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지구 메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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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범들
암살이 있었던 날, 부시는 텍사스주에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던 건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1960년 이래로 전직 쿠바 경찰 간부였던 펠릭스 로드리게스[Felix Rodriguez]에 의해 지휘되었던 비밀 쿠바 침공 팀의 총 책임자로서, 그 역시 1963년 달라스에 있었다. 부시는 닉슨을 위한 여러가지 비밀 작업 팀들을 총괄적으로 감독했었고, 그러한 팀에 소속되어 활동했던 몇몇 쿠바인들은 자프루더[Zapruder] 필름 속에 잡히기도 했다.
*** [Hatonn : 케네디 암살을 촬영한 몇가지 필름들 가운데 이것은 영화 ‘JFK’에 일부 사용되기도 했다. 나는 진심으로, 이 글이 조지 그린[George Green], 그리츠[Gritz], 그리고 스톤[Stone]에게 전해질 수 있길 바란다. 스톤은 이미 관련 자료들을 확보하고 있지만, 그러한 자료들을 자신에게 전해준 자들로부터의 코멘트를 필요로 하고 있다. 올리버 스톤에게는 지금 너무나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다?그를 지원해 주길 바란다!]***
1959년 로드리게스는 쿠바 바티스타[Batista] 정부 아래에서 최고의 경찰이었다. 바티스타 정권이 전복되고, 그가 마이애미로 도주하였을 때, 로드리게스 역시, 프랭크 스터지스[Frank Sturgis], 라파엘 퀸테로[Rafael Quintero]와 함께 그를 따라갔다. 공식적으로, 그는 CIA의 쿠바 침공 (그는 이 문제에도 관여했다.) 및 케네디 암살 사건이 있은 후인 1967년까지는 CIA 요원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최근 발견된 기록들에 따르면 쿠바 침공 준비과정에서 그는 조지 부시의 눈에 띄어 1961년에 이미 CIA에 합류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로드리게스가, 왜 자신이 부시의 가깝고도 내밀한 친구였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건지를 설명해 준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로드리게스는 1976년, 즉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자신이 연루되었던 문제로 감옥에 갔었던, 바로 그 해로부터 CIA를 떠났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롤링스톤[Rolling Stone]지(1988년 11월 3일자)의 기자 콘[Kohn]과 몽크스[Monks]에 따르면, 로드리게스는 여전히 CIA의 본부에 매달 드나들며, 자신의 일감을 받아 나오고, 매번 자신의 푸른색 1987년형 방탄 케딜락 자동차를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케네디가 암살되었을 때, 그가 어디 있었던 것인지를 롤링 스톤지의 기자들이 물었을 때, 그의 답변이란, “기억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조지 부시는 1976년, 전직 워렌[Warren] 위원회 운영 책임자이자,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에 의해 CIA국장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결코 CIA를 위해서 일했던 적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톤 : 행간을 읽도록 하라. 조지 부시는 그 때는 물론이거니와 나중에 대통령 후보로서 선거운동을 할 때에도 거짓말을 했다.]***
그가 CIA에 최초에 들어올 때 받았던 지시사항에 따라, 그는 CIA에서 일한 적이 없었노라고 말할 것으로, “회사”에 이미 맹세했었음을 기억하라.
***[하톤 : CIA는 비밀 조직으로서 그 어느 누구라도 상부로부터의 구체적인 지시가 없이는 멤버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점을 알기 바란다.]***
진실을 말하자면, 부시는 1961년 쿠바 침공이전부터 이미 최고위층 CIA간부로서 펠릭스 로드리게스와 함께 일하고 있었다. 부시는, 1959년 CIA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 부인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로드리게스 관련 파일들 및 기타 쿠바 피그스[Pigs]만 침공 관련 자료들 속에는 부시의 역할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미국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기업체들은 CIA 안에서 경험을 쌓고 이미 잘 훈련된 자가 아닌 한은, 어느 누구도 결코 그러한 국가적 비밀 작업 속에 투입시키지 않는다. (관련 증빙 자료 : “Project Censored Report”, 1989년 2월. 칼 젠센[Carl Jensen] 박사, Sonoma State College)
리처드 닉슨의 전기에 따르면, 부시 가문과 닉슨간의 개인적, 정치적 유대는 1941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당시 닉슨은, 조지 부시의 부친인 프레스콧 (셸던) 부시[PRESCOTT (SHELDON) BUSH]에 의해 지휘되던 부유한 사업가 단체에 의해, LA지역의 한 신문에 게시되었던 광고를 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국회의원 후보로 지원할 젊고, 유순한 성품의 후보를 물색 중이었는데, 닉슨이 이에 지원했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닉슨은 부시가 이끄는 그룹의 대변인같은 존재가 되었다. (출처 : L. F. Prouty)
***[하톤 : 기억해야 될 아주 중요한 이름이며, 그는 스톤 감독의 ‘JFK’영화와도 관련되어 있다.]***
사실상, 1950년 프레스콧 부시는 아이젠하워-닉슨의 당선을 위한 물밑 작업에도 큰 공을 세웠다. (출처 : “George Bush”, F. 그린[Green], hipocrene, 1988)
리처드 닉슨은 1956년부터 1960년까지 부통령이었다. 사실, 닉슨은 1959년 대통령 선거 켐페인동안에도, 1961년도 비밀 쿠바 침공 계획이었던 “작전 40 (Operation 40)”의 책임자로서 활동했다. 쿠바 민중 봉기에 의해 바티스타가 쫓겨난 이후,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가 권좌에 올랐고, 카스트로는 미국의 기업체들에게 쿠바 노동자들에게 적정임금을 지불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에 응하기는 커녕, 펩시 콜라의 경우 쿠바산 설탕에 대해 세계 시장에서의 최저 가격으로만 거래할 것이라고 밝혔다.
