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정체성을 의도적으로 죽게 하기 위해, 학생은 반드시 낡은 정체성이 궁극적으로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낡은 정체성이 무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의식을 이용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의식은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궁극적인 수단입니다. 스승으로서, 나는 학생들에게 그리스도의 비전을 전해주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학생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이 실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실재하지 않는 것인지를 구별할 수 있게 했습니다.


하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어떠한 의식 상태이며, 그러한 의식 상태에는 절대적인 실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의식 상태를 나누어 먹음으로써, 학생은 자신이 지닌 낡은 정체성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학생은 반-그리스도의 마음이 지닌 상대적이고, 이원성적인 논리를 이용하여, 낡은 정체성을 버릴 필요가 없으며, 이것으로 인해 제약을 받지도 않는다고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순수한 무지에 기초한 정체성이 이제는 고의적인 무지에 기초한 정체성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학생은 스승이 제시하는 실체에 대한 비전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이로 인해, 학생은 참된 스승과의 연결이 끊어지게 되며, 따라서 학생은 꼼짝달싹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태에 갇히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반-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인해, 학생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점검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어떠한 말이든 논쟁을 할 수 있으며,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학생은 자신이 가진 이원성적인 믿음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절대적인 실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과 정체성에 대해 의식적으로 점검을 받지 못한 그러한 의식 상태 속에서, 학생은 곧바로 길을 잃게 됩니다. 의식적인 선택들을 강요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학생의 의식적인 자아는 작은 동굴 속으로 은신하게 됩니다. 학생은 자신의 삶을 다스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힘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목적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은 단지 교통의 흐름에 따라 흘러갈 뿐이며,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던 검토되지 않은 삶(unexamined life)입니다. 하지만 학생이 자신의 삶에 대해 점검받고자 하지 않는 한, 자신의 삶이 살 가치조차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학생은 이제 참된 영적 스승과 접촉을 할 수 없게 되며, 더 이상 가르침도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영적인 스승으로부터 더 이상의 가르침을 받을 수 없게 되므로, 학생은 우주의 학습장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학생은 어쩔 수 없이 시련의 학교로 내려가게 되며, 그곳에서는 물리적인 결과가 스승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며, 따라서 학생은 이원성적인 논리를 통해 이러한 물리적인 결과를 외면하거나, 변명을 늘어놓기가 -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 더욱 힘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말의 요지는 동산에 있던 학생들은 분리라는 환상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참된 지식에 기초하여, 의식적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해 감에 따라, 각성하게 되고, 자립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 도달하기 위해, 학생들은 그때까지 누려왔던 어떤 것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자신의 상위 존재 및 다른 학생들과 분리되어 있다는 정체성을 지님으로써, 모든 생명이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신을 해하지 않고도, 다른 사람들을 해칠 수 있다는 환상을 유지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거나, 더 중요하다고 느낄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에 비교하여 자기 자신만 잘 되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아니면,  삶에 대해 고차원적인 목적을 정말로 가지고 있지 않은 척하면서, 어린 시절의 장난감을 계속 가지고 놀 수도 있습니다. 요약하면, 여러분은 아직까지는 정말로 성장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이미 충분히 성장했다고 시늉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스승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분리된 정체성을 유지함으로써, 스승에게 어떤 것들을 실제로 숨길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내가 여러 차례 이야기했듯이, 삶의 목적은 분리된 존재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생명은 진실로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이 동일한 근원으로부터 나왔으며, 창조주 자신의 존재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은 틀림없이 무지와 환상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동산에서도 이러한 환상이 존재할 여지가 있었으며, 나는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지침들을 전해주고, 학생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여지를 주기 위해, 뒤로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분리감을 극복했기 때문에, 실제로 동산에 있던 학생들을 포함하여, 실제로 모든 생명과 하나라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학생들은 진실로 나에게 어떤 것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분리된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한, 학생들은 나에게 어떤 것들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학생들은 근원적으로 우리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하지 말았어야 할 어떤 것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다시, 이것은 허용되었으며, 따라서 학생들은 결국 어린 시절의 장난감을 실컷 가지고 놀 수가 있었으며, 마침내 성장할 시기라고 결심할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중간지대에서, 학생은 오랫동안 놀 수는 있었지만, 내가 설명한 것처럼, 영원히 이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나에게 어떤 것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학생들이 깨닫게 되는 시점이 필연적으로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내용을 인용하여, 다시 살펴보기로 합시다.


