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경향이 있지만, 영적으로 성숙해 있는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지도자들을 따르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자립심을 성취했습니다. 하지만 거짓된 스승들은 참된 스승과 참된 스승을 따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의심을 품게 함으로써, 여러분이 자립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려고 시도해 왔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할 수 없다면, 여러분이 어떠한 스승도 따를 수 없게 하거나, 의사결정을 스스로 할 수 없게 함으로써, 영적으로 여러분을 불구의 상태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 이들은 외적인 기준을 만들어서, 자신들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거라는 점을 믿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기보다,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러한 의심을 극복할 수가 있을까요? 의심은 오직 어둠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흔히 하는 말, 즉 “의심할 여지(어둠)도 없다(Without the shadow of a doubt)”라는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의심은 마음의 애매한 영역(gray area)에 존재하며, 이 영역 속에는 여러분이 의식적으로 본 적이 없는 것이 존재하므로, 여러분이 지배하지 못하고 있는 영역입니다. 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애매한 지대(地帶)을 찾아내고, 이것들이 진리의 빛에 노출되도록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의심의 그림자(shadows:여지)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의심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이러한 의심은 보이는 것처럼 힘들거나,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또다시, 에고와 이원성적인 세력들은 여러분을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 빠지게 하여, 애매한 지대를 보지 않으려고 함으로써, 여러분은 어떤 것이 거기에 숨어 있을 수 있다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두려움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며, 알지 못하는 것들을 빛이 있는 곳으로 꺼내놓으면, 상황은 결코 예전처럼 나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하는 말처럼, 두려움 그 자체를 제외하고는, 두려워할 것이 없으며, 의심들을 살펴보는 체험을 통해, 여러분은 자유롭게 될 수가 있으며, 긍정적인 힘을 키움으로써, 의심을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비현실적인 목표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주된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심각한 우상숭배 때문이며, 추락한 존재들은 이러한 우상을 지난 2000년에 걸쳐 키워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 완벽하시므로, 누구도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없다고 묘사해 왔습니다. 거짓된 스승들의 말을 듣게 되면, 예수님의 완벽함에 압도되어, 시도조차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지구에서 완벽해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전반을 통해, 나는 삶이 점진적인 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성은 단계적으로 성취되어야 하며, 온전한 그리스도의 신성이 아니라 할지라도, 여러분은 현 단계에서의 그리스도 신성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일정한 수준의 그리스도 신성을 뛰어넘어야만, 그리스도의 신성을 표현하여, 타인들에게 사심 없이 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기다린다면, 여러분은 결국 자신이 지닌 그리스도의 신성을 땅 속에 묻어둠으로써, 그러한 신성을 증식시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거짓된 스승들은 이것을 알고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여러분이 지닌 그리스도의 신성을 이 세상에서 표현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하도록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다스리기 전에,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는 본보기가 되기 전에, 이들은 여러분이 그만 두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문제는 여러분이 거짓된 스승의 말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한복음 14:12)


거짓된 스승들이 일하는 또 다른 방법은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 실재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고, 실체가 없는 이원성적인 속성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아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진리의 영을 내면적으로 직접 체험하지 못하고, 단지 이원성적인 겉모습만을 마주하게 된 사람들에게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겉모습들은 모두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리고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은 이것을 보기 시작했으므로, 이들은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요?


이미 설명한 것처럼, 상실에 대한 모든 두려움은 분리된 정체성으로부터 생겨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열쇠입니다.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 여긴다면, 필연적으로 여러분은 자신의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의 정체성과 반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러한 반대에는 손실과 승리(loss and victory)가 내포되어 있으며, 이 말은 누군가가 여러분의 정체성을 없애거나,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분리된 정체성을 구축하는데 따르는 대가는 필연적으로 여러분의 정체성, 즉 개체성이 상실될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체성은 상실될 수가 없으며, 정말로 상실될 수 있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만들어낸 분리된 정체성입니다. 반대로,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며, 따라서 사실 어떤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분리는 환상이므로, 따라서 상실도 환상입니다. 실재하지 않는 것만 상실될 수 있는 것이며, 실재하는 것, 즉 여러분의 영적인 정체성은 어떤 것에도 위협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여러분의 참된 정체성과 개체성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물질 우주 위에, 물질 우주를 벗어나서 존재하는 여러분의 신적 자아 속에 정의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것도 여러분의 신적 자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가 없으며, 따라서 여러분의 참된 정체성을 결코 상실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의식적인 자아가 자신의 신적 자아와 접촉을 할 수 없게 됨으로써, 일시적으로 분리된 정체성 속으로 들어올 때에만, 이러한 상실감이 찾아올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의식적인 자아는 창조주께서 확장하신 분신이므로, 결코 상실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상실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이 시점까지 동일시해온 일시적인 정체성일 뿐입니다. 이러한 정체성을 버림으로써, 분리된 정체성을 극복할 수가 있으며, 정체성의 상실에 대한 궁극적인 두려움도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분리감을 버릴 때. 비로소 여러분은 자신의 상위 존재와 그 위에 존재하는 전(全) 존재의 고리가 지닌 조건 없는 사랑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 조건 없는 사랑은 완벽한 사랑으로, 모든 두려움을 쫓아내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분리된 정체성을 고수하는 한, 이러한 사랑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원성적인 의식에 갇혀 있음으로 인해, 모든 것을 이원성이라는 필터를 통해 보게 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분리된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 대단히 어려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자아감이 전체(All)와 분리되었기 때문에, 여러분은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으며,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환상에 쉽게 영향을 받을 수가 있게 됩니다. 거짓된 스승들은 정말로 이러한 환상을 믿고 있으며, 여러분 역시도 그러한 환상을 믿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차이는 그들은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반면에 여러분은 돌아오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에고, 즉 분리된 정체성은 절대로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에고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3:13)”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식으로부터 창조된 것만이 내려왔으며, 오로지 의식적인 자아가 그리스도의 의식으로부터 창조한 것만이 돌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의식적인 자아는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만약 자신이 분리된 자아라고 여긴다면, 그러한 믿음을 고수하는 한, 여러분은 길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원성적인 정체성을 버리는 순간,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언제든지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이원성적인 의식은 상실(喪失)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생겨나게 됩니다. 이 말은 여러분이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심지어 도망갈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는 물질 우주가 단지 일시적인 세상이며, 분리(分離)와 상실(喪失)이라는 개념은 단지 빛의 강도가 한계점에 도달할 때까지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깨닫게 되었기를 바라며, 그럼으로 불을 켜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이러한 환상들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여러분이 돌아와, 하나가 되지 못하도록 영원히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자신의 하위의 몸체 속에 들어 있는 이원성적인 믿음들과 추락한 이후, 권능을 잘못 부여한 에너지, 즉 카르마뿐입니다. 하지만 이 둘은 변형될 수가 있으며,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마음속에 존재하는 숲의 나무들을 뛰어넘어, 그 너머를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마음보다, 과거보다 그리고 믿음보다, 더 큰 존재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속적인 정체성보다도 더 큰 존재입니다.


