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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00천이라고 거짓말하는 날ㅇㄹ가 누군데.... 쪽지로 잠깐 대화하면서 알앗다)
나는 관심도 하나도 없는게 어디서 놀다가  이런데서 뒷북이나 치고잇는꼴을 보니
참 한심하다못해서 그내면의 허전함이 빤히 보인다
세상의 인연이 훨신 더많으니 내게 쓸데없는 거품은 꺼주고 빼달라는 의미에서
애기하다가 어저다가 엉뚱한 애기가  나오고 말앗다.......



占察善惡業報經卷下 出六根聚經中
天竺三藏菩提登譯



점찰선악업보경권하 출육근취경중
천축삼장보리등 번역

그 때에 견정신보살마하살께서 지장보살에게 물으셨다.

「대승을 구하여 향해 나아가는 자에게 나아가는 방편을 어떻게 열어보이시나이까?」

지장보살께서 말씀하사대

「선남자여 만약 어떤 중생이 대승을 향하려고 하는자는 응당 최초의 행하는 바 근본 업을 먼저 알아야하나니 그 최초 행하는 바 근본업이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일실경계에 의지함으로써 신해를 닦는 것이며, 신해력을 증장하는 것을 인연한 연고로 속히 보살의 종성(種性)에 들어감을 얻는 것입니다. 말하는 바 일실경계라는 것은 이를테면 중생심의 체는 본래부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스스로의 성품은 청정하고 장애가 없는 것이니 마치 허공이 분별을 여의는 연고로 평등하여 널리 두루하여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는 것과 같나이다. 시방에 원만하여 구경에는 하나의 모습이라 둘도 없고 다름도 없어서 변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음이며 늘어남도 없고 줄어드는 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체중생의 마음과 일체 성문 벽지불의 마음, 일체보살의 마음, 일체제불의 마음은 모두 한가지이니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물듦도 없는 적정한 진여상인 까닭입니다.

무슨 까닭인고하니 일체 마음이 있어 분별을 일으키는 것은 마치 허깨비와 같아 정한 진실이 있지 아니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식.수.상.행, 기억하여 생각하고 반연하여 생각한 것, 깨달아 아는 것 등의 가지가지의 마음(心數)들은 푸르지도 않고 누르지도 않으며 붉지도 않고 희지도 않으며 또한 여러가지 색도 아니며 길거나 짧거나 모나거나 둥글거나 크거나 작지 아니하며 내지 온 시방 허공 일체세계에서 마음으로 형상을 구하나 하나라도 구분하여 얻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중생이 무명과 어리석음의 훈습을 인연하여 허망한 경계를 나타내어 하여금 생각하여 집착을 일으키는 것 뿐이니, 이른 바 이 마음은 능히 스스로 알 수 없으며 망녕되이 스스로 있다고 이름하여 깨달아 안다는 생각을 일으키고 나와 내것이라고 계량하나 그러나 실은 깨달아 아는 상은 있지 아니한 것이니 이 망녕된 마음으로써 필경에는 체가 없어서 가히 볼 수 없는 까닭입니다.

만일 깨달아 알거나 능히 분별하여 알 수 없다고 한다면 곧 시방 삼세의 일체경계 차별 상이 없을 것이요 그럼으로써 일체의 법은 모두 저절로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허망한 마음의 분별에 의지한 까닭으로 있는 것이니 이른바 일체의 경계는 각각 같지 않거늘 스스로 있는 것이라 생각하여 이것은 자기라고 앎이요, 저것은 남인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일체의 법은 스스로 있을 수도 없거니와 곧 차별도 없는 것이지만 오직 허망한 마음을 의지하여 안에 스스로 없는 것을 요달하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앞의 바깥 경계가 있다고 생각하여 허망하게 갖가지의 법에 관한 생각을 내어 있다고 말하나니,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없다고 말하기도 하며, 저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이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며 옳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르다고 말하기도 하며 내지 한량 없고 가 없는 법에 관한 생각을 허망하게 내는 것입니다.

