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적인 스승과 하나가 되는 길을 걸음으로써, 실제로 많은 영혼들(lifestreams)이 더 큰 자기 존재의 일부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풍요로운 삶에 이르는 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세계와 연결을 유지하고 있는 한, 자신의 삶 속에서 풍요로운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면에 존재하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한 디딤돌로서, 외적인 스승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일부의 영혼들은 무시하기로 했습니다.


그 대신에, 이들은 또 다른 외적인 스승들 즉 거짓된 스승들을 따랐으며, 이러한 스승들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에 반대함으로써, 하나님과의 분리를 주장했었습니다. 거짓된 스승은 하나가 되는 것보다는 맹목적으로 복종하기를 바라며, 의사결정을 하려고 하지 않는 의식 상태, 즉 쉽게 살아가려고(path of least resistance) 하는 영혼들에게는 이러한 복종이 받아들이기가 더 편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성장의 길이지만, 불행히도 이 길은 위험이 뒤따르게 됩니다. 주된 위험은 영혼(lifestream)이 이원성적인 의식 속에 갇혀, 무한정 그러한 상태에 머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어느 쪽의 스승을 따른다 해도, 성장할 수는 있습니다. 만약 영적인 스승의 지시를 거역한다면, 그러한 영혼은 풍요의 결핍과 투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그 영혼은 하나됨의 순환 속에 머무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 영혼은 이해에 기초한, 실질적인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위험은 그 영혼이 이원성적인 의식과 아주 동일시함으로써, 영적인 스승 및 이원성적인 투쟁으로부터 벗어날 대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망각의 상태 속에 무한정, 아니면 적어도 주어진 시간이 모두 경과할 때까지 머물 수는 있지만, 그 영혼은 그러한 세속적인 정체성을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이원성적인 의식을 실험함으로써, 배우게 되는 방식에는 늘 위험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진실로, 이것을 시련의 학교(School of Hard Knocks)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영혼이 이러한 선택을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부의 공동 창조자들에게는 이러한 선택을 하는 것이 불가피했습니다. 거짓된 스승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들은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스승과 분리됨으로써, 더 큰 존재가 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해(害)가 없고, 순수한 게임처럼 보였으며, 실제로도 처음에는 해가 없었습니다.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이 신적 자아와 어느 정도의 연결을 유지하고 있는 한, 이원성적인 의식에 갇히지 않고도, 이원성적인 의식을 실험해볼 수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원성적인 의식이 아주 교활하여, 많은 공동 창조자들이 이원성적인 의식과 동일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점진적으로 일어났으므로, 이들은 이것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내가 앞에서 설명했던, 진실의 순간이 찾아올 때까지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 했던 것입니다.


진실의 순간이 찾아오고 난 이후,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은 그러한 상황에 몇 가지의 부정적인 감정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러한 감정들에는 예를 들어 두려움, 분노 혹은 비난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하나님, 거짓된 스승 혹은 참된 스승을 비난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다른 부정적인 감정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감정들 뒤에는, 여러분이 자신의 순수성, 즉 신적 자아와 하나라는 내적인 느낌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은총으로부터 추락했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이 이원성이라는 필터를 통해 모든 것을 보았기 때문에, 진실의 순간마저도 이원성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분리의 의식을 통해 모든 것들을 보았기 때문에, 진실의 순간에서조차 부정적으로 반응했던 것입니다. 진실의 순간을 스승에게 다시 돌아갈 기회로 삼았던 것이 아니라, 도망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기로 한 이상, 여러분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선택은 계속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에, 거짓된 스승은 여러분의 귀에다 대고,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었으며,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속삭였던 것입니다. 이때가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영혼이 이러한 유혹을 무시하고, 참된 스승에게 다시 돌아가고자 했다면, 참된 스승의 안내들 요청함으로써, 이원성적인 의식을 빠르게 극복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이러한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면, 그 영혼은 이제 하나님 및 신적 자아와 영원히 분리되어 있다는 환상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러한 마음 상태, 즉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에 직면하여, 영혼(lifestream), 즉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은 대개 운명적인 결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결정했으므로,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은 자신이 추락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원성적인 의식으로 실험할 수 있게 된 것은 의식적인 여러분이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영혼들(lifestreams)이 만약 자유의지를 지니지 않았다면, 그리고 어떤 결정도 하지 않았다면, 자신들이 추락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자유의지를 가졌던 것이, 그리고 의사결정을 한 것이 문제였다고 추론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단지 잘못된 결정을 한 것뿐이었습니다.

