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한 변질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많은 종교인들은 이러한 일이 자신들 혹은 타인들이 다니는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아 왔으며, 그 이유를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심리, 조직의 구조를 살펴봄으로써, 혹은 최선의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고 말함으로써, 부분적으로 그 이유를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들은 잘못이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종교 조직들이 이러한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왜 가톨릭교회는 현대사회가 중세 시대의 사회와 크게 다르다는 사실에 여전히 적응하려고 하지 않는 걸까요? 왜 어떤 종교들은 죽으라고 변화를 거부할까요? 조직의 변화를 가로막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진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추락한 존재들이 실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들이 사용하는 상용 수법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간단한 사실은 영적인 운동이 새로이 그리고 조그맣게 진행될 때에는, 육화해 있는 타락한 존재들에게 제공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큰 영향력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이러한 사람들이 새로운 조직에 끌릴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들 중에서 소수는 초기부터 그러한 조직에 몸을 담고 있으며, 가능한 초기 단계에서부터 운동에 영향을 미치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크기가 한계에 이르게 되고, 정말로 일반 대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 이러한 조직은 권력을 쥐려고 하며, 특권을 가진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려고 하는 추락한 존재를 끌어들이는 자석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조직에 들어가자마자, 내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추락한 존재들은 권력을 얻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영광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그 조직을 변질시키게 됩니다. 이들이 권력을 쥐고 나면, 조직의 전체적인 목적은 지도자들의 권력을 확장시키거나, 적어도 유지하려고 들게 됩니다. 이것이 조직이 스스로 변화할 수 없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으며,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모든 것에 저항하게 될 것이며, 합리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계속 그렇게 할 것입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조직은 구성원들이 지닌 영적인 요구를 더 이상 충족시킬 수가 없게 됩니다. 하지만 지도자들은 이것을 보려고 하지 않으며, 따라서 조직은 낡은 방식을 고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권력에 대한 이원성적인 갈증에 눈이 멀게 된 지도자들은 새로운 것은 모두 어떠한 위협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조직을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사람들, 즉 신비적이고, 직관적이며, 서비스 지향적인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걸러내려는 풍토가 조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힘 있는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은 외적인 조직 구조에서 승진을 하기 위해, 자신들이 지닌 원칙과 내적인 믿음을 굽히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추구함으로써, 일단 조직이 오염되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원칙과 진실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은 절대로 조직의 지도부에서 존재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물러나든지, 아니면 강제로 쫓겨나야 하며, 대개는 집권하고 있는 지도부로부터 큰 창피와 심한 비난을 당하게 됩니다. 영적인 운동이 시작되면서, 상위 10%의 사람들이 모이게 되지만, 조직이 커지게 되면서, 바닥의 하위 10%의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됩니다. 그 후, 상위 10%의 사람들은 배척을 당하게 되고, 권력에 굶주린 사람들이 조직을 떠맡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운동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것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성향에 대해서는 보다 폭넓게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종교조직이 권력을 쥐려는 사람들을 불러들이게 되며, 이들은 왜 폭력을 통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황제나 장군이 되려고 하지 않는 걸까요? 글쎄요, 지구에 추락해 있는 존재들 중에서 실제로 상당수가 황제였거나, 장군이었으며, 이들은 힘으로 권력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무리의 추락한 존재들이 있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다른 존재들보다 수준이 더 높거나, 교활한 존재들입니다. 보다 교활한 존재들은 폭력이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원시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힘에 의한 억압을 받게 되면, 사람들은 반드시 자유를 동경하게 되며, 머지않아 반란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억압받는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방법으로 이들을 억누르는 것이 훨씬 더 좋은 방법입니다. 사람들이 현재의 상황을 대체할 수 있는 방안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때, 훨씬 더 손쉽게 사람들을 따르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이유로, 추락한 존재들에게는 종교가 매력적이며, 종교는 이들에게 최고의 권리를 가지는, 즉 하나님의 교리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추락한 존재들은 종교를 이용하여, 추종자들에게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는 지도자로 군림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내는데 아주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도자가 하는 말을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와 교리 그리고 지도자를 반대하는 의사를 밝히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저항하는 것이 되며, 궁극적인 불이익, 즉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야 한다는 처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영원한 고통을 받게 할 수 있는 권한을 지녔다고 정말로 믿는다면, 이들이 요구하는 대로 따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것이 중세 시대의 사람들이 가톨릭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의 공공연한 횡포에 굴복했던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의 신성에 다가가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외적인 지도자들을 따르고자 했던 것입니다.


