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웅 자주론단(414) ‘동지’ 영화를 보고 북으로 간 스파이「The Spy Gone North」 |
예정웅 자주론단(414) ‘동지’ 영화를 보고
북으로 간 스파이「The Spy Gone North」
-쏘련의 「리하르트 조르게」는 1944년 11월 7일 사형대에서 그 인생을 마 감하였다. 그가 사형되기 전에 일본당국은 쏘련에 수감 되여 있는 일본 스 파이 10명과 교환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쏘련의 답은《우리는 그런 사람을 모른다.》였다. 조르게는 감옥생활 중에 단 한 차례도 어느 누구로부터 영치 금이나 위안의 편지조차 받아 본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그랬다. 혁명의 세 계는 이렇게 싸늘한 냉혹함이 존재 한다고…
-그러나 그의 책임자는 겉으로 들어나는 미소 속에 동지의 죽음에 흐르 는 피눈물을 감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쏘련은 조르게를 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1964년, 즉, 조르게가 사형을 당해 죽은 지 20주년이 되는 날 그의 존재와 공로를 그때서야 대대적으로 공개하여 쏘련인민들에게 알렸다. 그 의《기념우표》가 발행되고 그의 인물 형상을 동상으로 만들어 '쏘련의 영 웅'으로 추모하였다. 그는 영원히 쏘련 인민의 심장 속에서 영생한다. (본문 중에서...)
이 시기 그는 북의 대남사업 공작조직이 당면한 어려운 자금난을 겪고 있는다는 것을 이용해 접선공작 안을 기획했는데 이것이 상부에 의해 채택되었다. 그러자 그는 곧 유능한 엘리트에서 무능하고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으로 180도 바뀌는 변장을 한다. 그는 동료들에게 돈을 빌리고 제대로 갚지 않아서 신용불량자 취급을 받기도 하였고 그의 이런 행위는 감찰에 걸리고 말아 결국 1993년 3월 그는 소령 신분으로 강제 제대하고 만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작전에 따른 연극행위였다.
박채서는 안기부 203실(해외공작실) 공작원이 되어 대북활동을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그가 참여하는 공작은《편승공작》이라 명명된 대북사업에 열의가 있는 사업가를 지원하고 거기에 편승하는 방식으로 대북활동을 한다는 것이였다. 그런 박채서의 공작 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광고 프로듀서 출신의 박기영이였다.
박채서는 먼저 박기영의 이웃집으로 이사를 간 후 박기영과의 친분 쌓기에 주력한다. 그래서 박기영이 남한 광고를 북에서 금강산 백두산 평양에서 촬영하려는 방안을 꿈꾸고 있음을 알아냈다. 박채서는 박기영과 함께 그 방안을 현실화하기 위해 자본을 물색하던 중 미진양행 운영자 정진호와 접촉한다. 박채서, 박기영, 정진호는 1995년「커뮤니케이션 아자(AZA)」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그런 상황에서 북의 지도부는 흑금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1997년 2월 박채서는 리철과 함께 남북한의 관계자들을 끌어 모아 실무회의를 가지게 된다. 남에서는 박기영 사장을 비롯한「아자」직원들, 북에서는 방종삼 총 사장을 비롯한 「금강산국제관광총회사」관계자들이 모였다.
며칠간의 회의 끝에 양측은 2월 14일 베이징 캠핀스키 호텔에서 대북광고사업 조인식을 가졌다. 이를 통해 북에서의 광고 독점사업권이 넘어오게 되었다. 당시 흑금성은 명목상으로는「대북사업」이라는 미명하에 평양을 여러 번 방문하게 된다. 흑금성이 북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직접 만났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것이 사실인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장성택을 자주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면서「흑금성」의 사업은 점차 크기가 커져갔다. 북에서 광고촬영 독점권을 얻은「흑금성」은「삼성의 애니콜」광고를 북에서 촬영하는 건도 담당하게 되였고, 북에서 TV촬영 독점권과 MBC와의 합작 사업에도 관여하게 되였다. 그때마다 사업차「흑금성」은 수차례 평양을 방문한다.
