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생활 下 / 선경도서

저자인 베어드 T. 스폴딩은 1894년부터 3년 반 동안 동아시아를 탐사 활동을 하면서 히말라야의 위대한 대사들과 접촉을 가진 11인의 탐사대원이었다. 책의 본명은  "The life and Teaching of master in far east, 즉 극동에 있는 대사들의 생활과 교훈" 이라 하겠다. 이 책은 본래 5권으로 출간되었다. 그 후 속편이 나와 6권이 되었다. 1-3권은 대사들과 접촉으로 경험한 기사이적이라 하겠고, 4권은 대사들의 교훈을 기록하였고, 5권은 질문한 것에 대답하는 해결편이다. 6권은 일행 중 다른 분 가운데서 한 분이 보고 경험한 사실을 열거한 기록이라 하겠다.

(*우리나라에서는 초인생활 (원본의 1-3권)/성광문화사(1978),  초인생활 (원본의 1-5권)/선경도서(1985), 그 후 초인생활 (원본의1-3권)/정신세계사(1992)에서 발행하였습니다. 여기서는 원본의 5권의 내용인 "진리는 그대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를 읽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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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는 그대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예수는 "진리는 너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사람이 우주에 편만한 저 물밀듯하는 힘의 흐름 가운데 선다면 아무도 그를 방해하거나 정지시킬 수 없는 것은 물론 한 손가락도 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라 함은 개인을 통하여 흐르는 神을 말하는 것이다. 이 태도를 갖는 자는 모든 것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며 원리, 즉 神의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흐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경우 이 힘이 정체되고 불활발(不活潑)하여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유일한 원인은 거기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이다. 이 힘이 전신(全身)에 풍성하게 흐르고는 있으나, 우리 각자의 사물에 대한 사고 방식에 따라서는 모처럼의 이 힘을 활용하는 것이 저지 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힘이 내 속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 의식적으로 그것을 활동케 할 수 있다.

예수가 아버지인 神과 일체라고 선언하였을 때 예수는 인간 전부가 예수와 같이 되고 또 실상에 있어서도 이미 그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소극적 상태에 휘말려 있다 하여도 진리는 우리를 거기에서 해방 시켜 준다. 소극적 상태를 만들어 낸 것도 나 자신이고, 생각을 바꾸므로 써 소극적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것도 나 자신이다. 예수는 이 자유를 실현하는 지혜를 알고 있었다. 개인 개인이 진리를 파악하는데 따라서 인류가 더 큰 것을 성취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인간의 가능성을 겨우 알기 시작하였다. 과학의 세계를 통하여 여러 가지 변화가 생기고 있는 중이다. 과학자가 만일 명백히 원리에 따라 일한다면 그 연구는 더 효과적으로 그리고 속히 성취될 것임을 이해하는 중에 있다.

神을 낮추는 것은 죽음이다. 神을 낮추고 떨어트리는 것 외에 사망은 없는 것이다. 예수는 神에 대하는 길을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었다. "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神을 섬기라" 神을 섬기기 위하여 우리는 외부의 상태에 꿇어 절하고 무릇 생각할 수 있는 각종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는 내 속에서 참으로 神을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서 전체의 神을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말을 하면 그 권위를 어디서 얻었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것을 알고 싶으면 유대 성서와 히브리 사전을 꺼내 놓고 자기 스스로 번역하여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창세기 제 1장에 수백만 년에 미치는 진화가 서술되어 있는데 그 중에 인류의 위대한 시기가 몇 번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최초의 가르침이 왜곡됨에 따라 인간은 神의 배려에서 소외되어 물질 중에 살고 물질을 통하여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침을 받아왔다.

그러나 神은 결코 인간을 神의  밖으로 내어 던지지는 않았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가엾은 존재로 기도와 종교형식에 따름으로 써 神에게 용납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환상은 인간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취하든지 완전한 것은 변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것은 항상 명백한 진리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체를 자신의 생각으로 어떤 형으로 만들든지 원리 자체에 있어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체를 불완전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와 같이 만들어 내어도 원리 자체는 그 때문에 조금도 개변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여러 의혹을 품고 싶다면 그렇게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진리가 침투할 것이다. 우리가 일체의 회의를 제거할 때 비로소 고향인 완전에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의 구세주는 우리 자신이라고 예수는 말하였다. 사람은 항상 "神이여 용서하여 주소서"하고 기도한다. 도대체 완성된 사랑에 무엇을 용서한다는 일이 왜 있겠는가. 완전한 원리가 무엇을 용서한다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 같은 神性에서 배려된 자신을 자신이 용서할 뿐인 것이다.

