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져 있는 계단의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층들로 구성된 건물의 계단 아래로 내려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첫 번째 층의 계단을 내려가야, 다음 층의 계단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층에 도달하고 나서는, 그 층에 있는  여러 개의 방들을 걸어 다니며, 하나하나의 방을 점검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 층에서 무엇을 하든, 그 층 아래로 내려가지는 않고 있는 것입니다. 더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계단으로 다시 돌아와야 하며, 그래야 다음번의 층으로 내려갈 수가 있습니다. 더 낮은 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여러분 -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을 의미함 - 은 반드시 아래로 내려가겠다는 의사결정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의사결정을 함으로써, 보다 높은 층에 있을 때보다, 하나님과 더 분리된 존재로 자기 스스로를 표현하게 되는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단계로 내려가게 되면, 세속적인 자아가 업무를 이어받아, 여러분이 구축해놓은 새로운 정체성에 기초하여, 많은 의사결정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의사결정들로 인해, 습관들이 보다 더 강해지게 됨으로써, 위로 다시 올라오는 것은 더 힘들어지게 되고, 더 아래로 내려가는 의사결정은 보다 쉽게 할 수가 있지만, 그러한 의사결정들 중에서 어떤 것도 여러분을 더 아래로 내려가게 할 수는 않습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컴퓨터와 아주 흡사합니다. 이 세속적인 자아는 어떠한 의사결정들을 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지만, 프로그램 되어 있는 것을 스스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컴퓨터의 프로그램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프로그래머(programmer)가 필요한 것처럼, 프로그램 되어 있는 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이 반드시 관여해야 합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새로운 정체성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외부의 세력들, 즉 그 세력이 다른 사람들, 혹는 어떠한 믿음체계들이 되었건, 아니면 이 세상의 왕에 의한 직접적인 영향에 의해서든, 세속적인 자아는 쉽게 영향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보다 낮은 정체성을 받아들이도록 재촉할 수는 있지만, 다음의 층으로 내려가는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언제나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사례로서, 어떤 아이가 그림들 그려, 어른에게 보여준다고 상상해 보세요. 어른으로부터 부정적인 반응을 듣게 되면, 그 아이는 그림을 그리는 것에 흥미를 잃게 될 것입니다. 좋지 않은 반응으로 인해,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이 “나는 창의적인 사람이 아니야.”라고 실제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미래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지니고 있는 창조력을 다시는 표현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대적으로 사소한 의사결정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여러분의 삶에 커다란 충격을 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창조적인 표현을 요하는 직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차단했을 수도 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삶의 계획을 완수하지 못하고, 또한 창조의 기쁨을 체험하지 못 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믿음에 기초하여, 세속적인 자아가 많은 의사결정들, 예를 들어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대학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혹은 배우지 말아야 할지 등 많은 의사결정들을 했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창조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도록 만들었던 최초의 의사결정은 반드시 의식적으로 무효화해야 합니다.

심지어 더 깊은 의사결정들, 예를 들면 여러분이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세속적인 인간에 불과하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분리된 사람이라고 여기는 개념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여러 생의 이전에 했을 수도 있는 그러한 의사결정들이 여러분이 현재 지니고 있는 정체성의 모든 측면들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공동 창조자로서의 참된 잠재력을 부정했을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곰곰이 살펴보기 바랍니다.  


좋은 소식은 세속적인 자아가 행했던 하나하나의 의사결정들을 의식적으로 대체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주의 계단에서, 또 다른 계단 혹은 또 다른 층으로 내려가게 했던 의사결정들을 여러분은 반드시 무효화해야 합니다. 그러한 의사결정들 가운데 하나를 무효화하고 나면, 모든 의사결정들, 즉 그와 같은 더 큰 의사결정으로부터 생겨난 모든 의사결정들을 쉽게 버릴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의사결정들로 인해 생겨난 부적격한 에너지들은 반드시 정화해야 하지만, 의사결정들 그 자체는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쁜 소식은 또 다른 단계로 내려가게 만들었던 각각의 의사결정은 반드시 의식적으로 무효화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 최초의(original) 습관이라 부를 수 있는 주된(master) 습관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미묘한 원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명확한 사실은 세속적인 자아가 창조되고, 세속적인 자아가 여러분 삶 가운데 적어도 일부라도 통제할 수 있도록 허용하게 되면, 여러분은 부정(否定:denial) 하는 것에 대해 어떠한 패턴(거절할 때, 취하는 특정 행위나 습관, 또는 말버릇 등)을 형성하게 되고, 그리고 유쾌하지 않거나, 당황스러운 의사결정이나 상황들을 회피하려는 패턴을 구축하게 됩니다.

