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영과 대화할 수 있다.

“마음이 순수, 단순한 태고의 사람은, 그 마음이 영계를 향해 열려 있다. 그러므로 태고의 사람은 영들과 직접 이야기하는 일이 가끔 있었다.” 나는 영계에서 태고의 시대부터 살고 있던 영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 영으로부터 이런 말은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 영은, 마음이 순진하여 영계를 향해 마음의 창문이 활짝 열려 있던 태고 때 사람들 중에는 육체를 지닌 인간의 몸으로도 영과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었다고 말했다.

그 영이 나를 영계의 쓸쓸한 해안으로 데리고 갔다. 그 해안에는 몇 백 만년 아니 보다 훨씬 이전부터 똑같은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고 또 다시 밀려오는 광경이 되풀이되었을 것이다. 나는 이 끝없이 펼쳐진 해안과 물결의 광경이 실로 영계의 태고적 광경이라 생각되었다.

그는 해안에 다다르자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인간에게 태고적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할 것이니, 그대에게 표상을 통해 태고 사람이 영과 이야기하는 광경을 보여 주리다.” 그는 영계에서만 허용된 표상이라는 방법을 써서 나의 눈앞에 태고적 사람과 영이 대화하는 모습을 재현시켜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부터 여기에 기술하는 태고적 사람과 영과의 대화 광경은, 실제로 본 것이 아니라 표상에 의해서 본 것임을 말해둔다.

표상을 통해 나의 눈앞에는 세 사람의 태고인 이 나타났다. 그 몸에 걸친 옷과 순박하고 솔직한 얼굴모습 등을 훑어보고, 곧 이것이 태고의 “마음이 순수, 단순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자 그 곳에 또 하나의 영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고, 한 사람의 태고인 앞에 소리도 없이 섰다. 태고인 에게는 아직 그 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무엇인가를 느꼈음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영에게는 물론 태고인의 육체가 보일 리 없다. 하지만 그 태고인과 마주 서 있다. 그러자 태고인의 육체에 있던 영이 희미한 그림자처럼 육체 안에서 돋보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영계에서 온 영의 머리 위에는 하나의 표상이 나타났다. 그 표상은 맑고 푸른 밤의 연못과 그 물 위에 드리운 달, 그리고 무엇인가 문자를 연상케 하는 열쇠 무늬와 선(線) 따위가 잇달아 나타났다. 이 표상은 그 영이 육체에 깃들고 있는 태고 영의 상념(사람 마음속 깊이 간직된 생각)을 자기의 상념 속에 받아들여 이해했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영은 육체를 지닌 인간의 영적인 부분과의 교류에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아직 인간과의 직접적인 대화는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영과 인간과의 자연적인 상념(인간으로서의 일반적인 생각)이, 이 단계에서는 아직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윽고 영계에서 온 영의 상념이 육체 안에 있는 영의 상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공중에 엷은 안개가 흘러가는 듯한 느낌으로써 알아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차츰 그것은 인간 안에 있는 영의 상념 속으로도 흘러 들어갔다. 이 단계에 이르면 영과 인간과의 직접적인 대화는 어렵지 않게 진행된다. 영과 인간과의 직접적인 화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이 태고인은 자기 육체의 내부로부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목소리는 태고인 이 평상시에 쓰고 있는 언어인 것이다. 태고인은 이렇게 말했다.

“영계에 들어가면 내가 아는 사람들에 관한 것을 알아봐 주오. 그리고 그대가 아는 것이 있다면 지금 가르쳐 주오.” 영은 이에 대한 대답을 틀림없이 했겠지만 외부에 있는 나로서는 이해할 길이 없었다. “요셉에 관해서는 잘 알았소. 그러면 유다는 어떻게 지내고 있소?”

