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설명한 것처럼, 의식적인 자아는 - 적어도 물질세계에서는 - 자신이 누구라고 여기는 존재(자화상)가 됩니다. 의식적인 자아는 자신의 정체성을 통해, 자기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의식적인 자아는 자신의 정체성을 점진적으로 확장할 수는 있지만, 이러한 점진적인 변화는 오직 거기까지가 한계입니다. 일정한 간격마다, 혁신적인 변화를 겪음으로써, 앞을 향한 엄청난 도약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나비의 성장과정에 비유될 수가 있습니다. 애벌레는 점진적으로 자라고 난 후, 혁신적인 변화를 겪게 되며, 이제 고치가 됩니다. 고치 속에서, 나비는 점진적으로 자라게 되지만, 또 한 번의 혁신적인 변화의 과정을 통해, 고치를 깨고 나와, 날개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심리 단계에서, 학생은 먼저 제한적인 세계관에 기초하여 정체성을 수립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체성은 진화하게 되지만, 최초의 세계관이 지닌 제약으로 말미암아, 어디까지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조건들이 정해지게 됩니다. 고차원의 단계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낡은 정체성은 마땅히 죽어야 하며, 낡은 세계관은 고치처럼, 버려져야 합니다. 하지만 낡은 정체성이 죽게 되는 것은 아주 점진적으로 일어나게 되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낡은 정체성은 아주 부드럽게 새로운 정체성으로 바뀌게 되며, - 설사 어떠한 변화를 눈치챌 수도 있지만 -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자신들이 다시 태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성장하게 됨에 따라, 학생은 점진적 및 혁신적인 단계들을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정체성을 쌓아가게 되었습니다. 좀 더 많이 자립하게 됨에 따라, 학생도 정교한 정체성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체성은 학생이 지닌 개체성과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학생이 완전한 그리스도의 의식을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직접적인 체험과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이 영적인 존재이며, 물질 우주와 동산이 아닌 다른 곳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학생의 의식적인 자아는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더 큰 영적 존재가 확장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깨달음은 학생이 존재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열쇠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과 공동으로 창조하고 계신 창조주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학생은 그리스도 신성의 씨앗을 지닌 채, 깨달음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났으며,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자기 자신이 근원과 하나인 영적인 존재라는 것을 직접 인식하고 되고, 따라서 존재의 모든 면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담에게 금단의 열매를 먹으면, 죽게 될 거라고 말했을 때, 내가 아담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아담이 - 그리스도의 의식을 개발하기 위해 출발했지만, 아직 그리스도 의식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학생을 상징 - 어떤 중요한 단계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단계는 학생이 하나님의 법칙들을 거역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깨닫게 되는 때를 가리키는 것이며, 하지만 학생은 그리스도의 의식을 충분히 지니고 있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법칙을 거역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해치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학생은 자신의 상상력을 이용하여, “내가 하나님의 법칙들을 위반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라고 물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학생은 모든 생명과 하나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므로, 이에 따른 결과를 직접적으로 인식하지는 못 합니다. 결과를 오직 상상할 수만 있으며, 이로 인해 학생은 반-그리스도의 마음이 지닌 교묘한 논리에 영향을 받기 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학생은 아직 반-그리스도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분별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반-그리스도의 마음은 신비 학교의 학생들이 반드시 직면해야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스승으로서, 나는 학생들이 준비도 되기 전에, 이러한 과정과 마주하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운전교습을 받고 있는 학생을 혼잡한 출퇴근 시간에 보낼 수는 없으며, 사고를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체험을 하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금식 후,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을 때(마태복음 4:1), 보여주셨던 것처럼, 어느 정도의 그리스도 의식을 지닐 때에만, 반-그리스도의 유혹을 성공적으로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내 말의 요지는 아담과 이브는 준비도 되기 전에, 상대적인 선악을 알게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이러한 이유로 이들이 반-그리스도의 마음속에서 길을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스승이 아담에게 거짓말을 했느냐 하는 문제로 돌아가기로 합시다. 영적인 스승으로서, 나는 아담이 입문과정, 즉 자유의지라는 창조주의 법칙에 영원히 충실해야 하는 과정에 입문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강제적으로 아담에게 금단의 열매를 멀리하게 할 수 있는 수단이 나에게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아담에게 과일을 먹지 말라고 강한 자극을 주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과일을 먹으면, 죽게 될 거라고 말했던 것이며, 이제 이것이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과일을 먹기 전에는, 아담의 의식적인 자아는 자신의 상위자아와 어느 정도 연결된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그리스도의 마음을 나누어 먹고 난 이후, 그러한 연결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존재로서의 아담의 정체성은 말 그대로 물질 우주 속에서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대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도 못한 채, 아담은 낮은 정체성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이러한 정체성으로 말미암아, 아담은 자기 스스로를 침투할 수 없는 장벽에 의해 하나님과 분리된 물질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첫 번째의 아담은 죽었으며, 두 번째의 아담이 태어났지만, 두 번째 아담의 의식적인 자아는 첫 번째 아담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지 못했으며, 따라서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것도 알지 못 했습니다. 