본질적으로,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은 과거의 선택에 따른 결과들을 체험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과거의 불완전한 선택들로 인해, 이미 깊은 영향을 받고 있으므로, 좋은 옵션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새로운 선택해야 하는 고뇌를 체험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은 그러한 상황들에서 뒤로 물러나, 세속적인 자아가 유쾌하지 않은 상황에 반응하도록 허용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로 인해, 유쾌하지 않거나, 아주 어려워 보이는 의사결정들을 회피하려는 교묘한 패턴이 뿌리 깊게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것을 무시하거나, 부정함으로써, 그 어떤 것을 체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이원성적인 선택들, 즉 세속적인 자아를 구성하고 있으며, 세속적인 자아를 계속 살아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계속해서 통제할 수 있게 하는 이원성적인 선택들을 무효화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습관, 즉 유쾌하지 않거나, 당황스럽게 하는 것들에서 등을 돌리려고 하는 패턴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합니다. 의사결정들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성향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제 마음을 바꾸어, 지금까지 마주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과 반드시 대면하려고 해야 합니다.     


특정한 종교, 정신 철학 혹은 스승을 통해, 삶의 영적인 측면에 눈을 뜨기 시작한 영성인들을 나는 많이 보아 왔습니다. 이들은 매우 열성적이어서, 곧바로 성장을 위한 새로운 가르침을 배우고, 기법들을 실천하는데 몰두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실제로 새롭고도, 고차원적인 이해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으며, 진보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려운 의사결정들을 회피하려는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길을 가는데 있어, 이 시기가 결정적인 시점이며,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세속적인 자아와 이 세상의 왕은 이러한 시점이 취약하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회피하려는 성향에서 여러분이 벗어난다면, 이들은 여러분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당분간은 여러분에게 영향을 미쳐, 여러분의 진보를 늦출 수는 있겠지만, 여러분이 자기 자신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려고 하는 임계지점을 통과한 이상, 이들은 더 이상 여러분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일 따름입니다. 그러한 임계지점을 통과하고 나면, 여러분은 상향 나선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며, 따라서 세속적인 자아와 이 세상의 세력들은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와 이 세상의 왕은 회피하려는 패턴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 이들은 거짓된 길, 즉 사람에게는 올바르게 보이나, 그 길의 끝은 죽음인 길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여러분은 유쾌하지 않은 것과 대면할 필요가 없으며, 어려운 의사결정들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 대신에, 여러분은 단지 외적인 스승, 즉 권위 있는 외적인 인물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특정한 종교의 교리를 믿고, 그 종교의 관행을 따르고, 이들이 여러분에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행해야 하며, 하지 말아야 한다는 하는 것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면으로 들어가서, 세속적인 자아의 이원성적인 거짓말들을 꿰뚫어보고, 그리스도 자아의 고차원적인 이해를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지도자, 외적인 스승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이들은 여러분이 영적인 가르침을 찾아내서, 영적인 훈련을 시작한다 해도, 회피하려고 하는 습관은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과 삶에 접근하는 방식을 실제로 바꾸지 않고도, 그리고 과거의 의사결정들을 무효화하지 않고도, 외형적으로 올바르게 보이는 것들을 행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거짓된 약속입니다. 세속적인 자아와 동일시하는 것에서 벗어날 때까지, 여러분은 절대로 영원한 삶을 실현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우화 하나를 말씀하셨으며, 이 우화는 모든 사람들을 초대한 결혼 잔치에 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2“2) 어느 한 사람이 결혼 예복도 입지 않고 결혼 잔치에 참석하였으나, 그 후 수족이 결박되어, 바깥의 어두운 곳으로 던져졌으며,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았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극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이 뒤에 숨겨져 있는 진실은 영적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결혼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원성적인 요소들, 즉 반-그리스도의 요소들을 모두 제거하여, 하위의 4개 몸체들을 반드시 정화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의식이라는 결혼 예복을 반드시 입어야 합니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의식(意識)을 입지 않고는, 풍요로운 삶이라는 의식으로 들어갈 수가 없으며, 따라서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이원성적인 믿음들로 인해 수족이 결박당하게 될 것입니다. 바깥의 어두운 곳, 즉 이원성적인 마음 상태에 머물게 될 것이며, 이러한 상태에서는 삶이 끝없는 투쟁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분노하는 하나님의 벌이 아니며, 단지 여러분 스스로가 행한 선택들, 즉 선택의 폭이 좁은데(lack of choices) 따른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불편한 것을 회피하려고 하는 습관을 버리지 않는 한, 여러분은 절대로 구원, 즉 영원한 삶을 성취할 수가 없으며, 풍요로운 삶도 구현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습관을 버리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나는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이해를 전해주고자 합니다. 모든 것들은 자유의지의 지배를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위의 4개 몸체들 가운데 어느 하나 속에 지니고 있는 불완전한 믿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여러분은 반드시 그러한 믿음을 놓아버리는, 즉 버리려고 하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믿음이 참된 것이며,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거나, 불가피하다는 환상을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을 버리기 위해, 감정적인 모든 집착도 극복해야 합니다. 말 그대로 세속적인 자아의 그러한 측면을 죽게 해야 합니다.

