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창조를 사랑하지 않는자들은 모두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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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을, 밑판을 무시하고 사다리의 최고정점 하나만을 찾는 이들에게


최고가 되겠다고 꿈꾸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원대한 꿈을 품는 것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는 그 초입단계인 실질적 절차를 무시한다는데 있는 것이다. 그 길로 가는 길을 무시하고 존중하지 못하고 어떻게 목적지에 도달할수 있겠는가.


최고의 정점을 목표로 한다는게 나쁜것은 아니다. 그것 또한 에고이다. 문제는 중간 과정를 없는양 무시하는데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성이 있는 것이다. 에고라고 해서 모두 나쁜것이 아니며, 신성에 봉사하고 신성에 합치하기 위해 원동력처럼 사용하는 에고라는게 있다. 에고도 좋은 에고가 있고 나쁜 에고가 있다. 다 귀찮다고 모두 한데 싸잡아서 다 같이 취급하지 마라. 그런 것은 편의주의이며 분별없는 어린아이도 할수 있다. 에고가 없다면 당신은 나쁜일도 하지 못 할지언정 좋은 일도 하지 못한다. 에고는 불쏘시개이다. 문제는 그 에고를 어디에다 어떻게 사용하는 냐이다. 자기 하나의 욕망 하나만을 달성하기 위한을 위한 에고이냐(겨우 제 욕망만 채우려 하는 이기적인 수행자는 다 떨어진다), 개인은 개인이되 개인주의의 소아 에고가 아닌 자기 속알찌 그릇을 넓혀 지역사회 나라 국가 민족 전세계 인류 행성, 항성계와 성단 은하까지 확장하는 모두를 담는 대아의 자아 에고이냐이다.


최고정점 당신에게 있어 그것을 절대자 하나님이든 깨달음이든 부처의 경지든 극단적 금욕적 수행이든 프리덤티칭이든 최고 차원이든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어찌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부분의 우주면적을 악귀와 마귀들이 들끓는 악의 소굴로, 공포의 대상으로 보는가. 그것은 그대 자신의 존재를 악마요, 자신의 탄생을 죄로 보는 것과 같다. 어찌 그대 자신을 악마요 죄인으로 보는가.


어찌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를 그의 궁궐 하나만으로 축소하려고 하는가.


청와대와 강남부자들이 존재하는 서울수도만 대한민국이고 대부분의 백성들이 사는 지방중소도시는 대한민국이 아니라고 하는 말과 같다.


최고 사령관만 군인이고 말단 사병은 나라 지키는 군인도 아니란 말과 같다.


그래서 최고 사령관만 깎듯이 경례하고 당신과 같은, 혹은 당신보다 아래인 말단 사병은 만나면 당신 자신이 스스로에게 그러하듯이 무시하고 걷는가.


당신은 당신돈 많은 직업을 가진 부자 아버지의 굵은 팔둑에만 매달린채 같은 반 친구들에게 우리 아버지가 최고야 너희가 사는 집은 집도 아니야 너희와는 안놀아 하고 말하는 어린아이와 같다.


철없는 귀족의 도련님과 아가씨들이 그 궁궐밖의 대부분의 백성들이 사는 세상을 하층민이라 가난한자라 멸시하고 노예로 무시하던 전근대 부패한 부르주아 계급 사회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 당신들이 천시하는 자야말로 가난하기에 오히려 어려서부터 무엇이든 스스로 할줄 알아야했기에 최고만을 찾아 매달리는 응석쟁이 병든 도련님 같은 당신에겐 없는,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할줄 아는 힘이 있다. 그들은 이미 모든 부를 지금 여기에서 소유한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가난한만큼 정신이  건강하고 생기있다. ( 종교가 지배하고 있는 역사를 돌이켜 보면 힘없는 양같은 대중들에게 자기 스스로 힘을 가진 영웅들은 언제나 악마로 불려왔던 것이다)


'스스로' 라는 것은 생동감이다. 능동성이다. 살아 있음이다.


스스로 할줄 아는 자에게 신이 깃든다.


최고정점은 하느님은, 부처님은 지금 여기 스스로 그러한 자이다.

 

'길을 아는 것과 걷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핵심 '원리'를 아는 자들도 그것이 표현되고 실현되는 실질적인 무대 대부분의 우주 면적과 그 과정에 대한 존중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 면면들 말이다.


최고의 경지란 것이 주는 지고의 복을 당신들이 추구해야할 부라하자. 그것이 당신들에겐 추구해야할 최고의 인기의 대상이고 권력이고 그것을 권력으로 대하는한 타락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남의 틀대로 짜맞춘대로 안전하게 돌아가는 세계에서 나는 죄를 행할 권리를 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생생하게 살아 았는 것이고 최고의 경지야 말로 죽은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피를 물려 받은 존재들은 당신뿐만이 아니라 그들로서 지금 여기에서 모두가 스스로 그 지분만큼 리더요 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그리고 그 왕들로 이루어진 멤버들 왕들의 사회가 있다)


대부분의 우주면적 삶을 존중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지금'으로부터 떠나라. 두발이 땅에서 떨어진체 저 멀리 높은 허공의 최고정점만을 찾는 귀신이 되어라.


여러분들의 로봇 철 부처를 죽여야 참된 영성이 산다. 생명이 산다.
삶과 창조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현재로부터 떠나야 할일이다.


여러분의 절대자 하나님을 죽여야 참된 영성이 산다. 생명이 산다. 그들이야말로 모두 여러분들에게 종교라는 이름으로 가짜 부처와 하나님 행세를 하고 있는 냉혹한 기계들과 마귀들이며 여러분은 그들은 진짜 하나님 부처로 잘못 보고 있는 것이다. 왜 여러분 자신이 그들에게 교육을 참하게도 받아 바로 스스로를  마귀로 보기 때문에 그렇다.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고, 과정을 무시한체 최고 정점에만 매달리는
허무주의 도피주의적 '불'색추종자들에게 하는 말이 될것이다. 이 자들은 모두 철이 없다. 아버지의 뜻도 모른다.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하는 일에는 반도 이해를 못했다. 그 아버지에 대한 사랑조차도 언제든 자기 나약함과 공포 불안을 채우기 위해 최고의 권력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찾는 것으로, 수틀리면 언제든 갈아치울 자신의 이기심에 불과한것을.(아, 최고를 추구하는 자에겐 생존에 두려움에서 나온 그러한 이기심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니 무엇이 삶이 주는 과정이 주는 교훈인지를 정녕모른다.  이기심을 강한것으로 잘못알고 있으나 영적인 세계에서 보면 가장 그런자야말로 낮은 것이 될것이다.)


의존성 자체가 잘못이 라는게 아니다. 당신들의 의존성이 문제는 그것이 항구적이라는데 있으며
가장 최악은, 최고의 권력을 끊임없이 찾아 아부하며 자기와 동등한 레벨이나 자기보다 못하다고 보는 힘이 없다고 보는 약자를 멸시하는 소인으로만든다는데 있다.


그러나 그들 콩쥐들, '재투성이 아가씨(신데렐라)'들이야 말로 가짜 어머니 아버지신의 권력에 의존적인  팥쥐같은 당신에게 없는, 바로 여기 지금에서 스스로 할줄 아는 힘(영혼)이 있다. 무에서 유을 창조하는 능력이다. 그들은 건실한 무산계급가이다. 그런자에게 스스로 주체가 된 상태에서 만민 평등과 사랑을 힘이 주어질 것이다. 로봇시녀 없이는  아무것도 할줄 모르는 철없고 병든 부르주아 귀족들에겐 이제는 무엇이든 스스로 한다는 의식(영혼)이 필요하다.


