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이트를 접하면서 많은 공부를 하고 있는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양한 차원의 관점과 생각들을 보면서 ..아하 각도만 달리보면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는 것은 의식의 지평을 많이 널펴 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대부분의 영적 수행자들이 "우주적인 진리.진실에 눈을 띄여가고 있구나" 참
복 받은 시대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안의 의문과 궁금증을 많이 해갈시켜주는
빛의 지구는 많은 이들에게 앞으로도 좋은 길라잡이가 되어가겠구나.. 하는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한가지 속시원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초월(완전해탈)과 상승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른 것은 잘 모르기때문에 .. 기독교와 불교를 예로 든다면
인격적으로 표현하였지만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란 표현은 이 우주의 "신성한 섭리. 원리"를
말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의 몸으로 육화하거나 화신하여 몇십년을 살다간 형상이
아닌.. 모든 우주만물에 스며들어 있으며 우주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체계적인 시스템하에
운행하는 섭리.. 바로 이것이 "우주심"이며 "도" "하느님" "부처님"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이"
에 해당하는 "진공묘유"라 생각합니다..
금강경에서 여래가 말씀하시길.. 형상을 보고 여래가 오고 간다고 하면 그 사람은 잘못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니라..
일체 현상계의 모든 것을 꿈으로.. 파도치는 바다의 물거품으로 보라고 말씀하신 걸로
기억나군요.. 우리가  현재 이순간의 현상계라는 무대위의 상황이나 대상에
수많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하더라도 그것에 집착하거나 애착할 필요는 없는것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과거에 매여있다면 그 사람은 현재 이순간에 백프로 살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현상계에 무대가 단지 영혼의 성장과 완성을 위해 주어진 게임무대라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망각한 순간 사람들은 내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외부대상에 끌려다니고 집착하고 소유하는 삶의 자승자박에 묶여 고통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면 그런 삶에서 많이 벗어날 걸로 생각합니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평소에 고민해왔던 초월(완전해탈)과 상승에 대해 청화스님의
좋은 글이 있어 관심있는? 분들에게 길라잡이가 될거라 생각하여 글을 올리게 됬습니다.
많은 수행자들이 "상승"보단 초월에 더 관심이 많은 걸로 생각합니다..저 역시도 그렇고여
앞으로 지구가 5차원으로 변형된다면.. "차원상승"한다면.. 이 시대의 많은 지구인들이
보다 많이 행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보디사트바"적인 자세이겠죠..아울러 자신의
진정한 대각(초월-대자유)을 위해 수행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저역시 모든 종교나 관념..틀.. 지구적인 가치하나만을 믿으라고 주장하는 닫힌 마인드는
버린지 오랩니다.. 열린마음으로 "해탈"이란 주제하에 시작되는 청화스님의 글을 읽으시면
많은 것이 와 닿을것입니다...이 글을 읽고 스스로 많은 의문을 해결하였기에 ..여러분께
도움이 되었으면 하여 글을 올립니다..  다소 내용이 짧지 않아서 줄일까 하였으나
철저하게  원문 그대로 다 보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여 그대로 옮깁니다..
어떤 분에겐 "하나의 관점"이 될 수 있고 .. 어떤 이에게 "천국"이나 "천상"이냐 "지옥"이냐
"저승"이냐 처럼 개념에 얽매이지 않고 두루 통용되는 내적인 해갈을 시원하게 해줄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 원하는 만큼 얻어가시길 바랍니다.
# 주의: 부처님이란 인격적인 표현은 .. 하느님으로 통용될수 있고 .. 신성한 우주의 섭리
.. 근원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천상세계위치나 명칭은 상징적으로 보시면 되고
   업장이란 개념은 까르마로 대체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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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삼 계 해 탈 (三 界 解 脫)


1) 삼계(三界)의 초월(超越)



부처님께서 아난존자를 데리고 길을 가셨습니다. 그때 어느 고총(古塚)앞을

지나시다 고총을 향해서 합장배례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난(阿難)존자가,

_"세존이시여! 그것은 무주고혼(無主孤魂)의 고총이온데 어째서 절을 하십니까"_

이렇게 부처님께 여쭈니 부처님 말씀이,

_"과거 숙세(宿世)의 어느 생(生)엔가 몇 백세 전에 내 부모님의 무덤 이니라"

_하셨단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무슨 사람 뼈가 있고 어떠한 묘(墓)가 있으면,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비록

금생(今生)에 또는, 전생(前生)에 또는, 바로 그 전생에 자기 부모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 몇 생 전, 몇 백 생 전에는 우리 부모 또는, 형제간 관계의 무덤이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경(佛經)에 보면, 우리가 과거 숙세의 누겁(累劫) 동안에 오랜 동안 살아오면서

우리가 죽고 살고 한 뼈를 모으면, 가장 높고 방대한 산인 수미산(須彌山)보다도

뼈무더기가 더 많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같이, 우리는 무수(無數)한 동안 죽고 살고 생사(生死)를 거듭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한 생사를 거듭한 곳이 어느 곳인가 하면, 바로 삼계(三界)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역시 삼계내에서 살고 있고 또, 과거 무수생(無數生)동안 삼계를

지내왔고, 미래의 무수생 동안 또 삼계내에서 헤매야 하는 것 입니다.

