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여러분은 나에게 어떤 것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행한 어떠한 행위에 대해서도, 내가 판단하지 않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가치판단이라는 통속적인 개념은 이원성적인 의식과 상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생기게 되는 또 다른 결과물이라는 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참된 스승에게 등을 돌린 이상, 거짓된 스승들은 여러분이 절대로 스승에게 되돌아갈 수 없다고 믿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은 분리된 환상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며, 이들은 자신들이 정확히 원하는 대로, 여러분을 통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참자아를 보고 있으며, 또한 모든 불완전한 것들은 의식적인 자아가 단지 일시적으로 지니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인식함으로써, 여러분은 이것을 버릴 수 있으며, 참된 자신으로 되돌아올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에는 나는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위에서처럼, 여기 아래에서도 여러분이 모든 것이 되는 것을 보고자 할 뿐입니다.


여러분을 책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상위 존재와 하나가 되는 것에 토대를 둔 정체성을 구축하도록 만듦으로써, 여러분이 영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내가 해야 하는 역할입니다. 나는 단 1초도 여러분이 제한된 정체성 속에 갇히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모든 제약들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랄 뿐이며, 언제나 여러분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할 따름입니다. 문제는 여러분을 대신하여, 내가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원성적인 환상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한 것은 바로 여러분이며, 따라서 그러한 환상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진리로 대체하겠다고 여러분이 선택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말로 알지 못한 채, 이원성적인 환상을 선택했을 수도 있지만, 이것을 의식적으로 버리겠다고 선택하지 않으면, 그러한 환상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환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기꺼이 환상을 바라보고자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환상에 속았으며, 환상에 따라 행동했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정해야 합니다.


거짓된 스승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조종을 당함으로써, 하나님 혹은 영적인 참된 스승들로부터 자신들의 실수에 대해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거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사례는 아담과 이브에 대한 이야기로, 이들은 불타는 검(flaming sword)을 지닌 천사들에 의해 낙원에서 추방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대리인들은 누군가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이원성적인 의식을 사용하여, 이원성적인 기준에 따라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은 거짓된 스승들입니다.