그러면서도 북으로부터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 남한 쪽 정보도 과감하게 북에 넘겨주었다. 또한 기자나 야당 정치인들과의 접선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편 첩보활동을 위한 자기관리도 철저하게 하였다. 그리하여「흑금성」의 공작활동은 김영삼 정권에서 이루어 진 반북공작사업으로 진행되였다.
1997년까지 박채서의 대북공작 사업은 성공적으로 이뤄진다.1998년 안기부는 큰 위기에 빠진다. 바로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진영의 관련자들이 북이 휴전선에 총을 쏴달라고 부탁한 총풍사건(일명 푹풍 조작사건)이 터진 것이다.
시사저널은 흑금성을 만나 취재한 기사에 따르면 흑금성은 대북활동을 하면서 북의 의중을 파악한 결과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 중 이인제를 가장 선호하고 김대중을 가장 기피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적이 낙선시키려고 하는 국가 지도자라면 역으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지도자가 아니겠느냐면서 김대중 후보 측과 접촉을 시도하여 새정치국민회의의 정동영과 천용택 의원을 만났다.
그와 접촉에서 흑금성은 여러 제보를 통해 북풍을 막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이런 접촉이 안기부에 노출되면서 흑금성은 의심을 피하고자 두 의원을 만난 이유를「해외 공작원 정보보고」문건에 적당히 보고한다. 그런데 이것이 공개되는 바람에 그의 신분이 들통이 나 흑금성은 이중간첩 누명을 쓰게되였다.
한편으론 1998년 3월에 사업관련 방북이 예정되어있던 터라 방북 이후에 기사가 나오지 않은 것을「불행 중 다행」이라 여기기도 했다. 왜냐하면 방북 후에 그런 기사가 나왔다면 흑금성은 북의 보위부에 의해 간첩죄로 체포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이대성 파일》에 흑금성의 자료가 있기 때문에 흑금성이 안기부 소속의 공작원이라는 것이 천하에 다 밝혀진 것이다.
무엇보다 공작 영화는 실질적으로 가치있는 정보를 빼오는 스릴있는 장면이 아니라 일련의 사건들을 조작하는 데에 흥미의 중점을 두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후반부로 가면서 간첩작전에 정치적 압박이 들어오고 결론도 북이 개입하는 북풍조작 사건이나 대선의 영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줄거리가 재미있다.
그렇지 않으면「흑금성」은 벌써 죽었을 지도 모른다. 영화에 대한 호불호는 좀 많이 갈린다. 호의적인 측면에선 남북의 적대감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 스릴러 같은 총 싸움 없이 이야기를 전개해 가는 긴장감 없아도 시나리오는 잘 풀어간다. 감독이 머리가 좋다는 것이 영화에서 보인다. 컴퓨터 사용은 일류급이다. 소품도 굉장히 공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판적인 측에선 두 가지 이유를 댈 수 있다. 배우들의 내면적인 깊은 연기력 결핍과 과장 엑션이 가끔 눈을 밖으로 돌리게 한다.「고난의 행군」시대적 배경에서 굶어죽은 북 인민들의 시체더미의 컴퓨터 과장은 너무하였다. 감독이 진실을 더 알았다면 그렇게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희생자들은 원로 당 간부들이 먼저 굶기 시작 한 것을 빼 먹었다. 하나의 전쟁을 치른 것 보다 더 큰 피해와 아픔이 북조선 땅을 휩쓸고 지나갔지만 그와 같은 추위와 굼주림의 고통을 겪은 인민들만이 나라를 구하고 새것을 창조해 낼 수 있으며 앞으로 전진해 나갈 수 있다. 사람들이 배가 부를때 진수성찬을 대접받는것은 고맙게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허기지고 춥고 배고픔에 지칠때 따뜻한 보리밥 한그릇을 대접받는것은 그렇게도 고마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래토록 잊혀지지않는 인간의 사랑의 마음이다. 모든 시대적 위대한 창조물은 고통을 겪은 인민들만이 만들어 낼 수 있다. 제작진은 다음의 작품은 남북합작 영화로 눈길을 돌려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통속적 고급한 멜로물로 눈물을 짜내는 남북합작영화 한편은 흥행에 100%성공한다고 장담한다. 남과 북의 일류급 배우들이 출연하고 제작비를 넉넉히 들여 시대적미감에 맞게 잘 만들면 성공할 수 있다. 관객들의 영화보는 눈높이에 맟춰 수준에 맟게 만들면 성공한다.
