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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과 주체사상의 만남: 평화통일을 향하여
-최제우와 김일성의 사상을 중심으로-
신은희  (미국 심슨대 종교철학부 교수)                    (2006. 8 민족통일학회 자료)




1. 열면서: “위반의 경험”과 “위반의 문화”

2. 최제우와 김일성: “시대의 이단자들”

3. “비운이 드리운 나라”와 평화

4. 조선식 조화와 융합의 원리

5. 인민이 하늘이다

6. 남겨진 현실적 문제들







1. 열면서: “위반의 경험”과 “위반의 문화”

“우리는 어떻게 또 얼마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프랑스 포스트모던 철학자 미셀 푸코 (1926-1984)가 모더니티를 극복하는 새로운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던진 질문이다.  새로운 사고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푸코는 우리가 서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경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철학을 ‘경험-책’의 등식으로 표현한다.  자신의 철학세계를 ‘경험의 철학’으로 정의하며 과거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던 역사물에 대한 경험적 진리를 추구한다.  즉, 경험은 지역적이며 국지적이다.  따라서 사고와 생각 그리고 철학은 반드시 특정지역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보았다.  푸코의 경험은 일종의 ‘위반의 경험’이다.  이는 기존의 사고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바꿔 버리는 경험이기도 하고 전통적 가치를 해체시킬 수도 있는 강렬한 경험이기도 하다.  그러한 일련의 경험들이 모여져 사고의 틀을 변화시킨다.    




푸코의 이러한 ‘위반의 경험’에 기초한 ‘경험의 철학’은 북의 주체문화를 재해석하는데 있어서도 적용될 수 있다.  과거 북의 주체사상과 주체문화는 우리가 결코 넘어서는 안되는 ‘경계의 문화’였다.  또한 정상문화와 기존의 사회질서에 위배되는 ‘위반의 문화’였다.  그러나 북의 고유문화로 정착해버린 주체사상과 주체문화가 계속해서 ‘경계의 문화’로 ‘위반의 문화’로만 인식된다면 21세기 평화적인 통일문화의 정착은 불가능하다.  북의 주체사상을 단지 ‘독재의 정치수단’으로만 정의한다면 푸코가 생각했던 ‘위반의 경험’의 가능성은 즉각적으로 없어진다.  동시에 어떠한 대화도 존재할 수 없다.  하나가 또 다른 하나를 제거하거나 흡수하는 방법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주체문화를 정치적 이념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넘어 지역적 가치와 국지적 진리가 상대적으로 포함된 ‘위반의 문화’로 전제한다면, 그리고 그 '위반의 경험‘을 일부 실행에 옮긴다면 대화의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적 대화를 통한 새로운 사고의 모형도 가능해질 수 있다.  필자는 21세기 평화통일의 문화를 그리며 ‘위반의 문화’를 좀 더 자유롭게 넘나들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는 단지 지식인들의 지적 유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북의 평화공존을 위한 현실적인 접근방법이라고 본다.  이러한 방법의 필요성은 필자의 이론적 가설에만 기초한 것은 아니다.  제한적이나마 북의 인민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체득된 ‘위반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대화의 필연성을 대전제로 본 논문은 동학과 주체라는 두 줄기의 사상과 문화를 연결하고자 한다.  이 글의 주된 목적은 동학사상과 주체사상을 문화적 차원에서 재해석함으로서 21세기 한반도의 평화문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데 있다.  한민족의 고유한 정신세계가 녹아있는 동학의 세계관과 북의 고유문화로 정착한 주체문화와의 대화를 통하여 남북의 정신세계를 이해한다.  이러한 종교문화간의 상호적 대화는 남북의 통일문화를 성숙한 대화의 모델로 발전시키며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을 고양시킨다.  본 논문의 주된 초점은 최제우와 김일성의 사상을 비교분석함으로서 동학과 주체사상의 정신문화를 연결하여 현대적 조명을 하는 데 있다.  이 논문에서는 독립된 성격의 방법론을 도입하지 않고 동학의 세계관으로 북의 주체사상과 문화를 재해석하는 “동학의 해석학”을 통해 두 전통의 간주체적 만남을 시도하고자 한다.    


2. 최제우와 김일성: “시대의 이단자들”

약 100여년의 시대차이는 있지만 최제우(1824-1864)와 김일성(1912-1994)은 근현대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최제우와 김일성은 각각 나라가 외세의 침략과 제국주의 열강 속에 처해 있을 때 자생적인 정신문화로 새로운 국가 재건과 민중혁명을 꿈꾸었던 인물들이다.        




최제우는 1860년 4월 5일 동학을 창조한 제1대 교주이다.  최제우는 19세기 말 조선이 직면했던 대내외적인 총체적 위기를 민족사상으로 극복하고자 동학을 창도한다.  동학사상은 종교문화적으로는 무교의 바탕위에서 유, 불, 선의 기존종교문화를 흡수하여 출발한다.  역사적으로는 제국주의와 내부개혁을 강력히 요구했던 민중중심의 혁명전통이다.  최제우가 동학사상을 본격적으로 포교하기 시작한 해는 1861년부터다.  그는 1864년까지 3년 정도 활동하다가 1863년 12월에 체포되어 1864년 3월에 대구에서 처형당한다.    

최제우는 1824년  10월 28일 (음력) 금강산 일협곡에서 태어나 경북에서 성장했다.  최제우는 부친 근암 최옥과 한씨부인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나 서얼의 차별과 계급차별을 철저히 느끼며 살아야 했다.  지배문화로부터 항상 소외의식을 지니며 살아야 했던 최제우의 삶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그는 성장 후에도 특별한 직업 없이 아내와 자식을 처가에 맡기고 전국을 방랑하기도 했다.  새소리조차 자신을 조롱하는 것으로 들릴 만큼 그는 자신의 불운과 가정 그리고 국가의 슬픔을 절망적으로 그렸다.      

“가련하다 가련하다 이내가운 가련하다 나도 또한 출세후로 득죄부모 아닐런가 불효 불효 못면하니 적세원울 아닐런가 불우시지 남아로서 허송세월 하였구나 인간만사 행하다가 거연사십 되었더라 사십평생 이뿐인가 무가내라 할길없다 구미용담 찾아오니 흐르나니 물소리요 높으나니 산이로세 죄우산천 둘러보니 산수는 의구하고 초목은 함정이니 불효한 이내마음 그 아니 슬플소냐 오작은 날아들어 조롱을 하는듯고 송백은 울울하여 청절을 지켜내니 불효한 이내마음 비감회심 절로난다.”1)  

그는 개인의 절망감과 함께 당시 조선을 억압했던 중국과 일본을 향해 민족적 분노를 표출했다.  그는 “개같은 왜적놈”을 단번에 멸망시켜야 한다는 극도의 분도와 중국의 침략에 대한 강렬한 비판을 했다.  그러나 수운의 이와 같은 개인적 방황과 민족주의적 분노는 종교적 체험과 함께 승화된다.  그는 자신이 경험했던 소외감과 사회적 차별 그리고 국가의 몰락을 새로운 역사의식과 종교적 영성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그는 당시 조선이 경험하고 있던 총체적 국가 위기를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으로 전이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강대국의 제국주의와 맞설 수 있는 민족정신과 역사의식을 기초로 동학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최제우보다 약 100여년 후에 태어난 김일성은 적자와 서자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시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나라가 일본의 독점적인 식민지가 되었을 때 태어나 성장했다.   그는 1912년 4월 15일 평양 대동강 기슭의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부친 김형직과 모친 강반석의 삼형제중 첫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김성주였고 그의 가계는 조상 대대로 농민계층이었다.  김일성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고 그가 20세가 되었을 때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김일성은 고아가 되어버린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만주를 떠돌며 힘겨운 삶을 이어갔다.  그는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의 정규교육은 중학교 2학년으로 마감된다.  그러나 그는 중학교 시절 항일정신을 키우게 되고 ‘타도제국주의동맹’이라는 항일단체에 조선공산당 산하 만주총국에 중학생의 신분으로 참가하기도 한다.  김일성은 그의 회고록에서 당시 레닌의 말을 빌어 일본 제국주의 야수성을 고발하기도 했다: “...일본은 모든 새로운 발명들과 순전한 아세아식 고문을 결합시킨 전대미문의 야수성으로 조선을 략탈하고 있으며 그를 계속 략탈하기 위하여 싸울 것이다.”2)