아담은 단지 새로운 정체성이라는 필터를 통해, 자신이 처해 있던 상황과 영적 스승과의 관계를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십 대의 소년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것과 아주 유사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십 대의 소년은 종종 부모의 말을 거역하게 되지만, 소년이 성숙해짐에 따라, 부모를 이해하게 되고, 부모와 다시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말의 요지는 아담의 새로운 정체성은 반-그리스도의 마음에 토대를 두게 되었으며, 그러한 마음 상태에서는 진리는 상대적인 개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이후에 일어났던 일들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 대한 이야기의 유래는 훨씬 이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하지만 수천 년 전에 중동지역을 떠돌던 유목민족이 받았던 이야기를 토대로 한 공식적인 버전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들이 지닌 세계관과 자신들에 대한 이해는 현대인들에 비해 훨씬 낮았으며, 마치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의 세계관이 대학교의 신입생보다 낮은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창조에 대해, 창세기가 완전하고, 아주 정확한 상황(picture)을 설명해주며, 타락은 단지 무지에 불과하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대의 과학에도 불구하고,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글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고의적인 무지입니다. 내 말의 요지는 에덴동산의 이야기에는 어떠한 결함이 있으며, 무지에서 벗어남으로써, 이러한 결함은 극복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결함들 가운데 한 가지는 에덴동산의 이야기에 따르면, 추락이 하나의 중대한 사건으로 인해 매우 갑작스럽게 발생하게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동산에 있던 학생들은 점진적인 과정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지구의 십 대들처럼, 중요하고, 힘든 단계를 체험했습니다. 이러한 자기발견의 과정은 잠정적으로 건전한 단계였으며, 이를 통해 학생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정의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실제로 학생들은 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처음으로 정의하게 되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 꼭 심사숙고해 주기를 바랍니다. 어느 정도 성숙해지기 전까지는, 학생들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 채, 정체성을 정의하게 됩니다. 하지만 학생이 성숙해짐에 따라, 어떠한 전환점에 이르게 되며, 여기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의식적으로 알게 됨으로써, 이제 학생은 새로운 정체성을 정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의식이 지닌 진정한 의미입니다. 


이러한 단계를 거치면서, 학생은 학습장을 졸업하게 되는 상황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상위 존재와 단단히 연결된 채, 학생은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이로 인해, 학생이 세상에 압도당하거나,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망각하게 될 가능성은 아주 낮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졸업에 앞서,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스도의 마음에 기초하여 새롭게 정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 무지에 기초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 정의하려고 하는 유혹과 반드시 마주해야 하며, 이를 극복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되면, 되돌아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 지점에 이르러서는 낡은 정체성을 계속 사용할 수가 없게 됩니다. 새로운 정체성이 형성되어야 하며, 만약 반-그리스도의 마음이 지닌 고의적인 무지에 기초하여 정체성을 정의하게 된다면, 이것은 근원과 하나라는 것을 부정하는 잘못된 정체성을 정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혼자의 힘으로 정의해야 하므로, 어떠한 위험 요소가 존재하게 됩니다. 스승이라고 해서, 과정의 모든 부분을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을 대신하여, 아무도 여러분의 정체성을 정의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스승은 안전한 경계들을 정해주기 위해, 어떠한 한계를 설정하는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만약 학생들이 이러한 한계 내에 머물렀다면, 그들은 안전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경계들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반-그리스도의 의식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린 학생들은 스승의 지시에 토를 달지 않고, 잘 따르게 됩니다. 하지만 성숙해짐에 따라, 학생은 스승이 어떤 것을 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에 대해 자문해 보게 됩니다. “스승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너무 멀리 나가지 않는 한, 이것은 자립하게 되는 과정의 건전한 일부입니다. 왜냐하면 스승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보다, 이러한 자문을 통해, 지시를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어떤 것을 하지 말라고 해도, 그들 중의 일부는 - 보다 창의적이고, 자립적인 존재들 - 하게 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예견할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반-그리스도의 의식이 아주 교묘하며, 설득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울창한 숲을 걷는 것에 비유될 수가 있습니다. 숲의 바깥 부분을 볼 수 있는 경계선 가까이에 머물러 있다면, 언제든지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경계선을 보지 못한다면, 쉽게 길을 잃게 될 수도 있으며,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숲 속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으며, 그렇게 되면 옛 속담처럼,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게 될 것입니다.


스승으로서, 나는 학생들이 스승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숲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자유의지라는 창조주의 법칙을 지키는데 전념해 있었으며, 지금도 전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학생을 강제로 멈추게 할 수가 없었으며, 그럴 생각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학생이 나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한, 언제든지 학생들을 숲에서 돌아오도록 안내할 수 있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의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학생들의 실험은 가치 있는 배움의 체험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반-그리스도의 의식으로 실험하고자 하는 그 자체가 타락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말했던 것처럼, 모든 학생들은 어느 시점에서 반-그리스도의 유혹과 마주해야 하며, 학생이 잘 준비되어 있다면, 반-그리스도의 의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때까지, 일반적으로 반-그리스도의 의식을 실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에 크게 꾸짖었던 것처럼, 학생은 그것을 버리고, 모든 관심을 그리스도의 마음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정말로 추락하게 만들었던 것은 일부의 학생들이 스승과의 연결을 유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반-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실험을 했으며, 그 후, 반-그리스도의 상대적이고, 이원성적인 논리를 이용하여, 스승과 연결된 우주의 탯줄을 자르는 것을 정당화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학생들은 하나님의 실체,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과의 연결이 단절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자신들을 숲 밖으로, 반-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이원성적인 환상으로부터 꺼내줄 생명의 줄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타락하게 된 진짜 이유이며, 창세기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창세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