태고인의 소리만이 우리에게 들려왔다. 그 사람은 깊은 명상 속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계속 했다. 영은 이 태고인 에게 내면의 음성으로 대답하고 있지만, 외부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사람들이 본다면 명상에 잠긴 사람이 조용히 자기 자신에게 자문자답하는 것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의를 기울려 자세히 보면, 그가 질문하고 영이 대답하고 있으리라 생각되는 시간이면, 그의 혀가 조금씩 떨려 마치 소리 없는 말소리를 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영과 사람과의 직접적인 대화는 방금 말한 것과 같은 형식으로 진행되는 것인데, 이것이 가능한 사람은 나를 데려온 영의 말을 빌린다면 “마음이 순수한 사람”에 한한다고 한다. 그 까닭은 이러한 사람의 마음의 창문은 영이나 영계에 대해서 열려 있으므로 영의 상념을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로 인하여 영계에서는 태고 시대를 황금시대라 하고, 시대가 점점 내려감에 따라 백은 시대, 청동 시대라 부르며, 현대를 철기 시대라 부른다. 이것은 시대가 경과함에 따라 인간이 과학이나 세상의 명예나 이해타산 따위의 외면적인 사항에만 마음을 쓰게 되어 영에 대해 소홀히 한 결과이며, 동시에 영적 창문이 차츰 막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조금 전에 언급한 영의 말을 빌리면 “현대에는 마음이 순수함으로 해서 영과 대화 할만한 사람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면 좀더 영과의 대화에 관한 설명을 부연해 보기로 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로 보면, 영은 그 상대방 인간의 말을 쓰면서 태고인과 대화한 것처럼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오해이다. 왜냐하면 영은 인간의 언어를 한 마디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과의 대화는 영의 상념이 태고인의 영적 상념 속에 스며들어 다시 그 사람의 내면적인 마음속을 거쳐서 인간의 자연적 상념 안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태고인 에게는 마치 자신과 똑같은 말로써 영이 이야기를 걸고 있는 것처럼 들린 것이다.

이상의 이야기로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가장 중요한 결론이라고 믿는다.

마음이 순수, 단순한 태고적 사람들에게 영과의 직접적인 회합이 가능했다는 것은, 곧 인간의 본래의 모습은 영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인간은 점차로 갈 길을 잃고 본래의 바른 길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현대인들에게, 그것도 극히 한정된 사람뿐이지만 직접적인 영과의 교류가 가능했던 사례는 실상 알고 보면 진짜 영이 아닌 정령과의 대화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령과의 대화는 때로는 대화하는 사람의 육체를 멸망시키고 목숨을 빼앗아 가는 매우 위험한 것인데, 여기에 대한 것은 다음에서 자세히 말하기로 한다.

만약 우리 역시 태고 인처럼 유순하고 천진한 마음을 지닐 수 있다면 우리도 영과의 대화가 얼마든지 가능할 것임은 틀림없다.

정령과 인간과의 대화는 인간에게 매우 위험하다. 그 까닭은 정령은 아직 영으로서의 심사를 거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중에는 흉폭한 정령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또 정령에는 아직도 인간세계 시절의 기억이 꽤 남아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것이 대화하는 상대방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가끔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나 자신의 경험담과 목격담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보기로 한다.

나는 그 때 나의 영을 육체로부터 이탈시켰는데, 그 이탈의 정도가 얕았기 때문에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나의 영은 방금 이탈한 육체를 상공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나의 육체는 죽음의 상태에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나의 영은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고 깜빡 정신을 잃었다. 다음 순간 정신을 차리고 나의 육체를 굽어보자 죽어 있는 나의 육체 곁에 하나의 정령이 앉아 얼굴을 응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육체에 깃들어 있는 나의 영과 상념의 교류를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상념의 교류로 나의 영 속에 자신을 스며들게 하는 데 성공만 한다면 그는 나의 영을 내쫓고 나의 육체를 자기의 것으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상태였다.

왜냐하면 나의 영이 본 그 정령의 얼굴 모습은 안면의 반쪽이 거무튀튀할 뿐만 아니라 한쪽 볼은 떨어져 나가서 추악한 용모가 된 흉령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흉령이란 항상 이러한 끔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때 나의 영은 육체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그도 상념의 교류를 할 길이 없어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만일 그 때 나의 영이 육체를 이탈한 상태에 있지 않아 그와 상념의 교류를 하게 되었더라면...........하고 생각하면 지금도 전율을 금치 못한다.