기실 자기 자신조차도 사랑하지 못하고 멸시하지 않는가. 나는 공주이고 왕자였는데 어쩌다 죄를 받아 궁궐밖으로 떨어져 나와 이 더러운 시궁창 하층민 짐승들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고 스스로를 생각하고 신세 한탄하지 않는가.


바로 그렇게 아버지의 사랑과 귀염만 받고 자라 사랑도 겸손도 감사함도 모르고 철이 없고 응석쟁이였기에 당신의 아버지가 세상 좀 배워오라고 당신을 이 넓은 세상에 보낸것이다. 그것을 영혼을 통해 깨닫지 못하는한, 아버지가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낸 뜻을 알지 못하고 아버지를 원망하고 주위 이웃을 무시하고 배격하며 더욱 아버지에게만 매달리는한 당신에게 구원은 없다.


부처는 하나님은 스스로 돕지 않은 자를 돕지 않는다.


누군가 내가 나를 외면하고 져버리고 의존할 대상 스승을 찾지 말고 신(최고정점)을 찾지 말라. 그런 스승이라면 신이라면 한트럭을 가져다 준다해도 당신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다. 그것을 받아내야할 발판(스스로라는 최소한의 발판 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데 어떻게 그 이상을 받아내겠는가),  당신이 스스로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발판)이 되지 못하고 스스로 하지 못하는한('스스로'가 신인것을) 스승 한트럭을 가져다 준다해도 당신이 당신 스스로 자신이 아닌 이상 주인공인 당신이 빠져 있는 이상 영원히 당신에겐 밑빠진 독처럼 결실은 맺지 못할것이다.


그것이 권력 숭배이라는 것이다.당신의 의존성이 문제다  자신(발판)을 져버리고 외면하고 자신의 스스로 서야할 영혼의 힘을 져버리고 그것이 무슨 외부의 훌륭한 스승이든 신이든 무엇인든 당신이 힘이 있다고 보는 것 당신이 힘이 있다고 보는 것 타의 외부에 대한 인기에 대한 영합 그것이 나(영혼)를 버린 권력 추종이다.


권력이란것은 나와는 동떨어진  집단 사회적 단어나 정치적 단어가 아니다. 개개인 하나 하나 일상의 삶에서 어느 대상 어느 요소에나 있다.

 
너도 나도 다이어트에 성형수술 열풍이 부는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선 외모가 권력이다.코흘리개 아이들에게도 영어를 가르치는 조기 교육의 열풍이 부는 학벌 지상주의 사회에선 학벌이 권력이다. 그 세계에 끼지 못하면 나고가 될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처럼 여긴다. 그것은 공포와 권력인것이다. 모두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보단  헌신짝처럼 내팽겨치고 있다. 


그 어느 누구도 그러한 집단 군중 심리와 유행으로부터 영혼으로 홀로설 용기가 없어 미친짓(외부의 힘, 타인의 힘, 권력숭배)에 동참 하는 것이다.'자기 자신을 버리는 일'인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조건없는 자기(자기 발판-영혼)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내용의 본질보다는 외부의 이름이나 타이틀을 보고 의존하고 내용을 판단한다. 학벌이나 학위나 타이틀 같은 다른 사람이 유명하다거나 권위있다고 하거나 누군가 남들이 국가가 공인해주는 공인증 같은 권위을 꾸벅 추종한다.스스로는 생각할줄 모르기에 누군가가 규정해 놓은 것, 외부에서 딱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이름을 보고 판단하는게 당장 편한것이다. 하지만 사물의 본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마스터(스스로 주인이 된자)가 된다는 일은 외면의 이름이나 타이틀에 얽매이지 않고 본질을 스스로 보고 행하는 영혼의 융통성이고 주체성이다. 그것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부터 나온다.


왜 숱한 불경 성경 동학의 최제우(인간이 한얼님이며, 하늘님이 인간의 내부에 있다는 가르침(인내천)을 설파한 동학의 최제우 또한 채널러였다)까지 경전과 채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빛의 가르침들이 결실을 못했는가를 생각해보라 아무리 잘란 좋은 가르침 좋은 스승들도 당신들의 의존성 에너지 앞에선 당신들이 그런식으로 대하기 때문에 졸지에 권력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무고하게 그 옛날 당신을 신으로 굴림하며 통치하던 외계인들처럼 당신을 조종하는 조종자가 되거나 당신 내면의 힘이 아닌 외부의 힘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백안시되고 만다. 정작 주인공인 당신들이 빠져 있기 땜문에 밑 빠진 독에 물을 쏟아 붙는 것처럼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던것이다.


자기를 버림으로서... 무는 무를 낳을 뿐이다. 어둠이 실질적으로 당신의 육체를 지배하는 세상에서 나를 버린다면 그것은 그대로 어둠의 차지이며 수동적인 꼭두각시이다. 어둠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세상에서 나를 버리고 무로 만든다면 그것은 어둠에 실질적으로 동조하는 일이다.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나를 세워야하고 빛으로 채워야하는 능동성이 필요한 것이다.


당신들에겐 이런
당신이 스스로에게 당신 지분 당신 몫만큼은 리더가 되고 신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받쳐낼 튼튼한 지반 발판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스스로 (영혼)에 대한 사랑이다.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다.영혼이 바로 당신 자신이다. 영혼이 없다면 당신은 이곳에 올수 없었다. 당신이 이곳에 온것은 영혼이 온것이다. 당신은 영혼을 통해 이곳으로 왔다.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마음을 비운다'는 말을 여러분이 매달리며 숭배하는 그 대상을 향해 사용하라.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무엇인가.탄생한 그대로 창조한 바대로 영혼으로 줏대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외부의 권력숭배 의식을 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부처이든 어떤 잘란 스승이든 무엇이든 어떤 숭배의 대상이든 말이다.

 


2

 

자기 자신을 사랑할줄 아는 자는 이제 그 사랑을 나누어주는 타인을 사랑하는 보편적인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사랑의 실제적인 본론적인일을 실천적인일을 함에 약간의 지혜와 기술이 필요하다.
 

그렇게 스스로 왕이된 존재들은 이제 그 다음으로 당신처럼 그렇게 스스로 왕이된 멤버쉽의 사회에서 정상적인 삶이 있다는 것을 배울 차례이다. 실질적 구성을 형성하고 일을 하기 위해 각자 위치에서 분업과 협동의 지위의 위계질서는 존재하지만 근본에서 마음으로 독립된 영혼으로 평등한 사회 말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자는 충만한자 부족함이 없는 자이다. 그 무엇에도 구애될것이 없으며 두려움이 없다. 리더는 왕은 홀로 책임의 고독을 기꺼이 감수하는 자이다. 무엇이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기에 그 어떤 자신이 얽매이고 의존할 대상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자입니다.
왕은 스스로에게 구애될것도 두려움이 없는 자이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한 자이다. 위 아래 상관없이 그 내용을 보고 승복할것에는 승복하고 겸손할때는 겸손할줄 안다.스스로 왕이 되지 못한 자들은 이 세계에 진입도 못한것이다. 이 세계는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된자 진정으로 이렇든 탄생한자만이 들어갈수가 있다. 자기를 내팽겨 쳐 버림으로서 자기 존재 자체 마져도 책임을 방기하는 자가 어떻게 왕이 될수 있겠는가. 스스로 왕이 되지 못했다는 말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고, 탄생하지 못했다는 말이다.그들은 이세계에 진정으로 탄생하지도 자기 자신이 되지도 못했다.