현대의 이 위대한 인류는 그리스도의 큰 훈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즉 각 개인에 내재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용인하는 시점에 서있다. 만약 우리가 완전히 그리스도 원리에 바로 향하고 파괴적인 상념이 아니고 그리스도에 적합한 속성을 나타낸다면 그 훌륭함을 다시 인식하고 나아가서는 인류 전체에 성질을 변환시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큰 일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처하여 있는 이 큰 시기는 그리스도가 다시 지배자로서 나타나는 종말의 완성시기이다. 그리스도는 항상 정복자이다. 성서 전체가 이 시기를 가르키며 그 상태를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상태라 함은, 즉 그리스도 출현, 즉 우리 모두에게 내재한 그리스도, 실상, 신아(神我)가 나타나는 일이다. 이상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순간에 이 신체는 광체(光體)가 된다. 그때 우리가 오랜 동안 깨닫지 못하였던 내재의 힘과 우주력을 이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약 150년 전에 그 정점에 달한 자연 철학자의 소위 황금시대를 통과하여 자연의 모든 경이와 자연에 투영된 완전한 神의 계획을 충분히 인식하게 이르렀다. 이 神은 동시에 또 인류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실존하고 잇는 것이다. 특히 광물의 경우에는 생명은 있으나 광물 되기 이전은 어떠한 특수존재의 영향 속에 완전히 다른 영역에 있었다.

인류 전체가 정신능력을 활용하여 활발히 지배하게 된다면, 정신에는 모든 원자 모든 혹성을 지배하여 창조해 내는 능력 전부가 실존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지고의 영지, 즉 일체의 위에 일체를 관통하여 일체의 창조주인 神의 지혜인 것이다. 인간은 일체의 참된 지배자요 또 창조자이신 神에 영구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숭엄한 神의 경륜에 배반하기 시작함으로부터 이 배반 사상이 여러 가지 벌레 아니 유독(有毒)한 것까지 만들어 내고 그것들이 기어 나와 돌아다니며 인류를 괴롭히고, 때로는 그 자신과 상당수의 인간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몇 천만이라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반역적 사념을 사용한다 해도 神의 계획 전체에는 조금의 영향도 없는 것이다. 비록 한번 보기에는 대부분의 인류에 영향이 있는 듯이 보일지 모르나 神의 전체를 완전히 조화로 보존하고 틀림없이 본래의 계획에 합하게 하고 원자의 하나이라도 배치를 그르치는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인류의 무한의 지혜는 일체의 위에 일체를 통하여 지배하고 있는 무한 神性의 집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일개의 세포에서 어떻게 하여 만물이 출생하였는가를 생각하는 것은 과연 어려운 일이겠는가. 이 무한의 지혜는 우리가 출현하기 시작한 먼 이전부터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큰 지혜를 참으로 유일의 근원으로 숭배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이유는 이렇게 하므로 비로소 우리는 神과 만물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 까닭이다.

이 진리를 절대적 진리, 절대적 사실로 하여 끝까지 이것을 붙들고 나의 것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는 자기의 존재가 본래 완전한 것이라는 중요한 점을 잘못보고 마는 것이다. 그리스도(實相)의 탄생은 거룩한 원리의 특별한 배려에 의한 것으로 그것이 전 인류, 즉 신체을 나타내는 그리스도 神我의 출현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성모 마리아가 예견한 참된 불염수태(不染受胎)인 것이다. 그래서 출생하는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인류 전체가 영원히 썩지 않는 참 그리스도이며 또한 전 인류는 본래 영생 불사 진실의 神인 것이다.

우주 창조와 생명 탄생의 신비를 관찰하여 보라. 8억 년 옛날로 소급하여 올라가 보면 당시의 인류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이 神인 원리, 즉 그리스도의 지배하고 있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이 시점에서 현대에 내려와 보아도 당시와  마찬가지로 내재의 그리스도가 정당히 통솔하고 지배하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진리가 아무리 무지와 소극적 속된 생각에 덮혀 왔다 하여도 실은 큰 문제가 아니다. 만물을 유지하고 또 유지하면서 오는 이 진리를 비록 틈 사이로 본다해도 그 순간에 상념의 흐름 전체가 그 유익한 영향을 받고 호전하는 것이다.