1929년 5월 체포되어 17세의 나이에 옥살이를 경험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의 투쟁결심은 중학교 시절 중국인 선생으로부터의 항일교육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빈곤한 가정배경과 주류사회에 편승할 수 없었던 민중적 삶의 현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여 나는 어수선한 동란의 시대에 태어나 불우하게 어린시절을 보냈다.  이러한 시대상은 나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대대로 소작살이를 하다나니 우리집안은 매우 어렵게 살았다... 온 가정이 달라붙어 기를 쓰고 일했지만 늘 죽도 변변히 우리지 못하였다.  껍질도 벗기지 않은 수수로 타개죽을 쑤어 먹군하였는데 목안이 깔깔해서 넘어가지 않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3)

<조선노동당력사>에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역사를 전설적으로 기록하여 신비화시키고 있지만 역사적으로도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김일성이 고안한 주체사상은 한국전쟁 시기에 싹트기 시작한다.  개인이나 국가나 상대가 절실히 어려울 때 도움을 받으면 관계정립이 새롭게 된다.  반대로 가장 어려울 때 외면을 당하면 상대방과 상대 국가를 재평가하게 된다.   김일성은 한국전쟁 시기 소련의 도움이 가장 필요할 때 외면당하는 경험을 한다.  김일성은 한국전쟁을 개시할 때만 해도 소련의 노동자와 농민을 세계의 노동자와 농민으로 북의 인민들이 따라 배워야 하는 모델로 상정했었다.  실제로 그는 소련으로부터 한국전쟁의 명분을 인정받으려 했었고 전쟁에 필요한 무기와 지원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북한이 전쟁 중 유엔군의 반격으로 압록강까지 추격을 당했을 때 소련군의 파병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 후 복구 작업이 시작되면서 소련의 소극적인 복구지원이 이루어지자 김일성의 반소감정은 본격화 되고 표면화 되었다.  마침내 김일성은 1955년 12월 28일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없애고 주체를 세울 것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최제우와 김일성은 둘 다 주류사회에 소속되기 어려운 소외된 배경에서 성장했다.  또한 국운이 다한 시기에 태어나 불운한 개인사와 함께 나라가 침략당하고 빼앗기는 슬픔을 직간접으로 맛보아야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어두운 가정배경과 정치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최제우와 김일성은 자아성찰을 통하여 개인적 차원의 구원이 아닌 국가적 차원의 사회정치적 구원관을 정립한 인물들로 평가할 수 있다.  최제우는 동학을, 김일성을 주체라는 자생적인 사회정치적 담론을 돌출함으로서 외세의 압력에 저항하며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전통적인 주류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이단적이고 위험한 시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격동의 시기에 새로운 정치사회를 이끌어내고자 창조적 파괴를 단행한 ‘시대의 이단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꿈꾸었던 사회정치적 이상과 평화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3. “비운이 드리운 나라”와 평화  




최제우가 살았던 시대배경은 외세로부터 철저히 나라를 지켜야 했던 시기였다.  최제우는 당시 강대국들이 약소국가를 침략하여 식민지 정책을 피고자 하는 제국주의 시대를 목도했다.  중국을 괴멸시키고 조선에 위협을 가해오는 서양세력들로부터 어떻게 나라를 지킬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등 서양의 강대국들은 1860년 영, 불 연합군으로 북경을 침입하였다.  그는 “경신년 (1860)에 전해 온 세상의 얘기는 요망 무쌍한 서양의 적이 중국을 범하여 왔다...”4) 고 기록하고 있다.  

거의 매년 이양선의 출몰이 있었고 수시로 도전받는 통상 교섭의 강요등으로 조선은 자주적 국가로서의 기능을 점차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변강대국에 의한 제국주의 섭정정치를 견제하기 위하여 최제우는 ‘보국안민’ 정신을 주장한다.  이는 나라를 자주적으로 보위하는일이 백성을 가장 먼저 위하는 절대조건임을 강조한 원리이다.  나라를 빼앗기고 백성을 잘 먹이는 일이 불가능함하다고 믿은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 백성을 노예로 만들고 포식시키는 것은 ‘사육’에 가까운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최제우는 나라의 위기의식을 극복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민족적 유토피아를 꿈꾸며 보국안민 정신을 내세우게 된다.  

최제우의 보국안민은 신식무기뿐 아니라 정신세계의 중요성도 함께 강조하는 원리이다.   그는 새로운 무기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서양의 과학정신과 정신세계를 이해하고자 했다.  최제우는 무엇보다 과학으로 무장한 서양의 정신적 원동력을 단절시킬 수 있는 자생적 세계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가 동학을 창도하면서 기존의 유불선 선천전통을 흡수하고 재창조하려 했던 것은 바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보국안민의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천주교가 음이고 도학은 양이다.  그러므로 양이 음을 제압한다”고 주장했다.  최제우는 강대국의 제국주의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무기도 중요하지만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절대적인 민족적 애국적 영성이 더욱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산중에 제단을 쌓고 주문과 검가를 연창하면서 나무와 칼로 검무를 추는 방법도 고안했다.  최제우의 보국안민의 정신은 종교적 주문과 군사적 검무가 조화를 이룬 동학의 독특한 민족적 영성과 함께 무장투쟁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이처럼 동학의 평화란 국가의 주권과 독립적인 국가 방위에 기초하고 있다.  나라의 자주권이 외세에 의하여 박탈당한 상태에서 누리는 안정은 진정한 평화일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백성을 위하는 가장 첫 번째 조건은 나라를 위해 싸우는 국태민안 정신이다.  백성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기본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다.  이를 수호하기 위한 영성개발과 무장투쟁은 평화의 기초적 조건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국권과 자주권에 기초한 평화개념은 북의 주체문화에서 더욱 강조된다.

김일성의 평화인식은 항일 빨치산전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김일성은 당시 조국을 ‘비운이 드리운 나라’로 표현했다.  비운의 역사 한복판에서 그는 ‘독립이 곧 평화’라는 자주적 평화인식을 가졌다.  그는 두 종류의 평화개념을 제시한다.  첫째는 ‘부르죠아 평화’로 제국주의 국가들의 억압에 의하여 소수민족의 희생과 굴종을 요구하는 강압적 평화이다.  둘째는 사회주의가 이끌어 낸 평화로서 제국주의 국가들의 폭력을 영원히 제거한 상태를 의미한다.  김일성에게 있어서 진정한 평화란 결코 강대국에게 협상하거나 구걸하여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자들과의 투쟁을 통한 승리의 결과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예적 굴종이 가져다주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평화의 파괴자들을 반대하여 투쟁하며 노예의 평화를 반대하여 억압자들의 통치를 뒤집어엎지 않고서는 진정한 평화를 달성할 수 없다.”5)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서도 반미투쟁은 평화를 위한 투쟁의 기본이다.  미제국주의는 평화의 주된 교란자이며, 평화의 가장 흉악한 원쑤이다.  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을 떠나서는 세계평화를 수호할 수 없으며, 민족적 해방 과 독립도,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도 이룩할 수 없다.”6)

김일성은 조선인민군창건 50돐 경축연회에서 <주체의 혁명위업을 무력으로 튼튼히 담보하자>7)는 연설을 통하여 평화의 유지는 기본적으로 무력담보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조선인민혁명군은 조선인민의 반일민족 해방투쟁과 공산주의 운동발전에서 획기적인 전환의 계기를 열어 놓은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규정한다.   또한 조선인민혁명군의 창건은 조선인민이 역사상 참다운 혁명군대를 가지고 조국의 독립과 인민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높은 단계에서 실현시킬 수 있는 혁명무력의 영광스러운 역사임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김일성은 인민군대의 군사기술상태와 대열구성의 중요성도 역설한다.  그는 자주적인 국방을 위해서는 첫째, 인민군대가 현대적 무기와 전투기술로 장비되어야 한다고 했다.  둘째, 모든 군인들은 높은 군사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자기의 무기와 전투기술기재들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우리의 혁명무력은 창건 후 유격전도 해보고 정규전도 해보고 현대전도 해보았으며 그 과정에 풍부한 경험을 가진 유능한 혁명적 골간들이 수많이 자라났습니다... 영광스러운 항일혁명투쟁의 불길 속에서 창건되고 위대한 조국해방전쟁과 치렬한 계급투쟁의 시련 속에서 단련되었으며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현대 군사과학기술과 최신 군사기술기재로 장비된  필승불패의 조선인민군이 있음으로 하여 우리 조국의 안전과 우리 혁명의 승리는 확고히 담보되여 있습니다.”8)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대의 자위국방 없이 인민들의 생활 터전은 담보될 수 없으며 강대국들로부터 다시 나라를 빼앗기는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그의 아버지 김형식이 강대국에 대항해서는 ‘부탁’이나 ‘청원’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장활동’을 통해서만 나라의 자주권을 지킬 수 있다는 부탁을 늘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따라서 김일성의 평화인식은 강대국으로부터 철저히 자력으로 국가방위를 할 수 있는 혁명과 건설의 ‘무력전진’ ‘무력담보’임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자주국방의 실현은 인민군대를 강화하는 것과 함께 전체 인민을 무장시키고 전국을 요새화하기 위한 투쟁을 함께 전개해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전 인민적방위 체계’로 이름하고 군사규율과 상하일치, 그리고 군민일치의 주체군사문화의 정착을 위하여 매진해야 함을 강조한다.  동시에 김일성은 최고의 군시설과 함께 최고의 정신적 무장을 또한 요구했다.  그는 인민군대는 주체사상에 의하여 지도되며 주체사상의 승리를 위하여 투쟁하는 군대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전군을 주체사상화하는 것은 우리의 혁명무력발전의 합법칙적요구이며 오늘 인민군대앞에 나선 종적과업입니다... 우리는 <<전군을 주체사상화하자>>라는 구호를 높이 들고 인민군대를 정치사상적으로, 군사기술적으로 더욱 강화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려야 하겠습니다”9)라고 하면서 자위국방의 정신적 차원을 강조했다.  이러한 김일성의 자위국방론은 오늘날 김정일 시대의 선군정치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최제우와 김일성은 국가의 독립과 자주성을 지키는 것 자체가 평화임을 강조한다.  물론 시대적 역사적 상황이 다르지만 국가와 민족의 주권과 존엄성을 지키는 일은 국가에 속해있는 모든 이들의 기본적인 생존권과 인권을 보장하는 것과 직결된다고 믿었다.  또한 이 둘은 국가존립을 위해서는 무력항생이 필연적임을 역설하며 현대적 군사시설과 준비와 함께 무력투쟁의 정신적 차원을 함께 강조하고 있는 공통적 특징이 있다.      