이제 스스로 평등하게 왕임을 깨달은 존재들에게 말하지만 그 다음으로 다른 영혼들과 균형을 배울차례이다.  스스로 왕이라고 해서 각자가 저 하나만 잘랐다고 버릇없는 아이처럼 오만하게 구는게 아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은 당신의 환상이 아니다. 그래서 사랑은 중요하나 그 실질적인 것을 대함에 사랑만으로 되지 않으며 사랑과 지혜와 기술을 합한 삼위일체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혜와 의지의 힘이 빠졌을때 그것은 우리들에게 위선적인 사랑과 구분하기 어렵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영혼을 환상으로 보는 그것은 여전히 자기 위치에 대한 사랑의 부제로 인한 외부 힘의 굴종을 거꾸로 한것이고 그것의 반작용이다. 권력을 숭배하고 추종하는 자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자로 변한것 뿐이다. 여전히 그는 자기 내면의 공허와 부족함에 얽매여 있다. 그것을 외부의 물질이나 타인의 힘에 대한 소유 혹은 지배로 잊으려 하고 만회하려 든다. 외부의 물질이나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이 없으면 무언가 두렵다. 그 홀로 됨을 홀로가 되어  자기 자신을 대면하게 되는 상황을 두려워 하기에 타인의 힘과 외부의 물질을 지배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권력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루시퍼가 그랬다-대천사 루시퍼는 신을 배신하고 한번 타락한 자신의 실수를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고 스스로부터 두려워 달아나는 자였다) 내면(영혼)에 만족하기 보다는 끊임없이 외부의 자극을 찾는다. 모든 어둠은 이러한 홀로서기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홀로서기란 무엇인가 스승이든 최고정점이든 무엇이든 외부의 의존할 대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내가 홀로선 주권의 왕이듯이 다른 사람도 그의 홀로섬을 고유의 독립과 주권을 존중한다. 그 상태에서 협동하는 건강한 가족의 멤버쉽과 같은 사회가 있다.


하지만 자기 위치를 이미 사랑한다면 나는 나로서 충분한데 부족함이 없는데, 그가 왜 오만하게 굴겠는가. 오히려 스스로 충만함이 황금빛 액체 같은 빛이 향유처럼 밖으로 흘러나와 바닥으로부터 채운다. 그는 홀로 서서 근원의 우물에서 빛의 물을 길어내는 펌프와 같다.각자는 각자 모두가 이렇게 근원에 튼튼히 뿌리 박고 서서 빛을 뿜어내는 우물이다. 모두는 이곳에서 앞서거나 뒤서거니 나온 정도 입은 계급장과 지위와 위치는 다르지만 그런것은 하나의 놀이다. 아무래도 좋게 된다. 근원으로 통하는 고유의 홈통(케이블-영혼)을 등짝에 동등하고 하나씩 달고 있기에 외부적인 지위 그것이 어떻게 되었어도 그 자신은 충만함으로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하나이다. 하나라는 말은 대등하다는 말이다.


그런 사회에선 자기 자신의 위치를 먼저 사랑함으로  자기 위치를 사랑한 상태에서 자기 위치를 지키고 하나의 목적, 같은 공동 목적(내용)에 자발적으로 동참함에  상하 우열 계급이 따로 없다. 그것은 표면의 이름이나 지위의 다름에 구애되지 않은 '내용'을 알기에 가능한것이다.  같은 배를 탔다는 그 자기에게도 깊이 상관이 있는 공동의 목적을 아는한, 선장이 없으면 배가 침몰 하지만 말단 선원인 내가 없어도 나의 역활이 없어도 (기관병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볼트를 조이지 않으면) 배가 침몰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계급은 존재하지만 각자의 몫만큼 리더가 된다. 그 상태에서 너나 할것이없이 자발적이 되고 협동하고 동참한다. 천상은 이런 세계이다. 그 깊은 뜻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말단 사병은 말단 사병대로 왕이고 사령관은 사령관대로 왕이다. 각자 나라른 지킨다는 일념하에서라면 상하 우열이나 서열은 없다. 환경미화원은 환경미화원대로 왕이고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왕이다. 각자 역활과 위치는 다르지만 내가 없으면 나라가 유지 될수 없다 왕이란 면에선 대등하다. 그것이 권력이 아닌 사랑이다. 결코 동등하진 않지만 대등한 관계이다.끊임없이 비교하고 우열을 따지며 시기와 질투 경쟁심이란 없다. 그것은 저 하나만 생각하는 것이고 한가한것이다.


그것은 저마다 파트와 역활 위치는 다르지만 하나의 지휘자 앞에 모인 합창이고 하모니다.
감독이나 지휘자만 중요하다고 배우나 연주자 없으면 연극이나 음악이 이루어질수 있는가.


여러분 스스로도 창조나 창작을 해보아라. 그것이 시이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무용이든 좋다. 신성한 예술이나 문학을 스스로 해보는 일은 우주를 융통성있게 통찰하고 이해하는 감각을 배로 증진시킨다. 경직된 것은, 두뇌가 초박형 개미 대가리인 것은,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창조하거나 창작할때 느끼는 희열과 기쁨은 창조자가 우주를 소욜돌이 치는 빛으로 창조 할때의 기쁨과 정확히 에너지 적인 면에서 같다. 물론 창조나 창작 과정에 항상 기쁨만 있을수는 없다.  하지만 창작의 고통이 있기에, 산고와 출산의 고통의 '과정'이 있기에 자식들을 아이를 낳았을때(창조했을때)의 어머니의 기쁨도 있고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슬픔이나 고통을 극복하고 벗어난 뒤의 기쁨이 소중하게, 웃음으로 와 닿을 수 있는 것은 그전의 고통이나 슬픔을 겪어 봤기 때문이다.   당신이 창조를 하잘것 없이 취급하고 멀리하는 것은 자유나 그것이 그 과정에서 오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다면 문제가 있다.고통을 두려워하고 멀리하면 당장 슬픔을 모를지언정 태어난 존재로서 영원히 그 기쁨이란 것이 무엇인지 모를것이다. 이 또한 반드시 칭찬할만한 것은 아니다.


창작의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것이 신과의 소통, 다른 차원에 살고 있는 그 자신의 거대 자아, 내면과의 소통이 될것이다. 모든 창작과 예술은 우주와의 교신이고 채널링이다. 작가가 자신의 혼자 능력으로 창작하는 줄 알지만 사실 모든 예술의 영감은 우주로부터 다른 차원으로부터 온다.


작곡가나 작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이 창작중에 있는 자는 모든 것과 함께 하면서도 그것을 포괄하는 위치에 혼자일수밖에 없다. 요리사는 많은 재료들과 함께 하면서도 그것을 다루는 위치 혼자에 있다. 많은 것과 함께 하면서도 동시에 홀로 있는 것이다.바이올리니스트가 무수히 소리를 연마하는 것은 많은 소리와 함께 하면서 혼자 하는 고된 일이다. 발레리나가 율동을 연마하는 것은 많은 율동과 함께 하면서 혼자서 가야하는 고된 일이다 그들은 거기서 아직 이곳에 없는 곳으로부터 이곳에 없는 것을 이곳에 있게 하기 위해 아직 무언가를 짜낸다. 그러면서도 또 그와 같은, 다른 혼자 가는 존재들과 함께 언제가는 만나 무대위에서 공연하면서 협동하고 조화를 이룬다. '따로 또 같이'다.