지구의 상공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짙은 산소 층이 있어 이것으로 태양에서 오는 생명선을 걸러(濾過), 그 양(量)을 지구상에 생존하는 생명체의 유지에 적합하도록 하는 방어벽의 역할을 하게 하는 것도 실로 이 힘인 것이다. 인류가 이 큰 사람의 활동을 이해하고 인간 하나 하나에 대하여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을 안다면 그리스도 원리는 즉시 전 인류 중에 다시 급속히 그 힘을 회복할 것이고 이로써 인류는 잘못 없이 바르게 완전히 일체를 지배하고 있는 유일 최고의 神의 지혜만이 만물의 근본이 되는 원리임을 알고 비로소 神을 조각한 우상을 숭배하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이같이 하여 일단 그 완전한 진리, 다시 말하면 보이지 않는 배후에서 만물이 활동케 하고 있는 목적이 긍극에는 동일 unit of purpose 하다는 진리를 파악한 이상 비록 때로는 감정의 회오리, 기타 부조화의 상태에 이른다 하여도 이제는 이 진리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요  도리어 항상 이 감정의 회오리를 초월하여 불변 부동에 초연히 서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평정하고 침착한 덕(德)이 확립되면 이제 다시 동요하는 일은 없게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상념은 그 신화(神化)의 힘에 잠겨 마음이 다시 평정되고 시간과 공간을 완전히 초월한 유일신의 그릇이 되어 버리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혜의 원리인 아름다운 동산 가운데 돌아온 것이다. 즉 지상 천국의 모든 美가 실존하고 계속하여 지상의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각 사람의 심중에 성립된 낙원이다.

무궁한 지혜인 神을 발견하는 것은 진직(眞直)하게 내 마음에 잠겨들게 하는 일이다. 전심을 다하여 이를 행하고 神이란 참으로 나를 말함이요, 나의 전 심신이, 즉 神인줄로 깨달으면 어떠한 문제에 대하여도 회답이 나오며 영원하고 항상 부동하는 전지(全智)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당신이 항상 평안하고 자가가, 즉 전체요. 일체를 알고 일체를 줄 수 있는 자이며 일체의 진리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 인간 하나 하나가 다 자기와 같음을 알며 그런 사람들에게 자기와 똑같은 전권을 주는 것이 기쁨이 되는 것이다.

이상의 진리를 일관하여 파악하고 이것으로써 모든 장애를 극복하여 버린 자각이 생기면 그 다음에는 하고 싶은 대로되고, 하고 싶은 대로 행하고, 모든 것을 말로써 신성을 고취하게 되고, 그때는 무엇을 생각하는데 한계를 설정하는 일이 없게된다. 이 경지에 도달하기까지에 얼마마한 시간을 요하는가는 오직 당신 자신에 달린 것이다. 진실로 말하면 순간에 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나(眞我)"인 神안에 있어 기뻐하며 모든 한계를 버리고 일순간이 그대로, 즉 영원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神이요! 나 풍성하고 충만하며 자유로운 생명의 빛, 완전한 풍요와 부, 힘 일체의 장애를 초월한 자유를 당신께 감사하나이다"

이 기도를 할 때에는 언제나 내가 완전한 신체의 궁전임을 생각하고,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몸이 神임을 알라. 자기의 신체를 볼 때에는 자기가 완전 원만한 神의 궁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의 신체는 무릇 형체를 취한 것 중에서 최초의 궁전이다. 그러므로 神이 거처할 주소가 있다면 여러분의 신체야말로 첫째요 가장 순수한 궁전이다.

그렇다면 왜 이 완전한 신전(神殿)을 사랑하고 숭배하지 않는가.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이것을 신전으로 사랑하고 숭배하므로 말미암아 이 신전이 완전한 것임에 다시 주의를 새롭게 하는 까닭이요 또 사랑하는 것, 생각하는 것, 받아들이는 것이  참 숭배이기 때문이다. 살아 계신 神의 이 궁전 같은 것은 일찌기 있는 일이 없었다. 사람의 손으로 세운 어떠한 궁전도 이 신체의 궁전에 비할만한 것은 없다. 인공 건물은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여 내고 설계하여 건립한 것으로 이 아름다운 신체 궁의 기능에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 언젠가는 낡아 무너지는 것이다.

