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에 기초한 분리된 정체성을 창조하는 것이 영적인 스승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그리스도의 마음에 기초한 정체성을 구축하는 것보다 처음에는 훨씬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의 분리된 이원성적인 정체성이 창조되고 난 이후, 학생들은 직접 분리된 정체성을 만들지 않아도 되는 대안(代案)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반-그리스도의 마음에 기초하여, 미리 정해놓은 틀 속으로 들어가고자 선택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미리 정해진 정체성이라는 열매(fruit)”, 즉 이원성적인 의식으로부터 만들어진 상대적인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함께 나누어 먹기로 선택했습니다.

 

존재들이 금단의 열매를 한 모금씩 나누어 먹고 난 이후부터, 이들은 스스로 의사결정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정체성이 흘러가는 대로, 이들은 단지 따라서 흘러갈 뿐이었으며, 이것은 마치 양떼가 우두머리 양을 따라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따라서 어떤 존재가 참된 스승을 - 자립하라고 요청하는 -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학생은 그러한 요구를 하지 않는 거짓된 스승을 따르고자 선택할 수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려고 하지 않고, 거짓된 스승을 따랐던 존재들에게는 이것이 훨씬 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거짓된 스승은 해야 할 것을 기꺼이 말해줄 것이며, 이들은 단지 맹목적으로 자신들을 따르기를 바랄 뿐,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결코 요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원성적인 정체성은 그 뒤에 숨어 있는 짐승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의심이라는 중간지대(gray zone)에 있는 존재들의 감정체와 정신체를 적극적으로 끌어당기게 됩니다. 스스로 나누어진 집(마가복음 3:25)이 된 존재들의 마음은 대개 이러한 끌어당김에 의해 압도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끌어당기는 힘으로 인해, 거짓된 스승을 따르는 것이 참된 스승, 즉 자유의지의 법칙에 따라, 학생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려 하지 않는 참된 스승보다 따르기가 훨씬 더 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존재들이 미리 정해진 정체성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이들을 대신하여, 에고가 만들어지게 되며, 이 에고가 대부분의 일상적인 의사결정을 하게 되므로, 의식적인 자아는 작은 동굴(cave)”속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또한, 오래전에 거짓된 정체성을 선택하여, 지도자로 활동했던 그 밖의 존재들도 여기에 관여할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짐승 그 자체가 끌어당기는 힘은 이러한 존재들도 함께 끌어당기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클럽에 가입하기로 선택한 이상, 그들은 스스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부담을 피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클럽에 가입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모든 분리된 정체성은 이원성적인 특정한 거짓말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정체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론 절대적인 진리처럼 보이는 거짓말을 반드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시점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것은 거짓말을 받아들인 이상, 그러한 거짓말을 다시는 의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거짓말과 자신의 에고와 결부된 힘에 대해 의심을 하고자 한다면, 거짓말과 짐승을 수용하고 있는 그 밖의 다른 추락한 존재들은 여러분의 거짓말을 꿰뚫어보고, 거짓말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다할 것입니다. 내 말의 요지는 클럽에 가입하는 데에는 아무런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반면, 클럽에서 빠져나오는 데에는 전혀 다른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에 기초한 정체성은 회원자격을 그만둘 수 있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입한 이상, 영원히 그곳에 머물러야만 하며, 계속해서 여러분이 지닌 빛을 짐승에게 제공해야 하며, 따라서 이제 짐승은 여러분의 새로운 신()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클럽에 가입하기 이전에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를 듣지 못했으며, 그 이유는 영적인 스승의 말을 듣지 않겠다고 결심함으로써, 그러한 경고를 받을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되는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 저항이 가장 적은 것처럼 보였던 것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는 저항이 가장 많은 길, 즉 분리의 길, 죽음에 이르는 길이 된 것입니다. 계약을 할 때,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항상 작은 문자로 인쇄된 부분 (fine print : 감추어져 있는 불리한 조건)까지 꼼꼼히 읽어야.” 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반-그리스도의 마음은 작은 문자로 인쇄된 것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작은 문자로 인쇄된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추락한 존재들과 이원성에 눈이 먼 존재들도 자신들이 지닌 그리스도의 자아들, 즉 예수님께서 보혜사(Comforter)라고 설명했던 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마음에 접근할 수가 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은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한복음 14:26 ) 문제는 이들이 내적인 스승에게 귀를 기울일 것이냐, 아니면 외적인 스승에게 - 심지어 에고라는 외적인스승에게 - 귀를 기울일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리고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위가 자신들이 믿으라고 공언했던 것과 전혀 맞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이 위선자가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한 채, 사람들이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를 이제 알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 실제로 생각을 하지 않음으로써, 이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가 악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이 믿으라고 공언하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 사이의 모순을 볼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율이 자신들이 믿는 종교에 있다 하더라도, 자신들이 믿는 종교의 구성원이 아닌 사람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보상해줄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타인들을 죽이는 것은 지구에 알려진 궁극적인 형태의 위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위선이라는 것을 왜 사람들은 알 수가 없을까요? 그리고 이들은 왜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의식적인 자아들이 영적인 길에서 다음 단계, 즉 여러분이 자신의 정체성을 창조하는데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하며, 자신의 성장에 대해서, 심지어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도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단계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책임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자아는 스스로 생각하고, 의사결정을 하려고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집단적인 정체성에 합류함으로써, 그러한 의식 상태에서 지도자들이 말하는 것을 이제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눈먼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추종자가 됨으로써, 명확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된 정체성은 거짓말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이러한 거짓말은 이원성적인 의식을 -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 사용하여, 여러 행위들을 정당화하게 되며, 이러한 행위들을 악하지 않은 것으로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대부분의 악한 행위들이 저질러지게 되는 것이며,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동시에 자신들이 한 행위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하다는 말을 듣게 될 거라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분명한 사례로서, 십자군 전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합시다. 독실한 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데 전적으로 헌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슬림과 기독교는 모두 자신들의 종교적인 전통이 구약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구약의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하며, 이들은 구약의 하나님을 유일한 참된 하나님,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또한 이 하나님이 모세에게 10계율을 전해주었으며, 이러한 계율들 중의 하나는 살인하지 말라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가 있으며, 이들 모두가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들이 하나님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느낄 수가 있을까요? 아브라함의 참된 하나님이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계율을 주고 난 후, 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자신의 이름으로 서로를 죽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나는 이러한 일이 왜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유일한 참된 하나님이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을 죽이라고 말했다고 추측되는 구절들이 구약에 많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들 통틀어서,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러한 문구들을 이용하여, 살인하지 말라는 무조건적인 계율을 어기고,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왔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진실이 무엇일까요? 형태의 세계를 창조하셨으며, 자의식을 지닌 존재들에게 자기 존재의 일부를 주셨던 참된 창조주께서 지구라고 불리는 매우 작은 행성에 살고 있는 어떤 무리의 사람들에게 창조주의 존재로부터 벗어난 다른 그룹의 사람들을 죽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할까요?

