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행동 뒤에, 심지어 영성에 접근하는 태도 뒤에 숨어 있는 동기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 그리고 좋은 종교인이 되기 위해, 하나님을 숭배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종교인들이 이 행성에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예수님을 숭배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는 구원을 받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기 위해, 상당수가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해줄 뭔가를 해야 한다는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이러한 외적인 존재가 만들어놓은 법칙들을 엄격하게, 타협하지 않고 지켜져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전(全) 우주를 창조하셨다면, 이 하나님께서는 이 작은 행성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서 뭔가를 필요로 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는 것, 즉 하나님께서 아직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여러분이 줄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므로, 자체적으로 완벽하신데, 왜 굳이 누군가로부터 숭배를 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태양이 지속적으로 빛을 비추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완벽하시므로, 끊임없이 주고 계십니다. 외적인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하며, 혹은 그러한 하나님에게 뭔가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빛을 주기 위해, 거대한 탐조등을 세워, 태양을 향해 비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창조주로서의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도 여러분에게서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서 숭배를 받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여러분의 숭배를 받고 싶어 하지 않으시며,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뿐이니, 그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마태복음 19:17)”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교회나, 절에 가서, 자신을 숭배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시며, 향을 사르고, 희생을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성 들여 큰 성당을 짓고, 그 성당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는 것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주신 빛으로, 여러분이 무엇을 하기를 바랄까요?

 

이미 높은 곳에 올라서 있는 많은 영성인들과 종교인들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종교가 먼 하나님을 숭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또한 사람들의 숭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종교 분야에서 커다란 업적을 이루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삶을 다 바쳐 타인들을 돕고 있는 진지하고,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다른 종교들 그리고 영적인 공동체 및 새 시대(New Age)의 공동체들 속에도, 마찬가지로 다른 많은 의식(儀式)을 통해 긍정적인 에너지를 기원함으로써, 전 행성을 끌어올리려고 애쓰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진실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에서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일부의 사람들은 하늘에 계시는 먼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하는데 열중하는 성향에서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인들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며, 다시 말해 어떠한 의무감 혹은 책임감에서 이렇게 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해주지 않으면 안 되도록 부담을 지운다고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일부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들이 훨씬 더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을 하나님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교묘한 자만심에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주고자 하는 사랑의 발로에서, 즉 생명이 흐르는 것을 보고자 하는 순수한 사랑의 발로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대가로 뭔가를 얻기 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빈약한 동기로서, 나는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한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구에 실현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저항을 돌파하기 위해, 의지력을 지녀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의지력이 두려움에 근거하고 있다면, 그러한 의지력은 대중 의식과 이 세상의 왕이 만들어놓은 반대를 돌파해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력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실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두려움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이들이 여전히 의무감과 책임감을 지니고 있다면, 진실로 이러한 느낌은 이기적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느낌은 모든 반대를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의 요소, 즉 사랑의 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풍요로운 삶을 실현하려는 반대를 돌파하고자 한다면, 전적으로 사랑에 기초한 의지력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두려움과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벗어나기 위해, 사랑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하며, 이것은 많은 사람들, 심지어 많은 영성인들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영적으로 커다란 진보를 이루었지만,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정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한동안 성장하면서 커다란 진보를 이루고 있었지만, 이들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알게 되는 시점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들 중에서 상당수는 궁극적인 진리, 조직, 가르침 혹은 스승을 찾아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들이 했던 것은 그러한 가르침과 조직 속에 머물고, 그러한 스승을 계속 따르는 것뿐이었으며,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구원을 받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동적인 구원이라는 아주 교묘한 형태의 망상이며, 이것은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이 지니고 있는 추진력은 자기 초월, 즉 현재의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만약 자신이 충분히 알고 있으며, 충분히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여긴다면, 여러분은 필연적으로 생명의 강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숫자 8의 흐름을 차단시키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길을 걸어감에 있어, 어떠한 전환점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지점에 도달하게 될 때, 자기 자신을 초월하지 않고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으며, 나아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것과 배운 것을 주려고 할 때까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영적인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의식을 끌어올리기 위해, 자신이 배웠던 것, 찾아낸 것, 내면화한 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곰곰이 숙고해 보려고 해야 합니다.

