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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천재사학자(天才史學者)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 (中)
이용섭 역사 연구가
기사입력: 2014/06/10 [14:32] 최종편집: ⓒ 자주민보


우리 역사 이야기 – 8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천재사학자(天才史學者)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 (中)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의 상‧고대사에 대한 인식


4) 정치사적(政治史的)인 접근(接近)


⑴ 단재 선생이 해석(解釋)한 조선(朝鮮)의 뜻


① 지리(地理)에 의한 조선(朝鮮)에 대한 고증(考證)

❝〈고기(古記)〉에도 “단군(壇君)이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하였다”고 하였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단군(壇君)이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다”고 하였으며, 외국인이 기록한 〈위서(魏書)〉에도 “2천년전 이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朝鮮)』이란 뜻을 어디에서 취한 것일까? 이제 각 사가들의 해석을 토론해 보도록 하자.


(一) 〈여지승람(與地勝覽)〉에는 “동쪽 땅 위로 해가 솟는다(東表日出)”라는 뜻을 취하여 「조선(朝鮮)」이라 하였다고 했으며, 김학봉(金鶴峰)은 “아침 해가 선명하다(朝日鮮明)”라는 뜻을 가지고 「조선(朝鮮)」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하였는데, 두 사람의 말이 거의 같다. 그러나 이는 “百家濟海, 德業日新(백가제해, 덕업일신)”등으로 백제(百濟)와 신라(新羅)를 해석하는 것과 같은 억설이다.


「조선(朝鮮)」을 「해동(海東)」이라거나 「동국(東國)」이라고 한 것은 신라 말엽부터 생겨난 말이다. 단군 때에는 「三危太白(삼위태백)」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고 「가울」 곧 중부(中部)를 전국의 중심으로 잡았는데, 그런 때에 어찌 “東表日出(동표일출)”의 뜻으로 나라 이름을 지었겠는가. 후세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고증(考證)임이 명백하다.❞


(一)′에서 단재 선생이 증명하려는 것은 조선(朝鮮)이라는 나라 이름이 결코 <해 뜨는 아침의 나라〉나 〈아침 해가 선명하다〉라는 뜻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 선 글에서 이에 대해서는 이미 규명을 하였다. 즉 《조선(朝鮮)》 이라는 나라 이름이 가장 먼저 〈해가 뜨고 지고〉 하는 땅 이라거나 〈해 빛이 선명하다(깨끗하다)〉와 같은 지리적 또는 자연 현상적 의미만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땅의 해 빛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유난히도 맑고 깨끗하며 밝은 것도 사실이다. 특히나 이 땅에 비치는 해 빛은 유난히도 환(桓, 훤) 함에 필자도 신비함을 여겨왔다. 하지만 지리적 특성과 자연적 특성으로 비치는 해의 빛이 유난히 맑고 밝은 것만이 《조선(朝鮮)》이 아니다. 좀 더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조선(朝鮮)≫ 이라는 나라 이름인 것이다.


단재 선생도 고증을 하고 있듯이 「해동(海東)」 이나 「동국(東國)」이라는 명칭 자체가 신라(新羅) 말엽부터야 생겨난 말이라니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못 된다. 따라서 단재 선생이 (一)에서 고증을 하는 것은 단어의 사용 생성년대(生成年代)를 통해서 ≪조선(朝鮮)≫이 결코 〈해 뜨는 아침의 나라〉 〈해 빛이 맑고 밝은 나라〉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단군조선(壇君朝鮮)≫의 건국시기(建國時期)는 서력(A.D)을 기준으로 2333년(남한 학계) 혹은 3086(북한 학계)로서 〈해동(海東)〉 이나 〈동국(東國)〉 이라는 단어가 생성되기 약 3천여 년~ 3천 800여 년 전(前)이다. 또한 단재 선생도 고증을 하셨듯이 당시의 지명이나 정치중심에 쓰이는 말 역시 신라 말엽과는 다르기에 결코 ≪조선(朝鮮)≫이 <해 뜨는 아침의 나라〉나 〈해 빛이 맑은 나라〉라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앞에서도 말 했듯이 좀 더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二)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은 말하기를 “朝(조)는 東(동)이요, 鮮(선)은 西(서)의 뜻으로 鮮卑(선비)를 가리키니, 선비산(鮮卑山) 동쪽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조선(朝鮮)이라 하였다”고 했는데, 선비(鮮卑)는 곧 단국 때부터 고구려 때까지 조선의 속국이었다. 속국인 선비가 종국(宗國)인 조선에서 가져다가 선비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종국인 조선이 속국인 선비에게서 가져다가 조선이라고 하였다는 것은 천만 불가(不可)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하물며 조선의 「朝(조)」를 동(東)의 뜻이라 하고, 게다가 「鮮卑山東(선비산동)」 네 자(字)를 덧보태어 주종(主從)을 전도해 가면서 조선의 뜻을 찾아 붙이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구차한 말이어서 취할 가치가 없다.❞

(二)′에 대한 해석은 굳이 길게 할 가치가 없다. 물론 단재 선생도 고려의 대상도 아니라고 했듯이 필자 역시도 본 순암(順庵)의 해석은 터무니없다. 더구나 우리 고유의 동쪽을 의미하는 것은 《새》, 서쪽은 《하늬》, 남쪽은 《마》, 북쪽은 《노》인데 어찌 《조(朝)》가 《東=새》가 되고, 《鮮=하늬》가 되겠는가? 순암(順庵)의 해석은 이두(吏讀) 해석의 음역(音譯)으로도 의역(意譯)으로도 전혀 연관성이 없다. 또한 뜻글자(漢子)의 뜻을 있는 그대로 해서 동쪽과 서쪽을 대비해 봐도 전혀 개연성이 없다. 따라서 순암의 해석은 그 어떤 연관성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


❝(三)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는 “조수(潮水) ‧ 산수(山水) ‧ 열=렬수(冽水)의 세 강물(三水)이 합하여 렬수(冽水)가 되는데, 「조선(朝鮮)」의 뜻은 이에서 취한 것이다”고 하였다.

