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로 된 둥근 탑이 있는 옛 성(城)을 여러분도 보았을 것이며, 이 성의 내부에는 나선형의 계단이 있습니다. 나선형 계단의 꼭대기에는 성의 천장과 이어진 문이 있으며, 이곳에서 밝은 햇볕을 쬘 수가 있습니다.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서, 문을 통해 들어 오는 햇빛은 여전히 비치게 되며, 햇빛은 계단의 벽에 반사될 것입니다. 계단 아래로 계속 내려가면, 빛은 휘어지게 되며, 문을 통해 더 이상 푸른 하늘을 볼 수 없게 되는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이제는 햇빛에 어디에서 들어오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벽에 반사되는 빛은 볼 수가 있습니다.


더 아래로 내려가면, 또 다른 한계 지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지점을 벗어나면, 벽에서 반사되는 빛조차 더 이상 볼 수 없게 됩니다. 이 지점서부터, 햇빛이 계단의 꼭대기에 있는 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계단 아래로 계속 더 내려가면, 점점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며, 마침내 성의 밑바닥에 있는 지하묘지에 도달하게 되며, 그곳에는 칠흑과 같은 어둠만이 존재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의식 속에서 일어났던 환상입니다. 여러분은 당초에 푸른 하늘과 햇빛을 직접 볼 수 있었던 계단의 꼭대기에서 시작했었습니다.


물론, 이 햇빛은 여러분의 신적 자아를 상징하는 것이며, 또한 여러분의 존재라는 태양을 통해 빛나고 있는 하나님의 빛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감에 따라, 즉 이원성적인 의식 속으로 내려감에 따라, 여러분은 자신의 신적 자아와의 직접적이고, 의식적인 연결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자기 존재의 상위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더 깊이 내려가게 되자, 이러한 기억마저도 상실하게 되었으며, 남아 있는 유일한 문제는 여러분이 실제로 계단 아래로 얼마나 멀리 내려갔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강좌를 읽고 있다는 사실은 계단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지는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 과거 생에 계단 아래로 내려갔지만, 오래전에 위로 오르기 시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위로 오르는 길에 있지 않았다면, 이 강좌, 혹은 내가 제시하는 개념들에 대해 여러분은 마음의 문을 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내적인 앎을 통해, 여러분은 이미 그리스도 의식의 풍요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영적인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러한 영적인 길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도 느껴야 하며, 실제로는 이것이 승리하는 것이란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 여러분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면, 여러분은 현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으며, 이미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는 것을 시간을 가지고, 곰곰이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그 길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고 느끼고 있다면, 이 장에서 내가 이야기했던 것, 즉 세속적인 자기감을 죽게 해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이러한 세속적인 자기감은 여러분을 뒤에서 끌어당기고 있는 무거운 짐이며, 나선형의 계단을 오르는 것을 불필요하게 힘들게 만드는 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을 바꾸어, 여러분이 짐을 살펴보고자 했다면, 그 짐과 연결된 로프를 잘라냈을 것입니다. 그러한 무게가 떨어져 나감에 따라, 계단을 오르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해지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계단에서, 다음 단계의 조치를 취하기 전에, 현재의 자기감을 죽게 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삶은 훨씬 더 힘들어지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길을 걷는다는 것이 아주 힘들고, 고통스러워, 많은 기독교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따랐던 것처럼, 말 그대로 고난의 길(Via Dolorosa )이 될 것입니다. 중세 시대에,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이것(고난)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었으며,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바로 그 길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형과 십자가에서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기독교를 따르기 위해, 예수님처럼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주는 거울입니다. 삶이 고통이라는 정신적인 이미지를 거울 속으로 투사하면, 물질의 빛은 여러분의 이미지를 확인시켜주는 물리적인 상황들을 구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실제로 중세 암흑시대에 인류에게 일어났었습니다. 사람들이 고통에 집중함으로써, 이들은 그러한 암흑시대에 나타났던 외적인 고통들을 실제로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에 살고 일부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고통에 집중하게 된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사람들이 잘못된 이미지, 즉 우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단지 몇 시간 동안만 십자가에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3살까지 사셨으며, 예수님의 공식적인 임무는 3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삶, 사명 그리고 가르침들에 대해, 예수님의 마지막의 몇 시간이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이미지, 즉 결정적인 이미지가 된다는 것이 과연 공정하고, 올바른 것일까요? 그 시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형을 받았었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의 십자가형만이 특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며, 십자가형을 당한 후에도, 영적으로 부활한 몸으로 나타났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십자가형을 당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풍요로운 삶에 이르는 진정한 열쇠인 물질을 지배할 수 있는 마음을 통달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셨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길( Via Dolorosa), 즉 고통의 길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풍요로운 삶과 그러한 풍요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量)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한복음 10:10)”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를 치유하고, 죽은 자를 소생시켰으며,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빵과 물고기를 증식시켰으며, 물 위를 걷고, 또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열게 했던 가르침들을 전함으로써, 풍요로운 삶을 증명해 보이셨던 것입니다. 진실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투쟁의식에서 벗어나, 풍요로운 삶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투쟁의식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열쇠가 무엇일까요? 삶이 투쟁이라는 정신적인 이미지에 기초한 자기감, 즉 하나님과 하나님의 풍요와 분리되어 있다는 것에서 생겨나는 자아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기감을 극복할 때에만, 우주의 거울 속으로 투쟁이라는 이미지를 투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이미지를 투사하지 않을 때에만, 거울 역시도 삶이 투쟁이 되도록 하는 물질적인 상황들을 여러분에게 다시 반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열쇠는 여러분이 자신이 지각하고 이미지, 즉 제약적인 자아상보다 더 큰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진정한 실체는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이며, 이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은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존재이므로, 여러분은 세속적인 자기감을 통해 보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마치 색안경을 쓰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가 죽는다고 해서, 여러분의 개체성이 죽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은 결코 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더 고차원적인 자기감을 얻게 될 것이며, 영적인 자기감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 말을 전하면서, 내가 여러분과 함께 하고 있는 내 현존을 느낄 수가 있나요? 어머니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강렬한 사랑, 그리고 내 자녀들이 어둠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보는 것 외에 어떠한 것도 바라지 않는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나요? 얼마나 간절하게, 내가 여러분을 따뜻하게 포옹하고 싶어 하며,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으며,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말해주고 싶어 하는지 느낄 수가 있나요? 내가 얼마나 여러분의 머리를 쓰다듬고, 양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여러분의 눈을 들여다보고, “애야,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우리 과거는 모두 잊고, 네가 두려워했던 캄캄한 지하실에서 벗어나, 모든 두려움을 녹여줄 따뜻한 햇볕 속으로 들어가자“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지 느낄 수가 있나요?


