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次元의 世界의 “영계의 手記” / 스웨덴보르그 저 / 청화    

본서는 세계 최대의 기서의 하나로서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현재도 관심을 끌고 있는 “스웨덴보르그의 靈書”를 우리나라 독자가 알기 쉽도록 편역한 것이다. 여기서는 이 원저를 저술한 수수께끼의 인물, 스웨덴보르그의 인물과 본서가 이루어진 유래, 그리고 기타 알려드려야 할 몇 가지를 소개하기로 한다.

                    스웨덴보르그의 인물과 업적

스웨덴보르그는 유럽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가장 신비스러운 수수께끼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의 백과사전에는 과학자. 수학자. 철학자. 신비사상가. 등으로 간단히 분류하고 소개되고 있으나 그리 간단히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며, 실제에 있어서도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위대한 인물이다. 스웨덴보르그에 관심을 쏟고 있는 오늘날의 유럽과 미국 사람들도 이런 면에서는 동감인 듯하며 결국은 먼저도 말한 바와 같이 위대한 인물이며 불가사의한 사람으로 다루는 모양이다.

스웨덴보르그는 1688년 스톡홀름에 있는 경건한 그리스도 교도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신비적인 경향을 지닌 듯하여, 열 살도 채 되지 않아서 교회의 목사들과 신에 대한 문제를 토론하기를 좋아했고 또 그 언행에는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요소가 많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이 소년의 입을 빌어 말을 시키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우프살라 대학을 졸업한 뒤로는 오래도록 스웨덴 광산국 기사로 근무했고, 1719년에는 귀족(貴族)에 서임되어 이후 수십 년에 걸쳐 귀족원(貴族院) 의원으로 정계에서도 활약한 것으로 보아 실제가 실무가로서 활동하는 한편 과학자, 수학자. 발명가로로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학문상의 업적이 얼마나 폭넓은 것이고 위대한 것이며 또한 그 시대를 훨씬 앞지르는 수준이었던가를 보려면 다음 한 가지 일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가 죽은 것은 1772년, 체류 중이던 영국 런던에서였지만, 그의 사후 140년이 지난 1908년에 모국인 스웨덴 학술원(學術院)은 국왕에게 청하여 군함을 보내서 이 위인의 유해(런던 교외에 매장되었다)를 모시러 간다는 유래 없는 장례를 거행했다. 그의 학문상의 업적이 그 시대를 앞선 것이었고 20세기에서도 가치가 높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던 까닭이다. 또한 1910년, 런던에서 개최된 국제 스웨덴보르그 회의에서는 세계 각국의 학자, 종교가 등 400여 명이 출석한 가운데 각기 전문 분야별 20부분으로 잘라서 그의 업적을 20세기의 학술 수준에 입각해서 토의 검토한바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가 학술상의 업적이 얼마나 큰 것이었던가를 알 수 있지만 그의 저술 중에는 현대 수준으로 분석해도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 적지 않다. 일일이 그 예를 들 수는 없으나 발명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보더라도 제염기(製鹽機), 피아노라, 잠수정에서 비행기까지 발명하는 등 거인다운 힘을 과시했다. 그의 거장으로서의 면모는 르네상스기의 거인으로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능가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저 업적에 비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만큼 알려지지 않은 것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림을 통해 사람의 눈을 쉽게 끌었음에 비하여 그는 너무나 수준이 높은 서적을 그것도 방대한 량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가 당시의 동 년대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은 크며, 온 유럽에 걸친 것이었으나, 특히 유명한 것은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괴테의 유명한 “파우스트”는 만약 스웨덴보르그가 없었던들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다. [“파우스트”주인공인 파우스트는 스웨덴보르 그의 생애 바로 그것이라 해도 좋으리만큼 비슷하다.]

                   신비가 영매로서의 스웨덴보르그

스웨덴보르그가 거장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불가사의한 사람으로서 알려진 것은 그의 후반기의 생활과 그 시절에 남긴 방대한 “靈界 著述”의 내용이 수수께끼에 쌓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84세까지 장수를 누렸으나 그 후 반생의 30년이란 모든 학문을 내던지고 그가 말하는 하늘의 계시에 따라 영적 생애적(生涯的) 생활을 보냈으며, 영의 세계와 교신하는 영매로서 유럽에 큰 화제를 던졌던 것이다.

스웨덴보르그의 교령 능력이라든가 천리안(千里眼)의 능력이라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철학자 칸트가 직접 저서 “Traume eines Geister Sehers"를 펴서 이를 보증할 정도였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칸트는 스웨덴보르그의 비상한 능력에 관하여 “인류 사상에 이러한 인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또한 장래에 있어서도 나타나리라고는 생각지 않으며 그 수수께끼 같은 능력에 대해서는 그저 놀라울 뿐이다.”라고 경탄한 바 있다.
      
                    스웨덴보르그의 “영계의 저술”

스웨덴보르그의 “영계의 저술”은 몇 천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것인데 그 대부분은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 지금도 소중히 보존되고 있다. 그의 “영계의 저술”이 다른 작품과는 비교가 안 되는 특이한 점은 그가 “이 모두를  스스로 영계에 들어가서 보고 들었으며, 혹은 영들과 사귀면서 깨달은 지식을 토대로 했다”고 공언하고 있는 점이다. 이처럼 보통사람으로서는 좀처럼 믿을 수 없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기서로 취급되고 있지만, 단순히 믿기 어려운 기서라고만 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끌리는 없을 것이다. 그 비밀은 역시 보통 사람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점을 근거로 삼은 저술이라는 데도 있겠으나, 그 내용을 읽은 사람으로 하여금 단순히 부정만 할 수 없는 진실의 측면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의 “영계의 저술”에 대해서는 과거에도 영국 시인 “엘리지베드 브라우닝(1806-1861)”이나 일본의 “스스키 다이쎄스(禪學子 1870-1966)”를 비롯하여 호의적인 비평이 많았고, 브라우닝은 “영계의 일을 분명히 밝힌 저술은 스웨덴보르그를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없다”라고 말하였다. 저자인 “콜린 윌슨(1931-    )”도 스웨덴보르그의 저서에서 받은 인상은 ‘틀림없는 듯한 신빙성’이라고 높이 평가하는 동시에 그 인물의 위대함을 인정하고 있다. 또한 외국에서는 그의 사후 2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영국 스웨덴보르그 협회(Sweenborg House, 20 Bloomsbury Way London W. C. 1) 등이 있다는 것만 보아도 그의 저술과 인물에 대한 평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고 할 것이다.

