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깨달음의 함수관계


쿤달리니 각성을 체험한 많은 사람이 별난 행동을 한다. 생각도 보통사람과 다르다. 오라 aura 나 비젼을 볼 수 있고, 몸이 이상하게 느껴지고, 이상한 소리가 들리며,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인다. 사회에는 우리의 두뇌가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도록 조정장치가 되어 있다. 쿤달리니 각성이 시작되면 조건화가 사라지고 의식의 뚜껑은 완전히 열려버린다. 이런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괴팍스럽거나 때로는 미친 것처럼 일반인들에게 비쳐진다.

쿤달리니 각성과 광증은 외관상으로 같은 증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미쳐서 웃는 사람과 친구 앞에서 웃는 사람과 사진으로 찍어보면 둘 다 똑같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둘은 다르다. 인도의 고행승, 수피(이스람의 신비주의자들 또는 고행승들로 사막을 돌아다니며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크리스천 성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신에 도취한 사람들이 의식적으로는 미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함께 두고 비교해 보면 사실은 의식이 맑게 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람의 내부의식은 완전히 빛나며 조화로울 것이다.

      큰 오해

수세기 동안, 신비가들은 스스로는 황홀경을 체험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해를 받았다. 소크라테스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했기 때문에 독배를 마셨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가르침이 오해를 받아 십자가형을 받았다. 수피 성자인 알 할라지 Al-Hallaji 는 대중 앞에서 용감한 진리를 외쳤기 때문에 피부를 벗기는 사형에 처해졌고 잔 다르크와 살렘의 마녀들은 화형에 처해졌다. 이 모든 사람들은 내적 체험에서 비롯되는 비젼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수난을 받은 것이다. 이해 부족으로 인해 비교 교의들이 대중들로부터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먼 과거의 일이다.

우리들은 야만적인 잔인성과 거리가 먼, 보다 개화된 시대에 살고 있으나 전쟁과 가난은 광증과 마찬가지로 여전하다. 사회적 기준에서 볼 때 미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나을 때까지 격리된다. 그러나 미친 증세의 카테고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들이 우리를 포함한 다수 대중들과 다르게 행동한다 해서 미쳤다고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우리의 제한된 감각기관으로 인식한 피상적인 외관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 자신의 깊은 무의식적 두려움 때문일까?

정신병으로 입원해 있는 서구인 중에는 동양적 시각에서 볼 때  높은 영적 체험을 한 사람도 있다. 따라서 지금은 과학이 분열되고 미친 의식과 깨달음의 의식과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믿을 만한 방식에 의해 밝혀야 할 때이다.

     동서양 영적 체험

영적 체험의 지식은 서구에선 사라졌다. 지난 몇 세기 동안 불행히도 쿤달리니가 각성된 많은 사람들이 정신병원에 보내져 약물요법, 전기충격 용법이나 다른 부적절한 방법으로 치료받았다. 과학자들과 의사들은 이 각성이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보았고 가까운 가족조차도 이 각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처방하지도 못했다. 이것은 지난 200년 동안 서구에서 위대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이다. 설사 각성된 사람이 있다해도 정신병원에 보내졌고 그 외는 자신의 운명을 피해 버렸다.

인도에서는 상황은 젼혀 다르다. 그곳에서는 비정상적인 증상을 표현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보이고 또 이상한 꿈을 이야기하면 마음을 넘어선 어떤 상태를 체험하는 것으로 본다. 힌두 신앙은 의식은 완성된 자연의 식품이 아니라 진화하는 것이며, 일상의식과 깨달음 사이의 전이 시기에 위기가 발생한다는 것을 믿는다. 따라서 이상한 증상이 보이면 그 사람은 위기를 겪고 있으며 의식이 진화하는 과정에 있다고 믿는다. 만일 어린애의 전 인격이 신에 헌신하고 마음을 넘어선 체험을 하면 그의 가족이 정화되고 그 아이는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다.                    

           영적인 각성인가. 광증인가

영적인 각성 과정은 대개 사고나 장애 없이 일어나지만 채내의 막힌 곳과 불순물이 신경정신적인 현상과 유사한 증상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쿤달리니의 상승과 병리현상의 차이점을 신중히 진찰해야 한다. 아무리 증상이 엇비슷하다 해도 심리, 정신적 현상과 정신병을 구별하는 것은 쉽다. 혼란으로부터 초연해진 사람은 결코 정신병을 앓지 않는다. 개인적 생활에서 죽음, 파산, 감정의 파탄 등의 문제를 겪고 있다면 정신질환적인 행동이 일어날 수 있다. 환상이 나타나고 심리적 욕구가 심령 에너지의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반면 혼란, 걱정, 감정의 격동이 없으면 심리적인 질병은 생기지 않는다. 말일 개인적, 사회적인 뚜렷한 어려움이 없는데도 이상한 초감각적 경험을 하고 있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자명하다. 미친 사람은 경험이 지속적이지 않고 일정하지도 않으며 그의 자각력은 매우 둔화되어 있다. 외적으로는 무질서하며 내적으로는 장님이 되어 있다.        
반면 각성된 사람의 자각력은 변함없이 일정하다. 의식이 각성된 사람은 정확한 판단과 판별을 할 수 있고, 미친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광증과 영적인 각성은 둘 다 컨트롤 부족으로 규정 지을 수 있지만 영적으로 각성된 사람은 고양된 의식에 의해 안내되고, 미친 사람은 그렇지 않다.

초감각적인 체험이 일어나면 깨달음과 광증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과 상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승은 뇌가 퇴화하는지 아니면 초월적인 수준으로 진화하는지를 판단해준다. 두뇌에 손상이 있을 경우에는 치료를 받으면 된다. 그러나 증상이 영적인 것이라면 그 사람은 입문을 받고 행동이 교정될 수 있는 수련을 해야한다. 그에게는 잘 맞지 않는 결혼이나 사회적 역할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대신 스승이나 가르침으로 인도되어야 한다. 만일 각성에 대해서도 가이드나 도움이 없으면 정신병원이나 감옥에 가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의 행동 양상에 대한 과학적 시야가 넓어지고 있고 심리적이고 육체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영적 열망에서 비롯된 행동 양식도 있다는 것이 발견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매우 중요한 한 가지의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쿤달리니 각성은 마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과정이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심리 행동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쿤달리니 탄트라/양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