무릇 조선 태고의 문명은 강가에서 일어나, 예수(濊水) 가에 예국(濊國)이 있었고, 대수(帶水) 가에 대방국(帶方國)이 있었고, 패수(浿水) 가에 패수국(浿水國)이 있었다. 하남위례(河南慰禮)가 온조(溫祚)의 서울이 되고, 졸본천(卒本川) 위가 고주몽(高朱蒙)의 나라가 되어, 수천년 동안 유명한 도읍이나 큰 성읍(名都大邑)들로 강을 끼지 않은 것이 거의 없는데, 조(潮) ‧ 산(山) 두 강가에 조선이 났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5부(部)의 이름은 모두 청(靑)‧적(赤)‧백(白)‧황(黃)‧현(玄) 등의 형용사인데, 이제 5부를 관할하는 종주국(宗主國)만이 홀로 예(濊)‧량(梁)‧ 등 소국(小國)과 같이 강 이름에서 따온 이름이라 하는 것은 너무도 이상하며, 또 예(濊)‧량(梁) 등의 이름은 다 한 강의 강 이름을 취하였거늘, 이제 조선은 두 개의 작은 강을 아울러서 그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 것은 기이하고 괴상하니, 여전히 따를 수 없는 해석이다.❞


(三)′에 대한 해석은 굳이 덧붙여 설명을 할 이유가 없을 듯하다. 요약하면 조선(朝鮮)은 곧 주위에 있는 모든 나라들의 종주국(宗主國)인데 작은 강 이름을 가지고 나라 이름인 조선(朝鮮) 이라는 신성하고 큰 나라 이름을 지을 수 없다는 논증인 것이다. 위에 나오는 각 방위를 나타내는 청(靑)‧적(赤)‧백(白)‧황(黃)등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이 될 것이다.


 
② 사서(史書)에 의(依)한 조선(朝鮮)에 대한 고증(考證)

❝이전의 사서(史書)를 가지고 상고(詳考)해 보면, 「조선(朝鮮)」과 「숙신(肅愼)」은 대개 동일한 나라이다.

≪오월춘추(吳越春秋)에서 “안으로는 부산(釜山)에서의 「주신(州愼)」의 공을 칭송하였다(內美釜山, 州愼之功, 내미부산, 주신지공)”라고 한 「주신(州愼)」에 대하여 주(註)를 단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였으나, 그 앞뒤 문장의 뜻으로 보면, 부산은 복부산(覆釜山) 곧 도산(塗山)이고, 주신(州愼)은 곧 조선(朝鮮)이니, 부루는 조선의 태자이고, 도산은 부루가 하(夏)의 우왕(禹王)이 후에 그 공을 잊지 못하여 이같이 감탄하고 흠모한 것이다≫¹


조선을 주신(州愼)이라 하였으므로, 주신(州愼)과 동음(同音)인 숙신(肅愼)도 조선이 되는데, 이는 사실 조선 ‧ 숙신이 한 나라였음을 말한 것이다.

〈좌전(左傳)〉에는 “숙신(肅愼)‧ 연(燕)의 서울은 우리(周)의 북쪽에 있는 땅이다.(肅愼 ‧ 燕
京, 吾北土也)”고 하였고,

〈사기〉에는 “연(燕)은 북쪽으로 부여오아 이웃하고 있었다(燕北隣夫餘)”고 하였으며,〈산해경(山海經)〉에서는 “불함산(不咸山)에 숙신국(肅愼國)이 있다(不咸山, 有肅愼國)”고 하였으며,

〈사기〉 흉노전에서는 “흉노는...좌왕(좌왕)과 좌장(左將)들이 동방에 머물렀는데, 상곡(上谷:지금의 보정부保定府 - 원주, 현 하북성에 있음)부터는 동으로 예맥 및 조선과 접하였다(匈奴...左方王將居東方, 直上谷以往者, 東接濊貊朝鮮)”고 하였으니, 당시에 지나 동북(東北)에서 지나와 서로 왕래하는 대국(大國)으로는 조선 하나뿐이었으니, 어디에 따로 숙신이 있었겠는가. 이것은 그 위치가 조선 ‧ 숙신이 하나의 나라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에서 “청(淸) 총에 그 관할하는 지경(管境), 곧 영토를 「주신(珠申)」이라고 하였다. 주신은 「숙신(肅愼)」과 동음(同音)이라고 하였다.❞

위 지나 사서들 오월춘추(五月春秋), 좌전(左傳), 사기(史記), 산해경(山海經)과 청(淸)에서 발간된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등에서 보여지는 숙신(肅愼), 주신(州愼)은 같은 음이며, 또한 숙신(肅愼)이나 주신(州愼)은 조선(朝鮮)을 말 한다고 고증을 하고 있다. 지금 사서들을 보면 마치 숙신(肅愼) 이나 주신(珠申)이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인 듯 기술이 되어있다. 하지만 단재 선생께서는 ≪【조선(朝鮮)】 = 【숙신(肅愼)】 = 【주신(州愼)】≫ 이라는 논증을 하셨다. 조선(朝鮮) 이라는 하나의 나라 이름을 다르게 표기를 했을 뿐이다.


❝〈운옥(韻玉)〉에 이르기를 “신지(神誌)가 진단구변국도(震壇九變國圖)를 지어 후세에 일을 예언하였다”고 하였는데, 신지(神誌)는 단군 때의 사관(史官)이다. 이로써 보면, 조선이라고 한 외에 또 진단(震壇)이라고 부른 일도 있었던 것 같다.


진단(震壇)의 「震」은 진한(辰韓)의 「辰」과 같이 그 음(音)이 「신」이니, 고대에는 무릇 장엄한 자리나 신성한 땅이면 반드시 「신」이라 하였다.


「단(壇)」의 음(音)은 「단」이니, 「단」은 사람이나 물건 등의 한 단위(單位)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따라서 「진단(震壇)」은 대개 신(神)의 나라(神國) ‧ 성스러운 나라(聖國)라는 뜻으로, 이것은 나라의 휘호(徽號)이지 나라 이름은 아니다. 나라 이름은 오직 「조선(朝鮮)」 하나뿐이다.❞

또한 「진단(震壇)」이 마치나 「조선(朝鮮)」이라는 나라 이름과 같은 듯 기술을 한 사서들도 상당히 있다. 하지만 단재 선생은 위와 같이 「진단(震壇)」은 나라의 휘호 일뿐이지 나라 이름이 아니라고 논증을 하셨다. 본 글을 읽는 독자들은 혹시라도 「진단(震壇)」이 「조선(朝鮮)」 이라는 이름이 표현만 다르게 되었을 뿐이지 실제 「조선(朝鮮)」 과 같다고 하는 사서들이나 글을 보게 되면 이를 혼돈하지 말기 바란다. 필자 역시도 「진단(震壇)」은 어떤 분석이나 해석을 해도 「조선(朝鮮)」이 될 수 없다. 「조선(朝鮮)」은 ≪아사달≫을 이두(吏讀) 표현한 것이다.