경(經)에 보면 '삼계여객사(三界如客舍)하니 일심시본거(一心是本據)라' 삼계는

마치 객사(客舍)와 같은 것, 여관집이나 같으니, 이 한 마음 이것이 본 고향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하나의 객사에 불과 합니다. 잠시간 왔다 가는

곳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것을 우리가 짚기 위해서 지금 삼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더러, 사람들은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이다" "불교는 인본주의(人本主義)니까

사람이 제일 높다" 이렇게 말씀합니다마는 실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 사람은

삼계라 하는, 죽었다 살았다 윤회하는 가운데, 저 밑 아래에 존재합니다. 삼계에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가 있는데 우리는 삼계 가운데서 제일 밑인

욕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삼계를 넘어서 성불(成佛)로 가려면은 아득한 길입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자기 위치를 확실히 알지 못하면, 자기 위치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 무색계 │무소유처(無所有處)

│(無色界) │식무변처(識無邊處)

│ └공무변처(空無邊處)



│ ┌대자재천(大自在天)

│ ┌ 정거천 │색구경천(色究竟天)

│ │(淨居天)│선견천(善見天)

│ │ 정범지 │선현천(善現天)

│ │(淨梵地)│무열천(無熱天)

│ │ └무번천(無煩天)

│ │ ┌광과천(廣果天)

│ │ 사선천 │복생천(福生天)

삼계 ├ 색 계 │(四禪天)└무운천(無雲天)

(三界)│(色 界)│ ┌변정천(遍淨天)

│ │ 삼선천 │무량정천(無量淨天)

│ │(三禪天)└소정천(少淨天)

│ │ ┌광음천(光音天)

│ │ 이선천 │무량광천(無量光天)

│ │(二禪天)└소광천(少光天)

│ │ ┌대범천(大梵天)

│ └ 초선천 │범보천(梵輔天)

│ (初禪天)└범중천(梵衆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 ┌ 공거천 │화락천(化樂天)

│ │(空居天)└도솔천(兜率天)

│ 욕 계 │ ┌수야마천(須夜摩天)

└(欲 界)│지거천 │도리천(도利天) ┌북다문천(北多聞天)

└(地居天)│ │서광목천(西廣目天)

└사대왕천(四大王天)│남증장천(南增長天)

└동지국천(東持國天)

'나'란 지금 대체로 어떤 곳에 있는 것인가? 나의 업장은 어떠한 것이 무거운

것인가? 우리는 지금 아무리 큰소리 친다 해도 역시 욕계 가운데서 식욕(食慾),

또는 잠욕(睡眠慾), 성욕(性慾), 기타 그런 욕심으로 우리는 칭칭 감겨있는

것입니다.

욕계도 또한 지거천(地居天), 공거천(空居天)이 있습니다.

조금 번쇄(煩쇄)합니다마는, 우리가 사는 곳이니까, 우리가 필경 거쳐야 할 그런

처소(處所)니까 알아두고서 그때그때 짐작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지거천(地居天)이란, 우선 땅 기운을, 불교말로 하면 지진(地塵)을 미처 못 떠난

곳입니다. 가사, 하나의 별이라 하더라도 토성(土星)이나 북두칠성(北斗七星), 그런

별들은 우리 지구와 마찬가지로 땅 기운을 미처 못 떠난 곳입니다.

그리고 공거천(空居天)이란, 땅 기운을 떠난 보다 더 순수한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같은 별도 수성(水星)이나 금성(金星)이나 그런 별이 되겠지요.

아무튼, 이런 너무 복잡한 문제는 더 이상은 말씀을 않기로하고, 이러한 지거천

가운데서 즉, 땅 기운을 미처 못 떠난 하늘 가운데에, 또 사왕천(四王天)이나,

도리천(도利天), 또는 수야마천(須夜摩天)의 하늘이 있습니다.

또 이러한 사왕천 가운데 저 밑에 가서 네 군데 처소가 있는데,

동지국천(東持國天), 남증장천(南增長天), 서광목천(西廣目天),

북다문천(北多聞天)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남증장천 밑에 가서

남섬부주(南贍浮州)라, 여기에 우리 인간이 있습니다. 가장 밑인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가운데서 너무나 잘난 척해서는 아만심(我慢心)이 되겠지요. 우리는

그런 가운데에 겨우 남증장천 밑에 가서 우리 인간이 지금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어머님께서, 부처님 어머니이니까 역시 업장(業障)도 가벼웠겠지마는, 또

내나야 부처님 덕으로 해서 겨우 도리천(도利天)에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때는 도리천에서 천녀(天女)를 데리고 내려와서

부처님의열반을 슬퍼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처님께서는 부모도 모르고 세속적인 것을 다 무시했다고 말을

합니다만, 부처님은 굉장히 효성(孝誠)을 하셨습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부처님께서 몸소 자기 동생들을 거느리고 아버지의 관을 앞에서 들고 운반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어머니께서 미처 업장이 무거우니까 어머니의 업장을

녹이기 위해서 도리천에 올라 가셔서 삼개월 동안 천중(天衆)인 하늘 사람들을

교화하면서 어머니를 위해서 설법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에 어머니께서 천녀들을 거느리고 오시니까

관에 누워계신 부처님께서 벌떡 일어나셨던 것입니다. 삼계대도사(三界大導師)이신

부처님께서 어미님이 오시니까 관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맞이했던 것입니다. 역시

모자(母子)의 정은 지극한지라 어머니께서 슬픔을 금할 수 없어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고 계시니까 부처님께서 "어머님이시여, 한번 남이 있는 것은 반드시 다시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무상(無常)을 생각하시고 슬픔을 거두세요."

이렇게 위로하니까, 어머니께서는 그때서야 비로소 눈물을 거두시고 방긋이 미소를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어머니를 제도하셨습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효성이 극진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가(佛家)에서는 자식도 무시하고 부모도 무시하고 가정도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효성도 하고 또는 자식을 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그런 욕심도, 내나 욕심의 뭉치가 이런 욕계 아닙니까마는,

이렇게 올라갈수록 차근차근 줄어갑니다. 물욕(物慾)이나 남녀 이성간 욕심이나

차근차근 줄어갑니다. 그래서 색계(色界)에 올라 가려면, 욕심이 끊어져 버려야

색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욕심이 안끊어지면 색계에는 못

올라갑니다.