  

4. 조선식 조화와 융합의 원리

동학의 조화와 융합원리

최제우와 김일성의 사상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종교 문화적 원리가 있다.  그것은 ‘조선식 조화와 융합의 원리’라고 요약할 수 있다.  최제우는 동학을 창도하면서 기존의 선천문화를 비판적 수용하는 조화와 융합의 원리를 사용했다.  최제우는 선천시대 전통이 유교와 불교, 도교 (혹은 선교)의 전통이 당시 민중들의 삶속에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을 비판했다.  종교의 사회성과 개혁성을 상실해가고 있는 시대에 최제우는 민간신앙과 함께 전통사상을 습합하여 민중중심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했다.  

최제우는 무엇보다도 당시 일반 민중들에게 익숙했던 ‘한울님 신앙’을 간과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한울님 신앙은 고대로부터 농경민족인 우리 선민들이 천신, 지신, 조상신을 숭배하는 삼신신앙으로부터 출발하여 한민족의 전통신관으로 존재해 왔다.  최제우는 한울님 신앙을 일방적인 신으로 묘사하지 않고 늘 인간과 교감하는 인격신이면서도 자연적 기가 융합된 ‘기화지신(氣化’之神)‘으로 해석했다.  따라서 한울님과 인간의 관계가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한울님을 모시고 체득하면 무궁한 우주적 조화의 기운 속에 연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최제우는 민중들은 고상한 철학적 원리보다 무교와 같이 친근한 민간신앙을 더욱 가깝게 느끼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당시 지식층 사회로부터 폄하 당했던 무교적 종교체험을 미화시키지 않고 자신의 강신체험을 그대로 고백한다.  수운이 경신년에 경험했던 신비체험은 강신무에서 나타나는 현상과도 비슷한데 이는 신령들의 기운이 절대성을 가지고 일정기간 인간의 몸 안에 거하며 신의 뜻을 전하게 되는 원리로 신령들의 강력한 의지적 선택으로 먼저 이루어지게 된다.  

동경대전에 따르면 수운은 4월 초닷샛날 갑자기 몸과 마음에 이상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싸늘한 추위에 온몸이 휩싸이면서 몸과 마음이 몹시 떨리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게 되고 어떠한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수운은 세상을 구원할 무극대도의 가르침을 받게 되고 신의 제자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10)  수운의 강신체험은 강신무들의 강신체험과도 흡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용담유사에서 수운은 자신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기의 접령 사건을 보고 스스로 자신의 팔자를 한탄하며 사람들에게 비정상인처럼 변해가는 자신을 위해 기도나 제사를 드려줄 수 없는지를 부탁하기도 한다.  또한 수운의 변형된 모습 때문에 그의 자식들이 두려움에 떨고 이 구석 저 구석으로 숨어 다니었다고 한다.  또한 수운의 아내는 행주치마를 두른 채 혼절 상태에 가까워 한참을 당황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신의 강화와 접령은 전형적인 무층의 빙의현상이나 신내림 현상과도 같다.  무당이 빙이나 신내림이란 신이 일방적으로 특정개인에게 신기 (神氣)를 내리는 것으로 무병과 함께 신비체험을 동반하게 되며 신의 뜻을 받아들여 신의 제자로서 구도자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최제우는 자신의 체험한 한울님의 존재를 민중들이 이해하기 위하여 “강화접령 (降話接靈)”의 무교의 강신적 성격으로 설명한다.  또한 수운의 강신체험은 단지 신비체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종교적 도구들도 부여 받게 된다.  이는 무교전통에서 강신무들이 신에게로부터 엽전이나 방울, 침통 혹은 무덤에서 파오는 구여비와 같은 무구들을 받아 점사를 행하고 주술적 의료행위를 시작한 것과도 흡사하다.  신의 세계로부터 수운이 받은 것은 부적인 영부 (靈付)와 21자 강령주문11)을 받는다.  영부는 태극을 상징하는 것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선약 (仙藥) 으로도 쓰이고 인간 마음의 원형을 상징하는 궁궁 (弓弓)의 형태를 가진 것으로 고통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병을 낮게 해주는 무구의 일종이다.12)  

또한 수운의 21자 주문은 무교에서 말하는 일종의 접신경 (接神境)으로서 무당들이 신내림 상태에 있을 때 무당들의 입을 통하여 무당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새로운 “공수”를 내리게 되는 것과 흡사하다.  수운은 신비체험 중에 접신상태에서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환시와 환청의 체험을 하면서 몸의 떨림과 함께 신의 말씀이 내면으로 내려와 가르침을 전하게 되는 “내유강화지교 (內侑降話之敎)”의 형태라고 고백하고 있다.13)  무당들의 이러한 강신적 성격은 기의 초월적 절대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기가 인격성을 띠고 나타날 때  기의 초월성이 극대화 되면서 범재신론적 성격이 강화되는데 이 때의 초월성이란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이 분리되어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가 최고로 승화된 상태로서의 초월성을 의미하는 것이다.14)  이처럼 최제우는 아버지 근암으로부터 유학적 철학 가풍을 물려받았음에도 부적과 주술적 방법과 같은 민간신앙을 결코 미신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민중들에게 가깝게 전달하기 위하여 부적과 주술을 이용하여 기도의 정진과 치병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종교성의 힘을 단지 신비주의로만 이해하지 않고 민중의 고통 받는 역사의 현장속으로 들어가 종교성과 역사성을 융합시켜 개혁과 투쟁의 힘으로 삼은 것이다.  

민중들을 위한 무교적 성격을 강조하면서도 최제우는 유교의 철학적 원리를 동학의 사상 형성에서 제외시키지 않았다.  그는 공자의 도를 깨달으면 한 이치로 될 것이요, 동학의 도로 말하면 대체 같으나 약간은 다른 것이 있나니라.“ (포덕문)고 밝히고 있다.  최제우는 유교의 ‘인의예지’를 ‘수심정기’의 종교적 윤리성으로 변모시킨다.  그는 인의예지는 옛 성인의 가르치심으로 인간의 당위규범을 강조한 것이나 동학의 수심정기는 천주를 모시고 한울님의 조화를 자각하고 체득하여 신적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최제우는 그의 아버지 근암 최옥의 유교철학을 흡수한다.  수심정기의 교리도 아버지 근암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대저 근(謹)은 근언, 근행, 근독의 근이라.”  여기서 근언과 근행이 몸으로 행하는 외향적 근이라면 근독은 내면의 마음을 두고 말하는 내향적 근이다.  최제우는 인간의 언행이 마음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강조하며 말과 행동과 함께 독을 삼간다는 근의 참뜻을 심신의 합일로 해석했다.  이밖에도 최제우는 유교의 천명사상이나 천인합일론을 흡수하여 자생적인 종교문화의 철학적 기초를 형성하는데 주력했다.