⑵단군조선(檀君朝鮮)의 건국(建國)


①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보이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건국(建國)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檀君王儉 立都阿斯達。 開國號朝鮮。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今妙香山)神檀樹下。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 將風伯雨師雲師。 ~중략~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析干神雄。 願化爲。 時神譴靈艾一炷‧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僞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檀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高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 非庚寅也, 疑其本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周虎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 後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唐裵矩傳云。~ 후략 ~


❝위서운 내왕이천재, 유단군왕검 립도아사달, 개국호조선。 고기운, 석유환인(위제석야) 서자환웅, 수의천하。 탐구인세。 부지자의。 하시삼위태백 가이홍익인간。 내수천부인삼개。 견왕리지。웅솔도삼천。 강어태백산정(즉태백금묘향산)신단수하。 위지신시。 시위환웅 천왕야。 장풍백우사운사。 ~중략~ 시유일웅일호。 동혈이거。 상석간신웅。 원화위。 시신견령애일주, 신이십매왈。 이배식지。 불견일광백일。 편득인형。 웅호득이식 기삼칠일。 웅득여신。 호불능기。 이불득인신。 웅여자무여위혼。 고매어단수하, 축원유잉。 웅내가화이혼지。 잉생자。 호왈단군왕검。 이당고즉위오십년경인(당고즉위원년부진, 칙오십년, 비경인야, 의기본실) 도평양성(금서경)。 시칭조선。 우이도어백악산아사달。 우명궁(일작방)홀산。 우금미달。 어국일천오백년。 주호왕즉위기묘。 봉기자어조선。단군내이어장당경。 후환은어아사달。 후위산신。 수일천구백팔세。 ~ 후략 ~ ❞



※※※ 중략과 후략은 후에 집필할 예정 ※※※

고려(考慮) 시기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 단군신화(檀君神話) 부분 대부분을 올려주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말만 들었지 원문과 해제 모두를 본 적이 없을 것으로 안다. 따라서 시간이 들더라도 독자들을 위해서 약간의 중략과 후략을 제외하고 전편을 올려주었다. 또 단재 신채호 선생이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대한 비판을 하는 부분들도 상당히 있기에 올려줄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독자들은 좀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들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보기를 바란다. 어차피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은 앞으로도 끈임 없이 인용을 해야 한다. 따라서 독자들이 미리 내용을 인지해둔다면 앞으로 연재되는 글을 보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 해제(解題) ❀❀❀

해제부분은 위에서 생략된 부분도 올려주니 이 점 양지하시고 독서해 주기를 바란다.

위서(魏書)〉에 다음과 같이 말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세로 나라를 세워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 이라고 하였다. 이때는 지나의 고왕(高:堯)과 같은 시기였다.”


또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한인(桓因, 帝釋을 말함)이 있었는데, 한인의 여러 아들 중에 한웅(桓雄)이 있었다. 한웅은 자주 천하를 다스리고 어려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뜻을 두었다. 이에 한인(한님=하느님)이 아들의 뜻을 알아차리고, 아래 삼위태백을 내려다 보시메, 가히 홍익인간을 펼칠 수 있는 곳이로구나. 이에 한인은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한웅에게 주어 인간의 세계를 다스리도록 했다. 이에 한웅은 무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원주) 꼭대기(마루턱, 頂上)에 있는 신단수 하래로 아래로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 -검불, 검벌,-박달)라고 한다. 또한 이 분을 한웅천왕(桓雄天王)이라 이른다.


중략부분: 한웅천왕은 풍백 ‧ 우사 ‧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穀食) ‧ 수명(壽命) ‧ 질병(疾病) ‧ 형벌(刑罰) ‧ 선악(善惡) 등을 주관하고, 모든 인간의 360여사를 주관하고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를 하였다. 이때 범 한 마리와 곰 한 마리가 같은 굴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항상 신웅(神雄, 한검)에게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으메,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묶음(다발)과 마늘(달래-아마도 현대 마늘의 원조는 달래가 아니었는가 한다) 20개를 주며 말하기를 “그대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곧 괌과 범이 이것을 받아서 먹고 3 ‧ 7(三 ‧ 七일 = 3×7=21일) 동안 忌(꺼리다. 멀리하다, 참다)하니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으나, ≪범≫은 참지를 못했으니 사람의 몸으로 변하지 못했다.

곰여는 남자가 없어서 결혼을 하지 못하였으므로 날마다 단수(壇樹) 아래에 가서 아기 가지기를(아기 배기를) 축원했다. 이때 한웅(桓雄)이 잠시 거짓 남자로 변신하여 웅여와 혼인을 했다. 그리하여 웅여는 곧 아기를 가지게 되고 낳게 되니 그 아기의 이름을 ≪단군왕검(壇君王儉)≫이라 하였다.

단군왕검은 당고(唐高)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庚寅年(堯가 즉위한 원년은 무진戊辰년이다. 그러니 50년은 정사丁巳요, 경인庚寅이 아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스럽다- 원주)에 〈평양성平(壤城)〉(지금의 서경西京 - 원주)에 도읍을 하여 비로소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고 불렀다. 그 후 또다시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기니 궁홀산(일명 方忽山)이라고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단군왕성은 1500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나라 호왕(虎王)이 즉위한 기묘년(己卯年)에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封)했다.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도읍지를 옮기었다. 후일 또 다시 아사달(阿斯達)에 숨어 있다가 산신(山神)이 되니 그 나이는 1908세였다. ~

 