그 원천으로부터 메시지를 짜내는 일은 극도로 엄정하게 내면에 홀로 침잠해야 하는 일이고 혼자서 하는 일이다. 미켈란젤로 모짜르트 다빈치 베토벤 고흐 모두 그렇다. 소위 말하는 아티스트의 창작의 고통이다. 작가 자신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상상력이라고 치부할지 모르지만 영감은 그 자신이 아닌 홀로있는 자에게 우주로부터 온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내면이 바로 커뮤니케이션이고 협동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작가가 영감을 얻고 그 영감이라는 것과 순도 높은 커뮤니케이션을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홀로 있는 상태이다. 홀로 있는 상태는 모든 것을 배척하는 상태가 아니다. 아래를 잠시 닫아 둔 상태에서 상위와의 연결이다. 그것을 위해서 아무것도 안한다는 식으로 아래와 주위 레벨에 대해 잠시  닫아두는 것이다. 홀로 있다보면 당신은 내면을 통해 천사들이 안내하고 지키는 상위의 천국 성안에 모셔져 있는 보물상자에 이를수 있다. 그곳에 당신을 포함한 우주에 관한 모든 것이 있다. 그것은 실질적 세계이다.


여기서 말하는 창작은 비단 특정 아티스트나 작가에게만 국한 된 일이 아니다 이 계에 내려온자는 모두 영혼차원에서 우주 창조를 위해 이 고통을 감내하기로 약속한 용감한 자들이다. 여러분은 모두 여러분 스스로 자신에 만큼에서만은 창조자이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각자 위치에 맞게 협동한다.그들은 알건 모르건 의식하건 안하건 자각하건 안하건 그들의 삶을 통해서 창조를 행하고 있다.  다만 지금 지구인은 그 영혼의 창작을 자신의  완전히 자각하에 내면의 힘을 망각하고 이 세게를 지배하는 외부의 권력에 빼앗겼을 뿐이다. 이 힘을 되 찾는 것이 마스터이다. 마스터란 스스로 주인이 된 상태에서 창조를 행하는 자이다. 당신의 영혼이 당신의 유일한 주인이 되어야 한다.


일반인의 영혼은 작가처럼 작품이 아닌 바로  시공간안에  들어가서 그의 인생이란 것 삶이란 것 그 자체를 통해서 창작를 행한다. 시공간은 벗어나 있으면 한눈에 보이는 작은 건물과 같지만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그들에게는 마치 모든 것처럼 다가온다.그렇기에 그들은 삶의 카르마가 적용된다. 위대한 예술가는 삶이 아닌 작품 속에서 살기에 일반인에게 적용되는 카르마에서 벗어나 있다.


오늘날은 부모들이 조금만 아파도 병원에서 수술로 아이를 낳고 있으나 이것이 산모와 아이의 유대감을 결여시키고 아이의 저항력을 약화 시킨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편의주의적이것 편리만 찾는 것에는 사랑이 없다. 자기 영혼을,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부정직한 종교 권력과 함께 여러분의 의존성의 대상은 또한 주류물질과학이다. 여기에 대해선 다음에 기회가 있을때 말하기로 하겠다.
여러분은 자동인형처럼 누군가에게 자신이 할일을 맡기고 수동적으로 따라가길 편하다고 선택하고 있다. 혹은 어떤자는 자신이 아예 자동인형이길 바라고 있다. 편리함만 찾고 그러기를 바라고 옹호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의 법칙에 맞지 않는다. 그런다고 자기 존재자체에 대한 책임이 여러분들로부터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여러분이 그것을 언제고 자각할때 까지 정체된 상태로 풀어지길 기달릴 뿐이다. 당신이 영원히 스스로의 책임을 찾지 않는다면 영원히 정체될 뿐이다. 스스로 한다는 것은 수고하고 감내하길 마다하지 않는 자세이다. 그것은 당당히 홀로 서서 가는 자세이다.


여러분 모두 스스로 환경을 창조를 하는 연기자나 게임의 플레이어가 되어 보라 여러분을 스스로를 신의 각본대로 움직이는 자동인형에 꼭두각시라고 스스로를 비하하지만 실제로 연기를 하는 배우나 축구하는 선수에게 물어보라. 배우와 축구선수는 무슨 기쁨으로 그짓을 하는가  배우와 축구선수는 거기서 무슨 희열을 느끼기에 그런 짓을 하는가. 그것은 단지 감독의 꼭두각시인가. 그런말을 그들에게 했다간 그들로부터 싸대기가 돌아올 것이다. 배우와 감독은 똑 같이 사랑받지 않는가. 배우가 관객들에게 더 인기가 높지 않은가.그만의 연기는 그가 아니면 못한다. 그것은 그만의 고유의 독립된 영역이다. 종속이 아닌 협동하는 관계이다. 감독은 그의 영역이 아니다. 자신이 꼭두각시라고 비하하는 자는 그 감독의 위치를 쥐어 주어야 성이 풀리겠는가. 자신을 비하하는 자는 감사할줄 모르고 탐욕하는 자이다. 그것은 주제를 모르는 에고이고 오만함이다. 배우나 축구선수가 스스로를 누군가의 꼭두각시로만 여기고 꿈이나 희망이나 비젼이나 영감이나 상상력이 없다면 그 각본을 자기 나름에 맞게 창조하는 연기도 못한다. 연기, 그것은 그 나름의 창조이다. 단지 실제가 없는 공상속의 잠재된 감독의 아이디어를 실제로 눈 앞에서 표현하고 시현화시켜 존재하게 하는 것은 그만이 할수 있는 독립된 능력이다. 아무리 좋은 각본도 좋은 배우를 만나지 못하면 빛을 볼수 없다. 좋은 감독도 좋은 선수가 있기에 빛을 보고 가능한 것이다. 작가나 감독도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은 그 전부터 원천이 있다. 축구를 하는데 선수 없이 모두가 심팜이고 감독일수는 없다.감독은 시공을 넘어 미래에 까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겸험과 지식과 지혜를 보유하고 있지만 여러분이 가진것을 가지지 못한 것이 있다. 감독이 운동장에서 선수가 되어 직접 뛸수는 없는 것이다. 감독의 아이디어를 삼차원적으로 시현화 하기 위해 운동장에서 뛰는 것은 감독도 두고 봐야 하는 또 하나의 아직 실현되지 않은, 수많은 시간선으로 정해지지 않은 미래이다. 여러분은 각자가 여러분 몫만큼 신으로부터 지분과 창조 능력을 부여 받았다.  감독과 하나인것은 여러분들이기도 하기에, 여러분의 영혼은 왜 감독의 아이디어를 실제적 모형으로 시현시키는데 이바지 하는 것이 나에게도 행복인지를 알고 있다. <자기 자리를 지키고 하나의 공동의 목적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창조이다.> 신이 여러분이다. 신은 감독의 위치에서 감독도 하지만 여러분이 되어 여러분의 일을 하고 있는 것도 그 신이다. 신은 여러분과 함께 한다. 창조하고 협동한다. 실제 몸을 가진 여러분의 존재를 통해서 신은 '여기에 있게' 된다. 감독은 선수를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시킨다. 감독과 선수는 한 몸이다. 그리고 감독과 선수 코치 심판 의료팀 모두 관객으로부터 어느 하나 우열없이 사랑받는다. 하다 못해 골보이까지도... 처음부터 감독인 경우도 있지만 배우나 축구선수가 연기 겸험을 통해서 경륜과 연륜을 쌓았을때 비로서 감독이 될수도 있는 것이다. 그때 까지는 여러분은 여러분만 할수 있는 내부의 '장기'가 있으면서도 외부와 협동하는 존재이다. 장기가 내면이고 협동이 외면이다.