이외에도 최제우는 서학으로 전달된 기독교문화에 대한 주체적 비판을 한다.  전통적 종교문화의 흡수와 함께 최제우는 서학의 침략정신을 비판하기도 했다.  아마도 최제우는 비판을 위해서 ‘이단종교’ 혹은 ‘이질종교’로 구분된 기독교를 먼저 공부하고 연구했다.  이국문화에 접근하는 최제우의 방식은 무조건적인 국수적 배타주의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는 한울님을 모시는 신앙자체에 관해서는 기독교의 도가 동학의 도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판단한다.  다만 그는 기독교가 강대국의 정치적 힘을 등에 업고 자문화에 대한 이해 없이 일방적으로 소개되어지는 제국주의적 방식을 지적했다.  또한 나라를 빼앗긴 민중의 설움과 국권상실의 현실 속에서 개인구원만을 강조하는 비역사적 구원관이 민중혁명에 있어서 아무역할을 할 수 없음을 비판했다.  

“경신에 이르러 전하여 오는 말을 들으니 서양사람은 하날님을 위한다는 뜻으로 부귀는 취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천하를 쳐서 빼앗아 그들의 교당을 세우고 그들의 교를 널리 퍼뜨린다는 것이므로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되었느니라.”15)    

“서양사람은 말에 차례가 없고 글에 순서가 없으며 도무지 하느님을 위하는 단서가 없고 제몸만을 위하여 빌 따름이라.  몸에는 기화지신이 없고 학에는 하느님의 가르침이 없으니 형식은 있으나 자취가 없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주문이 없는지라.  도는 허무한데 가깝고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니...”16)

이와같이 최제우는 동학이라는 새로운 문명의식을 창도하는데 있어서 조선식 조화의 원리와 융합의 원리를 최대한 살려 민중중심의 신전통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전통적 뿌리와 맥을 함께 한 동학의 정신은 동학혁명의 중요한 정신사적인 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주체의 조화와 융합원리

그렇다면 김일성의 경우는 어떠한가.
조선식 조화와 융합의 원리는 김일성의 주체에도 나타난다.  그도 인정하듯이 주체는 맑시즘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는 전통 맑시즘을 조선식으로 변화시키는데 조화와 융합의 원리를 적용한다.  김일성은 맑시즘을 ‘선행이론’으로 부른다.  그는 주체사상과 맑시즘의 차이는 인민대중중심의 주체사관과 생산방식 중심의 유물사관과의 차이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선행이론인 맑시즘은 생산력의 담담자인 노동계급과 생산관계의 지배자인 자본 가 계급을 자본주의 사회의 두 기본계급으로 규정한다.  또한 지식인은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자본가 계급에게도 복무하고 노동계급에게도 복무할 수 있는 중간층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지식인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에서 ‘동요하는 중산층’으로 볼 수 있는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에게 있어서 주체의 사회역사관은 지식인을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근로자’로 규정하고 혁명 주체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인정한다는 점이다.  지식인을 혁명 주체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보는 관점과 동요하는 중간층으로 보는 관점은 인간관의 근본적 이해가 다르다고 주장한다.  

김일성은 지식인을 정치적 특권이나 경제적 특권에 의거하여 사람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지배계급과는 달리 자기의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정신노동으로 사회에 복무하는 근로자로 규정한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은 노동의 형태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사회에 복무하는 유익한 노동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에 복무하는 모든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노동이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인민대중을 역사의 주체로 이끄는 창조적 노동은 혁명주체의 원동력이 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의 이러한 지식인 이해를 김정일은 그대로 이어받아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한다.

“인민대중은 력사의 주체인것만큼 물질적 부를 창조하는 사업뿐아니라 사회를 개조하고 관리하는 사업과 사람을 교양육성하고 사상문화적 재부를 창조하는 사업도 다같이 책임져야 하며 사회생활의 여러 분야에서 벌여지는 모든 형태의 사회적 노동을 다 담당수행 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근로자들뿐 아니라 정신로동에 종사하는 근로자들도 다 력사의 주체, 혁명의 주체의 구성부분으로 되는 것입니다.”17)

이와 같은 사례는 김일성이 주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도 나름대로 조선식 조화와 융합의 원리를 적용한 경우로 볼 수 있다.  그는 국수적인 민족주의자였다기 보다는 조선의 상황에 맞게 외래적 요소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수정해 나갔다.  김일성은 지식인에 대한 이해를 맑스와 달리하면서 노동당을 창건할 때에 노동자, 농민과 함께 지식인을 당의 기본구성 성분으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그는 노동당 당마크에 노동자를 상징하는 망치와 농민을 상징하는 낫, 그리고 지식인을 상징하는 붓을 함께 그려 넣게 된다.  이러한 김일성의 조화와 융합의 원리는 종교에 대한 이해에도 나타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김일성이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김일성은 그의 어린 시절 어머니 강반석이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한 것을 회고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열두 식구를 모두 챙겨야 하는 장손 며느리로 늘 바쁘고 고단하게 지냈다고 한다.  봉건이 심하고 예의범절이 까다로운 큰집의 맏며느리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일성은 그의 어머니가 정기적으로 교회출석을 한 것은 대단히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교회는 맏며느리로서의 고달픈 생활에서 조금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안식처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기독교 신자들이 제법 많았는데 살아서 사람다운 생활을 못하니 예수의 가르침을 잘 따르다가 죽어서 천당이라는 곳에 가보자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른들이 교회를 가면 아이들도 따라갔는데 교회에서는 사탕이나 공책같은 것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아이들은 일요일마다 패를 지어 교회에 몰려가곤 했었다는 것이다.    

김일성도 처음에는 호기심이 나서 동물들과 함께 교회참석을 했다.  그러나 그는 동심에 어울리지 않는 교회의 엄숙한 종교의식과 목사의 단조로운 설교에 싫증을 느껴 열심히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칠골에서는 학교에서도 교회가지 않는 학생들을 통제하는 규칙이 있었지만 김일성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어느 일요일, 김일성이 교회를 가지 않겠다고 하자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가고 안가는 거야 네 마음대로지...  너는 예수보다도 자기나라를 더 믿고 자기 나라 사람들을 더 믿어야 한다.  그리구 나라를 위해서 큰일을 할 생각을 해야 한다”18)고 하였다.  

김일성은 성장하면서 예수의 복음이 인본주의적인 면이 강하지만 조국의 인민들이 겪고 있는 비극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고 회고한다: “예수의 고리 가운데 인도주의적인 것도 많았으나 민족의 운명을 두고 깊은 고뇌에 빠져있던 나에게는 구국에로 부르는 력사의 웨침소리가 그보다 더 절박하게 들리였다.”19)  후에 김일성은 기독교와 자신의 사상을 비교하면서 온 세상 사람들이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기를 바라는 기독교적 정신과 인간의 자주적인 삶을 주장하는 주체사상이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고 믿었다고 회고한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를 믿어도 민족적 정서와 애국적 입장을 지키며 ‘조선식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김일성은 종교성을 무조건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하지는 않았다.  다만 강한 종교성은 민족성과 애국심과 함께 결부 될 때 더욱 의미 있는 힘이 된다고 믿었다.  이와 관련된 예화가 있다.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할 때다. 오래전부터 독립운동자들이 드나들던 내도산 부락이라는 곳이 있었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천불교’라는 전통을 믿고 있었다.  내도산 부락의 천불교 신자들은 하늘에서 99명의 선녀가 백두산천지에서 미역을 감고 올라갔다는 전설에 기초하여 그것에 <<덩덕궁>>이라는 99칸짜리 절간을 지어 일 년에 두 번씩 찾아가 기도를 드리였다.  천불교신자들은 마을에도 <<천불사>>라는 절간을 지어놓고 열흘이나 일주일에 한 번씩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김일성은 평소 이 내도산 부락의 종교숭배에 관해 동지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막상 그것에 도착해서 신자들의 예배장면을 목격하고 나서 부정적인 마음을 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신자들은 모두 고구려인들처럼 전통의상을 입고 꽹과리와 제금, 북과 목탁을 두드리며 기도를 열심히 하였다.  김일성은 그 예배장면을 ‘장엄하다’고 느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신자들의 집 천정에는 절에 바칠 귀한 ‘기장이삭’이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당시는 먹을 것이 없어 끼니조차 제대로 못 챙기고 살았던 시절이었다.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여겼던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러한 종교적 제례가 대단한 허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김일성과 동행했던 리제우는 다음과 같은 비판을 쏟아냈다고 한다.  

