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에 의해서 건, 아니면 반-그리스도의 마음에 의해서 건, 불완전한 의사결정을 했을 때, 그러한 결정은 분명히 원인체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불완전한 의사결정을 스승에게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면, 스승은 그러한 결정을 통해 여러분이 배울 수 있도록 도울 것이며, 그러한 결정에 따른 카르마를 떠안음으로써, 카르마도 해소해주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러한 기억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게 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실수가 긍정적인 배움의 체험으로 변하게 되며, 이러한 체험은 여러분의 원인체에 나타날 수 있으며, 사건의 불완전 측면은 마치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연소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의사결정에 따른 순수한 혹은 고의적인 무지의 어떠한 요소도 오메가적인 정체성에 남지 않았으며, 비록 의식적으로 후자(고의적인 무지)를 인식하지는 못 했다 하더라도, 오메가적인 정체성은 알파의 정체성과 일치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상위의 정체성과 하위의 정체성 사이에 어떠한 분리 혹은 “공간”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것들을 처음으로 스승에게 숨기려고 했을 때, 배움의 과정은 - 적어도 부분적이라도 - 장애를 받게 되었으며, 불완전한 의사결정들을 제거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가 되는 길로 돌아와서, 불완전한 선택들을 완전한 배움의 체험으로 바꾸고자 결심할 때까지, 그러한  불완전한 의사결정들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학습장에 있는 동안에는, 그러한 공간은 스승이라는 존재(teacher’s Being) 속에 존재했습니다. 왜냐하면 학습에서의 모든 것들은 스승이라는 존재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승과의 연결을 단절하기로 결심하고, 윤회의 지배를 받게 된 후부터, 생에서 생으로 이어지는 기억을 운반할 이동 수단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그래야 바퀴를 새로 만들 필요가, 차라리 여러분 스스로를 재창조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며, - 매번 새롭게 육화할 때마다, 동일한 실수를 반복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동 수단, 즉 분리된 공간은 대부분의 영적인 가르침들에서 영혼(soul)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물론, 스승의 통제에서부터 벗어나게 되면서부터, 의식적인 자아는 의사결정을 거부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에고가 이러한 의사결정을 떠맡게 되었습니다. 에고는 단지 이원성적인 의식에 기초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을 뿐이며, 따라서 그 이후부터 에고는 영혼에 대한 통제권이 의식적인 자아보다도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영혼은 이원성적인 의식에 기초한 여러 결정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결정들 가운데 일부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나쁘거나, 악하다고 부르는 것이 될 수도 있으며, 한편 다른 일부의 사람들이 보통 선하다고 부르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말의 요지는 그러한 모든 결정들은 이원성적인 의식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들이거나, 아니면 하늘에 쌓아둔 보화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이러한 결정들이 불완전하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결정들은 여전히 원인체의 일부로서, 영적으로 여러분이 성장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배움의 체험으로 바뀔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실질적으로 모든 영적인 가르침들은 영혼이 부활하거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영혼이 아니라, 의사결정과 부활되는 영혼을 구성하고 있는 에너지들입니다.


영혼의 부활은 어떠한 외적인 구세주가 여러분을 대신하여 일을 해주기 때문에, 일어나게 되는 어떠한 과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식적인 자아가 자신이 했던 과거의 결정들을 기꺼이 보려고 해야 하는 과정이며, - 영적인 스승과 함께 일함으로써 - 그러한 결정들을 배움의 체험으로 바꾸려고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배움의 체험이란 처음으로 의사결정을 하게 만들었던 의식을 초월하는데 도움이 되는 체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과거의 의사결정이 고통의 근원이 아니라, 삶의 영적인 계단을 오르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원천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과거의 결정들은 배움의 체험으로 바뀔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결정들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것들이 이원성적인 이유를 이해하고, 그러한 결정들을 의식적으로 더 좋은 결정들로 대체해야 합니다.


