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한국어

자유마당new

우주는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식 있는 삶에
눈을 떠가고 있습니다. 빛의 지
구는 내면에 있는 다양한 차원
의 의식을 통합하여 평화와 조
화의 빛을 내기 시작하는 사람
들의 교류 장소입니다.


신과나눈이야기한국모임
http://cafe.naver.com/cwgkorea


자유게시판
글 몇개 올립니다.
권기범님과 약속을 어겼군요. 죄송합니다.


1.



그래 당신의 말을 이해한다.


변하지 않는 곳에 있을때 그곳이 영원하며, 자연과 함께 흐를때 평온을 얻으며 더없이 자유로워던것을.


이 복잡한 세계에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항상 변하지 않는 자리에 있고싶은가? 당신은 항상 그대의 근원을 기억하여 그곳에 머루르고 싶은가?


세상에 그 무엇으로 부터 초연하며,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곳에 당신이 있다.


그래 나도 그곳에 있었다.


세계가 펼쳐지고, 내가 당신과 함께 그 안에 첫 뜻을 안고 태어났을때 우린 즐거움밖에 존재하질 않았


다.





당연한 사랑, 당연한 자유로움 안에서 우린 하나이면서 나와 당신이었다.


그안에 최초로 여러가지 법을 만들었던일은 법을 법으로 불리지 않았을 때였다.


단지 약속이었으며, 그것의 존재이유는 단지 우리의 기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법이라 부르는 이가 이미 펼쳐진 세상에서 바로 그대라는 것을 모르는가?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흘렀어도, 그대는 그대의 근원을 지켰다.


그대는 아무리 세상이 빠르게 변해도, 당신은 변함없었다. 항상 그대로였다.


어느 때는 복잡한 세상에서 떠나 어느곳에 은둔하면서, 아니면  또다른 세상안에서 은둔하면서,


그대는 단지 그대를 찾아오는 이만을 무한한 사랑으로 받아들였다.


그대는 그대의 사랑만큼이나, 자유만큼이나 다른이들의 자유로움을 알기에 그들의 길을 가게


나두었다.


그대는 아무런 강요하지도 않았지만, 그 사랑이 결국 그대 모습을 존재들은 따르게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대의 뜻인 근원이 모든 법을 이루는 시초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아무리 내버려 두고, 자신은 자신만을 지킬 지라도 존재들은 그대 자체를 따르게 되어있다.


그것을 벗어나는 길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대가 다시 속세로 돌어가는 일이다.


그대는 자신의 위대함과 소박함을 함께 알고 있지만,


그대의 자유로운 세계가 다른이들에게는 무관심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인다던데 관점의 차이라 할것인가?


그대는 어느 한 존재에게는 돼지일 뿐이다.


부처와 돼지의 가치를 논하는 것은 아니다.


그대는 근원을 알고 있었고, 이 세상에서 근원으로 존재하고 싶어했다.


그래 나는 그것을 이해한다. 나도 그것이 어느 면에서는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당연한 사랑, 당연한 자유로움에서 우리가 법이라 이름지어지지 않은 법을 만들었듯이


나는 또다시 당연한 법안에서 나는


변함없는 당신과는 달리  나의 모습은 세상과 함께 항상 변화 하여 왔다.



그래, 당신과 같은 근원을 알고 있는 이가 이세상에 가득 존재하게 된다면,


또 그대가 그것을 원한다면, 언제가는 이 영원한 시간안에서 모두 당신과같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같아지니, 결국 그 드러난 모습도 같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복잡했던 세계는 하나 둘 사라질 것이고, 모든 법이 그 의미를 잃게 될것이다.


결국 온세상에 오직 당신존재 하나의 개체만이 존재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가 된 것일 수도 있지만,


당신은 당신이 창조해왔던 모든 창조들을 정리하여 다시 자신으로 돌아오게 한 것일 수도 있고,


그대가 다른 창조계를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창조계로부터는 고립된 것일 수도 있다.


