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 Am / 우리는 신이다 / 아름드리

1838년 독일 베르린에서 태어난 저자 페테르 에르베 Peter Erbe 의 어린
시절은 유럽의 풍부한 문화적 전통만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의 혼란과
전후 독일 상황에 큰 영향을 받아, 아주 어린 나이부터 인간의 가치를 의
문시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 그는 독일 남부의 자연 속에 파묻혀 지낼 수
있었던 축복 받은 아동기 생활의 단순성과 청소년기 뒤틀린 교육의 복잡
성간의 대비를 통해 사화 가치들의 한계성을 날카롭게 의식하게 되었고
이를 불신했다.

그가 20세에서 36세까지 무려 33개국에 달하는 나라를 여행하고 그 나라를 거주하면서, 또 60개에 달하는 직업을 갖고 수 개의 사업체를 운영해보면서 사회가 제공한 그 모든 고속도로와 우회로를 뒤졌던 것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36세 때  그는 오스트렐리아의 적도 북쪽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이곳에서 3개의 성공적인 사업체를 세우는 동안 그의 영적 추구는 엄청나게 강화되었다. 그러나 6년간 각고의 노력을 쏟았지만 자신이 추구하던 바를 얻지 못했다고 여긴 그는 자신의 추구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모든 인류의 유산이라고 부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 그 위대한 포상을 받은 이때, 즉 의도적인 노력을 포기했을 때였다. 10년 후 그는 영적으로 펼쳐져 가는 인류를 돕고 고무하기 위해 트라이어드 출판사를 세웠다. 페테르 에르베는 지금 오스트렐리아  노스 퀸스렌드의 카이른 해변가 구릉지역에서 그의 아름다운 부인과 살고 있다.

(*이 책의 내용 중에서 우리들에게 곧 닥칠 “100번째 원숭이 신드롬”을 같이 읽어봅시다)


                              100번째 원숭이 신드롬

물고기가 여러 해류들을 따라 헤엄치듯이 사람도 인류의 집단사고 양태인 지배적 사고방식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리가 환상에서 벗어나게 되는 건 이 사고방식 위로 떠올라 그것의 파도 마루로 올라설 때다. 따라서 이 사고방식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그것의 존재와 성격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우리가 참된 시각을 갖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100번째 원숭이 신드롬에 깔린 발상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이야기를 잠시 해보도록 하자. 이 이야기의 배경은 라이징선랜드에 있는 한 군도(群島)이다. 이 군도에 사는 특정 종의 원숭이들을 연구하던 과학자들은 1950년에 이 원숭이에게 고구마를 소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 낯선 식물을 찬찬히 살펴보던 머리 좋은 원숭이 한 마리가  바다모래가 잔뜩 달라붙어 있는 게 실었던지 고구마를 바다로 가져가 모래를 씻어냈다.

이 새로운 음식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지켜본 또 다른 원숭이가 금방 그 행동을 모방했고, 얼마 안 가 그 원숭이 씨족 전체가 입안에서 모래가 버석거리는 불쾌감을 맛보지 않고도 고구마를 먹을 수 있는 요령을 터득했다. 다른 섬들에 있던 동료 연구자들도 이와 똑같은 과정이 원숭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몇 년 전 영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어떤 작은 새 한 마리가 집 문 앞에 배달해 놓은 우윳병의 뚜껑을 여는 법을 찾아냈다. 병들은 새의 부리로 뚫을 수 있는 것이었기에 새는 우유 윗부분의 맛있는 크림 덩어리를 맛볼 수 있었다. 그런데 분명히 3일에서 일주일 정도밖에 안 되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스콧트랜드까지 포함하여 영국 전역에 사는 이 종의 새들 전부가 우윳병을 여는 법을 알아냈다.

두 경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깔려 있는 원리는 공명(共鳴)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보편정신, 하나의 나뿐이다. 개별 정신은 보편정신, 즉 신 혹은 나의 특정한 개별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동물의 경우에는 개개 동물을 집단정신 혹은 집단의식의 일부로 보기가 훨씬 쉽다. 한 무리의 새들이나 한 때의 물고기들이 온전히 한 덩어리라도 되는 듯 순식간에 전체가 방향을 바꾸는 모습을 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영장류에 이르러서 정신은 이미 훨씬 더 개별화된 상태가 된다. 그럼에도 한 원숭이의 정신 양태 혹은 진동수가 이웃인 자기 혈족, 자기 가족 원숭이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일단 가족 전체가 고구마를 씻어먹는 요령을 알고 나자 사고 진동수의 발산은 원숭이 가족의 숫자에 비례하여 증폭되고 늘어났다. 그러자 전체로서 그 원숭이의 진동체가 원숭이 가족과 똑같은 진동수로 공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일이 금방 일어난 건 아니었다. 눈사태가 일어나려면 관성이 붙어야 하듯이 공명도 쌓일 시간이 필요하다. 이때 원숭이종의 진동체가 진동수에 공명하도록 만들기 위해 필요한 원숭이의 수를 임계(臨界) 수치라고 한다. 그렇다면 “100번째 원숭이 신드롬”이라는 용어에서는 100이라는 숫자가 임계치를 나타내는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100이라는 수는 단지 상징성만을 갖는다. 만일 어떤 생각의 근원이 그 생각을 충분히 강열하게 발산한다면, 단일정신만으로도 충분히 하나의 사고방식을 가동시킬 수 있다. 이 에너지가 주요한 사고방식으로 발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 또한 바로 그 집단이 발산하는 사고의 강도에 좌우될 것이다. 따라서 실제 숫자가 어느 정도인지 아는 것은 이 원리를 이해하는 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 원리는 인간 종족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만일 특정한 사고 양태를 고수하는 개인들의 수가 임계 수치에 도달한다면, 이 사고 양태는 모두의 자산이 된다. 달리 말하면 한 집단의 사고 진동수가 인류를 에두르고 있는 공명체를 공명시킬 만큼 충분히 강해지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인플루엔자”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고 해보자. 그의 사고 진동은 비슷한 방식으로 그의 가족 진동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나면 그 가족은 이 진동을 친구들에게 옮기고, 아이들은 인플루엔자 진동을 학교로 가져 가게돼, 결국 오래지 않아 인플루엔자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임계치에 도달하게 된다. 그들의 사고 양태는 인플루엔자에 맞는 특정 진동수에 따라 진동한다. 인플루엔자에 대한 생각은 두려움에 근거한 진동이기에 낮은 진동수의 생각이다. 따라서 이 진동을 가장 잘 받아들일 사람들은 다음 두 집단 중 하나에 속하게 된다.