펩시콜라, 포드 자동차, 스텐다드 오일사 그리고 마피아 마약 판매상들은 적정 임금 지불을 요구하는 카스트로의 정책들이 그들의 수익구조에 해를 끼친다고 판단하여, 그를 제거해야 할 인물로 지목했다. 결국 이러한 기업체들은 당시 부통령이었던 닉슨에게 카스트로의 제거를 부탁했다. 닉슨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했지만, 우선은 존 F 케네디라 불리는, 잘 알려지지도 않은 민주당의 “애숭이”를 상대로 1960년 선거에서 이긴 다음에 곧 착수할 것이라고 했다.
닉슨은 쉬운 승리가 될 것으로 보았다. 전 미국에 걸친 대부분의 여론 조사에서 닉슨의 승리가 점쳐지기도 했었다. 게다가 케네디는 카톨릭 신자였는데, 미국인들은 여자, 흑인, 또는 유태인을 선출하지 않는 것처럼 카톨릭 신자도 뽑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되어졌었다. 때는 1959년이었다.
닉슨은, 자신들의 자산을 쿠바 농민들에게 되돌려 줌을 통해 손해를 입게 되었던 펩시 콜라, 스텐다드 오일사 및 기타 기업체들에게 말하기를, 자신이 선거에게 이기는데 도와주기만 한다면, 그는 카스트로 제거를 위한 쿠바 침공을 반드시 수행해 낼 것이라고 약속했다. 닉슨은 자신의 선거 캠페인 지지자들을 고무시킬 목적으로, 당선되자마자 쿠바 침공 비밀 계획인 ‘작전 40’팀을 구성할 것을 CIA에 지시하기도 했다.
CIA측에서는, 쿠바 침공 병력 편성에 있어서, 쿠바 망명자들 가운데 적절한 인물들을 선발하는 임무를, 텍사스 출신 백만장자이자 CIA요원이기도 한 조지 부시에게 맡겼다. 텍사스 석유 사업과 관련한 부시의 배경을 추적해 볼 때, 석유 운반선 임대업으로 부시의 사업 파트너였던 두사람은 다음과 같았다 :
텍사스 출신의 로버트 모스바쳐[Robert Mosbacher]와 역시 텍사스 출신의 제임스 베이커[James Baker]. 나중에 모스바쳐는 미상무장관이 되고, 베이커는 JFK 암살시 덜레스[Dulles]가 가졌던 직책이기도 한 국무장관이 된다. (Common Cause, 3-4월, 1990)
언론상에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의 대화로 알려진, 1972년 6월 23일자, 워트게이트 테잎 녹음 내용에 따르면, 닉슨은 자신의 참모장이었던 H. R. 헬더먼[Haldeman]과 함께, 당시 CIA의 워트게이트 침입 사건에 대해 취해지고 있던 FBI의 조사를 어떻게 멈추도록 만들 것인지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사가 결국엔 “피그스만 침략 계획”에 대한 자신들의 연루관계를 밝혀 내게 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 걱정했다. 헬더먼은 “권력의 최후”라는 자신의 책에서, 닉슨은 1963년 케네디 암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항상 코드명을 사용했었다고 밝혔다. 헬더먼에 따르면, 닉슨은 이 암살 사건을 늘 “피그스만”이라고 언급했던 것이다.
녹취록 상에서, 닉슨은 조지 부시의 사업파트너이자 닉슨의 선거 운동 때, 텍사스 지역 기금모집 책임업무를 맡기도 했던 로버트 모스바쳐의 역할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테잎에서 닉슨은 계속해서 “쿠바사람들”, 그리고 “텍사스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썼다. 여기서 “텍사스 사람들”이란 부시, 모스바쳐 그리고 베이커였다. 이것은 케네디 암살에 있어서 부시와 닉슨의 연루관계에 대한 증빙자료들을 부시와 보다 직접적으로 이어주는 또 하나의 고리였던 것이다.
같은 녹취록에서 닉슨은 “쿠바사람들”, “텍사스 사람들”, “헬름스[Helms]”, “헌트[Hunt]”, “버나드 바커[Bernard Barker]”, “로버트 모스바쳐[Robert Mosbacher]”를 꾸준히 함께 연계시켜 언급했다. 워터게이트 테잎 상에서 이러한 이름들은 계속 등장하는데, 특히 닉슨이 CIA를 시켜 워터게이트 빌딩 침입을 통해 그가 확보하려 했었던, 달라스에서 찍힌 사진들에 대한 논의를 하는 중에 그 이름들은 보다 자주 거명되었다.
프랭크 스터지스는, “‘우리’가 워터게이트 빌딩에 잠입했던 이유는, 바로 닉슨이, 존 F 케네디 암살시 찍힌 사진들 속에서 우리가 했던 역할들에 대한 비밀들이 언론에 새어 나가는 것을 막는데 관심이 컸기 때문이었다”라고 언급했다.
***[하톤 : 아, 그렇군. 그러고 보니 이제야, 투표자 명단 확보라는 둥, 정책 대변인들을 위한 선거 계획 확보라는 둥 떠들어 대던 엉뚱한 소리들을 넘어, 왜 그들이 그 건물에 침입에 들어갔는지가 보다 잘 이해가 되는군. 그렇지 않은가?]***
1972년 압도적인 선거전 승리를 이끈 후, 닉슨은 모든 권력을 백악관으로 집중시켜, 자신의 측근 그룹만이 권력을 행사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단지 권력을 독점할 뿐만이 아니라, 마치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았듯이 자신이 어떻게 비밀리에 백악관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인지에 대해 언론들이 파헤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만 했다.
