발견하면 아내로 삼든 노리개로 사용하든 각 병정의 자유에 맡긴다고 신명기 21장 10~14절에 설명했고, 이것은 그저 좋다고 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엄격한 율법이었다. 이런 구약에 나오는 옛날 옛적의 일을 개화된 지금 세상에 와서 따지냐고 반박할 크리스천이 있겠지만, 문제는 그 하나님은 그 때나 지금이나 같은 하나님이고, 만일 그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개화되었다면 그것은 전지전능한 진리의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그 하나님이 진리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당시에 있던 십일조는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교회의 목사나 성직자들이 돈이 좋아서 십일조를 아직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니길 바란다.
하나님의 심사(心思-heart)를 그대로 닮았다는 다윗은 음탕했고 난봉꾼이었다. 그의 정식 부인과 애첩이 몇 명 있었는지는 계산하기도 너무 복잡한 일이다. 심지어는 남의 부인까지 빼앗고 그 남편을 전쟁터에 보내 일부러 실수 없이 전사하도록 지휘관에게 명령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또 다윗의 아들 솔로몬도 난봉꾼이었으나 마음속에 거리낌이 없었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성경은 다루었다. 오랜 후에 하나님은 모세라는 사람을 통해 십계명이란 것을 마련하여 남의 재물이나 남의 부인을 탐내지 말고 간음을 하지 말라는 훈령을 내렸다. 그러나 세상 인류 누구보다도 모범이 되었어야 할 다윗, 솔로몬 또는 모세 자신은 별로 모범이 될 인간이 못되는 것 같다.
또 하나님이 가르친 형벌은 무지막지하기도 하고, 장난기가 섞인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시집간 여자가 첫날밤에 처녀막 파열로 요에 피를 흘리지 않으면 처녀가 아니었다는 증거가 되며, 신부의 아버지가 처녀였음을 증명하지 못할 때에는 그 여자를 돌로 쳐죽여야 한다고 신명기 22장 13~20절에 설명하였다. 돌로 쳐죽이는 형벌은 사형시키는 방법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방법일 것이다. 교수형이나 기요틴이나 전기의자나 다른 모든 방법에 비하여 제일 오래 고통을 겪다 죽는 방법으로서 어떻게 인자하다는 하나님이 이런 극악한 형벌을 택했을까 의문이다. 그리고 에스겔 4장 12~13장을 보면, “너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똥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보리떡처럼 구워 먹어라”라고 하나님이 말하였다. 그런데 요즈음 성경은 사람 똥으로 불을 피워 사람들 보는 앞에서 보리떡처럼 구워 먹으라고 말을 바꿔 번역하였다. 아마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들이 너무했다고 생각하여 살짝 말을 바꾼 것 같다. 만약 이것이 장난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가학성 변태증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기(詐欺)와 배반이 정의(正義)로 되는 도덕관념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소와 야곱의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야곱은 에소의 발꿈치를 잡고 뒤따라 나왔다 하여 동생이 되었다. 간사한 야곱은 사냥 나갔다 돌아온 형 에소가 몹시 배고파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아들로서 정당히 먹을 권리가 있는 음식을 안 주고 그 음식값으로 형의 출생권을 사게 된다. 필경 에소는 농담조로 생각하고 형이 된 출생권을 팔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야곱은 노력이나 희생이 전혀 없이 귀중한 형의 권리를 탈취하게 되었다는 그리스도교적 교훈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눈먼 아버지 이삭을 속여 에소로 변장을 하고,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일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여 형 대신에 축복을 받았다. 이것은 완전히 교활한 사기행위였다. 그러나 성경은 야곱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었다. 여기서 크리스천들이 교훈을 받지 않는다면 성경에 이 글을 넣은 목적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따라서 성경을 믿는 사람은 야곱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창세기 34장에는 야곱의 딸 디나가 가나안 땅의 추장 세켐(Shechem)에게 강간을 당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세켐은 자기 아버지 하몰과 함께 야곱을 찾아와 결혼승낙을 청하면서, 종족은 다르지만 서로 화목하게 살면서 서로의 딸과 아들들이 혼인하도록 하자는 관대한 제의를 했다. 현대의 도덕관념으로는 백 번 정당한 이야기이다. 그 때는 가나안이란 지방의 원주민은 히위족인 세켐의 사람들이었고, 외지에서 들어온 이방인의 입장에 있던 야곱의 식구들은 이러한 제의를 고맙게 생각해야 했을 터인데, 야곱의 아들들은 오히려 자기네의 풍습인 할례를 히위족들이 모두 따라야 한다는 무리한 요구를 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세켐 부자들은 이것도 승낙하였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은 세켐의 사람들을 안심시켜 놓고 급습하여 아무 관계도 없는 히위 원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이는 완전한 배반행위였고,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였으며, 우리의 상식으로는 천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벌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앞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독일인이나 아랍인 따위 수백, 수천만 명을 산 채로 학살해도 좋다는 하나님의 교훈이라고 보아야 할 것 아닌가? 히위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 따르는 할례제도도 따르겠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닥치는 대로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을 다만 히위 민족이라고 죽여 버렸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겠다고 교인이 되었다 한들, 제아무리 크리스천이라고 한들, 이스라엘 유대 민족이 와서 약탈하고 학살하여 내쫓아도 하나님은 거들떠도 안 보고 그들만 축복해 줄 것이라는 결론이 아닌가?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땅을 몽땅 빼앗고, 한국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내 형제자매들을 다만 한국 사람이란 이유로 학살했을 때도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그 유대인만 축복하는 하나님을 숭배할 것인가?
결론
위에서 대강 성경에 소개한 성서적 도덕관념에 해당하는 예문들을 몇몇 살펴보았다. 그리고 참고로 다른 몇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우선 미국 오리건 주에 있는 리버럴 대학(Liberal University)의 총장으로 있었고 사회학, 특히 윤리가 전공분야였던 웨이크먼(T.B. Wakeman) 씨는 “성경 속에는 ‘도덕’이라는 단어나 도덕이란 관념은 존재도 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도덕을 찾는다는 것은 마치 가장 밑바닥에 깔린 원래의 지층 속에서 사람 뼈를 찾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 하였으며, 19세기 말 미국속세연합(the American Secular Union)의 회장을 오래 했으며 당시 가장 유명했던 자유사상가인 렘스버그(John E. Remsburg)는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악과 범죄를 타당한 것으로 여긴 책이 바로 성경이라고 정의하였다. 성경에서 당연시하고 정당화하는 조목을 그는 아래와 같이 열거하였다.
?? 거짓말과 속임수(lying and deception)
?? 사기(cheating)
?? 도둑질과 강도질(theft and robbery)
?? 살인(murder)
?? 침략전쟁(wars of conquest)
?? 인간제물 봉헌(human sacrifices)
?? 사람고기 먹기(cannibalism)
?? 마술(魔術-witchcraft)
?? 노예제도(slavery)
?? 일부다처주의(polygamy)
?? 간통과 매음(賣淫)(adultery and prostitution)
?? 외설(猥褻-obscenity)
?? 방종(放縱-intemperance)
?? 부랑패류(浮浪悖類-vagrance)
?? 몰지각(沒知覺-ignorance)
?? 여자에 대한 부당한 행위(injustice to woman)
?? 어린이에 대한 몰인정(unkindness to children)
?? 동물에 대한 잔인성(cruelty to animals)
?? 포악한 학정(tyranny)
?? 무자비(無慈悲)와 박해(intolerance and persecution)
여기 열거한 조목 이외에 다른 나쁜 일이 또 무엇이 있을까? 마치 성경은 나쁜 짓의 사전처럼 보인다. 그는 계속하여 설명하였다. 대부분의 성경은 2천 년 전 또는 그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거친 인간사를 적은 책이라 할 수 있다. 그 안에는 옳고 그른 원칙에 대하서는 어느 정도 기술되어 있으나, 자세한 도리(道理)의 내용에 들어가서는 황막해진다. 그들은 무지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현재 역시도 무지한 사람들이 종교에 빠져 열심히 믿게 되고, 그래서 광신자가 된 이들은 거의 부도덕한 사람이 된다. 유대 민족은 하나님의 괴상한 기호(嗜好)에 의하여 선택된 민족이라고 믿고 있으며, 바로 이러한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강도질이나 사기, 살인 따위를 비롯하여 타민족을 노예화시키는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믿게 만든 것이다. 사람의 무지(無知)와 신앙(信仰), 주로 이 두 가지 중요한 이유로 사람들은 부도덕스런 행위를 거침없이 자행하게 되고, 영적인 안내자라 하는 그들의 예언자나 성직자들의 몰상식한 의견이 그들이 쓴 책에 그대로 표현되는 것이다. 악(惡)과 범죄(犯罪)를 다룬 성경의 내용을 보면 대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악과 범죄적 행위를 저주하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마땅히 추천하고 칭찬할 일이다.
2. 사람들이 악과 범죄를 저지르는 대목이 많이 나온다. 이에 대하여는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로 취급하여 잘했다, 못했다는 평가 없이 그저 서술만 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성경은 그 가치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3. 성경에서 악과 범죄를 행하도록 권장하고 인도한 내용은 무수하게 많다. 이러한 내용만으로도 성경은 인간에게 도덕을 제시하는 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충분한 이유가 서는 것이다.
참 고 서 적
THE APOCALYPSE OF ADAM: translated by George W. MacRae.
THE BAD POPES: E.R. Chamberlin.