하지만 의식적인 자아가 자기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할 때까지, 사람들은 과거를 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과거를 보려고 하지 않거나, 중립적인 입장에서 교훈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했던 행위들을 정당화하고, 방어하려고만 합니다. 이로 인해, 어떤 의미에서는 변화의 필요성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동일한 패턴을 거듭해서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은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며, 따라서 실수마저도 성장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마음에 새겨두기 바랍니다. 단, 의식적인 자아가 자기 스스로를 초월하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려고 하는 한.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깨달음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육체를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영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육체보다 더 큰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은 이 “더 큰(more) 것"을 영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다수의 영성인들과 종교인들은 자기 자신을 영혼으로 알고 있으며, 영혼은 부활해야 하며, 불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내가 정의했던 것처럼, 영혼은 불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영혼, 즉 영혼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결정들은 반드시 죽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혼은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반드시 버려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형을 통해 보여주셨던 과정입니다. 십자가는 마음이 지닌 4개 단계에서의 이원성적인 결정들로 인해 움직일 수 없도록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결정들이며, 이것들은 이원성적이고, 실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마음에 기초한 결정들로 대체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원성적인 결정을 대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결정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러한 결정을 - 영혼의 일부를 - 죽게 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부활하기 위해, 의식적인 자아가 반드시 영혼을 죽게 해야 하며, 이원성적인 정체성이라는 유령(ghost), 즉 영혼(마태복음 27:50)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분리된, 필멸의 영혼이 십자가에서 죽게 하는 것은 진정한 여러분인 의식적인 자아가 그리스도의 마음과 하나가 됨으로써, 새로운 정체성으로 거듭나기 위한 필요조건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영혼이라고 여긴다면, 만약 영혼이 사라지게 되면, 여러분은 죽게 될 것이며,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따라서 영혼을 버릴 수가 없게 되며, 과거도 버릴 수가 없게 되므로,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진퇴양난의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영혼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삶의 과정, 즉 자기 초월이라는 행위가 방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여러분, 즉 의식적인 자아가 고차원의 정체성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영혼, 즉 불완전한 정체성을 죽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성장을 하기 위한 열쇠는 존재의 핵심이 의식적인 자아이며, 의식적인 자아는 하위 존재의 어떠한 측면보다, 즉 영혼보다 더 큰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오로지 의식적인 자아가 하위의 정체성에서 빠져나올 때, 비로소 영적인 길에서 진정으로 앞을 향해 전진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이러한 가르침을 전하는 이유는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결론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실질적으로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타락한 의식에 의해 영향을 받은 영혼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에 적혀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로마서 3:23)”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게 겸손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겸손으로 인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키워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일부의 사람들은 고차원의 세계에서 추락한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타락한 의식과 완벽하게 동일시하고 있으며, 이들은 아주 복잡한 정체성을 구축해 왔으며, 이로 인해 그 너머의 것을 보는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존재들도 분리된 정체성 바깥으로 자기 자신을 투사할 수 있는 의식적인 자아를 여전히 지니고 있으며, 자기 자신을 그러한 정체성과 동일시하거나 혹은 그러한 정체성으로 여기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현재의 정체성을 초월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영적으로 깨어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잠재력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성모마리아께서 자신의 책에서 설명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것에 대해 무결한 개념을 지녀야만 합니다.


타락한 의식이 지닌 기본적인 욕구는 일부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추락한 존재들 혹은 추락한 천사들이라고 인식하고, 그들보다 우수하다고 느낀다면, 이러한 사람들은 타락한 의식을 초월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보다 더 교묘한 측면들 가운데 하나에 의한 희생양으로 전락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다음의 문구를 통해 설명하셨던 것을 이행하는데 전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7:3)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태복음 7:4)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마태복음 7:5)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여기에서 내 말의 요지는 무엇보다 먼저,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타락한 의식의 여러 요소들을 확인하려고 하지 말고, 여러분의 존재 속에 들어 있는 그것들을 극복하는데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구에서 가장 영적인 상위 10%가 이원성적인 의식과 이러한 의식을 체화한 사람들에 대해 반대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그렇게 한다면, 일반 대중들은 어떻게 타락한 의식이 존재한다는 것과 이에 따른 영향을 인식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의 그리스도 신성에 도달하기 전에는) 사람들을 추락한 존재로 여기는 것은 역효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온갖 다양함 속에 들어 있는 타락한 의식을 확인하고, 이러한 의식이 개인과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리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제를 객관화함으로써, 개인과 그룹들 간에 이원성적인 논쟁을 할 위험을 최소화하게 될 것입니다. 사회가 어떠한 의식 상태를 이원성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면, 사람들이 사회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보다 쉬워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국 고립되고, 알몸을 드러내게 되겠지만, 이것은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을 낙인찍을 때와는 다른 별개의 문제입니다. 내 말의 요지는 어떠한 의식 상태를 확인함으로써, 많은 것들을 이룰 수가 있으며, 따라서 마음속으로 사람들은 그러한 의식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한 개인으로서, 이원성을 뛰어넘는 시각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원성이 지닌 속성은 항상 타인들을 판단하려고 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판단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와 함께, 내가 의미하는 판단은 어떤 사람들을 “나쁜” 사람으로 낙인을 찍는 것을 말하며, 이로 인해 이러한 사람들은 도와줄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구원받을 수 없다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그들을 영원히 지옥에서 벌받게 하시고자 한다는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의 믿음과 행동들이 이원성에서 생겨난다고 이해하는 것과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이나 추락한 천사라고 낙인을 찍은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과 타인들이 지닌 어떠한 불완전한 이미지들을 영원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사람들은 그리스도로 부활할 수 있는 영적인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에 항상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상승한 호스트인 우리는 절대로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적으로 모든 영혼들이 성장하고, 부활하도록 하는데 온 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영혼들이 타락한 의식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분신이라는 참된 정체성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들을 다하고 있습니다. 나는 정성을 다해 영적인 길을 걷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와 똑같이 헌신해주기를 바라며, 그런 다음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이것을 분별력 있게 사용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