또다시, 바로 이 시점에서 외적인 스승은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이 의사결정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 이상 잘못된 어떤 결정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유혹했습니다.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을 대신하여, 외적인 스승을 따랐더라면,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은 원상복구되었을 것이며, 잃어버린 낙원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합니다. 이것은 거짓말이며, 미래에 잘못된 결정을 하지 않음으로써, 과거의 잘못된 결정을 만회할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잘못된 결정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외적인 인물이 해야 할 일과 행동해야 하는 방법에 대해 여러분에게 말해주도록 함으로써, 여러분이 어떤 결정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영혼(lifestream)이 이러한 거짓말을 받아들여, 더 이상 의사결정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 순간에 세속적인 자아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원성적인 의사결정과 이로 인해 생성된 부적격한 에너지들이 점차적으로 축적되어, 임계 수치에 도달하게 됨으로써, 세속적인 자아가 태어난다고 나는 지금까지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이며, 내가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설명한 것이 기본적인 과정입니다. 다시 말해, 기본적인 원리는 의식적인 여러분이 더 이상 의사결정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결정으로 인해, 여러분을 대신하여,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지닌 자의식적인 존재가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의식을 지닌 이러한 존재가 바로 내가 세속적인 자아라고 부르는 것이며, 많은 심리학자들이 에고라고 부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에 따른 문제는 삶이 온통 의사결정뿐이라는 것입니다. 의사결정을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사결정을 하지 않고는,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영적 세계에서도 절대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의식적인 여러분이 의사결정을 하지 않는다면, 삶에서 일어나는 의사결정을 누가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권리와 자기 영혼을 위해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특권을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이 행사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의식적인 여러분은 이제 세속적인 자아가 되고 마는 것이며, 세속적인 자아가 권한을 물려받아, 여러분을 대신하여 그러한 의사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식적인 여러분이 의사결정을 거부하기 때문에, 세속적인 자아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여러분을 대신하여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지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으며, 의식적인 여러분보다 의사결정을 더 잘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본질적으로 공격적이며,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믿음은 이 세상의 왕, 즉 외적인 세력들에 의해 크게 강화되며, 외적인 세력들은 세속적인 자아를 이용하여,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세력들은 우주를 운영하는 방법에 대해, 자신들이 하나님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자신이 옳으며, 자신의 견해 및 소망과 모순되는 것, 즉 영적인 스승이나 가르침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물론, 문제는 이원성적인 의식에서 벗어나는 것들에 대해서는 세속적인 자아가 본질적으로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오직 이원성의 세계 속에서만 생각하고, 추론할 수 있으며, 여러분을 대신하여 행하는 모든 의사결정은 단지 이원성적인 세계 속에 여러분을 더 단단하게 가두어둘 뿐입니다. 그러한 필터를 통해 삶을 바라보면, 삶이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이원성적인 세계 속에 존재하므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주장을 언제든지 만들어낼 수가 있습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자신이 언제나 옳으며, 의식적인 여러분을 비롯하여, 영적 스승, 심지어 하나님까지 포함하여,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옳지 않다고 철저하게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여러분의 삶을 가능한 최선의 방법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여러분이 오로지 구원에 이르는 올바른 길만을 계속 걸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길은 거짓말에 기초하고 있으며, 원상회복될 수 있는 방법은 잘못된 의사결정을 하지 않는 것 밖에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세속적인 자아는 이원성적인 추론을 이용하고 있으므로, 잘못된 결정을 절대로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주장을 언제든지 만들어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풍요로운 삶에 더 가까이 데려다줄 수 없다는 의미에서, 세속적인 자아가 행하는 모든 결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행성을 살펴보고, 일부의 사람들이 어떻게 아주 잔혹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옳았다고 확고하게 확신할 수 있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사례를 이용하면,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사람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게 했으면서도, 어떻게 옳은 일을 했다고 확신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기 바랍니다. 이것은 심리학자들이 부정(denial)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이러한 부정은 세속적인 자아가 즐겨 사용하는 상용 수법, 즉 자신은 절대로 잘못될 수가 없다는 것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어떤 상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이, 이원성적인 추론을 이용하여 자신은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끝없이 계속 증명할 것입니다.