BIBLE: Latin Vulgate, Douay-Rheims Version(DRV); King James Version(KJV); New International Version(NIV); New Jerusalem Version(NJV); New American Bible(NAB);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with Apocrypha(NRSV); New English Bible with the Apocrypha; 성경전서 개역한글판(KJV); 성경전서(NIV); 성서(가톨릭용 공동번역 개정판).
BISHOPS VS. THE POPE: Rev. Charles E. Coughlin.
BLOODLINE OF THE HOLY GRAIL: Laurence Gardner.
THE BOOK YOUR CHURCH DOESN'T WANT YOU TO READ: Edited by Tim C. Leedom.
BRITANNICA ENCYCLOPAEDIA.
CHRISTIANITY AND MYTHOLOGY: J.M. Robertson.
COLLIER'S ENCYCLOPA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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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D SEA SCROLLS - The Untold Story: Kenneth Hanson.
EMPIRE OF THE SOUL: Paul William Robe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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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SPEL OF THOMAS: translated by Stephen Patterson and Marvin Me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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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AIL, the Discovery of: Andrew Sinclair.
THE HOUSE OF MESSIAH: Ahmed Osman.
HIDDEN POLITICS OF THE CRUCIFIXION: Glenn Kimball.
THE HIRAM KEY: Christopher Knight & Robert Lo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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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OF THE APOCALYPSE: Barbara Thiering.
THE LIFE AND TIMES OF COTTON MATHER: Kenneth Silverman.
THE MASKS OF GOD: Joseph Campbell.
ODYSSEY OF THE GODS: Erich von Daniken.
OF HEAVEN AND EARTH: Zecharia Sitchin.
PAGAN CHRIST: J.M. Robertson.
REINCARNATION - The Missing Link in Christianity: Elizabeth Clare Prophet.
THE RETURN OF THE GODS: Erich von Daniken.
A REVIEW OF HISTORICAL JESUS CHRIST AND EARLY CHRISTIANITY: G.C.H. Nullens.
THE SECOND MESSIAH: Christopher Knight & Robert Lomas.
THE SECOND TREATISE OF THE GREAT SETH: translated by Roger A. Bullard and Joseph A. Gibbons.
SECRET TEACHINGS OF JESUS - Four Gnostic Gospels: Marvin W. Meyer.
THE SOPHIA OF JESUS CHRIST: translated by Douglas M. Parrott.
THAT OLD-TIME RELIGION: editied by Jordan Maxwell.
TRANSFORMATIONS OF MYTH THROUGH TIME: Joseph Campbell.
THE TREATISE ON THE RESSURECTION: translated by Malcolm L. Peel.
THE VIRGIN BIRTH AND CHILDHOOD MYSTERIES OF JESUS: James Still.
WOMEN'S ENCYCLOPAEDIA OF MYTHS AND SECRETS: Barbara G. Walker.
ZERO - The Biography of a Dangerous Idea: Charles Se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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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텐돔 안의 교회들
예루살렘의 사도들 The Apoastolic Church
로마제국 Roman Empire
아르메니아 왕국 Kingdom of Armenia
로 마 Rome
안티오크 Antioch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와 가톨릭교 Armenians Apostolic and Catholic
로마 가톨릭교 Roman Catholic Church
시리아-안티오크 가톨릭교와 정교회 Syrian Antiochene Catholic and orthodox
마로나이트 가톨릭 Maronites Catholic
말란카리스 인도 가톨릭교와 정교회 Malankarese India Catholic and Orthodox
멜키테
(안티오크계로 시작하여 현재 비잔틴 제식을 따르고 있음) Melkites
콥트 가톨릭교와 정교회 Copts Catholic and Orthodox
에티오피아 가톨릭교와 정교회 Ethiopians Catholic and Orthodox
페르시아제국 Persian Empire
셀루시아 테시폰 Seleucia Ctesiphon
동방교회 사도 가루디아 가톨릭교 Church of the East
Apostolic Chaldeans Catholic 말라바리스 인도 가톨릭교
Malabarese India Catholic 카파도시아 영향 카파도시아 및 시리아 영향
콘스탄티노플 -
- 4세기 로마 수도 비잔틴 교회, 가톨릭 교회
및 정교회 희랍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루테니아 가톨릭교 유크라이나 가톨릭 교회
및 정교회 멜키테 가톨릭 교회
및 정교회 로마니아 가톨릭 교회
및 정교회 비엘로러시아 가톨릭 교회 및 정교회 세르비아 정교회 불가리아 정교회 기 타
콥트 가톨릭교와 정교회
Copts Catholic and Orthodox
에티오피아 가톨릭교와 정교회
Ethiopians Catholic
and Orthodox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근원
아브라함 모 세 예 수 모하메드
이 삭 야 곱 이시마엘 케 다 다 윗 에 서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부인 사라) (이집트인 부인 하가) (이스라엘의 열 두 아들-부족) (레위의 후손) (유다의 후손)
~ 1850 B.C. ~ 1300 B.C. ~ 600 A.D.
그리스도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근원
드리는 말씀
대강 몇 가지 제목을 추려 보았습니다. 책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는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즐겁게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본 스크립트를 숙고하신 결과 출판을 거절하실 경우 하기 주소로 반송해 주시기 바랍니다.
Nuri Tzoweh (최 누리)
28-1445 Craigflower Rd., Victoria, B.C. Canada V9A 7C4
Tel. 0011-250-360-0649 Fax. 0011-250-360-1864
E-mail nurit@pacificcoast.net
● 제목을 우선 “교회에서 쉬쉬하는 그리스도교의 근본 개념”이라
● 내용은 그리스도교가 태어난 근원, 즉 당시의 사회상, 토속종교, 유대인들 의 입장,
다시 말해서 “Zoroasta"같은 그리스도교와 이론이 거의 동일한 그리스도교 이전의 종교,
이미 존재하고 있던 다른 토속 신앙의 영향,
예를 들면 뱀과 사탄, 일요일, 세례, 지팡이와 막대, 부활절, 태양신과 불, 사탄, 사과, Adam과 Eve 등등
● 예수에 관한 분석, 즉 생일과 크리스마스 ; 고향이 나사렛 었는가 ; 결혼했는가 ; 자식이 있는가 ; 진짜로 십자가에 못박혔는가 ; 성모 마리아는 정말로 처녀? ; 예수의 아버지는 요셉 ?
● 삼위일체 교리가 어떻게 해서 생겼나 ;
그리스도교의 단성론 종파와 변천사, 교리의 분쟁사, 그리스도교의 환생론
● Gnosis 와 Essenees 사상 ; 예수의 시체가 안장되었다는 Rennes-le-Chateau ; 예수 가족의 뒷 이야기
● 성경의 역사 - 어떻게 성경이 만들어 졌나 ? ; 낙 하마디, 사해의 문서 ; 베드로 복음서 ; 도마 복음서 ; 도마의 비밀복음서 ; 등등
● 교황에 대한 추문이랄가
● 십자군 ; 마녀사냥 ; Chathar / Gnosis파 토벌작전
● 그리스도교의 도덕관념
p 18
이것은 크리스천이라는 것이 생기기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그림이고 믿음이다. 아니, 이집트가 생기기도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미리 배웠단 말인가? 아니면 크리스천들이 이 사람들에게서 배웠다고 해야 옳을까?
p43
하나님의 후손인 한국인들은 모두 함께 생각해 볼 일이라 생각한다.
p50
에세네(Essenes)라는 말 자체가 희랍어로 병을 고치는 사람이란 뜻의 ‘엣세노이(essenoi)’라는 말에서 지어진 것이며, 이 말은 예수를 위시하여 에세네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로 같은 뜻의 ‘아사야(asayya)’라는 말이 희랍어로 번역되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풀이를 하고 있다.
p68
“신과 동격인 내가 허락한 자이고, 내가 허락을 받은 자이고, 그것이 바로 나 장본인이요. 그것은 나의 아버지가 자기의 소유물을 나에게 준 것이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은 예수가 살로메의 침실에서 주고받은 대화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왜 예수는 여자 혼자 있는 살로메의 방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예수가 성공하여 정말로 유대인의 왕이 되어 헤롯 왕의 용상에 대신 앉았다면 예수의 부인은 과연 몇 명이나 되었을까?
p137
거리에 있는 자연 요새를 방패로 하여 반항하는 미세한 조직 몇 개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마사다’와 비슷한 ‘몽세거(Monts?gur)’라는 자연 요새로 마치 수많은 산봉우리 중에 우뚝 솟은 범주와 같이 생긴 곳에서 10개월 동안 수없이 거듭된 공격에 버티고 있었던 것이 ‘카타르’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몽세거’는 1244년 3월에 함락되었고 이것으로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카타르’라는 것이 남부 프랑스에서 존재하는 것이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라두리(Emmanuel Le Roy Ladurie)라는 사람은 ‘몽세거’가 함락된 지 반세기 후에 생존한 ’카타르‘를 찾아 수집한 여러 가지 책을 종합하여 그들의 연대기와 활동 등을 묘사한 ‘몽테일루(Montaillou)’라는 책은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였다. 그러나 토벌 작전이 끝난 후에도 살아 남은 ‘카타르’는 극도로 작은 숫자이지만, 자기들의 교리를 지키면서 동굴 속에서 살면서 산발적이지만 얼마 동안 게릴라전을 계속하였고, ‘레네-르-샤토(Rennes-le-Ch?teau)’같은 곳을 기반으로 하여 비밀히 ‘카타르’의 신앙을 꾸준히 지켜 왔다. 그리하여 많은 학자들이 ‘카타르’의 사상을 추적하여 그로부터 분파한 가지들을 찾아 많은 글을 썼다. 즉, ‘발덴시안(Waldensians)’, ‘훗사이트(Hussites)’, ‘아담마이트(Adamites)’, ‘자유정신의 형제들(Brethren of the Free Spirit)’, ‘아나밥티스트(Anabaptists)’, ‘카미사아드(Camisards)’ 등을 열거할 수 있으며, 이들은 영국에도 피란 와서 18세기 초 런던에 많은 지파가 있었던 기록이 있다.
p146
사실을 이해한다는 것에 무리가 있을 줄 믿는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많은 기본적인 예비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믿어지며, 그 설명을 하자면 책 한 권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이런 말이 믿어지지 않는 독자가 있다면, 관대한 마음으로 하나의 가설로 우선 받아주기 바란다.
