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삶의 전 목적은 자의식의 성장에 있으며, 이것은 여러분이 여정을 시작할 당시에 지녔던, 제한되고 좁게 초점이 맞추어진 자의식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의식을 확장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완전한 의식으로 이어지는 존재의 고리 위로 올라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단계로 올라서기 위해, 여러분은 자신의 상위의 존재와 하나됨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의 첫 단계로, 여러분은 영적 스승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봉착하게 되는 난제(難題)는 만약 학생이 분리 의식, 즉 반-그리스도의 이원성으로 인해 눈이 멀어 있다면, 그 학생은 존재의 고리를 볼 수 없게 되며, 따라서 스승을 단지 자신의 바깥에 있는 존재로만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생은 분리 의식을 버리게 되면, 어떠한 정체성도 남지 않을 것이며, 상실로 인한 고통을 받게 될 거라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스승을 따르게 된다면, 선택의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일부의 학생들은 자신들의 선택들로 인해 다른 학생들이 어떤 영향을 받게 될 것인지를 고려해야 하는 것은 자신들이 가진 자유의지에 대한 구속이라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자의식을 지닌 존재는 누구나 어떠한 정체성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분리의 환상에 눈이 먼 학생들은 자신들의 낡은 정체성을 버릴 수가 없으며, 따라서 새로운 정체성도 태어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학생이 반-그리스도의 마음을 극복하고, 반-그리스도의 환상을 꿰뚫어볼 수 있다면, 그 학생은 낡은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곧바로 새로운 고차원적인 정체성을 태어나게 하는 거란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학생은 손실에 따른 두려움도 가지지 않고,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적은 것을 기꺼이 버리고자 할 것입니다. 하지만 눈이 멀게 되면, 그 학생에게는 어떤 것을 버린다는 것이 단지 손실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므로, 따라서 생사가 걸린 문제처럼, 낡은 것을 고수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학생은 글자 그대로 출구가 전혀 보이지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빠져나올 방법이 있을까요? 물론, 존재합니다. 하지만 유일한 방법은 학생의 의식적인 자아가 환상에 눈이 멀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실제로 일어났던 것은 학생의 의식적인 자아가 현재의 정체성을 자기 자신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식적인 자아는 그러한 정체성이 죽게 된다면, 자신도 죽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나는 학생의 의식적인 자아가 학생의 오메가적인 정체성을 구축하는데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 바가 있으며, 이러한 오메가적인 정체성으로 인해, 학생은 주위의 환경과 서로 교감하게 되고, 자신의 영적인 정체성과 창조력을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식적인 자아가 자신이 구축한 정체성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의식적인 자아는 자신이 구축한 정체성보다도 항상 더 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정체성은 극장에서 의식적인 자아라는 배우가 연기하는 동안에 입고 있는 의상과도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정체성이 죽는다고 해서, 의식적인 자아는 죽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정체성도 지니지 않게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의식적인 자아는 즉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내게 될 것입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의식적인 자아가 현재의 정체성보다 더 큰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며, 학생의 자의식이 정체성은 아니지만, 단지 그러한 정체성을 통해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고차원적인 정체성을 성취하기 전에, 의식적인 자아는 지금까지 동일시해온 낡은 정체성을 반드시 버려야만 합니다. 의식적인 자아는 낡은 정체성을 죽게 해야 하며, 정확하게 말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있을 때, 행동으로 보여주셨던 과정이 바로 이것입니다.


십자가는 - 다른 것들 중에서도 - 낡은 정체성을 상징하며, 이 정체성으로 인해, 움직일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창조한 제약으로 인해, 스스로 마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십자가에서 이렇게 느끼셨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고 탄식했던 것입니다.(마태복음 27:46) 이것은 예수님조차도 어떠한 기대감을 가지고 계셨으며, 이러한 기대감 때문에, 자신의 낡은 정체성을 버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예수님을 자유롭게 해주었던 핵심적인 열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자기 스스로를 자신의 고차원적인 의지에게 내맡기고, 영을 내어주셨던 것입니다.(마태복음 27:50)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낡은 정체성이라는 영을 버리셨으며, 낡은 자아를 죽게 하심으로써, 고차원적인 자기감으로 부활하기 위한 문을 여셨던 것입니다. 자아라는 나비가 날기 전에, 고치는 반드시 버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곰곰이 숙고해보아야 할 미묘한 개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내가 말했던 것처럼, 나의 목표는 학생들을 자립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나와 하나가 될 필요가 있었다고 것도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이 말이 내가 자기모순에 빠져 있는 것처럼 들리나요? 그렇다면, 정확히 말해, 일부의 학생들이 느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으며, 그렇다면 왜 그들이 그렇게 느끼게 되었을까요?