부정 (Denial) : 심리학 용어. 가장 원초적인 방어기제 중 하나로서, 의식화된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생각, 욕구, 또는 현실적 사실 자체를 무의식적으로 부정하는 방어기제로서,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했을 때,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해 버림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찾고 스스로 불안을 피하려는 것


하나님이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실수를 하는 것은 재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탓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여러분이 잘못에서 벗어나서, 전진해가기만을 바라고 계십니다. 세속적인 자아의 유혹에 넘어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러한 실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그 대신에, 이전에 했던 실수에 기초하여, 의사결정을 계속하게 됨으로써, 여러분은 하향 나선 속에서 실수를 거듭하게 되며, 이러한 실수는 끝없이 지속될 것입니다.

실수를 하는 것은 나쁜 의사결정은 아니지만, 실수를 인정하고,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는 것은 정말로 나쁜 의사결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덫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덫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세속적인 자아의 이원성적인 추론을 이용하여, 과거의 행위들을 정당화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옳지 않은 결정을 했다는 것을 당당하게 인정하고, 그러한 결정을 보다 나은 결정으로 대체해야 합니다.


이 장에서 전해주고자 하는 중요한 점은 구원에 이르는 참된 길, 즉 불멸의 삶에 이르는 참된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길은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이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자유의지를 부여받았다는 진실을 다시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은 후, 의식적인 여러분은 자신의 삶에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 이외에 구원에 이르는 길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올바른 것처럼 보이는 길이 있으며, 그 길이 올바르게 보이는 이유는 그 사람의 세속적인 자아에게 올바르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에 따르면,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권능을 되찾을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또한 여러분을 대신하여, 누군가가 의사결정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이 길을 따르면, 결국에는 구원받게 될 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길은 이 세상의 거짓된 스승들이 만들어놓은 길입니다. 이러한 길은 수없이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러 가지 형태의 위장을 하고 나타나게 됩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공공연하게 종교적인 형태를 띠고 있으며, 또 다른 길들은 자기계발 기법 혹은 삶에서 풍요를 창조할 수 있다는 온화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관계없이, 이러한 방법들은 똑같은 약속, 즉 어떠한 체계를 따르고, 어떤 기법을 실천하거나, 혹은 외적인 조직에 가입하기만 하면, 목표가 무엇이든, 정해진 목표지점에 마술처럼 도달하게 될 거라고 약속할 것입니다. 


외적인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강화하고 있는 종교들 역시 구원에 이르는 잘못된 길을 조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는, 주류의 기독교인들이 대개 간과하고 있는 어떠한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꾸짖는 장면이며, 의심할 바 없이, 성경에는 “너희의 의(義)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20~20)”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오직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으며, 이 말을 무시함으로써, 자신들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찾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특정한 사람들을 지칭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여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거짓된 길, 즉 외적인 교리를 고수하고, 외적인 규칙을 따르거나, 혹은 외적인 의식(儀式) 혹은 관행에 참여함으로써, 자동적으로 그리고 틀림없이 구원받게 될 거라고 믿고 있는 길(path)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