End-
2009.05.11 18:37:34 (*.127.163.122)
마하라지에 따르면 환생이란 개념은, 모든 현상을 절대(unmanifest, 비현시)가 현시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대신 자기 자신을 실체와 동일시하여 자신을 의지를 가진 존재로 생각하는 망상을 일으킨 것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미 내공 깊으신 분들이야 잘 아시는 내용일 수도 있으나 저도 얼마 전까지 환생을 믿었던 우매한 중생으로써 기독교의 모순된 교리를 포함/ 윗 글에 공감을 표합니다.
이미 내공 깊으신 분들이야 잘 아시는 내용일 수도 있으나 저도 얼마 전까지 환생을 믿었던 우매한 중생으로써 기독교의 모순된 교리를 포함/ 윗 글에 공감을 표합니다.
마사다(Masada)의 이야기는 다른 장에서 잠깐 설명하였듯이 서기 66년에서 74년까지 유대인들이 독립하기 위해 로마제국을 상대로 거국적인 무장 봉기를 한 일이다. 그러나 이 봉기는 모두 로마군에 의하여 진압되었고, 마지막으로 치열한 전투를 하며 저항한 곳이 말발굽처럼 생긴 자연바위의 요새로 마사다라는 곳이었다. 이 곳은 사해 서남쪽 해안 부근에 있으며, 마치 설악산의 울산바위처럼 생겼다. 여기에 진을 치고 투쟁한 960명의 질로트인들은 남녀노소를 모두 합한 숫자였다. 1만 5천 명의 로마군에 완전 포위되었고 식량이나 물을 포함한 모든 공급이 끊어져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에서, 이들은 항복하여 치욕의 생활을 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였다. 이 사람들의 용맹스런 저항에 물론 로마군도 대단한 어려움을 겪었었다. 74년 4월 15일 로마군은 대공세를 하였다. 하루 종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밤이 되어 공격을 쉬고 있는 동안 여기에 있던 960명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포함한 모두는 집단자결을 하였다. 다음날 새벽에 로마군이 다시 공격을 시작했을 때에는 물론 저항이 없어 쉽게 함락을 할 수 있었고, 막상 성문을 부수고 입성해 보니 불타고 있는 화염 속에 죽은 시체만 발견할 수 있었다.
한편 로마군의 진영에는 요세푸스(Josephus)라는 사령관이 있었다. 이 사람은 원래 유대인 명문 가문 출신으로 66년 반란이 일어났을 때 갈릴리 지방 집정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지위로 인하여 그 지역에서 로마에 항쟁하는 유대인 무장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로마군에 체포되어 전향하여 로마에 항거하는 유대인을 잡아 족치는 두목역할을 하게 되었고, 급기야 마사다 요새를 함락하는 로마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서기 37년에 태어난 이 사람은 원래의 자기 이름이 마티아스(Joseph ben Matthias)였는데, 전향을 하면서 로마식 이름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로 창씨개명하였고, 유대인 부인과 이혼하고 로마 여인과 새로 결혼하였으며,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Vespasian)으로부터 로마 시민이란 신분과 함께 황제 주택지에 큰 저택과 유대인으로부터 빼앗은 성지의 땅을 개인소유로 선사받았다. 이 사람이 역사에 공헌을 한 일은 서기 100년 그가 죽을 때까지 ‘유대인의 고대사(The Antiguities of the Jews)’를 기록한 일이다. 그가 쓴 일기를 통하여 그 당시 일어났던 일을 자세하게 알 수 있어, 결국 대단히 중요한 역사자료를 남긴 셈이었다. 그가 로마군 사령관으로서 마사다 요새에 선봉으로 들어갔을 때, 혹시라도 생존자가 있는가 하여 샅샅이 뒤지도록 명령하였다. 그 결과 한 여인이 두 어린 자식과 함께 요새 틈바구니에서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요세푸스는 이들을 정성스럽게 대우하고 그들로부터 일어났던 자세한 상황을 말하도록 하여 이를 낱낱이 기록에 남겼다. 그리하여 항거하던 마사다의 질로트 지도자가 누구였는지 이름을 알게 되었고, 모두 자결하기 전에 지도자인 엘르아살(Eleazar)이 매우 철학적인 연설을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 질로트는 신앙적으로 뭉친 하나의 집단이었고, 이들은 초기 크리스천들이었다. 이 연설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초기 그리스도교 교인으로서 종교철학적인 사고 아래 군중에게 왜 자살하여 죽는 일이 지당한 일인가를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초기 그리스도교의 종교철학이 어떤지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에 여기 소개해 본다.
“원시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으로 발전한 이래, 인간에게 재앙이란 죽은 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생 자체가 그것이라고 우리 조상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격언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왔으며, 우리는 선조들의 품행이나 그들의 마음가짐을 통하여 그 말씀이 진실이었음을 익히 알고 있는 터입니다. 영혼은 죽음을 통하여 자유를 얻게 되며, 우리가 죽음으로써 영혼이 육신을 떠나 고통과 번민을 모르는 본연의 고장으로 돌아가게 해 줍니다. 그러나 죽어 없어질 육신 속에 혼이 속박되어 있으면서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는 한, 그 혼은 진실한 의미에서 죽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불멸의 그것과 사멸의 그것이 결합하는 것은 가장 비이상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영혼이 육신 속에 갇혀 있다 하더라도 많은 과업을 실행할 수는 있습니다. 즉, 육신이라는 물체에 들어가 감각기능을 만들고, 그 기능을 눈에 보이지 않게 작동시키며, 육신의 영역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구의 인력으로 땅에 끌려 발버둥치는 한계에서 해방될 때, 영혼은 그 기능을 백분 발휘할 수 있어 주님처럼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축복된 권능과 무한의 능력에 진정한 의미로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란 불멸하는 존재이기에 육신 속에 들어가 있어도 보이지 않으며, 육신 속에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영혼이 함께 하는 것은 생동하고 꽃을 피우며, 영혼이 떠나면 시들고 죽어 버립니다. 그래서 영혼은 육신을 변화시키는 근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영혼이 불사의 존재이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현세의 인생을 자연에 순응해야 하는 일종의 봉사로 생각하는 관념을 포기하고, 기꺼이 육신에서 영혼을 해방시키며, 불우한 현세의 처지 때문이 아니라 영생을 얻기 위한 순수한 목적에서 육신을 떠난다고 친지에게 알려 주는 이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이 연설은 우리가 아는 유대교의 철학을 반영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에세네의 것이고, 그노시스의 것이며, 이원론적(dualistic)인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정통 유대교에서는 전혀 영혼에 대하여 영원불멸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영원불멸의 영혼관념이나, 영혼이란 물질보다 상위에 존재한다든가, 죽음으로서 하나님과 결합을 한다든가, 악하게 살아야 하는 불우한 인생을 저주하는 따위의 사상은 주류 유대교 철학과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그러나 비교적 크리스천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표현 자체보다 원래 예수의 제자들이 한 행위와 비교하여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서 도마가 베다니의 라자로가 죽었을 때 예수와 함께 가서 다 같이 죽자고 제의한 일과 상통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9년 동안의 유대인 봉기 때 많은 크리스천들이 봉기군에 가담하여 용감하게 싸웠으며, 당연히 질로트와 에세네 사람들은 예수를 지도자로 생각했던 사람들일 것이고, 이 사람들을 크리스천이라고 한다면 마사다에 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은 진정한 크리스천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크리스천들의 종교적 사상은 지도자 엘르아살의 연설내용과 합치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요세푸스의 이야기로 잠깐 돌아가면,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지금 우리가 분석한 내용 자체는 없었다. 그러나 여러 손을 거치면서 잘린 부분이 많아 과연 원래부터 없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현재 우리에게 알려진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문서들은 조작이라고 모두 묵살하여, 요세푸스의 기록도 마찬가지 범주에 집어넣는다. 여하튼 그의 기록에 예수의 이야기가 간헐적으로 여러 곳에 있었으며, 그가 묘사한 예수는 정교회에 가까운 교리를 이야기했다고 되어 있고, 1261년에 러시아어로 번역한 원본을 19세기의 러시아에서 발견하였다. 이를 번역한 사람은 정교회 계통의 유대인이 아니었고, 다른 원본의 내용과 비교하여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도 예수는 다른 원본과 마찬가지로 그가 인간이었고 정치적 혁명가였으며 왕위를 갖지 못한 왕으로 표현되었고, 머리 중간에 ‘나지리아(Nazirean)’ 사람들 풍으로 줄이 있었다고 했다. 요세푸스의 기록은 이 외에도 ‘슬라브 요세푸스(Slavonic Josephus)’라는 번역판도 있으며, 3세기의 초기 성서학자 오리겐(Origen)도 요세푸스가 기술한 내용을 많이 참조했다고 한다.
