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지도자들이 종교의 경전을 어디까지 바꾸려고 했는지 하나의 사례를 들어, 살펴보기로 합시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창세기가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먼저,


(창세기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런 다음, 바로 다음 장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볼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2:7)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을까요, 아니면 땅의 흙으로 창조되었을까요? 두 개의 진술들 간에는 약간의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진동수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 “인간이라 불리는 존재가 고차원의 세계, 즉 진동수가 높은 영역대에서 창조되었느냐, 아니면 물질의 영역대에서 창조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 “인간이라 불리는 존재가 지구로 내려가, 지구를 다스리도록 창조되었느냐, 아니면 자기 주인의 정원을 가꿀 목적으로 지구에서 창조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 “인간이 창조될 당시에, 하나님께서는 고차원의 세계에 존재하셨느냐, 아니면 지구에 존재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물질 형태의 지구로 내려오실 필요가 없었을 거란 것이 논리적으로 맞을 것입니다. 분명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영적 세계에서 인간을 창조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보다 높은 세계에서 창조되었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형태의 세계를 직접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인간을 창조하는 동안에, 어떻게 물질의 영역대에 있는 형태를 취할 수가 있었을까요?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같은 물질적인 육체를 지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물질의 빛 위에 정신적인 이미지를 올려놓음으로써, 인간이 공동으로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공동 창조자로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지구를 다스리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창세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지만, 2장에서는 인간이 영적 세계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땅의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며, 땅의 흙은 물질 영역대에 있는 에너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지구를 다스리도록 되어 있는 공동 창조자와는 반대로, 이러한 “살아 있는 영혼”을 창조하신 존재께서는 정원을 만들고, 인간이 가꾸도록 했다고 합니다.


(창세기 2:15) 주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지구를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은 여기에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두 번째의 진술이 첫 번째보다 훨씬 더 인간의 수동적인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두 개의 진술이 동일한 “하나님(god)”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두 번째의 진술에 나오는 “하나님(god)”은 왜 지구에 정원이 필요했을까요? - 이 하나님은 실제로 지구에 존재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상식적인 선에서 여기에 접근할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가 정말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이라면, 왜 하나님께서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인간의 창조에 대해 두 가지로 말씀하고 계실까요? 왜 한 가지의 표현을 고수하지 않음으로써, 두 번째의 진술이 후에 추가되어, 첫 번째의 진술과 섞이게 되었으며, 따라서 원래의 것과 추가된 것을 구별할 수 없게 되는 의문의 여지를 남겼을까요? 물론, 이로 인해 두 번째의 진술을 누가 삽입했느냐 하는 의문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내용을 토대로, 내가 답변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설명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과학에 의해 밝혀지지 않은 많은 문명들이 지구에 존재했었습니다. 이러한 문명들 중에서 일부는 오늘날의 과학을 훨씬 넘어서는 유전자 공학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여, 고도의 기술적인 능력을 지녔었습니다. 그러한 문명들 가운데 하나는 특정한 통치자가 지배했으며, 이 존재는 후에 추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는 문명의 통치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으로 군림했습니다. 그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던 큰 그룹의 다른 추락한 존재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들 중 일부는 유전자 조작과 관련하여 진보된 기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문명이 늘 그렇듯이, 그 문명 역시도 수축하는 힘에 의해 허물어지게 될 위협에 늘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확장하는 힘도 작용하고 있었으며, 이 힘으로 인해, 육체를 지닌 통치자가 정말로 최고의 하나님이라는 도리에 어긋나는 개념도 날로 커지게 되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영적 세계를 직접 체험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종교에서 - 국가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음 - 말하고 있던 것보다, 하나님에게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위협이 증가하자, 이를 해소하기 위한 시도로써, 통치자와 그를 따르는 사제들 그리고 과학자들은 유전적으로 인간의 몸을 바꾸는 계획을 마련했습니다. 이들은 인간이 지닌 영적인 동경(憧憬)이 유전자 속에 암호화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두뇌 속에는 물질 우주를 벗어나 있는 것들을 용이하게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센터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인간의 하부 인종을 만들어내려고 했으며, 이러한 존재들의 영적인 센터는 영적인 체험을 직접적으로 하기 어려운 단계로 퇴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존재들은 영적인 지도자들을 맹목적으로 따를 가능성이 높았으며, 외적인 교리를 벗어나는 것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도움이 되는 부작용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이러한 존재들은 물질 우주를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동경도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물질적인 소박한 삶의 방식에 훨씬 쉽게 만족했습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완벽한 일벌과도 같았습니다.


