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왕따는 일반화된 용어가 되었다. 얼마전 왕따 동영상도 있었고...
그러나 왕따라는 용어만 요즘 생겨난 것이지, 그런 따돌림은 예전부터 있어 왔다.

왕따 현상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부 그룹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하는 자가 그 그룹으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현상이다. 이런 사례는 너무나 많다.
아기중의 지진아, 선천적인 불구, 가족중의 미운오리, 학교의 문제아, 군대의 고문관, 장애인, 사회의 소외계층, 실미대원, 군사독재 시절의 좌익세력, 사이비 종교단체, pag에서의 청의 동자, 한국에서의 pag, 세계에서의 극빈국, 우주에서의 지구등등

모두 그 당시의 전체적인 분위기에 맞지않는 성향을 가졌던 것이다.
아직까지 우리사회는 쪽수가 우위에 서고 있다. 민주주의 라는 포장을 하고는 있지만 민주주의도 쪽수로 모든것을 결정한다.

아직 지구사회의 의식은 결코 높다고 볼 수 없다. 무수한 다양성을 포용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물론 예전에 비해 현저히 나아지긴 했지만 대립, 충돌은 여전하다. 심지어 포용, 수용을 이념으로 하고 있는 pag조차 여기저기서 투닥거린다. 우주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놈 프로젝트를 연구하는 학자가 교육방송 '지식의 최전선' 에 나와서 이야기 한 것이 있다.
단백질을 형성하는 수만개의 유전자들이 '유기적'인 활동으로 끊임없이 단백질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유기적' 이라는 뜻은 긴밀히 협조한다는 것이다. 즉 모두가 대립이 아닌 포용, 수용을 통한 협력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래야 창조적인 기능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저것의 교훈은 우리 인간이 진정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존중하고 포용, 수용을 통해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성이 풍부할수록 조합의 수는 무궁무진하다. 무궁무진한 조합은 창조의 가능성을 보다 넓게 열어두게 되는 것이다.

이 다양성에 대한 포용, 수용이 바로 '사랑'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