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성을 벗어나 있으며, 또한 초월해 있는 중도(中道:Middle Way)를 찾을 수 있는 열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알고 있는 것과 내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불렀던 것 사이에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사랑은 자기중심적이며, 또한 소유적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사실, 이들은 자기 자신들을 위해, 어떤 것을 갖고자 하는 희망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는 사랑은 사랑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통제함으로써,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한다는 의미에서, 소유적인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어떠한 조건을 정하게 되며, 자신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이러한 조건에 맞게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 이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자신들이 정해놓은 조건을 다른 사람들이 따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신성한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이며,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게 공짜로 주어지는 햇빛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신성한 사랑은 평화주의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 신성한 사랑은 햇빛보다 더 지성적이며, 이 사랑을 받는 존재에게 미치는 영향은 이 사랑으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또한 신성한 사랑은 받는 사람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확대시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성장하고자 한다면, 그 개인은 자신의 재능들을 증식시킬 것이며, 신성한 사랑은 그러한 성장을 가속화시킬 것입니다. 만약 개인이 성장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재능을 땅 속에 묻어두게 될 것이며, 그러면 신성한 사랑은 개인의 이기심만을 증식시켜, 그 이기심이 더 잘 보이도록 할 것이며, 외면하기가 더 어려워지게 될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될까요?


조건 없는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한 가지 측면은 이러한 사랑이 모든 존재들에게 공짜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동적인 측면 혹은 모든 생명을 양육하는 어머니의 측면입니다. 하지만 다른 측면은 적극적인 혹은 아버지의 측면으로, 어떠한 존재든, 그 존재가 제한된 정체성 속에 영원히 갇히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성한 사랑은 진실로 우주의 원동력이며, 모든 생명이 성장하여 더 큰 존재가 되도록 추진하는 힘입니다. 따라서 조건 없는 사랑은 모든 생명의 성장을 방해하는 어떠한 조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신성한 사랑은 당연히 자유의지의 범위 내에서 작용합니다. 따라서 이 신성한 사랑은 존재가 생명 자체의 힘, 즉 성장과 자기 초월을 하게 하는 힘에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존재는 자기 초월을 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을 만들어냄으로써, 이렇게 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가 있습니다. 비록 어떤 존재가 그러한 조건을 정의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 오로지 이원성적인 의식을 통해서만 가능함 - 그 존재는 그러한 조건을 무한정 유지할 수 있는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조건 없는 사랑의 힘은 어떤 존재를 성장할 수 없도록 방해하는 조건들에 대해, 이의(異議)를 제기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두 가지의 방식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온화한 방식으로, 인류의 영적인 스승들이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영감을 불어넣어, 이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의문을 가지도록 하며, 이렇게 하기 위해 영적인 가르침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을 제약하는 상황들을 스스로 만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따라서 이들은 그러한 상황들을 자발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지점까지 당연히 성장하게 될 것이며, 그런 다음에는 그러한 상황들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고무적인 힘에 저항하게 된다면, 이들은 두 번째 힘, 즉 시련의 학교에 의한 힘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은 그러한 상황들이 보다 더 잘 보일 수 있도록, 그들이 지닌 상황들을 커지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다행히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며, 그러한 행위들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우주는 사람들이 보낸 것을 - 조건 없는 사랑의 힘으로 증식시켜 - 되돌려주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증오심을 더 많이 보내면 보낼수록, 더 많은 증오심이 되돌아오게 될 것이며, 이러한 하향 나선은 사람들이 체험할 만큼 충분히 체험하고 난 후, 스스로를 변화시키려고 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의 힘은 사람들이 이원성적인 환상의 일부 혹은 전부를 버릴 때까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해서 제공해줄 뿐입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생명을 언제나 자유롭게 해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본적인 원리는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면, 더 잘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부의 사람들은 영적인 가르침이라는 영감을 통해 더 잘 알게 될 수도 있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들에 의해 눈이 멀게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가 있을까요? 오로지 선택을 통해서만,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이들은 상황들을 보고, 이러한 상황들이 자기 스스로를 제약하게 만드는 문제로 인식할 때까지, 삶의 결정(LIFE decisions)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상황이 일시적으로는 사람들을 성가시게 한다 하더라도, 이원성적인 상황들을 촉진시키고, 커지게 하는 것이 실제로는 자신들을 위해 최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돕는 유일한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지구에 존재하는 상위 10%의 사람들은 조건 없는 사랑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상승한 호스트들의 입이 되고, 영적인 가르침을 통해 사람들을 일깨우고, 살아 있는 본보기가 됨으로써,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사람들은 조건 없는 사랑이 확장한 분신이 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사람들이 보낸 것을 다시 되돌아오게 함으로써, 이들이 지닌 이원성적인 믿음을 더 잘 볼 수 있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이원성적인 것과 비-이원성적인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원성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제 이들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교회의 성직자들과 법률가들에게 적극적으로 도전했던 이유입니다.


