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선택의 자유는 자신의 감정들, 다시 말해 내면의 아이와의 관계에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자신의 감정들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감정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하여, 그러한 감정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진실로 내면의 아이를 존중하고,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내부로 방향을 바꿔, 감정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은 내면의 아이가 다른 누군가를 해치려고 하지 않으며, 피해자라고도 느끼지 않도록 돕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강한 감정들은 - 그것이 분노, 슬픔 혹은 두려움이든 - 언제나 외부의 어떤 것의 피해자라는 무기력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기 마련입니다. 외부의 환경이 아니라, 자신의 반응과 고통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감정의 원인이 외부 세계에 있다는 생각을 버린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게 됩니다. 전적으로 내면을 향해 방향을 바꾸어, 자기 자신에게 “좋아, 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반응이었다는 말이지. 왜 그랬는지 이유를 이해하겠어. 내가 왜 그런 식으로 느끼게 되었는지 이해하겠어. 이 점에 있어,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 자신을 지지할 거야.”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스러운 방법으로, 자신의 감정을 향해 방향을 바꾸는 것이 감정을 해방시켜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수양이 필요합니다. 악의 근원이 외부 세계에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은 “특정한 방식으로 반응하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제 누가 옳고 그런지, 무엇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해, 더 이상 논쟁을 하지 않게 되며, 외부에서 일어난, 통제할 수 없는 모든 일들을 자유롭게 놓아주게 될 것입니다. “지금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에서, 나는 이러한 감정을 체험하고 있으며, 그러한 감정을 선택한 것은 바로 나야.” 이렇게 하는 것이 책임을 지는 것이며, 바로 용기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기 수양이란 자신이 옳으며, 무기력한 피해자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 화가 나고, 오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버리게 되며, 때로는 아주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는 그 밖의 모든 피해 의식에 대한 표현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정말로, 자신을 가장 귀찮게 하는 감정들을 여러분은 종종 소중하게 여기는 성향이 있습니다.) 책임을 진다고 하는 것은 겸손한 행위입니다. 이것은 가장 어려운 순간에도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자기 수양인 것입니다. 동시에, 이처럼 내면으로 방향을 바꾸는 데에는 최고의 연민이 필요하게 됩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창조물로서, 솔직하게 여러분이 감정과 대면하고자 한다면, 그러한 감정을 부드러운 이해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네가 이번에는 분노를 선택했어, 그렇잖니? 그러면 연민은 여러분에게 “좋아, 이해할 수 있어, 그리고 용서해, 하지만 네가 내 사랑과 지지를 보다 명확하게 느끼게 되면, 다음번에는 그렇게 반응하고 싶어지지 않게 될 거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치유에 있어, 의식이 해야 하는 역할입니다. 영적인 연금술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의식은 싸우거나, 어떤 것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의식은 단지 자각으로 어둠을 에워쌀 뿐입니다. 다시 말해, 오해의 에너지를 이해로 에워쌈으로써, 일반 금속을 황금으로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의식과 사랑은 같은 것입니다. 의식적이라는 말은 어떤 것을 그대로 두고, 여러분의 사랑과 연민으로 그것을 감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대개 자신의 감정적인 문제들을 의식만으로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내가 감정을 억눌러 왔다는 것은 알고 있어. 그리고 그 이유도 알아. 내가 알고는 있지만, 그러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아.”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내면에 그러한 감정에 대한 미묘한 저항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저항에 압도당해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감정과 거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저항을 인정하겠다고 여러분이 의식적으로 선택하면, 그러한 감정에 절대로 압도당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감정과 거리를 계속 유지하는 한, 여러분은 감정과 대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감정과 싸우고 있는 것이며, 감정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여러분에게 덤벼들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감정을 바깥에 계속해서 둘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감정은 여러분의 몸속에서 통증 혹은 긴장감 혹은 우울한 느낌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울적해지거나, 자주 지치게 되는 것은 어떠한 감정을 여러분이 억누르고 있다는 명확한 신호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여러분의 의식 속으로 감정이 충분히 들어올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감정들이 거기에 존재하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몸에서 긴장감을 느끼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감정에 도달하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몸속에는 모든 감정들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위장 부위에서 통증이나,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면, 의식을 통해 그곳으로 가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물어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의 세포들이 말하게 하세요. 아니면 바로 거기에 아이가 있다고 상상하세요. 아이에게 몸속에 무슨 감정이 자리 잡고 있는지 알려달라고 요청하세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감정과 연결될 수가 있습니다. 감정 속에 갇혀 있는 에너지는 움직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러한 에너지는 해방되고 싶어 하며, 따라서 육체적인 질환이나, 스트레스 혹은 우울증이라는 증상으로 여러분의 문을 두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상들에 여러분은 정말로 마음의 문을 열고, 감정을 느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감정은 여러분이 처해 있는 지구적인 현실의 일부이지만, 감정이 여러분을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감정은 태양을 가리는 구름과도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감정을 인지하고, 그러한 감정을 의식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직관을 통해, 깨끗하고, 균형 잡힌 감정체로부터, 자신의 영혼 혹은 내적인 핵심과 접촉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사회에는 감정에 대해 많은 혼란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키우는 문제에 있어, 많은 논쟁과 혼란이 존재한다는 것에서 이러한 사실을 명백하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분명히 감정적으로 어른인 여러분보다, 훨씬 더 즉흥적입니다. 이 때문에, 어려움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행동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도덕적인 한계를 넘어선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상황을 감당할 수 없어, 혼란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아이들을 훈육해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할까요? 아이들의 감정을 통제해야 할까요, 아니면 내버려 두어야 할까요?


