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잊었던 기억을 되찾는 작업이다.


  또한 느낌이란 것은 체험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기가 체험했던 것은 기억으로 잠재되어 있다가, 그와 같은 것이 나타날 때 잠재되었던 기억을 자극하면서 느껴진다.  따라서 우리의 진리에 대한 이해와 공명은 사실 기억을 찾는 작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들 모두는 예전에 이미 모든 것을 알았었고, 지금은 망각상태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전에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잊었던 기억을 되찾는 작업이다.  
  우리가 새로운 정보와 체험을 얻을 때 그것은 하나의 지식으로 모아져 입력된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자료를 망각한 상태에서 다시 기억을 되찾는 과정을 걸어 나갈 때 다시 나타나는 정보들이 우리에게 큰 기쁨과 공명, 확신을 가져오는 것은 그것이 각자의 내면에서 깊이 잠자고 있던 지난날의 기억과 체험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큰 깨달음은 노력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문을 두드리는 과정은 필요하지만, 그것은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멍멍이가 노력한다고 사람이 되는 것을 보았는가?
곰이 열 바퀴 천 바퀴를 구른다고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가 神인것은, 우리가 부처인 것은 원래 우리가 신이고 부처였기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말이 가지고 있는 것은 잊었던 기억을 다시 찾기 시작하는 것을 상징한다.
      


  우물 안에서 나오라!  쳇바퀴에서 내려오라!


  우물 안 개구리가 보는 것은 손바닥만한 하늘뿐이다.
  더 큰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마음을 열고, 열린 문을 통하여 과감하게 뛰어 나가야 한다.
  우리가 들어온 것, 배워온 것에 안주(安住)하는 것은 개구리가 우물 안에서 만족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많은 정보가 직접적인 확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전달되고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교과서를 만든 이들의 생각이 모아져 전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로지 진실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진리를 꿰뚫어 알았던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나마 문제는 심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많이 다르다.  현실세계의 권력자들은 두려움을 이용하여 지배하려 하며, 지배하려는 마음 그 자체가 두려움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두려움은 또한 진실을 숨기고 거짓으로 치장하기를 잘한다.  두려움은 오로지 생존이 그 목적이기 때문이다. 생존이 제 1의 가치이기에 거짓도 필요하다면 옳은 것이 된다.

  예수와 같은, 석가모니와 같은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이 수 천 년 동안 이 지구 위에서 전달되어 왔음에도, 아직 한 혈통에서 태어난 존재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손바닥만한 지구위에서 어떤 곳에서는 남아 버려지는 음식물이 산을 이루는데, 다른 곳에서는 한 조각의 빵이 없어 눈물로 허기를 달래고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가?  
  연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간다는 것이 이 지구의 현실이다. 부모의 마음으로 가장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 않는 지도자들은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심각한 망각 속에 있는 神일 뿐이다. 예수와 같은 존재가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쳤음에도 아직까지 수 백, 수 천 만 명의 사람들이 형제들의 손에 버려지고 죽임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전 인류가 수 천 년 간 전쟁을 계속하여 왔으며 이제는 한 순간에 자멸할 수 있는 핵무기로 무장하고 서로 맞서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세상을 지배하여 온 권력자들과 엘리트들이 눈 뜬 장님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명백한 증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는 당신 스스로 지금까지 듣고 배워온 여러 가지 진실들을 다시 점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대한 선각자들의 가르침은 많이 왜곡되고 심지어는 교묘한 속임수까지 더해졌다.
  이 세상이 변하기 위해서, 더 이상 남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따라가는 일은 중단되어야 한다.  만약 가르치는 이들이 눈 뜬 장님이라면 당신은 평생을 헛되게 소모할 뿐이기 때문이다.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를 밟는 일을 기대하지 말고 당신 스스로 분별하기 시작하라!

  당신에게는 위대한 잠재력이 있으며, 당신은 잠시 망각상태에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모든 인류의 눈에 보이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 전과 후에는 어떤 세계가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큰 두려움이 인간을 사로잡는다.
  두려움에 휩싸이면 생존이 제1의 목표가 되고, 그 밖의 진실, 정의(正義), 상호존중은 그 뒤에 곧잘 숨는다.  이것이 계속되는 한 다람쥐 쳇바퀴 돌기는 끝나지 않는다.