거짓된 스승들은 자신들이 지닌 의식 상태를 하나님과 참된 스승들에게 투사해 왔으며, 사람들은 이로 인해 거짓된 스승들은 신뢰하는 반면, 참된 스승들은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스승이 자신들을 심판할 거라고 생각함으로써, 사람들은 참된 스승을 의지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실제로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에고가 지닌 이원성적인 판단입니다. 신비에 싸인 예수님의 두 개 말씀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8: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요한복음 8: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9:39)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숨은 뜻은 판단하도록 되어 있는 것은 아들(Son)의 의식이지만, 이 의식은 이원성적인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참된 판단은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사람들은 이원성적인 환상과 그리스도의 진리 간에 실질적인 선택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하는 역할은 사람들이 진정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갈구하는 사람들은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의 차이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닌 이원성적인 믿음에 의해 눈이 멀게 될 것입니다. 이원성적인 믿음으로는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을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것이 이원성적인 환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이원성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며, 이원성적인 기준이란 외적인 행동에 기초하여,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가치판단을 하지 않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사람들보다 못하다고 비난하거나,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다고 치켜세우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오로지 여러분의 행위가 삶의 질을 높여주는지, 즉 여러분 자신과 모든 생명을 끌어올리는지, 아니면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지, 즉 여러분 자신과 모든 생명을 제약하는지를 판단할 뿐입니다. 어떠한 행위가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마음은 단지 그것을 버리고, 그러한 행위들 뒤에 숨어 있는 의식을 초월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스도는 오직 여러분이 자유롭게 되고, 계속 갇혀 있는 것을 절대로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언제나 가슴속에 간직하기 바랍니다. 만약 참된 스승들이 정말로 여러분을 책망하고, 죄의식을 느끼도록 만들었다면, 우리는 여러분을 이원성적인 의식 속에 계속 갇혀 있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사명과 본성, 즉 비-이원성적인 속성과도 전혀 맞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나요? 이원성적인 판단에 따르면, 만약 여러분이 이것 혹은 저것을 한다면, 그 후, 여러분은 영원히 나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판단으로 인해, 여러분은 자신의 행위들 가운데 일부는 실재하지 않는 믿음들로부터 생겨났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목적은 영원히 여러분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영원히 자유롭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자마자,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용서받게 됩니다. 잘못을 저질렀던 “여러분”은 죽고, 진짜 여러분, 즉 의식적인 여러분은 새로운 정체성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여러분은 과거의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 과거의 잘못을 통해 교훈을 배웠다 할지라도, - 따라서 과거의 잘못으로 인한 짐을 짊어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제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도록 합시다. 여러분의 존재 속에 있는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요? 글쎄요, 여러분의 의식적인 자아가 그 자리를 맡도록 되어 있으며,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의식적인 자아는 빠르게 이원성적인 모든 믿음들과 행위들을 드러날 수 있게 할 것이며, 어떠한 부정적인 느낌도 가지지 않고, 그것들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더 큰 존재라는 것을 충분히 깨닫게 될 때, 적은 모든 것들을 손쉽게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정당한 역할을 받아들이고자 결심할 때, 비로소 모든 두려움과 죄책감 그리고 수치심을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원성적인 환상들을 초월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여러분이 영적인 자유를 얻게 되는 것만을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이제 알기 되기 때문입니다. 초월해야 환상 속에는 실수한 것에 대하여 기분 좋지 않게 느낌으로써, 실수에 대해 어느 정도 보상해야 한다는 환상도 포함되며, 이로 인해 이원성에 갇히게 됨으로써, 계속 이원성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다고 선이 되지는 않는다는 옛말처럼,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 기분 나빠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단지 버려야 하는 것은 그러한 행동을 하게 했던 이원성적인 환상이며, 여러분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이원성적인 환상들 가운데 하나를 꿰뚫어 볼 수 있도록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나는 언제든지 도와줄 용의가 있습니다. 요청하지 않는다면, 자유의지의 법칙에 따라, 나는 여러분을 도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요청하자마자, 여러분과 나와의 관계는 다시 복원될 것이며,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관계는 이원성과 분리의 유혹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게 해줄 하나가 되는 느낌으로 커지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2:32) 두려워하지 마라. 적은 무리여,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말라기3:10 )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여라. 이렇게 바치는 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서, 너희가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지 않나 보아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거짓된 신들이 사용하는 기본적인 전략은 여러분을 유혹하여, 이원성적인 의식을 함께 나누어 먹도록 하는 것이며, 그런 다음 여러분은 절대로 도망갈 수 없으며, 자신의 실수에 대해 보상할 방법이 없다고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돌아가게 된다면, 하나님과 참된 영적 스승들은 여러분을 엄하게 심판하게 될 거라고 믿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스승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스승으로부터 숨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심판은 이원성적인 의식으로부터 생겨나며, 여러분을 심판하는 것은 진실로 여러분의 에고와 이원성적인 세력들입니다. 스승으로부터 숨으려고 함으로써, 이러한 심판을 끝없이 체험하는 의식 상태에 머무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단지 자기 자신을 책망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런 다음, 영원히 지옥에서 불타야 하는 심판을 피하기 위해,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줄 게임 속에 계속 빠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단지 환상에 불과하며, 여러분이 하나가 되는 길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진실로 아무것도 없으며, 이 하나가 되는 길에서 여러분은 인류의 참된 영적 스승으로부터 조건 없는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 말의 요지는 만약 심지어 실수처럼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으로부터 배우고자 한다면, 여러분이 행한 어떠한 행위도 더 높은 자각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도록 돕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로지 여러분의 자의식이 성장하게 되기만을 바라시며, 따라서 어떠한 행위를 통해 성장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행위를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쪽의 끝은 성공이고, 다른 한쪽의 끝은 실패인, 이원성적인 기준에 기초한 행위들에 대해서도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기준에 기초하여, 자기 자신을 심판하거나, 혹은 타인들의 심판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행위를 성공과 실패라는 이원성으로부터 분리시킨다면, 궁극적인 조치를 취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 자신의 의식 상태 그리고 자신의 구원에 대해 충분한 책임을 받아들일 때까지, 여러분은 이러한 조치를 취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전적인 책임을 받아들여야만, 행위와 결과를 분리시키는 조치, 즉 작용과 반작용을 분리시키는 조치를 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물질세계의 핵심적인 속성이라 할 수 있는 이원성을 극복할 수가 있으며, 이 이원성으로 인해, 여러 행위들을 저지르게 됨으로써, 여러분은 우주로부터 카르마라는 형태로 반작용을 불러오게 되는 것이며,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전에, 이러한 카르마는 반드시 소멸되어야 합니다. 그 대신에, 자신을 이 세상에 묶어두는 카르마를 생성하지 않고도, 즉 반작용이라는 궁극적인 이원성을 만들어내지 않고도, 행동하는 방법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물질세계는 빛과 어둠이 공존함으로써, 궁극적인 이원성, 즉 작용과 반작용이 생겨날 수가 있으며, 반작용을 불러오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될 때, 여러분을 물질세계에 묶어둘 수 있는 것은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확실히, 이것이 불가사의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많은 존재들이 자신들이 지닌 빛과 진리를 공유할 목적으로 보다 높은 세계에서 물질 우주로 내려왔습니다. 이러한 존재들 중에서 많은 숫자가 이원성적인 의식이라는 덫에 갇혀 있으며, 이러한 덫에 갇히게 된 이유들 중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물질세계에서 행위에 따른 특정한 결과를 얻고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어떠한 행위들을 한다면, 어떠한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기대했고, 바랬으며, 심지어 요구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결과가 실현되지 않으면, 이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이로 인해 이들은 이원성의 구덩이, 즉 절망의 구덩이로 이어지는 계단 아래로 더 깊숙이 내려가게 된 것입니다.


종교로 인해, 대개 행위에 따른 결과를 더 기대하게 되었으며, 내가 앞장에서 이야기했던 것들로 인해, 기대가 더욱 커지게 되었다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종교들이 자기 자신과 세상 혹은 타인들을 구원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많은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정해놓은 희생을 감수하거나, 타인들을 자신들의 종교로 개종시킨다면, 어떠한 결과를 얻을 자격이 있다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전하는 나의 가르침은 인류를 일깨우고, 지구, 심지어 전 물질 우주를 끌어올려, 영적 세계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과 관련된 내용들입니다.


따라서 많은 영적인 사람들이 영적인 특정한 가르침들을 이용하여, 종교에 전념한 결과로서 어떠한 보상이 주어질 거라는 기대감을 쌓아왔습니다. 외적인 규율을 따르고, 정해진 희생을 감수함으로써, 자신들의 구원은 개인적으로 보장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밖의 사람들은 타인들을 개종시키려는 강한 열망을 지니고 있으며, 심지어 자신들이 믿는 종교, 정치체제 혹은 과학적 유물론이라는 종교가 지구를 지배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많은 주류 기독교인들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고도, 예수님에 의해 구원받게 될 거라고 정말로 믿고 있으며, 육체를 떠난 후, 이들은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대개는 매우 실망하게 될 것이며, 다시 육화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에 대해 불신이나, 분노를 지니고 돌아오게 되며, 대개 복수(復讐)의 형태로 과학적 유물론에 참여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사람들은 언젠가는 균형 잡힌 접근 방식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며,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반대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참된 길을 찾아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