닉슨이 대통령이 된 후에 한 첫번째 일이란, 전체 주요 정부 구성원들로부터 사직서를 받는 것이었다. 재임명에 앞서 일단 “모두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그는 존 얼리히만[John Ehrlichman]에게 말했지만, “조지 부시만큼은 예외였는데, 그 이유는 부시는 그들을 위해서 무슨일이라도 할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출처 : 충성 맹세 “Pledging Allegiance”, Sidney Blumenthal)
부시가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의 손은, 닉슨, 헌트, 스터지스, 펠릭스 로드리게스 그리고 제럴드 포드만큼이나 케네디의 피로 충분히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백악관 갱단은 그들이 어떻게 권좌에 오르게 되었는지를 대중이 알게 될까봐 두려워 했는데, 만약 조금이라도 알려진다면 이를 계기로 그들의 이 취약한 사기, 협잡의 스토리가 들통나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들 모두가 감옥에 쳐넣어지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CIA 워터게이트 침입 사건의 또 다른 주요 구성원들 중, 부시가 충원했었던 인물로는 프랭크 스터지스, E. 하워드 헌트[E. Howard Hunt], 버나드 바커, 라파엘 퀸테로가 있었다. 퀸테로는 공공연히 말하기를, 만약 자신이 달라스에서 있었던 일과 피그스 만 사건에 관련하여, 자신이 아는 바를 다 이야기하게 된다면, “그건 전 미국을 뒤흔들 가장 큰 스캔들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한편, 1960년, 프레스콧 부시는 닉슨의 선거운동을 후원중이었다. 당시, 닉슨은 한 때 남 베트남으로가서 프랑스의 지원을 받고 있던 정부에게 말하기를, 만약 프랑스가 지원을 철회한다면 미국이 개입하여 골든 트라이앵글로부터의 마약 무역을 보호해 주겠노라고 했다. (출처 : “Frontline”, 1988, “총, 마약 그리고 CIA”; S. F. 에그자미너[S. F. Examiner], 1991년 2월 2일; 동남아시아 헤로인 정치, 알프레드 멕코이[Alfred McCoy], 1972)
***[하톤 : 이 점에 관해서는 제임스 그리츠[James Gritz] 대령도 확인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데, 그는 바로 그 “골든 트라이앵글”이라는 음모의 쥐덫에 걸려서 범죄자들로부터 총부리가 겨뉘어지는 일을 당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59년 부통령이던 닉슨은 거의 대통령처럼 행세하며 전세계를 돌아다녔다. 닉슨에게는 손쉬운 선거처럼 보였다. 하원의원이던 제럴드 포드는 닉슨을 위한 기금 모집에 엄청난 일을 수행해내고 있었고, 조지 부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유한 자들은 모두 닉슨 편이었다. 언론은 닉슨이 던져주는 뼈다귀라면 앞뒤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물었다.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면, 그건 쿠바 침공 계획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 만큼은 닉슨이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분명 비밀사항이었다. 쿠바가 임박한 침공에 대한 낌새를 채도록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런데, 케네디는 오히려 닉슨보다 쿠바에 대해 보다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데, 실상 그는 미국의 기업체들과 CIA가 모의하여 쿠바 침공 계획을 짜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닉슨은 1960년 선거에서 미국 역사상 최소득표차로 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 닉슨, 카벨[Cabell] 그리고 헌트는, 대통령인 케네디한테도 알리지 않고, 처음 계획대로 쿠바 침공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작전 당일 새벽 4시, 침공 시작 단 두시간을 앞두고, 카벨 장군은 JFK에게 전화를 걸어, CIA의 쿠바 침공을 위한 미 공군 병력 출동을 허락해 줄 것을 대통령에게 부탁했다. 케네디는 ‘NO’라고 대답했다.
CIA측은 JFK에 대해 분노했지만, 그냥 계획대로 그들만의 침공 작전이라도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정보상의 문제로 인하여, CIA는 해안가 최악의 지점이라고 할만한 늪지대에 상륙했다. 침공은 실패로 돌아갔다. CIA는 최정예요원 115명을 잃고, 또다른 1100명의 요원은 쿠바 교도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CIA가 겪은 역사상 최악의 실패였다. (출처: E. 하워드 헌트[E. Howard Hunt], “Give us This Day”)
부시, 닉슨 그리고 헌트는 우선 케네디에게 그런 걸 물어봤던 카벨을 비난했고, 또한 이를 거절한 케네디도 함께 비난했다. 그들은 모두 분노에 펄펄 뛰었다. 닉슨을 후원했던 기업체들은 쿠바 교도소에 갇힌 1100명의 요원들을 송환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취해 줄 것을 JFK에게 요구했다. JFK는 그렇게 했다. 한때 잘 훈련된 쿠바 출신 요원들을 보유했었던 CIA로서는, 나중에라도 쿠바 침공을 다시 수행할 것이라고 결심했지만, 우선은 이 S.O.B. (Son of B***h) 케네디부터 제거할 것으로 마음먹었다.
1964년도 선거가 임박할 무렵이었다. 닉슨은 또다시 케네디와 맞붙게 될 전망이었다. 부시, 포드, 그리고 닉슨은 그들이 만약 JFK를 지금 제거하지 않으면, 로버트[Robert]와 테드[Ted]를 양쪽으로 거느린 케네디파들이 백악관을 1984년까지 장악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보았다.
그들은 백악관에 입성하는데 1984년까지 기다리지는 않기로 결심했다. 쿠바출신의 “저격수들”은 케네디가 가는 곳이면 어디라도 따라다니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케네디가 시카고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덜레이[Daley] 시장의 협조를 구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달라스[Dallas]에서는 마침내 최고의 타이밍을 잡을 수 있었다. 달라스 시장은, CIA가 침공 실패로 피난을 퍼부었던 카벨 장군의 동생이었다. 카벨 장군은 자신의 동생 얼[Earl]을 설득하여, 대통령이 탄 차량 행렬이 원래 지나기로 되어 있던 경로를 변경하여, 풀밭이 있는 언덕 옆을 약 3마일의 속도로 지나가도록 했다.