마땅히 이와 같이 아실지니.일체의 법은 모두가 허망한 생각(妄想)을 좇아 일어나 허망한 마음에 의하여 근본을 삼았으되 그러나 이 허망한 마음에는 스스로의 형상이 없기 때문에 또한 경계에 의지하여 있게 되는 것이니 이른바 앞의 경계를 반연하여 생각하고 깨달아 알기 때문에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이 허망한 마음과 더불어 앞의 경계가 비록 서로 의지함을 갖추었다하더라도 일어남에는 선후가 없으나 그러나 이 허망한 마음은 능히 일체 경계의 근원이며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이를테면 허망한 마음에 의지하여 법계가 하나의 형상인 줄 요달하지 못한 까닭으로 마음에 무명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명의 힘에 의지한 까닭으로 허망한 경계를 나타내고, 또한 무명이 없어짐을 의지한 까닭으로 일체의 경계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일체의 경계를 의지하여 스스로 요달하지 못한 까닭으로 경계에 무명이 있다고 말하지 않으며, 또한 경계에 의지하기 때문에 무명을 만든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일체 부처님은 일체의 경계에서 무명을 내지 않으신 까닭으로 또 다시 경계의 없어짐을 의지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무명의 마음이 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경계는 본래를 쫓은 이래로 체성은 스스로 멸하여 일찍부터 있지 아니한 연고로 이와 같은 뜻에 인연하나니 이러한 연고로 다만 일체의 모든 법은 마음에 의지하여 근본을 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아십시오. 일체의 모든 법은 모두 이름이 마음이라하며 그러므로 뜻과 체가 다르지 아니하나니 마음으로 거두는 바이기 때문인 것입다. 또 일체 모든 법은 마음을 쫓아 일어나는 바로서 마음과 더불어 형상을 지으며 화합하여 있게 되나니,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해지면서 하나로 머무르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경계는 다만 마음의 반연한바에 따라 생각생각으로 상속(相續)하는 것이기 때문에 잠깐 동안 머무르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하는 바 마음의 뜻에는 두 가지의 모습(相)이 있는데 무엇인 두 가진인고 하면 첫째는 마음의 안모습(心內相)이요, 둘째는 마음의 바깥모습(心外相)입니다. 마음의 안모습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나니, 무엇이 두가지인고하니 첫째가 참이요, 둘째가 허망함입니다. 말하는 바 참이라 하는 것은 이른바 마음의 바탕체의 본래의 모습은 여여(如如)하여 다르지 않으며, 청정하고 원만하여 장애가 없고 걸림이 없으며, 미묘하고 은밀하여 보기 어렵지만 일체의 처소에 두루하여 항상 무너지지 않고 일체의 법을 건립하고 오래도록 자라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바 허망이라 함은 이른바 생각을 일으켜 분별하여 깨달아알며 반연하여 헤아리고 기억하는 등의 일이니 비록 다시 일체의 가지가지 경계를 능히 생기게 하며 상속시키는 것이지만 그러나 안은 허망되고 거짓이어서 진실이 있지 않아 가히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바깥 모습이란 이른바 일체 모든 법의 가지가지 경계등이 생각하는바가 있음을 따라 경계가 앞에 나타나는 연고로 안 마음과 바깥 마음은 차별이 있는 줄로 알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땅히 아십시오. 안의 허망한 생각은 인이 되고 체가 되며, 밖의 망상은 과(果가) 되고 용(用)이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등의 뜻에 의지한 까닭으로 나는 모든 법은 다 이름이 마음이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다시 마땅히 아십시오. 마음의 바깥 모습은 마치 꿈에 보았던 가지가지 경계가 오직 마음의 생각으로 지어진 것이나 진실로 바깥 일은 없는 것처럼, 일체의 경계도 모두 이와 같나니 그러므로 모두 무명 의식의 꿈에 의지하여 보는 바를 망상으로 지은 까닭입니다.

다음으로 다시 응당 아셔야 할지니 안마음은 생각생각에 머무르지 아니한 연고로 보는 바와 반연하는 바 일체의 경계도 또한 마음을 따라 생각생각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마음이 생긴 연고로 가지가지의 법이 생기며, 마음이 멸하기 때문에 갖가지의 법이 사라진다는 것이니 이 생기고 멸하는 형상은 다만 이름 뿐이요 실제로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경계에 가지 아니하며 경계도 또한 마음에 오지 않는 것이니 마치 거울 가운데 형상이 옴도 없고 감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일체의 법에서 나고 없어지는 정한 모습을 요달하고저하나 가히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일체의 법은 필경에는 체가 없는 것이어서 본래 항상 공하여 실로 나고 없어지지 아니하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일체의 법은 실로 나고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곧 일체의 경계에는 차별의 모습이 없으며 적정(寂靜)하여 한 맛이므로 이름을 진여.제일의제.자성청정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 자성청정심은 담연(湛然)하고 원만하여 그러므로 분별의 모습이 없는 까닭입니다. 분별의 모습이 없다는 것은 일체의 처소에 있지 아니한 바가 없다는 것이며, 있지 아니한 바가 없다는 것은 일체의 법을 의지하고 지니며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다시 저 마음을 여래장이라 이름하나니 이른바 한량 없고 가이 없으며 불가사의하며 무루의 청정한 공덕의 업을 두루 갖춘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시작 없는 본제로부터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으며 자재하여 사라지지 않습니다. 일체에 나투신 변화와 가지가지의 공덕의 업은 항상 불이 타듯 왕성하여 일찌기 휴식함이 없었나니 이른바 일체의 세계에 두루하여 모든 짓는 업을 보이시며, 갖가지로 교화하고 이롭게하기 때문입니다. 한 부처님 몸은 곧 바로 일체 부처님의 몸이며, 일체 부처님 몸은 곧 바로 한 부처님의 몸이 되나니 있는바 작업도 또한 모두가 함께 하나인 것이니,이른바 분별하는 형상이 없음이며, 피(彼)와 차(此)를 생각하지 아니하여 평등해 둘이 없어서 하나의 법성에 의하여 짓는 업이 한가지로 되나니 자연으로 변화한 몸이 따로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일체의 처소에 두루하고 원만하여 움직이지 않는 까닭으로 여러 중생들이 여기에서 죽고 저기에 남을 따라서 언제나 그들을 위하여 의지가 되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허공이 일체의 물질 형상과 가지 가지의 모양, 무리를 모조리 용납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온갖 물질 형상과 여러가지의 모양. 무리들은 모두 허공에 의지하여 있으며 세워지고 자라나 허공 중에 머무르고 허공에 거두어지는 것이 그러므로 허공을 체로 삼음으로써 허공의 분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마땅히 아소서. 물질 형상속의 허공계는 헐리거나 없앨 수 없으나 물질 형상이 마침내 무너질 때에는 도로 허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니 그러므로 허공의 본래 경계는 늘어남도 없고 줄어짐도 없으며 움직이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일체 중생의 갖가지의 과보를 모두 다 능히 용납하여 받아들이는 것이니 그러므로 일체 중생의 갖가지의 과보는 모두 부처님의 법신에 의지하여 있으며, 세워지고 자라서 법신의 안에 머무르고 법신의 받아들이는 바가 되는 것이요, 법신을 체로 삼음으로써 법신의 분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마땅히 아소서. 일체 중생의 몸 안의 모든 부처님 법신도 또한 헐리거나 없앨 수 없으나 만일 번뇌가 끊어져 무너질 때에는 도로 법신에 돌아가는 것이니, 법신의 본래 경계는 늘어남도 없고 줄어짐도 없으며 움직이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시작 없는 세상에서부터 무명의 마음과 함께한 어리석고 어두운 인연과 훈습의 힘 때문에 허망한 경계를 나타냈었고, 허망한 경계인 훈습의 인연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망상과 서로 응하는 마음을 일으켜 나와 내것을 헤아리고 모든 업을 짓고 모아서 생사의 고통을 받는 것이니 그 법신을 설명하여 중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와 같은 중생중에 법신이 훈습되어 힘이 있는 이면 번뇌는 점차로 엷어져 세간을 싫어하며 열반의 도를 구하고 일실경계를 믿고 귀의하며, 육바라밀등의 온갖 보리 갈래의 법을 닦으면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합니다. 만일 이와 같은 보살 중에 일체의 선한 법을 수행하여 만족하며 필경에 무명의 잠을 여의는 이면 이름을 바꾸어 부처님이라고 합니다.