퍼즐의 또 다른 부분은 물론, 이원성적인 종교는 외적인 교리와 규칙을 준수한다면, 틀림없이 천국에 가게 된다고 약속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처벌이라는 위협과 영원한 보상에 대한 약속 사이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둘 중에서 그래도 지구에서 어느 정도의 억압에 굴복하는 것이 그나마 더 낫다고 느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톨릭교회가 수천 년 동안 계속해서 교묘하게 사람들을 억압할 수 있었던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교묘한 심리 기제를 볼 수 있나요? 많은 영적 및 종교적인 사람들은 교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천상에서 받게 될 영원한 보상을 얻는데 더 많은 관심이 있기 때문에, 여기 지구에서는 교회에 맞서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교회를 물려받은 추락한 존재들은 천상에서 보상을 받을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이들은 오로지 여기 지구에서 가능한 최대의 권력을 갖고자 하며, 권력을 얻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것에는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으며, 이와 동시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종교를 이용하는 것이 정당화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추락한 존재들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짐승의 일부이며, 종교가 힘을 가지게 될 때, 종교는 보다 더 큰 짐승의 노출된 부위로서, 자신의 짐승을 창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설명한 것처럼, 기본적으로 짐승은 컴퓨터와 유사하며, 컴퓨터는 프로그램화된 것을 스스로 바꿀 수가 없습니다. 짐승의 입장에서 보면, 외적인 종교는 단지 종교의 신도들은 신도들이 지닌 빛을 짐승에게 주기 위해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짐승은 기존의 종교가 신도들을 자립하게 하는 참된 종교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어떠한 변화에도 저항하게 될 것입니다. 짐승은 보상과 처벌(당근과 채찍) 그리고 기타의 수단을 통해 신도들의 감정체와 정신체를 끌어당김으로써, 신도들을 종교의 속박 속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게 할 것입니다.


거대한 종교조직이 변화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이유와 사람들이 종교를 떠나기 어려운 이유를 이것이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변화는 오로지 개별적으로만 가능하지만,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개인들은 반드시 짐승과 변화를 원치 않는 신도들의 집단의식이 끌어당기는 힘에 맞서고자 해야 합니다. 대다수의 개인들은, 심지어 여러 그룹의 사람들은 짐승의 힘을 이겨낼 만한 영적인 업적을 성취하지는 못했으며, 짐승에 의해 압도당해 있습니다. 아니면, 따돌림을 당하든지, 힘에 억눌려 있습니다.


따라서 대개 조직은 너무 경직되어 있어, 시대의 변화에 맞출 수가 없으며, 결국에는 붕괴로 이어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조직의 뒤에 숨어 있는 짐승은 자신이 변화하지 않으면, 죽게 될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지각력을 가지고 있지 못 합니다. 따라서 그러한 짐승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심지어 전 문명이 붕괴되는 지경에 이른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행동양식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이유를 이것이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짐승을 넘어설 수 없으며, 짐승은 프로그램화되어 있는 것을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도 임금님은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고 외치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자기파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자유의지가 불러올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초월을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자멸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앞장에서 형태의 세계를 창조하신 창조주께서는 모든 인간의 의식을 초월해 있다고 밝힌 바가 있습니다. 창조주는 긴 흰 수염을 한 노인이 아니며, 분노나 증오와 같은 인간적인 속성을 지닌 반신반인(god-man : 半神半人)도 아닙니다. 사실, 창조주 자체는 인간으로부터 숭배를 받을 이유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창조주께서 지구에 사는 인간에게서 무엇을 필요로 할 수 있을까요? 확실하게 말해, 사람들이 어떤 것에 관심을 둘 때, 에너지는 관심이라는 다리를 건너, 그 어떤 것으로 향하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숭배할 때, 그들은 에너지를 그 하나님에게로 유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형태의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에너지의 근원이신 창조주께서 무엇 때문에 인간으로부터 에너지를 필요로 할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숭배를 필요로 한다는 개념은 인간의 시각이 아주 좁았던 시대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지구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으며, 또한 평평했고, 하늘은 지구를 덮고 있는 돔(dome)이며, 하나님께서는 돔 바로 위에 살고 계신다고 믿었던 시대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우주가 매우 작으며,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하나님께서는 지구 가까이에 존재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에 기초하여, 인간적인 하나님, 즉 인간사(人間事)에 깊이 관련하고 있으며, 인간으로부터의 숭배와 심지어 희생까지 필요로 하는, 인간적인 하나님이라는 전통적인 유일신의 관점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놀랄만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들이 물질 우주가 구약시대에 믿었던 것보다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지금의 시대에도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적인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것입니다.


진실은 창조주께서는 인간으로부터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인간들이 자신의 빛을 사용하여, 지구에 하나님의 나라를 공동으로 창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로지 자신이 지닌 빛과 진리를 인간들에게 전해주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여러분에게 주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누가복음 12:32) 분명히 말해, 창조주께서는 구름 바로 위에 살고 계시지 않으시며, 저 멀리 떨어진 천국에 살고 있는 먼 존재도 아닙니다. 형태의 세계 어디에서도 창조주는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께서는 모든 형태를 초월하여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영적 세계에도 여러 단계들이 있으며, 이러한 영적 세계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리스도의 의식을 성취한 하나님의 대리인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물질 우주의 바로 위에는 영적 세계의 가장 낮은 층이 존재하며, 인류의 영적 스승들을 이곳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내 말의 요지는 창조주는 구약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인간적인 하나님이 아니며, 또한 인간은 혼자가 아닙니다. 상승한 호스트의 구성원들인 우리는 인간사에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지구에 하나님의 나라를 공동 창조해야 하는 인간들이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언제든지 도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창조주와 상승한 호스트들의 모든 구성원들은 이원성적인 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우리는 숭배 받을 필요가 없으며, 또한 인간들로부터 에너지 혹은 희생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주고자 하지만, 사람들이 이원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전에는, 우리가 가진 빛을 제대로 전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들을 상대하면서, 인간이 이원성에 더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원성을 초월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계속 모색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