도중(途中)의 운영을 걱정할 필요도 없이 음식을 섭취하고는 그것을 생명으로 변하게 하는 이 신체인 화학공장과 같은 활동을 하고 있는 공장은 세계 어디를 가도 없는 것이다. 또 생명체를 만들어 내는 공장, 이것으로 인류는 영원히 그 존재를 지속하는 것이다. 다시 또 행위하고, 활동하고, 말하고, 현재 과거 미래를 각자각하는 것은 물론 한 줄기 근육을 굽히는 것 또 건설하고, 축조하고, 온로(蘊 ) 속에 쌓인 것을 토하고, 번영에 원조하고, 선한 것 고상한 것 명예로운 것 숭고한 것을 주는 것 같은 일.......  .

생각하여 보라 이 신체의 궁전 외에 이 모든 가치를 줄 수 있는 신전이 있겠는가. 있다면 다만 이 영광스런 신체의 대 신전에  의해서만 있는 것이다.  그것은 최초요. 유일한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은 신전이다. 이 영광스런 신체의 모습이 神性인 형상, 완전히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이 신전 몸(體)에 神이 거주하고 또 평안함을 선택하는데 도대체 무슨 신기함이 잇겠는가.

그런데 이 같은 신체가 어찌하여 왜 이렇게 저주받았는가 심사 숙고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神을 모독하고 위선에 찬 무지로 이기적인 것만을 추구하여 참 지식을 도외시한 무리에 의하여 이 신체는 허약하고, 죄 많고, 불안전하고, 열등 비정상이고, 병들기 쉽고. 필경은 죽게 되는 것이고, 불의에 잉태하여 죄 가운데 출생하였다는 등 본래의 불멸의 인간이 잘못 된 생각으로 가지가지의 그릇된 관념을 불어넣은 까닭이다.

그러면 첫째로 먼저 과거를 조사하고 이 같은 가르침, 사상, 언어(말)가 어디서 어떻게 하여 우리를 죄, 이원론, 병, 실패, 그리고 최후에 최대의 불명예인 사망이라는 놀라운 소용돌이와 독기 속에 빠뜨리는가를 생각하여 보라. 또 이 불성실과 배신의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를 명석한 비젼을 가지고 관찰하고 또 그것이 어느 정도로 그 완전한 신체를 취한 우리 神을 모독하는데 이르게 하였는가를 조사하여 보자.

조사가 끝나고 그 실태가 명백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그것을 용서하고, 용서하므로 써 잊어버리고 우리의 생활, 생각, 행동을 모든 체험으로부터 없애 버리자. 또 용서하고 용서하여 잊고 또 잊어 잠재의식에서 그 발자취까지 없어지도록 지워버리자. 대체로 그런 것은 파동인데, 파동으로서의 세력을 자지기 위하여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방사되어 마치 사진의 경우와 같이 의식에 현상 되에 결국 그것이 참 사실인양 믿어 버리게 되고 이것이 잠재의식에 있는 상념의 잔재인 것이다.

당신 자신이나 또는 친구 기타 어떤 사람이드지 그 사람의 사진은 그 사람의 신체의 파동에 불과한 것이다. 상념이나 말이 파동을 일으켜서 잠재의식에 기록되는 것도 마찬가지로서 그것이 당신이라는 의식의 주체에 대하여도 되풀이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같은 인간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비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고, 마지막에는 숭배하는데 까지 자기가 자기를 이끌어온 과정을 잠깐 생각하여 보자.