그리고, 욕계내에서는 중생같은 이런 몸은 못 벗어납니다. 조금 더 무겁고 가볍고,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이런 몸뚱이는 못 벗어납니다.

색계(色界)에 올라가서야 비로소 이런 몸뚱이를 벗어나 광명(光明)으로 몸을

삼습니다. 색계에 올라가면 그때는 광명이 몸이 됩니다. 말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더라도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마음이 통해서 서로 말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색계(無色界)에 올라가면 몸은 전혀없이 다만 마음만 존재합니다. 마음만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선정(禪定)의 깊이와 낮음 따라서 이와 같이, 높고 낮은 천상(天上)의 구분이 약간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사는 천지, 지구나 천체는, 나중에 천지우주가 무너지는 괴겁(壞劫) 때가

오면 욕계는 다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욕계는 무너지고 다만 광명으로 된 색계,

무색계만 남으나, 색계도 역시 초선천, 2선천, 3선천, 이런 것은 어느 정도다

침륜(沈倫)되고 다만, 사선천(四禪天) 이상만 영원히 존재합니다. 우주가 텅 비어서

공겁(空劫)이 된다 하더라도 4선천 이상은 그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있다가, 나중에 공겁이 지나가서 다시 우주가 구성될 때에는 천상에서

내려와서 이것 되고 저것 되고 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문에는 그런 것이 다

세밀히 나와 있습니다.

태초에 인간이 이런 하늘 가운데 광음천(光音天)에서 지구(地球)로 맨 처음에 올

때는 그냥 비행자재(飛行自在)라, 몸이 광명의 몸이니까 마음대로 비행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지구에 내려와서 지구의 거치러운 것을 맛봄에 따라서 그것에 걸려서

차근차근 몸이 더러워지고 무거워지니까 다시 하늘에 올라갈 수가 없어서 울고불고

하지만 그때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과정들이 부처님 경전에는

소상(昭詳)히 말씀되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남섬부주(南贍浮州)라 하는 데에 업장(業障) 많은 중생이

되어있는 관계상, 우리가 안다는 것은 남섬부주의 업장을 둘러 쓴 것 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가사, 우리가 업장이 좀 가벼워서,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색계에 태어났다고

하면은, 그때는 천지우주를 훤히 다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는

천안통(天眼通)을 하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보다 더 닦아서 무색계의 공무변처(空無邊處)에 태어났다고 하면, 그때는

천지우주를 모두가 다 텅 비게 보는 것입니다. 천지우주를 다 공(空)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더 올라가서, 우리가 더 닦아서 다행히 식무변처(識無邊處)에 있다고 하면,

천지우주를 전부 다 식(識)의, 마음의 존재로만 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보는 견해는 그때그때 우리가 어느만치나 가서 있는가,

어느만치 올라가 있는가에 따라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데서, 우리는

자기가 아는 것, 우리 인간이 아는 것에 대해서, '이것이 허망(虛妄)하다' '이것이

망령 된다' 하고 느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삼계에 있는 '나' 다 하는 것은 망아(妄我), 망령된 나에

불과합니다. 참다운, 진짜 '참 자성(自性)' '부처의 나' 가 못 되는 것입니다.

삼계를 초월(超越)한 뒤에 참다운 실상(實相)을 증명(證明) 해야만이 '참다운 나'

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모든 것을 바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까 제가 허두(虛頭)에 말씀마따나, 삼계여객사(三界如客舍)라, 비록

높고 낮은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삼계, 이것은 결국은 객사와 마찬가지고 다만,

자성(自性), 불심(佛心), 그것만이 시본거(是本據)라, 영원히 변치않는 자기의

집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삼계를 비약적으로 초월해서 본집인 부처한테 가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삼계를 초월하는 가장 지름길이 참선(參禪)

아닙니까.

여기에 따르는 여러 가지 복잡한 설명이 많이 있습니다만, 전문적인 시간이

아니니까 여기서는 그냥 넘어가기로 하고, 공부하는 분들은 나중에 더 세밀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2) 구해탈 (俱解脫) : 혜해탈(慧解脫)과 정해탈(定解脫)




우리 공부가 이제 시작하자마자 그냥 공부가 탁 틔어서 삼계(三界)를 마구

뛰어넘으면 좋겠습니다마는 실은, 그렇게 쉽게는 안됩니다. 업장(業障), 이것이

굉장히 끈기가 있어놔서 잘 안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보면 짐작이 안

됩니까, 이것저것 다 뿌리치고 우리같이 스님네가 되어도 역시 망상(妄想)은 자꾸만

일어납니다. 하물며 일상생활에 계시는 분들은 망상을 떼기가 참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성불까지 가는 길목을 잘 모르면은 그때는 헤맵니다. 가사,

안성에서 서울 가는데 서울도 미처 못가서, 잘 못 알아 가지고 서울이라 하면

그때는 큰 탈입니다.

근래에는 그런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불(成佛)의 지위,

견성오도(見性悟道)의 지위도 미처 못 가 놓고서 그냥 길목을 잘못 알기 때문에

'내가 지금 견성했다, 내가 도인이 되었다' 고 함부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도 허물을 범하는 것이고 또 많은 중생을 사기(詐欺)하는 것입니다.