레네-르-샤토
이야기가 나온 김에 신비의 신앙처럼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노시스에 대하여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소개해 보겠다. 카타르가 존재하던 남부 프랑스의 산악지대인 랑그도크(Languedoc) 지방에 ‘레네-르-샤토(Rennes-le-Ch?teau)’라는 곳이 있다. 이 곳에는 1059년에 막달라 마리아를 위해 지은 아주 낡은 성당이 있었으며, 그 성당을 ‘막달라 마리아 교회(Church of Mary Magdalene)’라고 불렀다. 이 성당을 19세기 말에 소니에(B?ranger Sauni?re)라는 이름의 신부가 다시 새 단장을 하여 말끔하게 고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막달라 마리아 교회는 시옹의 수도회(Prieur? de Sion)의 신비와 직결되는 관계였고, 시옹의 수도회는 프리메이슨(Freemasonry)의 모체이며, 시옹의 수도회 비밀들은 바로 레네-르-샤토에 집결하게 된다.
소니에 신부는 원래 레네-르-샤토의 바로 옆 동네에서 출생하여 자랐고, 신부가 된 후에 레네-르-샤토로 부임해 와서 죽을 때까지 그 곳에 있은 사람이다. 그러나 레네-르-샤토라는 곳은 인구가 약 2백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아 신부로서 그리 바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였고, 다만 그 곳에 무척 오래된 교회와 그 주변에 그보다 훨씬 오래된 건물들이 여럿 있을 뿐이었다. 1885년 그가 부임하였을 때에는 너무 가난하여 동네 사람들이 음식을 갖다 주어 연명할 정도였는데, 1891년이 지나서부터는 그가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돈이 많아진 것이다. 그 때부터 소니에 신부는 백만장자 이상으로 돈을 후하게 썼으며, 교회도 돈 아까운 줄 모르고 무슨 자료든 구해 사용했고,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하곤 하였다. 그는 성당뿐 아니라 막대한 돈을 들여 마치 성처럼 생긴 막달라 추모 건물도 지었다. 그러나 의아한 점은 아무도 어디서 돈이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열 여덟 살 때부터 32년간 그를 보살펴 준 마리 데나노드(Marie Denarnaud)라는 가정부 격인 여자 하나뿐이었다. 후에 교구장이 죽고 새로 부임한 교구의 주교가 비밀의 내용과 금전에 관한 자세한 보고를 요구했을 때 그는 완강히 거부하였으며, 그 결과 소니에 신부는 다른 곳으로 가라는 전임명령을 받게 되었으나 그는 이것도 거절하였다. 그리고 대신 교황청에 이야기하여 교황이 직접 그 자리에 유임시키도록 주교에게 명령을 내리는 이해할 수 없는 영향력까지 과시하였다. 그가 어떻게 하여 교황까지 마음대로 움직이고 모든 것을 불문에 붙일 수 있었는지, 그것도 역시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다. 그는 1917년 65세 때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게 되는데, 이상한 것은 그가 심장마비 걸리기 불과 며칠 전 아직 건강한 상태일 때 가정부 마리가 이미 관을 준비했다는 점이다. 또 그가 죽기 조금 전 종부성사를 드리기 위해 옆 동네의 신부가 와서 그가 누워 있는 침실에 들어갔다. 물론 그 방에는 소니에 신부와 종부성사를 드리려는 신부 두 사람만 있었으며, 잠시 후 그 신부가 방에서 나올 때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와들와들 떨면서 몹시 무서운 큰일을 당한 사람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신부는 그 날부터 죽을 때까지 웃는 일이 없었고 항상 우울한 상태에 있었다 한다. 그리고 장례식도 이상하게 치러졌다. 그는 고해성사도 하지 않고 죽었으며, 다음날 죽은 시체에 호화로운 장식이 많이 달린 긴 옷을 입히고 주홍색의 너슬너슬한 술로 잔뜩 감아 놓고 의자에 앉혀 막달라 추모탑 꼭대기 베란다에 내놓았다. 그리고는 문상 온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시신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지나면서 달려 있는 너슬너슬한 술을 하나씩 뽑아 가는 매우 이상한 장례식이었다. 소니에 신부 장례식이 끝난 다음, 마리는 전에 소니에가 살지도 않으면서 경치 좋은 장소에 지은 베다니아라는 호화 별장으로 이사가서 혼자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대단히 호화로운 생활을 계속하였는데, 그 이유는 소니에가 죽기 전에 모든 자산을 마리의 이름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차 대전 후 1946년 드골 정부가 화폐개혁을 하고 나서 마리는 가난해지기 시작하였다. 소문에 의하면 그때 마당에 화톳불을 펴놓고 마리가 돈다발을 태우는 것을 보았다는 소문도 있다. 그리고서 7년 동안 아주 검소하게 살았으며, 생활비가 모자라 그 집을 그녀가 죽을 때까지 사는 조건으로 코부라는 사람에게 팔았다. 그러면서 코부에게 자기가 죽기 전에 어떤 비밀을 가르쳐 줄 것이며, 그 비밀을 알게 되면 엄청난 부자가 될 뿐 아니라 대단한 권세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리도 소니에와 마찬가지로 그 비밀을 말할 기회도 없이 1953년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다만 두 사람의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개인신상 이야기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이상한 일은 성당을 위주로 그 주변에서 생긴 일이다. 우선 ‘예수가 진정 십자가에 못박혔는가’라는 질문에 관한 장에서 잠깐 소개하였지만, 여기에는 얼키설키 사연이 많다. 소문으로는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 왕의 궁전과 헤롯 왕의 옛 성터에서 발굴한 금은보화를 발굴하여 엄청난 부자가 되었고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은행과 재벌정치를 행했다는 ‘템플라 기사단(Knights Templar)’의 숨긴 보물이 이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설도 있고, 또 어떤 설은 ‘비시고트(Visigoth)’의 금을 여기에서 발견했다고도 하며, 셋째 설은 예수의 후손이며 신성로마제국의 혈통을 계승한 옛 오스트리아제국의 합스부르크(von Hapsburgs) 왕가로부터 받은 돈이라고도 하며, 넷째 설은 여기에서 발견한 문서로 바티칸을 협박하였다고도 하고, 다섯째는 옛 알케미(Alchemy), 즉 연금술의 비밀을 알아냈다고도 한다. 템플라 기사단은 십자군 시대의 십자군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고 그들의 수송을 맡았으며, 십자군을 조직하여 출정하는 군대의 왕이나 영주들에게 군자금을 꾸어 줘 이자놀이를 하였고, 유럽 각지에서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각 마을에 은행지점을 차려 군인들이 출정지에서 돈을 은행에 저금하고 여행하는 도중 아무 곳에서나 필요한 대로 찾아 쓸 수 있게 하기도 했고, 또 이들은 유럽의 성지순례자들이 장거리를 여행하는 동안 모슬렘의 습격이나 강도들의 약탈에서 보호해 준다는 조건으로 현대로 말하면 여행사 사업까지 했던 것이다. 그래서 각 나라의 왕들은 템플라 기사단에게 많은 빚을 지게 되었고, 이들은 세계의 금융을 모두 차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전쟁으로 빚에 쪼들리던 당시의 프랑스 왕 필립 4세(Philippe IV.)는 템플라 기사단의 돈을 빼앗기 위해 교황 클레멘트 5세(Clement V.)와 합작으로 템플라 기사단의 총수였던 그랜드 마스터(Grand Master) 디 몰레이(Jacque de Molay)를 협의할 일이 있다고 파리로 불러내었다. 그리고는 전국적으로 칙령을 내려 일시에 전국의 템플라 기사단원을 체포하여 마귀를 섬기는 이단이니, 비자연적인 성교를 하느니 하며 엉터리 죄목을 씌워 모두 죽여 버리고, 그들의 재산을 차압해 버렸던 것이다. 디 몰레이를 잡아 가둔 것이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이었고, 그가 세느 강변에서 화형당한 것이 1314년 3월 12일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금요일이면서 13일이면 재수 없는 날이라고 몸조심하는 풍습이 생긴 것이고, 디 몰레이는 화형을 당할 때 교황은 40일 이내에 죽을 것이고, 죽어서 함께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자고 하였으며, 필립 왕은 그 해 안으로 죽을 것이라 말하고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클레멘트 교황은 다음 달인 4월에 갑자기 죽었고, 필립 왕은 그 해 10월 29일에 갑작스런 병으로 죽고 말았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인하여 템플라 기사단은 모두 지하로 숨고, 대거 스코틀랜드로 피난을 갔다. 그들은 막대한 재산을 대부분 빼앗겼으나 아직도 어마어마한 양의 금은보석을 어딘가에 숨겨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 보물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당시 그랜드 마스터였던 블랑셰포르(Bertrand de Blanchefort)라는 사람이 실제로 레네-르-샤토에 몰래 와서 여러 세대를 살았던 것이 후에 알려지기도 했다.