당시 이회창 대선후보의 외교안보 특보를 비롯하여 국회의원 3명이 배이징에서 조선과 접촉하여 준전시 상태와 같은 상황을 조성해 줄 것을 북에 요청하자고 했으며 제시 금액도 무려 1억 달러였다고 한다. 영화는 흑금성의 주장을 반영하면서도 적절히 규모를 줄인 것으로 짐작 할 수 있다.
그 이름이 박채서이다. 그는 국내에 활동하고 있는 미국 공작원과 끄나풀, 일본공작원과 끄나플에 관해서「현재 가요계에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가수도 있다」고 증언하였다. 그는「상대국 공작 정보를 수집할 때 필수적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망을 구축한다.」며「이는 공작의 기본」이라고 설명한다.
앞서 박채서씨는 청와대, 기무사령부 기밀까지 미국 정보기관에 넘기는「검은 머리 미국인」「남한 말 잘하는 일본인」들이 각계각층에 숨어있는데 개인적으로 386명까지 확인했다고 폭로하였다. 박씨는《한미합동정보대》에 3년간 근무할 당시 한국계 미국인 정보관으로부터 한국 지도층의 추악한 실상을 전해듣게 된다. 초반 갈등이 있었지만 신뢰감을 주면서 미국 정보관이 술자리에서 실상을 얘기해줬다는 것이다. 4살 때 이민을 갔던 미국 정보관은 「내 피는 조선 사람이다, 남한사람 정신 차려라!」며「남한 각계각층 저명인사 386명이 미국 공작원으로 일하고 있다, 미국이 시민권으로 포섭 되였다」고 말하였다. 박씨는 당시 우리나라와 미국 중간에서 40년 이상 미국 측에 고용돼 일한 협조관이 우리 팀에 배속돼 있었는데 정보를 많이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박씨는「예를 들어 당시 KBS본부 국제방송 일본어 강사로 나가 있는 사람이 일본문화원 강사를 겸하고 있었다.」며「오사카 방송국 국장을 퇴임하고 온 사람」이라고 일화를 소개한다. 그는「대학원 다닐 때 야간에 일본어학원에 다녔는데 그 친구와 상당히 오랫동안 접촉했다」며「나는 깜짝 놀랐다」고 말하였다.
박씨는「여의도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자기 방은 안 보여줬다」며「목이 마른데 먹을 것을 사다달라고 해서 그 친구가 밖에 나간 사이 그 방에 들어가 봤다」고 하였다. 그는 「그의 방 벽에 우리나라 정세를 분석해 놓은 메모지가 빽빽하게 붙어 있었다.」며 「그 당시 젊은 군인들의 전 정부에 대한 반응까지 세밀하게 파악해 놓고 있었다.」고 밝혔다. 박씨는「단순한 호기심에서 한 게 아니고 어떤 특정한 임무를 받고 있는 사람이 였다.」며「분석한 내용을 보면 일본어 강사가 어떻게 젊은 장교들 성향까지 분석할 수 있는가, 남한 군 장교들을 접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내용 들이었다」고 전한다. 또 미국이나 일본의 공작원 양성은 중학교, 고등학교 등 어릴 때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박씨는「일본은 중학교, 고등학교 때부터 방학 때 남한에 오고 어학연수를 다니고 대학을 남한 명문대학으로만 온다.」그 후 상사주재원이나 대사관 주재원으로 반드시 남한에 돌아온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대학, 고등학교 때 만났던 남한 친구들이 우리나라 각계 중요한 포스트에 다 들어가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박채서는 미국CIA는 중학교 때 자질 있는 학생을 엄선해서 한국이라면 한국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교육한다며 「10명 키웠으면 5~6명 정도 최종 선발하고 나머지는 대기시키거나 탈락 시킨다」고 말했다. 실제로 접해본 남한에 와있는 미국의 정보요원들, 블랙요원은 100% 남한 말을 유창하게 잘 한다」부인이 대부분 남한 여성들이다. 또「공통적으로 부인이 남한사람이고 대게 부인들이 남한에서 법적으로 직장을 가질 수 없지만 특채로 기자나 언론계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박씨는「결론적으로 우리가 일본이나 미국에 대해 아는 것 보다 그 이상으로 미국이나 일본이 우리를 더 잘 알고 있다」고 하였다.