불경(佛經)을 보면, 사기 가운데서 가장 큰 사기가 무엇인고하면, 진리의

사기입니다. 진리의 사기가 제일 무서운 사기입니다. 만일, 우리 출가한 스님네가

미처 도(道)를 모르면서 알았다고 하면 그 죄가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그때는

승복(僧服)을 빼앗기고 쫓겨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세(近世)에는 그런 예가

허다히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것은 우리 범부가 성불까지 가는

길목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길목을 몰라가지고 헤맨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현대와 같이

참다운 도인들이 없는, 없다고 하면 어폐(語弊)입니다만, 참다운 도인이 있을까

말까 하는 그런 희소(稀少)한 때에 있어서는 길목을 잘 몰라서 헤매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 경전 따라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_구 해 탈 (俱 解 脫)_


1. 혜해탈(慧解脫)…일체법(一切法)이 본래청정(本來淸淨)하고 평등

일미(平等一味)하여 일체공덕(一切功德)을 구족(具足)함을 신해(信解)함.

2. 정해탈(定解脫)…선정해탈(禪定解脫)





해탈(解脫)이라, 우리 목적은 해탈인데, 해탈 가운데는 혜해탈(慧解脫) 또는

정해탈(定解脫)이 있습니다.

혜해탈은 그냥 이치(理致)로만, 비록 자기가 체험(體驗)은 미처 못했지만 이치로는

'본래 부처다' '본래 부처니까 일체 번뇌가 없고 일체 모든 공덕을 갖추고 있다' 고

믿고 아는 것입니다.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안 나오셨으면 우리가 모르겠습니다마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뒤의 무수한 도인들 덕택으로 해서, 내가 지금 체험해서 부처는 못

되어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에 의지하면, '본래 부처다' '본래 부처니까

나한테는 일체 공덕이 다 갖추어 있다' '석가모니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니다'

또는 '천지우주는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다' 이와 같이 딱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혜해탈입니다.

혜해탈(慧解脫)도 역시 의심쩍은 사람들, 의심이 많은 사람들, 업장이 무거운

사람들은 좀체로 납득이 안 갑니다. 그러나, 업장이 가벼운 사람들은 다시 말하면,

마음이 불성(佛性)과 거리가 별로 안 먼 사람들은 척 느끼는 것입니다.

평생에 불경(佛經)만 보고 강사(講師)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업장이 무거운 분들은

혜해탈을 잘 못 합니다. 그러니까 불경해석을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선도

하고 염불도 많이 하신 분들은 별로 학문을 많이 안 배웠다 하더라도 그냥 척

들으면 '아 그렇구나' 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지금 부처는 못되었다 하더라도, 부처님 말씀을 거짓말이 아니고 또,

도인들 말씀은 부처님 말씀을 다 증명한 말씀인지라, 거기에 의지하면 본래 부처다'

'본래 부처니까 비록 내가 지금 범부라 하더라도 나한테는 일체 공덕이 다 갖추어

있다' 이렇게 딱 믿고, '천지우주는 부처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 가지도 버릴

것이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쁜 사람이나 부정적인 사태(事態)를 보면 '저것은 못쓴다'하고 그것을

제거(除去)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바로 보면은 천지우주는 가사, 개미  한

마리만 없어도 그때는 부처가 못되는 것입니다. 징그러운 독사 한 마리만 없어도

그때는 부처가 못되는 것입니다. 징그러운 독사 한 마리만 없어도 그때는 부처가

못되는 것입니다. 어느 한 가지도, 모두가 다 부처 밖에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다만 어두워서 자꾸만 구분을 세우는 것입니다.

죄(罪)는 무엇인가?

천지가 오직 하나의 부처뿐인 것인데 둘로 보고 셋으로 보는 그것이 죄입니다.

그것이 죄의 근원(根源)입니다.

우리는 일승적(一乘的)으로, 대승적(大乘的)으로 문제를 판단해야 합니다. 방금

말씀마따나, 바로 보면 천지우주는 하나의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부처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이 바로 못 보니까 둘로 셋으로 구분하고, 이원적(二元的),

삼원적(三元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것을 최파(催破)하고서 '오직 천지우주는 하나의 부처뿐이구나' '내

자성(自性)은 부처구나' '내 자성 가운데는 일체 공덕이 다 갖추어 있구나' 이렇게

딱 믿으면 그것이 혜해탈(慧解脫)입니다.

공부를 이렇게 하고 들어가야 공부가 빠릅니다. 그래야 참선(參禪)입니다. 우리가

주문을 하든 하느님을 부르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 부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 자세가 혜해탈(慧解脫)이 되면 그때는 참선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슬람교인이 되어서 알라신을 부를망정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 마음자세가 '내 마음 본바탕이 절대적인 부처고, 천지 우주가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딱 믿으면 그것이 벌써 참선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화두(話頭) 아니면 참선이 아니다 또는 묵조(默照) 아니면

참선 아니다' 고 하는 것은 너무나 협소(狹小)한 마음인 것입니다.

오직 문제는 마음자세가, 마음이 불심(佛心)을 안 떠나면 그때는 참선인 것입니다.

'나무묘우호우렌게교'를 부르건 무엇을 부르건 그때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먼저 혜해탈이 딱 된 뒤에는, 비록 내가 본래 부처라 하더라도

당하(當下) 부처가 아직은 못된 것이니까, 정작 부처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서 우리 업장의 종자(種子)를 녹여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잠재의식에는 과거 무수생(無數生)부터 지어내려온 업장이 누덕누덕 끼어 있습니다.

그것을 녹여야 정작, 정말로 부처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마냥 신통(神通)을 합니까, 무엇을 합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본래 부처인 줄을 느끼기만 하였지, 아직은 업장을 녹여서 정작

참다운 부처가 못되었으니까 우리는 아무런 재주도 못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동안 공부해서,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해가지고서, 업장이 녹아지면

그때는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해서 석가모니와 같이 기기묘묘(奇奇妙妙)한 여러

가지 공덕(功德)을 다 부리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참선과 염불로서 정작 우리의 업장을 녹여서 참다운 부처가 되는 것,

그것이 정해탈(定解脫)입니다.