그러면 정령과 인간과의 직접적인 대화나 교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설명에 앞서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하기로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영의 문제 그리고 영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얼마 동안을 그렇게 하고 있었는지 분명치 않지만, 갑자기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마치 물체라도 되는 듯이 형태를 갖추고 내 육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눈에 역력히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은 일찍이 겪어 보지 못했던 바이고 또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미쳐버린 것이 아닌가하고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나는 공포에 질려 빨리 명상에서 깨어나려고 애를 썼으나 이상하게도 무엇 때문인지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다음 순간에는 더욱 기묘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몸 안에서 나에게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나의 공포는 절정에 달했다............ .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나는 침대 위에 조용히 뉘어져 있었다. 나는 기절하기 직전에 내 몸에서 일어난 불가사의한 일을 곧 생각해 보았으나,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날 무서운 일이었다.

이 사람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면서도 정령과 대화를 할 뻔한 사람이다. 정령과 인간과의 직접적인 대화가 시작되는 전조(前兆)는 이와 같이 자신의 안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연상처럼 보이는 듯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은 정령의 상념이 그 사람의 영적 상념(인간의 마음속의 깊은 생각) 속에 흘러들어 다시 자연적 상념(인간으로서의 일반적인 생각) 속에 차츰 침투하기 시작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정령의 상념이 인간의 영적 상념 속으로 스며들어 다시 자연적 상념으로 들어가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영과 태고인과의 직접적인 대화의 경우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이 영이 아니라 정령인 까닭은 현대인들(그것도 매우 예외적인 사람들이지만)의 영적인 개안(開眼)의 정도가 태고의 황금시대 사람들에 미치지 못하고 정령계와 통할 정도밖에는 마음의 문이 열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은 앞에서 설명했으므로 이해하리라 믿는다.

정령과 인간과의 직접적인 대화는 영과의 직접적인 대화와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와 전혀 다른 형식으로 행하여지는 경우가 있다. 영과의 대화가 공통적인 점은, 정령이 인간의 영적 상념으로부터 자연적 상념으로 넘어 간다는 점이며, 인간에 관한 일과  인간의 언어를 알고 있고, 인간의 언어로 대화한다는 것이다.

또 영과의 경우와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정령과의 대화에는 경우에 따라서 사람을 죽게 할 위험성이 내포된다는 점과 정령이 인간을 지배할 위험성이 많다는 점 등이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 설명하기로 한다.

   (1). 유령일 경우에 따르는 위험

정령은 자기 이외에도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자기가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육체에 상념을 통해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는 그 인간을 자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정령과 인간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 정령은 자기 이외에도 대화의 상대인 인간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 정령이 선한 정령이라면 그런대로 위험이 따르지 않겠지만, 흉령일 경우에는 인간 혹은 자기 이외의 남에 대한 그의 악의는 이 세상 인간들이 품고 있는 악의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흉악한 것이다.  

이 점은 정령계를 설명할 때에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 흉령의 악의는 그가 인간계에 있을 때는 사람들의 눈이 있어 평판이나 이해타산 때문에 억제되었지만, 정령이 되고 나서부터는 거리낌 없이 적나하게 노골화하기 때문인 것이다. 흉령이 인간과 대화한 결과 인간의 존재를 알게 되면, 그는 인간에게 갖가지 악의에 찬 마수를 뻗쳐  드디어는 그 육체를 멸망으로 이끄는 예가 적지 않다.

    (2). 인간의 착각으로 일어나는 위험

인간은 흉령과 대화를 하면서도 모든 영은 한결 같이 성스러운 령이려니 생각하기 쉽다. 실상 흉령은 자기 이외에는 인간이 있을 리 없고, 세계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인간 쪽은 자기와 대화하고 있는 영이 영인 이상에는 성스러운 영이려니 착각하기 쉬운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 인간은 육체 속의 영의 소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복종하여 열광적인 광태를 부리게 된다. 그러나 실상은 착각이며,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성령(聖靈)은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큰 실수를 저질러 때로는 살인과 강도 등 별별 나쁜 짓을 예사로 거듭한 나머지, 마침내는 자신의 몸을 멸망으로 몰아넣어 버린다.

그러면 정령과의 대화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에 대해서 그 실례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500년 전 옛날에 전쟁 때문에 많은 사람이 사망한 유적지인 네덜란드의 시골 어느 마을의 스피레라고 하는 농부가 어느 날 밭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정령의 방문을 받았다. 즉 갑자기 이상야릇한 정신상태로 빠져들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스피레는 정신없이 이렇게 외쳤다. “너는 뭐냐? 내 뱃속에서 소리를 내고 있는 너는 누구냐 말이다. 악마냐 아니면 악령이냐? 내 뱃속에 함부로 들어오다니! 썩 꺼져 버려!”