 

그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다음 단계로서, 이제 이 행성에서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검토해보아야 하는 시점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결국, 이 책의 목적은 영적인 자유를 어떻게 성취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종교는 여러분에게 그러한 자유를 제공해주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원성적인 의식이 원래의 목적을 훼손시키고, 종교가 영적인 자유를 빼앗아가는 도구로 어떻게 전락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보게 되겠지만, 먼저 핵심적인 요지를 밝히고자 합니다.

 

일부의 사람들은 이 책의 가르침들을 받아들여, 인류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많은 추락한 존재들이 이 행성에 육화해 있기 때문에 생긴다고 예단해서는 안 되며, 이들은 단지 인간의 심리와 역사에 대해 배우고 있는 학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이러한 사람들을 식별해내고, 이러한 사람들을 죽이든지, 아니면 사회에서 어떠한 힘도 가지지 못하게 함으로써,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다 많이 깨어 있는 학생들이라면, 이러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추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타락한 의식 속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든 것을 이원성이라는 필터를 통해 바라보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은 우리그들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게 되며,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이 바로 타락한 존재들이 사고하는 방식입니다. 나의 가르침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은 이 행성의 모든 문제들을 만들어낸 의식과 똑같은 의식 상태에 갇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분명히 말해, 이러한 사람들은 그러한 의식으로부터 벗어나기 전에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는 - 단호한 어조로 -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은 지금까지 타락한 의식이 아주 오랫동안 이 행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볼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타락한 의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이 행성에 육화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사실, 현재 육화해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러 생 이전에 일어났던 의식의 추락으로 인해, 추락했거나, 아니면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타락한 의식의 여러 요소들을 자신들의 하위의 존재 속으로, 즉 대다수의 영성인들과 종교인들이 영혼(soul)이라 부르는 자신들의 정체성, 정신체 그리고 감정체 속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영혼이라고 부르는 실체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영혼은 자신의 분신들을 이원성 속으로 들여보내기 위하여, 영적인 부모에 의해 이동 수단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에 대한 사랑의 발로에서, 부모는 여러분에게 이동 수단을 제공한 것이며, 그 후 여러분은 물질 우주에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토대로서 이러한 이동 수단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원성에 기초하여 의사결정을 하게 됨에 따라, 이러한 이동 수단의 내용물은 여러분 스스로가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추락한 존재라 하더라도, 영적인 학습장에 계몽된 스승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고자 합니다.

 

영혼은 - 혹은 적어도 영혼이라는 이동 수단의 내용물은 - 의식적인 자아가 창조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 정체성 중에서 내가 지금까지 오메가의 측면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파생되어 나온 결과물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둘은 구별이 됩니다.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스승의 지시에 따라, 여러분이 하나가 되는 길을 따르는데 완전히 몰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과 스승 사이에는 숨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마음에 기초한 의사결정을 하게 될 때에는, 그러한 결정과 기억은 여러분의 원인체(causal body)에 나타나게 되며, 따라서 여러분이 이룩한 업적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쌓아둔 보화라고 불렀던 것(마태복음 19:21)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식에 기초한 모든 의사결정의 집합체입니다. 그런 다음 여러분의 의식적인 자아는 미래에 의사결정을 하게 될 때, 이러한 업적을 끌어다 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