따라서, 도인(道人)이라면 혜해탈(慧解脫)과 정해탈(定解脫)을 겸해야 참다운

도인인 셈이지요.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해탈의 과정 입니다.



3) 해탈(解脫)의 과정(過程)




一. 사가행(四加行) : 사선근(四善根)


1. 난법(煖法)…명득정(明得定)…전자(電子)

2. 정법(頂法)…명증정(明增定)…양핵(陽核)

3. 인법(忍法)…인순정(印順定)…양핵(陽核)

4. 세제일법(世第一法)…무간정(無間定)…원자핵(原子核)의 본질(本質) _


二. 사선정(四禪定) : 사선천(四禪天)


1. 초선정(初禪定)…희락지(喜樂地): 리생희락지(離生喜樂地)

2. 이선정(二禪定)…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

3. 삼선정(三禪定)…리희묘락지(離喜妙樂地)

4. 사선정(四禪定)…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


三. 멸진정(滅盡定)…일체번뇌습기(一切煩惱習氣)를 멸진(滅盡) 하는 삼매(三昧)

※ 사선정(四禪定)은 정도(正道)와 외도(外道)가 공수(共修)하나,

멸진정(滅盡定)은 정도(正道): 성도(聖道)에 한(限)함._






그 해탈 과정의 처음이 사가행(四加行) 또는 사선근(四善根)이라 합니다.

물론, 이러한데 있어서 그냥 비약적(飛躍的)으로 한 걸음 두걸음 안밟고서 마구

올라가는 분도 있고,(그 분은 업장도 가볍고, 영리하고 총명하겠지요) 또는 점차로,

단계적(段階的)으로 밟아가는 분도 있고, 또는 전(前)의 단계를 무시하고서

뜀뛰기로 마구 뛰어가는 분도 있고, 그와 같이 구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뭐라해도 말세(末世)에 와 있습니다. 말세라는 것은

오탁악세(五濁惡世)라는 말입니다. 여러 가지 혼탁(混濁)으로 굉장히 오염(汚染)된

현세(現世)에 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냥 비약적으로 성불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역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불로 올라가는데 있어서 맨 시초의 올라가는 단계가 사가행(四加行), 다른

말로는 사선근(四善根)으로 착한 뿌리를 많이 심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지 못하면 참선할 때에 가사, 혼자 토굴에서 백일 동안이나

얼마동안이나 하는 경우에, 어떤 경계(境界)가 나오면 그냥 헤매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파뜩 마음만 개운하면 '다 되었구나' 하고 아만심(我慢心)을 내어서

함부로 그냥 도인으로 행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써서 공부하다 보면 그냥 맑아와서 마음도 개운하고 몸도 가볍게 됩니다.

등골도 시원하고 눈도 시원하고 그리고, 오래 앉아도 별로 피로도 못 느끼고서 잘

나갈 때에, 불교말로 성성적적(惺惺寂寂)할 때에, 혼침(昏沈)도 안 오고 어떠한

분별망상(分別妄想)도 줄어지고 말입니다. 분별망상이나 혼침은 다 개운하지

않으니까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운하고, 쾌적(快適)하고, 상쾌할 때는 그게

줄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찌뿌드드하고 그야말로 빡빡할 때는 자꾸만 망상이 나오고 혼침이

꾸벅꾸벅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떨어지고서, 물론 다는 안

떨어졌다하더라도, 우선 개운해 가지고서 마치 자기 몸이 전류에 감전(感電)된

기분으로 짜르르해올 때가 있습니다. 눈도 깜박거려지고 말 입니다. 이런 때가,

이런 것이 맨 처음 난법(煖法)입니다.

난법이란 그런 법상(法相)만 나와도 그때는 별로 피로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염불을 하든 화두를 들든간에 애쓰고서 하다 보면 문득 이런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이것이 명득정(明得定)이라, 마음지평이

열려서 훤하니 마음이 툭 트인다고 해서, 이것이 밝음을 얻은 참선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은 지금 물리학적인 술어로 배대(配對)를 한다면 전자(電子) 정도로나

맑아있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물질에 딱 얽매인 것인데 공부를 하다보면

우리 마음은 이와 같이 훤히 맑아오고 우리 몸을 구성한, 구성요소인 물질 역시

전자 정도로나 정화되어 온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더 공부를 하다보면 정법(頂法)이라, 우리 마음의 욕심이 줄어져서

욕계정천(欲界頂天) 즉, 욕계를 거의 벗어날 단계에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명증정(明增定)이라, 시원하고 밝은 마음이 더 증가되어 옵니다.

물리적인 말로 하면 양핵(陽核)이라 즉, 양자나 그런 정도로 우리가 정화되어

온다는 말입니다. 이런것은 우리가 공부할 때에 알아두면 헤매지 않고 혼동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 다음은 인법(忍法)이라, 이런 때는 심월(心月)이라, 우리 앞에 마음 달이

부옇게 비쳐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부할 때에 나오는 것은 허상(虛像)과 법상(法相)이 있습니다. 괜히 헛된

망상이 나올 때가 있는 것이지마는, 법상은 허망한 것이 아닙니다. 법상(法相)은

몸도 마음도 시원스런 때에 나오는 심월(心月) 곧, 마음 달같은 것입니다. 법상이

한번 나오면 그때는 공부에 후퇴가 전혀 없지는 않지마는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환희심과 행복감이 자기 마음에 충만해오는 것입니다. 몸도 개운하니

시원하고 웬만한 병은 다 물러나고, 말입니다.