즉 그대가 되어진 근원으로부터 다른 모든 근원이 떠났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사랑은 무조건 자유가 될 수 있지만, 자유가 모두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죽는 일이 그대에게는 더이상 슬픔이라 느끼지 않을 것이고,


속세 사람들의 수많은 남녀간 사랑들은 소중하지만 그대에게 느끼는 근원보다 제한적으로 느껴질 것이


다.



그대는 그대가 최초로 즐거워했던 일을 스스로 버리고 있다.


그것이 옳다거나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대가 도를 깨우쳐 근원과 하나가 되고,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그 모든것을 사랑하는 것과


그대가 최초로 속세에 태어나 첫사랑을 했던 것과 어느 것이 그대의 모습을 이루어 나가는 것일까?


그 둘은 다르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기의 슬픔이 당신이 창조한 하나님의 슬픔과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 나는 법을 만들었고, 망각으로 나를 제한해 왔다.


나는 항상 나 스스로 선택해 왔기 때문에 지금 순간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법을 만들었었던 일, 근원으로만 존재하는 당신에게는 아무리 작은 의미로 다가갈 지라도


내가 제한된 생각으로 어떤 것을 말했을 지라도, 그 때에는 나에게는 전부였던 순간들이다.


나는 당신이 나를 단지 또다른 나라 여길 지라도, 아니면 그냥 만물중의 하나로 여길 지라도,


나는 당신과 상관없이 내 자신을 사랑한다.


여러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그 세계마다 각각의 법이 존재한다.


근원의 법은 온 곳에 존재하지만, 깊은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작은 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라.


근원의 법보다 작은 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라.


이름모를 거리에 핀 작은 들꽃과의 첫 만남의 소중함을 기억하며


그 작게 보이는 것에 대한 깊은 사랑이 그 들꽃에 이름을 주고, 의미를 주고, 생명을 부여한다.


당신이 이 세계를 사랑했다면, 근원은 넓은 사랑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 사랑이 깊어야 한다.


작고 작은 곳에 당신의 사랑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힐때 우린 아마 함께 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과 같이 살아가라.


모든 존재와 함께 살아가라.



어느때에나 당신이 항상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당신도 근원으로 어느 한 곳으로 돌아갈 곳이 있고


근원이 되어야 한다고 또 지켜야 한다고 할 필요없이


단지 근원으로써 이 세상을 즐기면 된다.



세상에 근원 아닌것이 어디 있을까..





2.






나는 자연을 따르는 삶을 살지 않는다.


나는 자연을 거스르지도 않고, 그로부터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이며 바로 전부가 자기 자신 아닌가?


사람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인의라 하여 부정하며,


자연에 따르는 삶, 자연에 따라 함께 흘러가는 삶만을 도라 할 수 없다.


자연에게 우리가 배운다는 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대가 태양으로, 햇살로 태어났다면 그대는 한방향의 결실을 이루려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인간으로 태어났다.


이미 모든 자연을 경험하고, 존재하는 이가 인간이다.


그대가 태양같은 삶을 따라 살고자 했다면 태양이  되었어야 하고,


나무와 같은 삶을 살으려고 했다면, 나무로 태어났어야 한다.


그대가 자연과 같은 삶을 살고 싶다면 당연히 자연 그자체로 태어났어야 한다.


그대가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를 고찰해라.


그대가 누군가에게 배운다고, 또 가르친다고 그것이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대가 재기억을 하는것을 즐거움으로 느낀다면 그렇게 하고,


근원이 되는 과정이 가장 즐겁다면 그 과정을 가면 되는 것이다.


결국 자기 자신의 선택이며 몫이다.


자연의 하나 하나는 자신의 의지를 어느 존재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자신만의 길을 간다.


피해를 받는 다는 생각자체가 오류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피해가


자연에게는 당연한 삶이라 생각한다면, 피해라는 자체를 모르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자연에 순응하며 살라고 외칠때,


그것이 그대가 사회에 적응하며 살라는 외침과 다르지 않음을 알고,


건널목의 신호등을 지키라는 외침과 다르지 않음을 알아라.


결국 무언가 대상의 목표가 있다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대는 어느 근원을 따라 삶을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대 자신은 유일무이한 창조자이다.