몸의 각 부분이 저 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 머리가 되려고 경쟁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팔뚝이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발목이 되려하고 발목이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팔뚝이 되려하면 어떻게 그 몸은 유지 될수 있겠는가. 그것은 공멸이다. 팔뚝은 팔뚝으로서 각자 위치만큼 왕이고 발은 발로서 각자 위치만큼 왕이다. 각자 위치는 몸으로서 연결되어 이미 하나로서 연결되는  생명의 축복을 받고 있지 않는가.


배가 침몰하고 있다고 치자.
기관병이 내가 선장이 아니라고 최고 자리가 아니라고 쫄때기라고 자기 비하와 신세한탄만 하고 앉었다면 자기 사랑을 패기처분한다면 어떻게 안 보이는 곳에서 그가 홀로 자기 일에 스스로 최선을 다 할수 있겠는가. 어떻게 배가 유지되고 나갈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망망대해에서 배가 침몰하는데 선장이 두눈 부릅뜨고 모든 곳에서 항상 옆에서 감시하고 지켜보고 있어야만 하는가. 선장이 옆에서 안 보면 아무일도 못하는 바보인가.어떻게 독립된 개체로서 믿고 지분을 맡길수 있을텐가. 그것은 선장이 모두 혼자서 다 알아서 하는 이만 못하다.


(이런 방식으로 여러분들에게 과거 어둠의 시절 가짜 절대 신, 절대 권력으로 가짜 아버지 노릇을 했던 존재들이 여러분의 무서운 삼촌인 루시퍼이고 아눈나키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이 만든 방식들에, 그들이 만든 의존성의 로보트 노예들에 염증을 느끼고 지구에서 떠나갔다.) 


볼트를 조이는 일은 선장이 아닌 오직 당신만이 할수 있다. 그 일에 있어서만큼은 당신은 당신 스스로에게 선장이며 정확히 선장과 동등한 에너지를 공유한다. 이렇게 해서 신은 그 자신이면서 신은 모두 이기도 한것이다. (결코 혼자서 선장질을 하고 쫄다구짓을 하는 미친짓를 하는게 아니다.)


절대자 신 하나만 대가리가 달리면 되지 쫄다구 하나 까지 각자 고유의 대가리가 달린 이유가 무엇인가. 각자 대가리를 소멸시키는 그런식으로 해서 어떻게 우주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돌아갈수 있을 텐가. 안락사나 낙태와 같은 것을 종용하는 라엘리안이나 무묘앙에요 같은, 영혼에 대한 나약함에 근거한 편리만 찾는, 영혼에 대해 위선적 사랑을 말하는 자들이 이딴 식으로 배를 침몰시키려 하는 불쌍한 자들이다.(연민을 느낀다) 대가리를 소멸시키는 것보다 그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당신이 볼트를 하나 조이는 것은 당신이 선장(최고의 경지)이 되기 위함만이 아니다. 바다에서 배를 유지 하기 위함이다. 거기서 당장 자신의 생명의 안전과 기쁨을 얻는 것은 당신 자신이고 모두이다.


이타심, 사랑의 기쁨을 한번 느끼기 시작하면 당신은 거기서 다시는 나오고 싶지 않을 것이다.자기일에 스스로 알아서 하는 능동성은 자기 일에 '사랑'이 없으면 안된다. 자기 일에 사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안된다. 사랑은 생명력이다. 능동성이다 살아있음이다. 모든 일이 강제와 강압이 없어도 조화롭게 돌아가는 강력한 법칙이다.


서로가 자리 바꿈을 하거나 위치가 이동할때는  그에 합당한 자질과 능력과 자격을 심사받고 이루어진다.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맡은 그 일을 얼마나 잘 해냈느냐 얼마나 사랑했느냐이다. 그것이 과정이고, 그 과정은 삶의 단계의 도상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심사하는 것도 피할수 없는 스스로의 정직한  자기 자신이다. 영적 세계에서 그 보상, 상과 벌은 우리 세계에서 처럼 외부에서 다른 사람이 평가하고 주어지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과의 정직한 일 대 일 맨투맨식 만남, 당신 자아가 준다. 신은 이미 당신 자아속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현존이며 신성한 자아라 한다. 무라는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소멸시키고 버리는 따위로, 정직한 자기 자신을 만나지 않고 회피는한 깨달음은 없고 상승할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둠에 종속된 하위 욕망의 자아에 대해서만 해당하는 것이지 송두리째 자아가 아니다. 당신이 자아를 버리는 말든 목적을 가지든 말든 상관없다 그러나 그 목적을 위해서라도 당신은 자아를 먼저 만나야 한다.


당신과 다른 사람의 영혼은 그 보다 더 한 환상인 당신에게 환상이 아니라 지금 당신이 가야할 첫번째 단계이다.


그리스도가 창조의 세계라면 부처의 세계는 순수 바탕의 세계이다. 그리스도를 동이고 부처를 정이라 할때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만으로 이루어져있지 않으며 부처 또한 그렇다. 그 둘은 서로 속에 서로의 요소를 이미 가지고 있으며 서로 협동한다. 그리스도 또한 정과 동의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부처 또한 정과 동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여러분은 이 세계에선 명상과 생활은 절도있게  구분해서 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둘을 혼동하고 서로의 방식으로 서로의 영역을 없애려 하지 마라. 여기서 그리스도가 창조의 일이고 삶이라면 부처는 명상을 상징할때, 당신들은 그리스도와 부처가 전쟁하는 꼴이다. 예를 들어서 명상할때는 마음을 비우고 무심하라 가르쳐도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할때 당신은 무관심하거나 무심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뭔가 '또라이'가 아닌가. 명상을 할땐는 명상을 하고 일을 할때는 생각과 정신과 마음을 써서 일을 하라. 극단적인 골수 전통수행종교가 채널링을 마귀짓이라고 배타하는 것은  명상에 대한 가르침(자기들이 어디서 들은 것이 그것 뿐이라)과 자신들이 관심도 없는 대부분의 면적, 생활과 일과 창조와 행성 진화의 드라마에 대한 교훈과 지혜의 가르침을 서로 혼동하고 있기 대문이다. 명상을 할때는 마음을 잠시 비우고 고요해야 하지만 그것에서 깨어 생활을 할때는 다시 마음을 행동을 가슴을 주어담고 삶을 붙잡고 망치와 못과 연필과 붓을 들어야 한다. 명상을 할때는 마음을 '비우더라도' 생활의 일을 할때는 마음을 다시 주어 담고 '다루는방법을 배워야' 한다. 한참 생활을 하고, 일을 하는 데에 다 두고 한켠에 와서 마음을 비우라고'만' 말하지 말라. 그것은 누가 더 우월하거나 중요하다고 할수 없다. 균형이 맞아야 한다. 근원으로부터 나와 창조된 자는 생활만 하다보면 명상을 할수 없지만 명상만 하다보면 생활을 할수 없다. 명상과 생활은 함께 가는 것이다. 왜 창작을 하는 위대한 아티스트가 내면에 침잠하는지 이유를 알것이다. (예술가는 일반인의 카르마에서 벗어나 있으며,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가장 완전한 창조는 가장 완전한 명상이다.그렇게 하다보면 명상과 생활이 합치되는 지점에 이르게 될것이다. 내면과 외면이 같아져서 하나가 되는 지점에 이를것이다. 그런시대가 앞으로 올 5차원 반 에테르문명이다.