후략~


되도록 여기서는 필자의 해석은 하지 않고 일연선사(사실은 필자가 연구를 한 바에 따르면 불가의 “중”이라기보다 전통 선가의 선배일 가능성이 크다. 고려사에 기록되어있기를 그는 “국존國尊”으로 되어있다. 이는 우리 전통선가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단군의 삼신교 혹은 삼사상을 받드는 집단의 우두머리인 것이다.)에 의해 저술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대한 단재 선생의 비판적 논증을 통해서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왜 비판을 받아야 하는지를 논증을 하고자 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많은 반론들도 존재를 하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내용은 첫째 – 기록에 담긴 내용의 은유성은 역사적 사실을 신화라는 방법을 통해서 후세에 전달을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록 내용을 보이는 그대로 해석하지 말고 그 내용이 담고 있는 은유적인 표현으로부터 역사적 사실을 유추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 ≪삼국유사(三國遺事)≫는 허구적인 신화이며 그로부터 그 어떤 역사적 사실성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아무런 역사적 근거나 사실성이 없이 존재하는 신화임으로 그로부터 우리 겨레의 역사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종교적 성격을 가진 〈우상숭배〉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단군(壇君)≫ 혹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식과 무지의 소치요 21세기 세계화시대에 고리타분하게 허상을 쫓는 어리석은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현상에 남쪽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두 번째의 경우는 일부 극단적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지만 어찌 자신들 조상의 업적을 부인하면서 허상 내지는 우상숭배라고 몰아 부치는 것인지 필자로서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배달겨레 ”라고 하고 있다. 이 얼마나 무지하고 무식한 자들인가? 바로 자신의 입으로 주절거리는 ≪배달겨레(밝달=단(檀),단(壇)+달(達)+겨레(民族)=밝달겨레=단군의 후손≫을 말 하는 것인데 입으로는 자신들이 단군의 후예라고 말하면서 실제 행동에서는 자신들의 조상인 ≪단군(壇君)≫을 역사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도 우상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 일제가 20여 년 동안 우리 겨레의 상‧고대사를 악랄하게 왜곡‧말살을 한 폐해가 한 세기가 다가오는 오늘에 이르러서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개탄스럽고 통탄을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현존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내용들이 왠지 허구적이고 신화적인 것이 사실이다. 필자는 이 점을 매우 의심을 하고 있다. 즉 어찌하여 수많은 자료들 가운데 삼국유사만 대부분 인용을 하고 있으며, 실제 역사적 사실로서 기록된 자료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우리 겨레는 결코 허투루 세상 살지 않았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만 보더라도 우리 겨레가 자신들의 삶의 발자취에 대한 기록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 수 있다. 온 누리 그 어느 민족도 우리 겨레만큼 철저하게 기록을 하고 그 유산을 남긴 민족은 없다. 이는 분명 일제의 역사왜곡의 폐해라고 밖에 더 이상 설명할 길이 없다. 우리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무려 20여 년이라는 세월을 수많은 인원과 자금을 투입을 했다면 우리 겨레의 역사를 위대한 역사였다고 하기 위해서였겠는가? 결코 아니라고 본다. 필자는 삼국유사 역시 일제에 의해 손이 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다. 이제 왜곡되고 멸실된 우리의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올바른 역사를 후세들에게는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일본의 사학자로 우리 겨레의 역사 왜곡에 가장 깊숙이 개입을 한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인 이마니시 류(今西 龍)는 ❝ 「고려시대에 ≪고조선기≫와 유사한 구전과 고기(古記)가 많았다」고 하면서 그 당시 서운관(書雲觀)에 있었던 다음 서적들을 소개하였다. <표훈삼성밀기〉도 있으며,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신비집(神秘集)≫ ≪고조선비사(古朝鮮秘史)≫ ≪대변설(大辯說)≫ ≪지공기(誌公記)≫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와 안함 로‧원동중의 ≪삼성기(三聖記)≫ ≪도증기(道證記)≫ ≪지이성모하사량훈(智異성母河沙良訓)≫ ≪수찬기소(修撰企所)≫ 등 백여 권, (문태산文泰山, 왕거王 居, 인설仁薛 등 3인 기록) ≪동천록(動天錄)≫ ≪마슬록(磨虱錄)≫ ≪통부록(通夫錄)≫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讒記)≫ 등이다.❞ 위에 그가 보았다고 한 서적들 중에서 이마니시는 안함 로의 〈삼성기〉까지도 보았던 것이다. 이마니시는 단군조선(檀君朝鮮) 관계사나 단군전사(壇를君傳史)를 잘 알고 있는 이마니시가 실재했던 역사인 단군조선사(檀君朝鮮史)와 단군관계사(檀君關係史)를 신화(神話)로 왜곡해버렸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움을 금치 못 할 일이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왜인들에 의해 악랄하게 왜곡 말살된 우리의 상‧고대사를 신화니 허구니 만들어낸(우리 겨레에 의해서 조작된) 역사니 하면서 제 조상들 삶의 발자취(歷史)를 스스로 부정을 하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이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


위 이마니시가 보았다고 소개를 한 서적들 우리 역사 이야기 제1편에서 소개를 했던 자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까지 존재했던 저 많은 서적들은 도대체 다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또 위에 거론한 서적들이나 자료들 이외에 조선 땅 전체에 있었던 수많은 서적이나 자료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다.

한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편이나 부도지(符都誌) 등에는 단군조선(檀君朝鮮)과 단군관계사(檀君關係史)에 대한 기록이 신화(神化)나 허구가 아닌 역사적 사실로서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있다. 이는 추후 단군조선(檀君朝鮮)에 대한 집필을 할 때 많은 자료들을 통해서 철저하게 분석을 할 것이다.


 
(3) 단군조선(壇君朝鮮) 건국(建國)에 대한 단재(丹齋) 선생(先生)의 논증(論證)


① 조선의 최초를 개척한 부여(扶餘)

❝농업은 대개 불(火)의 힘을 이용하여 초목을 태워서 전야(田野)를 개척 한 뒤에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에, 고어(古語)에서 야지(野地)를 「불=벌」이라 하였던 것이다. ~중략~ 동서 고대의 인민들이 다 불의 발견을 기념하여 그리스의 화신(火神), 페르시아의 화교(火敎), 중국의 수인씨(燧人氏) 등의 전설이 있게 되었다. 우리 조선에서는 더욱 불을 사랑하여 사람의 이름을 「불」이라 지은 경우도 많은데 「부루(夫婁)」, 「품리(稟離)」 등이 다 「불(火)」의 음역(音譯)이다.


「불」이라 지은 지명도 적지 않은데 부여(夫餘) ‧ 부리(夫里) ‧ 불내(不耐) ‧ 불이(不而) ‧ 국내(國內) ‧ 불(弗) ‧ 벌(伐) ‧ 발(發) 등이 다 「불」의 음역(音譯)이다.

〈고기(古記)〉 〈고사기(古事記)〉 등을 참고하면, 조선 문화의 원시(原始) 「수두」의 발원(發源)은 거의 다 송화강변의 허얼빈(哈爾濱) 부근에서이며, 하얼빈은 그 옛 이름이 부여(夫餘)이다. 그러므로 송화강은 조선족이 최초에 그 뿌리를 내리고 정주(定住)를 시작한 「아리라」이고, 하얼빈은 조선족이 최초로 개척한 야지(野地) - 「불」이며, 그 외외의 모든 부여(夫餘) ‧ 부리(夫里) ...등은 연대를 따라서 차례로 개척된 야지(野地) - 「불」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족의 발상지 내지는 발원지를 지금 흑룡강성(黑龍江省) 하얼빈으로 보고 있다. 단재 선생은 또 불함산(不咸山 - 밝메) 역시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으로 불리는 부근이 아닌 하얼빈에 있는 완달산(完達山)으로 보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이론도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단재 선생의 학설에 따라 반도사관을 극복하고자 하는 일단의 재야사학자들 역시 흑룡강성의 송화강 부근 하얼빈과 그 일대를 조선족 문화의 첫 발상지이자 조선이 건국한 장소라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추후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비교분석을 해보기로 한다.