마땅히 아소서. 이와같은 중생․보살․부처님등은 다만 세간의 거짓인 이름과 언설에 의지하였기 대문에 차별이 있으나 법신의 체는 끝내 평등하여 다른 형상이 없는 것인 줄로 알아야 할 것이니 선남자여, 이것을 이름하여 일실경계의 이치를 간략히 해설한 것이라합니다.

만일 일실경계에 의지하여 신해를 닦고자 하는 이는 응당 두 가지의 도를 관하는 배워 읽혀야 합니다. 무엇 등이 두 가지가 되는 것인고 하면 첫째는 유심식관(唯心識觀)이요, 둘째는 진여실관(眞如實觀)입니다. 유심식관을 배우는 이는 이른바 일체의 시간과 처소에서 몸.입.뜻의 온갖 짓는 업을 따라 모두 마땅히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나니 오직 이 마음인 줄로 알아야하며, 내지 일체의 경계에서 혹 마음이 생각에 머무르면 모두 마땅히 살펴 알아서 마음으로 하여금 무기(無記)에 반연하여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하게 하지 말도록 해야합니다. 생각생각의 사이에 있어 모두 응당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니 마음이 반연하여 생각하는 바가 있음을 따라서 도리어 마땅히 마음으로 하여금 그 생각을 따르고 쫓게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스스로 알게 하여야 합니다. 자기 속 마음에 스스로 생각이 일어나는 줄을 아는 것은 일체의 경계에 생각이 있고 분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른바 속 마음에 스스로 길고 짧음, 좋음과 싫음, 옳음과 그름, 얻음과 잃음, 쇠약과 이익, 있음과 없음등의 소견과 한량 없는 여러 생각을 내었다하더라도 그러나 일체의 경계는 일찌기 생각이 있어서 분별을 일으키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마땅히 아소서. 일체의 경계는 스스로 분별하는 생각이 없는 까닭으로 곧 스스로 긴 것도 아니요, 짧은 것도 아니며, 좋은 것도 아니요 싫은 것도 아니며, 내지 있는 것이 아니요 없는 것이 아니어서 일체의 형상을 떠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세히 살피면 일체의 법은 오직 마음의 생각에서 날 뿐이요, 만일 마음을 떠나게 하면 곧 하나의 법, 하나의 생각도 스스로 능히 차별이 있게 됨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마땅히 아소서. 이와같이 속마음을 지키고 기억하여 오직 허망한 생각이요, 진실한 경계가 없는 것인 줄 알아 쉬어 버리거나 폐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이것을 유심식관을 닦아 배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마음이 무기이어서 스스로의 마음의 생각인 줄을 모르는 이는 곧 앞의 경계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니 유심식관이라 이름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속마음을 지키고 기억하는 이는 곧 탐내는 생각, 성내는 생각, 어리석고 삿된 소견의 생각을 알며, 선을 알고 선하지 않음을 알고 무기를 알고 마음의 근심과 가지 가지의 모든 고통을 알 것입니다. 만약 앉았을 때에 마음의 반연한 바를 따라 생각 생각에 오직 마음의 나고 없어짐이라고 자세히 살피며 알 것이니, 비유컨대 물의 흐름과 등의 불꽃이 잠시라도 머무름이 없는 것과 같다 할 것이며, 이것을 쫓아 색적(色寂) 삼매(三昧)를 얻을 것이니 이 삼매를 얻고 나면 다음으로 사마타의 관심을 믿으며 비파사나의 관심을 믿고 배워 익혀야 합니다.