이에 대한 정령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곧 너의 주인이다. 너는 나의 종에 불과하며, 지금까지 나는 너에게 육체를 빌려주었을 뿐이다. 그러니 너는 이제부터 나의 말을 명심하고 명령에 복종하라.”

스피레는 이 해괴한 대답에 너무 놀란 나머지 대꾸도 못하고 말았다.

이 때 스피레의 행동을 보고 있던 같은 마을의 농부들은 스피레가 숨이 끊어질 듯한 단말마(斷末魔)의 고함을 지르므로 깜짝 놀라 지켜보았으나, 다음 순간에는 괭이를 손에 든 채 얼빠진 사람처럼 멍청히 하늘을 우러러보며 방심 상태로 밭 한 가운데 말뚝같이 서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집으로 돌아온 그는 정신 회복은 되었으나 이제까지의 스피레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고, 또 가끔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말을 중얼거렸다.

온 마을이 스피레의 방화로 말미암아 집이 전부 타버리고 많은 사상자를 내었을 뿐 아니라, 스피레 자신도 타죽는 끔직한 일이 발생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다. 이 사건은 스피레의 발광 때문이라고 낙착되었나. 나는 이것을 정령과의 대화에서 생긴 위험의 한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정령과의 대화에 있어서 정령 쪽이 인간의 상념을 이해하고,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먼저도 말한바와 같이 영과의 대화와 같은 것이므로 별로 위험할 것이 없다. 이에 반하여 정령 쪽이 인간의 언어는 이해는 하지만 인간의 상념까지는 알아차리지를 못하고, 정령 자신의 상념만을 고집하여 대화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에는 곧 기묘한 혼란이 야기된다. 대화를 통해 들은 정령의 상념을 인간은 마치 자신의 진짜 상념처럼 생각해 버린다. 이렇게 됨으로써 인간은 그 때까지의 자기를 버리고 대화의 상대인 정령의 생각대로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되어버린다. 이 인간은 정령의 생각을 자기 생각으로 살아가는 정령의 기계가 된 것이다.

스피레의 경우가 바로 이것이라 믿는다. 그에게 정령의 상념을 심어 준 정령은, 아마도 과거에 그 마을에서 학대를 받은 사람이거나 혹은 500년 전에 있었던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의 정령이었을 지도 모른다. 이 정령의 기억 또는 상념을 스피레는 자기의 것이라 생각하고, 그 정령으로 둔갑하여 복수를 한 것이라 생각된다.

또 열 살도 채 못 되는 아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고장의 사정을 상세하게 알고 있다거나, 자기는 옛날에 어디에 살고 있던 아무개라고 주장하는 일이 흔히 있다. 그리고 이런 경우, 그 아이는 그 고장에 데리고 가면 그것이 설사 다른 나라일지라도 전혀 배운 일이 없는 그 나라 말로 그 고장 사람들과 태연히 이야기를 나누는 수수께끼 같은 일이 있다. 이러한 예는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오인하기 쉽지만, 실은 정령과의 대화로 말미암아 그 정령의 기억이 인간 속에 어엿하게 자리를 잡았을 경우도 매우 많은 것이다.

               이승도 영계의 일부이다

나는 앞에서 영계의 넓이는 광대무변하여 전 우주보다도 넓다고 말한바 있다. 또 영계에서의 결혼은 남녀의 영이 영으로서의 일체(一體)가 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나는 이제 영계와 이 세상의 공간적 상관성에 관하여 설명할 단계가 되었다. 그러면 영계와 이 세상간의 공간적인 관계는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일까?

설명의 편법으로 우선 우리들 인간이 흔히 보는 유령 이야기를 몇 가지 소개한다.

독일의 어느 도시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농부 드루는 어느 날 밤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드루는 입 속으로 가져가려던 포오크를 자기도 모르게 멈추고 내려놓았다. 그 자신도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고 훗날 고백한 바 있는데 포오크를 식탁에 놓고는 곧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입구 문짝에 등을 진 채  오스트리아에 있는 친구가 서 있었다. 그는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친구가 수상쩍기는 했으나 곧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고 다정하게 말을 걸려고 하자 그 친구는 훌쩍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는 당시 상황을, “그 친구가 사라진 모습은 마치 문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 증거로 곧 문을 살펴보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문은 꼭 닫혀져 있었다. 유령은 문틈으로 드나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내 고향인 스톡홀름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어떤 교회의 목사가 한밤중에 독서를 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방안 공기가 보통 때와 다르다는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러자 거기에 안면이 있는 교회 신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 평소 때와는 달랐으나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러자 이상스럽게도 그 신도는 모습을 감추었다.

