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교란시키는 짓궂은 태양
[속보, 기타] 2003년 11월 13일 (목) 16:48


1989년 3월 캐나다 몬트리올과 퀘벡 지역이 난데없이 정전돼 도시 기능이 마비됐다. 9시간 동안 이어진 이 정전 사고의 범인은 뜻밖에도 태양으로 밝혀져 우주과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1989년은 천문학사에 기록될 정도로 태양의 활동이 활발했다. 태양의 자기 극성을 나타내는 흑점(검은 점으로 관측되기 때문에 흑점이라 부른다)의 수가 절정을 이뤘고, 태양 표면의 폭발활동도 극에 달했다.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한 태양은 결국 엄청난 양의 고에너지 입자와 전자들을 우주공간에 토해놓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태양으로부터 쏟아져나온 에너지는 쏜살같이 우주공간으로 퍼져나갔고, 결국 수십만㎞ 밖의 지구에 도달했다. 거대한 자석 덩어리인 지구는 몰려드는 전자와 양성자를 거부하지 않고(?) 끌어들임으로써 자신의 자력을 더욱 강화했다.


문제는 평소보다 강해진 지구의 자력 때문에 발생했다. 지구의 자기장이 강해지자 자기장에서 발생하는 유도전류가 평소보다 높아졌고 결국 땅 깊은 곳에 매설된 고압선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유도전류에 의해 순간적으로 용량을 초 과한 전압이 걸리자 고압선들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급기야 합선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암흑천지.... 이는 태양의 활동에 의해 지구의 자기장이 교란된 데 따른 현상으로, 태양의 활동이 지구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단적인 예다.


난데없이 미국에서 오로라 관측

이밖에도 당시에는 여러 가지 희한한 현상이 세계 곳곳에서 보고됐다. 알래스카 같은 고위도에서나 볼 수 있는 오로라 현상이 난데없이 미국 애리조나 주에서 관측되는가 하면, 이유없이 자동차 문이 열리는 현상도 나타났다. 또 인공위성 궤도 추적을 담당했던 미국의 위성 추적소는 지구를 선회하고 있던 1만9천 개 위성 중 1만1천 개를 잃어버리는 대소동을 빚기도 했다. 모두 태양의 혈기왕성한 활동이 지구에 영향을 미치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십수 년이 흐른 2003년 11월, 지구는 또다시 태양의 혈기왕성한 '몸풀기'(?)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태양의 표면은 기본적으로 기체가 펄펄 끓고 있는 가마솥과 같은 상태라고 생각하면 된다. 평상시에는 적당한 온도로 표면이 끓다가 내부 에너지가 세지면 태양 대기권에 격렬한 운동이 일어난다. 이때 현상은 마치 죽을 끓일 때와 비슷하다. 죽은 끓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표면에 작은 거품이 살짝 일어났다가 꺼지는 정도로 완만한 운동을 하지만 불을 더욱 세게 가하면 점점 큰 거품이 일어나고 결국엔 그릇 밖으로 터져나온다. 태양도 평상시엔 이렇게 조용히 끓다가 특정한 시기가 되면 미친 듯이 폭발하면서 에너지를 외부로 방출한다. 이것이 바로 '태양 플레어(flare)'다.


태양 플레어는 태양 흑점 주위에서 빈번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태양 흑점 폭발'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흑점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태양 흑점 폭발'은 옳은 표현이 아니다. 플레어가 발생하면 수소탄 1백만 개에 해당하는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된다. 가장 큰 플레어는 수시간 지속되기도 하는데 이때 방출되는 에너지는 현재 미국의 전력 소비율로 따져서 미국이 10만 년 동안 사용하고도 남을 정도의 에너지다.