  다람쥐가 넓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매일 거듭해서 뛰고 있었던 쳇바퀴를 벗어나는 길 뿐이다. 또한 그 문은 닫혀져 있지 않다. 쳇바퀴에는 원래 문이 있지도 않았으며, 단지 우리가 환상 속에서 문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이 매우 적은 것이며, 내가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 수 백 배, 수 천 배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호기심 가득한 눈을 가져야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착각하고 마음 문을 잠그는 것은, 멋진 옷을 입었다고 믿고 벌거벗은 채 활보하는 임금님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진리의 문은 뒤따라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몇 가지의 진실은 내가 가슴으로 느끼고, 그로부터 오는 명료성과 기쁨을 많은 분들과 함께 나누기 위한 목적에서 쓴 것이다.
  그것들과 관련하여 나를 괴롭히던 여러 가지의 의문들 때문에, 삶이 괴로웠던 시절이 있었으며, 그 답답함과 고통을 풀어버리기 위해 보따리를 쌌었고, 그렇게 떠난 여행길에서 소중하게 모아진 것이 위의 몇몇 이해인 것이다.

  나는 이것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완전한 기억을 되찾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으로 크게 또는 작게 달라질 수 있는 진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것의 줄기에 큰 변화가 있으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은 내게 큰 기쁨 속에서 나타난 것들이며, 강한 확신과 신뢰 가운데 전체적으로 점점 더 명확하게 맞추어지는 큰 그림으로 보여 진 것이기 때문이다.

  큰 기쁨을 가져다 준 것은 새롭기 때문이라기보다 희미했던, 또는 잊혀졌던 기억들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새로운 것도 큰 기쁨을 줄 수 있지만 잃었던 가장 큰 보물을 찾았을 때의 기쁨은 무엇보다도 크지 않겠는가?!

  한편 이러한 진실에 대하여 여러분이 단순히 믿거나, 당신의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스스로 체험적으로 확인하여 얻은 지식이 아니면 백가지의 지식도 한번의 체험으로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을 단지 ‘나’라는 한 사람이 오랜 시간 미로를 헤매다가 열린 문을 찾아 나와서 보게 된 빛이며, 오랜 갈증을 충만히 해소시켜 준 맑고 시원한 샘이었다고 이해하여 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여러분 스스로 그 과정을 밟아보시기 바란다. 스스로 판 샘이 아니면 언제든 바닥날 수 있는 독안의 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신이 이러한 진실들에서 기쁨과 밝음을 느낀다면 당신은 이미 충분히 준비된 분이다.  내가 30년 이상 걸어온 길을 당신은 3년, 혹은 3개월, 또는 3일 만에 지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나’의 진실이 당신에게 이해되지 않는 황당한 환상과 같이 보인다면, 그 또한 문제될 것이 없다!  산의 정상에 이르는 길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아마도 당신은 나와 다른 코스로 정상에 접근하고 있을 수 도 있으며, 그 누구도 ‘나’나 혹은 당신이 먼저 정상에 도착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이 나와 같은 의문과 문제를 가지고 살아왔거나 그러한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또한 당신의 삶에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슬픔이 있다면, ‘나’의 진실을 신중하게 점검해 보시기 바란다.  ‘나’의 경험이 좋은 참고자료가 되리라 믿어지며, 약간의 도움이 될 수도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 문제는 모든 사람이 해결해야만 될 중요한 문제이며 우리 삶의 토대가 되는 문제라고 나는 알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한  것들은 지금 이 순간 내가 확신하고 신뢰하는 진실이며, 내가 느끼는 기쁨과 확신을 지금 수준에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이다. 내가 밝히고 싶은 것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이 100% 온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 역시 아직 과정 중에 있는 神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아직 산의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모든 이가 함께 정상에 이르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나는 이 책을 쓰고 있으며, 우리 모두는 서로 분리됨이 없는 하나의 나무에 매달린 각각의 나뭇잎과 같은 존재라는 것과, 나만의 행복, 나만의 깨달음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나의 앎이기에, 미력하나마 나의 경험을 함께 나누려는 것이다.

  문은 열리기 위해 있는 것이다.
  문을 두드릴 사람은 당신과 나, 그리고 모든 인류 전체다.

  또한 문은 각자가 스스로 두드려 열어야만 한다. 뒤따라 들어갈 생각일랑 하지도 말자.
  그 문은 스스로 여는 자에게만 열리는 문이기 때문이다.