초인(超人) 스웨덴보르그는 그 경력부터가 복잡하다. 처음에는 과학자. 광산기사로 활약하고 뒤에는 종신의 상원의원이 되었으나, 마침내 심령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세계적으로는 철학자. 신비주의자로서 알려졌다.

2세기에 걸친 긴 생애를 통해 가장 화려했던 시절은 1688-1772년에 걸친 시기였을 것이다. 지칠 줄 모르는 여행자로서 유럽 대륙 특히 영국에서는 그의 이름을 떨쳤고, 라틴어로 씌어진 저서는 각국어로 번역되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저서에 대한 해석은 이론이 분분한 바 있다. 과학방면의 저서는 그대로 비교적 용이한 편이라고 하지만, 그의 종교 철학을 이해하려고 하면 우선 30권 이상에 달하는 그의 신학관계 저서를 통독하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저작들은 뉴욕의 스웨덴보르그 재단이나 기타의 공공 도서관에서 영문 번역서로 읽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가장 이해하기 쉬운 전기의 하나인 지그스뎃트 저작의 “스웨덴보르그의 서사시 : 이마뉴엘 스웨덴보르그의 생애와 업적”이 그의 영능적 경험을 잘 설명하고 있다.  

스웨덴보르그의 생애를 논할 때 가장 두드러지게 남과 다른 점은 뭐니 뭐니 해도 영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영능력자라는 말에서 연상되듯이 신경 과민한 성격은 결코 없었다. 그의 건강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같은 시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항상 자신의 안팎에 충실했으므로 모든 면에서 매우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평생 독신이었으나 장년이 되기 전까지는 결혼하여 가정을 가져야겠다는 희망이 없지 않아 가끔 결혼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가 분명히 독신으로 지내고자 결심한 것은 “하늘의 소리”를 들은 후부터였다.

스웨덴보르그는 영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다른 영능력자들과는 달라서 모든 면에 천분을 발휘했다. 그는 루터 교회파의 목사 “예스텔 스웨덴보르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종교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으며, 그 대신에 과학자가 되고자 결심했다. 그는 매우 우수한 학생이어서 21세에 우프살라 대학의 지질학과 학위를 땄다. 얼마 동안을 스웨덴 국외에서 연구를 계속했으나 귀국하자 스웨덴 광산 대학의 특별 보좌역으로 임명되었고 얼마 안 가서 일류 야금 학자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1719년에는 발명을 통해 국가에 공헌했다는 공적으로 작위를 받아 이름을 바꾸어 스웨덴보르그 남작이 되었다. 다음에는 스웨덴 상원의원이 되었으며 경제 방면의 권위자로서 여기에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었다. 다시 파리로 가서 2년 동안 해부학을 수업함으로써 그의 학문적 분야를 더욱 넓혀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천거되었다.

이처럼 다망한 사회적, 문화적 활동을 계속하는 가운데, 그 다방면에 걸친 전문 분야에서 각기 대작인 저서를 내 놓았다. 그의 많은 저서의 내용을 분석한 20세기 학자들은, 스웨덴보르그는 과학자로서 시대를 훨씬 앞지른 곳을 걸어가고 있었다고 말한다. 비엔나의 어느 대학교수는 1910년에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스웨덴보르그의 시대에 공통된 결점, 오류, 불완전한 증명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개념이나 미래를 멀리 예견한 그의 사고방식은 스웨덴보르그의 정신적 특성을 형성한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소방식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는 것이 현대 과학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예컨대 인체의 임파선이나 뇌의 기능에 관한 그의 추론은 현대 과학에 의해서 비로소 알려진 학설과 매우 공통된 점이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이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는 이유는 해부학 관계의 저작을 가명으로 발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비판에 관한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만일에 그가 자기의 연구 및 고찰한 바를 모조리 발표했더라면, 당장에 논란의 소용돌이를 불러일으켰을 것이 틀림없다. 1740년대에 이미 그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논문을 발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과학의 영역을 훨씬 벗어난 것이었음은 확실했다. 그는 몇 가지 중요한 연구의 공표를 망설였다. 그 가운데에는 뇌, 감각기관, 생식기관에 관한 연구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심리학에 관한 이론은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출판되지 않았다. 아마 스웨덴보르그는 그러한 혁명적인 학설을 동료 학자에게 귀뜸조차 안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래의 학설을 초월한 인식방법을 동료들이 따라오지 못할  뿐 아니라 공감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영혼을 연구한다는 유일한 목적으로 이 해부를 실시했다. 이 작업이 해부학 또는 의학의 분야에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이 나는 만족스럽겠다. 하지만 만약에 영혼의 연구에 어떠한 광명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나로서는 더욱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약 10년 동안에 걸쳐 스웨덴보르그는 자기의 연구 자료로서 자신이 꾼 꿈을 기록했다. 처음으로 해부를 하려고 집도했을 때 그는 정신을 잃고 깊은 혼수상태로 빠졌는데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믿었다. 1744년에는 꿈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는데 “그대는 약속한 바를 수행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1745년 4월에는 사람의 환영을 보고 자기의 사명을 역력히 깨달았다.

“그 사람의 그림자는 말하였다. 자기는 우주의 지배자요 만물의 창조주, 구세주인 하나님이라고. 그리고 성서의 영적인 취지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나를 선택했다. 하나님은 이 문제에 대해서 글을 나에게 쓰라고 하셨다........ . 이윽고 그날 밤 영의 세계가 뚜렷하게 내 앞에 전개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생명에 관한 모든 상황에 대해서 인식할 수가 있었다. 그 날부터 나는 현세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영적인 것에 모든 노력을 바치기로 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을 때, 스웨덴보르그는 57세였다. 이후 84세로 죽음에 이르기  까지 그는 저작 활동의 전부를 종교 관계의 주제에다 쏟았다. 그의 성서의 해설 전부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자동필기로 쓰여 진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육체가 멸망한 뒤에도 영혼은 생존한다는 현상을 구명한 결과 저승을 가끔 방문하게 되었다. 정령계란 사자(死者)의 영혼이 영계 혹은 지옥계로 가기 위해 대기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가 오랜 세월을 두고 쌓아올린 종교적 신념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리라고 그가 바라던 “뉴 예루살렘”의 관념이라는 것은, 프로테스탄트, 카토릭을 불문코 종래의 그리스도교의 교의와는 극단적으로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와 같은 시대 사람들은 그를 이교도라고 보기보다는 미친 사람이 아닌가 라고 의심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뛰어난 정신과 인품에 다른 의심을 품을 수가 없었다.
      