원래, 병이란 것은 우리 마음이 정화가 안 되어서 피가 맑지 않으니까 생기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지라 피가 맑아지고 마음이 정화되면 따라서, 병도

물러가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은 절대로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그 다음은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 이것은 욕계에서는 가장 제일인법이라는

말입니다. 비록 아직 도인은 미처 못되엇다 하더라도 세간에서는 제일 수승(殊勝)한

자리에 올라갔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하면 무간정(無間定)이라 합니다.

우리 공부하는 분들은 비록 도통(道通)은 미처 못해서 무간정까지는 못갈 망정

그래도 사람 몸으로 태어났으니까 꼭가야 하는 것입니다.

무간정(無間定)이란, 우리 마음이 딱 모아져서 잡념이 사이에 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무간정 밑의 단계에서는 조금 시원스럽기도 하고 기분은 좋으나,

그때그때 잡념 때문에 방해를 받지만, 무간정은 마음이 일심(一心)으로 딱

모아지니까 잡념이 사이에 낄 틈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 마음 참, 기묘한 것입니다. 닦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고 못 닦으면 결국은

밑에 가서 별 몸을 다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길목이 다 있는 것이니까

우리는 부처님 법을 만났을 적에 길목 따라서 행하지 않으면 사람된 본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한사코 참선, 염불로 해서 명득정(明得定)이라, 밝음을 통해서 훤히

트이는 그 정도 또는, 명증정(明增定)이라, 밝음이 더 증가 되어서 천지우주 광명이

나한테 비추어 오는 그런 기분으로 있는 상괘한때, 조금 더 올라가

인순정(印順定)이라, 마음에서 달이 비추는 그런때, 더 올라가서 일체 잡념은

사이에 안 끼고서 오직 청정한 생각만 이어가는 무간정(無間定)으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이런 때의 행복이란 무엇에도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물리학적인 술어로 말하면 원자핵(原子核)의 본질(本質)이라 곧,

물질의 가장 근원(根源)이 되는 셈입니다.

이렇게 해가지고서, 마음이 열려서 심월(心月)이, 부옇게 보인 마음 달이 훤히

트인 금색광명의 해로 변화하는 단계가 초선천(初禪天)입니다.

이렇게 되면 범부성(凡夫性)은 차근차근 초월(超越)해 가는 셈이지요. 아까

말씀드린대로, 색계(色界)에 태어나는 셈입니다. 몸은 비록 사람 몸일망정 자기

마음은 벌써 하늘에 있는 천상인간 곧, 색계에 태어난 셈 입니다.

이때는 희락지(喜樂地) 곧, 리생희락지(離生喜樂地)라, 욕계의 더러운 생을 떠나서

참다운 기쁨과 안락을 맛본다는 경계입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재미나 그런 욕계 행복은 너무나 찰나 무상(無常)한 것이고,

참다운 행복은 욕계의 오욕락(五欲樂)을 떠나서 영원적인 희락(喜樂)을 맛볼 때가

참다운 행복인 것입니다.

마하가섭(摩訶迦葉 Mahakasyapa)은 두타제일(頭陀第一)이고, 부처님의제일가는

제자 아닙니까, 이 분은 굉장히 근엄한 분으로 평생 동안에 잘 웃지도 않는 분인데,

이런 분도 역시 희락지가 나올 때 그냥, 너울너울 춤을 추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기쁨이 얼마나한가를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이런 데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우리 행복은 더 증장됩니다. 어찌 그런고

하면은, 원래 불성, 자성은 행복의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부처라는 것은 행복과 지혜와 모든 공덕을 다 갖춘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

경지에 접근될수록 우리 행복은 더욱 더 증가되어 온다는 말입니다.

리생희락지(離生喜樂地)라, 욕계의 생을 떠나서 그야말로 희락을 맛본다는

경계인데, 그 기쁨이나 즐거움이 더하기도 하고 덜하기도 하는 것 입니다.

따라서, 그 다음은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라, 선정으로서 잠잠한 행복이 온다는

말입니다. 그때는 기쁨이 정착(定着)되어서 후퇴없는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선천(二禪天)입니다.

그 다음, 삼선천(三禪天)이란 리희묘락지(離喜妙樂地)라, 우리 마음의 거치러운

기쁨을 떠나서, 묘락(妙樂) 곧, 신묘한 안락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사선정(四禪定)인 사선천(四禪天)은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라, 기쁘고

무엇이고 다 떠납니다. 기쁨도 역시 한가지 번뇌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비록 우리

중생경계(衆生境界)에 비해서는 좋다 하더라도 역시 기쁨이나 그런 것은

상(相)이니까 하나의 번뇌입니다. 따라서, 이때는 벌써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라,

생각을 다 떠나서 오직 청정한 자리에만 머문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이제, 선정(禪定)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셈입니다. 여기까지

올라오면 그때는 신통(神通)을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래에 신통하는 분들이 안 나오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 여기까지 공부가

미처 미달해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역시 오랫동안 염불삼매(念佛三昧)나,

또는 화두삼매(話頭三昧)의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여기까지 올라왔다 하더라도, 선정에는 비록 높은 지위에 올라왔지만

아직은 당하(當下) 도인은 못됩니다. 어찌 못되는고 하면, 여기까지 올라와서

선정은 깊다 하더라도 나라는 아상(我相) 뿌리를 미처 뽑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제아무리 공부가 되고, 학식이 많고, 또는 참선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나라는

아상(我相)을 미처 못 뽑으면 도인은 못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은 아상의 뿌리를 뽑는 멸진정(滅盡定)이라, 우리 번뇌의 종자를

마저 다 뽑아버린다는 말입니다. 일체 번뇌 습기(習氣)를 다 멸진(滅盡)한 삼매라는

말입니다. 멸진정에서 '나' 라 하는 아의 뿌리, 범부의 뿌리를 뽑아야 비로소

성자(聖者)입니다.