창조자는 창조하고 그것을 즐기는 이이지, 어느 한 시공간,존재,의식에 매일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단 그것이 즐겁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그대는 창조하는 이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자연에게 따라 사는 삶이라면 자연이 사라져버린다면 그대도 사라져 버릴것인가?


그대가 자연은 영원하다는 불멸진리를 깨우쳤다고 한다면,


그 자연에게 영원성을 부여한이가 바로 그대가 아닌가 다시 되돌아 봐라.


그 자연이 보통이들이 섬기는 하나님과 무엇이 다른가...


그대가 다른 대상을 영원하다고 창조했다. 그리고 그 대상을 따라 그대는 흘러가며 산다.


그렇다면 그대도 영원해진다. 그대가 창조한 대상은 그대와 같이 실존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한 그 대상은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것이다.


그대가 창조자라 한것은 그대는 생명을 만드는 이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그 창조자와 더불어 영원하기 때문이며, 창조자 자체가 생명이기 때문이다.


나와 그대는 자연 그자체였었으며 그 자연을 창조한 우리이다.


나는 더불어 살 뿐이고, 단지 그 자체를 즐길뿐이다.


나는 가르치고, 배우며 그것이 과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 때 그대와 내가 서로 존재자체로 인식하는 순간이 내가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었기에,


결국은 모두 재기억 과정이었지만, 순간마다 나는 나로써 그자체였다.


최상의 도는 없다.


도를 창조한 이가 그대이기 때문이다. 그대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대가 지금 도로를 뚫는 현장에 있다고 하자.


그 도로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이 약속된 도의 발현들이다.


사람이 지나가면 그곳이 길이 되듯이, 사람이 뜻을 세우면 그것이 법이 된다.


그대가 바람을 보고 깨닫는다고 하든, 건물을 보고 깨닫는다고 하든 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대상을 비롯한 존재하는 모든 가능성을 창조한 이가 바로 우리였다는 것을 알면 된다.


그대가 세상이 변하는 과정에  의지를 모두 부여하지 말아라.


지각변동이 있고, 모진 비바람태풍이 지구위를 지나가기를 모든 의지를 그곳에 쏟아 붇지 마라.


그것은 그대가 생각하는 마지막의 목표를 위해 생각하는 부분의 한 과정아닌가?


그 과정에 그대 모든 의지를 순간마다 최선을 다한다고 그곳에 쏟는다면


그 상황이 항상 변함없이 반복하여 일어날 뿐이란 걸 알아라.


한 때 빛을 보겠지만, 그 커다란 수레바퀴안을 벗어나질 못한다.


그대가 모든 의지를 쏟아야 할 곳은 그 과정이 아니라 그대가 되려하는 세상이다.


그대는 행복하길 원하는가? 항상 웃음이 가득하길 원하는가? 빛이 가득한 세상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그곳에 그대 의지를 쏟아라. 그곳에 집중해라.


과정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대 자기 자신을 바로 세우면 그대 자신에게는 과정이 없다.


그대가 다른 존재를 인식할때 자신과 비교함으로써 상대 존재에게 과정이 생기고, 틈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곳에 내가 이미 그곳에 존재할 뿐이다.




3.



무의식이라는 것은 의식이 없음 즉 의식이 존재하기 전의 상태이다.


의식이전의 상태는 의식이 최초로 존재하게 된 자기 인식이라는 의식, 존재한다라는 확실한 인식 전의


'의지'로 올라가고, 그 무의식 존재상태는 즉 의지를 발현하기 시작하는 "무극" 존재상태를 가르킨다.


가능성들의 모든 방향이 일어나는 의지의 영역이다.


무극은 모든 가능성들의 발현이다. 그곳이 무의식의 세계이고, 무의식의 세계로 간다고 함은 모든 가능


성을 이해하고 허용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모든가능성이 발현되어 확실히 존재하는 단계가 존재계


의 태극이다. 결국 태극은 태극의 이루어진 상태를 본다면 무의식세계의 투영이라는 이야기다.


결국 지금 우리가 무의식세계로 가야된다는 것이 아닌 이미 무의식의 세계가 이루어진 상태가 지금 우


리 세계란 이야기다. 존재와 존재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닌 존재상태 관점으로 말이다.