세계의 정탐계의 력사는 지구가 탄생하면서부 생겨났을 것이다.각나라마다 능숙능란한 첩보 정보요원들을 거느리고 있다. 1차2차 세계대전을 전후에 첩보, 정보요원들은 수천 수만명이 서로 죽이거나 죽었을 것이다. 그중 이렇듯 굵직굵직한 정탐의 세계 속에,
영웅과 거인(巨人)들이 펼치는 파란만장한 위대한 삶과 행동 사이에는 영민하고 유능한, 적들마저 감쪽같이 속여 넘기는 연기력과 인간적 매력까지 겸비한 스파이들의 잰 걸음들이 항상 숨어 있다. 여기 대표적인 두 인물을 소개한다.박채서가 대북공작원으로써 활동한 사람이라면 이들은 이미 역사책으로 영화로 나와 알고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쏘련 2차대전 승리에 기여한 '리하르트 조르게'
리하르트 조르게」는 철저한 독일인으로 교육받고 성장한 사람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다른 젊은이들처럼 군대에 자원하여 자신의 고향인 러시아 군에 맞서서 용감히 싸우다가 세 손가락을 잃는 등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간다. 여기까지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용맹한 상등병「아돌프 히틀러」의 경험과 유사하다. 하지만 병원에서 만난 한 간호사가「리하르트 조르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트라우마》에다가 일종의 격세유전 (할아버지가 맑스와 엥겔스의 친구였다) 탓이었을까. 《참고 : 트라우마(trauma)란 의학용어로 외상(外傷)을 뜻하지만 심리학에서는「정신적인 외상」을 의미한다. 과거에 겪은 고통이나 정신적인 충격으로 유사한 상황 발생 시 불안한 증세를 겪는 현상을 말 한다.》 그는 공산주의자였던 간호사의 설득에 완전히 빠져들고 그 이후 자신의 일생을 공산주의자로 보내게 된다. 함부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소련으로 가서 「코민테른」에서 일했던 그가 발군의 능력을 보인 분야는 어학이었다. 독일어 외에도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까지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적국이나 기타 정보수집이 필요한 나라의 언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안다는 것은 스파이로서의 기본적인 자질을 우수하게 갖췄다는 뜻이다. 쏘련정보국 GRU (KGB의 전신)도 이 점을 주목하였다. 정보원이「내부에 있는 사람들도 속이지 못하면서 어떻게 외부에 있는 적을 속일 수 있으랴,」조세프 스탈린은 「리하르드 조르게」가 트로츠기 파벌이라는데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정보국은「리하르드 조르게」를 정보원으로 발탁돼 일본으로 파견한다. 독일 언론의 일본지국 기자의 신분으로 위장한 스파이 조르게는 독일대사관에 침투해 들어가 살다 싶이 한 전설적인 스파이 활약상은 이렇게 시작된다. 당시 독일에 구축한 쏘련의 정보망이 일망타진되면서 정보에 무척이나 목말라 했던 쏘련에게, 독일과 동맹국이던 일본은 정보의 오아시스였고 조르게는 정력적인 스파이 활동을 통해 소련의 갈증을 풀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동안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였다. 내부 파벌싸움 때문이 였다고 한다. 독일의 쏘련 침공을 날짜까지 정확하게 파악하여 전달했으나 스탈린은 그의 정보를 신뢰하지 않았고 무시했다고 한다. 대원수 였던 스탈린은 자신의 충직한 스파이보다 독일과의 불가침조약을 더 믿었던 것이다.
그 결과 전면전이 터진 것을 보고받고는「우리가 독일에게 뭘 잘못했습니까?」라고 얼뜨게 물어보는 바보가 되고 말았다.「조세프 스탈린」이 조르게를 믿지 못했던 것은 그가 「트로츠키」와「부하린」파벌 계열의 공산주의자인데다가 혈통적으로 독일인이기 때문이었다. 정보를 전달하는데 시각적 표현력은 가장 나중에 실현되지만 가장 극적으로 반대자를 설득할 수 있다.