“그 망할놈의 천불교 때문에 내도산 사람들이 그만 다 환장하였소.  종교를 아편이라고 한 맑스의 말은 정말 명언중의 명언인 것 같소.  이런 종교쟁이들을 새사상으로 개조하는 것이 과연 필요하며 가능하겠는가 하는거요.”20)  리제우는 종교인들의 비현실적인 신앙에 분노하며 내도산 인민들의 얼을 다 빼앗는 천불교의 덩덕궁에 불을 지르고 싶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일성은 리제우의 종교이해가 오히려 협소하다고 비판했다.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교를 아편이라고 한 맑스의 명제를 나는 물론 부정하지 않소.  그러나 이 명제를 어떤 경우에나 다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요.  일본에 천벌을 내리고 조선민족에게 복을 내려 달라고 비는 천불교에다 그래 아편이라는 감투를 함부로 씌울 수 있겠소?  나는 천불교를 애국적인 종교라고 생각하며 이 교의 신자들을 다 애국자라고 생각하오.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이 애국자들을 하나의 력량으로 묶어 세우는 것 뿐이요.”21)

김일성은 천불교의 교주인 장두범이 한 때 독립군에서 싸우다 독립군이 전멸의 위기에 몰렸을 때 투쟁을 접고 산으로 들어와 백두산천지에서 기도한 이였음을 알게 되었다.  장두범은 일본인에게 천벌을 내리고 조선민족의 복을 빌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장두범을 애국적 종교인으로 이해하고 그를 동지의 한명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천불교의 애국정신을 더욱 지원해서 민족적 종교인으로 남아 줄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또한 김일성은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는데 종교를 믿는 것만으로는 조국의 광복을 이룰 수 없음을 전달하기도 했다.  김일성과 장두범의 일화는 종교간의 대화가 평화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좋은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김일성은 동시에 ‘현지지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동료 리제우의 말만 들었다면 천불교를 허무한 종교성으로만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직접 그들의 제례를 목격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천불교의 애국충정의 신앙심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와 같은 일화에서 살펴 볼 수 있듯이 그는 항일투쟁 초기부터 종교성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의 관점에서 ‘이질적인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애국주의와 결합될 수 있다면 혁명의 동력에서 제외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김일성은 ‘하늘을 믿어도 조선 사람은 조선의 하늘을 믿어야 한다’는 민족적 입장을 고수했다.  즉,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대단히 정치적인 의미가 깊다.  북의 종교가 오늘날까지 강한 정치적 성격을 유지하는 것도 이런 전통에서 유래된 듯하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북의  조선천주교연맹이나 조선그리스도교 연맹등 북의 종교단체들은 ‘순수한 신앙’활동이 아닌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종교를 대외정책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본다.  이는 ‘종교와 정치의 연관성’에 관한 문제이며 이는 곧 ‘종교의 인식론’의 문제이기도 하다.  김일성은 그의 회고록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종교성과 정치성은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애국주의에 기초를 두고 ‘조선민족의 이익’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환영할 만한 정치적 종교성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일성에게 있어서 정치적 종교성은 지극히 ‘순수한 신앙적 행위’로 인식된다.  종교성이 정치적이면 ‘순수한 신앙’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종교의 성과 속을 구분하는 이분적 도식과 근본주의 관점으로만 해석하려는 한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  북의 조선식 사회주의 이념에 기초해 보면 민족의 이익과 애국주의를 떠난 ‘순수한 신앙’이란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맑시즘과 타종교의 이해에서도 나타나듯이 조선식 조화와 융합의 원리는 김일성의 초기 사상에서부터 관찰되고 있다.          







5.  인민이 하늘이다

동학의 인간 그리고 하늘

최제우는 서자출신으로 신분차별의 아픔을 느꼈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 엄격한 사회 신분제도를 타파하기 위해 새로운 ‘신인간학’을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사회적 혁신 운동은 근대화의 평등화와 민주화를 앞당기는 기폭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는 사회개혁의 이론적 담론만 제시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노비 둘을 며느리와 수양딸로 들이는 획기적인 결정을 하기도 했다.  이는 기존문화에 대한 최제우의 저항적 수행이기도 하다.  저항적 신인간학을 수립할 수 있었던 최제우의 영성은 시천주의 “모심”의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에 인간 스스로 노예화 되어 가는 비애를 체험하며 모든 인간이 한울을 모신 신적존재임을 역설했다.  즉, 시천주사상은 모든 ‘인간이 하늘’임을 천명한 조선식 인본주의의 극치이다.  모심의 철학은 신과 인간을 이중적 구조로 파악하지 않은 ‘관계성의 영성’이며 실천적 영성이기도 하다.  즉, 신과 인간이 일원론적 존재구조를 가지며 역동적 기운으로 이합취산하는 것이다.  ‘모신다’는 뜻은 인연을 맺는 관계성을 뜻한다.  신과 인간의 관계성은 신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이 동시에 주체가 되어 이루어지는 조화의 관계성이다.    

최제우는 “사람의 수족동정 (手足動靜) 이는 역시 귀신이오” 이라고 하며 신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이 따로 존재할 수 없음을 뜻하는 ‘오심즉여심’의 원리를 소개했다.  즉, 민심이 천심이라는 유교의 전통적 세계관을 민중의 시각에 가깝게 무교적 바탕위에서 재해석한 것이다.  

최제우는 모든 인간이 지극하고 고귀한 한울님을 모시되 그 한울님의 존재를 바로 각자의 몸 안에서 찾으라는 내재적 신성을 강조한다.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을 믿었어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 (捨近取遠)하단말가.”22)      


최제우의 모심의 사상은 후대 교주들에 의하여 신성한 한울님을 우리 안에서 키우며 체득하라는 ‘공동체적 영성’으로 발전된다.  해월 최시형에서 발견되는 "베짜는 며느리"의 예화는 당시 인권에서 제외되었던 며느리들에게도 신성한 한울의 영이 존재함을 가르치는 실천적 인본주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베짜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 "여인이 베를 짜는가 아니면 한울님이 베를 짜는가" 하는 질문은 모심의 철학에서 파생된 기화지신의 우주적 생명성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는 예화라 하겠다.23)  즉, 최제우의 모심철학은 생명의 유지와 보존을 위하여 인간이 행하는 모든 노동의 현장과 자연의 생태를 보존하기 위한 모든 환경 운동과 평화 운동 속에 이루어지는 생명중심의 인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한울이라는 사상은 무계급적인 공동체성과 관계성의 힘을 강조한다.  공동체적 성격은 동학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이미 분출되었고 이와 같은 역사는 민중 역사 속에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동학의 인본주의 사상은 동학의 ‘기론’과도 연결된다.  동학의 기론은 각 개인이 공유하는 기의 시너지 효과가 공동체를 이루면서 민중 중심의 새로운 전통을 창조한 예이다.  이때 공동체의 성격은 다분히 민중의 해방적 기능을 한다.  민중의 개념이 시대마다 다양하게 정의될 필요가 있음을 전제로 동학의 민중은 여전히 소외되고 억눌린 계급차별의 대상과 여성과 아동이 포함된 민중 중심의 공동체를 해방하는 원리를 지닌다.  사람이 하늘이고 인민이 하늘이라는 동귀일체 (同歸 一體)의 원리는 기의 한자적 용어에서도 나타난다.  즉, 氣는 汽 와 米 의 조합으로 이때 米 (쌀미)는 바로 밥을 뜻하며 인간의 생존을 뜻하는 것이다.  인간이 먹는 밥의 의미와 한울의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는 기화지신의 원리인 것이다.  이는 또한 신과 인간이 한울임을 깨닫는 이치이며 다양한 개별성이 모아져 조화로운 전체성의 연합으로 변형되어 신인간과 함께 만물의 조화를 이루는 관계성의 인본주의인 것이다.    