모든 사람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조건 없는 사랑을 지니셨으며,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난 속에 홀로 남겨두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림받았다고 여겼던 모든 사람들과 접촉하셨으며, 괴로움을 겪고 있던 모든 사람들을 보살펴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통제권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던 오만한 자들에게 도전했던 것입니다. 아주 많은 영성인들이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 히말라야의 동굴 속에 앉아서, 하루 24시간 내내 하나님에 대한 명상을 하는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랬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명상을 하신 후, 광야에 머물지 않았을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산에 머물러 있었다면 피할 수 있었던, 온갖 모욕과 십자가형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왜 붓다께서는 열반을 성취하신 후, 열반에 머물러 있지 않았을까요? 붓다께서는 사회로 돌아가, 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과 붓다께서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가지지 않았으며, 조건 없는 사랑을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두 분께서는 사람들이 이원성적인 의식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내버려 둔 채, 자신들만 고차원의 의식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두 분께서는 자신들이 성취한 의식 상태를 사람들이 체험할 수 없도록 방해하는 상황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두 분께서는 분리된 정체성을 극복하셨으며, 따라서 모든 생명과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며, 이러한 깨달음으로 인해, 모든 생명을 끌어올리려는 열망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땅에서 들리면, 당연히 모든 사람들을 여러분에게로 끌어당기고 싶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32)


만약 눈가리개를 하고 있는 사람이 구렁텅이를 향해 걷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처하겠습니까? 눈가리개를 하고, 걸으려고 했던 것은 그 개인의 선택이므로, 자신의 선택을 통해 배울 수 있도록 내버려 두어야 할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눈가리개를 씌웠다면, 눈가리개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눈가리개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그가 자유로운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고 추정해야 할까요?

상위 10%의 사람들 중에서도 자신이 매우 사랑스러우며,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단지 적극적이고, 광신적인 태도와는 반대되는 이원성적인 극성인,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눈가리개를 한 사람들이 구렁텅이를 향해 걷고 있는 것을 보고도, 그러한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 자신들에 대해서만 - 자신들은 오직 사랑스럽고, 친절해야 한다는 이원성적인 이미지에 - 관심을 집중한 나머지, 실제로 도움이 되는 일, 즉 지붕 꼭대기로 올라가, “이원성의 임금님은 아무것도 입지 않았어요.”라고 외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실로 이것이 사랑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이것이 정말로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나는 이것이 정말로 이기적인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기심에 대해 살펴보고, 이러한 이기심을 극단적인 상황과 연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다수의 영성인들은 이기심을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기적이 되지 않기 위해,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이기적이라고 하면, 이들은 이것을 받아들이기를 아주 꺼려합니다. 하지만 이기적이라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요? 이기심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미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을 위한 최선이 진실로 무엇일까요? 글쎄요, 그것은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분리된 자아로 정의하나요, 아니면 하나님의 몸체라는 전체(All)로 정의하나요? 분리와 이원성이라는 환상에 기초하여, 자신을 정의한다면, 여러분은 필연적으로 투쟁과 고통이라는 끝없는 순환을 겪고 있는 것에 대해 자기 자신을 책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정말로 자신을 위한 최선일까요? 만약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진실에 기초하여, 자기 자신을 정의한다면, 여러분은 생명의 강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됨으로써 여러분의 삶은 끝없는 성장의 과정이 될 것이며, 긍정적인 것은 무엇이든, 점점 더 커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명의 강으로 들어가는데 무엇이 필요할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해야 하는 모든 것은 분리된 자아라는 환상을 버리기만 하면, 다시 말해 자아가 하나라는 진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다음, 더 큰 자아가 되기 위해 최선인 것을 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 우주는 여러분의 모든 노력을 지원할 것이며, 증식시키게 될 것입니다. 삶을 통해, 여러분의 개인적인 자아와 현재 여러분이 일부라고 알고 있는 더 큰 자아는 틀림없이 상승 나선이 될 것입니다.