또 5세기에서 8세기 사이 프랑스는 메로빙거(Merovingian) 왕조가 통치하던 때였다. 4~5세기 때 중부 유럽을 통치하던 비시고트(Visigoths)족은 이 곳까지 밀려와 이 곳에서 요새를 만들고 국가의 명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시고트는 아직도 세력과 영향력이 강하여 7세기 프랑스 왕 다고베르트 2세(Dagobert II.)가 비시고트의 공주와 정략결혼까지 할 정도였다. 이 비시고트의 공주는 예수의 피를 받은 후손이었다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때 전 유럽을 휩쓸던 강력한 비시고트가 이 곳으로 밀려왔을 때 많은 보물을 갖고 와서 망하기 전 이 부근에 묻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 보물 중에는 유대교에서 언약궤(Ark of the Covenant) 이상으로 성스럽게 여기는, 막대한 양의 금으로 만든 일곱 가지의 촛대와 히브리 왕들의 보배와 솔로몬의 보배도 있었다고 한다. 이 보물들은 5세기 초 비시고트가 왕성하여 로마의 영역을 파죽지세로 먹어가면서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로마 당국으로부터 빼앗은 것이라는 사실이 시옹의 수도회(Priory of Sion) 종단의 비밀지식으로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또 합스부르크(von Hapsburgs) 왕가 이야기는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음악가로 활약할 때 오스트리아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Franz Josef)의 사촌인 대공작(大公爵) 요한 폰 합스부르크(Archduke Johann von Hapsburg)가 몰래 이 곳을 무척 자주 다녀갔다는 점이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합스부르크는 비시고트와 같은 게르만 민족으로 통하는 점이 있어 혹시 왕가의 일부가 비시고트의 비밀을 알고 있을 확률도 있다는 짐작이다. 그리고 이 곳은 역사 이전 고대 시대에 애당초 켈트 민족이 살던 곳으로서 그 사람들이 성소(聖所)로 여기던 곳이었으며, 로마 시대에는 한때 번창하여 인구가 꽤 많이 모여 살던 큰 마을이었다. 역시 이 사람들도 성스러운 곳으로 여겨, 토속신앙인들의 사원도 여러 곳이 있는 지방이었다. 또 4세기에는 중앙 유럽과 스페인까지 휩쓸었던 비시고트(Visigoths)라는 게르만족이 북방 제국의 수도라고 할 정도로 번성했던 곳이기도 하며, 그 후 6세기에 와서는 인구 6만을 헤아리는 도시로 변모하기도 했고, 그로부터 5백여 년 동안 라제(Comt? of Raz?) 백작 가문의 본거지로 융성하였으며, 13세기 알비젠시안 십자군이 쳐들어와 카타르 멸종의 인종청소를 할 때까지 계속 발전하였던 지역이다. 그러나 그 십자군 침공이 있은 후 인구가 급속히 줄어들어 거의 유령도시화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작곡가 바그너(Wagner)가 가곡 ‘파르지팔(Parsifal)’을 작곡할 때 그 영감을 받기 위해 이 곳을 여러 번 방문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치 독일이 이 곳을 점령했을 때에는 히틀러의 특명에 의하여 특별히 훈련받은 광부 출신으로 형성된 부대가 이 곳에 와서 몰래 발굴탐사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대단히 엄중한 경비로 일을 진행했으며, 그들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또는 발견했다면 그것을 어디로 갖고 갔는지는 현재 시옹의 수도회와 히틀러와 아주 가까웠던 측근만 알고 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미라가 된 예수의 시체를 이 곳에서 어디론가 운반했을 것이라고도 한다.
또 이상한 일은 소니에 신부 자신이 입구 문의 머리 위에 라틴어로 ‘TERRIBILIS EST LOCUS ISTE’라고 새겨 놓았다. 즉, ‘여기는 소름끼치는 무서운 곳이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아스모디우스(Asmodeus)’라는, 불교의 사천왕 같은 비밀을 지키는 신의 조각상을 세워 놓았다. 이 신은 유대아 사람들이 솔로몬 신전을 지을 때 비밀을 보호했다는 전설에 나오는 신이다. 이러한 점으로 전문가들은 예수의 시체가 이 곳에 안치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고 한다. 또 소니에 신부는 성당 부근의 옛 건물터에서 네 뭉텅이의 문서를 발견했다. 하나는 1244년에 작성한 어떤 혈통가문의 족보를 포함한 문서이고, 또 하나는 1644년에 작성한 마찬가지의 족보문서라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두 문서 꾸러미는 그 성당의 전임자였던 비구(Bigou)라는 신부가 프랑스 혁명 바로 전까지인 1780년대에 이 지방의 유지였고 프리메이슨 그랜드 마스터였던 블랑셰포르 가문과 신앙에 대한 대화를 적은 책이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내용은 신약성경의 구절 등 표면적으로는 신앙 이야기였지만, 문장의 띄어쓰기가 엉망이고 철자가 틀리기도 하며 글씨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기도 했고 단어 사이에 엉뚱한 철자가 끼어 있기도 한 아주 괴상하게 씌어진 글이었다. 이것은 신앙의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어떤 내용이 담긴 암호문이라는 것을 누구나 감지할 수 있는 문서 꾸러미였다. 그뿐이 아니다. 이 곳에는 13세기 말 잠깐 교황지위에 있었던 교황 셀레스틴 5세(Pope St. Celestine V.)의 초상화, 테니에라는 화가의 ‘아카디아의 목동들(Les Bergers d'Arcaie)’이란 그림, 이 부근 성당의 무덤에서 나온 어느 시체 뼈에 새겨진 글, 이상하게 비석문이 씌어진 블랑셰 후작 부인의 비석 등등이 있었는데 이들 그림이나 글에는 분명히 암호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소니에 신부가 몇 가지는 지워 없애 버린 흔적까지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상한 것은 성당 안 벽에 여느 성당에서처럼 십자가에 대한 그림들이 걸려 있는데, 이 그림들을 자세히 보면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특이한 점들이 있다. 예를 들면 어떤 그림에는 어린아이가 스코틀랜드의 무늬가 있는 보자기로 감싸여져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보름달이 있는 달밤에 예수의 육신을 옮기는 장면 같은 것들이다. 물론 그림을 보면 예수를 무덤으로 옮기는 것인지, 무덤에서 갖고 나오는 것인지 구별할 수는 없지만, 보름달이 높이 뜬 것을 감안하면 성경에 예수의 시체를 무덤에 옮겼다는 시간과 꽤 많은 시간의 차이가 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들은 소니에 신부가 성당을 고치면서 새로 그림을 주문하여 그린 것들이다. 그렇다면 소니에 신부는 그림에서 어떤 이야기를 전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할 수 있다. 여하튼 소니에 신부는 무엇인가 알려지지 않은 어떤 비밀을 알고 있었으며, 그 비밀에 관련되어 어느 정도의 보물을 찾았기 때문에 갑자기 돈이 많아졌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레네-르-샤토’의 신비한 이야기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신비에 싸인 사연을 갖고 있음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이 이야기는 많은 독자들이 흥미로워 할 것 같아 사족을 달아 간단하게 소개해 보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그리스도교의 발달과정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라는 것이 항상 조작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정사(正史)와 다른 이야기의 역사에도 귀를 기울여 이치를 따질 필요가 있고 사실여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다른 주장을 하는 역사가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의 내용을 조작·변형시켜 본래의 그리스도교를 둔갑시켰다는 것이다. 염두에 두어야 할 역사적으로 중요한 한 사건은 8세기인 740~750년경 프랑스에서 왕위문제로 파벌간 반목이 한창 심할 때 당시 교황이 관여하여 정당한 왕이 될 사람을 천거한 일이다. 이때 교황의 절대적 권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소위 ‘콘스탄티누스의 기증(Donation of Constantine)’이라는 책으로 된 문서를 발견하였다고 내놓은 일이 있었다. 지금은 이 문서가 조작된 것이 증명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이 문서를 진짜로 모두 믿고 있어 그 위력을 당당히 과시하며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사실 지금도 이를 기본으로 이루어진 관례를 주류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따르고 있다. 이 문서의 내용은 콘스탄티누스가 크리스천이 된 연유부터 그리스도교와 관계되는 콘스탄티누스의 모든 업적을 기록한 책이었다. 이 책에는 콘스탄티누스가 교황의 상징과 휘장을 만들어 증정했으며, 콘스탄티누스가 로마(市) 교역(敎域)의 교왕을 그리스도의 대리인(Vicar of Christ)이라고 불러 하나님에게서 특별한 임무를 받고 지상을 다스리는 황제의 신분으로 다른 모든 제왕들을 다스릴 수 있는 정당성을 수여했다는 것이다. 결국 서부 유럽에서 교황이 마음대로 왕을 만들 수도 있고 왕자리를 뺏을 수도 있는 권한을 갖게 된 원인이 주로 이 책에 근거하여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학자들은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조작인지 몹시 혼동되어 여러 종류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 내려오는 현실이다.