  ‘나는 제일 마지막으로 그 문을 통과하겠다.’고 말한 이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 소리가 내 가슴을 친다.



  두려움의 외투를 벗기는 것은 오로지 사랑과 참된 앎이다.


  끝으로 짚고 넘어가야할 중요한 진실이 있다.
  그것은 모든 악과 고통을 주는 범죄행위에 대하여, 분노와 보복으로 대응하지 말고 사랑과 용서로 감싸 안으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어둠-악은 오로지 빛과 사랑인 신이 자신의 앎과 체험을 확장하기 위해 스스로 창조한 하나의 거울이며 환상이기 때문인데,
  우리가 인간으로 무수히 반복하였던 生과 死의 드라마는 하나의 연극에 불과할 뿐 영원히 죽음을 알지 못하는 神-靈은 결코 죽지 아니하며, 모든 무대 위의 살인과 죽음은 체험을 위한 드라마일 뿐 그 어떤 영혼도 죽임을 당하지 않으며 죽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생이란 드라마를 연출하고 배역을 맡아 연기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죽음을 모르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神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죽음이 두려움을 줄 수 있겠는가?  자신이 누구인지 망각하였기에 우리의 삶은 극도의 두려움과 희비(喜悲)가 교차하는 처절한 드라마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벌인 모든 삶의 드라마가 모두 서로의 체험을 위한 처절한 학습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자각할 때, 우리는 모든 원망과 분노와 절망을 온전히 털어버리고 모두가 함께 서로의 역할에 대해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내게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이에 대해서는 더욱 크게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고 윤회를 반복하며 필요한 체험을 얻을 필요가 있었기에 그러한 환경을 스스로 창조하고 그 안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목적이 이 시대에 성취되었고, 이제는 망각에서 깨어나 다시 예전의 기억을 되찾을 때이다.  그러하기에 무수히 많은 천상의 천사, 대천사를 비롯하여 물질계의 형제들이 기쁨 속에서 게임의 성공적인 결말을 알려주기 위해 몰려오는 것이다.

  우리는 게임판(운동장)에서 직접 뛴 선수들이었고, 그들 모두는 관람석에서 응원하고 가이드로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지원(응원)팀이었으며, 그들과 함께 우리는 우주적 게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게 된 것이다.

  둘째로 우리가 모든 거짓과 악행에 대하여 맞서지 말고 사랑과 연민으로 감싸 안아야 하는 이유는 루시퍼로 알고 있는 어둠의 천사는 스스로 어둠의 역할을 자청하였던 빛의 대천사이기 때문이다.  루시퍼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위하여 스스로 가장 어려운 일을 짊어졌다.   자신의 본성이 원래 어둠을 알지 못하는 빛이었기 때문에 그가 어둠의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몇 배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는 그 일을 해 내었고, 그 역할에 너무나 충실하다 보니 자신이 누구였는지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고향을 잊은 사람들과 같이 항상 더욱 큰 공허와 추위 속에서 떨었고 드디어는 완전히 얼어버렸다. 이 루시퍼를 다시 빛과 사랑으로 되돌리는 것은 오로지 한 가족이며 형제인, 빛과 사랑 속에 머물러 왔던 존재들의 뜨거운 사랑과 감사의 눈물뿐이다.
  죄(罪-惡)라는 것은 환상일 뿐이며 루시퍼는 말 할 수 없이 큰 희생과 봉사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었던 것이다.  

  셋째로 우리 현실 삶에서 큰 권력과 부를 추구하는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자세히 관찰하면 알 수 있다. 이들은 무의식 가운데 생존이라는 절대적 목표를 위해 큰 권력과 부에 집착하는 것이며, 권력과 물질적 富가 자신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리라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짓과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의 첫째가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도, 두려움에 휩싸인 이들을 기쁨과 사랑, 평화로 되돌리는 것은 조건 없는 순수한 사랑과 연민의 눈빛과 마음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며, 분노와 단죄함으로 맞서는 것은 오리려 불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두려움을 놓아 보내고 사랑과 평화 속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는 두려워 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하며, 오로지 자기 자신의 안위(安危)에만 집착하는 이들은 망각의 깊은 늪에서 방황하는 어린 영혼들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끌어안을 때 그들은 스스로 깊은 잠에서 깨어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