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란 학생들이 스승으로부터 멀어지게 됨에 따라, 그들이 유혹, 즉 반-그리스도의 마음에 기초한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유혹에 희생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이원성적인 논리를 활용하여, 자신들의 낡은 정체성을 - 순수한 무지로 인해 구축해온 정체성 - 죽게 하지 않는 것을 반-그리스도의 마음을 통해 정당화하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새로운 학생은 영적인 자아와 하나님의 법칙들에 대해 제한된 의식만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학생의 세계관이 무지에 의해 지배된다는 말입니다. 학생이 성장함에 따라,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학생의 세계관에는 여전히 상당한 무지가 존재하게 될 것이며, 이 말은 학생의 정체성이 부분적으로 무지에 토대를 두게 될 거라는 것을 뜻합니다. 학생은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삶에 대한 고차원적인 이해를 정기적으로 습득하게 되며, 그럼으로써 낡은 정체성은 자연적으로 죽게 될 것이며, 새로운 정체성이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학생은 이것을 알지 못했지만, 이러한 이해의 결핍은 학생이 자립을 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서, 이것을 지속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학생은 의식적으로 낮은 정체성에서 높은 정체성으로 변하게 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학생이 낡은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죽게 하려고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환경에 의해 변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학생은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갈 필요가 있으며, 변화를 가로막았던 마음자세와 믿음들을 의식적으로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영적인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에 익숙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는데 있어, 틀림없이 삶을 변화시키는 결정들, 즉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키고, 낡은 행동들, 믿음들 그리고 자아상을 의식적으로 버리려고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삶의 전환기에는 어떠한 변화, 즉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졸업을 한 후, 직장을 다니고, 배우자를 찾고, 자녀를 갖는 것처럼, 어떠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그 점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삶을 변화시키는 그러한 과정들을 통해 여러분의 낡은 정체성은 죽고, 새로운 정체성, 즉 새로운 상황에 적합한 정체성이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임사체험을 했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알려진 것처럼, 육체의 죽음은 단지 또 다른 변화일 뿐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이러한 변화를 스스로 그리고 사랑스럽게 만들어냈습니다. 왜냐하면  제한된 정체성을 죽게 하는 것이 곧바로 고차원적인 정체성이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며, 손실은 없고 이득만 있다는 것을 그들이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그리스도의 마음이 지닌 이원성에 눈이 먼 학생들은 이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낡은 정체성을 죽게 하는 것이 손실을 뜻한다고 믿게 되었으며, 따라서 정체성을 잃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일부의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내가 낡은 정체성을 포기하도록 강요했으며, 이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이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학생들에게 강요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학생들이 가능한 오랫동안 뒤로 물러나 있게 함으로써, 학생들이 결국에는 자신들에게 최선의 이익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고, 그런 다음 성장의 과정에 동참해주기를 희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지구의 부모들이 때로는 자녀들이 십 대의 시기를 무사히 극복하고, 어른들처럼 생산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과 아주 유사한 것입니다.

결정적인 시점은 반-그리스도의 마음에 의해 영향을 받은 학생들이 이 반-그리스도의 마음이 지닌 모순과 비-일관성을 꿰뚫어보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반-그리스도)으로 인해, 실제로 자신들이 환상의 베일 속에 갇혀 있었으며, 성장도 멈추게 되었다는 사실을 학생들이 깨닫게 될까요? 일부의 학생들은 실제로 이것을 깨달았으며, 자신들의 낡은 정체성이  감옥이 되어왔으며, 이로 인해 마음의 제약을 받게 되었으며, 삶의 과정에서 자신들이 분리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학생들은 내가 학생들에게 강요하려고 했다는 것에 너무 관심을 집중한 나머지, 내가 말했던 모든 것들에 대해 못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내가 하나됨의 길과 분리의 길 중에서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그들에게 역설했다는 사실에 특히 분개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버릇없는 아이들이 되어 버렸으며, 자신들의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것에 대해 분개했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자유의지에 대한 또 다른 오해, 즉 어떠한 제약이든 제약이 존재한다면, 진정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이어지게 됩니다. 동산에 있던 어떤 학생들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느끼게 되었으며, 이것은 뱀이 주도하는 사고방식이었으며, 뱀의 정체에 대해서는 나중에 밝히게 될 것입니다. 내 말의 요지는 여러분이 실제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자유의지에는 피해 갈 수 없는 어떠한 기계적인 측면들(mechanical aspects)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결과가 없는 자유의지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은 성장이며, 선택을 하고, 선택에 따른 결과를 체험함으로써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 그대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선택에 따른 결과를 체험하는 것은 피해 갈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이것이 여러분의 자유의지를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는 어떠한 의식 상태에 갇혀, 무한정 고통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된 안전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내 말의 전반적인 요지는 에덴동산은 영적인 학습장으로 특별히 계획되었으며, 학생들은 이 학습장에서 성장의 과정을 추구해 갔습니다. 따라서 성장은 에덴동산이 지닌 목적 전체였습니다. 학생은 자유의지를 가졌으므로,  성장의 과정에서 스스로 분리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학생이 이렇게 분리된 채, 영원히 남아 있을 수 있는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 말은 곧 학생이 어느 시점 이후에도 성장의 과정에 합류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학생은 동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는 말이 됩다. 대학에 들어가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면, 대학에 다닐 필요가 없지 않나요? 배우고자 하지 않는다면, 다른 환경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그 외의 장소를 찾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동산에 있던 학생들에게는 시한(時限)이 주어졌으며, 학생들은 그 시기가 지나면서, 성장의 과정에 합류하든지, 아니면 스승과 분리되든지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후자를 선택한다면, 이들은 동산에 남아 있을 수가 없으며, 더 낮은 영역으로, 대개는 물질세계의 육체 속으로 내려가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이 후 스승의 지시를 더 이상 받을 수가 없게 되고, 스승도 더 이상 학생의 카르마를 상쇄시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학생들은 이제 시련의 학교에 머물게 될 것이며, 그곳에서 자신들의 선택에 따른 결과를 철저하게 체험함으로써, 배우게 될 것입니다.