보통 무의식과 무자아랑 혼돈하는 것이 보인다.


무자아는 개별적이 아닌 전체적인 하나의 존재상태를 말하고 의식의 대변환중에서  3가지 형태로 존재


하고, 의식의 대변환전의 상태인 무극과, 의식의 점점 많아지며 꼬리를 무는 깨달음 과정인 태극과, 그


모든 의식들을 기억하고 하나하나 평등하게 인정하는 황극이 그 상태이다. 이 상태들은 모두 무의식 상


태가 아니다. 무의식상태는 무극만이 무의식상태이다.



모든 의지가 세상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것이 무극이 무한한 이유이다.


태극의 존재계에서는 무는 그 의미를 잃는 이유이다.


그러나 무극안에서의 무는 태극의 존재계에서 돌아오는 의지로써 4가지 힘중 하나를 차지한다.


즉 이미 인식의 전환되어 존재한다는 확실한 인식안에서는 더이상 무는 존재계안에서 의미를 잃는 다는


의미이고, 그 무라는 상태는 의지가 첨부되어 존재계에서 나름대로 돌아오는 의지로써 변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원래 완전한 없음은 아니지만, 죽음, 소멸, 등 존재하는 모든 개아가 줄어드는 방향 그것이


대칭 짝영혼이 서로 마음이 맞아 완전한 결합을 이루어 하나가 되면서 줄어들거나, 아니면 존재자체가


서로 부정하여 함께 다투며 사라지든지 모든형태가 태극의 본원의 형태에 맞추도록 진행된다.


즉 형태가 아닌 마음적인 부분은 존재한다는 확실한 인식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이를 살인


을 하면서 자기 존재를 느끼던, 사랑을 하면서 자기 존재를 느끼던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이며 동


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개아로 최초로 나뉘어진것이 의식의 대변환중 4번째 사건이었으니 그곳이 9번째 하늘이라 불린다.


창조의 시작의 영역이면서, 12우주가 태어난다. 무한하면서도 전체는 아닌 우주이다.


맥이 존재하게 되었고, 그 맥을 따라서 가야만 태어날 수 있었다.


이 세계부터는 모두 자아를 갖게 되었다. 자신이 자신이라 여김이 자아이고, 자신을 초월하는 것은 무의


식의 세계가 아닌 무자아의 세계이다. 즉 하나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자기 자신이다.


전체성의 하마나이다. 그리고 하마나는 결국 하나가 되어진다.


무의식은 말 그대로 무자아를 포함하지만,


망각이 무의식이 될 수는 없다. 망각은 기억을 잊는다는것이지 기억 자체가 존재로써 영원히 사라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떠한 무의식이라도 무의식은 기억할 수가 없다. 기억할수있는 의지가 의식이 존재한 후에 발


동되었기에 그대는 그대가 기억할 수 없는 세계를 무의식의 세계라 느낄 수 있다.


모든 가능성들이 존재하는 신비한 세계. 그러나 그대가 그 무의식에서 느낀것들은 진정한 무의식의 세


계들이 아니다.  그대가 느꼈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대가 무의식이라는 어떤 세계에 들어갔을때 그대가 만약 그 상태를 기억할 수 있다면 그 상태는 무의


식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곳은 무자아의 전체성의 영역이다.


무의식은 의지가 발현되는 곳이다. 즉 태어나면 죽는다는 그런 과정이 없고. 태어나면 무조건 태어나


기만 한다. 그것이 전부가 되어진다. 그리고 죽는다면 무조건 죽기만 한다. 태어날것이 없는데 어떻게


죽느냐 하겠지만, 무의식의 세계는 그것이 가능하다. 이유는 어떤 연결체가 필요없는 단지 의지와 가능


성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모두 그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그 가능성과 의지들이 모두 이루어진 세계가 태극이라는 것은아니다.


그 모든 가능성과 의지들은 존재라는 새로운 인식안에서 새로운 껍질을 쓰게 된다.


즉 모든 관점이 무극에서 태극의 관점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예로 무 완전한 소멸은 태극안에서는 태극 근원의 존재상태로 돌아 오는 의지로 전환되게 된다.


