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의식의 본질은 한 마디로 표현될 수가 있으며, 그 한 마디는 “균형”입니다. 그리스도의 의식은 확장하는 아버지의 힘과 수축하는 어머니의 힘 간에 균형을 유지시켜 주며, 따라서 하나님의 법칙들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게 함으로써, 유지될 수 있는 형태를 창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식은 개인과 전체 간에 완벽한 조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개별적인 공동 창조자와 하나님의 몸체 간에도 균형을 유지시켜줍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의식은 개별적인 공동 창조가 하나님의 법칙들을 따르게 하고, 삶의 모든 부분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창조력을 행사하게 함으로써, 창조를 확대해갈 수 있게 해줍니다. 공동 창조자가 형태의 세계 속에서 완전하게 길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의식은 개별적인 공동 창조자와 창조주 간의 관계에서도 균형을 유지시켜주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의식에 의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식을 통해, 정의되는 형태는 어떤 형태든 완벽한 형태가 됩니다. 이러한 형태는 하나님의 법칙들 및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형태가 되며, 이 말은 모든 생명이 더 큰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모든 공동 창조자들이 서로 간에 조화를 이루면서 성장해야 한다는 뜻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즉 여러분의 신적 자아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마태복음 5:48)”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게 하는 것도 바로 이 그리스도의 의식을 통해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 있는 온전함(perfection)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종류의 온전함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온전하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절대로 변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이원성적인 개념, 즉 우상숭배적인 개념을 믿고 있습니다. 이 우주를 창조한 전체적인 목적은 허공 속에 어떠한 구체를 창조하여, 그 구체가 확장하여, 허공의 더 큰 부분을 채울 때까지, 그 구체를 하나님의 빛으로 점차적으로 채워가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의 목적, 그리고 삶의 목적은 끊임없는 성장이며, 지속적인 확장과 지속적인 자기 초월인 것입니다.


형태의 세계가 존재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더 큰 것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더 큰 것이 되고자 하는 이러한 소망은 모든 피조물들의 이면에 존재하는 추진력으로, 모든 피조물 속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천상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 즉 핑크색 구름 위에 앉아, 영원히 하프나 연주하고 있는 정적인 장소라는 개념은 맥동하며, 역동적인 하나님의 실체와는 한참 거리가 먼 것입니다. 천상은 지구보다도 훨씬 더 역동적인 장소입니다. 왜냐하면 천상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더 큰 하나님, 그리고 더 큰 전체가 되고자 하는 목적에 부응하기 위해, 확장하는 하나님의 빛으로 끊임없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것이 되고자 하는 추진력은 그리스도의 의식 속에도 내재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마음은 개별적인 공동 창조자들이 자신들이 창조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자의식을 확장해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식은 여러분을 더 큰 존재가 되게 하며, 또한 온전하신 하나님의 의식을 성취하여, 전체(All)가 개체화한 분신이 바로 여러분이며,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때까지, 여러분의 자의식을 확장해가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여러분은 개별적인 자기감을 통해,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내가 말하고 있는 온전함은 정적인 것이 아니며, 우상도 아닙니다. 온전함은 역동적이며, 끊임없이 성장함으로써, 언제나 더 큰 온전한 하나님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앞에서 수축하는 어머니의 힘이 물질의 빛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이 수축하는 힘은 어떤 형태도 지니지 않는 기저의 상태로 언제나 돌아가려고 합니다. 혹자는 이 수축하는 힘이 어떤 형태든 그 형태를 지속적으로 허물려고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도는 모든 형태들을 허물어뜨려,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함으로써, 공동 창조자들의 노력들이 허사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어떤 형태도 정지해 있어서는 안 되며, 영원해져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형태들이 역동적이 되기를 바라시며, 이 말은 어떤 형태든, 그 형태는 더 큰 성장을 위해 토대가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완벽한 형태라 하더라도, 그 형태는 초월해야 하며, 더 높은 형태를 구현하기 위한 토대로 이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식은 공동 창조자가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형태를 창조할 수 있게 해줍니다. 