여기서 최제우가 의미하는 전체성 혹은 관계성은 서구적 범재신론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동학의 전체성은 다신적 이면서도 일원론적인 성격이 있다.  한울이 "한 가지" 라는 측면에서 서구 ‘범재신론’은 유사하다고 보여 질 수 있으나 두 전통에서 말하는 일원론의 성격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예를 들면, 모심의 철학에서 말하는 신과 인간의 일원론적 성격은 다분히 질적인 차원의 일원개념인 반면 서구 범재신론은 양적인 일원개념에 더 가깝다.  질적 일원론이란 숫자적 개념의 "하나"보다는 영이 한 종류임을 더욱 강조한다.  인간이 신을 모시는 신격 (degree)에는 어느 정도의 차등이 있다고 보지만 여전히 질적으로는 한 종류의 신성활동으로 본다.  서구 범재신론은 여전히 양적인 일원론이 부각된다.  즉 숫자적 개념의 한 개의 영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서구 범재신론의 신학적 틀이 지극히 신플라톤 의 철학적 단일개념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영의 유출과 귀속의 존재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세상의 다분화된 현상으로  나타나는 신성은 절대자와 같은 존재로부터 유출된 것으로 결국 거대한 단일 개념속에 흡수되는 일원적 한 개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학의 신성의 단일개념은 다양한 영의 존재와 활동이 연대하여 질적인 하나를 형성한다는 차원에서 부분이 전체를 이루고 전체가 부분을 이루어야 하는 전체성으로서의 하나의 개념이다.  이는 인간이 하늘이 될 수 있는 철학적 논리를 지니고 있다.  다분화된 인격신들이란 다양한 신성들이 조화를 이루고 치유와 해방을 경험하게 하는 철학구조이며 한 개의 신성에서의 유출이 아니라 다양한 존재들의 신성들이 연대 속에서 이루어진 질적인 차원의 하나이다.  이러한 생명의 그물망 속에서 동학의 동귀일체의 공동체적 영성은 공시적 연계성의 존재 구조를 가진다.  이러한 공동체적 관계성의 한울이 모든 존재에 존재한다는 신인본주의 정신이며 각 개인이 모신 한울은 공동체 속에서 영속성을 발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어떠한 계급논리가 적용될 수 없다.  한울의 영속성이란 인간과 공동체의 죽음을 삶의 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혁명의 정신은 계속되는 것이며 혁명에 참여했던 모든 민중과 인민들은 다시 한울의 존재로 영생불멸하는 신인간의 인본주의 원리가 있다.  

동학에서는 삶과 죽음을 순환적 관계로 파악하여 일정한 신성의 순환 과정을 통하여 또 다시 거듭 태어나게 된다.  동학에서는 삶과 죽음이 궁극적으로 하나임을 말하는 생사일여 (生死 一如)의 원리로 무한한 무형의 기화지신이 다채로운 형태로 유형화 된 것이 인간임을 뜻한다.  육신의 자연의 법칙으로 사라지지만 기는 없어지지 않으며 이 세상에 출세(出世)하여 사회적 정신으로, 민중의 공동체적 영혼으로 장생하며 인간 개개인의 심성 속에 융합일치 되어 영원한 “인계극락“을 창조하는 순환적 재생 혹은 환생의 원리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환생이란 한국적 개념의 부활양식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존재의 장생불사설 (長生不死設)은 북의 김일성이 사후에도 영생불멸한다는 차원과도 일맥상통할 수 있다.




주체의 인간 그리고 하늘

김일성의 사상에서도 ‘인민이 하늘이다’는 지론이 있다.  그는 회고록 제1권의 첫 장에서 인민들과 함께 있어야 함을 제일 먼저 강조한다: “혁명하는 사람은 언제나 인민을 믿고 인민에 의거하면 백번 승리하지만 인민의 버림을 받게 되면 백번 태한다는 진리를 삶과 투쟁의 좌우명으로 삼아야 한다.”

김일성은 ‘이민위천,’ 즉 ‘인민을 하늘처럼 여긴다’는 것이 그의 정치적 삶의 철학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는 인민대중을 혁명의 힘으로 믿고 그 힘에 기초하여 주체의 원리를 수행할 때 가장 숭고한 정치적 신앙이 되었으며 일생을 인민을 위하여 바치게 한 생활의 본령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인민대중의 역할을 높이는 것은 자주위업의 승리를 위한 담보>24)라는 연설에서 역사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인민대중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언제나 인민대중의 생명과 결부시켜야 하며 인민대중과 생사운명을 같이 함으로써 삶의 보람과 승리의 비결을 찾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인민을 믿고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난관을 맞받아나가면서 투쟁하여 왔다고 말한다.  김일성이 꿈꾸었던 사회는 당과 인민대중이 일심 단결되어 혁명의 자주적인 주체를 이루고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면에서 주체가 튼튼히 선 사회이며 모든 것이 사람을 위하여 복무하는 인민대중중심의 사회주의라고 주장한다.  

김일성은 인민대중의 노선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인민들의 삶속으로 직접 들어가야 함을 강조한다.  인민대중의 힘을 현실정치와 연결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 바로 ‘현지지도’이다.  김일성은 인민대중이 역사의 주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인민의 머슴인 수령이 인민들의 삶을 직접 체험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현지지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민적 풍격과 인민의 리익에 부합되는 인민적인 사고방식을 지닌다는 것은  결코 탁상 앞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며 더욱이 말공부로써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로지 사람들의 육성은 물론, 숨결, 눈빛, 표정, 말투, 손세, 몸가짐까지도 자기의 눈과 귀로 직접 포착할 수 있는 인민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법이다.”25)  

김정일은 김일성의 이민위천 사상을 인민정권과 연결시켜 그 수행적 기능을 더욱 구체화한다.  김정일의 현지지도 정책 또한 김일성의 이민위천 사상의 실천적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김정일은 진정한 이민위천의 이상을 실현하려면 부정부패한 관료주의 또한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개혁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민정권의 법을 어기고 국가사회재산을 류용하거나 탐오랑비하는 현상과 상적행위를 비롯하여 돈과 물건을 가지고 부정부패행위를 하는 현상을 없애기 위한 투쟁도 강하여 벌여야 합니다...  인민정권은 온갖 부정부패현상을 극복하고 모든 근로자들이 사회주의적 요구에 맞게 일하고 생활하도록 하며 인민들의 물질 문화수준을 고르롭게 높이고 그것을 철저히 보호하여야 합니다.”26)

그런데 북에서 주장하는 이민위천의 실천원칙에는 외부에서 보기에는 대단히 이질적인 특이점이 있다.  그것은 ‘독재’개념의 해석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인민정권이 인민대중의 이익을 침해하는 세력과 요소에 대하여 ‘독재’를 실시하는 것은 인권유린이 아니라 철저히 인권옹호라고 주장한다.  인권은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살며 발전하려는 사회적 인간의 신성한 권리라고 설명하며 참다운 인권의 체현자는 인민대중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민민주주의독재는 인민대중에게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서 민주주의적 권리와 자유를 보장해주기 위한 인민정권의 권력기능이라고 정의한다.  인권의 유린자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인민들과 인사들을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으로 탄압하고 박해하며 삶의 기초 생존권도 보장하지 않은 행위라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김일성은 제국주의자들이 ‘인권옹호’의 간판아래  인민을 위한 권력행사를 마치 인권유린인 것으로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소동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인민정권은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옹호하는 혁명의 무기로서 인민민주주의독재를 더욱 강화하여 인민대중에게 더 잘 복무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북의 경우는 ‘독재’의 권력 또한 인민에게서 부여받은 신성한 주권기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북에서는 민주주의적 선거원칙에 따라 각계각층의 우수한 대표들로 구성된 인민회의는 주권실현에서 ‘완전권’을 행사하는 주권기관이라는 것이다.  최고인민회의를 비롯한 각급 인민회의를 사회주의 헌법의 요구에 맞게 정기적으로 소집하고 높은 수준에서 운영하여 광범한 인민대중의 의사와 요구를 반영한 법령과 결정을 채택한다.  즉, 인민에 의하여 선출된 대의원들은 인민회의에서 대중의 의사와 요구를 반영하여 발언권과 결의권을 옳게 행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대의원들은 늘 선거자들과 함께 군중 속에 들어가 군중의 목소리를 귀 담아 들어야 하며 그들을 당과 국가의 정책관철을 위해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이민위천 사상은 근본적 기준이 인민대중이라면 그들의 국권과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권력의 독점적 독재도 필연적임을 강조하며 독재로 인식되는 주권의 완전권 또한 인민에게서 부여받았음을 강조하는 특수개념을 지니고 있다.        