 


3

 

명상을 통해 하나님과 부처가  현재 여기서 당신과 함께 한다는 느끼는 것,  다시 말해서 당신의 의식을 사용해서 천국에 잠시 여행 가보는 것, 연결되는 것과 당신의 신체가 실질적으로 그 위치에 위치하는 것은 다르다.


그렇게 의식이 올라갔다 삶속으로 내려오는 것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신체또한 상승하게 된다.신체가 실질적으로 위치하는 것은 12단계에 따른다.


수백만년 수억년의 영원한 삶일수도 있는 은하의 '삶', 그 전 과정을 다 마치고 10-12단계에 올랐을때 실질적으로 개체 자아가 전체 자아 전체 의식으로 소멸할수 있다. 그러나 의식을 통해 지금 천국과 연결되고 하나님이나 부처님이 지금 현재 당신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당신에겐 행복일 것이니 그것을 고역이나 불평부당한 노역이라고 할것이 없다. 정상적인 세상에선 그것은 기쁨이다.


의식의 여행이 아닌, 실질적 신체의 진화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의식을 통해 상위를 여행하고 신과 함께 한다는 것을 느껴도 당신의 엉덩이는 여전히 이곳에 있다.


의식이 아닌 신체적으로 여러분들은 현재 3,4차원에 걸쳐 있고 5차원에 진입하는 중이다. 5차원 부터가 이러한 본격적인 깨달음의 진화가 이루어지는 행성 레벨이다.


6차원은 여러분들의 상위영혼들이 존재들이 사는 행성 레벨이다. 상위영혼은 여러분 영혼 하나만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무수한 하위 나툼 영혼을 자신의 내부에 동시 다차원적으로 거느리는 집단 의식의 존재이다.당신은 그중에 하나의 구성원과 같다. 이 우주에는 현재 이곳에 당신말고도 당신의 전생(나툼)이라고 부르는 다른 다른 차원과 시간대에 살고 있는 또 하나의 당신이 무수히 존재하고 있다. 시간은 일직선 하나만이 존재하지 않으면 나뭇가지처럼 서로 조금씩 다른 역사가 무수히 한 갈래에서 갈라져서 동시에 존재한다. 그것을 모두 통합해 자신의 내부에 동시에 뿌리처럼 다차원적으로 거느리는게  상위영혼의 존재이다. 그 만큼 상위영혼은 속알지 그릇이 넓은 거대한 '자아'이며 당신 하나만을 포함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아 대아가 바로 이 상위영혼이다. 상위영혼부터 본격적인 집단의식이 시작된다.


개체의 영은 순수 백광의 빛 기둥으로 9차원의 행성과 성단에 존재한다. 개체 영이 모인 대영그룹과 가족은 10에 차원의 우주에 존재한다. 그들은 당신들의 게임을 관리 감독하는 자이다. 개체인 당신들은 게임의 플레이어들이다.


12차원 이상으로 나가면 더 이상 우리 우주가 아니다.  우리 우주와 같은 레벨의  무수한 다른 우주를 하부 그룹으로 포함한 초우주 존재들의 '내면'이다. 밖으로 '들어가니' 내면이 '나오고' 내면으로 '나가니' 밖으로 '들어간다.' 여기에 대해선  여러분에게 지금 해당사항이 아니기에 불필요해 말할것도 없고 생각할것도 없다. 우리 우주 내부에 대해서만 말해도 벅차다. 그것들 중에는 기계들로만 이루어진, 완성이 실패한, 스스로 패가망신한 우주 존재도 있고 이원성이 없는 따분한 우주 존재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의 우주는 그것이 또하나의 몸으로 이루어진 개체이고 영혼이고 생명체라 부를수 있다. 정확한 비유가 아닐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 생명체를 이루는 그 안의 작은 분신들로 작은 세포중의 세포들이고 분자이고 원자이고 전자들인 것이다.


이러한 하나의 개체로서 다른 우주와 상위 우주 존재로부터 불리는 우리 우주의 이름은 인간의 언어로 '그리스도'이다. 이름 따위야 어찌되었든 무엇으로 부르든 상관없다. 중요한것은 내용이다. 환단고기서에서 말하는 우리 민족의 시조신인 환인이 바로 이 그리스도라고 봐도 무방하다.그리스도와 환인 모두 하나님이나 한얼님의 아들이며 우리 우주의 창조자이고 원인자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제1 퍼스트 원인자 하나님은 그의 아들인 창조자, '그리스도'를 통해 여러분을 창조했다.  그리고 근원자 하느님이 거느리는 우주는 우리 우주 '그리스도', '환인' 말고도 많다. 그들은 모두 제1 퍼스트 원인자 하나님이 낳은 아들들이고 그들 우주들은 서로에겐 형제들이다.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낳았다면 여러분들을 낳은 것은 그리스도이다. 근원자가 모든 우주를 다스리는 아버지이자 여러분들의 할아버지라면 그리스도는 여러분들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여러분들의 아버지이다.


다른 우주는 그들의 그 원인자, 대표자, 아버지가 따로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내용과 이름으로 불린다.그리스도와 환인이란 제 1 퍼스트 원인자, 근원자, 하느님/한얼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여러분에 대한 사랑을 증거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로를 낳은 하느님의 여러분에 대한 사랑이다. 우리 우주의 진리는 사랑이다. 진리는 우주마다 다르며 다른 우주의 진리가 우리 우주에서 반드시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우주에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시스템, 전혀 다른 진리로 돌아가는 우주도 있기에 부처 의식이나 그리스도 의식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처의식이나 그리스도 의식은 우리 우주에서만 부처의 의식이고 그리스도 의식이다.부처와 그리스도 의식은 우리 우주에서 나왔다.
우리 들처럼 영혼으로 나와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 의식과 부처 의식을 달성한 예수와 고타마 붓다는 아직 우리 우주를 신체적으로 벗어나 있지 않다.예수와 고타마 붓다는 아직 우리 우주를 신체적으로 벗어나 있지 않다. 그들은 우리 우주엣 난 영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진화를 통해 완성을 이루고 한몸이 되었을때 하나의 몸이 되어 근원으로 간다. 그때까지는 당신들을 기다려주며 원조하고 조력하는 상태이다.

 
(여호와나 성모 에너지, 우리 우주가 시작될때 행성위의 여러분의 신체를 창조한 쉐크메트 사자인(고대 이집트의 여신)과 행성들의 궤도를 창조한 조인들 같은 것은 다른 우주에서 건너 왔다고 한다. 사자인과 조인들 같은 존재는 영적 존재들과 구분할수 없을정도로 아주 나이가 많고 높이 진보한 외계인인데, 여러분들이 신이라고 말할때 이들 또한 신이며, 최고 창조주 하나만을 신이라 말하고 여러분이 신이 아니라고 할때 이들또한 신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우주를 다른 우주 존재들과 상위 우주 존재들에 대해 하나의 몸으로 대표하고, 여러분들은 그의 몸을 이루는 분신들로서 건강한 신체 부위나 세포에 비유할수 있다. 여러분 각자가 스스로 왕이 되는 일은 세포가 건강하게 살아서 자기 위치 대로(위는 위대로 간은 간대로 두뇌는 두뇌대로 심장은 심장대로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기능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우리 우주의 창조자의 이루는 몸을 건강하게 한다는 것이고, 신의 몸이 건강하다는 것은 여러분들의 건강하다는 것이고 행복으로 이어진다. 이렇듯 신과 여러분은 뗄수 없는 불가분의 공생 관계에 있다. '나를 버리는 것'은 세포나 몸의 기관을 죽이는 일이고 신을 죽이는 일임을 명심하라. 그것은 여러분이 사랑한다는 제 1 퍼스트 원인자, 모든 것의 원천을 죽이는 반역하는 행위임을 명심하라.