또한 단재 선생은 ≪밝≫을 ≪불(火)≫로 해석을 하고 있다. 즉 선사시대에는 불(火)이 무척이나 귀한 대상이라서 거의 신앙으로까지 승화를 하였다고 해석을 하면서 신성한 단어로 해석을 하였다. 따라서 신성한 ≪불(火)≫의 이름을 따라서 사람의 이름도 ≪불≫이 들어가는 명칭을 쓰고 직책의 이름도 ≪불≫이 들어가는 이름을 썼다고 논증을 하였다. 또한 지명 역시 신성한 ≪불(火)≫이라는 이름은 따서 ≪부여≫ ≪부리≫등으로 지었다고 논증을 했다. 따라서 단재 선생은 우리 민족 첫 발상지가 지금의 하얼빈(옛 이름이 부여라고 논증) 부근의 땅 ≪부여(夫餘)≫라고 논증을 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추후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논증을 하고자 한다. 다만 여기서는 단재 선생의 조선민족의 발생지 ≪부여≫라고 주장을 하는 부분에 방점을 두고자 한다. 앞선 장에서 이미 논증을 했듯이 ≪불≫은 ≪밝≫에서 전이(轉移)된 것이며 결국 ≪밝=불≫의 관계가 성립이 된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될 것이다.

 

②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의 삼국유사(三國遺事) 단군신화(檀君神話) 비판(批判)

❝ 〈제석(帝釋)〉이니 〈웅(雄)〉이니 〈천부(天符)〉니 하는 따위가 거의 불전(佛典)에서 나온 명사(名詞)이며, 또는 삼국사(三國史)의 초두(初頭)의 사회(社會)에도 매우 여성(女性)을 존시(尊視)하였다는데 이제 남자(男子)는 신(神)의 화신(化身)이요 여자(女子)는 수(獸)의 화신(化身)이라 하여 너무 여성(女性)을 비시(卑視)하였으니, 나는 이것이 순수(純粹)한 조선(朝鮮) 고유(固有)의 신화(神話)가 아니오 불교수입(佛敎輸入) 이후에 불교도(佛敎徒)의 점철(點綴)이 적지 않은가 하노라.❞

단재 선생은 삼국유사가 저술되게 된 배경에 중점을 두는 비판을 가한 것으로 본다. 즉 삼국유사가 저술된 시기는 고려중기인 고려 희종(1206년)과 충렬(1289년) 사이이다. 대개 고려는 불교를 숭상하는(교과서에서는 불교가 국교인 듯 기술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이는 그다지 설득력을 가진다고 볼 수 없다. 추후 상세 예정) 시기였고 또 저자인 일연선사가 ”중“이었다고 보는 견해에서 출발을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이론이 있으며 실제 일연선사의 삶과 활동 등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오히려 일연선사는 중이라기보다 우리 전통 선교(仙敎)라는 주장들도 있다.

하지만 단재 선생의 종교론 적 신화에 대해서 비판을 가한 것은 결코 우리의 전통종교의 교리나 혹은 종교성을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즉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화적 접근만으로는 단군조선의 실재한 역사를 회복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단군의 역사는 결코 종교적 신화나 혹은 민간에서 회자되는 설화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 〈고기(古記)〉에 단군(壇君)이 수(壽) 1049, 1908세(歲)등 설(說)이 있으나 이는 신라(新羅) 말엽(末葉)에 〈신수두〉를 〈진단(震壇)〉으로 〈환국(桓國)〉을 〈환인(桓因)〉으로써 불전(佛典)의 구어(句語)로 조선(朝鮮) 고사(古史)를 환배(換拜)하는 불교도(佛敎徒)들이 ~후략~❞

단재 선생은 단군이 1048년을 살았느니, 1908세까지 수(壽)를 누렸느니 하는 것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는 마치 단군(壇君)이라는 단 한분의 생(生)이 1049년 혹은 1908년을 살았다는 등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신화적 또는 허구적 사실로 만들어버린 위험성을 지적한 비판인 것이다. 또한 신라 말엽에는 〈신수두〉 → 〈진단〉으로 바꾸었고, 〈환국(桓國)〉 → 〈환인(桓因)〉으로 바꾸는 등 우리 고래의 사서에 기록된 문구들을 우리 전통의 문구에서 불교용어(佛敎用語)로 바꾸어 역사적 사실을 불교적 색채가 나는 종교적 신화로써 만들어냈다는 비판인 것이다. 종교적 신화 또는 설화 등으로는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전달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 단재 선생의 생각이 아니었나한다.


당시 단재 선생이 삼국유사 어떤 자료를 참고를 했는지 필자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삼국유사 원본에서 일제가 환국(桓國)에서 【國】자를 【因】자로 변조를 했다는 사실은 이미 증명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최남선 선생 역시 같은 주장을 하였다. 육당 최남선은 그의 저서 ≪단군신전(檀君神典,여기에서 신은 결코 종교적인 뜻의 신이 아닌 임금을 가리키는 것임을 잊지 말기 바란다. 즉 神은 이두로서 “검, 금”을 나타내기 때문이다)의 고의(古義)≫에서 ≪석유환국(昔有桓國)≫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桓國】은 곧 광명(光明)의 천국(天國)이라고 하였다. 이는 앞선 장에서 이미 설명을 하였듯이 단재 선생 역시 “천국(天國)을 〈환〉(桓國-환국, 한국, 하늘나라)이라 함은 광명(光明)에서 뜻을 취함이니”라고 해석을 하였다. 이는 단재 선생이나 육당 선생이나 〈환인〉이 아닌 〈환국〉으로 해석을 하였으며 그 뜻 역시 동일하게 해석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재 선생은 단군조선(壇君朝鮮)과 단군(壇君)에 대하여 어떻게 접근을 하고 있었나 하는 것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단재 선생은 단군(壇君)을 종교적(宗敎的)으로 막연한 숭배대상이나 혹은 신화(神話)적 허구의 대상으로 추락하는 걸 과감하게 비판을 하였다. 즉 단군(壇君)은 결코 허상이 아닌 우리 역사에 있어서 실재했던 인물로 후세들이 단군(壇君)의 업적을 높이 기려 오히려 숭배의 대상으로 삼은 바 있었다고 논증을 하고 있다. 또한 단군(壇君)의 수명이 1049년이니 1908세니 하는 등의 숫자에 대해서도 결코 동의를 하지 않는다. 그 비판은 다름 아닌 단군(壇君)은 단 한분으로서 존재를 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존재하는 직책으로서 단군(壇君)을 논증하고자 하였다. 바로 이 논증이 그 유명한 ≪수두≫론인 것이다. 