삼위일체 설을 부정하는 스웨덴보르그의 대담한 종교 이론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또한 영계에서 독일의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1483-1546)”를 만나 신앙에 의해서만 구제를 받을 수 있다는 루터의 교리에는 승복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한다. 스웨덴보르그의 설에 의하면, 인간이 구제 받기 위해서는 선행을 필요로 하며, 악을 회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사자(死者)의 영이 지옥으로 가는 것은 신(神)의 재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죄로 더럽혀진 영혼 스스로가 자신의 뜻으로 그곳에 간다는 설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구원이 되었다. 영계에서도 결혼할 수 있고 이승에서 배우자의 선택을 잘못한 자는 저승에 가서 새로이 배우자를 고를 수가 있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한 사람들도 많다.

생애 최고의 저작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탈고했을 때 스웨덴보르그는 82세의 고령이었으나, 암스테르담의 인쇄업자에게 넘겨주기 위해서 네델란드까지 여행할만한 여력이 있었다. 더구나 그의 가장 충실한 신봉자들을 만나기 위하여 영국 런던에 여정을 연장하는 정력을 보였다. 그는 조국인 스웨덴을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런던에서 죽는다는 것을 예언하고 있었다.

1771년 크리스마스가 가까왔을 때 스웨덴보르그는 중풍으로 쓰러져 의식불명이 되었다. 의식을 회복했을 때 그는 착한 영혼들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오랜 세월동안 교회에는 간 적이 없었지만 스웨덴인 목사가 방문하는 것을 거절은 하지 않았다. 목사가 그의 저작물 가운데 그 진실성을 부정할 것은 없느냐고 묻자 스웨덴보르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 앉더니 격하고 열렬한 말투로 말했다.

“당신의 눈앞에 내가 있는 것이 진실인 것처럼, 내가 쓴 것은 모든 것이 진실이오. 허락한다면 더 할말이 있소. 당신이 저승으로 들어올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터이니. 그 때는 좀더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1772년 3월 29일 스웨덴보르그는 죽었다. 유해는 런던의 스웨덴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1908년에 스웨덴 정부는 순양함을 영국으로 파견하여 그 유해를 모국으로 맞아들여 우프살라 대성당에 안장했다. 1910년 구스타프 5세의 후원으로 스웨덴보르그의 국제회의가 영국에서 개최되어 각국 학계인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이 스웨덴의 위대한 철학자의 영예를 찬양했다.

그의 교리를 신봉하는 뉴 예루살렘 교파에 속하는 교도는 스웨덴, 기타의 나라에서 실제로 활동하는 자만 꼽아도 3,000명을 웃돈다고 한다. 저 미국의 삼중고의 여성 헬렌 켈러는 이 교리의 열렬한 대변자의 한 사람으로 그의 저서 “나의 신앙”에서 스웨덴보르그 주의에서 비상한 영감과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눈, 귀, 입의 삼중고의 세계에서 스웨덴의 위대한 예언자의 가르침을 궁리한 그녀는 이렇게 경고했다.

“우리들의 문명은 스웨덴보르그와 같은 철학자의 교리, 세계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선견지명에 무관심하다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천사들이 그의 교사요 인도자였다. 그는 그의 영혼을 천상에 머물게 했다. 그는 끝없는 하나님의 섭리를, 영원한 생명의 가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하늘 나라를 원을 그리는 별들의 길을 걷도록 허락 받았다.” 이 여성의 위대한 처세훈에 어떠한 시사를 던져 준 인간 스웨덴보르그를 우리는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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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계로 가는 사자(死者)의 길
  
              영계와 이승은 동전의 안팎이다.

나는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가 없는 이 수기(手記)를 써 내려가기 전에, 우리들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이야기 두어 가지를 전제 삼아 소개하기로 한다.

기가르트라고 하는 이름의 이 사나이는 17xx년 어느 날 암스테르담에 있는 시장 안에서 부산하게 일을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의 중매인이 없으므로 장터의 소란과 법석쯤은 매일의 일과여서 예사로 여기는 터였다. 그는 이 틈바구니에서 큰 소리로 외치며 손을 들어 시장 특유의 손짓을 하며 다른 중매인과 거래하고 있었다.

삥 둘러 서있는 중매인들 가운데 바로 마주 보이는 건너편 중매인이 꼽는 손짓에 따라서 그도 손가락을 꼽으려는 순간이었다. 상대하던 중매인의 손은 말할 것도 없고 전체의 광경을 그의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졌을 뿐 아니라, 술렁거리던 시장의 소음도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그의 놀라움은 어떠했으랴? 그러나 그의 놀라움도 그 다음에 펼쳐진 광경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시장이 통째로 사라져 버린 그의 시야에는 다음과 같은 광경이 나타났다고 그는 말한다. “그렇지요. 온통 시뻘건 광채였지요. 그것이 눈앞에 가득히 피어올랐어요. 그런데 다음 순간에 그 빨간 놈이 .......... .” 말문을 닫는 그는 슬픔을 못 이겨서 흐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가르트는 그 시뻘건 빛깔 너머로 바다가 펼쳐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차츰 모습을 드러낸 그 바다에는 이제 막 바다 밑으로 가라앉으려는 난파선이 보였으며, 그 배에는 몇 만 명을 헤아리는 많은 사람들이 매달려 최후의 안간힘을 다하여 바둥거리고 있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 바로 그것이지요. 몇 만 명을 헤아리는 그 많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얼굴이 보이질 않아 도무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죠. 다만 우리 집 아들놈은 겨우 일곱 살밖에 안되었습니다만, 이 녀석의 얼굴만은 또렷이 보였고 그 얼굴은 슬픔에 젖어 나에게 구조를 애원하고 있었지요...........  .”          

가가르트의 장남이 바다에서 익사한 것은 그가 시장 안에서 이 환영(幻影)------ 필자에게는 결코 이것이 환영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아직 여기서는 일반 사람들의 생각을 좇아 환영이라고 말하여 둔다.------을 본 바로 그 시간이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이렇다.
약 10년 전에 영국의 농촌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직도 젊디젊은 청년이 죽었다. 부모는 물론 마을 사람들도 한창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를 가엾게 여겼다. 이틀 후 그의 시체는 마을 묘지에 묻혔다. 그런데 장사를 치른 뒤 사흘이 지나자 젊은이를 잃은 어머니는 남편과 마을 사람들에게 터무니없이 놀라운 일을 알렸다. 어머니는 미친 듯이 이렇게 외쳤다.