자신이 배운 것을 주지 않는다면, 어떠한 상태 이상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정체하겠지만, 정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초월을 통해 성장하든지, 아니면 자기도취(self-absorption), 즉 열역학의 제2법칙으로 묘사되는 중력의 힘을 통해 허물어지게 될 것입니다. 지구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매우 영적이며,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이들은 성장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런저런 조직에 속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의(義)롭다고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면, 특정한 조직을 위해 일을 했는지, 아니면 행성의 의식을 끌어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비록 많은 일을 했다 하더라도, 이들의 성장은 멈추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외적인 조직이나, 외적인 가르침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들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고, 삶에 접근하는 마음가짐과 방식을 초월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현재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이해에 만족하고 있으며, 다음 단계로 데려다줄 더 높은 지식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구에 육화해 있는 동안에, 이들은 다음 단계가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단계를 이르기 위해 언제나 노력해야만, 여러분은 지구에서 영원히 상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너희의 의(義)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5:20)”라고 질책하셨던 의(義)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스승인 우리에게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로 인해, 우리는 최고의 영적인 성취도를 이룬 사람들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딜레마는 단순합니다. 이 강좌의 가르침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될 많은 사람들은 이미 영적인 길에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그 길에서 상당한 진보를 이룩한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자신들이 이룩한 진보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호기심에서 이 강좌를 읽고 있을 수도 있으며, 이러한 사람들은 아주 좋다고 느끼는 몇 개의 개념들만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이미 믿고 있는 것을 그러한 개념들이 확인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강좌를 활용하여, 거울 속을 들여다보고, 어떠한 이해와 성취도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비록 많은 영적인 진보를 이루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풍요로운 삶을 이루기 위해, 마지막의 한 걸음을 여전히 내디디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의 한 걸음이란 여러분이 받을 것을 거저 주는 것이며,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더 높이 오르도록 함으로써, 타인들을 돕기 위해 받은 것을 활용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지식과 이해들은 지니고 있지만, 그러한 지식과 이해를 실행에 옮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자기 자신과 타인들을 위해 영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실현할 수 없는 이러한 전환점에 서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본질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완전히 왜곡된 관점, 즉 이원성적인 관점, 반-그리스도의 의식에 기초한 사회 속에서 성장해 왔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신성한 사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이 신성한 사랑과 상반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인간의 사랑이 신성한 사랑과 단절되어 있을 뿐입니다. 신성한 사랑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몰아가는 힘이며, 또한 스스로를 초월하여, 더 큰 것이 되게 하는 힘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간의 사랑은 가지려고 하고, 소유하려고 하며, 생명의 흐름을 멈추게 함으로써, 어떤 상황들을 정지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 그것을 지키려고 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자동적으로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며, 상실을 피하기 위해, 환경이 변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자신이 처한 환경을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더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제한된 상태에 붙잡아두려고 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 갇히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지니고 있는 것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됨으로써, 지니고 있는 것을 더 커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한된 상태에 있는 것을 고수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태는 여러분에게 무제한의 풍요를 주시고 계시는 하나님에게 “하나님, 나를 내버려 두세요, 나는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을 계속 유지하고 싶습니다. 나는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이 더 커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인간관계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사랑스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들의 관계는 다른 사람들을 소유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얻은 것을 통제하려고 하는 욕망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겉보기에 사랑스러운 관계 이면에는, 어떤 것을 동일한 상태에 머물게 하고, 어떤 것을 통제함으로써, 그것을 계속 소유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일시적인 거라는 점을 고려하면, 궁극적으로는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지 않나요? 계속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흔히 하는 말, 즉 죽을 때, 여러분이 물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들 중에서 어떤 것도 저승으로 가져갈 수 없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하지만 여러분이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내면화한 영적인 업적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업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필요로 하며, 그러한 사랑은 지속적인 흐름, 즉 결코 멈추지 않는 생명의 강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강은 결코 어떤 것을 가지려고 하거나, 소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주는 것이며, 지속적으로 흐르면서, 변화하고, 스스로를 초월하며, 더 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강은 어느 한 가지라도 소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강은 자기 스스로를 좋고 완벽한 모든 것과 하나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강은 더 큰 존재가 될 때에만, 즉 생명의 강과 하나가 될 때에만, 여러분이 어떤 것을 진실로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 가지라도 소유하고, 통제하려고 하지 않을 때에만, 전체(All)가 더 커지도록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여러분은 자신의 재능을 증식시킬 수가 있으며, 더 큰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을 초월할 때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를 초월할 때에만, 생명의 강 속에 머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강 속에 머물 때에만, 지속적으로 성장하며, 더 큰 것이 되고 있는 풍요, 진정한 풍요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랑에 대한 이해를 키울 필요가 있으며, 그래야 그러한 참된 사랑, 즉 신성한 사랑은 결코 멈추지 않으며, 어떤 것을 가지거나, 소유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통제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언제나 자기 스스로를 주는 것이며,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 자신을 내어줄 때, 더 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풍요를 실현할 수 있는 핵심이며, 대다수의 영적인 구도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도, 내면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행동으로 옮기지도 못하고 있는 진실입니다. 숫자 8의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분은 마땅히 위로부터 받은 것을 여기 아래에서 주어야 합니다. 창조주께서는 여러분이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기를 바라시지만, 여러분이 받을 것을 자신(하나님)에게 주는 것은 바라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창조주께서는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창조주께서 여러분에게서 어떤 것을 필요로 하셨다면, 왜 창조주께서 자신이 지닌 빛을 여러분에게 지속적으로 주려고 할까요? 하늘에 계신 먼 하나님을 숭배함으로써, 먼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목적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하거나, 혹은 저 먼 하나님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자신의 의식만을 끌어올리는데 초점을 맞춤으로써, 여러분이 가진 것을 자신(하나님)에게 되돌려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바라시지 않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