이원성이라는 필터를 초월하여 보게 됨으로써,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실패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고차원적인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삶이 배움의 과정이며, 자각을 키우는 과정이라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당연히 실험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사실, 모든 실험이 성장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열쇠입니다. 실험이 실패 혹은 성공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행하는 모든 것은 결과가 있게 마련입니다.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실험의 결과가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과 일치하느냐, 아니면 자신이 지닌 최고의 비전과 일치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답이 후자라면, 행동을 바꾸어, 그러한 행동들이 여러분의 존재와 일치되도록 해야 합니다. 어느 쪽이든, 실험을 통해, 여러분은 자신에 대한 정의(定義)를 높여갈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실험이 앞을 향해 내딛는 한 걸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패 혹은 성공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면, 모든 것을 두 개의 극성들로, 즉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로, 정의하는 상대적인 잣대에 따라 판단하는 의식을 초월하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두 개의 실질적인 사례들을 전하고자 합니다. 토머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고자 했을 때, 중요한 문제는 빛을 내는 가느다란 줄, 즉 필라멘트를 만들 물질을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물질로 시도해 보았지만,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지만, 그는 그것들을 단지 배우는 체험이라고 여겼습니다. “나는 전구를 만들지 못하는 2000가지 방법을 찾아냈어.”라고 말했던 것처럼, 첫 번째 시도에서 물질을 찾아내지 못한 것에 대해, 자기 자신을 책망했더라면, 그는 제대로 작동하는 물질을 찾아내기도 전에, 감정적인 면에서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또 다른 사례로서, 지하 탄광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5개의 터널로 퍼져나간 어느 방에 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그중의 하나를 골라, 막다른 지점에 이를 때까지 따라 가게 됩니다. 그 터널을 선택한 것이 실패한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의 가능성을 배제함으로써, 앞을 향한 중요한 진일보를 한 것일까요? 만약 쓰러져서, 스스로 실패했다고 여기고, 다시는 절대로 시도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틀림없이 탄광 속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방으로 돌아가, 다른 터널을 선택한다면, 결국에는 어둠에서 벗어나, 새로운 날의 빛으로 안내해줄 하나의 터널을 찾아내게 될 것입니다.


거짓된 스승들과 여러분의 에고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 즉 분리로부터 생겨나는 두려움을 통해, 여러분을 통제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삶에 접근하는 법, 즉 이원성적인 기준에 따라 정의한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는 접근 방식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러한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나요? 이원성을 벗어난 것은 고차원의 기준, 즉 하나님의 기준이며, 참된 정체성을 정의하기 위한 영적인 길에서, 이러한 기준은 모든 체험을 진일보하기 위한 디딤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어 줄 것입니다. 이러한 수준 높은 접근 방식으로 올라서는데, 무엇이 필요할까요? 모든 것들에 대해 의심하고, 반성하려고 함으로써, 반드시 자신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찾아내려고 해야 합니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자신 스스로를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찾아낸다면, 이들은 자기 스스로를 책망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 혹은 하나님을 비난하게 될 것입니다. 생존의 메커니즘(機制)으로서, 이러한 사람들은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음으로써, 죄의식과 수치심, 비난 그리고 자책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실수를 하면,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며, 나쁜 사람들은 지옥으로 가게 될 거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잘못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신은 다치지 않을 수 있다는 가정에 기초하여, 잘못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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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가정(假定)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오직 이원성적인 의식에서만 올 수 있으며, 이원성적인 의식은 물질세계만이 유일한 세계이며, 빛과 어둠은 둘 다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잘못을 어둠 속에 숨길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흔히 볼 수 있는 환상, 즉 상대방에게 어떤 것을 숨길 수 있으면, 하나님에게도 숨길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 인류의 영적인 스승들에게 어떤 것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여러분이 영적 스승과 분리된 것은 여러분이 영적 스승에게 어떤 것을 숨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숨기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 스승은 여러분을 도울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