사마타의 관심을 믿고 익힌다는 것은 속마음의 볼 수 없는 형상을 생각하는 것이니 원만하여 움직이지 아니하고 옴도 없고 감도 없으며, 본래의 성품은 나지 아니하여 분별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비파사나야의 관심을 믿고 익힌다는 것은 안팎의 물질을 생각하고 보는 것이니 마음을 따라 나고 마음을 따라 없어지며 내지 생각을 익혀서 부처님의 색신을 볼 적에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마음을 따라 나고 마음을 따라 없어지는 것은 허깨비와 같고 변화한 것이며, 물 속의 달과 같고 거울 속의 형상과 같습니다. 마음이 아니고 마음을 여읜 것이 아니며 옴이 아니고 오지 않는 것도 아니며, 감도 아니고 가지 않는 것도 아니며, 난 것도 아니고 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지음도 아니고 짓지 않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선남자여 만약 이 두가지의 관심을 믿고 익히는 이는 빨리 일승의 도 회상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마땅히 아소서. 이와 같은 유심식관은 최상 지혜의 문이라고 하는 것이니 이른바 능히 그 마음으로 하여금 민첩하게하여 신해의 힘을 기르고 빨리 공의 이치에 들어가서 위 없는 큰 보리 마음을 낼 수 있게 하는 까닭입니다.

만일 진여실관을 배워 익히는 이는 마음의 성품은 남이 없고 없어짐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데에 머무르지 아니하며 영원히 일체의 분별의 생각을 여의어 점차로 공처, 식처, 무소처, 비상비비상처등의 정경계의 형상을 지나서 상사공(相似空)삼매를 얻을 것이니, 상사공삼매를 얻었을 때에는 식상수행의 거칠은 분별의 형상은 앞에 나타나지 아니합니다. 이것으로 부터 배워 닦아서 선지식과 대자비하는 이를 위하여 수호하고 기를 것이니 이러한 까닭으로 모든 장애를 여의고 부지런히 닦아 폐지하지 아니하면 차차로 능히 심적삼매에 들 수 있으며 이 삼매를 얻으면 곧 다시 일행삼매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일행삼매에 들어간 뒤에는 부처님을 수 없이 뵈오며 깊고 넓은 수행의 마음을 내어 견신위에 머무르는 것이니, 이른바 사마타 비파사나야의 두가지 관하는 도를 결정코 신해하여 결정코 향할 것이요 닦아 배운 바의 세간의 모든 선 삼매의 업을 따라 좋아하거나 집착하는 바가 없을 것이며, 내지 두루일체의 선한 바탕인 보리 갈래의 법을 닦아 생사의 안에 있어 겁내거나 두려워 하는 바가 없을 것이며 이승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니, 두 가지 관하는 마음을 익히고 향하여 의지하는 가장 미묘하고 좋은 방편은 여러 지혜의 의지하는 바요 행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다시 위와 같은 신해를 닦아 배우는 자는 사람에 두 종류가 있습니다. 무엇이 두 종류인고 하니 첫째는 날카로운 근기요, 둘째는 둔한 근기입니다. 그 날카로운 근기인 자는 먼저 이미 능히 일체의 바깥 여러 경계는 오직 마음의 지은바로서 허망하고 거짓이며 진실이 아닌 것이어서 꿈과 같고 환과 같은 등의 것인줄로 알아 결정코 의심이 없으며 음개(陰蓋)가 경미하여져서 산란한 마음이 적은 것이니 이런 사람들은 곧 응당 진여실관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 둔한 근기인 자는 먼저 일체의 바깥 여러 경계는 죄다 오직 이는 마음이어서 허망하고 거짓이며 진실이 아닌 것인줄 능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물들거나 집착하는 마음이 두텁고 개장(蓋障)이 자주 일어나서 마음을 조복하기 어려울 것이니 응당 먼저 유심식관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비록 이와 같은 신해를 배운다 하더라도 그러나 선근의 업이 박하고 아직도 진취할 수 없어서 여러 나쁜 번뇌를 점차로 조복할 수 없으면, 그의 마음은 의심하고 겁을 내며 삼악도에 떨어지고 팔난처에 날 것을 두려워 할 것이며, 항상 부처님, 보살등을 만나지 못하고 바른 법을 공양하며 듣고 받을 수 없음을 두려워 할 것이요, 이와 같은 의심과 두려움 및 가지가지 장애가 있는 자는 응당 일체의 시간과 일체의 처소에서 언제나 부지런히 나의 명호를 외우며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한 마음(一心)을 얻으면 선근이 자라나서 그의 뜻이 맹렬하고 민첩하여질 것이며 마땅히 나의 법신과 및 일체 모든 부처님의 법신과 더불어 자기 법신은 체와 성품이 평등하고, 둘이 아니고 차별이 없는 것이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상(常)․락(樂)․아(我)정(淨)의 공덕이 원만한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가히 귀의할 만한 것이라고 관하여야 합니다. 또 다시 관찰하되 자기의 몸과 마음의 형상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이며 허깨비와 같고 변화한 것과 같은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가히 싫증내어 떠나야 할 것입니다. 만일 능히 이와같은 관을 닦아 배울 수 있는 이면 빨리 청정한 믿음의 마음을 얻게 되어 있는바 여러 장애는 점점 덜어지며 줄어질 것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이사람은 이름하기를. 나의 이름을 들어서 배워 익히는 이요, 또한 능히 시방의 모든 부처님 명호를 듣고 배워 익힐 수 있는 이라고 하며, 이름하기를 지극한 마음을 배워 나를 예배하고 공양하는 이요, 또한 능히 지극한 마음을 배워 시방의 모든 부처님 공양을 할 수 있는 이라고 하며, 이름하기를 대승의 깊은 경을 듣고 배우는 이고, 이름하기를 대승의 깊은 경을 지니고 지키며 글로 써서 공양 공경하고 배우는 이라고 하며, 이름하기를 대승의 깊은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움을 배우는 이라하고, 이름하기를 삿된 소견을 멀리 여의고 깊숙하고 바른 이치에서 훼방에 빠지지 않음을 배우는 이라하며, 이름하기를 구경의 심히 깊은 제1의 실다운 이치안에서 신해를 배우는 이라고하고, 이름하기를 능히 모든 죄와 장애를 없앨 수 있는 이라고 하며, 마땅히 한량 없는 공덕무더기를 얻는 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몸을 버리면 마침내 나쁜 길과 8난처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도리어 바른 법을 듣고 익히며 믿어서 닦아 행할 것입니다. 또한 능히 원을 따라 타방의 청정한 부처님 국토에 가서 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다시 만약 사람이 타방에 현재하는 청정한 국토에 나려고하는 자는 응당 그 세계의 부처님 명호를 따라 뜻을 오롯이 하여 외우거나 생각하되 한 마음으로 어지럽지 않아야 하나니 위와 같이 관찰하는 이는 결정코 그 부처님의 청정한 국토에 나게 되고 선근이 증장되어 빨리 불퇴를 얻을 것입니다. 마땅히 아소서. 위와 같이 한 마음으로 생각을 잡아 매어 모든 부처님의 평등한 법신을 생각하면, 일체의 선근 가운데서 그 업은 가장 훌륭한 것이나니, 이른바 부지런히 닦아 익히는 이는 점점 능히 일행삼매에 향하여 갈 것이요, 만약 일행삼매에 도달한 이면 곧 넓고 크며 미묘한 행의 마음을 이룩하여 이름하기를 상사(相似)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다고 할 것이니, 능히 나의 명호를 들어 얻는 까닭이며, 또한 능히 시방의 부처님 명호를 들어 얻는 까닭이며, 능히 지극한 마음으로 나를 예배하고 공양한 때문입니다.