***[하톤 : 누가 차량 행렬의 경로를 변경하고 조정했던 것인지에 대한 대답이 바로 여기 있군. 그렇지 않은가?] 헌트와 스터지스는 풀밭에서 JFK를 쏘았다. 그들은 체포되었고, 사진찍혔으며, 15명의 목격자도 있었다. 하지만 언론은 그 사진들을 못 본 체 했고, 그 후 25년동안 세상은 사진 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살피며, 진실을 찾고 있을 뿐이다. [하톤 : 이 점을 알기 바란다. 케네디를 향해 발사된 또 다른 한 발은 바로 케네디 자신의 “비밀 보좌역”을 맡았던 차량 운전기사였다는 것을.]***
케네디가 살해된 날, 닉슨, 헌트, 그리고 또 다른 몇몇의 워터게이트 사건 멤버들과 더불어 한 무리의 쿠바인들도, 달라스에서 찍힌 사진 속에 들어 있었다. 케네디가 탄 리무진이 지나갈 때, 그 중 한 명이 일종의 신호로서 우산을 위로 들어 올렸고, 그 때 케네디는 저격되었다. 자프루더[Zapruder] 필름 상에는 이 신호용 우산을 든 쿠바인들이 뚜렷이 나타나 있고, 십여명은 암살 장면이 담긴 필름 속에 계속 나타난다. 살해 직후, 조용하고도 유유히 그들이 자리를 빠져나가는 장면이 비춰진다.
닉슨은 그가 달라스에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하지만 새로 발견된 사진들과 정황들은 그가 그 곳에 있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닉슨은 FBI에게 말하기를 케네디가 죽은 날 자신이 어디 있었던 건지 기억하지 못하겠다고 주장했다. 잭 앤더슨[Jack Anderson]은 1988년 한 TV 특집프로그램에서 의심의 수준을 넘어서, 달라스의 그 풀밭 뒤쪽에서 체포되었던 두 명의 방랑자들은 헌트와 스터지스였음을 밝혀 냈다.
***[하톤 : 나아가, 만약 당신이 팁 오닐[Tip O’Neill]에게 이 풀밭으로부터의 총격에 관한 정보원을 캐묻는다면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그는 그들 역시 총격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며 또한 그들을 쏜 자들도 알고 있다!]***
살해 직후, 전직 부통령이었던 닉슨은 린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에게, 닉슨의 친구이자 전직 FBI 요원이었던 제럴드 포드에게 워렌[Warren] 위원회의 운영 책임을 맡길 것을 부탁했다. 닉슨은 또한 닉슨의 오랜 지지자인 얼 워렌[Earl Warren] 판사를 이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할 것도 함께 부탁했다. 린든 존슨은 이 모두를 다 수락했다. 포드는 모든 증인들을 다 인터뷰 한 다음에, 어떤 증언들이 공개되고, 어떤 증언들이 묵살될지를 결정했다.
스피로 에그뉴[Spiro Agnew]가 쫓겨난 후 닉슨이 포드를 자신의 부통령으로 선택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이다. 닉슨 자신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파멸 직전에 몰리게 되자, 얼 워렌은 또다른 특별 위원회를 만들어서 그를 곤란으로부터 구해내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포드는 물론 워트게이트 침입 사건으로부터 닉슨을 사면해 주었다. 하지만 닉슨은 여전히 곤란을 면치 못하는 상태였다. 왜냐하면, 약 4000시간 분량의 워트게이트 사건 테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2년 6월 23일 존 딘[John Dean] 그리고 헬더만[Haldeman]과의 논의가 담긴 테잎에는, 닉슨이 헌트를 고용하여 JFK를 살해했음을 공공연히 “고백하는” 명백한 증거들이 들어 있다. 바로 여기에, 몇몇 테잎들에 대한 의회에서의 청취 직후, 왜 워트게이트 사건 “조사”가 비밀 회의로 소집되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나타나 있다.
***[하톤 : 당신은 JFK살해와 관련된 CIA 테잎들이 공개되면 더 잘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가? 꼭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주의깊게 조사를 한다면, 몇몇 단서들은 결국엔 드러날 것이다.]***
JFK가 쿠바 피그스만 침공에 공군 병력 지원을 막았다는 이유로 닉슨과 부시가 그를 살해하기로 공공연히 모의했었다는 사실을 의회가 알았을까? 닉슨이 부시를 포함한 자신의 내부 세력들과 나눈 모든 이야기들이 실제로 다 녹음이 되었었고, 나중에 그는 몇몇 사람들을 매수하려하기도 했었다.
1968년 백악관에서 부시가 닉슨에게 보고를 하는 사진이 한 장 있다. 만약 이 4000시간 분량의 전체 녹음 테잎이 모두 무삭제로 공개되어, 그날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면 대단히 흥미로울 것이다. 1963년 JFK살해 사건의 비밀을 풀어주는 열쇠는 바로 이 미공개의 3988시간에 이르는 백악관내 녹취 테잎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하톤 : 부시는 ‘단지 우연히’ 레이건이 피격되었던 날에도 달라스에 있었다.. 아주 흥미롭지 않은가?]***
문제는 케네디 암살과 같은 이 엄청난 음모에 있어서 전체가 아닌, 단지 한가지 사안만을 고려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케네디는 베트남 전쟁을 끝낼려고 했다.
그는 쿠바 침공에서도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는 골든 트라이앵글 정부 은폐 및 마약 무역 문제에도 대립각을 세웠다.
그는 연방 준비 시스템으로부터 조폐업무를 되찾아와, 헌법적 근거를 가진 “화폐” 제작을 지지하려 했다.
실제로 그는 타겟 중에서도 타겟이었다. 올리버 스톤은 이제 막 자신의 일을 시작했을 뿐이다.
나는 거듭 요구한다. 시민들이여, 거짓이 계속적으로 공개되어 지도록 만든다면 당신들은 진실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진실의 뚜껑은 열려있고, 진실을 밝혀내려는 이들의 노력을 지지해주도록 하라. 이러한 모든 내부 범죄들에 대한 은폐는, 당신들의 나라를, 당신들의 보다 영악한 적들에게 먹이로 내어주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감히 용감하게 전선앞으로 나서는 자들을 돕는데 있어서, 단지 당신들의 지지를 글로서 표현할 수 밖에는 없을지라도, 여기 나와 있는 내용들을 통해 부디 통찰력을 갖게 되길 바란다. 노스[North]는 현 상황을 “교전중”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인데,
나는, 용감하게 당신의 나라를 새롭게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애쓰는 이 “최전선에 있는 자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영예가 돌려져야 마땅할 이들에게 나는 겸허히 내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피닉스 저널 제 43권, “Tangled Webs, “Gotcha””?Vol I. 제 4장. pp. 72-80.
http://www.fourwinds10.com/journals/
암살이 있었던 날, 부시는 텍사스주에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던 건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1960년 이래로 전직 쿠바 경찰 간부였던 펠릭스 로드리게스[Felix Rodriguez]에 의해 지휘되었던 비밀 쿠바 침공 팀의 총 책임자로서, 그 역시 1963년 달라스에 있었다. 부시는 닉슨을 위한 여러가지 비밀 작업 팀들을 총괄적으로 감독했었고, 그러한 팀에 소속되어 활동했던 몇몇 쿠바인들은 자프루더[Zapruder] 필름 속에 잡히기도 했다.