그렇게 느끼게 된 이유는 이원성적인 의식으로 인해, 그들이 눈이 너무 멀어 있어, 길(path)이 모든 것(all)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진실은 여러분이 존재의 고리  상에 속해 있는 일부라는 것입니다. 개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에서 보면, 여러분은 분리된 존재이지만, 여러분의 근원 혹은 다른 존재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보면,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제한된 의식을 지니고 시작했기 때문에, 분리라는 환상에 기초하여 정체성을 쌓아가게 되며, 이로 인해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다른 학생들, 스승 그리고 자신의 근원과 분리되어 있다고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체성은 무지에 기초한 것이며, 이로 인해 여러분은 자기 스스로를 제한된 상태 속에 가두어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적인 길에서 당연히 취하게 되는 다음 단계의 조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러한 제한된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며,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가 있을까요? 비록 여러분이 개체성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단절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더 큰 영적인 존재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허공 속에 떠다니는 물방울이 아니라, 자아라는 바다에 존재하는 파도인 것입니다. 학생들이 그러한 제한된 자기감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어떤 것, 즉 제한된 자아보다 더 큰 어떤 것의 일부가 되게 함으로써, 나는 동산에 있던 학생들이 제한되고, 단절된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전해주었습니다. 영적인 자유에 이르는 참된 길은 여러분이 단절된 존재라는 제한된 정체성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차원적인 존재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성숙해지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의식적으로 이러한 역학관계를 인지하고, 그런 다음 자신들의 스승과, 동료들과 그리고 자신의 상위자아들과 단절되어 있다는 존재감을 자발적으로 버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내가 에덴동산의 상급반 학생들에게 제공했던 것은 참된 공동체 의식이었으며, 이러한 의식 속에서, 자의식을 키우고, 물질세계를 다스리는 창조의 진정한 목적을 중심으로 모두가 하나가 되며, 즉 모두가 하나로 통합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이러한 기회를 볼 수 없었던, 혹은 제한된 정체성을 버리려 하지 않고, 더 큰 정체성과 하나로 통합되려고 하지 않았던 학생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하나로 통합되려고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동산이라는 공동체 속에 남아 있을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지를 이해할 수 있나요? 스승인 나와 하나가 된다고 해서, 여러분이 지닌 개체성과 자유의지가 없어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상위 존재의 의지와 하나가 되는 것이며, 또한 여러분을 물질세계로 내려보낸 여러분의 고차원적인 존재가 지니고 있는 목적과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되라고 내가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는 여러분의 고차원적인 존재가 지니고 있는 의지 및 비전과 다시 연결될 수 있도록 도우려는 것뿐이며, 여러분이 보람과 평화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위의 존재가 고차원의 존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한,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나누어진 집 (마가 3:25)이라 부르셨던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됨의 길은 어딘가에서 시작해야 했으므로, 에덴동산에 있던 학생들은 스승인 나와 하나가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단절된 존재로서의 낡은 정체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분도 스승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고차원적인 존재와 분리된 채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고차원적인 존재와 하나가 된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가 된다는 것은 비전과 목적 그리고 지식과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하며, 하나님의 법칙을 따름으로써, 성장으로 이어지게 되는 반면, 하나님의 법칙들을 거스르게 됨으로써,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개체성과 자유의지를 상실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분리된 정체성은 여러분이 지닌 자유를 빼앗아 가는 것이며, 오로지 자신의 고차원적인 존재와 하나가 됨으로써, 여러분은 참된 영적인 자유를 체험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새로운 학생은 제한된 정체성을 지니고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체성을 지니지 않고는 어떠한 활동도 할 수가 없으므로, 새로운 학생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기초하여, 정체성을 쌓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새로운 학생은 어쩔 수 없이 주로 무지에 기초한 정체성을 쌓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학생이 분리된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채 시작하여, 의식을 키워가는 창조의 목적과도 완벽하게 일치했습니다.

이것은 지구의 아이들과 유사하며, 아이들은 직접적으로 자신들이 처해 있는 환경에 기초하여, 정체성을 쌓게 되며, 삶을 시작하게 되는 처음 몇 년 동안에는 이러한 환경은 아주 좁게 제한되어 있습니다. 아이의 정체성은 대개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가정 혹은 유아원에 의해 정해지게 됩니다. 하지만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어린 시절의 환경보다 세상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점차적으로 폭넓은 정체성을 쌓아가게 됩니다. 심지어 일부의 사람들은 가족, 출신민족(ethnic origin), 국적에 기초한 정체성을 뛰어넘기도 합니다. 이들은 세계의 시민으로서, 심지어 일시적이나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영적인 존재로서, 보다 더 큰 보편적인 정체성을 쌓아가기도 합니다.


러한 성장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요? 학생이 이전의 자기 정체성이 무지에 그리고 불완전한 세계관에 기초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만,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 다음, 학생은 이전의 자기감을 의식적으로 죽게 해야 하며, 그래야만 고차원적인 이해에 기초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말의 요지는 학생이 제한된 정체성을 쌓게 되는 것이 잘못된 것이나,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단지 성장의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생기는 일부였습니다. 따라서 학생이 제한된 정체성을 죽게 하고, 고차원적인 정체성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은 성장의 일부였습니다. 학생들은 수없이 이렇게 했지만, 동산에 있던 학생들이 직면했던 상황은 이러한 시도를 의식적으로 실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의식적으로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로 상징되는 유혹과 대면해야만 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