첫째로 이미 그 진동수나 그것과 가까운 진동수로 진동하고 있는 유사집단. 이 집단이 꼭 “인플루엔자”를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들의 마음이 비슷한 진동수인 접촉성 같은 가치들에 붙들려 있는 건 확실하다. 이 집단은 자신의 진동 소리에 곧바로 공명하는 소리굽쇠에 비유될 수 있다.

두 번째 집단은 낮은 진동수를 나타내는 마음들을 나타낸다. 이 마음들은 스스로 명확한 사고형태를 발산하지는 않지만 외부의 자극에 대단히 민감하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느슨해지면 무심결에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고 만다. 느슨해진 정신의 진동수가 오래지 않아 자극을 가하는 쪽의 진동수와 같아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 집단이 첫 번째 집단에 보태지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인플루엔자를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설사 재난이 일어난다 해도 어디 그것이 놀랄 일이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존재하고, 생각하는 대로 현실을 창조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자극하는 쪽의 진동이 리드미컬한 흐름으로 발산될 때 우리는 재미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집단화된 사고 진동수의 진폭이 애초에 공명을 일으킨 쪽의 진폭에 비해서 몇 배로 증폭되는 것이다. 다리를 건너 행진하는 병정들의 모습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발걸음 리듬으로 다리가 무너질 것 같은 진동이 쌓여간다. 그 걸음 진동의 진폭은 계속 똑 같지만 공명하는 진동의 진폭이 다리를 무너뜨릴 높이로까지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공명하는 생각 진동의 진폭은 예컨대 대중 히스터리로 표현되는 임계점까지 올라갈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경우이다.

아무 뚜렷한 이유도 없는데 설명하기 곤란한 불안감이나 뿌듯한 자신감을 경험해 본 적은 누구나 한두 번 이상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대개의 경우 우리는 그런 감정들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건 이따금 우리의 지금 정신상태 위로 겹쳐진 것 같은 대기 속의 “보편느낌”이다. 어떤 사고방식을 확인할 수 있을 때도 -- 사실 이것이야말로 사고방식 자체이다 -- 이런 느낌을 받지만 이 신드롬은 대부분 인식되지 않는다.

국내 또는 국제 분쟁으로 방아쇠가 당겨진 사고방식들이 좋은 예이다. 이것들은 이미 존재하는 사고방식의 결과들이면서 동시에 원인에도 작용한다. 세상 어딘가에 벌어지는 전쟁은 주식 시장과 원유가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대중 매체들은 잽싸게 이런 사건들을 보도할 것이다. 물론 대체로 실제보다 부풀려서 말이다. 그리고 나면 짧은 시간 안에 침울과 결핍의 느낌이 에테르를 가득 적시게 되니, 얼마 안 가 이 사고 방식은 좀더 저항력 있는 사람들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역으로 그들은 이미 우세해진 사고방식을 다시 강화한다. 그 결과는 전 세계적인 불황이여서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게 되니, 불황은 점점 더 아래로 떨어지는 나선을 그린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그것은 극단적인 사랑을 억누른 경우이다.
                                  
이쯤해서 사고방식 안에 또 사고방식이 있고, 그 안에 또 사고방식이 있지 않을까한 의문을 갖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렇다. 사고방식이 우리의 일상 사고와 이 사고로 인한 행동들에 전지전능한 영향을 미친다 해도 놀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그것의 존재를 의식하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차린다면, 그때 그 영향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거짓된 마음상태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우리는 별로 어렵지 않게 세상 사고방식 Global Thoughtform 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다. 형태발생론상의 공명으로도 알려진 이 세상사고방식이란 개인 차원을 넘는 인류 집단의 거짓된 자기, 다시 말해 모든 개인들 전체의 거짓된 마음, 즉 실체를 부정하는 마음 상태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좀더 파고 들어가 보면 우리는 인식을 고정하는 “핑퐁(탁구)”효과를 관찰할 수 있다. 개별 정신은 가족 집단의 공명을 키워내고, 가족집단은 다시 그 가족이 사는 지역에 맞는 특별한 공명을 키워낸다. 지역 집단의 사고방식은 나라의 공명에 반영되고, 다시 이것은 세상 사고방식에 보태진다. 이렇게 형성된 세상 사고방식은 이제 역순으로 하위 집단에 반영된다. 우리는 올가미에 완전히 결려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왜 세상이 나아지지 않는지 의아해 한다!  

셀라맛 가준! 셀라맛 카시자람! (시리우스 말로 하나가 되세요! 그리고 사랑과 기쁨 속에 축복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