*** [Hatonn : 케네디 암살을 촬영한 몇가지 필름들 가운데 이것은 영화 ‘JFK’에 일부 사용되기도 했다. 나는 진심으로, 이 글이 조지 그린[George Green], 그리츠[Gritz], 그리고 스톤[Stone]에게 전해질 수 있길 바란다. 스톤은 이미 관련 자료들을 확보하고 있지만, 그러한 자료들을 자신에게 전해준 자들로부터의 코멘트를 필요로 하고 있다. 올리버 스톤에게는 지금 너무나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다?그를 지원해 주길 바란다!]***
1959년 로드리게스는 쿠바 바티스타[Batista] 정부 아래에서 최고의 경찰이었다. 바티스타 정권이 전복되고, 그가 마이애미로 도주하였을 때, 로드리게스 역시, 프랭크 스터지스[Frank Sturgis], 라파엘 퀸테로[Rafael Quintero]와 함께 그를 따라갔다. 공식적으로, 그는 CIA의 쿠바 침공 (그는 이 문제에도 관여했다.) 및 케네디 암살 사건이 있은 후인 1967년까지는 CIA 요원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최근 발견된 기록들에 따르면 쿠바 침공 준비과정에서 그는 조지 부시의 눈에 띄어 1961년에 이미 CIA에 합류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로드리게스가, 왜 자신이 부시의 가깝고도 내밀한 친구였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건지를 설명해 준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로드리게스는 1976년, 즉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자신이 연루되었던 문제로 감옥에 갔었던, 바로 그 해로부터 CIA를 떠났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롤링스톤[Rolling Stone]지(1988년 11월 3일자)의 기자 콘[Kohn]과 몽크스[Monks]에 따르면, 로드리게스는 여전히 CIA의 본부에 매달 드나들며, 자신의 일감을 받아 나오고, 매번 자신의 푸른색 1987년형 방탄 케딜락 자동차를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케네디가 암살되었을 때, 그가 어디 있었던 것인지를 롤링 스톤지의 기자들이 물었을 때, 그의 답변이란, “기억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조지 부시는 1976년, 전직 워렌[Warren] 위원회 운영 책임자이자,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에 의해 CIA국장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결코 CIA를 위해서 일했던 적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톤 : 행간을 읽도록 하라. 조지 부시는 그 때는 물론이거니와 나중에 대통령 후보로서 선거운동을 할 때에도 거짓말을 했다.]***
그가 CIA에 최초에 들어올 때 받았던 지시사항에 따라, 그는 CIA에서 일한 적이 없었노라고 말할 것으로, “회사”에 이미 맹세했었음을 기억하라.
***[하톤 : CIA는 비밀 조직으로서 그 어느 누구라도 상부로부터의 구체적인 지시가 없이는 멤버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점을 알기 바란다.]***
진실을 말하자면, 부시는 1961년 쿠바 침공이전부터 이미 최고위층 CIA간부로서 펠릭스 로드리게스와 함께 일하고 있었다. 부시는, 1959년 CIA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 부인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로드리게스 관련 파일들 및 기타 쿠바 피그스[Pigs]만 침공 관련 자료들 속에는 부시의 역할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미국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기업체들은 CIA 안에서 경험을 쌓고 이미 잘 훈련된 자가 아닌 한은, 어느 누구도 결코 그러한 국가적 비밀 작업 속에 투입시키지 않는다. (관련 증빙 자료 : “Project Censored Report”, 1989년 2월. 칼 젠센[Carl Jensen] 박사, Sonoma State College)
리처드 닉슨의 전기에 따르면, 부시 가문과 닉슨간의 개인적, 정치적 유대는 1941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당시 닉슨은, 조지 부시의 부친인 프레스콧 (셸던) 부시[PRESCOTT (SHELDON) BUSH]에 의해 지휘되던 부유한 사업가 단체에 의해, LA지역의 한 신문에 게시되었던 광고를 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국회의원 후보로 지원할 젊고, 유순한 성품의 후보를 물색 중이었는데, 닉슨이 이에 지원했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닉슨은 부시가 이끄는 그룹의 대변인같은 존재가 되었다. (출처 : L. F. Prouty)
***[하톤 : 기억해야 될 아주 중요한 이름이며, 그는 스톤 감독의 ‘JFK’영화와도 관련되어 있다.]***
사실상, 1950년 프레스콧 부시는 아이젠하워-닉슨의 당선을 위한 물밑 작업에도 큰 공을 세웠다. (출처 : “George Bush”, F. 그린[Green], hipocrene, 1988)
리처드 닉슨은 1956년부터 1960년까지 부통령이었다. 사실, 닉슨은 1959년 대통령 선거 켐페인동안에도, 1961년도 비밀 쿠바 침공 계획이었던 “작전 40 (Operation 40)”의 책임자로서 활동했다. 쿠바 민중 봉기에 의해 바티스타가 쫓겨난 이후,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가 권좌에 올랐고, 카스트로는 미국의 기업체들에게 쿠바 노동자들에게 적정임금을 지불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에 응하기는 커녕, 펩시 콜라의 경우 쿠바산 설탕에 대해 세계 시장에서의 최저 가격으로만 거래할 것이라고 밝혔다.