그리고 참으로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우리는 이 같은 비 진리의 말을 들은 일도, 배운 일도 없고 따라서 또 우리의 어휘 중에 그것이 숨어 들어온 일도 없다고 가정하여 보자. 그러면 우리는 그러한 비 진리를 결코 아는 일도 없고, 받아들이는 일도 없고,  배우는 일도, 믿는 일도, 숭배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 그 같은 비 진리까지도 배워 믿을 수 있는 이상, 하물며 그것이 잠재의식에서 떠올라 온다든지 되풀리 될 때마다 그의 퇴거를 요구하여 잠재의식에서 추방하는 것도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면 이 같은 비 진리에 다만 이렇게 선언하자 "그대는 벌써 전부 용서 하여 주었으므로 내게서 완전히 떠나거라" 다음에 잠재의식에 이렇게 말하라 "그런 것쯤 전부 추방하고 일체 받지 말라. 다만 내가 말하는 진리만을 받으라" 청춘, 미, 청순, 신성, 완전, 풍요 같은 것은 현실에 그것을 보고 느끼고 듣고 알고 숭배한 다음, 이념과 말과 행동 기타의 방법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것을 현실화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므로 써  우리는 그것을 잠재의식에 인상(印象)을 주고, 잠재의식은 이 인상된 심상(心象)에서 이념으로 파동을 일으키고 그것이 현재의식에 반사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이전에 잠재의식에 심어진 비 진리보다 지금 주고 있는 진리를 되풀이하는 쪽이 잠재의식으로서는 하기 쉽다는 것을 오래지 않아 알게 될 것이다.

잠재의식에 사랑과 숭배의 마음으로서 진리를 인상(印象)시키면, 인상시킬수록 보다 강하게 그것을 반사하여 주는 것이다. 이 것이, 즉 주(主, master)가 되는 이유라는 것은 이제야 비 진리를 용서, 추방함으로 써 그것이 극복됐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당신은 비 진리를 초월한 것이다. 이미 비 진리는 용서되었으며 망각된 것이다.

자기가 말하는 것이 절대적 진리임을 확신한 다음, 자기의 신체, 자기의 잠재의식에 말하면 잠재의식은 그것을 외부에 표현하여 준다. 왜냐하면 신체에 말해주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신체를 소유하는 일도 없고, 생각한다는 것, 움직이는 것, 말하는 것, 느끼는 것, 보는 것, 듣는 것, 숨쉬는 것 등 산다는 것은 결코 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음 세계에 대한 최대의 특권은 모든 것이 본질에 있어 같으며 또 자기의 힘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그들은 나와 같이 같은 힘을 가지며 자기와 같이 실상(實相)에 있어서는 그 힘을 상실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와 같이 그들도 이 힘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한 일이 있는지도 모르나 힘 자체는 결코 그것에 의하여 변화하지도 않으며 감소된 적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쪽이 변화하여 바른 생각을 하고, 바른 말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하게되면 이 힘이 체내에 흐르게 되고 그 신기한 반응이 즉시 느껴지기 때문이다. 청춘이란 이상의 것을 완전히 하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제까지 자기의 상념의 힘을 한정하여 온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 서인가 자기를 가두고 있던 그 껍질을 깨뜨려 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이미 자유의 몸인 것이다. 참으로 "진리를 알라. 그러면 진리가 그대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질    의    응   답

문 : 당신은 인도에 있을 때 당신의 저서에 기재될 사실을 신체적으로 체험하였다는 것이 사실인가?
답 : 우리들에게는 영체대로의 이동은 우리 자력으로는 전혀 할 수 없으며, 보통은 현재의 알려져 있는 물리적인 방법 이외의 방법으로 이동한 일은 없다. 체험으로서는 사실이다.

문 : 어디에서든지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것을 안다면 왜 그 같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하여 일부러 인도까지 갔는가?
답. : 우리는 그 목적으로 인도에 간 것은 아니다.

문 : 당신은 신체로 이동하였는가. 그렇지 않으면 영체로 이동하였는가?  
답 : 나는 영체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새 신체 그대로 이동한 일은 여러번  있었다. 어떻게 하여 그러한 일이 일어낫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일어 낫다는 사실은 또 할 수 있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결국 그것은 어떤 바른 방법으로 의하여 지는가에 불과한 것이다.

문 : 용서가 부족하면 사랑의 힘이 한정되어 버리는가?
답 : 사랑이나 용서나 원리에는 한도가 없다. 우리는 모든 최악의 상태에 대하여, 모든 방향에 대하여 사랑과 용서의 원리를 사용할 수가 있다. 악한상태 같은 것을 추방하고 원리에 돌아가는 것이다. 추방하는 것이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한 순간에 이미 원리에 돌아온 것이다.  
    
                           <사랑과 기쁨 속에 축복을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