플레어가 폭발하는 순간 방출되는 물질은 1천만℃까지 가열되며 이처럼 높은 온도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엑스선과 자외선 복사가 방출된다. 태양 플레어 현상이 새삼 중요하게 떠오르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엑스선과 자외선 같은 고에너지선이

지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들 고에너지입자는 우주공간에 떠 있는 인공위성의 태양 전지판이나 핵심 부품을 그대로 통과해 아예 못쓰게 만들어버린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플레어 현상은 코로나질량방출(CME:Corona Mass Ejection)을 동반하고, 이는 커다란 자석인 지구에 일대 혼란을 일으킨다. 플레어는 고에너지 입자를 방출하는 데 반해 CME는 전자나 양성자 같은 비교적 가벼운 대전입자를 대량 방출한다. 바로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태양이 뱉어놓은 입자들은 지구의 자력선을 따라 극지방을 통해 지구 대기권 상층부로 유입된다. 오로라 현상은 이 입자들이 지구 대기권 내의 분자나 원자와 부딪히면서 빛을 발해서 생기는 것에 불과하다. 오로라 현상이 주로 극지방에서 관찰되는 것도 자력이 강한 극지방을 통해 이들 입자가 지구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력선을 따라 지구 내부로 들어온 전자는 어떤 역할을 할까. 거대한 자석인 지구의 대기권으로 유입된 막대한 양의 전자는 자력선을 따라 지구 내부까지 침투한다. 그리고 지구의 자력을 더욱 강하게 한다. 이 때문에 지구 자기장은 평상심을 잃고 들쑥날쑥하게 변한다. 이른바 지구자기장 왜곡 현상이다.


이로 인한 혼란은 심각하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나침반의 왜곡이다. 막대자석에 철가루를 뿌리면 그 철가루의 궤적이 자석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N극과 S극에 많은 철가루가 몰려 있지만 양극의 경계면에도 둥글게 작은 원이 생긴다.


나침반 바늘 갑자기 서쪽 가리켜
지구도 마찬가지다. 자력선은 북극과 남극으로만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저위도에도 지구 내부를 향하는 자력선이 존재한다. 이를 통해 태양으로부터 온 전자가 유입되면서 자력이 강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지구 내부를 향하는 자력선이 통과하는 지점에서는 나침반의 바늘이 북이 아닌 엉뚱한 방향을 가리키는 웃지 못할 사태가 발생한다. 중앙집권체제이던 국가에서 지방의 권력이 강화되면 당연히 토착주민은 중앙정부보다 지방권력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처럼 지구 자기장의 교란으로 인해 항상 북을 가리키던 나침반의 바늘이 갑자기 남쪽이나 서쪽을 가리키는 일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최근 우리나라 상공에서 오로라가 관측된 것도 한반도 주변의 자력선이 강해지면서 우주에서 날아온 입자를 강하게 끌어당긴 결과로 설명하고 있다.


이밖에도 태양 플레어 현상은 지구에 다양한 영향을 미친다. 플레어가 진행되는 동안 방출된 파장 복사는 지구 상층 대기를 가열시킨다. 1981년 우주왕복선 콜롬비아 호에 탑승했던 우주인은 지구를 선회하는 중에 260㎞ 상공 대기의 온도가 정상치를 훨씬 벗어난 사실을 관측했다. 당시 측정온도는 2,200K(K는 절대온도)로 평상시의 1,200K를 훨씬 웃돌았다.


이렇게 상층 대기가 가열되면 팽창하기 때문에 지구 대기는 우주 밖으로 더 확장된다. 따라서 우주선과 대기의 마찰이 증가하고, 덕분에 인공위성을 낮은 고도로 끌어내리는 결과도 초래한다. 1989년에 미 위성추적소가 1만 개가 넘는 위성의 궤도를 추적하지 못했던 것도 바로 이런 현상으로 위성들이 계산된 궤도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태양의 활동은 지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때문에 미래에는 TV 9시뉴스 말미에 '일기예보'에 이어 '태양예보'를 방송할지도 모를 일이다.


유지영〈과학신문 기자〉 jyryoo@scienc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