그 목사는, “유령은 별안간 키가 줄어지면서 마룻바닥으로 꺼져 버렸다.” 라고 그 후 설명했다.

내가 근래 수십 년 동안 수시로 방문하여 머무르던 런던 교외에 자리한 유령의 집에 대해서는 세상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유령의 목격담을 퍼트린 바 있다. 나는 사람들의 입에 오른 유령의 출현과 사라질 때의 모습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수집했었다. 수집한 자료에 의하면 첫째 이야기처럼 문틈으로 출입했다는 사람,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 수 없고 그저 무심코 보니까 유령이 있었으며 어느새 사라졌다고 하는 사람, 벽 속을 마치 공간처럼 생각하고 걸어가는 듯한 느낌으로 사라졌다고 하는 사람 등 가지각색이었다.

이상 세 가지의 이야기에 관한 설명은 뒤로 돌리기로 하고 먼저 영계라는 세계가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으며, 또한 그 공간과 이승의 공간(세상)과의 상관관계는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설명하기로 한다.

나는 이미 영계가 전 우주보다도 넓은 광대무변한 것이라는 점, 그리고 영계와 이승의 관계는 한 닢의 동전 안팎과 같이 밀착해 있어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나는 이승과 영계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비유를 들어보기로 하겠다.

이 세상이란 영계와 광대무변한 공간 속에 두 둥실 떠 있는 하나의 고무공이며, 이러한 자연계의 주위는 온통 영계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자연계와 영계의 관계는 고무공의 껍질로 해서 뚜렷이 경계가 지어져 있는 별도의 세계라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으며 그 진상을 여기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무공 내부에도 빈틈없이 영계가 스며들어있다. 고무공 내부도 실상 영계이다. 고무공 내부 이외는 모두가 영계이지만, 고무공 내부만은 예외적으로 자연계와 영계의 두 세계가 동일한 공간 안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사람들은 좀처럼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예컨대 책상이 하나 놓여 있으면 그 놓여진 자리에 다른 책상을 놓으려고 해 보았자  더 놓을 수 없다는 것이 자연계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공간에 두 물체를 동시에 놓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계에서나 있는 생각에 불과하다. 이것은 자연계가 물질계, 즉 물질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연계에서도 놓여 있는 책상을 치워 버린 다음에 또 하나의 책상을 그 자리에 놓을 수는 있다. 이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며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역시 책상 하나를 치운 뒤에 다른 하나의 책상을 놓는 것이니까, 그 두 책상은 놓여지는 것이라고 밖에는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각기 다른 시간에 같은 장소, 즉 공간에 두 책상을 놓았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사람들도 각기 다른 시간에 같은 공간에 두 물체가 자리 잡는다고 한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왜냐하면 공간과 시간은 각기 다른 성질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부지불식간에 마음에 박혀 버린 일반적인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걸음 깊이 들어가 보기로 하자. 같은 공간이라고 하지만 성질이 전혀 다른 두 공간 사이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흡사 시간과 공간이 그 성질을 전혀 달리하고 있듯이 말이다.

좀더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신경 조직은 몸 안에 분명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엄연히 공간을 차지한 셈이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 또 하나의 것(다른 신경 조직이라도 좋다.)을 집어  넣자면 먼저 들어 있는 것을 옮겨 놓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신경 조직을 타고 우리의 몸을 움직이게 하는 신경의 명령이나 신호는 같은 공간 속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명령이나 신호는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반론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그것은 엄연히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공간의 성질이 다를 따름이다.”

영계의 공간과 이승의 공간과의 상관관계로 이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영계에서 결혼한 영이 두 몸이 완전히 하나로 되어, 하나의 영으로 취급되는 것도 영계의 공간과 자연계의 공간과의 성질의 차이 때문이다. 또한 영계가 이승과 한 닢의 동전처럼 앞뒤의 관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계가 존재하는 영역에서는 이승과 꼭 같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수수께끼도 역시 영계의 공간이 갖는 성질 때문이다. 이 일이 우리에게 여간해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우리가 영계의 문제를 생각할 때에도 이승과 자연계적. 물질계적 습관에 생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앞서 말한 유령의 출현과 사라지는 모습에 관한 비밀을 알아보기로 하자.