정지해 있는 모든 것, 즉 열역학의 제2법칙에서 말하는 것처럼, 밀폐된 시스템이 되는 모든 것들은 수축하는 어머니의 힘에 의해 허물어지게 될 것이므로, 어떤 형태도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창조적인 노력들이 허물어지지 않게 해주는 열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식 속에 머무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은 절대로 멈춰 서 있으려고 하지 않게 되며, 어떤 형태를 유지하려고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롭고, 더 좋은 형태를 지속적으로 창조하게 되며, 따라서 생명의 강 속에, 즉 끊임없이 흐르는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력 속에,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흐름 속에 있을 때, 특정한 형태에 대해, 여러분은 어떠한 집착도 가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형태가 영원히 존속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게 되며, 단지 그러한 형태를 자신의 창조력을 확장시키기 위한 도약대로 이용하고자 할 뿐입니다. 영원히 존속할 수 있는 형태를 창조할 수 있다는 기대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형태가 더 좋은 형태로 대체된다고 해서, 자신의 창조적인 노력이 낭비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강의 흐름 속에 머물고 있는 한, 여러분의 창조적인 노력들은 결코 낭비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특정한 형태라는 창조의 결과보다는, 창조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입니다. 또한, 삶은 결코 끝나지 않는 여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목적지보다는, 여정 그 자체에 관심을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실례(實例)로서, 땅에 떨어진 밀알에 대해 살펴보기로 합시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잃어버린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얼마 후 싹이 틉니다. 싹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농부는 그 싹이 그대로 있기를 바랄까요? 싹이 식물로 자람에 따라, 싹의 형태는 없어지지만, 그 식물의 창조적인 노력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단지 새로운 단계, 즉 새로운 형태로 변형되었을 뿐입니다. 식물은 녹색의 잎들을 지니고 아름답게 보이지만, 결국에는 씨가 들어 있는 줄기로 바뀌게 되며, 노랗게 변하게 됩니다. 녹색의 식물은 없어지지만, 식물의 창조적인 노력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밀을 수확할 때, 식물은 사라지지만, 곡식의 일부는 다음 해에 뿌릴 씨가 되며, 이들 중의 일부는 하나님의 창조력을 확대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지구에 사는 공동 창조자들의 음식으로 사용될 것입니다. 하나의 밀알이 싹트고, 자라는 창조적인 노력의 목적은 싹, 녹색의 식물 혹은 다 자란 식물이 되어, 그 형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력이 지닌 목적은 생명 그 자체의 과정, 즉 하나님의 창조물 전체를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더 커지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공동 창조자로서, 여러분은 자신이 창조한 어떠한 형태든, 그 형태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혹은 그 형태를 만드는데 엄청난 노력을 쏟았다 해도, 그 형태에 집착하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강의 일부가 되도록 되어 있으며, 따라서 하나의 형태를 계속해서 더 큰 창조적인 결실을 맺기 위한 도약대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며, 진정으로 여러분이 보람을 느끼고,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은 오로지 생명의 강 속에 있을 때뿐입니다.

끊임없는 자기 초월이라는 이러한 의식이 바로 생명의 의식입니다. 특정한 형태에 대한 집착과 어떤 형태를 고수하려고 하는 것은 죽음의 의식, 즉 반-그리스도의 의식입니다. 반-그리스도의 의식은 자의식을 지닌 존재가 제한된 자기감에 집착하도록 만들며, 스스로를 초월하는 것을 거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의식을 지닌 존재들이 생명의 강에서 나오게 되면, 수축하는 어머니의 힘은 이들이 유지하려고 하는 것들, 그리고 소유하려고 하는 것들을 곧바로 허물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태복음 16:25)”라고 하신 말씀 뒤에 숨어 있는 더 깊은 의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제한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스스로를 초월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수축하는 어머니의 힘은 여러분에게서 그러한 삶의 의미를 빼앗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단계를 초월하고, 더 큰 자기감을 얻기 위해, 삶에 대한 정지된 의식, 즉 우상을 버리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의식 속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의 의식을 통해, 그러한 지속적인 자기 초월을 통해, 여러분은 결코 끝나지 않으며, 따라서 영원한 생명인, 생명의 흐름 속에 있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하나뿐인 참된 형태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자기 초월이라는 끊임없는 역동적인 상태입니다. 여러분은 자의식과 상상력 그리고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어떤 정체성이든, 여러분이 좋아하는 정체성을, 심지어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닌 죄인이라는 정체성마저도 창조할 수 있는 권리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정체성 속에 영원히 머물 수 있는 권리는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흐름으로 인해, 그것은 여러분이 뒤처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랑스러운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제한된 정체성 속에 갇혀,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을 바라겠습니까? 그러한 제한된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필연적으로 그러한 정체성을 잃게 될 것입니다. 