“내 아들이 살아있어! 이제 막 되살아나고 있어. 무덤을 파헤쳐 구해 내야 해요!” 남편과 마을 사람들은 아들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어머니가 실성해서 발광하는 것이려니 생각했지만, 그래도 어머님의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무덤을 파기로 작정했다. 막상 무덤을 파헤치자 사람들은 놀라움에 몸을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눈에는 파헤쳐진 무덤 속에서 어머니의 말대로 이제 막 되살아나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아직 그 젊은이의 모습에는 살아있는 인간의 의식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죽음의 심연, 그 어둠 속에서 차츰 소생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젊은이의 얼굴에 감도는 생기만으로도 분명히 알 수가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가장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일 것이다.
------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 아들의 소생을 알았을 것일까? -----

여기서 소개한 두 가지 예는 흔히 있는 이야기이므로 세상 사람들도 이러한 이야기의 하나 둘쯤은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이 지니고 있는 참다운 뜻을 이해하는 사람은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한, 인류 역사상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내가 앞에서 든 예는 모두가 인간이 죽은 뒤의 세계와 이승이라는 두 세계가 접촉되는 경계 상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나는 이러한 사건이 지니고 있는 참된 뜻을 설명함과 더불어 내가 어떻게 해서 영(靈)의 세계, 사후의 세계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는가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의문을 풀어주고자 한다.

기가르트는 어떻게 해서 난파선에 매달려 구조를 애원하는 아들의 모습을 느닷없이 보게 되었는가? 영국의 어느 마을에 사는 어머니는 어찌하여 죽음의 수령에서 아들이 되살아나고 있음을 알았을까?

이 의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알아둘 일이 있다. 아직 영계(靈界), 즉 사후 세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지만 , 영계에 있는 영들은 상념(想念)의 교류를 자유자제로 하고 있다.
상념의 교류란 어떤 영이 다른 영에 대하여 자기의 생각과 느낀 바를 알린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두 영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또 벽이나 장애물이 있건 없건 그런 것에는 아랑곳없이 거침없이 행하고 있는 것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이것은 영과 영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영과 육체를 갖고 있는 인간 사이에서는 행하여 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영과 영계의 존재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죽음의 통지라든가, 기가르트나 영국의 한 마을의 어머니의 경우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기가르트나 영국의 어머니의 경우, 그리고 인간이 죽음의 통지를 받는 경우는 그 모두가 죽어가는 사자의 영이 상대할 수 있는 인간에게 상년의 교류로써 알려주는 것이다”라고

여기서 우리들은 큰 의문을 품게 된다. 그것은 영들끼리의 상념 교류가 어찌하여 영과 인간의 사이에서도 행해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이렇다.

“기가르트나 영국의 어느 어머니는 실로 죽어 있었던 것이다. 죽어서 영이 되어 있었다..........  .”

기가르트의 경우나, 영국의 어머니의 경우도 사실을 말한다면 육체를 지닌 인간이 아니라 죽어서 영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기가르트가 난파선에서 아들의 모습을 본다거나, 어머니가 아들의 소생을 알게 된 순간에는 두 사람 다같이 죽어서 영으로 되어 있었던 까닭에 자식들의 영으로부터 통지를 받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아들의 영들은 가장 친한 기가르트나 어머니의 육체에 깃든 영에 대하여 상념의 상통(想通)을 구하였으며, 기가르트나 어머니는 그 순간 영의 세계에 눈뜨면서 육체의 인간은 순간적인 죽음을 경험했던 것이다.  
나는 한 가지 더 거론하고 나서 “죽음의 기술(技術)” “죽을 수 있는 기술”에 대한 설명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 어쩐지 등 뒤에 사람의 기척을 느꼈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은 시선을 느끼고 뒤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다만 돌아다 본 공간에서는 평소와는 다른 그 무엇인가가 느껴져서 잠시 눈여겨보았다 ------

이러한 경험은 누구나가 겪었을 것으로 안다. 너무나 순간적이고 막연한 경험이기 때문에 우리의 주의나 공포심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지만, 바로 이때 당신의 등 뒤에는 영이나 영계 혹은 사후세계가 땅거미처럼 자취 없이 다가와 모습을 드려내려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순간은 당신도 기가르트나 앞서 말한 어머니의 경우처럼 순간적으로 죽어서 영계를 어렴풋이나마 엿본 것이다.          

영계가 이승의 하늘을 날아가는 참새처럼 지상에 드리우는 순간적인 그림자는 너무나도 미미하다. 그러나 그 그림자가 아무리 엷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그곳을 날아간 참새가 실존(實存)하는 이상 영계는 이승의 뒤안길에 찰싹 붙은 채 실재(實在)하고 있다. 영계와 이승은 떼어내려고 해도 떨어질 수 없는 동전 한 닢의 안팎과 같은 것이다.

나는 스스로의 육체를 자신의 의지로 죽음의 상태로 끌어들임으로써 영의 세계로 들어가 영계 또는 영들의 소식을 알아냈다. 마치 기가르트나 영국의 어머니가 격은 그 순간처럼 말이다. 이 일을 표현하는 데 우선은 “죽음의 기술”, “죽는 기술”이라고만 말하겠다. 내가 말하는 “죽음의 기술”이나 “죽음의 상태”가 어떤 것인가는 이 수기를 읽어 나가는 동안 차츰 알게 될 것이다.

               죽음의 기술

나는 이제 어떻게 해서 영계에 들어갈 수 있었는가를 말하겠으나, 이에 앞서 나를 영의 세계로 이끌어 준 최초의 계기가 된 이상한 경험을 소개하기로 한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20여 년 전 여름날 어는 저녁때 일이다. 그 무렵 나는 볼일이 있어 고국인 스웨덴을 떠나 바다 건너 영국의 한 객사(客舍)에서 40에 접어든 몸으로 혼자 씁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거리로 나온 나는 늘 다니던 음식점에 들러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 때 가게에는 다른 손님이라곤 한 사람도 없었다. 식사를 마친 나는 좀 과식  했구나 생각하면서 포오크를 놓고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괴상한 경험은 바로 이 순간에 일어났다.

내가 식사를 하던 방안 마루바닥에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뱀과 두꺼비가 득실거리며 갑자기 땅에서 솟은 듯이 수없이 나타났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정신이 아찔했으나 잠시 후 기분 나쁜 그 생물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곳에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인물이 이상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나타났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그대여! 과식(過食)하지 말지어다” 그 인물은 이 한마디를 남기고서 홀연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가 섰던 곳에는 구름이나 안개처럼 희미한 것이 떠돌아 나 자신도 그 속에 감싸이고 말았다. 그리고는 곧 안개는 걷히고 방안에 혼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급히 숙소로 돌아갔다. 하지만 집주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에 들어박혀 방금 격은 그 기괴한 경험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처음엔 심신(心身)의 피로나  그런 류의 어떠한 변화에서 온 환각(幻覺)인가 생각했으나,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나 자신 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건강했을 뿐더러 일에 쫓기어 바쁜 나날을 보내던 때의 일인지라 심각히 생각한다든지 고민할 나위도 없이 곧 잠이 들었다. 이튿날 밤에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나리라곤 꿈에도 모르고 .......  .