첫 번째 농부의 이야기에서는 출입문 문틈으로 유령이 출입한다고 했다. 또 런던의 유령의 집에서도 이와 비슷한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또 두 번 채 목사의 이야기에서는 마룻바닥으로 사라졌다고 했고, 런던의 유령의 집 이야기에서도 벽 속에서 나타나 벽 속으로 사라졌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또 마지막으로 어떻게 나타났다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통 알 수가 없다고 한 사람들도 꾀 많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어느 것이나 다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영은 벽 속을 통과해서 나타나 벽 속을 통해서 사라지거나 목사의 경우처럼  마룻바닥을 통해서도 사라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간의 성질이 다른 이상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은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즉 벽 속이건 마룻바닥이건 거기에는 모두 영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출입문 문틈을 통해서 출입한다는 농부의 말도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다. 그것 역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더 설명한다면, 이것은 농부가 출입문이 잠겨져 있었으니까 틈을 통하지 않고서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이승의 상식에 사로잡혀 그 상식에 입각해서 해석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그럴 이유는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영에게는 물질계의 문짝 따위는 말할 나위도 없이 눈에 보일 리가 없기 때문에, 구태여 문틈을 골라 빠져나갈 까닭이 없으며, 출입문을 곧장 통과하면 되는 것이다.

끝으로 덧붙여 말해 둘 것이 있다. 첫 번째 농부가 말을 걸려고 하자 유령은 왜 사라졌을까? 또 두 번째 이야기에서처럼 목사가 손짓을 하는 순간 영은 왜 사라졌을 까? 이 사실에 관해서는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농부나 목사는 말을 걸어 보려고 생각했거나 손짓하는 순간에 이승의 사람으로 다시 살아나 영의 세계로부터 이 인간계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영을 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을 말한다면 영은 어차피 그곳을 벗어나 어디 론가에 갔을 것은 틀림없지만, 농부나 목사 그리고 유령의 집 방문객들이 말하는 것처럼 문이나 마룻바닥이나 벽으로 사라졌다는 것은 실상 그들의 착각이다. 그 때 영은 단순히 그들의 시계에서 사라진 것에 지나지 않으며, 영은 아직 그곳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유령은 왜 사건 현장에 나타나는가.

세상에는 흔히 유령의 집이라는 것이 있다. 유령을 완강히 부정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환상이라든가, 그 집의 구조나 뜰에 있는 나무의 배치, 그리고 낮에도 유령이 나오는 집은 그 집의 태양광선의 조화, 밤이면 달이나 별 등의 빛과의 관계 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유령처럼 느끼게 한다는 식의 그럴듯한 이유를 붙인다.

이것은 아예 근거가 없는 것이므로 새삼스럽게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나는 어째서 유령이 나오는지 그리고 유령의 집이라고 불리는 저택에는 정말 유령이 자주 나타나는 것인지에 대하여 한층 더 근거 있는 설명을 하고자 한다.

나는 전례에 따라 하나의 실례를 들어 말하기로 한다. 이 유령의 집은 특히 유명한 것이어서 영국에서는 모두들 베란다의 유령이라 불리고 있다.

이 집은 에딘버러(영국의 중부 도시)의 변두리에 있는 2층 건물이다. 집은 큰 편이었고 넓은 정원에는 오래된 고목들이 꽉 들어차 한낮에도 고요적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유령의 출현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20년경이고 유령을 처음으로 본 사람은 그 집에서 수십 년을 일해 온 하인이었다.

그는 어느 날 저녁, 저택의 문단속을 하며 한 바퀴 돌아보고 있었는데 2층 베란다에 연한 방까지 왔을 때, 베란다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으므로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 그림자는 10년 전에 죽은 이집의 딸 엘렌 이었기 때문이다. 그 유령은 몸을 떨고 있는 하인은 물론이고 주위에 있는 물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태도로 베란다 끝까지 5-6미터 가량 걸어가서는 훌쩍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는 후부터 이 집에는 엘렌의 유령이 때때로 나타났고, 게다가 영락없이 베란다에 나타났으므로 베란다의 유령 저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 후 이 집은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가 되었는데, 1740년경에 엘렌의 가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또 유령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헌트가 이 집을 사 들여 새로 개조하여 살게 되었다.