이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란 책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는 항상 크리스천에 동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결국 크리스천의 신앙을 허가하여 자유로이 믿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자기 신조였기 때문에 신앙의 자유를 공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리스도교라는 이상한 신앙을 근절하기 위해 오랫동안 박해를 계속했지만, 기대하던 성과는 고사하고 그리스도교가 계속 번져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하여 그 수가 엄청나게 되었다. 그래서 왕위를 다투기 위해 싸우던 그의 정적인 막센티우스(Maxentius)를 이기는 한 방편으로 크리스천들을 자기편에 흡수하면 막대한 득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 아래 그리스도교 신앙을 허가했을 것이라는 추론도 있다. 312년 ‘밀비안 다리의 결전(Battle of Milvian Bridge)’이란 전투에서 막센티우스와 대결하기 직전에 그는 예언자와 같은 말을 했다 한다. 즉, 꿈에 하늘을 쳐다보니 빛을 발하는 십자가가 있었고 십자가에 ‘X’자 형태로 “In Hoc Signo Vinces(이 상징으로 그대 정복하리니)”라는 문구가 씌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하고 나서 자기 군사에게 모두 방패에 페인트로 하늘에서 내려 준 일종의 부적이라 할 ‘■’라는 표식을 그리도록 명령하였다. 현대에서는 이 모노그램을 “라바룸(Labarum)”이라고 읽지만 이것은 영어로 ‘P’자와 ‘X’자를 겹친 형태이고, 실제로는 희랍어 ‘치(X)’와 ‘로(P)’자를 겹친 것이다. 그래서 이 상징을 ‘치-로(Chi-Rho)’라고 부르며 희랍어 ‘크리스토스(Christos)’의 첫 두 글자를 택한 것이다. 여하튼 그 결과 콘스탄티누스는 대승리를 하게 되었고, 이것을 크리스천이 사교(邪敎)를 이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하튼 이 일은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는 큰 계기를 만들게 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가 크리스천을 이용하는 위력을 실감하게 되어 그의 신념을 굳히게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물론 이것은 유독 그리스도교라는 신앙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어떤 신앙이나 믿음으로 군인들이 정신적으로 무장되면 그것이 그리스도교이건 불교이건 심지어 공산주의나 왕에 관계없이 전투에서 막대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일이다. 어쨌든 이렇게 인기를 얻은 그리스도교를 얼마 후 국교로 아주 바꿔 버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잠깐 위에서 말한 라바룸에 대하여 조금 더 이야기해 보자. 크리스천에게 인기 있는 라바룸을 처음 인용하여 기대 이상의 큰 효과를 본 콘스탄티누스는 이를 더욱 크게 활용하였다. 그는 주홍빛 사각 깃발을 만들고, 그 안에 ‘X’자를 금으로 수놓고, 희랍어로 ‘TOUTO NIKA’라는 글을 넣었으며, 가장자리는 금빛 술을 달아 창을 깃대 삼아 기를 매달고 행진을 했다. 지금도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우승기는 바로 이것을 본뜬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씌어 있는 ‘Touto Nika’라는 글은 ‘이 표식으로 정복한다’는 뜻이고, 후에는 라틴어로 ‘In hoc signo vinces’라 하였다. 그리고 ‘X’자도 역시 정복이라는 뜻이고, 이 때부터 기병대들이 이런 식의 깃발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 전까지 계속되었으며, 아직도 여러 나라의 국기에 ‘X’자 형이 들어 있는 것은 바로 여기서 유래가 된 것이다. 또 라바룸을 “팍스 그리스도(Pax Christo)”라고 부르는 경우도 흔히 있다. 팍스라는 말은 ‘여기에 키스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여기 라바룸에 키스하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장한 꿈에서 보았다는 라바룸의 이야기는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보좌로 항상 옆에 있던 한 증인의 말을 인용하면, 그때 콘스탄티누스는 지금의 프랑스 아우툰(Autun) 부근에 있는 무적의 태양신 솔 인빅투스(Sol Invictus)를 섬기는 한 절에서 입교식을 하였고, 솔 인빅투스를 꿈에서 보는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솔 인빅투스라는 것은 미트라 신을 말하는 표식이다. 다시 말해서 라바룸이라고 부르기 전에 미트라 종교에서는 이를 솔 인빅투스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밀비안 다리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로마 의회(Senate)에서는 로마 시의 콜로세움에 아치(arch)를 세우고 ‘신의 뜻을 받들었기에’라는 구절을 새겼다 하며, 여기서 말하는 신은 예수가 아니라 태양신인 미트라를 뜻했다는 것이다. 또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집권 당시의 로마 국교는 태양신을 믿는 종교였으며, 평생 동안 자기 자신이 직접 그 태양신 종교의 최고 승려직을 갖고 실행했기 때문에 그가 황제로서 집정한 기간을 ‘태양의 황정(皇政)’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집정기간 동안 사용한 황실의 깃발과 엽전에 ‘솔 인빅투스’ 상징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세례를 받은 것이 임종하기 바로 전이 된 것이지 예수처럼 요단 강에서 세례받기 위해 뒤로 미루다가 할 수 없이 죽기 전에 받은 것이 아니다. 그가 황제로서 요단 강에 가서 세례받으려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는데 그럴 형편이 못 되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며, 다 죽게 되어 거동하기 어려울 때 임종자리에서 받을 이유가 없었다. 이 사실은 그 때서야 비로소 크리스천이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거나, 근력이 없어 주위의 강압으로 할 수 없이 세례를 받았을 확률도 있다. 참고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면 그가 한참 그리스도교를 통합하려는 노력으로 동분서주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그의 아들을 살해하고 부인을 끓는 물에 산 채로 집어넣어 죽인 일이 있어, 이는 크리스천이 된 사람의 행동이라 짐작하기에는 문제가 있지 않나 한다. 그리고 위에 말한 ‘치-로’의 모노그램도 그가 창안한 것이 아니고, 그보다 250년 전의 폼페이 고분에 그려져 있듯이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솔 인빅투스’라는 종교는 원래 시리아에서 시작된 것으로 콘스탄티누스 시대보다 100여 년 전에 이미 로마 황제들이 믿고 있던 종교라 한다. ‘솔 인빅투스’, 즉 ‘미트라(Mithras)’ 신을 섬기는 이 종교의 특이한 점은 태양신 ‘미트라’가 다른 모든 신들이 자발적으로 합세하여 모시기 때문에 으뜸신으로 추앙되는 신이라는 점이다. 이 원리를 제왕들에 비하면 혹시 한두 명의 왕이 반란을 해도 다른 제왕들이 힘을 합하여 평정을 하기 때문에 항상 화평이 있게 된다는 것이며, 종교적으로 보아도 원래 로마에 자리잡고 있던 ‘미트라(Mithras)’라는 태양신 종교와 그 외 점령지의 토속종교와 크리스천 등 모든 종교를 자연스럽고 평화스럽게 융화시키는 종교로서 이들이 자발적으로 섬겨 주는 종주 종교이기 때문에 로마 황제들이 선호하였을 것이며, 이미 로마제국 전체에 깊이 보급되어 있던 종교였다 한다. 따라서 로마제국을 통치하는 황제로서는 이보다 더 이상적인 종교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숫자가 많아진 크리스천들을 박해하여 반대세력을 기르는 것보다 흡수하여 ‘미트라’ 종교 테두리 안에 넣어 두는 것이 황제로서는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을 콘스탄티누스는 오래 전에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정교회파의 교리는 ‘미트라’의 교리와 공통되는 점이 여럿 있었다. ‘미트라’는 단일신 종교였고 정교회측도 단일신을 지향했었기 때문에 ‘미트라’ 산하에 묶어 두기 쉬웠을 것이므로, 그는 정교회를 지지하여 동일본질을 논하는 파를 누르고 번성했을 것이다. 그가 312년 종교의 자유를 공표했을 때 그 동안 크리스천들이 1월 6일을 예수의 생일이라고 잔치하던 풍습이 있었는데, 그는 태양신 종교에서 태양이 다시 태어난다는 12월 25일로 예수의 생일도 바꾸도록 지시했으며, 유대인들이나 크리스천들이 휴식의 날로 여기던 토요일을 태양신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고 일곱 번째 날에 쉬었다는 일요일로 바꾸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일요일을 태양의 날인 “Sun-day"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태양신 종교인들이나 그리스도 종교인들이 같은 날 휴식을 하여 결국 같은 종교를 믿는다는 관념을 암암리에 강조하기 위해 취한 조치였을 것이다. 또 ‘미트라’나 ‘솔 인빅투스’에 영혼의 영원불사 교리, 미래에 다가올 최후의 심판과 심판날에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교리는 이미 존재해 있는 터였고, 성모 마리아 대신 어머니 여신 ‘시벨(Cybele)’을, 태양신 아버지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미트라’ 자신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간과 인간 세계에 내려온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하나님 예수의 이론과 대등한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제국의 기존 종교 ‘미트라(Mithras)’와 비슷한 태양신 종교와 선대 황제들이 백여 년 전에 이미 채택한 ‘솔 빅투스(Sol Invictus)’와 그리스도교가 서로 상치되는 점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했고, 그 일환으로 ‘미트라’가 신으로서 인간 세상에 내려온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신격화를 조장했을 것이라 한다. 이런 이론을 따라가면 콘스탄티누스라는 사람은 신앙인이라기보다 정치인으로서 종교를 정치화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니케아 종교회의는 가장 좋은 표본이다. 여기에서 그는 부활절 날짜를 결정하도록 하였고, 회의에 참가한 주교들의 권한을 규정지어 놓아 통치하기에 편리하도록 만들었으며, 그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를 신으로 인정하는 문제를 투표로 결정지은 일이다. 이 말은 그 당시 많은 지도자 격의 크리스천들이 예수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다만 인간으로서 선지자의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다시 뒤집어서 말하면 정치적인 필요에 의하여 예수라는 인간이 하나님으로 승격했다는 의미이며, 콘스탄티누스의 집념은 그의 열성적인 신앙심에서가 아니라 황제로서 정치상의 편의와 제국통치를 위한 종교통일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예수가 신이 되어야 ‘미트라’의 교리와 짝이 맞는 일이었다. 만일 예수가 인간이었다면 오히려 교리상 수용하기 더욱 곤란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니케아 종교회의가 시작된 다음 해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정교회의 교리에 상반되는 모든 문서나 책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도록 명령했다. 물론 이 중에는 다른 종교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쓴 글도 있었지만, 같은 크리스천으로서 의견을 달리하는 내용이 있는 문서들도 모두 포함됐던 것이다. 또 하나는 로마 시(市)에 거처하는 교왕에게 일정한 봉급을 지급하고 ‘라테란(Lateran)’ 궁에서 살도록 한 일이다. 이것은 사실상 교황을 봉직한 꼴이 되며, 이 제도가 오래되어 실제로 교황이라고 부른 것은 384년부터의 일이다.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일을 한 것은 331년에 성경을 다시 만들도록 명령한 일이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명기해야 할 일은 이보다 28년 전인 303년에 당시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안(Diocletian)이 크리스천에 관한 모든 서류는 보이는 대로 없애라는 명령을 내린 일이 있었다. 그 결과 특히 로마 시 부근에는 크리스천에 관한 글이 전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성경을 새로 쓰라고 했을 때에는 자기의 구미에 맞게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이때 신약성경에서 많은 중요한 부분이 둔갑하고, 예수의 신분이 격상됐으리라는 것이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5천 종 이상의 현존하는 신약에 관계되는 문서 중 단 하나도 4세기 이전의 것이 없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성경은 모두 4세기 때의 작가와 편집자들이 만들어 낸 작품이며, 이들은 모두 정교회 계통의 성직자이고 학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여하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영향력이 심대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둘로 나누면, 예수가 예언자로서 전한 ‘메시지’를 중심으로 신앙을 삼는 파와 예수의 가족과 혈통을 중심으로 신앙을 삼는 파가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혈통파를 완전히 묵살하고 메시지를 중심으로 하는 파를 택했다. 만일 혈통파를 택했다면 예수의 후손들이 마치 왕위를 계승하듯 교황 대신 그 후손들이 교회를 통치했을 것이며, 로마의 황제나 교황의 권한은 완전히 묵살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누락된 혈통파들은 후에 질로트 같은 저항하는 세력으로 남아 있게 되었고, 그들 나름대로의 교회를 세웠으나 로마 가톨릭의 세력으로 그들의 뿌리는 뽑아 없어지게 되었다. 여하튼 콘스탄티누스는 애초 유대인을 근거로 하던 신앙을 변형시켜 로마인을 위한 종교로 변환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고, 결과적으로 유대교와 완전히 다른 종교를 만드는 데 공로자가 되었다 할 수 있다. 또 콘스탄티누스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기초를 마련해 준 산파였음은 기정사실이다.