이튿날 밤 내가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에 또 다시 그 괴상한 인물이 이번에는 내 침대 머리에 현신(現身)한 것이다. 나의 놀라움과 공포가 얼마나 컸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나에게 더욱더 기막힌 말이 떨어졌다.

“나는 그대를 인간 사후의 세계, 영의 세계로 동반하리라. 그대는 그곳에서 영들과 사귀고, 그 세계에서 듣고 본 바를 그대로 기록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라”

이 불가사의한 인물과는 그 뒤 이승에서는 물론 영계나 사후의 세계에서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현재로서는 그 인물이 세상에서 말하는 신(神)이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나 자신도 깨닫지 못한 마음속에 숨어 있던 영이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어떤 것이라고 집히지가 않았다. 다만 확신한 것은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인간이 죽은 뒤의 세계, 영의 세계를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이렇게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 예가 없는 이 저서를 남기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나는 죽음의 기술을 스스로의 육체에 베풀어 육체를 죽음의 상태에 둔 채 인간 사후의 세계로 들어갔다고 했다. 이제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해서 적어 보기로 한다.

우리가 죽음을 통지를 받았을 때,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사람은 영의 존재나 영계의 존재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은 원래 육체만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보다도 더 깊고 보다 본질적인 영과 그 영의 도구로서 활동하는 육체가 서로 둘로 갈라진 것처럼 보여준다. 이 점은 앞에서 말한 몇 가지 예를 보아도 누구나 곧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육체에 깃들고 있을 때의 영은 육체라는 기둥에 묶여 있으므로 해서 영이 지니고 있는 가장 영다운 성질이나 작용을 충분히 나타내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으로서의 원래의 면모를 나타낼 수 있다면 극히 한정된 경우뿐이다. 앞에서 예를 든 기가르트나 영국의 어머니처럼 “죽음과 경계를 마주칠 때”가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때 사람들은 비록 순간적이긴 하지만 죽음의 상태로 들어가 그의 영은 육체의 속박을 벗어나 영계의 문안을 넘보게 된다.

내가 영계에 들어가 영들과 사귀게 된 것은 나 스스로의 의지로 나의 영을 나 자신의 육체로부터 벗어나게 한 까닭이었다. 나는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영들과 어울린 것이 아니라, 육체를 지니지 않은 하나의 영으로서 어울린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나는 또한 육체를 가진 인간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그것은 인간에게 영들이 보이지 않듯이 영들에게는 인간의 육체가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으로서의 나를 보았고 나를 영으로서 대우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육체와 영을 분리하여 영계로 들어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나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소개함으로써 대신 하겠다.

영이 육체로부터 이탈하는 초기에는 실상 잠들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또렷하게 깨어있는 상태도 아닌 특이한 감각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때 나 스스로는 자신이 완전히 깨어 있다는 의식이 뚜렷하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이 깨어 있다는 감각은 육체적인 인간이 흔히 느끼는 그러한 각성(覺醒)이 아니라 영으로서의 감각차원에서 느끼는 각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사로운 눈과 귀, 코를 통한 외형적인 육체적 감각은 모두 잠들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가 육체로서의 인간에 속하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앞서 말한 영혼으로서의 감각은 더욱더 밝아져서 뚜렷해진다. 영으로서의 의식 속에서 느끼는 시각과 청각 더구나 촉각에 이르러서는 보통 때의 50배 1백배나 날카로워진다는 것을 나 자신이 알아차린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이러한 감각은 젼혀 육체적인 감각에서 느끼는 깨달은이 아니라는 것은 지금 설명한 그대로이다. 만약 이러할 때의 나를 누가 본다면, 나는 인간으로서의 의식을 완전히 잃고 죽은 것이라고 밖에는 보지 않을 것이다. 또한 심장의 고동이나 맥박도 멎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상태를 가리켜 나는 죽음의 상태라고 말한다. 같은 말이 되겠지만 다음에서 서술하려는 이유로 말미암아 영의 상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죽음의 상태, 즉 영의 상태에 들어가면 자기 자신의 영이 자기의 육체 속에 있는 것도 또 육체 밖에 있는 것도 그 어느 쪽도 아닌 상태에 놓여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영들의 모습이나 영계의 분위기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고 더군다나 영들의 말을 들으면 그 말을 이해 할 수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영들을 만질 수 있을 듯한 촉각을 느끼기도 한다. 이것은 영과 나 사이에 육체라고 하는 방해물이 없어진 까닭에 직접 영들과 어울리게 되었다는 증거이다.

이런 상태가 더욱 길어지면 영의 세계를 자유롭게 왕래하며 다른 영들과 마치 인간을 사귀는 것처럼 사귈 수 있게 되는데, 거기에는 또 하나의 단계가 놓여 있다.

육체를 이탈한 뒤 아직 그 육체와의 거리가 멀어지지 않는 단계에서는 나의 영은 방금 이탈한 스스로의 육체를 역력히 볼 수가 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육체에 대한 지배력을 지속한다. 그 상태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나의 영혼은 육체를 벗어나서 20-30미터 가량의 높이로 나직이 떠 있었다. 아래를 굽어보니 침대에 누워있는 나의 육체가 보였다. 내가 육체적 시각에서가 아니라 영의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이 사실 만으로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육체적 시각이었다면 지붕 밑에 있는 나의 육체나 침대는 볼 수가 없었을 게 아닌가?) 나의 육체는 그때 침대 모서리에 목덜미가 닿아 있었다. 영으로서의 나는 허공에서 생각했다.

“저래 가지고는 목이 아플 텐데, 혹시 질식이라도 하는 것이 아닐까? 몸이 틀어져 바로 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나의 영이 그렇게 생각하자 나의 육체는 몸을 틀어 목덜미를 침대 모서리에서 벗어나도록 움직였다. 이 순간의 나의 육체는 누구의 눈에도 죽은 시체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혹 누군가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죽은 시체로밖에 보이지 않던 육체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대경실색하여 심장이라도 얼어붙을 지경이었으리라.
이 상태로부터 다시금 더 나아가서 나의 영이 나의 육체를 거의 의식할 수 없게 되면 나의 영은 완전히 육체에서 이탈하여 영계의 어는 곳이나 자유롭게 드나들며, 많은 영과 자유로이 어울리게 되는 것이다.

내가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들과 사귀고 영계에서 일어나는 가지가지의 일들을 보고 듣고 해서 돌아오게 된 것도 이러한 방법으로서였다.

