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들이여, 현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종교들은 모래 위에 쌓은 바벨탑(창세기 11:4)과 집들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황금시대가 실현되기 이전에, 이러한 것들은 정말로 허물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들에 길을 터주기 위해, 낡은 것들은 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자연이라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 목격할 수 있는 불변의 원리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지구에 존재하는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보고 있는 외적인 환경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들이 더 좋아질 수 없으며, 더 큰 존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의 제도와 관습들을 더 좋은 것, 더 큰 어떤 것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을 유지하고,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살펴보면, 종교계 속에도 과거의 체계와 교리, 경전들을 유지해야 한다고 여기는 성향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어떠한 변화에도 이러한 체계들을 고수하는 것이 자신들의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설명했던 것처럼, 주류의 종교들은 모두 이원성적인 의식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원성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을 보존해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상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이원성적인 이미지 뒤에 가려져 있는 진리의 영을 직접적으로 체험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 아닌가요?


사랑하는 이들이여, 인류가 비-이원성적인 형태의 영성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러한 이원성적인 체계들은 반드시 허물어져야 하며, 포기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의식을 체화하고, 그것을 표현함에 따라, 여러분은 어떤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종교적인 체계들을 무너뜨리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은 대개 여러 생에 걸쳐 쌓아온 바벨탑에 감정적으로 집착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모든 전통적인 종교들이 무너져야 한다거나, 사라지게 될 거라는 말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주기 바랍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구조(structure)는 오직 그 자체를 초월함으로써만, 보존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비-이원성적인 비전에 의해 변형되지 않는 구조물들은 성령의 바람에 의해 정말로 허물어지게 될 것입니다.


육화해 있는 인간의 마음에게 감옥이 되어 왔던 체계들을 허물어버리도록 되어 있는 하나님의 힘, 즉 자연 그 자체의 힘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감옥의 벽을 허물어뜨려야만, 사람들이 고차원적인 미래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더 커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힘은 동양에서는 파괴자인 쉬바(Shiva)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쉬바는 그리스도의 바위 위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비전에 따라 세워진 것은 절대로 파괴하지 않으며, 오로지 이원성적인 의식에 따라 세워진 것들만을 파괴합니다.

이 힘이 서양에서는 성령의 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참된 역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심지어 성령(Holy Spirit)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거짓된 영(spirit)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영은 그들이 만들어낸 이원성적인 믿음 체계 속에서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이들이여, 만약 어떠한 힘이 - 아무리 영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 여러분이 지닌 믿음을 시험하지 않는다면, 그 힘은 성령이 아닙니다. 성령은 어떤 것이든 시험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설명하고자 했던 것처럼, 이 세상의 어떤 믿음이든, 여러분의 마음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덫이 될 수 있으며, 이 덫은 여러분을 방해하여,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초월하고 있는 생명의 강과 함께 흐르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성령의 임무라고 알려주는 것을 여러분이 인식하고, 충분히 체화(내면화) 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성령의 참된 공동체, 즉 사람들, 즉 이원성적인 의식이 정해놓은 모든 경계를 초월해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사명입니다. 이 말은 공동체가 모든 외적인 종교들, 모든 외적인 종교적인 가르침들과 인종과 성별 그리고 국적 혹은 민족성과 같은 모든 외적인 구분들을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성령은 어떤 것도 영원하다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공동체 역시도 영원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공동체는 언제나 스스로를 초월하려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참된 영과 하나가 됨으로써 더 높이 오르려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이들이여, 어제까지 이룬 것으로는 오늘 충분치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일 또한 오늘 이룬 것으로는 충분치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 책에서 전하는 가르침들이 확장될 수 없으며, 심지어 더 높은 가르침으로 대체될 수 없는, 오류가 전혀 없는 경전의 상태로 격상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이들이여, 여러분에게 온전한 진리를 전하는 것이 내 목표이긴 하지만, 미래에는 언제나 더 큰 것이 전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의식이 상승하게 됨에 따라, - 나는 이 책이 이러한 진보를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리라 희망하면서 - 심지어 상승한 호스트들에 의해 이보다 더 심오한 계시(啓示)들이 전해질 수 있으며, 전해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언제든지 새로운 계시들을 받을 수 있는 성령의 공동체가 출현하는 것을 보고자 하며, 이미 최고의 계시를 받았다거나, 이미 최고의 메신저가 있다거나, 그리고 더 이상 어떠한 가르침도 전해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과정(계시를 받는 것)이 중단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성령의 공동체는 상승한 호스트들로부터 주어지는 진보적인 계시를 받는데 영원히 전념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공동체, 운동 혹은 조직이 궁극적인 계시를 정의하고, 이제 그러한 계시가 중단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러한 공동체는 더 이상 성령에 의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공동체는 성령 그 자체, 즉 자기 초월이라는 본질로부터 실제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자기 초월을 멈추는 순간, - 어떠한 가르침, 어떠한 체계를 이용하여, 자기 초월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는 구실로 삼고자 한다면, - 바로 그 순간에, 여러분은 하나가 되는 길(Path of Oneness)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강과 분리되며, 이것은 성령에게 비록 성령이 임의로 분다 할지라도, 어딘가로 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더 이상 성령이 흐를 수 있는 열린 문이 되고자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여러분이 이원성에 눈이 멀어 있는 사람들의 믿음과 제도와 관행에 도전함으로써, 이들이 여러분을 제거하려고 한다면, 이로 인해 여러분이 현재의 의식 상태에서 두려움과 무서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입문과정을 통과할 수 있는 의식 상태에 도달하기 전에는, 그러한 입문과정과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법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랑하는 이들이여, 예수님과 붓다의 삶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가장 높은 그리스도의 신성의 단계에서 마주하게 되는 입문과정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와 같은 그리스도 신성의 단계에 도달하기 전에는, 그러한 입문과정들과 마주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보다 낮은 단계들에 있는 동안에는, 예수님과 붓다께서 마주했던 것과 같은 가혹한 입문과정을 맞이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극복할 수 없는 입문과정은 결코 마주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주하게 되는 모든 시험은 통과할 수가 있지만, 하나가 되는 길(Path of Oneness)에서 여러분이 어느 단계에 있느냐 와는 관계없이, 그 단계에서 마주하게 되는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정확히 말해, 여러분이 자기 초월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초월을 멈추는 순간, 필연적으로 여러분은 현재의 의식 상태에서 제시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더 높이 올라갈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이 멈춰 서 있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하향 나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될 것이며, 대개는 무엇이 일어났는지도 눈치채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초월을 거부하면, 자아(Self)에 대한 시험, 즉 하나님의 완전 의식에 도달할 때까지, 자기감을 계속 확장시켜야 하는 도전에 실패하게 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우상에도 결코 만족하지 않아야 하며, 창조주와 하나가 되는 것보다 적은 것에 결코 만족해서는 안 되는 도전과제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리고 여러분이 어떠한 상황에 직면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현재의 의식 단계를 초월하려고 하는 한, 그러한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바랍니다. 이 말이 한 번의 도약으로, 여러분이 현재 있는 곳에서 예수님이나 붓다의 의식으로 뛰어오르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삶이라는 영적인 계단에서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디기 위해, 현재의 단계를 초월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현재 보고 있는 제약들을 벗어나야 하며, 여러분이 자기감의 제약이라고 아는데 익숙해져 있는 것들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뛰어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노력을 증식시키실 것이며, 하나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분리된 자아로서의 여러분은 시험에 통과할 수 없지만, 더 큰 존재가 되고자 하는 여러분은 정말로 모든 시험을 통과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시험이 현재의 정체성에 집착하느냐, 아니면 더 큰 존재가 되고자 하느냐의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궁극적으로, 어떻게 하면 추락한 존재들, 즉 이원성적인 의식에 빠져 있는 존재들의 반대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원성적인 의식에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즉 이원성의 환상에 눈이 멀면 멀수록, 그 존재는 자기 자신과 자신이 믿고 있는 것, 또한 진지하게 행하는 모든 것을 그만큼 더 진지하게 대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심하게 눈이 멀어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너무 진지하게 대하여,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개인적인 공격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100% 복종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을 반대하는 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여러분을 침묵하게 하거나, 심지어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도, 이것이 정당화된다고 느끼게 됩니다.


