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종교가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들을 무지(無知) 속에 계속 가두어왔다는 것이며, 이러한 상태에서 사람들은 이원성적인 세력들의 보이지 않는 조종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 이원성적인 세력들은 종교를 이용하여, 사람들이 두려워하거나, 적어도 의심하기를 꺼려하는 여러 우상들과 정신적인 이미지들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한 가지의 사고실험(思考實驗 : thought experiment)으로, 지구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에너지를 가장 많이 가진 사람들, 즉 영적인 성취도가 가장 높은 사람들로부터 에너지를 얻고자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에너지를 어둠이나 악이라고 여기는 존재들에게 제공할 가능성이 아주 낮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로부터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들이 좋은 목적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지구에서 최고로 선한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큰 뜻으로, 유일한 참된 종교라고 주장하는 교회가 정해놓은 목적이 될 것입니다.

 

☞ 사고실험 (思考實驗 : thought experiment) : 머릿속에서 생각으로 진행하는 실험. 실험에 필요한 장치와 조건을 단순하게 가정한 후 이론을 바탕으로 일어날 현상을 예측한다. 실제로 만들 수 없는 장치나 조건을 가지고 실험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을 믿게 되면,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가장 고귀한 대의(大義)라고 여기는 것에 자신들이 지닌 에너지를 - 심지어 생명까지도 - 내놓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하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위 뒤에 무슨 결과가 숨어있는지 의심해 보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참된 지도자라고 믿는 존재들의 눈먼 추종자로 스스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지도자들이 이원성적인 세력과 연결되어 있거나, 이원성적인 세력에 의해 눈이 멀어 있다면, 이들 역시도 눈이 먼 지도자들로, 자신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구덩이 속으로(마태복음 15:14), 즉 이원성적인 양극단으로 인도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잠언 14;12)"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파멸로 이어지는 넓은 길(마태복음 7:13)이라 불렀던 것이며, 이원성이 존재할 여지가 전혀 없으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곧고 협착한 길과는 반대의 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보다 자세하게 이야기하겠지만, 이원성적인 의식이 지닌 속성을 한 가지 상기시켜 주고자 합니다. 이러한 이원성적인 의식을 꿰뚫어보기가 아주 어려운 이유는 선과 악을 완벽하게 정의해놓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데, 종교가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가 이원성적인 의식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면서부터, 선과 악 역시도 이원성에 기초하여, 즉 반-그리스도의 마음에 기초하여 정의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종교가 선이라고 규정해놓은 것을 행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러한 행위들을 통해 보다 낮은 에너지가 창출됨으로써, 이원성적인 세력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종교가 이원성에서 벗어나, 확실하게 당초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종교가 본연의 기능을 회복해야만, 사람들 역시도 이원성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비-이원성적인 종교와 이원성적인 종교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제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앞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많은 종교인들이“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열쇠는 이원성적인 의식을 초월하고, 반드시 그리스도의 마음을 입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이제 충분히 이해했기를 바랍니다.

내가 설명한 것처럼, 여러분은 영적으로 완전히 자립적인 존재, 즉 영적인 빛을 내면에서 방사하는, 하나님의 참된 태양(a true SUN of God)이 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자아가 하나님의 존재께서 확장하신 분신이기 때문에, 자신의 내면에서 하나님의 온전함에 - 여러분의 상위 존재들을 통해 -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의 내면에 존재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밖에서 찾고자 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을 보다 더 직접적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원성적인 무지에서 그리스도의 깨달음으로, 의식을 전환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은 방법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구원을 보장해줄 수 있는 외적인 혹은 물리적인 수단은 지구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한 생애에 걸쳐 교회의 신도가 되어, 일요일마다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교리를 믿고, 외적인 규율을 따를 수 있지만,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 오로지 의식적인 자아만이 할 수 있는 -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혼 축하연과 관련된 자신의 우화를 통해, 그리스도의 의식을 상징하는 결혼 예복을 입어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식으로 인해, 여성성을 상징하는 여러분의 하위 존재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11)