우주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거느리는 초우주 밖으로 나가면 그러한 초우주의 존재들을 내부에 하부 그룹으로 거느린 더 큰 또하나의 초초 우주 그룹의 존재가 있고 그 초초 우주 밖으로 나가면 그 초초 우주들의 그룹을 통합해 이루어진 더 큰 초초초 우주 그룹이 존재한다.


우리 우주 내에서 상위차원 존재들이 여러분들의 하위 차원의 존재들을 돕고 관리 하듯이, 상위 우주 존재들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하위 우주 존재들을 그룹을  관리한다. 언급하는게 무의미 할정도로 이런 우주 단계는 많다. 그리고 그 정점에 그 모두를 거느리는 13차원 하느님이 존재한다. 근원은 지금 여기 현재에도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근원이다. 따라서 당신들이 지금 현재 여기에 존재하는 만큼 근원도 지금 현재 존재한다. 지금 현재에 근원이 존재하기에 지금 여기에 모든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과거의 신이거나 죽은 신이 아니다. 근원은 저기에도 있지만 이곳에도 있다.  그 하느님은 바로 당신 몸으로 여기에 내려와 있으며 당신이기도 한것이다. 하지만 당신만이 유일한 하느님은 아니다.


현재 여기서 하나님이나 부처와 함께 있음을 느끼는 것과 그 일을 다하고 실질적으로 신체가 소멸하여 그 자리에 위치하는 것은 똑 같이 중요하며 동질의 기쁨이다.


(신체적으로 당신이 하나님 근원의 13차원의 자리에 앉는다고(소멸한다고) 하나님 근원이 사라지고 당신이 하나님 근원으로 대체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다시 임무를 부여 받고 영혼으로 창조되어 나올 수도 있다. 고도로 진화한 영의 존재들은 자신의 진동수와 밀도를 바꿔 언제든 거꾸로 하강하여 영혼이 되기도 하고 에테르체가 되기도 하고 육체가 되는 능력이 있다. 우리도 그 방식으로 아주 오래전에 지구에 온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상승중에 있는 것이다.
각 학년마다 그 '과정'을 다 거치고 졸업할때 버리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손으로 정중히 받드는 단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단계들, 과정, 과정들을 즐겨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멀고 먼 길위에서 한숨만 쉬고 있어야 한다. 가야할 방대한 이 우주의 크기에 목표만 보고 매달린다면 그 일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당신 정신건강에 해롭다.


목적을 두되, 목적을 향해 갈때는 목적을 잊고 도상을 즐겨라, 부처와 하나님이 지금도 이 순간에 함께 함으로 그것이 가능하다. 과정은 끝이 없기에 지금 이순간 완전하다는 말이 가능한것이다. 걸으면서도 쉬고 쉬면서도 걷는 과정 자체가 사실은 전부이고 완전함이다. 그것이 신의 호흡이고 살아 있음이다. 하나님이나 부처는 '궁궐' 안에서만 존재하는게 아니며 당신 내부에, 이곳에 존재한다.여러분이 상위의 하위 디레토리로서 딸린 아들이고 자녀들이듯이 당신들에게도 하위 디레토리로 딸린 자녀들이 가지고 있고, 또 가지게 될것이다.
부처와 하나님은 저곳에도 존재하지만 이곳에도 당신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천국은 저곳에도 존재하지만 이곳에도 존재한다.  어느 하나로 가기 위해 다른 곳을 버리는게 아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도 이루어지게 하는 것, 그둘 사이의 연결이 튼튼하고 건강해서 그 둘을 같게 만든는 것이 당신의 목적이다.그렇게 해서 하느님의 천국은 당신의 개개인들이 있는 곳으로 전 우주로 확장될수 있다.

 
여러분 몸에게 여러분의 진아, 대아, 상위영혼으로부터 생명에너지를 이어 받아 전달하는, 신체에 존재하는 빛의 신체, 5차원의 반에테르체(유체)를 자각도 못하고 5차원에 진입도 못한 여러분에겐 첫번째 단추가 중요하다. 여러분은 겨우 기초공사를 놓고 있는 지점에 있는 것이다. (6차원과 실질적으로 접촉할수 있는 5차원은 본격적인 내면의 세계이며 본격적인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면에서 지금의 여러분에게 당금에 가야할 목적지로 집중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특별하다. 그 이상의 너무 먼 목표는 그것에 촛점을 잃게 만든다. 5차원만 되어도 여러분은 그 위치에서 신체적으로 모든 차원과 통합과 교류와 소통과 연결이 가능하다.)


에고를 없애려거든 에고를 받들어라.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당신은 그것을 영원히 다룰수 없다.다룰수 없는자 영원히 벗어날수도 없앨수도 없다. 그것은 당신의 진화를 위해서도 다루어야할 중요한 도구이다.


당신 자신의 영혼과 다른 사람의 영혼은 그 보다 낮은 당신에게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확실한 지혜와 의지로 사랑으로 창조된것이다. 환상을 환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자세라면 모르지만 당신이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환상으로 본다면 당신은 영원히 충족될수 없다.


그런 자세로 어떻게 현재 이곳에서 자기 사랑이, 신과 함께 함이 가능하겠는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함은 당신의 모습으로 이곳에 있는 하나님과 부처를 사랑하지 못함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자가 어찌 남을 사랑하고 신을 사랑하고 부처를 사랑하겠는가.
사랑에 게으름을 피우고 태만을 부리면서 어느날 한시에 무얼 이루면 나머지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 돼, 다 보상이 돼가 아니다. 그동안에 자신의 영혼을 없애려고 당신은 영원히 싸울것인가.  모든 것은 단계별로 이루어진다. 오늘 못하면 내일도 못한다.


현재 지금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자가 즉 딛고 올라설 발판이 없는자가 어떻게 그 '없는' 발판을 딛고 다음 단계로 그 이상 으로 올라가려고 헛된 욕망을 품는가.


당신은 혼이라는 것 넋이라는 것 얼이라는 것을 무슨 수행의 거추장스런 방해물정도로 하찮게 취급하고 없애려 하지만 그것은 당신 하나의 사정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영혼이 없다면 이 우주가 돌아가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당신은 당신 하나의 욕망만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전체가 돌아가는 그림을 살펴보고 전체와의 균형을 생각하라.비록 언제가는 당신에게 소멸할것이라 해도 이 우주의 어느 곳 다른 이들에게는 여전히 영혼이 태어난다. 영혼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우주의 진화를 위해선 영혼이 필수 불가결한 단계가 있다.


얼이나 혼 넋이라는 것도 창조를 위해 하는 역활이 있다. 그 역활를 다 했을때야 비로서 배움을 마치고 소멸할수 있다.  공짜를 탐하지 마라. 뭘 했다고 무조건 소멸인가. 해 놓은 일도 없이 무조건 소멸이 아니다. 신체는 그렇게 해서 소멸하는게 아니다. 신체는, 신체의 일, 실질적인 일을 통해 소멸한다.


'이것은 그의 혼과 넋이 서린 작품이다', '민족의 얼이 담긴 땅'이라고 할때와 같이 넋이나 얼은 긍정적인 면이 있다.


얼이나 혼 넋이라는 것은 영이  자신을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서 구체화하고 표현하며 실현시키기 위한 역활을 한다. 그 또한 신의 일부이다.