조르게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스탈린의 무시무시한 철권통치로 대숙청이 휘몰아치는 쏘련에서 무정부주의자 트로츠키 계열이란 딱지는 곧 사형 대기장과 같았고 자신의 혈통 또한 언제 목에 밧줄이 매여질지 모를 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임무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의 적은 스탈린이 아니라 자신의 조국을 집어삼킬 나찌즘이였고 그 동맹국 일본의 군국주의였다.
시베리아 주둔 병력이 신속히 유럽전선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쏘련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2차 대전의 가장 거대한 전역(戰役)이었던 유럽동부전선에서 쏘련이 붕괴된다면 역사는 또 어디로 흘러갔을지 모른다. 처칠이 상상 했던바 「미얀마」에서 인도로 쳐들어오는 일본군은 소련령 중앙아시아까지 치고 들어간 뒤 인도로 남하해 독일군이 악수 나누는 끔찍한 상황이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 이스라엘의 전설적 스파이 엘리 코헨
모사드는 그들이 모토로 삼고 있는 구약 성경 잠언 24장 6절,「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는 성경구절 그대로 모사드는 세기의 첩보원 하나를 길러 냈다. 콧수염까지 멋지게 기른 이 이집트 출신의 유태인, 히브리어와 아랍어를 같이하는 이 유태인 스파이는 스파이들이 우글거리며 아랍계 이민들의 공동체가 구성돼 있는 남미의 아르헨티나로 보내졌고 여기서 시리아 대사관 무관 하페스를 비롯하여 본국에서 쫓겨나「권토중래」하고 있는 시리아 바트당 당원들과도 친교를 맺는다.
2015년 5월 18일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당시)에「레우벤 리블린」대통령,「베냐민 네타냐후」총리,「타미르 파르도」모사드 국장 등 이스라엘의 거물급 정치인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유는 바로「엘리 코헨」의 사망 50주년을 기념하고 그 유해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과시하는 것이었다. 모사드 국장은「이스라엘은 코헨에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를 본국에 데려와 안장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라고 힘주어 말했고 네타냐후 총리는「오늘날 많은 어린이는 물론이고 거리 이름까지 코헨가의 이름을 띠고 있다」하였다.
이스라엘은 시신이라도 돌려 달라고 했지만 상처받은 시리아 측은「너희들이 이미 훔쳐 갔잖아?」라고 일갈하며 어디론가 아무렇게나 묻어 버려 지금 시신의 행방조차 알 수 없다고 한다. 이스라엘 정부는 그의 희생 덕택에 우리가 발을 뻗고 살 수 있는 만큼 반드시 그를 모국으로 데려와 안장하겠다며「엘리 코헨」의 죽음을 애도한다.
아마 저승에서「리하르트 조르게」는「엘리 코헨」의 어깨를 두드리며「그래도 자네는 행복한 스파이 아닌가.」하고 치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래 정탐계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비신사적인 곳이다.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 나를 속여야 하고 원래의 나를 철저히 임무 속의 복속시켜 임무수행이 가능한 분야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조르게와 코헨 외에도 밤하늘에 반짝 반착 빛나는 수억의 별들처럼 수천수만 명의 스파이들이 그렇게 은밀한 업무에 뛰어들었고 허무하게 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뛰어난 성과를 거두기도 하고 자신의 임무 완수를 위해 누군가를 죽이기도 하고 심지어 돈 때문에 동지들을 숱하게 팔아넘기기도 하고 이중간첩 노릇을 하며 양쪽에서 보상을 받다가 머리 양쪽에 구멍이 나서 저승길을 가기도 하였다.
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의 정보원이 돼 누군가를 감시하고 보고하는 임무를 역시 자신도 모르게 수행하는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동독이 소멸한 뒤 동독 국민들은 동독 정보기관「슈타지」의 가공할만한 활동상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모든 활동의 비밀자료들이 거의 다 미국이 가져갔다니...
슈타지 비밀정보원의 총인원이 얼마인지는 아직도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 없다. 규명되지 않고 있다. 최소 18만9000명에 이른다는 분석이 있는가 하면 인구 6명당 1명이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보도(영국 BBC방송)도 나왔다고 하니 그 규모의 방대함과 서독에 홉수통일 된 동독인민들에게 들이닥친 충격의 크기를 누군들 짐작할 수 있을까...(끝 : 2018년9월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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