<역자주> 스웨덴보르그가  다른 사람의 출입을 금지하고 자기 방에 들어박힌 채 며칠씩 식사를 걸렀다는 사실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진다. 런던에 머물고 있을 때 그의 하숙집 주인은 그러한 그를 무척 수상하게 생각했음인지 그 기록이 현재에도 남아 있다. 또 그가 방에 들어 박혔던 기간은 2-3일에서 10일에 걸친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면 순서를 밟아 영계나 영들에 관한 일을 적어 나가기로 한다.
            
              죽은 사람도 생각은 한다.

영원히 잠든 사자(死者), 말하자면 인간으로서의 모든 활동을 마치고 고요히 죽음의 자리에 몸을 뉜 죽은 사람, 사자라고 하면 모든 것이 끝난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이지만, 이 사자도 실은 고요히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긴다고 한다면 누구나 나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디인지 잘 모르지만 자기를 부르는 인기척을 느꼈다. 그것이 어디에서 부르는 것인지 왜 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모르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웠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부르는 인기척은 계속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세차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그 부름은 그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는 점은 마찬가지였다.

그가 기묘한 인기척에 이끌리어 찾아간 곳은 어떤 집 방안이었다. 그는 그 자신도 까닭을 모른 채 찾아간 그 방안을 둘러보았다.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방에는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열 명쯤 모여 있었다. 다만 그가 알아차린 것은 방안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깊은 슬픔에 잠긴 표정이었다는 점이다. 침울하고 구슬픈 분위기로 꽉 차있었다. 누구한사람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것은 사람들의 목구멍에서 새어나오는 꾹 참으려는 듯한 흐느낌뿐이다.

자기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와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그는 더욱 불안하기만 했으나, 그래도 그 이상한 모임의 진상을 알아보려고 차분히 방안을 훑어보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둘러싼 한 복판에 침대 하나가 놓여 있고 거기에는 한 인간이. 즉 죽은 사람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사정을 겨우 알아차린 그는 이번에는 침착하게 다시금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가 알만한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이때서야 그는 겨우 깨달았다. 자기가 하나의 영으로서 여기에 와 있다는 것을. 그렇게 깨닫자 새로운 불안에 휩싸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나의 존재를 알아차리지나 않을까?”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방안에 바람이 스쳐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이게 웬일인가? 그때까지 전혀 느끼지 못했던 사람의 그림자가 희미하나마 방안에 떠올랐다. 다음 순간 그 그림자처럼 생긴 희미한 것은 소리도 없이 시체가 있는 침대의 머리에 다가 앉았다. 그는 놀란 나머지 어안이 벙벙하여 꼼짝도 못하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그림자처럼 엷은 침입자의 출현은 아가부터 마음에 걸렸던 한 사실에 대한 의미를 꼭 꼬집어서 얘기할 것은 못되지만 깨닫게 해 주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는 이방에 처음 들어 왔을 때부터 가느다란 숨소리가 마음에 걸려 의아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은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그는 사자(死者)의 가슴 언저리에서 새어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물론 그것만으로 의문은 풀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사자의 숨결인가하고 여겼으나 곧 자신의 터무니없는 생각을 부정했다. “사자가 호흡을 할 리가 없지 않는가?”

그러나 이것은 그의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가 처음에 생각한 바와 같이 죽은 사람의 숨결, 다시 말해서 사자의 호흡이었던 것이다. 이상한 사람의 그림자가 방안에 들어 왔을 때  그의 뇌리엔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저것이 사자의 호흡이라고 해도 별로 이상할 것은 없잖은가?”

이윽고 더욱 놀라운 사태가 일어났다. 그것은 사자의 몸에서 아까 침대 머리에 다가 앉았던 이상한 그림자와 같은 것이 문득 일어나 앉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순간에는 더욱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사자의 몸에서 빠져 나온 그림자와 먼저의 그림자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앉은 것이다. 그 모양은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얘기를 주고받는다고 밖에는 느껴지질 않았다.

잇달아 일어난 이 무서운 사태의 진전으로 그는 자신의 존재조차 잊고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그의 머릿속은 혼란하기만 하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나 약간 마음이 안정되는 듯하였다. 그는 새삼스럽게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슬픔에 잠겨있고, 두 그림자의 대화도 계속되고 있는 듯했으나, 그 순간 그가 비로소 깨닫고 놀란 일이 있으니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 두 그림자에 대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으며, 두 그림자 역시 사람들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상식을 초월한 현상이었다.

시간은 다시 흘러 두 그림자는 사라지고 사람들도 죽은 사람을 밖으로 운구(運柩)하여 옮겼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육체의 죽음은 곧 모든 것의 끝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이승, 물질계요 자연계의 광명 속에서 사물을 보고 느끼고 하는 이상은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나 스스로 영이 되어 영계에 들어가 영의 세계를 보고 오는 나로서는 그러한 생각이 얼마나 단순한 것인가를 일일이 사실을 들어 지적해 보일 수가 있다. 이제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점을 지적하기 전에 우선 인간의 죽음이 실제로 어떤 것인가에 관해서 말해보기로 한다.

앞에서도 잠깐 말한바와 같이 인간의 육체의 죽음이란 이승에서 모든 일에 대한종말을 의미한다는 것은 물질계와 자연계의 관념으로 본다면 분명히 옳은 일이다. 그러나 죽음은 영의 입장이나 영계의 측면에서 본다면 단지 육체 속에 깃 들고 있던 영, 즉 육체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도구로써 사용해온 영이 육체의 사용을 그치고, 육체를 지배한 힘을 잃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영은 그 뒤에 영계를 향해 여행길에 오른다. 죽음이란 영으로 볼 때에는 영계에 오르는 여로(旅路)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럼 이런 견해에 대한 예를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해 보기로 하자. 인간이 죽으면 그 육체에 살고 있던 영은 영계로  여행길에 오르게 되는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보통 이승의 시간으로 따진다면 보통 2-3일이란 시간이 걸린다. 죽음과 동시에 육체 속의 영은 비로소 눈을 뜨는데, 이 일을 알아차리고 영계로부터는 다른 영(안내 역할을 하는 영)이 사자의 영을 찾아온다. 이는 영끼리의 감응(感應)에 따라 일어나는 결과이다. 그리하여 영계로부터 찾아온 인도하는 영과 사자의 영은 죽은 사람의 육체가 있는 장소에서 서로의 상념(생각)의 교환을 시작한다. 이 교환에 관한 일은 따로 자세히 말하겠으나 어쨌든 이 교환은 죽은 사람의 새 영이 장차 영원한 삶을 보내기 위한 매우 중요한 준비의 한 단계를 이룬다.