이이를 양육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감정을 이해하고, 그러한 감정들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이해하고, 이러한 감정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배우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도움으로, 아이는 자신들의 감정이 오해의 분출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는 이러한 이해를 통해, 자신들의 감정에 “몰입”하지 않고,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는 감정들을 자유롭게 해줄 뿐만 아니라,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도, 자신의 중심으로 다시 돌아오게 해주는 것입니다. 부모는 살아 있는 본보기가 됨으로써, 이런 식으로 아이들에게 감정을 다루는 법을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다루는데 있어, 가지게 되는 모든 의문들은 여러분 자신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나요? 여러분은 자신에게 엄한가요? 잠시 화가 나거나, 슬플 때, “괜찮아, 정신 차리고, 넘어가야지”라고 말하는 훈련을 하고 있나요? 감정을 억누르나요? 훈련하는 것이 도움이 되고, 필요하다고 느끼나요? 누가 이러한 훈련을 가르쳐주었나요? 부모였나요?


아니면, 반대로 하나요? 자신의 감정을 버리려 하지 않고, 그 속에 빠져 있나요? 또한 이러한 경우는 흔히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랫동안 자신이 외부의 어떠한 상황, 즉 가정교육, 배우자 혹은 직장환경의 피해자라고 느껴왔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내면의 분노와 연결됨으로써, 여러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들부터 아주 자유롭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분노로 인해, 이러한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길을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노에 매혹되어, 그러한 분노를 더 이상 버리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분노가 출입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치유가 아니라, 피해 의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혼자서 서 있는 것조차 정말로 힘들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 책임을 지고, 감정이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감정들이 “오해의 폭발”이 아니라,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여기게 될 때, 여러분은 그러한 감정들에 기초하여 행동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중심이 잡히지 않은 결정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동일한 형태가 감정적인 자유를 너무 많이 주었던 아이들에게도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아이들은 제멋대로 자라게 되며, 통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어린 폭군이 되며, 이렇게 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부모와 마찬가지로, 감정적인 혼란은 아이에게도 불편한 것입니다. 


요약하면, 여러분은 자신의 감정(그리고 유추하여, 아이들)을 다루는데 있어, 너무 엄하거나, 너무 느슨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약간만 더 느슨해지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쟁점들이 더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이후부터는 감정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는 집단적인 각성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감정을 억누른다는 것은 여러분의 자연스러움과 창조성, 실제로는 여러분의 영혼을 억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가슴의 속삭임보다는, 규칙에 더 신경을 쓰는, 훈련되고, 말 잘 듣는 아이들을 만들어내게 되며,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비극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반대의 극단은 어떨까요? 감정이 여러분의 삶을 인수받아, 삶을 지배하도록 감정을 정당화하는 것은 어떨까요?