또한 눙히 지극한 마음으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에배하며 공양하고 능히 대승의 깊은 경전을 듣고 얻은 까닭이며, 능히 대승의 깊은 경을 지니고 지키며 글로 써서 공양 공경한 까닭이며, 능히 대승의 깊은 경전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운 까닭이며, 능히 구경의 심히 깊은 제1실의의 안에 있어 두려움을 내지 않고 비방을 멀리 여의고 바른 소견을 얻어 믿고 알 수 있는 까닭이고, 결정코 모든 죄와 장애를 없앤 까닭이며, 한량 없는 공덕의 무더기를 실제로 증득하는 까닭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이르자면 분별 없는 보리의 마음과 고요한 지혜가 나타나서 방편의 일과 가지가지의 서원․수행을 일으켜 내기 때문이나니 능히 나의 명호를 듣는 이는 이르자면 결정코 이익 되는 행을 믿기 때문이며 내지 일체에 능한바의 자는 모두 일승의 인에서 물러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마음이 잡되고 어지럽거나 더러우면 비록 다시 나의 명호를 부른다 하더라도 그러나 들었다고 이름하지 못할 것이요, 능히 결정코 신해를 낼 수 없기 때문에 다만 세간의 선한 과보만 을 얻게 되며 광대하고 깊고 미묘한 이익은 얻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그 마음이 잡되고 어지럽거나 더러우면 그 닦는 바의 일체 선을 따라 모두 깊고 큰 이익은 얻을 수 없습니다.

선남자여 마땅히 아소서. 위와 같이 부지런한 마음에서 무상선을 닦아 배우는 이는 오래지 않아 능히 깊고 큰 이익을 얻어 점차로 부처님이 될 수 있습니다.

깊고 큰 이익이란 이른바 굳건한 믿음의 법 자리에 들어갔다라고 하는 것이니 신인(信忍)을 성취한 때문이며, 굳건한 수행의 자리라고 하니 순인(順忍)을 성취한 때문이고, 바르고 참된 자리(正眞)에 들어갔다라고 하는 것이니 무생인(無生忍)을 성취하는 까닭입니다. 또 신인을 성취함이라 하는 것은 능히 여래의 종자 성품을 짓는 까닭이며, 순인을 성취함이라 하는 것은 능히 여래의 행을 성취함이 여래의 행을 이해하는 까닭이요, 무생인을 성취함이라하는 것은 여래의 업을 얻는 까닭입니다.

점차로 부처님이 됨이란 것은 간략히 말하여 네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 등이 네 가지가 되는가? 첫 째는 신만법(信滿法)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되는 것이니 이른바 종성지(種性地)에 의하여 결정코 모든 법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청정하고 평등하며 바라고 구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이라고 믿는 까닭입니다.

둘 째는 해만법(解滿法)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되는 것이니 이른바 해행지(解行地)에 의하여 깊은 법의 성품을 이해하고 여래의 업은 만들음이 없고 지음이 없는 줄을 알아 생사와 열반에 있어 두 가지의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며, 마음에 두려워하는 바가 없는 까닭입니다.

세 째로 증만법(證滿法)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되는 것이니 이른바 정심지(淨心地)에 의하여 분별이 없는 고요한 법의 지혜와 및 부사의한 자연의 업을 얻어 구하는 생각이 없는 까닭입니다.

네 째로 일체 공덕의 행이 만족하기 때문에 부처님이 되는 것이니 이른바 구경의 보살지에 의하여 능히 일체의 모든 장애와 무명의 꿈을 없애서 다한 까닭입니다.