앞에서 말한 사후 2-3일간은 죽은 사람의 영이 아직 육체에 남아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상념의 교환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동안에 죽은 사람의 영은 죽은 육체 속에서 조용히 소리 없이 영의 호흡을 지속하며 또한 영으로서의 생각에 잠기게 된다. “죽은 자도 생각을 한!”는 것이다. 죽은 사람의 영과 인도하는 영과의 상념의 교환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는 다음에서 말하기로 한다.        
                  
               죽은 뒤에 시작되는 영광의 대화
                      
제프는 가족의 정성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저승길로 떠났다. 슬픔에 한숨짓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그의 시체는 이승에서 모든 일을 마쳤다는 듯이 고요히 영면(永眠)하였다. 제프가 이 세상을 하직한지 몇 시간이 지났다. 제프의 둘레에는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여 눈물을 흘리는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제프 ---- 죽은 자가 된 제프는 이 때 불현듯 무엇인가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분명히 조금 전에 죽었을 것인데........ ? 사람들이 내 손을 잡고 마지막 이별이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가......... ? 그것은 꿈이었단 말인가.......... ?”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가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그곳에는 이미 사람들의 모습도, 그가 오래 살아오던 낯익은 방도 그의 눈에는 보일 까닭이 없었다. 분명히 방에는 사람들이 함께 있건만 제프는 같은 방에 있으면서도 죽은 자로서 누워 있어 이미 별개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프의 의식 속에 이러한 마음이 솟아난다는 것은 제프의 영으로서의 깨달음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제프는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는 그 육체의 눈을 뜨고 둘레에 서있는 사람들을 본다든지 입을 열어 말을 건다든지 하는 일은 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가 영으로부터의 조용한 호흡을 소리 없이 계속하고 심장도 고동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 .

이윽고 제프는 영으로서의 의식 속에서 놀라움의 소리를 지르고 숨막히는 일을 겪었다. 그는 눈앞에서 아직 희미하나마 그 때까지 보기는커녕 상상조차도 못했던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무언가 지금까지의 세계와는 전혀 별도의 세계로구나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이것이 바로 사후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그는 죽음의 수렁에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의 시야에는 희미하지만 넓은 평원처럼 보이는 경치 그리고 건너편 기슭이 보이지 않는 큰 강, 엷게 하늘에 빛나고 있는 태양 같은 것, 어쩐지 인간을 방불케 하는 생물 ----- 그러나 아지랑이처럼 희미한 모습이지만 ----- 이 자유롭게 그 세계의 하늘을 날고 있는 듯한......... 그런 불가사의한 세계가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얼마 후 제프는 몽상이라고 할까, 환상이라고 할까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는 자기 바로 앞에 그 때까지도 상상도 못했던 두 그림자가 나타나 바로 앞에 다가앉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영계로부터 인도하는 영이 나타난 것이다.

이끌어주는 영은 제프가 자기들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을 알자 제프의 얼굴을 지그시 눈 여겨 보았다. 이에 응해서 제프 안에서 눈을 뜬 영(정확히는 아직 정령(精靈)이지만)도 제프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르지만 인도하는 영에게 얼굴을 돌렸다. 영끼리의 사이에서는 얼굴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념의 교류가 되는 법이지만, 제프의 정령은 아직 그렇지가 못하다. 그래서 인도하는 영은 제프의 정령을 영으로서의 눈을 뜰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했다.

제프의 정령은 왼쪽 눈 위의 엷은 천이 천천히 벗겨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왼쪽 눈에 희미하게나마 조금씩 빛이 비쳐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치 그것은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려고 할 때에 가느다랗게 뜬 눈까풀 사이로 바깥세상을 보는 때처럼 매우 어렴풋하고 희미한 상태였다. 다음에 제프의 정령은 얼굴 전체를 뒤덮였던 부드러운 엷은 천이 차차 말려 올라가는 듯함을 느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영으로서 눈을 뜨기 시작한  제프의 정령은 그 마음속에 여지껏 육체의 인간이었을 때에는 상상도 못했던 영으로서의 상념이 한꺼번에 밀려 스며온다.

왼쪽 눈 위에서 혹은 얼굴 전체에서 차츰 말리어 걷히는 얇은 천은 인도하는 영의 손으로 말려 올려지는 것은 물론 아니며 실제로 이러한 일이 이루어질 까닭이 없다. 이것은 제프의 정령으로서의 생각이 육체의 정령으로 있었을 때의 생각에서 벗어나 영의 상념으로 옮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상징이요 표시인 것이다.

영으로서의 상념을 스스로 받아들인 제프의 정령은 이 때에 분명히 자기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에 이른다. 인도하는 영은 이 때에 제프의 정령에게 영계의 말을 전했다 “그대는 이제 정령이 되었다 지금부터는 영으로서의 영원한 삶을 영위하라” 이제는 제프의 정령도 자기를 안내하러 온 영의 말뜻을 역력히 알아듣게끔 되었다. 인도하는 영과 제프의 정령 사이에 상념의 교환이 이루어진 것은 이 때부터였다.

인도하려온 영이 물었다. “그대는 인간으로 있을 때에 어떠한 생애를 보냈는가?” 이 물음에 대하여 제프의 정령은 육체를 가진 인간 시절의 생애를 더듬어 두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족했다.

“영계에는 허다한 단체가 있다. 지금 그대에게 이를 보여 주리라” 안내를 맡은 인도하는 영은 이렇게 말하자 지금까지 제프의 영이 볼 수 없었던 영계라든가 그곳에서 영원한 삶을 보내고 있는 많은 영의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인도하는 영은 제프의 정령이 짓는 얼굴의 표정을 응시하고 조그마한 얼굴의 변화도 놓치지 않을 세라 눈여겨보고 있었다.

영계에는 뒤에 언급하겠지만 수없이 많은 단체가 있다. 영들은 빠짐없이 자기에게 가장 알맞은 단체에 소속되어 영원한 삶을 누린다. 인도하는 영이 나타나 사자의 영과 상념의 교환을 갖는 것도 실은 그 사자의 영이 인도해 주는 영과 같은 단체에 속할만한 성질을 지니고 있는가를 알고자 함에서였다.

그러므로 이 상념의 교환을 통해서 동일한 단체에 속할 성질을 지녔다고 판단이 되면 인도하는 영 스스로의 손으로 사자의 영을 영계(단 최초의 정령계이다)로 이끌어 간다. 또한 이와는 반대로 그 사자의 영이 다른 영계의 단체에 속해야 옳다고 생각되면 곧 사자의 영을 육체 속에 둔 채로 사라져 버린다. 이렇게 되면 사자의 영은 그 뒤를 이어 잇달아 나타나는 안내하는 영에 의해서 자기가 장차 소속할 만한 단체를 결정할 때까지 육체 속에 남아서 영으로서의 삶을 보내게 된다. 따라서 이 동안에는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사자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제프의 예에서 말한 “사자의 영과 인도하는 영과 상념의 교환”에 관해서 설명을 보충해 보기로 한다.

