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사람은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하면 자연히 탈것에서 내린다.
부산역에 도착하기전에 기차나 버스에서 내리고 싶다고 내린다고 해서
그 사람이 부산에 도착한것은 아니다
그는 부산까지 가기 위해서는 다시 탈것을 타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랜시간 고생를 해서 걸어서 가야만 한다.
자살이라는것도 이와 같다.  

수행을 하지 않고 자연적인 진화 상테에 있다면 오십만년이란
진화의 세월이 걸리지만 단 50년으로 단축시킬수 있는것이 수행이라고 한다.
수행을 하지 않고 육체를 가지고 사는것은 목적지까지 비행기를 타지 않고
차를 타고 가는것에 비유될수 있다.
그러나 육체마저 버리는것은 걸어가거나 기어가는것에 비유되거나
극단적으로는 모든 의지를 포기한채 사방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것과 같기 대문에
그 정체성 속에서 언제 다시 진화의 여정을 시작할지조차 알수 없는
매우 암담하고 안타까운 상황에 빠져 버리고 만다.  

날아가든 기어가든 그 사람의 자유이고 늦게 가도 좋다면 그것도 좋겠지만
그러나 정말 중요한 사항은
인간의 육체란 영혼에게 있어서 하나의 씨앗이 토양속에 잘 파묻혀 있어야만
훌륭하게 싹을 틔우고 잘 자랄수 있는것과 같은 어떤 기능성이나 필요성이 있다는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 죽을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을 수 있는 사람은 깨달은 사람들 뿐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날 나는 죽은것이다. 그때부터 40년 동안
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한적은  없다.  라고 말씀하신다.  

육체가 죽으면 아스트럴체가 있고,  아스트럴체가 죽으면 멘탈체가 있으며
멘틸체가 죽으면  붓디 차원의 코잘체가 있다.
멘탈체까지 죽고 붓디 차원의 코잘체까지 도달할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것이 그렇게 되질 않는다.

육체가 죽고 아스트럴체에 이르렀다면 그는 다시 육체를 받아야 한다.  
또는 아스트럴체가 죽고 멘탈체 상태에 있다면 그는 다시 아스트럴계에 환생해야 할지 모른다 .
부처님은 이런것과 관련하여 비유적으로 육도 윤회를 가르치셨다.

그는 생사에서 자유로운 사람, 삼계를 해탈한 사람이 아니다
생과 사 를 마음대로 할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죽고 싶다고 해서 죽는다는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
그는 다시 육체를 받아야 하며 자기가 자신을 살해한 무거운 카르마를 짊어진채(자기가
자기를 그르쳤기 때문에 불구로 태어날수가 있다. )

진짜 죽으려면 죽을 때 조차 의식을 유지한채 각성 상태에서 죽어야 한다.
(보통 사람은 이것이 안되기 때문에 수행이라는것을 한다. )
이렇게 한번 죽을수 있다면 그리고  

신비한 힘인 쿤달리니가  너를 초인으로 하기전에 먼저 뜻을 세워 너의 아스트럴체를
말살하라(브라바키)   이렇게 아스트럴 차원에서 두번 죽을수 있다면

그리고 멘탈차원에서 세번 죽을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붓디차원의 코잘체까지 갈수 있다면 그는 깨달은 사람이 된다.
죽을때 지켜보는자가 되고
각성한채로 죽는다면 그의 윤회의 수레바퀴는 멈추어진다. (사자의 서)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수행을 하지 않고 물질적인것에 집착하다 죽는 사람은
죽을때 온몸의 뼈마디가 끊어질듯한 고통과 함께 그의 영혼은 아랫쪽의 챠크라나
아랫쪽의 출구를 통해서 영혼이 빠져나가고  그 뒤 그의 영혼은 저급한 세계로 가게 된다
그러나 열심히 수행한 사람은 죽을 때조차 심신이 상쾌하며 의식을 유지한채
그의 영혼은 상단적이나
크라운 챠크라를 통해 빠져나가며 그의 영혼은 높은 차원으로 가게 된다

세번 죽을 때 윤회를 끊고 생사에서 자유로운 대 해탈자가 된다.
그는 진정한 죽은자가 되며  또한 참다웁게 생생히 살아 있는자가 된다.
진공과 하나되며   오고 감이 여여한  여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