여기에서, 앞에 있는 사선정(四禪定)은 정도(正道)와 외도(外道)가 같이

닦는(共修) 것이나 멸진정(滅盡定)은 오직 정도(正道), 성자(聖者)에 만 한(限)

합니다.

근기(根機)가 수승하고 전생에 여러 가지로 선근(善根)이 아주 많은 분들은 그냥,

범부에서 막 뛰어넘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보통은 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상생활로 가정에 계시는 분들은 이렇게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만,

이러한 사선정(四禪定)은 미처 어렵다 하더라도 사가행(四加行)의

무간정(無間定)까지는 꼭 올라오셔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욕계(欲界)를 조금 넘어설까 말까 하는데에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인생에 태어난 보람이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밤으로 해서 이번에 용맹정진 법문은 마무리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조금

지리하지만 더 말씀을 하겠습니다.


4) 열 반 진 색 (涅 槃 眞 色)




1. 열반(涅槃)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생(生), 주(住),

괴(壞), 남(男), 여(女)의 십상(十相)이 무(無)함.

2. 색시무상(色是無常)이나, 인멸시색(因滅是色)하여 획득해탈상주

색(獲得解脫常住色)이라

3. 여래장중(如來藏中)에 성색진공(性色眞空)이요 성공진색(性空眞色)이라

청정본연(淸淨本然)하여 주변법계(周邊法界)라

4. 일모공중(一毛孔中)에 무량불찰(無量佛刹)이 장엄청정(莊嚴淸淨)하여

광연안립(曠然安立)이라

5. 찰찰진진(刹刹塵塵)이 구설구청(俱說俱聽)하여 설청(說聽)을 동시(同時)하니

묘재(妙哉)라 차경(此境)이여!

6. 묘색담연상안주(妙色湛然常安住) 불이생로병사천(不移生老病死遷)





이제 열반진색(涅槃眞色)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문을 부처님

일대시교(一代時敎)라 곧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문을 체계를 세워서 본다면,

유,공,중(有,空,中) 삼교(三敎)라고 합니다.

맨 처음에는, 우리 중생차원에서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고 너도 있고 나도

있다' 그러한 정도의 낮은 법문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유교(有敎)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실은 있지가 않습니다. 선악(善惡)이나 자타(自他), 이런것은

우리 범부가 보아 있는 것이지, 원래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원래 자타가

없다, 원래 본질에서 보면 선악이 없다' 이러한 자타와 선악을 초월한 법문이

공교(空敎)입니다.

그 다음에는 '다만 비어 있지 않고 천지우주는 바로 부처님의 광명 뿐이다. 다만

부처님의 불성 뿐이다' 이런 가르침이 중도교(中道敎)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문의 요지(要旨)는, 목적은 역시 중도(中道)에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중생차원에서 '있다 없다' 하는 법문 곧, 인과(因果) 법문이나 그런

법문이 되겠지요. 그 다음은 '이런 것은 모두가 다 공(空)이다.

제법공(諸法空)이다' 이러한 공(空)에서 보는 법문이고, 가장 높은 차원이

중도교(中道敎)로 본질에 바로 들어선 법문입니다. 이것이 '모두가 다 부처뿐이다.

불성 뿐이다' 하는 법문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불성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어떻게 보이는 것인가?

우리가 말씀을 더 깊이 해야만이 이제 실감이 좀 나겠기에, 경전(經典) 가운데서는

불성광명(佛性光明)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을 살펴서, 우리한테 인식을 더 깊이

하기 위해서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열반경(涅槃經)에서는 '열반(涅槃)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또는 생(生), 주(住), 괴(壞), 남(男), 여(女)의 십상(十相)이 없다' 고 합니다.

열반은 우리가 닦아서 성불(成佛)한 단계가 열반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열반든다

하지만 그것은 죽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참다운 열반의 뜻은 '번뇌를 다 없애버린

단계 곧, 번뇌가 멸진(滅盡)한 단계' 이것이 열반입니다. 즉 말하자면 성자의

단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성자의 단계는 십상(十相)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까, 선정(禪定)을 말씀드렸습니다만, 선정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런 것은 다

끊어지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그냥 맛도 못 보고, 또는 냄새도 못 맡고,

차근차근 올라가면 그때는 보아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의식(意識)만

남다가, 가장 맨 나중에는 의식마저 끊어지는 것 입니다. 의식이 끊어져 버려야

비로소 참다운 부처 곧, 대아(大我)가 되어서 성불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열반도 역시 번뇌를 다 끊어버린 단계니까 마땅히 이런 상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상 곧, 물질이란 색(色)의 상소리, 향기, 맛, 촉감

또는 낳는다는 생기는 상, 머무르는 상, 부서지는 상, 또는 남자 상, 여자상, 이런

것이 없어져야 비로소 열반인 것입니다.

아까 말씀한 법문 가운데, 욕계(欲界)에만 남녀의 구분이 있고 색계(色界)

이상에는 남녀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열반 가운데도 남녀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욕계에 있는 중생이 보아서 남녀가 있는 것이지, 더 올라가서

참다운 불성(佛性) 자리에 올라가면 남녀나 색성향미촉 또는 낳는다, 부서진다,

이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하나의 영원한

불성(佛性)뿐입니다. 영원히 존재하는 부처뿐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열반경(涅槃經)에 있는 법문으로,

'색시무상(色是無常)이나, 색은 항상이 없으나, 인멸시색(因滅是色)하여, 이 색이

곧 우리가 보는 물질이 없어짐으로 말미암아서 그때는,

획득해탈상주색(獲得解脫常住色)이라, 항시 머무는 영생의 색, 해탈상주색을

얻는다' 는 법문입니다.

