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의식의 핵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창조주께서 자신을 개체화하여 분신들을 창조하시고자 하셨을 때, 어려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문제는 개체화한 분신과 전체 간에, 균형을 어떻게 유지하도록 하느냐 하는 것으로, 분신이 전체와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으면서, 또한 전체를 축소시키지 않고, 전체를 확대시키는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창조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의식을 지니고 계십니다. 형태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창조주의 의식 속에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창조주께서는 자신의 본질, 즉 자신의 존재 및 의식으로부터 모든 것들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창조주의 분신들, 즉 자의식을 지닌 공동 창조자들이 창조한 모든 것들도 또한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창조되었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창조된 모든 것들 속에 존재하시며, 따라서 창조주께서는 자신이 전체(All)라는 것을 인지하면서, 또한 모든 것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형태를 창조하신다는 말은 전적으로 옳다고만은 할 수가 없습니다. 창조주께서 자기 자신을 어떠한 형태로 구현하신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창조주께서는 어떤 형태든지 지닐 수가 있으며, 전체성(Allness)을 상실하지 않고도, 여러 제약들 속에 스스로 갇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어떠한 형태가 생겨나면, 그 형태는 어떠한 특성들을 지니게 되며, 이 특성들로 인해 형태가 전체와 분리되기 때문에, 존재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전체성(Allness:보편성) 속에는 어떠한 형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 허공 속에는 어둠만이 존재하며, 따라서 어떠한 형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 형태의 세계에 존재하는 기타의 형태들


형태의 본질은 그 형태를 분리시키는, 즉 그 형태를 차별화하는 개별적인 특성들에 의해 정해지게 됩니다. 만약 그 형태가 어떠한 특성들도 지니지 않았다면, 그 형태는 여전히 전체 속에 존재했을 것이므로, 별개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자기 스스로를 자의식을 지닌 존재로 구현하실 때, 그 존재는 반드시 개별적인 특성들을 지녀야만 합니다. 그 존재가 어떠한 개별성도 지니지 않았다면, 그 존재는 별개의 존재로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또한 하나님 존재의 전체와도 차별화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존재가 무생물이라는 형태 혹은 동물들처럼 자의식을 지니지 않은 존재로 나타날 때, 개별적인 특성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체와의 차별이 전체와의 분리로 결코 이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의식을 지닌 존재의 경우에는 잠재적인 문제, 즉 일종의 수수께끼가 존재하게 됩니다. 자의식을 지닌 존재는 자각, 즉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정체성의 핵심은 개별적인 특성들과 그러한 특성들을 여러분의 창조력을 통해 표현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별개의 존재로 존재한다는 자각입니다. 정확하게 말해,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지닌 개체성을 표현함으로써, 지구 행성을 포함하여 여러분이 존재하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공동으로 창조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전체의 일부로서, 그리고 하나님 몸체, 즉 형태의 세계에 존재하는 공동 창조자들이라는 가족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지닌 개체성을 표현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개체성을 마치 외부와 격리되어 있는 것처럼, 표현하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전체와 절대로 분리될 수가 없으므로, 자신이 일원으로 있는 전체를 고양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개체성을 표현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상상력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공동 창조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상상력과 자유의지를 표현하는 방식은 곧 여러분이 지닌 자의식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아직 구현되어 있지 않은 형태들을 마음속으로 그릴 수 있는 상상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이냐 하는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결정됩니다. 또한 이것은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어떤 형태들을 구현할 것인지, 혹은 어떤 형태들을 구현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자의식이 하나님의 진실과 일치하는 한, 즉 여러분이 전체(All)의 일부이며, 지구에서 하나님 몸체의 일부라고 인식하는 한, 여러분의 개별적인 표현은 전체와 부합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한한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마음속으로 자신의 자의식을 하나님의 전체와 분리되어 있으며, 그리고 다른 자의식을 지닌 존재들과 분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들과 경쟁 관계에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제한적인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제약적인 자아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여러분이 창조되었던 당초의 하나됨이라는 느낌이 아니라, 분리에 기초한 새로운 자아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능성은 자유의지와 상상력을 여러분에게 부여하는데 따른 불가피한 측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창조력을 이용하여, 여러분이 그러한 제약적인 자아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쉽게 올바른 자아상을 유지하고, 그러한 자아상 위에 쌓아가도록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셨으며, 따라서 여러분은 창조되었을 당초보다 더 적어지게 하는 잘못된 자아상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창조될 당시보다 더 큰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야 자의식을 지닌 존재가 하나님과 분리된 것처럼, 하나님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을 수 있느냐 하는 것, 혹은 자신이 우주에 존재하는 자의식을 지닌 유일한 존재인 것처럼 또는 중요한 유일한 존재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딜레마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동 창조자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는, 자의식을 지닌 존재들을 수도 없이 창조하셨습니다. 자의식을 지닌 이러한 존재들은 어느 누구도 홀로 떨어져 있는 섬으로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존재도 홀로 존재하도록, 혹은 하나님이나 다른 존재들과는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존재는 아끼는 아들로 창조함으로써, 왕과 같은 역할을 하고, 나머지 자의식을 지닌 존재들은 그 한 존재의 미천한 종이 되도록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으십니다. (사도행전 10:34) 창조주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공동 창조자들을 무한한 사랑으로, 사랑하고 계십니다. 사랑이 무한하고, 조건이 없다면, 어떠한 비교도 있을 수 없으므로, 좋아하는 아들과 딸들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똑같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의 눈에는 모두가 다 똑같이 소중하고, 똑같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의식을 지닌 모든 존재들은 창조주의 본질로부터 창조되었으며, 창조주께서 자기 스스로를 그러한 개체화한 존재로 구현하고 있다면, 어떻게 달리 될 수가 있겠습니까?