또한 김일성은 이민위천의 윤리적 실천으로서 ‘인민대중의 국제적 연대’를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혁명활동의 첫 시기부터 형제적 인민들과 끊을 수 없는 동지적 연대를 맺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해 왔다.  ‘공동의 원수’를 대항하여 함께 투쟁해야 하는 국제주의적 혁명동지들의 존재를 축소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조선의 운명은 세계인민들의 운명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조선의 인민은 자기 위업에 충실할 뿐 아니라 세계인민들의 공동의 위업에 충실할 것이며 민족이기주의를 반대하고 국제주의적 의리를 다해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오늘 세계 진보적인 인민들 앞에 나서는 공동의 과업은 자주화된 새 세계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자주화된 세계는 나라와 민족들 사이에 지배와 예속이 없고 침략과 전쟁이 없는 세계, 다시 말하여 국제사회의 민주화가 실현된 새 세계입니다.  온 세계가 자주화되면 세계의 공고한 평화를 보장하고 인민들 사이의 친선과 협조를 전면적으로 발전시켜 날 수 있을 뿐 아니라 매개 나라 인민들의 자주성을 완전히 실현할 수 있는 넓은 길이 열려지게 될 것입니다.  자주화된 새 세계는 단결된 세계인민들의 공동의 노력에 의해서만 건설될 수 있습니다.”27)

김일성은 자본이 특정 강대국에 의하여 독점당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진보적 인민들이 국제적으로 단결하여 투쟁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세계인민들의 단결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각 국가 인민의 자주적 요구와 이익을 대표하는 진보정당들의 책임과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진단한다.  세계 여러 나라의 진보정당들은 자주성과 국제주의의 원칙에 기초하여 단결하고 변화되는 정세와 환경에 맞게 올바른 공동의 전략을 세우기 위하여 밀접하게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김일성은 “세계의 주인,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역사무대에 등장한 인민들은 예속이 아니라 자주를 요구하며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요구하며 대립이 아니라 친선을 요구하고 있다”28)고 전했다.  자주, 평화, 친선은 인류공동의 숭고한 이념이며 이것은 온 세계를 자주화하기 위한 투쟁에서 세계 인민들의 단결의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6. 남겨진 현실적 문제들

이제까지 최제우와 김일성의 사상을 중심으로 동학의 관점에서 북의 주체사상과 문화를 재해석해 보고자 했다.  본 논문에서 동학이라는 사상적 틀은 ‘위반의 경험’을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을 제시한다.  물론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최제우와 김일성은 역동의 시기에 태어나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이상사회를 꿈꾸며 사회정치적 구원관을 제시하고자 했던 ‘시대의 이단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의 현실적용에서 보면 동학혁명도 실패로 끝났고 주체문화도 역사상 유례 없는 비운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최제우와 김일성은 민족주의에 바탕을 두고 자주적 평화인식과, ‘인민이 하늘’이라는 원칙에 기초한 인간중심의 철학을 주창했다.  또한 이들은 선천전통과 선행이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았고 창조적 비판을 통하여 조선식 조화와 융합의 원리로 수용하고자 노력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두 전통에서 말하는 평화의 인식은 소수민족이라고 하더라도 자주성과 독립성이 보장될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보국안민과 선군정치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호적 대화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이러한 문화적 대화가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동학의 관점에서 해석한 북의 주체문화에도, 동학의 철학이 그렇듯이 적어도 이론적 차원에서는, 주체의 인본주의적 성격과 평화의 인식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인민대중의 이익과 평화를 추구한 전통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북의 주체문화에도 ‘평화개념’과 ‘평화의 인식’이 존재한다고 하면 많은 이들은 여전히 경악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국내외 언론들은 북의 핵무기 문제와 최근의 미사일 발사 등으로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나라로 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상식’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동학의 시대상황에서 보았듯이 북이 오늘날 처한 국제정세 속에서 주장하는 자주적 평화개념은 어쩌면 주권국가로서는 당연한 발상일 수도 있지 않을까.  

국가의 독립과 주권문제가 걸려있다면 군대와 무기로 무장투쟁하는 것이 바로 ‘평화의 수행’이라는 교훈은 이미 동학 전통에서도 살펴본 바 있다.  그런데 유독 북의 무장투쟁만이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군사문화의 형평성을 따지기 전에 미국의 뿌리 깊은 ‘주체문화 혐오증’ 때문이라고 본다.  북의 문화를 ‘악’으로 규정하는 한 북의 모든 정치적 군사적 행위는 ‘나쁜 행위’ 혹은 ‘불량행위’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물론 북은 서구사회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인권문제나 인민들의 알권리를 보장하지 못하는 사례들이 많다.  그러나 미국이 북의 평화적 개혁개방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현재보다는 훨씬 안정적인 구도 속에서 재건과 건설의 원조를 지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은 ‘북이 정말 평화를 원하는가,’ ‘북이 진정 인민을 하늘로 여기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굶주림으로 고통당하는 북의 현실을 볼 때 ‘북의 주체문화가 과연 이민위천의 정치원리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북의 ‘개혁개방’의  상황성과 진정성 문제를 동시에 제기한다.  오늘날 북의 개혁개방은 국가생존전략이다.  어느 국가든지 나라마다 “국가생존전략”이라는 것이 있다.  국가생존전략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국가의 이익을 분명히 정의하고 그 우선순위를 정하여 운영하는 것이다.  이 전략은 기본적으로 국가의 안전, 경제적 번영, 문화가치의 보존을 기본골자로 하며 이는 모든 국가가 지니는 근본적인 방향일 것이다.  북도 이 사항에서 결코 예외일 수 없다.  그렇다면 국가전략의 가장 첫 번째 항목인 국가안전과 안보문제에서 북은 과연 안전한가?  북은 여전히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주장한다.  내부적 개혁도 절실하고 개혁개방의 의지도 있지만 국제사회가 담보하는 국가안보의 합의가 없이는 “진정한 평화 프로세스”를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한다.  평양의 참사들은 모두 “미국한테 우리가 쏙았어요”라며 격분한다.  또한 “우리는 문을 오래전에 열었는데 미국은 우리의 문을 밖에서 잠궜다”라는 표현을 많이 한다.  북은 여전히 미국의 이중적 태도에 대한 강한 불신을 표출하고 있다.  

북이 주장하는 인민대중을 위한 가장 중요한 인권은 국권의 수호라는 것이다.  따라서 북은 ‘미국이 요구하고 있는 전향적인 조치’에 순응하는 방식으로는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없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들은 북의 개혁개방의 진정성을 묻는 질문은 반드시 미국의 진정성을 묻는 질문과 함께 던져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진정성과 상호불신의 문제는 북미간에 오랜 기간 쌓여 온 것이다.  비교적 가까운 예로 북은 미국 클린턴 정부 때의 경우를 예로 든다.  그나마 한반도의 평화지수를 높였다고 평가되던 클린턴 정부 때도 북미간의 관계성 회복을 위한 진정성이나 신뢰관계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북은 미국의 모든 정책은 북의 주체문화와 regime change를 기초로 작성된 것임을 간과하지 않는다.

지난 클린턴 행정부의 관리들이 했던 일련의 말들 가운데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은 가까운 미래에 북의 붕괴를 점쳐왔다.  1994년도 제네바 기본 합의서에 규정된 대부분의 어려운 단계들은 쉽게 피해갈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국가안전보장회의 (NSC) 동아시아 국장이었던 스텐리 로스는 퇴임후 미국의 대북정책 결정은 북한의 “즉각적인 붕괴란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또한 기본합의서의 미국측 협상대표였던 로버트 갈루치는 합의서의 극히 일부만 이행할 의도를 갖고 합의했다고 인정했다.29)  북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너무도 잘 인식하고 있고 부시 행정부 기간 동안 그들은 “버티기 작전”으로 결론을 보았다고 한다.  이제까지 북미관계 개선을 위한 많은 합의와 선언문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두 나라의 근본적인 불신은 어떠한 새로운 선언과 합의서가 만들어 진다 해도 여전히 북은 북대로 미국은 미국대로 한반도 평화에 대한 이중적 입장을 고수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정치적 정서 속에서 북이 “미국이 요구하고 있는 전향적인 조치”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은 남쪽의 정서에는 적절할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 기능하기 어려워 보이는 정책이다.  

외부에서는 북에 대해 6자 회담 복귀를 집요하게 요구하지만 북의 입장에서는 회담의 의미를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조국평화통일연구원 관계자는 6자 회담이건 다자회담이건 북미양자대화의 조건 없이는 외화낭비라고 폄하한다.  또한 미국이 선 핵포기를 주장하는 한 회담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는 미국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구체적인 내용은 북 인민들이 일심단결하여 보위하고자 하는 김일성-김정일 정권을 미국이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은 미국이 한반도의 평화와 북의 개혁개방을 돕고자 하는 진정성이 있다면 금융제재와 같은 강경정책이 아닌 더욱 안정된 구도 속에서 북의 개혁개방을 지원해야 한다고 본다.  북의 주체문화와 현정권에 대한 인정이 함께 포함되는 평화의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북이 그토록 바라고 있는 ‘북미국교정상화’이며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이시키는 데 주변국가들이 협력하는 다자안보의 형태인 것이다.  류젠차오(劉建超.42)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난항의 근본 원인은 북한과 미국의 뿌리 깊은 불신"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6자 회담이 표류하고 있는 것은 북한과 미국이 융통성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책임있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진정성 문제와 뿌리 깊은 정치적 문화적 불신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이 문제의 회복은 문화적 차원에서 풀어야 할 난제들이기도 하다.  정치적 합의가 진정한 합의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바로 문화적인 차원의 불신과 배타적인 제국주의 세계관 때문인 것이다.  북미간의 합의가 완결되지 못했을 때 비판은 쌍방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국제사회는 북에게만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는 경향성도 문화 상호주의 원칙에서 재고해 볼 문제이기도 하다.    