학생들이 하나됨의 길에 의식적으로 합류하기 위해, 반드시 버려야만 했던 것이 정확히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분리된 존재로서의 정체성이었으며, 학생들이 제한되고, 좁게 집중된 자의식을 지니고 시작하게 된 결과로서, 이러한 정체성은 그동안 자연스럽게 구축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지에 기초한 정체성으로, 학생들은 자신들이 존재의 고리가 확장한 분신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또한 체험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지가 학생들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학생들은 자신들이 처해 있는 환경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학생들은 자신들의 참된 정체성과 근원에 대해 진실을 알지 못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자아가 아니라, 물질세계에 기초한 정체성을 구축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상위자아들과 하나라는 것을, 혹은 스승과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서로들 간에도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아(Self)라는 바다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아라는 바다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지 못 했던 파도와도 같았던 것입니다.

참고로, 나는 지구의 많은 영성인들이 깨달음이라는 개념을 오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깨달은 사람이라면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들에게 특별한 권능을 전해줄 비법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일부의 영적인 구도자들이 이러한 비법을 찾기 위해 영적인 가르침들을 배우고 있으며, 이것은 마치 연금술사들이 현자의 돌(philosopher's stone)을 찾고 있는 것과 아주 흡사한 것입니다. 또 다른 일부의 영적인 구도자들은 삶의 영적인 측면에 대해, 오직 매우 정교하고 지적인 이해를 가질 수만 있다면, 비법을 찾아낼 수 있으며, 따라서 외적인 가르침들을 배우며, 세상의 온갖 주제들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자의 돌 : 중세의 연금술사들이 모든 금속을 황금으로 만들고, 영생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던 상상의

                   물질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여러분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15) 나는 이 책을 읽을 일부의 독자들은 내가 비법을 말해줄 페이지를 애타게 찾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어떠한 비법도 존재하지 않으며, 영적인 주제를 아무리 지적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이것으로 인해 깨달음의 단계로 들어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여러분이 분리의 환상, 즉 여러분이 존재의 고리, 여러분의 창조주 및 다른 존재들과 분리되어 있다는 환상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깨달았다는 말의 의미는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한다는 뜻이 아니라, 여러분의 시각을 변화시켜, 이제 분리의 장막 뒤에 숨겨진 진실을 보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적인 지식에서의 변화가 아니라, 내적인 관점에서의 변화입니다. 사실, 지적으로 정교한 지식을 가짐으로써, 종종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게 될 수도 있으며, 이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서 그들 앞에 서셨을 때, 살아 있는 그리스도를 부정하기 위해, 그들이 성경의 지식을 이용했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마태복음 5:20)

이제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합시다. 새로운 학생들은 스승을 자신들의 밖에 존재하는 인물로 인식했으며, 그것은 당연한 단계였습니다. 하지만 학생이 성숙해짐에 따라, 스승은 단지 학생을 위해 최선의 것만을 원했다는 사실을 학생이 깨닫게 되는 것도 또한 당연했습니다. 따라서 스승에 대한 학생의 신뢰는 자연적으로 커지게 될 것이며, 마침내 학생은 스승이 자신의 뜻을 학생에게 강요하려고 하는 외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스승은 학생의 영적인 자아가 지닌 고차원적인 의지를 대신했던 것입니다. 제한된 자의식을 지닌 채 시작하기 위해, 의식적인 자아를 물질 우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의 고차원적인 존재의 선택이었습니다.

따라서 무엇보다 먼저, 의식적인 자아가 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왜 여기에 존재하는지를 깨닫게 될 때까지, 의식적인 자아가 자의식을 성장시키는 것이 여러분의 상위자아가 지닌 바람이고, 소망입니다. 스승은 학생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일을 맡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지가 어떤 외적인 존재, 즉 하늘에 계신 분노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의지는 실제로 여러분 자신의 상위자아의 의지이며, 상위자아는 존재의 고리의 일부로서, 계속 올라가면 창조주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자신의 고차원적인 의지에 따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지 혹은 스승의 의지를 따른다는 것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자신의 창의성을 표현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법칙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이것은 자신과 다른 생명들을 해치지 않게 될 거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