창조주께서 자의식을 지닌 존재에게 상상력과 자유의지를 부여하신 이상, 공동 창조자는 전체와 분리될 수가 있으며, 다른 존재들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심지어 다른 존재들보다 더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행동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을 전체와 분리시키는 행위 속에서, 자의식을 지닌 존재는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게 되며, 이 선악과(善惡果)는 실제로는 상대적인 선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원성적인 의식 속에서, 비교는 가능하며, 따라서 공동 창조자는 다른 존재들보다 더 뛰어나거나, 더 가치 있는 존재라는 자아상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존재는 전체를 확대시키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존재들을 지배하고 전체를 통제하려는 욕망을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공동 창조자가 진실로 이러한 이원성적인 자아상을 받아들인다면, 공동 창조자는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공동 창조자는 자신이 창조한 이러한 진실에 점차적으로 초점을 맞추게 됨으로써,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망각하게 됩니다. 공동 창조자, 즉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께서 개체화하신 분신으로 늘 인식하도록 되어 있는 공동 창조자는 하나가 된 상태, 즉 은총의 상태를 상실하게 될 수가 있으며, 그렇게 됨으로써 하나님과 따로 떨어져 있는, 그리고 하나님의 몸체와도 따로 떨어져 있는, 분리된 존재라는 제약적인 정체성으로 추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의식을 지닌, 그리고 상상력과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들을 창조하시는 바로 그 순간에, 존재하게 된 가능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과 딸들이 보다 낮은 정체성 속에서 길을 잃게 되는 것을 보시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에게 왕국을 주시는 것이 아버지의 기쁨이지만, 여러분이 그러한 왕국을 받을 수 있으며, 그리고 왕국을 받을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여길 때에만, 그러한 왕국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체와 스스로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풍요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여기거나,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게 되는 보다 낮은 정체성 속에 갇혀 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온전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러한 일을 피할 수 있을까요? 보다 낮은 정체성에 갇힐 수 있는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분의 상상력과 자유의지를 빼앗는 것입니다. 제약적인 정체성을 상상할 수 없다면, 그리고 그러한 정체성을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의지를 없애버리면, 길을 잃게 되지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창조적인 재능들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공동 창조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더 큰 존재도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허공을 빛으로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빛의 강도도 증가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더 큰 존재가 되고, 허공을 채우는 것은 바로 존재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직면해 있는 문제는 여러분이 지닌 창조력을 어떻게 하면 가능한 안전하게 행사할 수 있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기원과 근원을 망각하지 않고, 창조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절대적인 해결책이 없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되찾을 가능성을 상실하게 될 수도 있으므로, 절대적인 해결책을 찾아야만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리 멀리 움직여 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왕국으로 언제나 되돌아올 수 있는 독창적인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고안해내셨습니다.


하나이신 창조주께서는 두 개의 서로 보완적인 힘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창조의 과정을 시작하셨습니다. 도교(道敎)에서는 이 힘들을 음과 양이라고 불렀지만, 나는 이것들을 확장하는 아버지의 힘과 수축하는 어머니의 힘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이 두 개의 힘들은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은 절대적인 진실(unconditional truth)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두 개의 힘들이 반대되는 성질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보완적인 힘들입니다. 이 두 개의 힘들은 상대방을 상쇄시키지 않으며, 단지 서로의 균형을 유지시켜줍니다. 유지될 수 있는 형태가 창조되려면, 이 두 개의 힘들 간에 완벽한 균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떤 것이 유지될 수 있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열쇠는 창조의 목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허공을 채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빛을 증가시켜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속적인 성장과 자기 초월이 목표입니다. 확장하는 힘의 역할은 멈춰 서 있지 못하게 하기 위해, 창조물을 밖으로 내몰고, 방향을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확장하는 힘은 결코 특정한 형태에 한정될 수가 없으며, 언제나 더 큰 것이 되도록 커지게 하는 것입니다.