지배계급은 그러한 노예종(인간과 동물의 DNA를 혼합함으로써)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으며, 이러한 피조물들에 대해 아주 만족해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이 했던 일에 대해 종교의 경전을 바꿈으로써, 은폐된 증거를 남겨두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들은 지금 창세기로 알려져 있는 것의 이전에 존재했던 전신(前身)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이 경전은 비록 영적인 개념들에 대해 제한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문화 속에 전해졌지만, 당초에는 상승한 호스트의 순수한 계시로서 전해졌던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는 창조에 대해 결코 완벽하게 설명하도록 되어 있지 않았으며, 또한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문명의 지배계급은 두 번째 창조의 이야기를 삽입함으로써, 창세기를 바꾸어놓았으며, 이 두 번째 이야기에 따르면, 이들은 유전 물질을 상징하는 “땅의 흙”에서 인간을 창조했으며, 그런 다음 시험관 속에 있는 피조물 속으로 “생명을 불어넣었던” 것입니다. 이 두 번째의 “창조”로 인해, 인간이 태어나게 되었으며, 이들은 “위험스러운” 질문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고, 주인의 정원을 가꾸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엘리트들은 뱀의 진정한 기원과 자신들이 노출되는 자료는 창세기에서 모두 제거해 버렸습니다.