다음으로 다시 마땅히 아시옵소서. 만약 세간의 유상선(有相禪)을 닦아 배우는 이에게도 세 가지가 있는 줄을 알 것이니, 세 가지란 첫째 방편과 신해하는 힘이 없기 때문에 모든 선삼매(禪三昧)의 공덕을 탐내고 받아 교만을 냄으로써 선에 얽메어서 되돌아가 세간을 구하려는 것이요, 둘 째는 방편과 신해하는 힘이 없기 때문에 선에 의지하여 치우치게 싫어하고 여의려는 행을 일으켜 생사를 두려워하고 겁내어 이승에 되돌아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세 째는 방편과 신해하는 힘이 있는 것이니 이른바 일실경계에 의지하여 사마타.비파사나야의 두 가지 관하는 도를 익히고 가까이 하기 때문에, 능히 일체의 법은 오직 마음의 생각에서 생기며 꿈과 같고 환과 같은 것이라 믿고 이해하여 비록 세간의 모든 선의 공덕을 얻었다하더라도 그러나 굳게 집착하지 아니하며 다시 돌아가 3유의 과보를 구하지 않는 것이요, 또 생사가 곧 열반이라고 믿으며 아는 까닭에 또한 두려워하거나 겁내서 되돌아가 2승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일체 모든 선의 삼매의 법을 닦아 배우는 것에는 마땅히 아소서. 열 가지의 차례로 나아가는 상의 문이 있나니 선정의 업을 구족하고 섭취하여 능히 배우는 자로 하여금 성취하고 상응하여 틀림도 없고 잘못됨도 없도록합니다.

무엇 등이 열이 되는가 하면 첫째는 섭념방편상(攝念方便相 : 생각을 가다듬으로써 방편으로 하는 상)이요, 둘 째는 욕주경계상(欲住境界相 : 경계에 머무르고자 하는 상)이며, 세 째는 초주경계분명요요지출지입상(初住境界分明了了知出知入相 : 처음 경계에 머물러 분명하고 똑똑하게 나아감을 알고 들어옴을 아는 상)이고, 네 째는 선주경계득견고상(善住境界得堅固相 : 경계에 잘 머물러 견고함을 얻는 상)이며, 다섯 째는 소작사유방변용맹전구진기상(所作思惟方便勇猛轉求進起相 : 지은바를 생각하며 방편과 용맹으로 전전히나아가고 일어나는 것을 구하는 상)입니다.

여섯 째는 점득조순칭심희낙제의혹신해자안위상(漸得調順稱心喜樂除疑惑信解自安慰相 :점점 순조로움을 얻어 마음에 맞아 기뻐하고 좋아하며 의심을 없애고 믿으며 이해하여 스스로 편안한 상)이며, 일곱 째는 극획승진의소전자소분상응각지리익상(剋獲勝進意所專者少分相應覺知利益相 :이기고 나아가 이기는 것을 얻어서 뜻을 오롯이 하는 이는 조금 서로 응하여 이익을 깨달아 아는 상)이고, 여덟 째는 전수증명소습견고득승공덕대치성취상(轉修增明所習堅固得勝功德對治成就相 : 전전히 닦고 밝음을 늘려서 익히는 바가 굳건하면 훌륭한 공덕을 얻어 대치하며 성취하는 상)이며, 아홉 째는 수심유소념작외현공업여의상응부착부류상(隨心有所念作外現功業如意相應不錯不謬相 : 마음에 생각하여 지은 바가 있음을 따라 밖으로 공덕을 나타내고 뜻과 같이 서로 응하여 틀리지도 않고 잘못되지도 않는 상이고, 열 째는 야갱리수의전소득이기방변차제성취출입수심초월자재상(若更異修依前所得而起方便次第成就出入隨心超越自在相 : 만일 다시 특이하게 닦아 앞에서 얻은 바에 의하여 방편을 일으키고 차례로 이룩하여 나고 들음에 마음을 따라 초월하여 자재하는 상)입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열가지의 차례로 나아가는 상의 문으로써 선정의 업을 거두어 닦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 견정신보살마하살이 지장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깊은 법을 잘 말씀하셔서 중생으로 하여금 겁내고 약한 것을 여읠 수 있게 하시나이까?」

지장보살마하살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마땅히 아소서. 처음으로 뜻을 발하여 대승을 향하여 구하고 배우려 하였으나 아직 믿는 마음을 얻지 못한 사람은 위 없는 도의 심히 깊은 법에 대하여 기뻐하거나 의심과 겁을 내어야 합니다. 나는 항상 방편으로써 실다운 이치를 잘 말하여 하여금 겁내고 약한 것을 여의게 하여 안위합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나를 부르기를 ‘안위를 잘 설하는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일러 안위라 하겠습니까? 이른바 둔한 근기며 마음이 작은 중생들이 위 없는 도의 가장 수승하고 가장 미묘함을 듣고 뜻에 비록 탐내고 좋아하여 마음을 내어 원하고 향한다 하더라도 다시 생각하기를 ‘위 없는 도를 구하는 이는 반드시 넓고 극진한 공을 쌓고 행하기 어려운 행과 고행을 행하여 자기를 제도하고 남도 제도하며 길고 먼 생사의 가운데서 여러겁 동안 오래도록 부지런하고 고통을 받은 후에야 바야흐로 이에 획득하여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한다면 나는 곧 그를 위하여 진실한 이치를 연설할 것입니다.