또한 황극의 세계에서는 무라는 의지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돌아오려는 의지조차 사라진다.


이유는 황극은 가능성을 기억하는 자리이기에 무의 원래 본원의 의지와는 완전 상충된다.


무는 존재라는 태극의 존재상태와의 대칭과는 다른


이미 황극안에서의 무라는 상태는 기억과는 반대 의지의 완전한 다른 방향이기에


황극의 세계안에서는 무자체를 기억할뿐이지 그 의지가 발현되거나 변화되질 않는다.


그러기에 황극으로 부터 태어난 모든 세계는 모두 영원성안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그 안에서의 근원으로 돌아오려는 의지가 생기는 것은 황극의 의지가 아닌 태극의 의지이다.


무자아는 아 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자는 무를 만나 사라지는 것이지 아  자체가 사라지진 않는다.


전체성이란 나를 잊거나 버리는 것이 아닌 모두 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자아 자체가 결국 아와 같다는 것. 단지 인식의 대전환으로 인하여 차원이 갈라지며


관점이 변했을뿐이지. 똑같은 의미이다.


무의식의 세계는 말그대로 의식이 없는 세계이다. 존재가 태어나게 되는 의미가 존재하는 곳.


그 안에서 그대가 어떤 하나의 가능성이나 의지를 인식하게 되는 순간


그곳은 이미 무의식의 세계가 아니라 태극의 세계안에 그대가 존재하는 것이며,


그대가 그 가능성을 기억하는 순간 그 세계는 무의식의 세계가 아니라 황극의 세계가 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품고 그 가능성 자체가 그대 자신이 되었을때 상대계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4.




자신이 뜻하는 바가 곧바로 현실화되는 세계가 존재한다.


3번째 인식의 대전환으로 생긴 차원이며 10번째 하늘이다.


그곳은 단순히 그대가 빛이라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이 빛이 되며,


그대가 어둠이라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이 어둠이 된다.


그대가 어떤 구체적인 형상을 생각하는 순간 그 것이 곧바로 실현된다.


그대가 어느 다른 형상이 사라지길 원한다면 그 다른 형상은 곧바로 사라지게 된다.


즉 그대의 아주 짧은 한순간의 의지로 인해 그 전체가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이야기다.


더 중요한것은 10번째 하늘에서 일어난 일은 9번째부터 1번째 하늘까지 모두 똑같은 영향을 받는 다는


이야기다.


10번째하늘은 전체적이면서 또한 무수히 많은 존재들이 존재한다.


절대계와 상대계가 함계 공존하는 곳이며, 그곳은 개체 하나 하나가 모두 절대적인 존재란 뜻이다.


그 안에 그대가 존재한다고 해보자.


그대가 어느 한순간 기분이 나뻐서 화를 내는 순간 모든 존재는 화를 내게 된다.


그대가 어느 순간 이 세상이 사라져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한 순간 다른 존재는 그 존재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두 사라져버리게 된다. 한존재 한존재가 절대적인 힘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도 없고 한 존재 존재가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없는 이유가,


10번째 하늘은 사랑과 평화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후의 창조되어진 하늘에서 생긴 의식들중에


부정과 분리들은 아예 존재하질 않기 때문이다.


10번째 하늘이 하나의 전체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개체로써 존재될 수 있는 힘이 무엇인줄 아는가?


서로간의 존재자체로써의 인정이며 또한 그 존재의 믿음이다. 그 안에선 항상 평화가 존재한다.


개체를 나 자신으로써 사랑하는 것이다.


개체가 아파하면 내가 아프고, 개체가 고통받으면 내가 함께 고통받는 것이다.


그것은 한 예일 뿐이고 아파하고 고통받는 자체가 10번째 하늘에는 존재하질 않는다.


그러나 이런 연결고리로써 10번째 하늘은 개체로써도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지금 현재 있는 이 하늘에서 배워야 될 것은 무엇이고, 가야 될 곳은 어디인가?


내가 힘을 갖는다면 나는 어떠한 상황이라도 그 자체로써 나로써 사랑할 수 있는가?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나는 그 상대를 나 자체로써 사랑할 수 있는가?