(창세기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세기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진실은 학생들이 순수했을 때에는, 스승에게 어떤 것도 숨길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반-그리스도의 의식을 나누어 먹기 시작했을 때, 나에게 어떤 것을 숨길 필요가 있거나, 혹은 숨겨야 한다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품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학생들의 마음속에 부끄러움이나, 죄책감과 같은 느낌을 가지게 했던 것은 오직 반-그리스도의 마음이었습니다. 나는 그러한 느낌을 가지게 할 만한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어떤 것도 숨길 필요가 없으며, 어떤 것에 대해 기분 나빠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확신시켜 주기 위해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로지 반-그리스도의 마음이 지닌 상대적인 논리로 인해, 어떠한 행동들은 나쁜 것이며, 그러한 행위를 범함으로써, 나쁜 학생이 된다는 가치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스승이나 하나님으로부터 숨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그러한 상태에 도달하지 않게 하기 위해, 내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나에게서 숨어야 한다고 느끼게 만들었던 심리적인 메커니즘(기제)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학생들이 반-그리스도의 마음을 사용하여, 나라는 존재(who I AM)의 실체와 상관이 없는 속성들을 나에게 투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모세에게 주었던 처음 두 개의 계율을 위반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스승인 나에 대해, 그들은 각인된 이미지를 만들어냈으며, 그러한 이미지를 나에게 투사하면서, 그러한 이미지가 진짜 나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이미지로 말미암아, 학생들은 나에게서 숨는 것이 더 낫다고 믿게 되었으므로, 내가 어떻게 그들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고, 그들이 지닌 이미지가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내가 자신들에게 엄하고, 비판적일 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모두가 나를 피하는 것이 더 낫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그 후, 그들은 나에게서 멀어지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들이 지닌 각인된 이미지를 실체와 비교하여,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반-그리스도의 마음이 지닌 핵심적인 속성을 알 수가 있으며,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하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러한 반-그리스도의 마음은 모든 것에 대해 각인된 이미지를 만들어서, 그러한 이미지를 실체에게 투사하게 되는 것이며, 그다음에는 이원성적인 논리를 -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는 - 이용하여, 그러한 이미지는 실체와 비교조차 할 필요가 없으며, 절대로 의심하거나, 그 너머를 보려고 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세상에 대해 여러분이 지닌 이미지를 의심하려고 하지 않는 이러한 의향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태에 오랫동안 갇혀 있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정신적인 이미지를 타인들에게 투사하기에 앞서, 그러한 이미지를 먼저 자기 자신에게 투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학생들이 나에게 투사했던 이미지는 이원성적인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자기 자신들에 대해 그들이 창조했던 이미지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만약 내가 화를 내는 스승이라 생각했다면, 그것은 학생들이 자기 자신을 화내는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나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단지 자기 자신들에 대한 분노를 반영하는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나의 유일한 바람은 그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느끼는 심하게 손상된 이미지와 부정적인 느낌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유의지가 최우선이었으므로, 의식적인 자아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여러분을 구해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자기 자신을 외적인 자기감보다 더 큰 존재로 인식함으로써만,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는 또 다른 미묘한 지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내가 설명했던 것처럼, 성장함에 따라, 학생들은 주로 무지에 기초한 정체성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어떠한 지점에 도달하게 되며, 그때에 비로소 학생들은 정체성을 구축하는 “메커니즘”을 의식적으로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스승과 하나라는 느낌 그리고 자신들의 상위 존재들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과도 하나라는 느낌이 점차적으로 확장함에 따라, 학생들은 그러한 느낌에 기초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쌓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학생이 그러한 의식 단계에 다가서려 하지 않는다면, 학생은 분리된 존재로서의 낡은 정체성을 고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생은 순수한 무지에 기초하여, 더 이상 이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있었던 일은 학생의 낡은 정체성은 - 학생이 버리려고 하지 않았으며, 고수하려고 했던 정체성 - 어쨌든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만약 학생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 자신들의 낡은 정체성을 의미 - 먹게 된다면, 확실히 죽게 될 거라고 내가 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낡은 정체성이 죽게 되었을 때, 그 학생은 새로운 정체성으로 곧바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 (모든 생명과 하나가 됨)라는 실체에 기초한 학생은 고차원적인 정체성으로 다시 태어났지만, 반-그리스도 (모든 생명은 분리되어 있음)라는 실체가 없는 것에 기초한 학생은 낮은 정체성으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미묘한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의식적인 자아가 이렇게 불리는 이유는, 정확히 말해, 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라는 실체가 여러분에게 주어진 이상, 여러분의 의식적인 자아는 그러한 실체를 부정할 수 없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실체를 방어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의식적인 자아는 그리스도의 실체를 인지한 이상, 의식적으로 실체를 결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의식이 성장하게 되는 지점에 다가서려 하지 않을 때, 학생의 의식적인 자아는 필연적으로 작은 동굴 속으로 은둔하게 될 것이며, 그곳에 머물면서, 학생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의식적인 자아는 - 여러분의 삶을 지휘하도록 되어 있으나 -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게 되고, 삶에서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려 하지 않게 되며,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방어기제를 고수하기 위해, 의식적인 자아는 의식적인 의사결정을 멈출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식적인 자아는 순수한 무지 속으로 은둔할 수는 없으며, 고의적인 무지라는 동굴 속으로 은둔해야 하며, 그 동굴 속에서 의식적인 자아는 무의식적인 의사결정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의식적인 자아가 의식적이라는 것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사결정으로부터 복원하는 과정이 의식적인 자아라는 잠자는 공주를 다시 깨우는 과정이며, 따라서 여러분은 다시 의식적이 되고,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붓다께서는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단지 “나는 깨어 있다!”라고만 대답하셨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