동방정교회
그리스도교의 초창기에는 주로 다섯 도시, 즉 안티오크(Antioch),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예루살렘(Jerusalem) 그리고 로마(Rome) 시에 그 중심지를 두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바티칸이 가톨릭교를 관장하는 교주 또는 총령이 있는 도시인 것처럼, 위의 각 도시들이 정치적, 사회적 또는 문화적으로 중심지이기도 했지만 종교적으로도 중심지였기 때문에 그 부근 지역을 관장하는 총령이 있었던 곳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바티칸의 교황과 같은 교황 또는 교왕들이 이 도시에 각각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200년경에 이미 인구 80만 정도였던 ‘안티오크’라는 도시는 사도행정 11장 26절에 표기했듯이, 바나바(Barnabas)와 바울(Paul)이 선교사로 처음 활동한 곳이고 처음으로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던 곳이다. 로마제국 시대 로마 시와 안티오크와 함께 3대 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는 마가복음을 쓴 마가(St. Mark)가 오랫동안 정착하여 교회를 세운 곳이고, ‘안티오크’과 함께 애당초 교리를 정돈하여 체계를 잡은 그리스도교의 두 본거지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은 옛 희랍 시대부터 비잔틴 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내려오는 중요한 도시로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동로마의 도읍지로 정하고 신로마 시(市)라 불러 그리스도교의 중심지로 만든 곳이다. 예루살렘은 예수가 활동한 중심지였고, 이 곳에서 죽임을 당하고 승천한 곳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심장부라 말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로마(市)는 사도 바울이 네로 황제에 의하여 순교당했고, 베드로 역시 순교당했으며, 그 전부터 원래의 로마제국 수도였기 때문에 중요한 곳이 되었다.
이 도시들은 서울과 마찬가지로 모든 점에서 중요한 중심지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교회의 중심지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특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종교의 자유(Edict of Tolerance 또는 Edict of Milan)를 선언하고 나서 더욱 활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리우스(Arius)의 종교관을 중심으로 하는 아리우스(Arian)계와 나머지 정교회(Orthodox)계 사이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위치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즉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와 그의 성신을 하나로 보는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Trinity)과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에 종속되어 하나님 하나만이 유일한 지상의 신이라는 단성론(單聖論-Monophysitism)이 대결하여 그리스도교계가 둘로 쪼개질 위험에 있었다. 이를 구출하기 위하여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니케아(Nicea)’에서 그리스도교 전체를 망라한 광범한 회의를 열었다. 이것이 유명한 ‘니케아 종교회의’이다. 그리고 381년 두 번째 종교회의를 지금 터키의 콘스탄티노플에서 열었을 때에는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시 다음 가는 두 번째로 중요한 교왕청3(Patriarchate) 소재지로 만들었다. 희랍의 ‘에베소(Ephesus)’에서 세 번째 종교회의가 열렸을 때에는 키프러스(Cyprus) 섬을 독립적인 종교구역인 일종의 자치지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칼케돈(Chalcedon)’에서 4차 종교회의가 열렸을 때에는 ‘예루살렘’을 교왕청 소재지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교왕청 소재지의 중요한 순서로 나열하면 로마 시,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의 순위이고, 각 도시는 당시 로마제국의 일부를 분할하여 교왕이 주재하고 해당 지역을 관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바티칸 주재 교황을 포함하여 다섯 명의 교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마 시의 교왕이 가장 상위의 교왕이었기 때문에 교황(Pope)이라 부르게 된 것 같다. 교리상의 차이 때문에 따로 분가한 이집트의 ‘콥트’ 교회에도 현재 알렉산드리아에 교황청이 주재하는 교황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의 이름은 117대 ‘셰누다 3세(Shenouda III.)’라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교역의 교황은 바티칸 교역에서 384년 로마 교황이라 부르기 시작한 때보다 훨씬 먼저 시작하여 역사가 길다고 한다.
그러나 1054년에 와서 로마 시를 제외하고 나머지 지역은 당시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이슬람에 의하여 모두 점령되었다. 632년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모하메드가 죽은 지 불과 15년 만에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점령하여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은 모슬렘의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되었으며, 당연히 교세가 약해지게 되었다. 안티오크의 경우는 설상가상으로 5세기에 단성론을 주장해 온 시리아 정교회(Syrian Orthodox Church)와 네스토리아 교회(Nestorian Church)가 가톨릭에서 분리·퇴출하여 더더욱 약하게 되었으며, 이에 더하여 이슬람을 믿는 아랍 정권이 수도를 안티오크에서 다마스커스로 옮기어 교왕청도 따라서 다마스커스로 이사하게 되어 또다시 약세에 약세를 거듭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약한 교세에도 불구하고 일단 다마스커스로 옮긴 후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그 줄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 그림자 속에 있는 동방 그리스도 교회의 실상인 것이다.
예루살렘은 637년 아랍 이슬람의 침공으로 함락되었다. 이들 모슬렘들은 철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성숙하였으므로 크리스천들이나 유대교도들의 종교를 존중하여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모두들 이렇다 할 문제없이 회교도 통치하에서 자기의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화목한 사회조건이 11세기와 13세기에 십자군이 쳐들어옴으로써 나빠지게 되었다.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 유럽에서 온 크리스천들인 십자군들은 유대교의 유대인들과 모슬렘과 크리스천의 구별 없이 모두 학살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잠깐 점령한 팔레스타인에 십자군에 의한 라틴 왕국이 들어서서 자기네와 색깔이 다른 크리스천들을 보이는 대로 학살해 버렸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던 교왕청도 사이프러스로 피난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1187년에는 십자군이 차지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이 모슬렘의 반공으로 다시 함락되자 모슬렘이 또다시 주인이 되어, 덕분에 사이프러스로 피란 갔던 교왕청은 안심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들 크리스천들은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바티칸의 크리스천에게 몰살을 당해야 했고, 오히려 완전히 다른 종교인 이슬람 통치 아래에서 안전하게 신앙을 가질 수 있는 이상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여하튼 이 때부터 희랍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간에는 서로 융화할 수 없는 관계가 시작되었다.
안티오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리아 교왕청도 교회 줄기에서 큰 몫을 하던 이집트의 콥트교가 4세기에 분리되어 나감으로써 크게 약화되었고, 이슬람 아랍 군대가 알렉산드리아 성문 앞에 도달했을 때 알렉산드리아 시는 반항 없이 그대로 항복하여 역시 이 곳도 이슬람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16세기 오토만 투르크(Ottoman Turks)가 이집트를 점령하여 알렉산드리아 교왕청을 콘스탄티노플 교왕청 산하로 만든 후 교세는 극도로 약해졌으며, 계속하여 19세기까지 줄곧 감소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아프리카의 복음주의는 점차 다시 부흥을 시작하게 된다.