펩시콜라, 포드 자동차, 스텐다드 오일사 그리고 마피아 마약 판매상들은 적정 임금 지불을 요구하는 카스트로의 정책들이 그들의 수익구조에 해를 끼친다고 판단하여, 그를 제거해야 할 인물로 지목했다. 결국 이러한 기업체들은 당시 부통령이었던 닉슨에게 카스트로의 제거를 부탁했다. 닉슨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했지만, 우선은 존 F 케네디라 불리는, 잘 알려지지도 않은 민주당의 “애숭이”를 상대로 1960년 선거에서 이긴 다음에 곧 착수할 것이라고 했다.
닉슨은 쉬운 승리가 될 것으로 보았다. 전 미국에 걸친 대부분의 여론 조사에서 닉슨의 승리가 점쳐지기도 했었다. 게다가 케네디는 카톨릭 신자였는데, 미국인들은 여자, 흑인, 또는 유태인을 선출하지 않는 것처럼 카톨릭 신자도 뽑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되어졌었다. 때는 1959년이었다.
닉슨은, 자신들의 자산을 쿠바 농민들에게 되돌려 줌을 통해 손해를 입게 되었던 펩시 콜라, 스텐다드 오일사 및 기타 기업체들에게 말하기를, 자신이 선거에게 이기는데 도와주기만 한다면, 그는 카스트로 제거를 위한 쿠바 침공을 반드시 수행해 낼 것이라고 약속했다. 닉슨은 자신의 선거 캠페인 지지자들을 고무시킬 목적으로, 당선되자마자 쿠바 침공 비밀 계획인 ‘작전 40’팀을 구성할 것을 CIA에 지시하기도 했다.
CIA측에서는, 쿠바 침공 병력 편성에 있어서, 쿠바 망명자들 가운데 적절한 인물들을 선발하는 임무를, 텍사스 출신 백만장자이자 CIA요원이기도 한 조지 부시에게 맡겼다. 텍사스 석유 사업과 관련한 부시의 배경을 추적해 볼 때, 석유 운반선 임대업으로 부시의 사업 파트너였던 두사람은 다음과 같았다 :
텍사스 출신의 로버트 모스바쳐[Robert Mosbacher]와 역시 텍사스 출신의 제임스 베이커[James Baker]. 나중에 모스바쳐는 미상무장관이 되고, 베이커는 JFK 암살시 덜레스[Dulles]가 가졌던 직책이기도 한 국무장관이 된다. (Common Cause, 3-4월, 1990)
언론상에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의 대화로 알려진, 1972년 6월 23일자, 워트게이트 테잎 녹음 내용에 따르면, 닉슨은 자신의 참모장이었던 H. R. 헬더먼[Haldeman]과 함께, 당시 CIA의 워트게이트 침입 사건에 대해 취해지고 있던 FBI의 조사를 어떻게 멈추도록 만들 것인지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사가 결국엔 “피그스만 침략 계획”에 대한 자신들의 연루관계를 밝혀 내게 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 걱정했다. 헬더먼은 “권력의 최후”라는 자신의 책에서, 닉슨은 1963년 케네디 암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항상 코드명을 사용했었다고 밝혔다. 헬더먼에 따르면, 닉슨은 이 암살 사건을 늘 “피그스만”이라고 언급했던 것이다.
녹취록 상에서, 닉슨은 조지 부시의 사업파트너이자 닉슨의 선거 운동 때, 텍사스 지역 기금모집 책임업무를 맡기도 했던 로버트 모스바쳐의 역할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테잎에서 닉슨은 계속해서 “쿠바사람들”, 그리고 “텍사스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썼다. 여기서 “텍사스 사람들”이란 부시, 모스바쳐 그리고 베이커였다. 이것은 케네디 암살에 있어서 부시와 닉슨의 연루관계에 대한 증빙자료들을 부시와 보다 직접적으로 이어주는 또 하나의 고리였던 것이다.
같은 녹취록에서 닉슨은 “쿠바사람들”, “텍사스 사람들”, “헬름스[Helms]”, “헌트[Hunt]”, “버나드 바커[Bernard Barker]”, “로버트 모스바쳐[Robert Mosbacher]”를 꾸준히 함께 연계시켜 언급했다. 워터게이트 테잎 상에서 이러한 이름들은 계속 등장하는데, 특히 닉슨이 CIA를 시켜 워터게이트 빌딩 침입을 통해 그가 확보하려 했었던, 달라스에서 찍힌 사진들에 대한 논의를 하는 중에 그 이름들은 보다 자주 거명되었다.
프랭크 스터지스는, “‘우리’가 워터게이트 빌딩에 잠입했던 이유는, 바로 닉슨이, 존 F 케네디 암살시 찍힌 사진들 속에서 우리가 했던 역할들에 대한 비밀들이 언론에 새어 나가는 것을 막는데 관심이 컸기 때문이었다”라고 언급했다.
***[하톤 : 아, 그렇군. 그러고 보니 이제야, 투표자 명단 확보라는 둥, 정책 대변인들을 위한 선거 계획 확보라는 둥 떠들어 대던 엉뚱한 소리들을 넘어, 왜 그들이 그 건물에 침입에 들어갔는지가 보다 잘 이해가 되는군. 그렇지 않은가?]***
1972년 압도적인 선거전 승리를 이끈 후, 닉슨은 모든 권력을 백악관으로 집중시켜, 자신의 측근 그룹만이 권력을 행사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단지 권력을 독점할 뿐만이 아니라, 마치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았듯이 자신이 어떻게 비밀리에 백악관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인지에 대해 언론들이 파헤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만 했다.
