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들이여, 여러분의 현재의 자기감이 죽어야 한다는 말이 과장된(dramatic)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들리는 것처럼, 그렇게 과장된 것은 아닙니다. 자의식을 지닌 모든 존재들은 자신들의 정체성, 즉 자기감을 상실하게 되는 것에 대해 큰 두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분이 별개의 존재가 되도록 하는 개별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개체성을 증식시키고, 그런 다음 자기 자신을 먼저 지배하고 난 후,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다스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것(last thing you would want)은 자신의 개체성, 즉 자신의 자아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현재의 정체성을 상실한다는 것이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현재 지니고 있는 정체성은 참된 개체성이 아닙니다. 이와는 반대로, 현재의 개체성은 제한적인 자아상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훨씬 더 아름답고, 완벽한 개체성을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의 몸이 아기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떤 것을 잃게 되나요? 확실하게 말하면, 아기의 몸을 잃고, 지금은 어른의 몸을 가지게 되지만, 이것이 정말로 잃고, 얻은 것일까요? 여러분이 나에게 1달러를 주면, 내가 백만 달러를 준다고 하면, 이 거래에서 여러분은 어떤 것을 잃게 되는 것일까요? 맞습니다, 1달러를 잃게 되지만, 그 대신에 백만 달러를 얻게 되므로, 여러분은 거래의 이전보다 훨씬 더 좋아질 것입니다.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으로 대체된다면, 실제로는 잃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참된 개체성, 즉 태초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개체성은 오늘날 여러분이 물질세계에서 성장하면서, 받아들인 개체성보다 백만 배나 더 아름답고, 완벽한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더 큰 자아, 즉 여러분이 속해 있는 하나님의 몸체라는 입장에서 보면, 얻는 것만 있지, 잃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낮은 의식 상태, 즉 이원성적인 의식, 반-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내려올 때, 여러분은 점진적인 방식으로 내려왔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의식, 즉 여러분의 참된 정체성으로 다시 올라갈 때에도, 점진적으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현재의 자기감이 죽고, 그 대신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점차적으로 더 높은 자기감과 더 높은 자존감으로 상승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이것이 손실이 아니라, 이익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은 진실로 없습니다.

다음 장으로 이동하여, 이 강좌에서 내가 전해주는 도구들을 적용해 감에 따라, 언젠가는 두려움을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진정한 자신인 상위의 존재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적 자아와의 연결을 복원하기 위한 이러한 점진적인 길을 걸어감에 따라, 여러분은 자신의 신적 자아라는 태양의 빛이 자신의 하위의 존재 속으로 직접 비추고 있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며, 신적 자아와 창조주께서 여러분에 대해 지니고 계신 완벽한 사랑, 즉 조건 없는 사랑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완벽한 사랑이 여러분이 지닌 모든 두려움을 내쫓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여러분의 현재 자기감이 죽어야 한다고 내가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가 여러분에게는 놀라운 메시지지만, 여러분의 현재의 자기감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보다 쉽고, 덜 자극적인 길이 될 수 있도록, 보다 부드럽고, 마음에 와 닿는 메시지를 전하지 않고, 왜 이렇게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것일까요? 각자가 지니고 있는 두려움과 마주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어, 떨어져 나가게 하는 위험을 왜 내가 감수하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로 이렇게 하는 것이지만, 주요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풍요에 이르는 참된 길, 심지어 영원한 삶에 이르는 길을 내가 전해주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스승들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풍요를 실현할 수 있다거나, 심지어 현재의 자기감을 버리지 않고도, 즉 세속적인 자기감을 죽게 하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약속할 것입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세속적인 자기감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것이며, 이러한 이유로 세속적인 자기감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거짓된 스승들이 제공해주는 상품을 사려고 할 것입니다. 이 길은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것처럼 보이지만, 영원히 지속될 진정한 풍요로운 삶에는 절대로 이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인기도 없고, 매력적이지도 않은 진실을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이유는 정확히 말해 이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진리만이 여러분을 자유롭게 해줄 것입니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더 높고, 더 영적인 자기감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현재의 자기감을 반드시 죽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일 때, 영적인 길을 걷기가 훨씬 더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승한 이후, 지난 2000년 동안, 나는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가르침들을 실천하고자 애쓰는 많은 사람들을 지켜보았습니다. 공식적인 기독교 교회들이 이러한 사람들에게 전해준 길을 모든 것을 다 바쳐, 걸었던 신실한 사람들을 나는 아주 많이 보아 왔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은 예수님께서 전해준 중요한 개념들 가운데 일부, 즉 지식의 열쇠를 제거해 버렸기 때문에, 대다수의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세속적인 자아를 죽게 하고, 불멸의 영적인 자기감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진실로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세속적인 자아를 완벽하게 하려는 잘못된 길에 빠지게 되었으며, 세속적인 자아를 그리스도께서 설교하신 이상(理想)이라는 것에 맞추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외적인 마음을 이용하여, 이상적이고, 정신적인 이미지, 즉 우상을 만들어냈으며, 그리스도의 진정한 추종자라면 마땅히 이러한 우상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며, 그러한 우상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전 생을 다 바쳐 커다란 정성과 열정으로, 외적인 의지를 이용하여, 그러한 정신적인 이미지를 본받으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대개 