5)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의 ≪수두론≫ - 종교론적(宗敎論的) 접근(接近)


(1) ≪수두≫론에서 보이는 종교적 믿음의 대상의 생성과 형태론적 존재

〈수두〉라 하니 일반 독자들은 도대체 “수두”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점을 가지게 될 것이다. 단재 선생이 말 하는 ≪수두≫는 우리 민족 전래의 종교적 성지라고 가르치던 〈소도(蘇塗)〉를 이두로 해석을 한 것이다.

필자는 〈소도〉 혹은 〈수두, 혹자는 단재 선생이 지나인의 발음에서 수두라고 하였다고 하는 설도 있다〉는 이두 해석으로 하면 【솟=높다, 예: 하늘로 솟아오르다 . 소슬(솟을)대문】라고 해석을 한다. 즉 천주교에서 십자가를 모신 곳이 성당이듯 솟대를 모신 곳이 바로 우리 민족의 전통적 성지라고 해석을 한다. 천주교의 성당, 기독교의 예배당, 불교도들의 절간 등에 십자가와 불상을 모신 것 같이 【솟대】를 높이 세워놓은 곳을 일컬어 【솟】이라고 했다고 해석을 한다. 즉 우리 겨레들은 【솟대】를 높이 세워놓은 【솟】에 가서 하늘에 있을(마음속에서) 삼신(三神)과 소통을 하였을 것이다. 필자의 〈수두〉에 대한 언어적 해석은 그만하고 단재 선생의 【수두론】을 보기로 하자.

❝朝鮮族은 宇宙의 光明이 그 崇拜의 대상이 되어, 太白山의 樹林을 光明神의 棲宿所로 믿어, 그 뒤에 人口가 繁殖하여 각지에 分布하메, 각기 居住地 부근에 樹林을 길러 太白山의 것을 模像하고 그 樹林을 이름 하여 〈수두〉라 하니, 〈수두〉는 신단이란 뜻이니 ~후략~


❀❀❀ 해제 ❀❀❀

조선족은 우주의 광명이 그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태백산의 수림을 광명신이 잠자고 머무는 곳으로 믿었다. 그 뒤에 사람이 늘어나고 각 지역으로 번져나가 살게 되니 각기 자신들이 살고 있는 부근에 수림(숲)을 만들어 태백산의 숲을 본 떠 그 숲(수림)을 일컬어 〈수두〉라고 하였다. 〈수두〉는 〈신(神)〉을 모신 단(壇, 제단祭壇)이라는 뜻이다. ~ 후략 ~


〈수두〉에 대한 유래를 단재 선생이 간단히 설명을 하였다. 간단하지만 매우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나 현대 천주교의 확장과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뒤에서도 계속 설명이 나갈 것이다. 태백산에 본래 광명신(光明神, 밝)을 모시는 수림(숲)이 조성이 되어있고, 또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인구가 계속 증가를 하여 여러 지역으로 번져나가게 되니 옮겨간 사람들이 또 다시 그 곳에 태백산 수림을 본 따 수림(숲)을 조성하여 광명신을 모시니 그 곳이 곧 〈수두〉라는 것이다. 결국 세월이 흘러감과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수두〉의 수(數)도 역시 증가를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역 또한 더욱더 광범위하게 넓어졌을 것이다.


❝每年 5月과 10月에 〈수두〉에 나아가 祭할 새, 1人을 뽑아 祭主를 삼아 〈수두〉의 中央에 앉히어 〈하느님〉〈天神〉이라 이름 하여 衆人들이 祭를 올리고 〈수두〉의 周圍에 금줄을 매어 閑人의 出入을 禁하고, ~ 중략 ~ , 强賊인 侵入하면 各 〈수두〉所屬의 部落들이 聯合하여 이를 防禦하고 가장 功이 많은 部落의 〈수두〉를 第一位로 尊崇하여 〈신수두〉라 이름 하니 〈신〉은 最高最上을 의미한 것이며, 기타의 각 〈수두〉는 그 아래 附屬하였나니, 三韓史에 보인 〈蘇塗〉는 〈수두〉의 音譯이며 〈新蘇塗〉는 〈신수두〉의 音譯이요, ≪震壇九變國圖≫에 보인 〈震壇〉의 〈震〉은 〈신〉의 音譯이며 〈壇〉은 〈수두〉의 音譯이요, 〈壇君〉은 곧 〈수두하느님〉의 音譯이니라. 〈수두〉는 小壇이요 〈신수두〉는 大壇이니 一〈수두〉에 一壇君이 있었은 즉 〈수두〉의 壇君은 小壇君이요 〈신수두〉의 壇君은 大壇君이니라.❞

 


❀❀❀ 해제 ❀❀❀

❝매년 5월과 10월에 〈수두〉에 나아가서 제를 지낼 때 1인(한 명)을 뽑아 제주(제사를 주관하는 사람)로 삼고 〈수두〉의 가운데 앉히어 〈하느님〉이라고 부르며 참석한 무리들이 제사를 올렸다. 〈수두〉의 주변에는 금줄을 매어서 잡인들의 출입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중략~, 외부의 강적이 침입을 하면 각 〈수두〉에 소속된 마을들이 연합하여 이름 물리치고 가장 공이 많은 마을의 〈수두〉를 으뜸으로 존중하며 숭배하고 그를 〈신 수두〉라고 불러주었다. 〈신〉은 가장 높은 것을 의미한다. 기타의 각 〈수두〉는 〈신 수두〉 아래 부속이 되었다. 삼한사에 보이는 〈소도(蘇塗)〉는 〈수두〉의 소리를 나타낸 것이며, 〈신소도(新蘇塗)〉는 〈신 수두〉의 소리를 나타낸 것이다. 〈단군〉은 곧 〈수두하느님〉을 소리 나는 대로 나타낸 것이니, 〈수두〉는 소단(小壇, 작은 단군)이요, 〈신 수두〉는 대단(大壇, 큰 단군)이니, 한 개의 〈수두〉에 일 단군(一壇君, 한 명의 단군)이 있었으니 〈수두〉의 단군의 소 단군(작은 단국)이요 〈신 수두〉의 단군의 대 단군(큰 단군)이다.❞


위 단재 선생의 〈수두〉론을 보면 두 종교론 적 입장에서 두 가지로 해석을 할 수가 있다.

