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을 거부하고 신념을 지키며 살아왔던 과거..

요즘에는 변절 혹은 전향한 386이라는 말도 나오듯이
세월이 흐르면 가지지 못하고 지나친 것들에 대한 회한이 생기고
때때로 그 쪽으로 슬그머니 마음이 흘러가기도 합니다.

동지들이 변해가는 것을 볼 때에,
더구나 신자유주의의 파고 속에서
자본의 노예가 되고, 사탄의 힘에 휘둘려지는 모습을 보노라면
삶의 지향점을 어디에 두어야 할런지 헷갈리기만 합니다.

나 홀로 잘못 살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요.
더구나... 당장의 '돈'이 내 삶의 뿌리를 흔들어 놓으려
작정하고 덤벼들 적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독재를 타도하기 바란 세대들은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지만,
진리를 추구해온 일군의 사람들도 언젠가 자리를 잡게 될 날이 있을까요?

돈이나 위신 등으로 충족되는 자유에 대한 욕구와는 달리,
진리에 대한 욕구는 오로지 자기 자신이 변해가고 스스로 더 많은
자유를 느끼고 세상을 아는 것으로 보상받습니다.
내재적인 보상이라는 점이 특색인 것 같습니다.

부처는 육신을 버리고 해탈하여 육신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서는 가치가 있음을 말하면서 죽어갔고,
예수 역시 육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하늘나라의 영광을 가리키며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지상의 언어로 말하기 어려운가 봅니다.
그것은 오로지 사회의 적대와 냉대로 인정받게 되곤 했지요.




내가 한 마리의 사자였을 때,
나는 정의와 성실이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의와 성실은 대립항을 필요로 하며
결여된 상태에서 충족된 상태로 나아간다는 의미에서
선형적 시간관을 전제합니다.

그리고 사자는 자신이 믿는 바를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함으로써 소통하고자 합니다.
그 소통의 단위가 커질 수록 정의는 빛을 발합니다.
때론 일평생을 바치고, 목숨조차 바쳐가면서
정의와 성실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그 한마리의 사자들처럼,
나에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도 완성은 없었습니다.
지금의 성공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시간이 흐르면 퇴색하여 또 다른 시작이 필요하여 졌습니다.
언제나 회한을 남기고 마는
늙은 사자의 회한이 떠오릅니다..






또 세상에는 사자만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사는 방식도 있습니다.
니체는 낙타를 거쳐
사자가 되고,
다시 어린아이가 되면서
초인은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초인은 superman이 아니라 하루 하루 새롭게 오전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즐거운 사람을 뜻한다 합니다.

어린 아이는 억겁의 윤회를 반복하여
다시 또 한번 인간으로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눈 감으면 잊어버리고 눈 뜨면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지기 때문이죠.
그에게는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선형적 시간감각이 없습니다.
그는 지금 여기 속에 모든 시간이 합쳐진 비선형적 시간속에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인과의 사슬도 없으며, 죄책감이나 걱정도 없습니다.
그와 그를 둘러싼 주변의 생명장은 동시에 교류하면서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그는 진정한 실재의 나타남이며,
드러나지 않은 '나'의 정수입니다.





최고의 사냥감을 앞에 두고서도 만족할 수 없는
드높은 사자의 자존심은...
모든 것을 진리 앞에 내놓으려 합니다.
하지만 매 순간 한계에 부딪히고,
결국 사자는 한계를 통감하여....
자신을 하나의 제물로 세상 앞에 내놓습니다.


노수석이 그랬고, 전태일이 그랬고,
예수가 그랬고, 부처가 그랬습니다.
모든 것을 버린 순간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은 극복되며
바로 이 자리에서 천국이 펼쳐집니다.

심판의 날과 종말의 때는 바로 오늘 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머리를 수그려서 어린 아이가 되지 못한다면,
심판의 날은 언제 까지나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연기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로 그리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떻든간에 그 말을 믿는 수 밖에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존엄을 갖춘 사자들은 아마 다 이런 생각을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