콘스탄티노플 교왕청의 역사는 신앙적으로는 큰 성장을 보았으나 정치적인 면에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8세기에서 11세기 사이 교세가 커져 점차 서쪽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즉, 서쪽으로는 이탈리아 남단까지, 북쪽으로는 러시아까지 확대되었었다. 그렇지만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의 4차 십자군의 침공으로 1204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을 때, 역시 라틴계 크리스천 십자군에 의하여 잔악하게 이 곳 크리스천들이 학살당하고 교회가 파괴되었으며, 일시적이긴 하지만 잔인했던 로마(바티칸) 교왕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어 당연히 교세가 극도로 약화하게 되었다. 이렇게 지방 크리스천을 포함하여 모슬렘 등 모든 점령지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십자군 크리스천들의 잔악한 행동으로 인하여 다시 진격해 오는 이슬람교도인 오토만제국 군대들이 복수하는 일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전에 비하여 무척 복수심이 강해져 살상을 많이 하였으나 십자군의 잔학상에 비하면 아직도 양반 격이었다. 여하튼 1453년 이들이 다시 진격해와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게 되고, 비잔틴제국의 마지막 왕이 성에 나와 싸우다 전사함으로써 동로마제국인 비잔틴제국은 완전히 사직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렇게 성이 함락되고 비잔틴제국이 없어짐으로써 콘스탄티노플의 독립된 교왕청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은 계속하여 이슬람 세계 안에 있는 크리스천들을 돌보는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크리스천 국가인 비잔틴제국의 보호 대신 이슬람 국가인 오토만제국의 보호 아래 이슬람 영향권 안에 있는 모든 크리스천을 통괄하게 되었기 때문에, 과거 콘스탄티노플 교역 구내에 속한 신도수보다 훨씬 더 많은 크리스천들을 돌보게 되어 교왕은 없지만 실질적으로는 더욱 큰 규모의 크리스천 판도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크리스천들은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사회 속에서 이등 국민의 신세를 면할 수는 없었다. 이들은 세금도 더 많이 내야 했고, 크리스천임을 나타내는 특별한 의상을 입어야 했으며, 선교사업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새로운 교회를 건축하는 일도, 모슬렘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 군대에 입대하는 것도 금지되었었다. 이러한 상황은 오토만제국이 19세기에 동남 유럽 쪽으로 밀려 쫓기고, 1차 세계대전으로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지역적으로 해방됨으로써 동방정교는 콘스탄티노플의 관리를 떠나 희랍, 불가리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각각 독립적인 자치지역을 구성하게 되었으며, 이에 첨가하여 알바니아도 자치교역(自治敎域-autocephalous)으로 1937년 추가되었던 것이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토만제국에 함락되었다는 사실은 동방정교회의 중심지가 러시아로 옮겨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러시아 정교회의 경우는 860년대에 동방교회의 선교사가 지금의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에프(Kiev)에 파견되었고, 988년에 키에프의 왕 블라디미르(Vladimir)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러시아권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1448년에는 독립된 교역(敎域)4을 확립하게 되었고, 1589년에는 교왕을 갖게 될 정도로 확장일로에 있었다. 그러나 17세기에 와서는 이 곳도 교리문제로 동요되고 갈라져 교세가 약화되었다. 이때 모스크바의 교왕 니콘(Nikon)은 모든 미사제식에 틀린 점도 많이 있었고 너무 희랍식이라며 러시아식으로 고치기를 원하였으나 다수의 신도들은 이를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니콘 교왕은 이들을 구식 신도라 하여 박해를 하였으나 이들은 굽히지 않고 계속 옛날방식의 제식을 그대로 지켜 오늘날까지도 계승되고 있는 형편이다.
반면에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 정부의 협조와 선교사 활동의 덕으로 확대되어 다른 작은 종파들을 흡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공산혁명 후 핀란드는 모스크바 관할에서 분리되어 콘스탄티노플 산하로 들어갔고, 1811년 러시아에 합병되었던 ‘조지아(Georgia)’는 1917년 공산혁명으로 오히려 독립된 교역(敎域)을 갖게 되었으며, 1차 대전이 끝나면서 ‘폴란드’라는 나라가 새로 탄생하면서 1924년 폴란드 정교회가 생겨 새로운 교역이 만들어지게 된다. 또 18세기 러시아의 선교사 활동으로 중국에도 러시아 정교회가 설립되었고, 공산혁명 이후 많은 러시아 피난민이 중국으로 이주함으로써 중국에 정교회 신도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7년에 중국은 모스크바 교왕의 범위에서 벗어나 독립된 교역을 차리게 되었다. 또 러시아 정교회는 18세기 알래스카를 아직 러시아가 영토로 갖고 있을 때 이주해 와서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북미에서는 1970년 자치교역이 인정되었으며, 일본에도 1853년에 러시아 외교관을 통하여 전도되어 뿌리를 내리게 되어 교세가 커지게 되었고, 여기도 1970년에 모스크바에서 이탈하여 독립된 교역을 갖게 된다. 소련연방공화국이 붕괴되면서 과거 소련의 영향하에 있던 동구권 국가들은 각각 자치교역을 선언하게 된다. 즉, 1991년에 우크라이나가 자주교역을 공표하였고, 1951년에 준자주권을 갖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가 같은 해에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이들은 다시 두 나라로 쪼개지면서 1993년에 체코 정교회와 슬로바키아 정교회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근래에 와서 유니에이트 교회 (Uniate Churches-연합동방가톨릭교회)라는 것이 탄생하여 역사적으로 중요한 변환이 발생하였다. 이 교회들의 대부분은 과거 소련연방 시대 모스크바 영향권 내에 있던 동방교회로 바티칸 로마 가톨릭과 연결을 맺은 것이다. 이들은 과거 지켜 오던 동방교회의 제식을 그대로 지키면서 미사를 드리며, 이것은 사실상 바티칸과 함께 교제(communion)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동방교회들의 교역은 바티칸에 속해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종파로는 레바논의 마로나이트(Maronites)와, 시리아에 주로 분포되어 있는 멜키데(Melkites) 가톨릭과, 우크라이나에 있는 우크라이나 유니에이트 교회를 들 수 있다.
이들 교회의 특성을 살펴보면 교리 면에서 약간 복잡한 역사를 갖고 있다. 우선 이들은 삼위일체원리를 인정하는 동방정교회 속의 교파였다. 멜키데 가톨릭 교회는 삼위일체와 단성론의 싸움으로 로마 가톨릭을 말하는 서방교회와 동방정교회를 결정적으로 갈라놓게 한 451년의 칼케돈 종교회의 이후 비잔틴제국에 끝까지 충성한 종파로, 안티오크 산하 시리아 정교회 주류에서 이탈한 교파이다. 그리고 멜키데 종파는 18세기에 다시 둘로 갈라졌다. 하나는 콘스탄티노플 교왕 산하에 들어갔고, 하나는 로마 시의 바티칸 교황 산하에 들어가 이들을 멜키데 가톨릭 교회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마로나이트는 4세기 성 마론(St. Maron)이라는 수도승을 따르던 사람들이 만든 종파이다. 시리아에 회교도들이 침공하였을 때 ‘마로나이트’들은 레바논에 있는 어느 한적한 산으로 피난간 것이 그 곳에 정착하게 되면서 특유의 종파를 갖게 되었고, 이들이 11세기와 12세기 십자군과 내통하면서 바티칸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이 그 기원이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도 레바논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며, 약 20여 년 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점령했을 때 정치적 세력을 얻은 그룹이 바로 이 사람들이었고, 2000년에 이스라엘이 레바논에서 철수하기 때문에 그 동안 이스라엘에 의지하여 세력을 폈던 크리스천들이 위험을 느껴 대거 이스라엘로 피난한 부류가 바로 이 사람들인 것이다.
우크라이나 유니에이트 교회는 1596년 키에프(Kiev) 메트로폴리탄 정교회 교구를 로마 가톨릭과 교제시킨 소위 ‘브레스트 리토프스크(Union of Brest Litovsk)’라는 결합으로 이루어진 교파이다. 이들은 1945년 소련 정부의 탄압을 받아 러시아 정교회에 속하든가 지하로 들어가야 하는 운명에 처했었다. 그러나 1989년 다시 소련 정부로부터 법적 보호를 보장받아 지상으로 나오게 되었으며, 그 동안 러시아 정교회에서 갖고 있던 많은 교회의 기물이나 소유물들을 되돌려 받아 다시 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들은 재빠른 회복으로 1991년에는 신도수 5백만에 교회수가 2천 개 이상을 헤아리게 되었던 것이다.
註 3 : 교왕청(敎王廳) 및 교왕(敎王) = 이것은 필자 역이다. 영어로 ‘patriarchate’ 또는 ‘patriarch’를 말하며, 한글 사전에 보면 동방교회의 교직 또는 원로라고 표기되어 있어 독자로 하여금 진정한 뜻을 오해할 염려가 있다고 생각하여, 의미를 좇아 교왕청과 교왕으로 풀이하였다. 로마 시 안에 소재하고 있는 바티칸 시(~市-Vatican See)에 있는 교황(敎皇)은 으뜸 되는 교왕이었다. 당시 ‘크리스텐돔(Christendom)’, 즉 그리스도 왕국을 다섯으로 분할하여 통괄하였다. 제일 상위가 ‘로마 시’, 둘째가 ‘콘스탄티노플’, 셋째가 ‘알렉산드리아’, 넷째가 ‘안티오크’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이었다. 그 때문에 마찬가지의 직위에 있는 모든 ‘patriarch' 중에서도 유별 바티칸의 교왕은 ‘교황(Pope)’이라고 불렀다. 때문에 ‘patriarch'은 교황보다는 직위가 낮지만 자기 교역(敎域) 내에서는 교황과 마찬가지의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다. 마치 황제와 왕과의 차이와 같기 때문에 교황보다 약간 격이 낮은 교왕(敎王)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이다. 로마 시의 교왕을 우두머리 교왕으로 교황이라 부르게 된 것은 그리스도교 교리와는 관계없이 다만 정치적 중요성으로 결정된 것으로 안다.
註 4 : 교역(敎域-patriarch) = 교왕이 관장하는 영역이라는 뜻에서 필자가 부친 용어이다. 따라서 ‘교역’ 테두리 안에 여러 나라가 있을 수 있고, 그 나라 안에 교구(敎區-diocese)가 여럿 있게 되는 것이다.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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