힘이 드는 싸움이 되었으며, 그 이유는 세속적인 자아를 죽게 할 때까지, 여러분은 스스로 분열된 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3:25)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이 그리스도의 신성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설 때마다, 세속적인 자아는 여러분을 뒤로 잡아당기게 됨으로써,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로마서 7:19)"라고 베드로가 설명했던 딜레마에 갇히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많은 성실한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죄의식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받은 정신적인 이미지, 즉 애초부터 반-그리스도라는 이원성에 기초한 정신적인 이미지에 따라, 이들은 끝까지 삶을 살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이미지로, 어느 누구도 인간의 완벽함이라는 이러한 우상적인 이미지에 따라 끝까지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이것은 마음(heart)의 완벽함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것” (마태복음 5:8)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반-그리스도의 마음에서 생겨난 이상(理想)에 기초하여, 여러분이 외적으로 인간적인 완벽함을 실현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적인 자질, 즉 마음의 청결함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음의 청결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순수하지 못한 자아, 즉 세속적인 자아를 죽게 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가 있으며, 따라서 그러한 자아는 여러분의 참된 자아, 즉 하나님께서 신성한 완벽함 속에서 창조하셨으며, 결코 완벽함을 벗어난 적이 없는 자아로 대체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많은 성실하고, 독실한 사람들이 감내해왔던 고통을 생각하면, 내 가슴은 정말로 연민의 정으로 흘러넘치며, 슬픔으로 물들게 됩니다. 결국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전(全) 생을, 때로는 여러 생에 걸쳐 고난의 길(Via Dolorosa)을 걸어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대개 이러한 사람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며, 이들 중에서 상당수가 잘못된 약속을 받았다고, 즉 예수님께서 거짓된 약속을 했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다고 생각되는 길을 따랐지만, 성인(聖人)의 경지 혹은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의식 상태, 즉 은총의 상태에 도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많은 사람들은 결국 정통 기독교에 대해 실망하게 되고, 예수님에 대해 분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유물론적인 사회에 육화해 있으면서, 기독교를 부정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생에 정통 기독교회들이 제시했던 길을 부지런히 따랐던 적이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들은 이러한 길에 아주 실망했으며, 이번의 생을 살아가는 동안, 정동 기독교의 위선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은 아기 예수(Christ child)를 교회의 더러운 목욕탕 물에 던져 버렸으며, 예수님과 예수님의 메시지도 함께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의 일부는 무신론자가 되었으며, 과학적 유물론이라는 종교를 따르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어떤 종교도 따르지 않으며, 삶의 영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새 시대 운동(New Age movement)에 합류하여, 다른 영적인 가르침들이나, 스승들을 따르기로 결심하면서도, 무슨 전염병처럼 예수님은 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내 가슴에도 큰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운동이 무결한 개념이 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내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임계 수치의 기독교인들만이라도 예수님의 내적인 가르침에 충실했더라면, 엄청난 충격이 이 행성에 주어졌을 거란 사실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 운동의 주요 메시지가 예수님께서는 따를 수 있는 본보기였으며, 모든 사람들이 그의 발자취를 따라 걸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이 개인적인 그리스도의 신성을 성취했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겠는지를 상상해보기 바랍니다. 짧은 기간의 예수님의 사명이 이 행성에 주어졌을 충격을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동일한 의식 상태에 도달하여, 인류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개념과 가르침을 만들어냈다면, 그 충격이 얼마나 대단했을지를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현재의 의식 수준과 이해로는, 이러한 충격이 어떠했을 것인지 상상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지만, 지구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오늘날과는 아주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인간의 투쟁, 인간의 권력투쟁에 대해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권력과 부 그리고 천연자원을 소수의 권력 엘리트들이 장악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약속이 이루어졌다면, 이러한 권력 엘리트들은 이미 오래전에 지구에서 사라져야 했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모든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풍요와 더 많은 평등이 실현되어 있는 사회를 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지구를 살펴보면서, 부유한 국가에 살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대다수의 부를 통제하는 엘리트 사회를 예수님께서 원했다고 여러분은 정말로 믿으시나요? 부유한 소수의 국가가 자원의 대부분을 소비하면서, 이와 동시에 가난한 국가의 아이들은 기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매년 수백만 명의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이러한 사회를 예수님께서 원했다고 믿으시나요?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접촉했던 영적인 스승들이 그러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용서할 거라고 여러분은 생각하나요?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러한 엘리트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로 정통 기독교를 이용되어 왔다는 사실은 정말로 개탄스러운 일이며, 예수님의 내적인 가르침들을 조롱하는 거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내 울분을 여러분은 느낄 수 있나요? 예수님께서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태복음 25:40)”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12)”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출처] 제3장 : 인간적인 자아가 어떻게 풍요를 방해하는가? (1/5)|작성자 목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