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caremind.com 우주적 지혜

지혜는 우주적인 것이다. 지혜는 긍정(실재,positive)의 원리인 고요한 빛(still Light)에 있다. 지혜는 결코 운동하는 물질(matter in motion) 우주의 신기루를 만들어내는 두개의 부정(비실재,negation)적인 특성이 아니다. 모든 것을 안다는 것(전지)은 원인(Cause), 즉 우주의 완전한 하나의 아이디어에 대한 모든 지혜를 가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원인의 효과(Effect), 즉 창조된 것들에 대한 지혜를 의미하지 않는다. 완전한 우주적 아이디어는 단순하지만 평범한 지능을 가진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반면에 원인의 효과는 혼란스러울 정도로(bewilder) 복잡하다.


인간은 일시적인(transient) 효과(effect)를 의식으로 알(Know) 수 없다. 인간은 오로지 원인(Cause)만 의식으로 알게 된다. 인간은 효과를 단지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인간은 일출 광경의 하늘을 알 수는 없다. 단지 그가 그것의 원인을 알게 된다면 그것을 이해(comprehend)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원인에 한정된다.


모든 지혜는 존재한다. 인간은 그것을 요청한다면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지혜는 인간의 내면에 있으면서 지혜의 무소부재가 깨달아 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지혜는 두뇌에 의해 밖으로부터 획득될 수 없다. 그것은 자아의 의식으로부터 상기(recollect)되어야 한다. 점차 의식의 각성이 밝아오면서 인간의 내면에 항상 존재한 전지(all-knowing)가 점차 상기되어지고 있다.


인간은 책이나 학교에서 지혜를 얻을 수는 없다. 그런 방식으로는 단지 정보(information) 만을 얻을 수 있다. 그러한 정보는 인간의 영적 의식에 의해 인지되지 않으면 지혜가 아니다. 마치 음식물이 피의 흐름 속에서 일부가 되기 전까지는 몸을 위한 영양소(nourishment)가 아니듯이... 감각의 운동에 의해 획득된 정보는 지혜가 되기 전에 근원의 고요 속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


같은 이유로 인간은 물질의 실체로부터 지혜를 획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일시적인 물질 우주 안에는 물질의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운동하는 물질은 단지 인간을 잘못된 결론으로 이끌어 속이고 있는 일련의 환영일 뿐이다.


인간이 역동적인 효과를 다시 원인으로 되돌려 번역하는 능력을 얻기 전에는 운동하는 물질에 대한 관찰을 통해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단지 지혜의 근원인 의식의 빛을 분화(decentration)함으로써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 효과와 현혹(deception)의 이유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인간은 신뢰할 만한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인간은 단지 신뢰할 수 없는 정보만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몸에 관한 정보는 몸의 원인이나 몸과 우주의 관계에 대한 지혜를 주지는 못한다. 몸이 자아라는 가정에 기초한 몸의 탄생과 죽음의 대한 정보는 결코 몸이 자아가 아니며 자아는 불멸한다 라는 지혜에 이끌어 줄 수 없다.


또한 물질적인 몸, 화학작용, 몸의 기능에 대한 정보만으로는 몸을 치유할 수 없다. 몸은 생명을 표현하고 있으며 생명은 우주적인 것이다. 생명은 몸에 있지 않다. 생명은 영적이며 영적인 것은 부동의 고요이다. 생명은 화학작용이 아니며 물질로 된 생식세포도 아니다. 몸을 통해 영적 자아의 생명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몸은 치유하기 위해서는 불균형한 몸에 영적인 균형을 잡아주어야 한다. 빛에 대한 지혜만이 균형을 잡아줄 수 있다. 치유자의 빛과 치유 받는 자의 빛의 도움 없이 세상의 모든 정보만으로는 몸을 치유할 수 없다.


하나의 빛(One Light)으로써 나(신)는 빛(Light)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내안의 빛은 나의 창조계의 감각의 우주 속에서 감지된 빛(lights)이 아니다. 창조자로서 나는 생각한다(think). 나는 나의 하나의 빛으로부터 확장되어 나온 두개의 빛들을 통해 생각한다. 두개의 빛들은 내가 아니고 나의 생각도 내가 아니다.


나, 하나의 빛(Self, One Light) ≠ 생각, 창조 우주 속에 두개로 확장된 빛(thinking, two extended lights in Creation)


나는 나의 것을 주고 다시 가져간다. 나는 이미지 형체를 상상하는 자이다. 이미지 형체(image form)는 부수어 해체되어(tear apart) 새로 지어내어 진다. 나는 진리의 안전을 목적으로 봉사하는(serve) 사람에게 주며 내가 안전의 그물망을 상상한 것처럼 나의 요구를 마음에 새기고 내가 요구한 주의(attention)를 유지시킨다면 어떤 누구도 해(harm)를 받지 않는다. 내가 상상한대로 안위(security)와 안전(safety)이 투영되어져 안위와 안전과 안전에 대한 의식이 완전무결해진다. 물론 너는 인간적인 경험 속으로 투영된 이미지이며 그런 이미지가 변화되지 전까지는 그런 투영 속에서만 행동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내가 이런 이미지를 선택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는 지구에서 인식되는 재앙과 공포의 반대의 이미지를 선택한다. 나의 상상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신은 변덕스러운 걸까? 그렇지 않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신은 결코 지루해 하지 않는다. 따분함은 신적인 것이 아니다.


나는 마음을 생각하고 있다. 영원히 나의 변하지 않는 자아에 대하여 변하는 이미지를 생각하고 있다.  나(자아)는 변하지 않지만 나의 이미지는 생각의 두 빛들의 변화와 함께 변화한다. 모든 것은 변한다. 그 변화는 나를 형상화하고 있지만 내가 아니다.


인간은 나의 이원적인 생각의 환영에 한정되어 있다. 인간의 감각적 시력과 청각은 속박되어 있다. 나는 인간의 감각적 시각을 위해 나의 이원적인 생각으로 환영을 지어내고 있다. 감각적 시력은 인간에게 형체와 사물들에게 속박되게 한다. 반면에 마음의 의식은 내가 마음의 모든 아이디어로 형체와 많은 움직이는 사물을 엮어낸 반대편의 빛의 실들(thread)이 있는 영광의 문을 열게 한다. 마음으로 보는 것은 나의 우주의 머나먼 곳까지 분화되어 모든 형체들은 하나로 보게 한다.


보이는 눈을 통해 인간은 빛을 에너지로 충전된 물질로 본다. 그러나 물질의 에너지는 나의 분리된 생각의 빛임을 감지하지 못한다. 인간의 영적인 보이지 않는 눈을 통해 나의 빛, 근원을 알게 되고 사람이 내안에, 내가 사람 안에 하나로 묶여 있음을 알게 된다.


“내안에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인 사랑의 신을 보라”


나는 누구인가? 아! 그렇다면 창조자 신은 더 부족하게 줄 수 있을까? 당신은 그의 일부분이며 그의 숨결이며 그의 생각들인데, 그의 아이들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적게 줄 수 있을까요?


진리와 당신에게 존재하는 빛이 이해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나(I)에 관한 생각들을 모아서 집으로 가져갈 시간입니다. 당신이 어디서 왔는 지 기억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여행에서 당신의 친구가 되길 원합니다. 참으로 그러합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이 여행을 즐기시길...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12-15 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