여러분은 자신의 내면에서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즉 오해의 폭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여기면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지를 잘 관찰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자신이라고 동일시하는 감정들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감정들로 인해, 아주 흔하게 여러분이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무력감(“난 어쩔 수가 없어”), 통제(“내가 처리할 거야”), 분노(“그건 그들의 잘못이야”), 슬픔(“삶은 비참해”) 등등. 이러한 감정들은 모두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감정들로 인해, 계속 고수해야 할 특별한 것을 가지게 되기도 합니다.


무력감과 “피해자라는 느낌”을 가져보세요. 이러한 감정적인 패턴 속에도 이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감정적인 패턴이 여러분에게 안전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패턴으로 인해, 어떠한 의무감이나,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난 어쩔 수 없어, 그렇지?” 비록 어두운 구석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안전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한 감정과 오랫동안 동일시하거나, 하나가 되는데 따르는 위험은 자신의 참된 자유, 즉 가장 안쪽에 있는 신성한 핵심과 접촉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내면에 존재하는 분노의 감정과 분개심을 유발했던 것들이 여러분의 삶의 길에 들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젊었을 때,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으며, 그 이후에, 심지어 과거의 생들에서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감정들과 의식적으로 접촉하여, 내면에 존재하는 분노, 슬픔 혹은 엄청나게 축적되어 있는 기타 에너지들을 인지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이 되면, 자신의 감정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감정들은 외부의 사건에 대해 여러분이 반응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중심에 머물면서, 영적인 균형을 유지하며, 명료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내면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들에 대해, 여러분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면에 존재하는 분노와 같은 감정을 인식할 수가 있으며, 동시에 “이것은 어떤 사건들에 대한 내 반응이었어. 나는 이러한 반응을 이해로 감싸지만, 동시에 이러한 반응을 놓아주겠어.”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삶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올바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방식이 되어 버린 낡은 감정적인 반응들을 해소하고 나면, 아주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감정들을 억누르는 것과 그러한 감정들 속에 몰입하는 것 사이에, 미묘한 중간의 길을 찾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양쪽에서, 여러분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연금술과 일치하지 않는 견해와 이상(理想)들을 키워 왔습니다. 영적인 성장의 본질은 어떤 것도 억누르지 않는 것이지만, 이와 동시에 거기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느끼고, 이러한 반응을 선택함으로써, 그것을 치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 메시지의 요점은 여러분의 온전함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중간의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온전함에 관한 것입니다. 내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 그것들을 초월하여, 그것들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온전함은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것입니다. 온전함은 매우 허용적(allowing)이지만, 이렇게 되는 데에는 많은 훈련, 즉 용기와 정직에 대해 수양을 쌓아야 합니다


온전함을 찾는다는 것은 대개 뒤쪽에서 여러분을 고통스럽게 하는 감정의 조각들을 자유롭게 해준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감정의 조각들과 접촉하고, 책임을 지세요. 여러분을 샛길로 빠지게 하고, 내적인 자유에 이르는 길을 방해하는 무의식적인 감정의 상처들에 이끌리지 마세요. 치유를 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의식입니다. 어느 누구도 여러분의 감정들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여러분을 대신하여 회복시켜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감정들을 제거할 수 있는 외적인 도구나, 수단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힘과 결심 그리고 연민을 가지고 그러한 감정들을 인식하게 될 때, 그러한 감정들은 빛 속에서 해방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감정의 차원에서, 온전해지고, 자유롭게 되는 것은 영적인 성장에 있어, 가장 중요한 측면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보다, 더 어렵게 만들지 말라"라는 말로, 끝을 맺고자 합니다. 영적인 길은 간단한 길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그리고 내적인 명료성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특정한 지식이나, 특정한 의식(儀式)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성장을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고요한 순간, 느낌의 자리로 가세요. 이러한 느낌의 자리가 여러분의 내면이 명료해지고, 정화되는데 무엇이 필요한지 말하게 하세요. 자신의 직관을 신뢰하세요. 이 훈련을 계속하세요. 자기 자신을 믿으세요. 여러분은 자신의 삶의 주인이며, 사랑과 자유에 이르는 자신만의 독특한 길을 걸어가는 주인입니다.




[출처] 감정의 처리 (2/2) |작성자 목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