닉슨이 대통령이 된 후에 한 첫번째 일이란, 전체 주요 정부 구성원들로부터 사직서를 받는 것이었다. 재임명에 앞서 일단 “모두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그는 존 얼리히만[John Ehrlichman]에게 말했지만, “조지 부시만큼은 예외였는데, 그 이유는 부시는 그들을 위해서 무슨일이라도 할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출처 : 충성 맹세 “Pledging Allegiance”, Sidney Blumenthal)
부시가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의 손은, 닉슨, 헌트, 스터지스, 펠릭스 로드리게스 그리고 제럴드 포드만큼이나 케네디의 피로 충분히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백악관 갱단은 그들이 어떻게 권좌에 오르게 되었는지를 대중이 알게 될까봐 두려워 했는데, 만약 조금이라도 알려진다면 이를 계기로 그들의 이 취약한 사기, 협잡의 스토리가 들통나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들 모두가 감옥에 쳐넣어지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CIA 워터게이트 침입 사건의 또 다른 주요 구성원들 중, 부시가 충원했었던 인물로는 프랭크 스터지스, E. 하워드 헌트[E. Howard Hunt], 버나드 바커, 라파엘 퀸테로가 있었다. 퀸테로는 공공연히 말하기를, 만약 자신이 달라스에서 있었던 일과 피그스 만 사건에 관련하여, 자신이 아는 바를 다 이야기하게 된다면, “그건 전 미국을 뒤흔들 가장 큰 스캔들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한편, 1960년, 프레스콧 부시는 닉슨의 선거운동을 후원중이었다. 당시, 닉슨은 한 때 남 베트남으로가서 프랑스의 지원을 받고 있던 정부에게 말하기를, 만약 프랑스가 지원을 철회한다면 미국이 개입하여 골든 트라이앵글로부터의 마약 무역을 보호해 주겠노라고 했다. (출처 : “Frontline”, 1988, “총, 마약 그리고 CIA”; S. F. 에그자미너[S. F. Examiner], 1991년 2월 2일; 동남아시아 헤로인 정치, 알프레드 멕코이[Alfred McCoy], 1972)
***[하톤 : 이 점에 관해서는 제임스 그리츠[James Gritz] 대령도 확인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데, 그는 바로 그 “골든 트라이앵글”이라는 음모의 쥐덫에 걸려서 범죄자들로부터 총부리가 겨뉘어지는 일을 당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59년 부통령이던 닉슨은 거의 대통령처럼 행세하며 전세계를 돌아다녔다. 닉슨에게는 손쉬운 선거처럼 보였다. 하원의원이던 제럴드 포드는 닉슨을 위한 기금 모집에 엄청난 일을 수행해내고 있었고, 조지 부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유한 자들은 모두 닉슨 편이었다. 언론은 닉슨이 던져주는 뼈다귀라면 앞뒤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물었다.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면, 그건 쿠바 침공 계획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 만큼은 닉슨이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분명 비밀사항이었다. 쿠바가 임박한 침공에 대한 낌새를 채도록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런데, 케네디는 오히려 닉슨보다 쿠바에 대해 보다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데, 실상 그는 미국의 기업체들과 CIA가 모의하여 쿠바 침공 계획을 짜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닉슨은 1960년 선거에서 미국 역사상 최소득표차로 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 닉슨, 카벨[Cabell] 그리고 헌트는, 대통령인 케네디한테도 알리지 않고, 처음 계획대로 쿠바 침공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작전 당일 새벽 4시, 침공 시작 단 두시간을 앞두고, 카벨 장군은 JFK에게 전화를 걸어, CIA의 쿠바 침공을 위한 미 공군 병력 출동을 허락해 줄 것을 대통령에게 부탁했다. 케네디는 ‘NO’라고 대답했다.
CIA측은 JFK에 대해 분노했지만, 그냥 계획대로 그들만의 침공 작전이라도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정보상의 문제로 인하여, CIA는 해안가 최악의 지점이라고 할만한 늪지대에 상륙했다. 침공은 실패로 돌아갔다. CIA는 최정예요원 115명을 잃고, 또다른 1100명의 요원은 쿠바 교도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CIA가 겪은 역사상 최악의 실패였다. (출처: E. 하워드 헌트[E. Howard Hunt], “Give us This Day”)
부시, 닉슨 그리고 헌트는 우선 케네디에게 그런 걸 물어봤던 카벨을 비난했고, 또한 이를 거절한 케네디도 함께 비난했다. 그들은 모두 분노에 펄펄 뛰었다. 닉슨을 후원했던 기업체들은 쿠바 교도소에 갇힌 1100명의 요원들을 송환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취해 줄 것을 JFK에게 요구했다. JFK는 그렇게 했다. 한때 잘 훈련된 쿠바 출신 요원들을 보유했었던 CIA로서는, 나중에라도 쿠바 침공을 다시 수행할 것이라고 결심했지만, 우선은 이 S.O.B. (Son of B***h) 케네디부터 제거할 것으로 마음먹었다.
1964년도 선거가 임박할 무렵이었다. 닉슨은 또다시 케네디와 맞붙게 될 전망이었다. 부시, 포드, 그리고 닉슨은 그들이 만약 JFK를 지금 제거하지 않으면, 로버트[Robert]와 테드[Ted]를 양쪽으로 거느린 케네디파들이 백악관을 1984년까지 장악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보았다.
그들은 백악관에 입성하는데 1984년까지 기다리지는 않기로 결심했다. 쿠바출신의 “저격수들”은 케네디가 가는 곳이면 어디라도 따라다니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케네디가 시카고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덜레이[Daley] 시장의 협조를 구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달라스[Dallas]에서는 마침내 최고의 타이밍을 잡을 수 있었다. 달라스 시장은, CIA가 침공 실패로 피난을 퍼부었던 카벨 장군의 동생이었다. 카벨 장군은 자신의 동생 얼[Earl]을 설득하여, 대통령이 탄 차량 행렬이 원래 지나기로 되어 있던 경로를 변경하여, 풀밭이 있는 언덕 옆을 약 3마일의 속도로 지나가도록 했다.