첫째 – 단군이라는 종교적 신앙의 대상의 생성론(生成論)이다. 단재 선생의 〈수두〉론에 따르면 지금까지 있어왔던 타 종교의 생성론과는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즉 타 종교를 보면 불교는 〈부처〉를 먼저 만들어 놓고 , 기독교는 〈야훼 – 기독교에서 믿는 것은 실제로는 야훼이지 하느님이 아니다. 하느님은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우리의 전통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만들어 놓았으며 이슬람교는 〈알라〉라는 신이 먼저 만들어져 있었다. 이렇듯 타 종교는 믿는 신앙의 대상이 먼저 존재를 하고 다음 신도들이 이를 믿는 식의 종교 생성론인 것이다.

단재 선생의 〈수두〉론에서 보면 〈수두〉에 나아가 제를 지낼 때 무리들 중 제사를 주관하는 한 명을 뽑아서 가운데 앉혀놓고 그를 【하느님 = 광명신】 이라고 부르며 무리들이 제사를 지냈다고 논증을 한다. 이로서 살아 있는 사람을 뽑아(물론 백성들의 삶에 큰 업적을 쌓은 사람을 뽑았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로 제사를 지냈다. 결국 광명신에 제사를 지내기는 하되 뽑힌 이는 곧 【광명신】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타 종교와 단재 선생이 〈수두〉론에서 거론하는 단군 즉 하느님, 광명신은 함께 무리지어 사는 이들이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둘째 – 종교에서 믿음의 대상의 생성론과 또 다른 형태론적 입장을 고찰해 보면 타 종교는 믿음의 대상이 부존재 즉 보이지 않는 환상적 허구적 대상인 것이다. 하지만 단재 선생이 〈수두〉론에서 논증하는 ≪【단군(壇君) = 하느님 = 광명신】≫은 보이지 않는 환상적 허구적인 대상이 아니라 실존하는 신앙으로서의 믿음의 대상에 있다는 것이다. 즉 단재 선생이 고증하는 〈수두〉론에서의 ≪【단군(壇君) = 하느님 = 광명신】≫은 무리(民衆)들이 만들어냈기에 실제로 존재를 하며, 눈으로도 보이는 존재론적 신관, 종교관인 것이다. 따라서 단군의 한웅(桓雄)과 본래 곰이었다가 사람으로 변신한 웅여(熊女)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허구적 혹은 환상적 존재로서의 단군(壇君)이 아닌 민중(民衆)에 의해서 뽑혀진 실존재로서 단군이요 광명신인 것이다. 또한 당시 민중들이 신단수 아래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는 필히 단군이 존재를 하였다는 것도 확고한 존재로서의 단군론을 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도 제사를 지낼 때에는 언제나 제주(祭主)를 세워놓고 하는 것도 아마도 이런 흔적이 아닌가 한다.

 

(2) 종교조직체(宗敎組織體)로서의 ≪수두론≫

 

① 종교적 믿음의 장소에 대한 ≪수두론≫

단재 선생의 〈수두론〉은 종교적 조직체계로서 또 하나의 커다란 특징을 보이고 있다. 위 단재 선생의 논증에 의한 〈수두〉와 〈신 수두〉 ≪소 단군≫과 ≪대 단군≫의 종교적 조직체계는 근‧현대 종교적 조직체계 특히 천주교의 조직체계와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수두〉와 〈신 수두〉라는 신단(神壇)을 기준으로 보면 태백산 수림(숲)에 존재하는 최고최상의 〈수두〉가 먼저 존재를 했으며, 사람들이 점차 불어남에 따라 사는 곳을 이동하여 그들이 새로이 정착을 한 땅에 태백산 수림(숲)을 본 딴 새로운 〈수두〉를 내온다고 논증을 했다. 이것은 가운데(중앙)에 가장 신성하고 중요한〈수두〉가 이미 존재를 했으며, 이전해 간 곳에 또 다른 〈수두〉를 새움으로서 그 지역에서 작은 〈수두〉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건 천주교에서 로마 교황청이 이미 존재를 했으며 신앙의 전파로 세계 각 지역에 성당이 생겨나는 형태와 같은 것이다. 즉 천주교도 각 성당들이 있고 그 위에 구역이 있다. 구역 위에는 교구들이 있고, 그 위에 대교구가 있다. 대교구 위에는 추기경이 관할하는 교구가 있으며, 그 최상위에 로마 교황청이 있다. 둘 사이에 차이점은 〈수두〉는 정치적, 군사적 연합체를 가지고 있지만 천주교의 교구들은 종교적 연합체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차이는 〈수두〉는 무리들이 직접 조직하지만 천주교 교구는 대교구에서 혹은 교황청에서 일방적으로 내려먹인다는 것이다. 비록 생성 년대는 우리네 전통종교가 수천 년 오래 되었지만 약 2000~3000여 년 뒤진 천주교의 조직체계 보다 훨씬 더 민주적이고 민중적이며 민의가 잘 반영되어있다는 것이다.

우리네 전통 종교인 〈수두〉에서 행해지던 종교적인 영향력의 행사 면에서 천주교와 또 다른 두드러진 차이점은 〈수두〉와 〈신 수두〉의 정해짐에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천주교의 교구는 일방적으로 위에서 내려 먹이기에 천주교인 자신들이 스스로 교구니 대교구니 하는 것들을 결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네 전통 종교에서 〈수두〉 〈신 수두〉에 대한 결정은 외적 혹은 환란을 당했을 때 어떤 〈수두〉가 더 큰 공을 세워서 민중들을 더 안전하고 평안하게 해주었으며 살아가는데 어느 〈수두〉가 잘 했느냐에 따라서 그 결정이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대단히 선진적이고 발전적인 규범인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단재 선생의 〈수두〉론대로 행해졌다면 이는 21세기 현재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한 종교적 규범인 것이다.

 

② 종교 지도자적 측면에서의 ≪수두론≫

단재 선생이 고증을 하고 있는 〈수두〉론에서 보면 종교지도자 배출이라는 측면서 보아도 대단히 선진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비교 분석은 또 다시 천주교와 비교를 할 수밖에 없다.