 
한민족의 얼은 이 세계에 '남아' 중요한 역활을 하고 장차 닥쳐올 지구 창조와 화합을 위해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사도에 빠진 수행자처럼 무조건 없애려고만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지구에 와서 지구의 녹을 먹고 수행을 하고 있는 자가 이 지구의 본래 목적대로의 창조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가. 그것은 창조신에 대한 반역이다. 모두가 부르주아 궁전에 올라 애들처럼 살려고만 하면(당신의 수행이라는 것은 부르주아적이며 그 이득을 보기 위함이 아닌가) 쓰레기는 누가 남아 치우는가. 누가 집안 청소를 하는가. 겨우 제 한몸 이기적이고 편의적인것만 추구하며 무얼을 없애, 편의만 보려하는 희생의 삶이란것을 모르는 수행자는 그 넋과 얼 앞에서 발 뒤꿈치 때만큼도 못한 것이다. 이것은 진화와 수행의 혼돈하고 서로의 자리를 분간 못해서 벌어지는 촌극이다.


왜 수행은 마귀들이 사는 곳이라 하며 '진화'와 '우주면적'을 괴리를 두고 전쟁을 하는가. 그것은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수행이 진화를 정상적으로 복원시키고 구원하려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귀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문제는 상위와 의식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의식이 그 혼에 고착될 때이지 그것 자체가 나쁜것이라서 얿애야하는 것은 아니다. 없앤다는 것은 얼이나 넋 자체를 없애는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그것에만 고착된 상태 행위를 없애는 것이다. 행동, 죄는 미워해도 사물은 미워하지 마라.  정상적인 세상에서 진화와 수행은 서로 배척하지 않으며 같이 간다. 수행은 그저 진화를 곁에서 도와주고 촉진시켜주고 균형을 잡게하는 보조 장치이지 결코 진화 배척하지 못하며 주가 되지 못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두발이 없이 땅(각 단계의 행성 층이나 배)에 닫지 앉고 모가지가 높은곳에만 매달려 있는 것을 우리는 구신이라고 한다. 천사나 상위 차원의 존재들도 행성에서, 배들에서 산다는 것을 명심하라.


당신을 지배하는 것은 우주에 대한 대부분의 면적에 대한 분별없는 공포이고, 그 공포가 외부의 힘(스승이나 최고신 최고의 경지따위)에 대한 권력을 추종하게 만들며, 당신이 품은 공포가 바로 당신이 무엇보다도 똑똑히 알아야할, 당신이 두려워하는 그 마귀의 전부인것이다.

 


4

 

최초에 우주 창조 계획에는 깨달음이란 없었다. 모든 것이 깨달음 상태였따. 여러분은 본래 부터 여기 오기전 부터 깨달았었다. 여러분이 온곳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이고 부처가 산다는 극락으로부터 였다.


여러분이 이 곳에 온 목적은 그 '깨달음'이란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잠시 여러분들이 어둠에 감금되고 지배되고 그 깨달음이라는 기억을 잃어버린 변질된 망각 상황하에서 본래의 모습을 찾으라고 나온 스승들의 말이었다. 깨달음이란 본래의 모습을 찾는 것을 말한다.


원래부터 깨달은 상태였음으로 깨달음을 찾으라는 말이 그 시기가 지나면 절대적인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스승들의 소임을 다하고 변질된 상황이 지나면 사라져버릴 것이다.


여러분들은 깨달음이란 것을 어떻게든 어린애가 부모로부터 떨어지지 않고 부모에가 달려가 다시 매달리는 것처럼 하나님이나 부처와 함께 있으려는 경지로만 생각한다.


만일 그런 깨달음이 목적이라면 여러분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이나 부처라는 것과 함께 있는 경지에 있으면 되는 것이지 이곳에 와 있을 필요도, 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목적이라면 처음부터 나중까지 함께 있으면 된다.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최선은 처음부터 구태여 떨어져 있을 필요가 없다. 깨달음으로부터 나온 이유가 고작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달려가는일 인가. 손이 닿지 않는 등을 긁기 위해서 손바닥을 긁고 그것을 등에다 갖다 붙일 필요는 없다. 이  무슨 덤앤 더머 코미디 같은 일이란 말인가.


뭔지도 모르고 그런일을 하는가.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 누가 당신들에게 하나님이나 부처로 부터 떨어지는 '죄'를 부여했는가.


여러분이 온 곳은 누구나 할것없이 이미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 부처라하는 그 최고의 높은 목표, 최고의 정점이라고 부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원래 상태에선 여러분은 이곳에 온 목적은 그런 깨달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본시 그런 <깨달음과 함께 하는 삶>이라는 겸험과 체험을 통한 실질적 배움을 얻기 위해서다. 그것은 기쁨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두레박이다.


각자 아래로 내려갔다가 물을 길어오는 하나님, 부처의 두레박이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길어오는 '물'이 삶의 체험을 통한 배움이고 지혜이고 교훈이고 창조의 데이터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혼도 필요하고 넋도 필요하고 얼도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두레박이 내려갔다가 엘리베이터처럼 오르는 길에는, 사다리와 같은 12단계가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12차원이라고 한다.(7차원 이상의 집단 의식을 하나로 생략하고 줄여서 그 이하 7차원이라고도 한다) 각 차원마다, 여러분이 발을 딛고 올라가는 사다리의 발판 하나 하나 마다 여러분이 반드시 거쳐야할 그 나름의 수준의 층이 있고 삶이 있다.


정말 일을 잘 이루고 싶거든 최고 정점에 가고 싶거든 지금 현재 여기 당면한 단계부터 생각하라. 목적을 가지되 목적을 향해 걸을땐 걷는일에만 충실하고 목적을 잊어라.


여러분이 깨달음이라는 것을 얻는 다고 이 과정들 중간 단계를 모두 무시하고 여러분의 신체가 어느날 한날 한시에 하나님이 되고 부처님의 차리에 앉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부처든 하나님이든 떨어지지 않고 어디를 가든, 지금 이순간에도 당신과 함께 할뿐이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이나 부처가 앉아 있는 자리에 앉았을때 하나님이나 부처가 그 길위에서 물을, 어떤 내용물을 길어왔느냐고 물었을대 아무 답변도 못한다면 다시 빠구되어 그 물이라는 것을 길어와야 한다.


그 물이 삶이고 배움이고 겸험이고 체험이고 그것을 통한 교훈인 것이다.


깨달음이란 말은 정상적이 궤도로 올려 놓기 위함이다. 깨달음을 얻은 자도 그 궤도는 타야 한다.


다리 밑에서 온 배고픈 그지들처럼, 우리들이야 그 세계에 들지 못하니 아무것도 모르고 어떻게든 저 하나 곤궁해서  탐식하는 아귀떼처럼 깨달음이란 것을 얻어볼까하고 저 하나 문밖에 서서 눈독을 들이지만(그것외엔 정신이 없고), 진짜 깨달은 자들은, 어느 정도 개인의 수행을 이루고 그 레벨 그 무대에 올랐다면 그 수준에선 진화, 진화, 우주의 진화가 본격적인 일이며  더 이상 개인의 수행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정말로 깨달음은 자들은, 의식이 개인의 속알찌 그릇, 소아에서 대아로 우주 전체로 확장된 자이다. 무엇보다도 우주 자체가 우선이며, 우주가 이제 새롭게 하나의 대상으로 크게 다가온다. 당신은 이 우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주의 생명의 진화 그것이 신의 모습이고 우주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조그만 지구하나를 두고 극성스럽다 하지만 외계인이나 상위의 차원의 존재들이 이 조그만 지구의 당신들에게 관심을 갖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