참고로, 문명이 유전자들에 대한 지식과 유전자를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어느 정도 가지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문명이 지구에서의 삶의 목적인 영적인 잠재력을 빼앗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문명이 이러한 법칙을 어기게 되면, 수축하는 힘은 그 문명을 허물기 시작할 것입니다. 따라서 지배계급이 스스로 지구에 낙원을 - 많은 일벌들이 자신들을 대신하여 힘이 드는 모든 일들을 다해주는 - 건설했다고 생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명은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외적인 매개체(vehicle:수단)는 지배계급 내부의 라이벌 관계였으며, 이로 인해 내부에서부터 문명은 허약해지게 되었으며, 외부의 적이 문명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전쟁은 핵무기를 동원한 싸움이었으며, 이로 인해 격렬한 자연재해가 - 세계적인 홍수의 신화를 불러온 사건 - 발생했으며, 문명은 몰락했으며,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말해, 문명의 모든 구성원들이 죽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옛 문명에 대한 모든 기억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다만 몇 개의 신화들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아틀란티스와 레무리아 대륙의 침몰과 같은) 생명력이 지닌 확장하는 힘이 유전자 조작에 따른 폐해를 어느 정도는 복구했지만, 현재 육화해 있는 사람들 중에는 아직까지도 유전자가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구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영적인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직접적으로 내적인 체험을 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맹목적으로 외적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 뒤에는 유전자적인 요소도 한몫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그룹의 생존자들은 지금 창세기로 알려진 것을 포함하여, 영적인 관습들 중의 일부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지만, 변형된 형식이 보존되어 왔던 것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이것은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로서, 사람들은 모든 것이 조작되었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종교의 경전을 왜곡시키기 위해, 추락한 존재들이 어디까지 하려고 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일단 이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 나면, 그다음에는 경전을 오류가 전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숭배하게 하는 문화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며, 그러한 문화를 이용하여, 종교를 만들어내기 위한 토대로 삼을 것이며, 결국에는 밀폐된 상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존재들은 순수한 계시를 전혀 존중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목적과 영광을 위하여,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경전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참된 영적인 구도자들은 외적인 모든 경전을 뛰어넘는 것을 보려고 해야 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그리스도의 분별력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역사를 솔직하게 살펴보면, 많은 종교들이 아주 독특한 패턴을 따라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종교들은 영적 세계와 연결된 한 개인으로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이 개인은 상승한 호스트로부터 받은 비-이원성적인 가르침을 전달하는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도자들의 대부분은 매우 영적이거나, 신비로운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들이 영적 세계에 관심을 집중했으며, 세상의 일, 특히 권력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들이 시작한 것은 신비적인 운동으로, 다음과 같은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신비스러운 지식을 전하고, 전파하는 것. 신비스러운 지식이란 이원성적인 의식을 통해 만들어진 교리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영적 세계로부터 받은 이러한 운동은 언제나 인간의 의견보다 하나님과 영적인 계시를 우선시합니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 대개는 한 명 이상의 개인이 이러한 계시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 신비주의 운동은 서비스 지향적이며, 이 말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조직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조직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사람들에게 봉사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 가운데 사람들이 진리의 영을 내면적으로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비스 지향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일반적으로 운동의 지도자들은 신비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은 세속적인 권력과 특권에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알려진 역사 속에서만 하더라도, 이러한 조직들은 많이 있었지만, 그러한 조직들의 대부분은 오랫동안 존속하지 못했으며, 특정한 지역을 벗어나지 못 했습니다. 이는 주로 인류의 의식이 신비적인 가르침과 마지막으로 변화가 시작된 상황을 일반 대중이 인식할 수 있는 수준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몇몇 신비주의 운동은 성장하기도 했지만, 어느 시점에서 한계점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점진적인 변형의 기간을 - 때로는 몇 세대에 걸쳐, 때로는 단 몇 년에 걸쳐 - 거친 후, 조직은 변질되었으며, 이제는 다음과 같은 속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계시에 더 이상 초점을 맞추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실, 구원받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식적인 경전이 모든 것을 제공해주고 있으므로, 더 이상 계시가 필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상위 존재들과 영적인 세계와의 내적인 연결을 개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외적인 조직과 조직의 교리와 지도자들을 따르라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조직은 교리와 구조에 있어 - 위로부터뿐만 아니라 아래로부터도 - 더 이상 변화를 꾀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조직은 굳어지고, 경직화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조직이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조직은 이제 밀폐된 상자가 되었습니다.


조직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데 더 이상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조직 그 자체 혹은 조직의 지도자들에게 봉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조직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봉사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조직을 튼튼하게 하려는 목적에 도움을 주는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조직의 생존과 확장 그리고 지도자의 힘을 확장시키는 것이 목적 자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조직은 권력을 쥐고자 하는 지도자들을 끌어당기게 되었습니다. 일부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에, 다른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 혹은 사회에서의 영향을 얻기 위해 분명히 조직을 이용했습니다. 권력은 빠르게 가장 중요시되었으며, 아주 작은 계층구조의 중심이 되어 버렸습니다. 조직은 신비주의자들을 더 이상 조직의 지도부로 끌어들이지 않게 되었으며, 대개는 고의적으로 지도부에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요약하면, 참된 영적인 운동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이제는 내가 앞에서 설명했던 이원성적인 종교가 지닌 속성들을 가장 많이 혹은 모두를 보여주는 외적인 종교로 변질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새로운 젊은 조직은 포용력이 있는 반면에, 경직화된 조직은 배타적이 되었습니다. 조직은 흔히 하는 말로 “어울리기 위해,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다."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조직의 교리와 지도자들을 맹목적으로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면, 조직으로부터 배척당하게 되었을 것이며, 심지어 곧장 지옥으로 향해야 될 존재로 낙인찍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변질의 전형적인 사례를 알고자 한다면, 비록 얼마 안 되지만, 초기 기독교 운동에 대해 구할 수 있는 것들을 검토해보고, 이것을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식적인 국교가 되고 난 이후에 형성된 조직과 비교해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