이른바 ‘일체의 모든 법은 본래의 성품이 스스로 공하여 필경에 내가 없고, 지음도 없고, 받음도 없으며, 자기도 없고 남도 없으며, 가는 것도 없고 이르는 것도 없으며, 방소도 있지 아니하고, 또한 과거.현재.미래도 없으며, 내지 18공과 생사와 열반, 일체의 여러 법은 일정하고 진실한 모양이 있지 아니하다’고 설명한 것을 가히 얻은 것입니다.
또 다시 위하여 설하나니 ‘체의 여러 법은 허깨비와 같고 변화한 것과 같으며, 물 속의 달과 같고, 거울속의 형상과 같으며, 건달바성과 같고,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으며, 아지랑이와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이슬과 같고, 등불과 같으며, 눈흘림과 같고, 꿈과 같으며, 번갯불과 같고, 구름과 같은 것이나니, 번뇌와 생사의 성품은 심히 미약하여 없애기가 쉬운 것이며 또 번뇌와 생사는 필경에 체가 없고 구하여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본래 태어남이 없으므로 실로 다시 없어짐이 없는 것이요, 스스로의 성품은 적정하여 곧 이것이 열반인 것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한 바 능히 일체의 여러 소견을 깨뜨리고 스스로의 몸과 마음의 집착하는 생각을 덜어지게 하는 까닭으로 겁나고 나역한 것을 여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어떤 중생이 여래의 말씀하신 뜻을 이해할 수 없는 까닭으로 겁을 많이 내는 것입니다. 마땅히 아십시오. 여래의 말씀하신 뜻이란 이른바 여래는 저 일실경계를 보신 까닭으로 구경에는 생노병사와 여러 악한 법을 여의게 되셨고, 저 법신은 항상 청량하고 변하지 않는등의 한량 없는 공덕 무더기를 증득하셨으며 다시 능히 일체중생의 몸가운데 모두가 이와 같은 진실하고 미묘하여 청정한 공덕이 있으나 무명과 어두움과 더러움에 덮여져서 오랜 세월에 항상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한량 없는 여러 가지 고통을 분명하게 보십니다.

여래는 이에 대자비의 뜻을 일으켜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고통을 여의고 한 가지로 법신인 제일의 즐거움을 얻게 하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저 법신은 바로 분별이 없고 생각을 떠난 법입니다. 오직 능히 허망한 알음알이의 생각을 없애고 생각하고 집착함을 일으키지 않아야 이에 응당 얻는 바가 되는 것이어늘, 다만 일체의 중생은 항상 모든 법에 분별하고 집착하기를 즐거이하여 그럼으로써 뒤바뀐 망상(전도망상)으로 인해 생사를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여래께서는 저들로 하여금 분별과 집착의 생각을 여의게 하시려고 하기 때문에 일체 세간의 법은 필경에 바탕(체)이 공하여 있는 바가 없고 내지 일체 출세간의 법도 또한 필경에 바탕이 공하여 있는 바가 없다고 연설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널리 말씀한다면 18불공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일체의 모든 법은 모두 보리의 바탕을 떠나지 않음을 보이시는 것이니, 보리의 바탕이란 있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이 아님도 아니고 없는 것이 아님도 아니며, 있고 없음을 다 갖춘 것도 아니며,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동일한 것이 아님도 아니고 다른 것이 아님도 아니며, 동일하고 다른 것을 다 갖춘 것도 아닌 것이며 내지 필경에는 하나의 모양이라도 가히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지 아니한 것이니 그럼으로써 일체의 모양을 여읜 까닭입니다. 일체의 모양을 여의는 것이란 이른바 언설에 의지하여 취할 수 없는 것이니 보리의 법 안에는 언설을 받는 이가 없고 및 능히 언설할 수 있는 이도 없는 까닭입니다. 또 마음의 생각에 의지하여 알 수 없는 것이니 보리의 법 가운데에는 능히 취할 수 있거나 가히 취할 만한 것이 없으며 자기도 없고 남도 없어서 분별의 모양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분별하는 생각이 있으면 곧 허위가 되며 서로 응하는 것이라 이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등의 말씀은 둔한 근기의 중생은 능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니 이르되 위 없는 도와 여래의 법신은 오직 공의 법으로 한결 같아 필경에는 있는바가 없는 것이므로 그 마음은 겁을 내고 약하며, 얻는 바가 없는 가운에 떨어질 까 두려워하여 혹은 끊어 없어진다는 생각을 내기도 하고 늘어남과 줄어듬의 소견을 짓기도 하며, 전전히 비방을 일으키어 자기를 가벼이 여기고 남도 가벼이 여길 것입니다. 나는 곧 그를 위하여 ‘여래의 법신은 스스로의 성품이 공이 아니요, 진실한 바탕이 있으며, 한량 없는 청정한 공덕의 업을 완전히 갖추어 있는 것이다. 시작도 없는 세상을 쫓은 이래로 자연히 원만하여 닦은 것도 아니고 지은 것이 아니다. 내지 일체중생의 몸 속에도 또한 모두가 완전히 갖추어져서 변하지 않고 다르지 않으며 늘어남도 없고 줄어듬도 없는 것이다’라고 연설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등의 언설은 능히 겁과 약한 것을 없앨 수 있는 것이므로 이것을 이름하여 ‘안위’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다시 어리석은 것에 견고히 집착하는 중생은 이와 같은 등의 연설을 듣고 또한 겁을 내고 약하여 질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여래의 법신은 본래 만족하여 닦지도 않고 짓는 것도 아니라는 상을 취한 연고로 얻는 바 없는 생각을 일으켜 겁을 내고 약해 질것이며 혹은 자연이라고 헤아려 사뙨 뒤바뀐 소견에 떨어질 것이니, 나는 곧 그를 위하여 일체의 선한 법을 수행하여 증장하여 만족하게하여 여래의 색신을 내어 한량 없는 공덕과 청정한 과보를 얻을 것이다라고 연설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등의 말은 지금에 겁내고 약하게 하는 것을 떠나게 할 것이니 이것을 일러 ‘안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바 심히 깊은 이치는 진실과 서로 응하여 모든 허물이 있지 아니하는 것이니 그럼으로써 서로 어긋나는 해설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일러 서로 어긋남을 여의는 상인줄 안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른바 여래의 법신 안에는 비록 다시 언설의 경계가 있지 아니하고 마음의 생각을 떠났으며, 공이 아니고 공 아님도 아니요, 내지 일체의 상이 없고 언설에 의지하여 보일 수 없는 것이나 세간 일반의 진리는 허깨비의 인연에 근거함으로써 거짓 이름으로 법의 속에서 서로 기다리고 서로 대하게 되나니 곧 가히 방편으로서 나타내어 보여 해설하여야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법신의 성품은 실로 분별이 없고 스스로의 형상도 떠났고 남의 형상도 떠났으며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으며 내지 일체의 형상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그 법의 바탕은 필경 공이요, 있는 바가 없어서 마음으로 분별하는 생각을 떠나면 곧 능히 스스로 보거나 스스로 알아서 있다고 하는 하나의 형상도 다 없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공의 이치는 결정코 진실과 서로 응하여 그릇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다시 곧 저 공의 이치 안에는 분별과 망상의 마음을 떠난 까닭으로써 곧 다 필경에는 하나의 형상도 공이라고 할 것도 없으며, 오직 진실만이 있으므로 곧 공이 못되는 것이니 이른바 알음알이를 떠났기 때문에 일체의 거짓 형상은 없으며 필경 언제나 변하지 않고 다르지 아니한 것입니다. 다시 하나의 형상이라도 무너뜨리거나 없애야 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이니 늘거나 줄어짐을 떠난 까닭입니다.