불완전한 믿음을 반드시 버려야 하지만, 문제는 여러분이 소유하지 않고는 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상의 체험에서 보면, 지극히 논리적인 것입니다. 인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 인형을 아이에게 줄 수가 없습니다. 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대금을 지불하기 위해 돈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믿음을 버리기 전에, 불완전한 믿음과 그러한 믿음이 자아의 구체 속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반드시 소유해야 합니다. 불쾌하거나, 복잡한 것을 회피하려는 습관을 유지하고 있다면, 어떻게 그러한 믿음을 소유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습관은 말 그대로 과거의 선택들을 소유하고,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을 방해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선택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열쇠를 가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위의 4개 몸체들 속에 저장되어 있는 믿음들과 의사결정들에 대해, 책임에서 멀어지려고 하거나,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한, 여러분은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 계속 갇혀 있게 될 것입니다.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한, 말 그대로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왕과 세속적인 자아가 제시하는 거짓된 길은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으며, 구원은 자동적이거나, 혹은 보장된다는 주장에 그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일부의 종교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그러한 종교를 계속 따른다면, 언젠가는 천국에서 깨어나게 될 거라고 합니다. 또 다른 종교들은 예수님과 같은, 외적인 구세주가 여러분을 대신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므로, 언젠가는 천국에서 깨어나게 될 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현재 있는 곳 말고, 어떻게 다른 곳에서 깨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 깨어나고자 결심할 때까지 여러분은 깨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의 왕이 준비해놓은 완전한 덫입니다. 이 세상의 왕은 실수를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먼저 여러분에게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그런 다음, 여러분을 속여, 과거의 의사결정들로부터 도망 가려는 패턴을 만들어내도록 합니다. 최종적으로, 이 세상의 왕은 거짓된 길을 제시하게 되며, 이 길에 의하면, 외적인 인물을 따르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도망 가려는 성향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나쁜 상황에 이것이 추가됨으로써,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은 말 그대로 방향타와 나침판도 없이, 즉 이리저리 바람에 밀려 요동치는 배(야고보서 1:6)와 같은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말을 극복하기 위해, 참된 구원이란 자신의 근원과 하나가 되는 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고 있으면서, 어떻게 자신의 근원과 하나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집에서 도망가고 있으면서, 어떻게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왕국을 주시는 것이 아버지의 기쁨이지만, 그 왕국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을 여러분은 반드시 받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저 주시는 선물, 즉 풍요로운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 세상의 왕이 주도면밀하게 계획해놓은 하나님에 대해, 여러분은 완전히 잘못된 이미지, 즉 우상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또한 세속적인 자아로 인해, 하나님을 분노하는 하나님으로, 즉 여러분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벌하고자 하시는 분노하는 하나님으로 바라보도록 여러분은 길들여져 왔습니다. 이로 인해, 구원을 돈으로 살 수 있으며, 하나님과 거래를 할 수 있다는 교묘한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비록 종교의 지도자들과 추종자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깨닫고 있지 못한다 할지라도, 많은 종교들이 이러한 믿음에 그 토대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하나님에게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인상을 가지게 되었으며, 따라서 무한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마치 인간에게서 어떠한 희생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아주 많은 종교들이 자신들이 믿는 신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피로 물든 재물, 심지어 인간을 재물로 바치는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는 천국으로 가는 길을 돈으로 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원성적인 사고는 하나님과의 분리감으로부터 생겨나게 됩니다. 이러한 사고는 하나님을 외적이고, 저 멀리 떨어져 계신 하나님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을 저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의 내면에 존재한다고 말씀하셨으며, 이 말의 의미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내적인 상황들만이 왕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길을 걸어가면서, 멋있는 옷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는 가게를 가진 사람을 보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세요. 마음에 드는 옷을 보고, 이게 "얼마냐?"라고 묻습니다. 그 사람이 “이건 공짜이니, 마음대로 가져도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믿지 않고, 여러분은 그 사람에게 돈을 건네줍니다. 반면에, 그 사람은 그 옷들은 자신에게는 가치가 없으니, 돈을 받지 않겠다고 사양합니다. 여러분은 좀 더 끈질겨서, 그가 여러분의 성의를 거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러분이 그 사람에게 돈을 주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부릴수록, 그 사람은 돈을 받지 않으려고 그만큼 더 완고해지게 됩니다. 그 사람은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한사코 거절하므로, 여러분이 그 옷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옷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옷에 대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옷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