우선 우리가 첫째로 의문을 품게되는 것은 영계의 말을 익혔을 까닭이 없는 제프의 정령과 영들 사이에 이미 말을 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비밀은 다름이 아니라 영계의 말은 영들이 배워 익히지 않더라도 마음에 생각이 떠오르면 저절로 말이 되어 상대방에게 통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도하는 영이 인간으로서의 제프의 생애에 대해서 질문한 것은 인간세계에서의 생애 속에는 영이 된 제프의 성질을 알 수 있는 많은 열쇠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며, 인도하는 영은 그것을 알아야만 장차 제프의 영이 속해야 할 영계의 단체를 판단할 수 있는 참고로 삼을 수 있게 된다.

또 우리가 가장 괴상하다고 느낀 것은 앞의 예를 든 가운데 두 번 정도 나온 표상(表像), 즉 심볼이라고 생각한다. 표상이라고 하면 한 가지 일을 무엇인가 공통점을 암시하는 다른 심볼로 나타내는 것이며, 가령 붉은 색은 정열을, 흰색은 순결이라고 하듯이, 표상은 이승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또 제프의 얼굴에 덮여 있던 엷은 천을 벗기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함으로써 제프의 정령이 이미 인간계를 벗어나 그 생각이 영적인 것으로 바뀌었다고 가르쳐준 인도하는 영이 취한 표상 등은 아직도 이승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상 방법이다.

그러나 영계의 표상에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표상이 많다. 방금 든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제프의 정령에게 영계의 모습이나 영계 단체가 뚜렷이 보인 것도 인도하는 영이 표상이라는 방법으로 볼 수 있게 한 것이지만 영계의 놀랄만한 표상에 관해서는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제프의 영은 이렇게 하여 어느 영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어느 영에 의해서 인도되어 간다. 사자의 영(정령)은 영원히 삶을 보내게 될 영계로 떠나기 전에 우선 정령계로 안내되는데 그 정령계로 인도되는 과정에 대해선 다음에서 말하기로 한다.

               정령계(精靈界)로 가는 길

나는 방금 죽은 사자의 정령이 인도하는 영의 안내로 정령계로 인도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이제 또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하기로 한다.

이 무렵 인도하는 영과 정령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얘기를 나누면서 어떤 교외의 흐르는 강가를 걸어가고 있었다. 강변에는 포도밭과 보리밭  그리고 목장과 축사(畜舍) 등, 그리고 갖가지 모양을 한 집들, 게다가 언덕 위에는 섬이 보이고 많은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풍경은 이승의 것이어서 그들의 눈에는 뛸 리가 없다. 그들의 대화를 드문드문 들었다.

“그대는 저 건너편에 펼쳐진 빙원(氷原)이 보이는가? 그대가 이제부터 가려는 정령게는 저 빙원 너머 아득히 먼 저쪽 산골짜기에 있다.” 영이 말하는 빙원 같은 것은 그들이 지금 걷고 있는 이 세상의 풍경에는 전혀 없는 존재이다. 그들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같은 공간에는 없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것은 모두 이승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 즉 영계의 그것이다.

정령은 의아스럽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다. “도대체 어디에 있소? 또한 정령계라는 것도 나에게는 어떠한 곳이라는 개념조차 분명치 않소. 그대의 말은 모두가 어둠과 같아서 나로서는 하나도 없는 거나 같으니 어떻게 할 것이요?”

인도하는 영들끼리는 서로 마주 보고 빙그레 웃는 듯이 보였다.“아직은 좋소. 그대는 염려하지 마시오. 멀지 않아 그대도 우리의 말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오.”

정령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에게 빙원은 보이질 않으나 다른 것은 눈에 보입니다. 그것은 바다처럼 보이며, 그 해변엔 큰 바위가 있고 거암(巨巖)위에는 마치 사람의 그림자처럼 보이는 것이 수없이 보입니다. 또 큰 바위 옆에는 큰 고래와 같은 물고기가 있어 큰 입을 벌리고 바위를 삼키려 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

여기까지 말하자 인도하는 영은 정령의 말을 가로막고 말했다. “그대는 정령으로서의 눈이 차츰 뜨이고 있는 것이오. 그대는 그 바다라고 하는 것을 잠시 눈여겨보시오.”

그들은 여전히 강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보리밭 언저리까지 가자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강 건너편으로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다리가 놓여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마치 공중을 보이지 않는 다리라도 걸려 있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걸어간 것이다. 강 건너편으로 걸어가자 마치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을 때처럼 서슴지 않고 성 안으로 들어가 곧장 성벽을 아랑곳없이 통과하여 빠져나와서는 앞으로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영에 의해서 인도되었던 나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기로 한다. 나는 지난날 어떤 시가지를 지나 교외로 걸어가고 있었다. 도중에 나는 눈을 뜨고 있었으며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이 감각을 가진 것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눈을 뜨고 각성한 상태였다고 생각한 그 자체가 환상이었다. 나는 걷고 있는 도중에 숲이라든가 집, 강, 사람 등 늘 보던 인간계의 풍경을 모두 다 보았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은 인간계에 있는 숲이나 가옥이 아니라 영계에 속한 것이었다. 나는 실상 그때에 영에 의해서 인도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런 상태로 걸어가다가 갑자기 육체로 되돌아 왔다. 그러자 내 주위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지금까지 보고 온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깨닫고 아찔했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영의 인도를 받아 걸어가고 걷고 있던 시간이 어느 정도였는지, 혹은 얼마나 날짜가 지났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알고 있던 것은 전혀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는 것과 내가 인간계로 돌아온 순간 서 잇던 자리가 전혀 낮선 고장이었다는 두 가지 사실 뿐이었다.

인도하는 영에 의해 인도를 받는 이 새로운 정령은 멀지 않아 정령의 세계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때까지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상상 조차도 하지 못했던 정령의 세계, 즉 정령계를 직접 눈여겨보게 되는 동시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음에는 나는 영계 중에서도 가장 흥미 있는 세계, 즉 이 세상의 인간과도 관련이 깊은 세계인 정령계의 여러 가지 일을 말해 보기로 한다. (계속)                  
      
셀라맛 가준Selamat Gajun(시리우스 말로 하나가 되세요)! 셀라맛 카시자람Selamat Kasijaram(사랑과 기쁨 속에서 축복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