개축한 이집은 본래의 집보다 규모가 작아서 정원 깊이 자리 잡은 조그마한 건물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 엘렌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소문도 들어보지 못했던 헌트 가족도 얼마 안 가서 엘렌의 유령을 보게 되었다. 더구나 엘렌의 유령은 집을 개조하기 전의 2층 베란다가 있던 자리에 나타나서 옛날 하인이 본 것처럼 마치 옛날의 베란다 위를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걸어가듯이 공중을 밟아 가더니 훌쩍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위의 물체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한 모습도 전과 다름이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밝혀 둘 것은 이 엘렌은 엄격한 성격의 시골 유지였던 부친이 허락할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하여 베란다에서 자살 했었다.

이러한 유령의 이야기는 영의 입장, 영계의 입장에서 설명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며, 또한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나는 이미 앞에서도 기술한 바와 같이 영은 그 상념에 의해서 어디든지 자유롭게 몸을 이동할 수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영은 공간이나 거리라는 관념을 가지지 않는다고 설명한 바가 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 이야기 가운데 “똑같은 장소”에만 엘렌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설명해 보기로 한다. 엘렌이 사람의 눈에 즉시 엘렌 이라고 인정받았다는 것(영이 된 엘렌의 얼굴 모습에 큰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 엘렌이 유령이 되어 가끔 나타난 것으로 보아 엘렌의 영은 아직 영계에는 가지 못하고, 이승과 영계의 중간인 정령계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령계에 있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영들과 마찬가지로 엘렌의 영적인 마음의 상태는 아직 인간계에 있을 때의 기억이 상당히 남아 있었던 게 사실이다.    

내가 자주 언급한 바와 같이 영들의 기억 속에 남는 것은 아직 그 영이 육체적 인간으로 있을 때의 기억이라 하더라도 그 마음 깊숙이 간직된 영의 평면에 기억된 것뿐이며, 표면적인 지식 따위는 모조리 소멸하여 기억에 남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은 인간이 그 육체적 감각 눈. 귀. 코 등에 의해서 알게 된 것에 불과하므로 그 인간의 육체상의 기억으로 그치고 영으로까지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만 특이한 예외적인 경우에는 인간시절의 기억이라 할지라도 영의 평면에 이르지 못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르는 수가 있어, 이 기억은 죽은 뒤 한참동안 남게 된다. 이런 특이한 예는 엘렌의 경우처럼 자살했다든가 혹은 살인으로 인해 죽었다든가 한 영의 경우는 그 최후의 장면이나 장소가 기억으로 남아 있게 되어 비록 물질계의 기억이지만 영의 평면에까지 도달하는 수가 있다.

따라서 정령으로서의 엘렌의 상념에는 아직 인간 시절의 물질적인 기억이 상당히 남아 있어, 엘렌의 정령적인 상념 속에서 되살아나는 일이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할 때에 엘렌은 상념에 따라 영계를 자기도 모르게 이동해서 그 상념의 장소---이 경우에는 베란다(이승도 영계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다.)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엘렌의 영이 사후 상당한 시간이 경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영계로 가지 않고 정령계에 마냥 머물러 있다는 것도, 실은 그녀의 영(정령)으로서의 상념 속에 물질계 속박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 다소나마 남아 있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유독 엘렌만은 아니지만 유령이 모두 주위의 상황에 무관심한 태도를 짓는 이유는 이미 말한 것처럼 아직 물질계의 속박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유령이란 어디까지나 영이며, 영에게는 물질계의 일은 눈에 띄지 않는 법이며, 영들로서는 물질계의 존재조차도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계속. 다음은 마지막으로 나의 교령술, 고텐버어그에서 본 스톡홀름의 화재, 영계와 이승은 한 세계 속의 두 부분, 영계와 이승의 관계, 등의 내용입니다.)

              四次元의 世界13.의 “영계의 手記” / 스웨덴보르그 저 / 청화 (1984)  

셀라맛 가준Selamat Gajun(시리우스 말로 하나가 되세요)! 셀라맛 카시자람Selamat Kasijaram(사랑과 기쁨 속에서 축복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