성장하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자기감을 절대로 잃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특정한 정체성을 유지할 수는 없지만, 창조된 어떠한 형태와도 관계없는, 현재 진행 중에 있는 정체성은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참된 정체성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초월해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께서는 자신이 직접 창조하신 창조물을 뛰어넘어 존재하고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공동 창조자도 자신이 창조한 것, 심지어 형태의 세계마저도 뛰어넘어 존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창조주께서 확장하신 분신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이 세상에 창조된 어떤 형태보다도 더 큰 존재입니다. 자신의 신적 자아와 단절되고, 자기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 여기게 된 이후, 여러분이 창조했을 수도 있는 어떠한 정체성보다도 더 큰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자신과 분리되는 것도 허용하고 계시지만,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자신과 영원히 분리시키는 상황은, 어떤 상황도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풍요로운 삶에 언제나 미치지 못하는 분리의 상태 속에, 여러분이 영원히 갇히게 되는 상황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다시 한 번, 직선적인 마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개념 하나를 전해주고자 합니다. 물질 우주는 영화관에 비유될 수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영화를 시청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의 요소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영화가 투사되는 스크린이며, 또 다른 하나는 영사기 속에 들어가는 필름이며, 세 번째는 영사기의 전구에서 나오는 빛입니다. 영사기 속에 들어 있는 전구는 확장하는 아버지의 힘에 비유될 수가 있으며, 이 힘은 모든 형태의 창조물의 이면에 존재하는 추진력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신적 자아로부터 흐르는 영적인 빛입니다. 스크린은 물질의 빛에 비유될 수 있으며, 물질의 빛은 영사기에서 투사되는 형태가 어떤 것이든지, 그 형태를 비추게 될 것입니다. 필름은 공동 창조자의 의식에 비유될 수가 있습니다.


이제 극장으로 가서, 영화를 관람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영화의 첫 장면이 계속해서 반복된다고 생각해보세요. 다시 말해, 필름이 영사기 속에 들어 있으며, 움직이고는 있지만, 필름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이미지가 똑같다고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해서는 분명히,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정적인 장면으로, 곧바로 지루해지게 될 것입니다. 영화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은 필름마다 하나의 장면이 들어 있지만, 이 장면이 이어지는 장면과 약간 다르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비록 실제로는 정지된 화상을 모아놓은 것을 보고 있지만, 움직이는 영화를 보고 있다는 환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개개의 정지된 장면들이 단지 스크린 위에 아주 빠르게 연속해서 투사됨으로써,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영화라고 속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우주 속에서의 삶도 영화와 아주 흡사합니다. 여러분이 현재 직면해 있는 외적인 상황은 과거에 했던 선택들과 현재에 하고 있는 선택들의 결과물입니다. 여러분이 처해 있는 외적인 상황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정신적인 이미지를 삶이라는 스크린에 투사한 결과입니다. 영사기 속에서, 1초에도 새로운 이미지가 여러 차례 상연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외적인 상황은 여러분이 매초마다 물질의 빛에 어떠한 이미지를 여러 차례 투사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매 순간, 여러분은 물질의 빛에 투사하는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지를 바꾸고 싶지 않다면, 즉 우상을 지니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동일한 이미지를 계속해서 투사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이유로, 삶이 전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똑같은 문제를 반복해서 만나게 되며, 삶이 결코 끝나지 않는 투쟁처럼 보이게 되는 이유입니다.


현재 아픔과 고통만을 가져다주는 상황 속에 처해 있다면, 그 이유는 삶이라는 스크린에 여러분이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이미지를 투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의식으로부터 창조되지 않은 이미지를 투사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법칙들, 즉 여러분에게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주도록 되어 있는 바로 그 법칙과 일치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해 있는 상황이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 제약들로 인해 여러분이 갇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삶이라는 스크린에 동일한 이미지를 반복해서 투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 즉 유일한 방법은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이미지를 바꾸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즉 상상력과 자유의지 그리고 정체성을 똑같은 각인된 이미지 속에 갇히게 함으로써, 두 번째의 계율(출애굽기 20:4)을 위반하도록 하는 영적인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마음속에 지닌 이미지들을 움직이는 장면으로 바꿈으로써, 여러분의 삶은 점차적으로 해피엔딩을 향해 나아가는 영화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