여기에서의 요지는 구원받는데, 외부에 존재하는 어떠한 것도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종교조차도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형식적인 종교를 따르지 않고도, 의식을 실제로 바꿀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원칙적으로, 종교는 이러한 내적인 전환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야 하며, 그러한 전환을 방해하지 말고, 촉진시켜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진정한 종교는 여러분이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면에 가지고 있는 것을 꺼내,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여러분의 영적인 스승 및 상위 존재와 내적인 접촉을 할 수 있도록 도울 때, 종교는 본연의 역할을 완수하는 것이며, 내적인 접촉을 통해 믿어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알게 된다는 의미에서, 종교는 이제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여러분은 구원의 오메가적인 측면을 달성하기 위해, 즉 타인들을 돕기 위해, 그러한 종교에 여전히 몸을 담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원성적인 종교는 이러한 필요조건을 이행하지 않고 있는 종교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는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내면에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실제로 불완전하게, 심지어 결함을 지닌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구원을 받기 위해, 여러분은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나, 누군가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실제로 일부의 종교들은 여러분에게는 외적인 조직이나, 외적인 지도자들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부는 여러분에게는 외적인 구세주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이 여러분과 구세주 사이의 중재자라고 자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많은 교묘한 위장들 속에 감춰진 이러한 믿음들에 따르면, 외적인 종교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으므로, 종교는 언제나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종교 자체가 무의미해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원성적인 종교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종교는 외적인 조직 및 그 조직의 지도자들과 여러분이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그러한 종교들 뒤에 숨어 있는 이원성적인 세력들과도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 개의 역사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대다수의 서구인들은 불교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있으며, 대개는 붓다가 영적인 공백기에 나타나서,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러한 추측은 사실이 아닙니다. 붓다는 힌두교가 지배했던 문화 속에서 태어났지만, 당시의 힌두교는 원래 형태의 힌두교가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에, 힌두교는 구원의 열쇠로서, 외적인 종교와 그 종교의 지도자들을 중요시했습니다. 힌두교는 대단히 엘리트적인 종교로서, 브라만이라는 계급(승려)이 있었으며, 이들은 자신들이 사람들 위에 있으며,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또한 사람들이 어떤 가르침들을 이해할 정도로 충분히 진화해 있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사람들에게 이러한 가르침들을 모두 다 전하지 않고, 유보되어져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붓다께서는 깨달음 혹은 구원의 열쇠로서, 내적인 의식의 전환을 중요시하는 가르침을 전파하셨습니다. 또한 붓다께서는 이러한 구원을 성취하는데 필요한 것은 마음을 통달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한 통달은 외적인 규율을 따른다고 해서, 그리고 여러분을 대신하여 누군가가 그것을 해준다고 해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여러분의 내면에서부터 이루어져야 가능한 것입니다.   


붓다께서 전하시고자 했던 것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가르침으로, 하나가 되는 길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그들이 믿는 외적인 종교와 관계없이, 누구나 실천할 수 있었으며, 지금도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붓다께서는 진실로 힌두교도인들에게 그들이 힌두교의 본질, 즉 참된 종교의 본질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가르침을 전하시고자 노력하셨습니다. 힌두교의 지도자들은 이것을 위협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지도자들을 따랐기 때문에, 힌두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개혁을 이루지 못했으며, 결국 새로운 종교로 출발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종교의 탄생은 붓다께서 의도하셨던 것이 아니었으며, 새로운 종교가 여러 개의 분파로 쪼개지는 것 역시도 붓다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분파들 중의 일부는 붓다께서 개혁하고자 했던 힌두교처럼, 외적인 교리와 의식(儀式) 속에 갇히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유대교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환경 속에서 태어났던 예수님의 사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유대교는 창세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유대교의 기원은 에덴동산, 즉 마이트레야의 신비 학교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 시대의 힌두교처럼, 유대교도 의식(儀式)과 교리 그리고 규율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구원에 이르는 열쇠가 죄를 사(赦) 하는 것이라고 믿었으며, 유대교의 성직자들만이 죄를 사할 수 있는 권능을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성직자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죄를 사할 수 없으며, 그를 지옥으로 보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성직자들은 추종자들에 대해서 절대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유대교에서 새로운 종교로 이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예수님께서는 유대교가 동물을 희생시키는 것 그리고 외적인 의식(儀式)과 엘리트 의식을 가진 사제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교의 지도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전했으며, 이러한 도전이 지닌 두 가지 주요한 측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내면에 있다고 말씀하셨으며, 이 말은 구원의 열쇠가 여러분의 내면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17:21) 따라서 구원을 받기 위해, 외적인 종교나 성직자가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사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고 주장하셨으며, 그러한 권능을 자신의 제자들에도 주셨습니다.(요한복음 20:23)


하지만 사실, 그러한 권능은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 지구에서 성령으로 구현되어 - 그리스도의 마음은 죄를 변형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입고, 죄의식을 초월할 때에만, 죄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죄를 제거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입는 방법을 보여주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며, 그러면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들의 죄를 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두 개의 기준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던 유대교의 사제단에게 도전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면, 성직자들은 권력과 특권적인 지위를 잃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그러한 권력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선택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최대한 사람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이러한 짓을 한 것처럼 보이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결국, 그것은 온 민족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죽어야 하는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1:50) (그러한 선택들이 마치 유일한 선택이었던 것처럼).


대다수의 유대교인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지도자들과 맞서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가 별도의 종교로 태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교처럼, 기독교도 빠르게 경직화되고, 의식화(儀式化) 되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경직화된 새로운 종교를 펼치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에 이르는 내적인 길, 즉 하나가 되는 길과 관련된 보편적인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바람은 외적인 종교의 소속과는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보편적인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이 행성에서 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두 개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패턴이 수없이 되풀이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는 내적인 변형과 관련된 보편적인 가르침을 장려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게 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경직된 시스템으로 변형되어, 내면으로부터는 구원받을 수가 없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종교는 비-이원성적인 가르침으로 시작하여, 그 후 이원성적인 종교로 바뀌게 됩니다. 영적인 자유를 얻고자 한다면, 이러한 일이 왜 일어나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출처] KEY 20 : 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답지 않은 진리 (4/4)|작성자 목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