창조주의 특이점에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하기 위해, 반드시 외향적인 힘이 존재해야 합니다. 만약 외향적인 힘만 존재했었다면, 창조는 어떠한 독립적인 형태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며, 단지 지속적인 폭발만 존재했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수축하는 힘이 아버지의 확장하는 힘의 균형을 유지시켜 주게 되며, 서로 간에 균형이 이루어질 때, 지속될 수 있는 어떠한 형태가 창조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개의 기본적인 힘들은 형태를 창조하기 위한 토대를 제공해주게 됩니다. 성공적인 창조를 하기 위한 핵심적인 열쇠는 두 개의 기본적인 힘들 간에 올바른 균형입니다.


확장하는 힘이 너무 강하게 되면, 모든 형태는 산산조각이 나게 될 것입니다. 수축하는 힘이 너무 강하면, 성장을 멈추게 함으로써, 결국 모든 형태들은 스스로 붕괴될 것이며, 물질의 빛은 기저의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두 개의 힘들 간에 올바른 균형을 유지시켜 줄 수 있는 것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며, 그래야 창조물은 멈춰 서 있지 않고, 유지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속성은 멈춰 서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지속적인 자기 초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생명에 대한 정의는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모든 것들은 지속적으로 자기 스스로를 초월하는 과정 속에 있으며, 언제나 더 큰 하나님을 구현함으로써, 허공 속에 존재하는 어둠을 대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확장하는 힘과 수축하는 힘은 자체적으로 형태를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확장하는 힘은 언제나 확장하며, 수축하는 힘은 언제나 수축할 것이므로, 어느 쪽이든, 모든 형태, 모든 구조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어떠한 형태가 창조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잠재력으로서, 그 형태에 대한 정신적인 이미지 먼저 존재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두 개의 힘들 간에 균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형태가 역동적인 상태에서 유지될 수가 있으며, 따라서 형태는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더 크게 성장할 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수축하는 어머니의 힘은 물질의 빛 속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파도가 없는 잔잔한 바다에 비유될 수가 있습니다. 확장하는 아버지의 힘은 바다에 부는 바람과 같으며, 파도를 일으키게 됩니다. 빛의 무한한 바닷속에 있는 파도들이 별개의 형태들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의 빛은 어떤 형태든, 형태를 지닐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형태들 가운데 일부는 바다에 있는 파도들이 서로를 상쇄시킬 수 있는 것처럼, 서로를 상쇄시킬 수가 있습니다. 특정한 형태들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특정한 형태가 지닌 속성들은 그 형태가 물질의 빛 위에 포개지기 전에, 반드시 잠재적인 가능성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확장하는 힘은 무계획적인(indiscriminate) 폭발이 아니라, 물질의 빛이 특정한 형태를 지닐 수 있도록, 반드시 빛이 흐를 수 있는 어떠한 틀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확장하는 힘과 수축하는 힘은 그러한 정신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가 없으며, 그러한 틀을 이용하여, 확장하는 힘이 어머니의 빛으로 흐르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이미지를 그릴 수 있는 상상력과 그러한 이미지를 물질의 빛 위에 포개놓을 수 있는 의지를 지닌 마음, 즉 자의식을 지닌 존재만이 그러한 이미지를 지닐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은 자신이 존재하고 있으며, 또한 창조의 기본적인 힘들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자의식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창조주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지니고 계시지만, 창조주께서는 모든 것을 혼자서 창조하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창조주께서는 공동 창조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개별적인 존재들로 자기 스스로를 구현하기로 하셨습니다. 이러한 존재들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어떠한 형태에 대한 이미지를 마음속으로 그릴 수 있으며, 그런 다음 그러한 이미지를 물질의 빛 위에 투사할 수 있는 정신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확장하는 힘이 틀 속으로 흐르게 됨에 따라, 어머니의 빛은 여기에 맞는 형태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공동 창조자들에게 이러한 능력을 주는 걸까요? 그것은 공동 창조자들이 하나님의 또 다른 측면, 즉 창조주로부터 창조되었으며, 창조주께서 개체화하신, 즉 확장하신 분신이라는 사실이며, 성경에서는 이것을 말씀 혹은 은혜와 진리가 가득한 아버지의 독생자(요한복음 1:14)라고 부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