흔히 하는 말처럼, 악마를 보고 비웃으면, 악마는 도망간다고 하는 말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자기 자신을 진지하게 대하고,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자신을 진지하게 대하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악마는 자신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게 되며, 따라서 결국 도망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살펴보면, 추락한 존재들과 대면하게 되었을 때,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유쾌하거나, 농담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2000년 전과는 시대가 아주 달라졌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다른 상황과 마주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인류가 그리스도의 의식에 이르는 길에 다가서도록 하기 위한 선구자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본보기를 보여주기 이전에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의식을 성취한다는 것이 지극히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오늘날에 여러분이 직면하게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반대에 부딪쳐야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그리스도 의식을 성취했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더 높이 보다 쉽게 오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성취한 업적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보다 더 큰일도 할 수 있다는 예수님의 예언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표현함으로써, 여러분은 예수님의 본보기를 통해 배우고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 말이 예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것을 똑같이 모방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지닌 개별적인 그리스도의 신성을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쌍어궁 시대에서 보병궁 시대로 움직여 감에 따라, 이 특정한 시기에 표현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새 시대는 영적인 자유의 시대이며, 자유는 통제 하에서는 번창할 수가 없습니다. 자유는 기쁨이 존재할 때, 열정이 존재할 때, 번창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은 종교에 비-이원성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기쁨과 열정을 지니고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지구에 왜 이토록 많은 종교가 존재하며, 이러한 종교들로 인해, 사람들이 하루 종일 얼마나 우울한 표정(long face)을 하고 돌아다니는지를 살펴보기 바랍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종교로부터 등을 돌려 왔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두려움과 모든 것을 너무 진지하게 대하는 성향 때문에, 실수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삶을 실험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 수 없다(마가복음 10:15)는 예수님의 명령을 여러분은 이 시대에 실행에 옮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린아이들은 기쁨에 차 있으며, 열정적이고, 자유로우며, 여러분이 밖으로 나가, 비-이원성적인 방식으로 종교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호소할 때, 이러한 것들은 반드시 표현되어야 하는 속성들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영성에 신이 나 있으며, 영성에 열정적이며, 영성에 기뻐하며, 어떤 것도 금기시하지 않고, 영성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알려지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반대에 부딪친다 해도, 개의치 않는 사람으로 알려지세요. 사람들이 여러분의 기쁨, 여러분의 열정을 빼앗아가지 못하게 하세요. 그들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던지다 해도, 평화와 기쁨 속에 머물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