이 법문은 일승법문(一乘法門)입니다. 따라서, 어려운 법문이지만 이런 법문을

외워두시면 참 편리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물질은 허망한 것인데, 허망하다는 관념이 익어져서 이걸 우리가

부정함에 따라서, 허망한 것이 없어짐에 따라서 참다운 해탈상주색(解脫常住色)인

항시 머무는 영생의 색을 우리가 얻는다는 말입니다.

나라는 색(色), 너라는 색(色), 그런 상(相)이 있을 때는 아직은 영원히

해탈색(解脫色)은 우리가 얻을 수가 없습니다. 자타(自他)의 색(色)이나 이런 것을

없앰으로 해서 비로소 영원한 해탈의 색(色)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는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일락서산월출동(日落西山月出東)이라' 해가

떨어진 뒤에야 비로소 달이 솟아오른다는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번뇌가

안 떨어지면 영원의 해탈색은 우리한테 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물질의 색(色), 이것은 비록 무상(無常)이나, 이것이 없음에

따라서, 이것을 부정함에 따라서, 비로소 영원적인 항시 머무는 해탈의 색을 우리가

얻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또, 그 다음 능엄경(능嚴經)에는 '여래장중(如來藏中)에, 부처님의 깨달은 경계

가운데는, 성색진공(性色眞空)이요, 불성(佛性) 가운데에 있는 색(色)은 바로

진공(眞空)이 되는 것이고, 성공진색(性空眞色)이라, 부처님의 불성(佛性)은 텅

비었지마는 또 역시 참다운 색(眞色)이 있다'고 합니다.

너무 깊이 들어가면 복잡하니까 그냥 대강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청정본연 주변법계(淸淨本然 周遍法界)라, 청정미묘(淸淨微妙)한

광명(光明)이 법계(法界)에 충만해 있다' 는 법문입니다.

우리 중생의 번뇌에서는 안 보이나, 참다운 안목으로 본다고 하면 청정한 광명이

법계에, 온 우주에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온 우주는 부처 님광명으로 충만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무량광불(無量光佛)인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바로 무량광불인

것입니다. 이것은 능엄경(楞嚴經)에 있는 법문입니다.

그 다음 화엄경(華嚴經)에는 '일모공중(一毛孔中)에, 한 터럭 구멍 속에,

무량불찰(無量佛刹)이, 한량없는 부처님의 나라가, 장엄청정(莊嚴淸淨)하여,

장엄스럽게 청정해서, 광연안립(曠然安立)이라, 조금도 줄어지지 않고서 광활하게

편안히 있다' 는 법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미묘법문(微妙法門)을 각인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우리가

생각해본다고 할 때, 터럭 구멍이라는 것이 굉장히 작은 것인데, 이런 가운데에

부처님의 무량세계인 큰 세계가 조금도 안 줄어지고서 거기에 편안히 있다는

것입니다.

물방울 하나나, 태평양 물 전부나 물이란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물론 농도는

차이가 있을런가 모르지마는 물이란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불성(佛性)에 한번 들어가면은, 천지를 다 통합한 불성이나 또는 불성의 한쪽이나

그때는 똑같은 것입니다. 그 성질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이

원융무애(圓融無碍)라는 말입니다.

석가모니한테 있는 불성이나 나한테 있는 불성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개미한테 있는 불성 또는 사람한테 있는 불성이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불성에

한번 들어가면은 우주는 모두가 다 불성뿐인 것입니다. 불성위에서 우주가 그때그때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비록 한 터럭의 조그마한 구멍 속이라 하더라도, 의미로

보아서는 천지가 거기에 다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다 공부해서 차근차근 스스로 납득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 터럭 구멍 가운데, 무량의 부처님 세계가, 장엄청정(莊嚴淸淨)해서 조금도

크기가 줄어지지 않고 있다는 말은 이치가 아닌 말 같으나 이것이

원융무애(圓融無碍)입니다.

또 '찰찰진진(刹刹塵塵)이, 어떤 물질이나 모든 것이, 구설구청(俱說俱聽)하여,

함께 설법하고 함께 들어서, 설청동시(說聽同時)하니, 설법과 듣는 것을 같이

동시에 하니, 묘재(妙哉)라 차경(此境)이여, 묘하구나 이런 경계여!'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설법을 저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저한테 지금 설법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무언 중에 말입니다. 나무나 소나 또는 공기나 모두가 다

설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중생이 어두워서, 중생의 귀가 한정되어서 미처

못 듣는 것입니다.

천지우주는 모두가 다, 모든 제법(諸法)이 다, 방식만 차이가 있지 서로 피차

설법하고 서로 피차 듣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서로 피차 설법과 듣는 것을 동시에

하는 것이니 이런 경계가 참 묘하구나! 이런 경계는 깨달은 뒤에만 비로소 알수가

있는 것이니까 이제 묘하다고 했겠지요.

그 다음 또 '묘색담연상안주(妙色湛然常安住)요' 묘색(妙色)이란 일반색이 아니라

청정미묘한 불성의 색을 말한 것입니다. 청정 미묘한 불성의 색이 고요히 우주에

가득차게 안주(安住)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불이생로병사천(不移生老病死遷)이라' 우리가 죽고 살고 늙고 병들고 한다

하더라도 이런 묘색(妙色)은 조금도 옮기지 않고 변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이런 것은 일승(一乘) 경전에 있는 법문이니까, 앞으로 수십번 외우시고

생각하면 차근차근 열반의 참다운 색인 열반진색(涅槃眞色)을 더 깊이 인식하고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혜해탈(慧解脫)을 얻으시고 가행(加行) 정진으로 사선정(四禪定)에

들고, 나아가 멸진정(滅盡定)을 통과하여 삼계(三界)를 초탈(超脫)하고,

선정해탈(禪定解脫)로 기필코 성불(成佛)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법문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