***[하톤 : 누가 차량 행렬의 경로를 변경하고 조정했던 것인지에 대한 대답이 바로 여기 있군. 그렇지 않은가?] 헌트와 스터지스는 풀밭에서 JFK를 쏘았다. 그들은 체포되었고, 사진찍혔으며, 15명의 목격자도 있었다. 하지만 언론은 그 사진들을 못 본 체 했고, 그 후 25년동안 세상은 사진 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살피며, 진실을 찾고 있을 뿐이다. [하톤 : 이 점을 알기 바란다. 케네디를 향해 발사된 또 다른 한 발은 바로 케네디 자신의 “비밀 보좌역”을 맡았던 차량 운전기사였다는 것을.]***
케네디가 살해된 날, 닉슨, 헌트, 그리고 또 다른 몇몇의 워터게이트 사건 멤버들과 더불어 한 무리의 쿠바인들도, 달라스에서 찍힌 사진 속에 들어 있었다. 케네디가 탄 리무진이 지나갈 때, 그 중 한 명이 일종의 신호로서 우산을 위로 들어 올렸고, 그 때 케네디는 저격되었다. 자프루더[Zapruder] 필름 상에는 이 신호용 우산을 든 쿠바인들이 뚜렷이 나타나 있고, 십여명은 암살 장면이 담긴 필름 속에 계속 나타난다. 살해 직후, 조용하고도 유유히 그들이 자리를 빠져나가는 장면이 비춰진다.
닉슨은 그가 달라스에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하지만 새로 발견된 사진들과 정황들은 그가 그 곳에 있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닉슨은 FBI에게 말하기를 케네디가 죽은 날 자신이 어디 있었던 건지 기억하지 못하겠다고 주장했다. 잭 앤더슨[Jack Anderson]은 1988년 한 TV 특집프로그램에서 의심의 수준을 넘어서, 달라스의 그 풀밭 뒤쪽에서 체포되었던 두 명의 방랑자들은 헌트와 스터지스였음을 밝혀 냈다.
***[하톤 : 나아가, 만약 당신이 팁 오닐[Tip O’Neill]에게 이 풀밭으로부터의 총격에 관한 정보원을 캐묻는다면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그는 그들 역시 총격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며 또한 그들을 쏜 자들도 알고 있다!]***
살해 직후, 전직 부통령이었던 닉슨은 린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에게, 닉슨의 친구이자 전직 FBI 요원이었던 제럴드 포드에게 워렌[Warren] 위원회의 운영 책임을 맡길 것을 부탁했다. 닉슨은 또한 닉슨의 오랜 지지자인 얼 워렌[Earl Warren] 판사를 이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할 것도 함께 부탁했다. 린든 존슨은 이 모두를 다 수락했다. 포드는 모든 증인들을 다 인터뷰 한 다음에, 어떤 증언들이 공개되고, 어떤 증언들이 묵살될지를 결정했다.
스피로 에그뉴[Spiro Agnew]가 쫓겨난 후 닉슨이 포드를 자신의 부통령으로 선택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이다. 닉슨 자신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파멸 직전에 몰리게 되자, 얼 워렌은 또다른 특별 위원회를 만들어서 그를 곤란으로부터 구해내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포드는 물론 워트게이트 침입 사건으로부터 닉슨을 사면해 주었다. 하지만 닉슨은 여전히 곤란을 면치 못하는 상태였다. 왜냐하면, 약 4000시간 분량의 워트게이트 사건 테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2년 6월 23일 존 딘[John Dean] 그리고 헬더만[Haldeman]과의 논의가 담긴 테잎에는, 닉슨이 헌트를 고용하여 JFK를 살해했음을 공공연히 “고백하는” 명백한 증거들이 들어 있다. 바로 여기에, 몇몇 테잎들에 대한 의회에서의 청취 직후, 왜 워트게이트 사건 “조사”가 비밀 회의로 소집되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나타나 있다.
***[하톤 : 당신은 JFK살해와 관련된 CIA 테잎들이 공개되면 더 잘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가? 꼭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주의깊게 조사를 한다면, 몇몇 단서들은 결국엔 드러날 것이다.]***
JFK가 쿠바 피그스만 침공에 공군 병력 지원을 막았다는 이유로 닉슨과 부시가 그를 살해하기로 공공연히 모의했었다는 사실을 의회가 알았을까? 닉슨이 부시를 포함한 자신의 내부 세력들과 나눈 모든 이야기들이 실제로 다 녹음이 되었었고, 나중에 그는 몇몇 사람들을 매수하려하기도 했었다.
1968년 백악관에서 부시가 닉슨에게 보고를 하는 사진이 한 장 있다. 만약 이 4000시간 분량의 전체 녹음 테잎이 모두 무삭제로 공개되어, 그날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면 대단히 흥미로울 것이다. 1963년 JFK살해 사건의 비밀을 풀어주는 열쇠는 바로 이 미공개의 3988시간에 이르는 백악관내 녹취 테잎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하톤 : 부시는 ‘단지 우연히’ 레이건이 피격되었던 날에도 달라스에 있었다.. 아주 흥미롭지 않은가?]***
문제는 케네디 암살과 같은 이 엄청난 음모에 있어서 전체가 아닌, 단지 한가지 사안만을 고려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케네디는 베트남 전쟁을 끝낼려고 했다.
그는 쿠바 침공에서도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그는 골든 트라이앵글 정부 은폐 및 마약 무역 문제에도 대립각을 세웠다.
그는 연방 준비 시스템으로부터 조폐업무를 되찾아와, 헌법적 근거를 가진 “화폐” 제작을 지지하려 했다.
실제로 그는 타겟 중에서도 타겟이었다. 올리버 스톤은 이제 막 자신의 일을 시작했을 뿐이다.
나는 거듭 요구한다. 시민들이여, 거짓이 계속적으로 공개되어 지도록 만든다면 당신들은 진실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진실의 뚜껑은 열려있고, 진실을 밝혀내려는 이들의 노력을 지지해주도록 하라. 이러한 모든 내부 범죄들에 대한 은폐는, 당신들의 나라를, 당신들의 보다 영악한 적들에게 먹이로 내어주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감히 용감하게 전선앞으로 나서는 자들을 돕는데 있어서, 단지 당신들의 지지를 글로서 표현할 수 밖에는 없을지라도, 여기 나와 있는 내용들을 통해 부디 통찰력을 갖게 되길 바란다. 노스[North]는 현 상황을 “교전중”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인데,
나는, 용감하게 당신의 나라를 새롭게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애쓰는 이 “최전선에 있는 자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영예가 돌려져야 마땅할 이들에게 나는 겸허히 내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피닉스 저널 제 43권, “Tangled Webs, “Gotcha””?Vol I. 제 4장. pp. 7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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