영적인 길에서, 자신의 영적인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당연하며, 또한 받아들일 수 있는 단계가 정말로 존재합니다. 대중 의식을 따른다고 해서, 영적으로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중 의식은 영적인 노력을 하지 못하도록 여러분을 떼어놓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일시적으로 영적인 성장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물질적인 “정상적인” 삶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상위 10%의 사람들 중에는 삶에서 이러한 단계를 끝마친 사람들이 수백만 명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든 존재들이 성장의 과정에서 맞이하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분기점, 즉 앞에서 설명했던 전환점을 이미 도달해 있습니다. 이 지점은 자신의 성장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하며, 영적으로 자립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분리된 자아감을 버려야 하며, 더 이상 자신만의 성장을 위해 일하지 않고, 모두, 즉 하나인 자아(one Self)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해, 여러분은 자신의 생명, 즉 여러분의 분리된 생명의식을 기꺼이 버려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와 붓다의 삶을 조사해보면, 이 두 분께서도 자기 자신의 의식 상태를 끌어올리는데 초점을 맞추었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분께서는 어떠한 전환점, 즉 비-이원성적인 의식상태라는 문턱에 도달했습니다. 그 시점에서 두 분께서는 어떠한 선택, 즉 그리스도와 붓다를 우상화하고 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그리고 이 두 분께서 틀림없이 성공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어떠한 선택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분께서 직면하셨던 선택은 간단했습니다. 계속해서 개인적인 자아에 집중할 것인가, 아니면 모두(All)에게 집중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분리된 자아를 버리고, 의식적인 자아가 깨어 있는 자아, 계몽된 자아가 되는 선택으로,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나는 앞에서 추락한 존재들이 영적 세계로부터 추락하도록 만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들이 추락하게 된 이유는 모든 생명에게 사심 없이 봉사하려고 하지 않고, 분리된 자아에게만 봉사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들 중에는 의식이 일단 어떠한 단계로 상승하고 나면, 다시 되돌아가거나, 상승이 무효화될 수 없다고 믿고 있는 고지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상승하지 못한 구체 속에 존재하는 한, 아무리 높은 영적인 이해를 성취했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정말로 추락할 수가 있습니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물질을 어느 정도 지배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을 통달한 사람들이 정말로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기적과 같이 보이는 것을 실행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분리된 자아를 높이기 위해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진실로 경고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적을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기(마태복음 24:24)” 때문입니다.


상위 10%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현재 그리스도의 신성으로 들어갈지, 아니면 추락한 존재들이 지닌 이기심으로 들어가야 할지를 선택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 봉착해 있습니다. 문제는 간단합니다. 타인들에게 사심 없는 봉사로 표현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이기심이 영적인 재능으로 가장(假裝) 하고 있는 것뿐이며, 이것이 표적이나, 기적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가면을 쓰고 있는 추락한 의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 바울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고린도후서 11:13)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린도후서 11: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내 말의 요지는 이 책을 여기까지 읽었다면, 여러분은 이 행성에서 가장 영적인 사람들 가운데 상위 10%의 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 행성을 황금시대로 나아가게 할 운동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능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이 장에서 설명한 이원성적인 아주 교활한 환상들을 이겨내야 합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남은 유물이라 할 수 있는 분리된 자아라는 환상을 극복하고, 진실로 하나뿐인 자아(one self)를 끌어올릴 수 있도록 일해야만 합니다. 여기에는 하위 10%를 노출시키고, 도전하는 것도 포함되며, 심지어 그들이 여러분이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그들이 공격할 때에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설사, 중간의 80%인 일반 대중들이 세속의 상태에서 잠들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을 일깨워서, 영원한 삶에 눈을 뜨게 해야 하며, 이들이 여러분의 노력에 대해 전혀 감사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이들을 일깨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