최근 북의 인권문제와 연관하여 동북아의 헬싱키모델을 중심으로 미국의 대북전략을 모색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동북아 헬싱키모델은 정치군사문제와 인권문제를 복합적으로 처리하는 모델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델의 근본취지는 결국 regime change를 전제로 하고 있다.  조금 새로운 표현으로 “정권행태변화”라는 용어도 도입되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북한 정치 시스템을 변형시켜야 한다는 것이 동북아 헬싱키모델의 최종목적이다.  이는 남북 6.15공동선언 1항인 상호체제를 인정하는 것에 위배되고 있다.  이는 미국의 대북정책과 한국의 대북정책은 근본적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권교체가 전제가 된 미국의 대북통일론은 한반도의 평화지수를 더욱 떨어뜨리는 기능을 한다.  인권문제가 나오면 북의 인민들은 ‘공기를 마시고 사는 사람은 공기를 분석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말하는 인권의 개념이 북의 사회에서는 이미 보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권’이라는 개념은 1980년대 중반까지 법률상의 특수용어로 일반 인민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용어라고 한다.  법률학부 중에서도 국제법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특수하게 사용하는 용어라고 설명한다.  또한 북의 현실에서 인권의 잣대가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음도 역설한다.  북의 인민들의 관점은 다르다.  외부에서는 북 내부에 존재하는 정치수용소의 인권문제를 주로 언급하지만 그들은 감옥에 살지 않지만 기아와 가난으로 고통당하는 일반 인민들의 인권은 미국의 ‘압살고립정책’으로 유린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북의 인민들은 굶주림 속에 죽어가도 결코 수령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그들의 가난이 철저히 ‘미제원쑤들’ 때문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이천만 인민들이 총폭탄되어 수령을 결사 옹위하는 것이 북의 주권과 인권을 모두 수호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북의 인민들은 이 길이 진정한 이민위천의 실천적 정신이라고 실제로 믿고 있다.  외부에 있는 대북 전문가들이 종교적 영성으로 뭉쳐진 북의 주체문화와 주체 인본주의와 주체 인권개념을 현실적으로 재고할 필연성이 반드시 있다고 본다.    

미국은 여전히 북을 테러지원국으로 지목하고 있는데 사실 테러의 위협보다 북이 테러지원국으로서 ADB나 IMF와 같은 국제금융기구에 합류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하는 경제제재의 의미가 더욱 강하다.  9.11 사태가 일어났을 때 북은 강력한 테러비난 성명을 채택하고 타협적인 정치적 입장을 밝히면서 미국에 대해 위로성 발언을 하였다.  그러나 부시는 바로 악의 축 발언으로 적대적 반응을 보였다.  북의 개혁개방과 인권개선을 위해서는 외부적 금융지원이 필수적이다. 1999년 5월 페리 보고서가 제출된 후인 9월 미국은 적성국 교역법 (Trading with Enemy Act)을 적용하여 경제 제재를 조금 풀었을 때와 같은 수준의 조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부시정부 아래서 이러한 정책은 불가능해 보인다.

아마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의 주체문화는 악의 소산이고 인민을 죽이는 폭정의 문화라고 인식한다.  북에도 인민을 하늘로 여기는 이민위천의 철학이 존재한다는 것은 정치적 포장으로 치부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들은 인민대중의 기본권을 위하여 국권을 견고히 한 후에 개인적 인권과 알권리 등을 폭넓게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고 믿고 있다.  동시에 이미 일종의 종교성으로 자리잡고 문화적 영성으로 남아있는 주체문화는 북의 정권교체를 전제로 하는 어떠한 합의에도 이를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북의 주체문화의 인정 없이는 한반도의 평화통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뜻하는 것이다.  

김일성은 “혁명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것은 가장 숭고한 의리이고 본분이며 인민을 위하여 한생을 다 바치는 것보다 보람 있고 영광스러운 일은 없다”고 고백한다.  김일성은 “나의 소원은 앞으로도 인민들의 사랑과 믿음 속에서 인민을 위하여 끝까지 복무하는 것”이라고 재차 강조한다.  그는 자신을 결코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나는 나의 한생이 결코 남달리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친 한생이며 인민과 더불어 지나온 한 생이었다고 자부하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김일성의 고백은 외부세계의 인정여부와 상관없이 오늘날 북의 인민들의 가슴속에 ‘불꽃같은 신앙’처럼 살아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가 꿈꾸었던 인민중심의 정치인생이 얼마나 실현되었는가에 관한 현실 정치적 평가에 앞서 사상가로서 철학자로서의 김일성은 ‘인민이 곧 하늘’임을 추구했던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는 북의 정치선동으로만 사용되는 미사여구일 수도 있고 푸코가 주장했던 국지적 경험이 축적되어 ‘책’으로 남겨진 ‘경험-책’의 원리일 수도 있으며 또한 쉽게 넘나들기 어려운 ‘위반의 문화’일 수도 있다.  대다수 북의 인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자주적 평화개념과 이민위천의 실천적 윤리를 배제하고 과연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현실적으로 이룰 수 있을까.  이 질문 자체가 본 논문의 주된 결론이라 하겠다.  이러한 북의 현실적 평화인식과 인민의 주체영성을 이해하며 우리 스스로에게도 푸코의 질문을 다시 한번 던져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어떻게 또 얼마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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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제우,『용담유사』 「용담가」
2)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1권,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2.
3) 김일성, 같은책, 5.
4) 최제우, 『동경대전』「권학가」
5) 김일성, 『김일성저작선집 4』(평양:조선로동당출판사, 1968), 521.
6) 김일성, 『김일성저작선집 3』(평양:조선로동당출판사, 1975), 415.
7) 김일성, 『주체의 혁명위업을 무력으로 튼튼히 담보하자』(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2003).
8) 김일성, 같은책, 6.
9) 김일성, 같은책, 9.
10) “不意四月에 心寒身戰 하여 疾不得執症하고 言不得難狀之際에 有何仙語 忽入耳中이라.... 최제우, 『동경대전』 "경신년 4월 초닷새날, 꿈일런가 잠일런가 정신을 수습하지 못할 즈음에 하날님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천지가 몹시 울려서 흔들리는데 집안사람의 거동을 보니 놀라고 두려워 얼굴빛이 변하여 소리 지르고 있었다.” 최제우, 『용담유사』, 안심가.
11) “至氣今支 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之” 최제우, 『동경대전』「포덕문」
12) “吾有靈付하니 其名은 仙藥이요 其形은 太極이요 又形은 弓弓이니....” 같은책.    

13) “...身多戰寒한대 外有接靈之氣하고 內侑降話之敎로다“ 같은책.
14) 필자는 한국적 초월성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기의 자아우연성 (self-spontaneity)의 발현으로서의 초월성, 둘째, 완벽한 조화란 인간 공동체 안에서 완성될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의 초월성, 셋째, 이와 같은 우주적 조화를 위하여 인간들의 자기연마 (self-cultivation)를 통하여 경험되는 초월성이 그것이다.    
15) 최제우, 『동경대전』「포덕문」
16) 최제우, 같은책, 「논학문」
17) 김정일, 『인테리는 정신로동을 하는 근로자이며 혁명의 주체의 중요한 구성부분이다』(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2001), 31.    
18)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103.
19) 김일성, 같은책.
20) 김일성, 같은책, 267.
21) 김일성, 같은책,
22) 최제우, 『동경대전』「교훈가」
23) 베짜는 여인의 예화는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영천주 사상에서 나오는 것으로 가부장주의 사회속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살았던 여성의 일상적 노동을 바로 한울님의 노동으로 인식하는 동학의 생명사상이다.  이돈화 『천도교 창건사』(서울: 천도교 중앙 종리원, 1933); 베짜는 여인의 예화를 홍정수는 신학적으로 승화시켜 “베짜는 하나님“으로 상징화하여 표현하였다. 홍정수 『베짜는 하나님』(서울: 조명문화사, 1991).    24) 김일성, 『인민대중의 역할을 높이는 것은 자주위업의 승리를 위한 담보』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92),
25) 김일성, 『최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 268.
26) 김정일, 『우리 인민정권의 우월성을 더욱 높이 발양시키자』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2003), 34.
27) 김일성, 『인민대중의 역할을 높이는 것은 자주위업의 승리를 위한 담보』, 9.
28) 김일성, 같은책, 10.
29) Ben Barber, "Clinton Hardened Position on North Korea to Appease Conservatives," Washington Times, 1/2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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