또 저분별 없는 실체는 끝 없는 세상으로 부터 한량없는 공덕과 자연의 업을 갖추어 상응을 성취하여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공이 못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은 이와 같은 실체의 공덕의 무더기가 비록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다만 무명의 눈 흘림에 덮였기 때문에 알거나 보지 못하고 또 공덕의 이익을 얻지 못하므로 없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그것을 말하여 없는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법의 바탕을 알고 보지 못하는 까닭에 모든 공덕의 이익 되는 업은 그 중생이 받아 쓸 수 없는 것이므로 그에게 속한 것이라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두루 일체의 선한 법 닦음을 의지하여 모든 장애를 대치하고 저법신을 본 뒤에야 능히 공덕의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일체의 선한 법을 닦아야 여래의 색신과 지신(智身)을 낸다고 말합니다.

선남자여! 내가 말하는 바 깊고 깊은 이치는 결정코 진실하여 서로 어긋나는 허물을 떠나는 것과 같나니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에 지장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등의 뛰어나고 훌륭한 방편과 깊고 요긴한 법문을 설하실 때에 십만억 중생이 있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어 견신위(堅信位)에 머물렀으며, 디시 9만 8천의 보살이 있어 무생법인을 얻었고, 일체의 대중은 각기 하늘의 묘한 향과 꽃으로써 부처님께 공양하고 및 지장보살마하살께 공양하였다.

그때에 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고하여 말씀하사대

「너희들은 각각 응당 이 법문을 받아지니며 머무는바의 처소를 따라 널리 하여금 유포하여야 하리니 무슨 까닭인가 이와 같은 법문은 심히 만나기 어렵거니와 능히 크게 이익 되기 때문이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저 지장보살마하살의 명호를 듣고 및 그 설하는 바를 믿는자는 마땅히 알라 이사람은 속히 능히 일체있는바 여러 장애의 일을 떠남을 얻고 빨리 위없는 도에 이르게 되리라.」

이에 대중들이 모두가 한가지로 말하기를

「저희들은 마땅히 받아 지니고 세간에 널리 퍼뜨려 하여금 감히 잊지 않게 하겠나이다.」

그 때 견정신보살마하살께서 부처님께 고하여 말씀하사대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말씀하신바는 육근취 수다라 가운데 이름을 무슨 법문이라 하옵나이까? 이 법이야 말로 진실로 요긴하옵나니 저는 마땅히 받아 지녀서 오는 세상으로 하여금 널리 모두 다 듣게 하겠나이다.」

부처님께서 견정신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사대

「이 법문의 이름은 《점찰선악업보(占察善惡業報-선악의 업보를 점치어 살피는 것)》이며, 또한 《소제재장증장정신(掃除諸障增長淨信-여러 장애를 쓸어 없애고 바른 믿음을 증장시키는 것)》이며, 《개시구향대승자진취방편출심심구경실의(開示求向大乘者進趣方便出甚深究竟實義-대승을 구하여 향하는 자에게 방편을 열어 보이어 깊고 깊은 구경의 실다운 이치를 열어보이는 것)》이며, 또한 《선악위설영리겁약속입견신결정법문(善惡慰說令離怯弱速入堅信決定法門-선과 악의 위로를 말하여 하여금 겁내고 약한 것을 여의고 속히 믿음을 견고히하여 결정의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와 같은 이름의 뜻에 의지하여 너희들은 마땅히 받아지닐지니라.」

부처님께서 이 법문의 이름을 말씀하여 마치시니 회중의 일체의 대중들은 모두다 기뻐하여 믿어 받고 받들어 행하였다.

占察善惡業報經卷下(점찰선악업보경권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