먼저 천주교의 지도자 즉 신부, 수녀, 수도사, 주교, 대주교, 추기경, 교황(이 부분에서는 형식적으로 선출을 하기는 하지만 내면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은 민중들이 뽑는 것이 아니다. 신부는 주교가, 주교, 대주교, 추기경은 교황청에서 일방적으로 뽑는다. 물론 추천을 하는 제도가 형식적으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건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신부를 서품을 하는데 있어 주교의 입장이 실제적으로 가장 크게 작용을 한다. 주교에 대한 임명 역시 마찬가지로 교황청대리대사의 입김이 가장 크다. 추기경 선출 역시 교황청 대리대사의 영향력과 최종적으로 교황청의 영향력이 가장 크다. 결국 천주교의 조직체계는 가장 선진화된 것처럼 포장이 되어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가장 전근대적이며 후진적이라고 볼 수 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신부는 주교의 눈치를 봐야하고, 주교는 추기경의 눈치를, 추기경은 교황청을 입장을 가장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천주교의 조직에서 보면 결국 교인들의 의사는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반면 단재 선생이 논증을 하고 있는 〈수두〉론에서 보이는 〈수두〉 와 〈신 수두〉관계는 〈신 수두〉의 ≪대 단군≫이 멋대로 〈수두〉를 〈신 수두〉 만들지 못하며 ≪소 단군≫을 ≪대 단군≫으로 절대 임명하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래 문장이 이를 잘 보여준다.

“强賊인 侵入하면 各 〈수두〉所屬의 部落들이 聯合하여 이를 防禦하고 가장 功이 많은 部落의 〈수두〉를 第一位로 尊崇하여 〈신 수두〉라 이름 하니”

위 문장에서 보이는 〈수두〉에서 〈신 수두〉로의 이름으로 상승을 하기 위해서는 외적의 침입이나 환란에 연합하여 대처를 하여서 가장 큰 공을 세워야 얻을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즉 공을 세우지 못 한 〈수두〉는 결코 〈신 수두〉가 될 수 없다. 또한 〈수두〉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제주인 ≪소 단군≫ 역시 큰 공을 세우지 않는 한 결코 ≪대 단군≫이 될 수 없다. 물론 ≪대 단군≫ 역시 강한 외적이 침입하면 연합하여 방어를 했을 때 그 공적이 미미하면 ≪소 단군≫으로 격하되며 그가 관장하는 〈신 수두〉는 〈수두〉로 강등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문장이라고 본다. 이 얼마나 민주적이며 민중적인가?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5천여 년 전에 21세기인 오늘에도 실현하지 못하는 민주적인 종교조직규범을 가졌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위와 같은 종교조직체계 혹은 정치, 군사조직체계에서 우리 겨레에게 닥친 강한 외적을 막아내고 평화를 지켜내고, 환란에 닥친 민중들을 구제하여 편안한 삶을 살게 해준다면 이를 담당했던 ≪소 단군≫이나 ≪대 단군≫에 대한 민중들의 존경심과 숭배 심은 과연 얼마일지 짐작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 단재 선생의 ≪수두론≫에 나오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 가장 功이 많은 部落의 〈수두〉를 第一位로 尊崇하여 〈신 수두〉라 이름 하니 〈신〉은 最高最上을 의미한 것이며, 기타의 각 〈수두〉는 그 아래 附屬하였나니,”

가장 공이 많은 부락의 〈수두〉를 第一位로 尊崇(존경하고 숭배한다) 한다. 또한 〈신 수두〉라 이름 하니 〈신〉은 最高最上을 의미한 것이며, 기타의 각 〈수두〉는 그 아래 附屬하였다. 역시 그 당시에도 우리 겨레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존경과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은 바로 우리 겨레의 삶을 얼마나 잘 보장해주고 보호해주느냐에 따른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겨레는 결코 어느 개인의 삶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단재 선생의 ≪수두론≫에서 그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이 얼마나 민주적이며 민중적인가. 아마도 여기로부터 ≪【우리】≫라는 말이 생겨나지 않았나 한다. 

 

2014년 6월 9일

이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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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제 ❀❀❀

한단고기(桓檀古記)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 갑술 67년( B. C. 2267년) 단군께서 태자 부루(夫婁)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우사공(虞司公)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는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방법을 전하여 주었다.

“甲戌六十七年帝遣太子夫婁與虞司公會干塗山太子傳五行治水之法“❞

도산(塗山)은 지나 안휘성 회원현을 흐르는 회하의 동쪽 강변 일명 당도산(當塗山)을 말한 다. ≪오월춘추(吳越春秋)≫에는 하나라 우왕이 도산 씨의 여인에게 장가를 든 장소라고 기 록 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은 “주신지공(州愼之功)이라고 한 것은 창수사자(蒼水使者)인 부루 (夫婁)의 공(功)을 가리킨 것이다.”라는 문장에서 보듯이 단군의 태자 부루가 하나라 우왕과 만나 물을 다스리고 산을 다스리는 법과 오행치수의 이론을 전수시켰기 때문에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배경이다. 이 땅에 대해서는 중국 쪽 정사에도 하나라 우왕과의 관련 사실 을 하나와 같이 널리 알리고 있으니 그때 단군조선의 문화와 문명이 지나 쪽에 전해진 것으로 본다. 여기에 대해서는 추후 상세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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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한국근대사상가선집➁ 신채호(申采浩)(신채호 원저. 안병직 편. 한길사. 1979년 12월 25일)

단재신채호전집 별집. 丹齋申采浩全集 別集(신채호 원저.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단재신채호전집발행위원회. 1977년 12월 28일)

주역 조선상고사(下) (신채호 원저. 이만열 주역.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 형설출판사. 1983년 12월 30일)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00주년기념논집(論集), 단재 신채호와 민족사관(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형설출판사. 1980년 12월 8일)

조선상고사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06년 11월 10일)

조선상고문화사〈독사신론(讀史新論),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사론(史論)〉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07몀 3월 5일)

한단고기(계연수 찬. 임승국 주역. 정신세계사. 2010년 3월 25일)

삼국유사(일연 저. 이민수 주역. 을유문화사. 1975년 2월 20일)

삼국유사(일연 저. 박성봉 / 고경식 주역. 서문문화사. 1985년 10월 15일)

삼국유사(일연 저. 리상호 옮김. 북한사회과학원 민족고전 연구소. 까치글방. 1999년 5월 10일)

불함문화론(최남선 저. 정재승 / 이주현 역주. 우리역사연구재단. 2008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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