영적인 어머니로서, 나는 여러분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모든 제약들로부터 여러분이 벗어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나는 먼저 여러분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직면해 있는 모든 제약들의 핵심은 바로 거짓말을 살펴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내 손을 잡고, 햇빛 속으로 들어가, 눈물과 세속적인 자기감에 대한 두려움을 웃음으로 떨어버리세요. 그 대신에, 이전의 자기감은 잊고, 새날의 태양, 즉 새로운 자기감을 받아들이세요.


그러한 잊어버림을 통해, 사라진 줄도 모르게, 이전의 자기감을 죽게 하세요. 어린아이처럼, 삶이라는 놀이터에서 예전에 가지고 놀던 낡은 장난감을 잊어버릴 수 있도록, 새로운 장난감으로 신나게 놀아보세요. 새로운 자기감에 집중하여, 예전의 것을 까맣게 잊게 됨으로써, 여러분은 새로운 자기감, 즉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영원히 저장되어 있으며, 또한 여러분의 영적인 어머니의 가슴속에서도 간직되어 있는 무결한 개념으로, 여러분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내가 진실로 예수를 위해 간직했던 것처럼, 나는 여러분을 위해서도 무결한 개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사랑하며, 내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지닌 진정한 잠재력을 알고 있으며, 여러분이 그러한 잠재력을 이 지구에서 충분히 실현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상황들을 초월할 수 있도록, 나는 기꺼이 여러분을 돕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도달해, 빛으로 상승할 수 있도록, 내가 예수와 함께 한걸음 한 걸음씩 걸어갔듯이, 나는 여러분의 손을 잡고, 여러분과 함께 걸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