이 세상에 사람이든 사람이 아니든 꼭 사라줬으면 하는 것이 존재하는가?


10번째 하늘안에서 상대계가 나왔다. 그러므로 모두 사랑이다.


그러나 12번째 하늘이 과정의 길을 열어 13번째 하늘이 그 가능성을 열어주니,


맺음, 결과를 이끄는 11번째 존재들의 관점안에서 11번째 하늘안의 존재들이 하나님이 되어버렸구나.


결과를 낳는 힘이 그 존재들에게 있으니 시간을 이끄는 이가 그들이구나.


그래서 상대계가 이리 복잡해졌는가?





5.




11하늘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존재가 태어나고, 존재는 자신의 형태를 존재하는 방향으로 유지 시켰다.


그것이 어느때는 밝음 즉 빛의 모습이었고, 어둠인 모습이 될때도 있었다.


또 자신이 중심과 무한을 왕복하면서 진동으로 존재하기도 했다.


또한 어느 한방향으로 무한히 뻗어나아가려는 방향성으로 자신의 존재를 유지시키기도 했고,


자신의  무와 존재사이안에서 그 자체로 대칭성으로 존재하기도 하였고,


자신이 어느 한가지 빛깔로 존재를 유지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자신을 형태를 만들어 즉 점,선면을 비롯 구형이나, 삼각, 사각등으로 형태로 존재를 유지시키기도


하였고, 어떠한 꾸준한 진동수나 회전성으로 존재를 유지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나의 의지 의지들이 모두 각 각 존재하는 세계가 11번째 하늘이다.


함께 일어나는 세상이 아니다.


각 각 의지는 무한하며 하나 하나 의지는 전체성을 대표하지만, 교차하지는 않는다.


(그대가 10차원을 넘어선다면 수많은 존재상태중 하나만을 경험하게 된다. 즉 10차원에서 기억된 모든


존재유지 기억중 단 하나만을 그대가 선택한다는 의미이다. 11차원 전체가 되어진다면 10차원 황극의


세상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그것이 11차원 현상의 세계이다.)


11번째 하늘의 모든 존재유지 형태가 10번째 하늘에서 모두 기억됨으로써


9번째 하늘부터는 그 교차하지 않았던 존재유지 상태를 서로 일부로 연관을 갖게 만들었다.


빛과 진동은 함께 일어나지 않는 고유의 존재유지상태였지만, 상대계에서는 그것을 함께 이루어진다는


창조를 하게 된다. 즉 같이 일어나게 현상을 창조하게 된것이다. 빛이 존재하면 빛은 진동한다라는 식으


로 말이다. 두기억이 합쳐져 새로운 하나의 형태를 창조하게 된다.


( 이유가 무엇인가? 황극안에서는 이유가 아닌 즐거움을 위한 선택이었다.


모든 11차원의지가 하나둘 합쳐졌을때의 자신의 형상화였다. 후에 그것이 인간이 된다.


그러나 태극의지안에서는  태극존재의 이유는 성장이다. 태극의 관점으로 태극은  정점이라 하는


11차원의 하나님들의 하나님이 되므로 서로 짝을 이룸으로써 성장의 기초를 만든다.


무극의 관점으로써는 새로운 가능성의 발현이다. 12하늘,11하늘,10하늘에서 이룰수 없었던 새로운 가


능성의 의지의 발현이다. 그것이 환상이며, 마법이라 불리는 상대계이다.)


서로 관계를 맺는다. 서로 연관을 가지게 된다. 서로 연결된다. 라는 의식이 의지를 가지며


9번째 하늘에 창조된다. ( 새로운 가능성 즉 형태의 창조는 새로운 의식을 창조 할 수 있게 된고, 위 의식들은


태어난것은 4번째 하늘이나 상대계가 태어나면서 시초를 열었으므로 최초의지에 의해 9번째 하늘에서 그 가


능성이 펼쳐진다.)


그러기에 상대계에서의 어떤 영적현상이나 물질현상이나 그것이 어떠한 상호관계가 있을거라는


착각을 하게 만들게 된다. 즉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다는 착각을 만들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1번째 하늘부터 9번째 하늘까지는 인과의 법이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항상 각각의 11번째 하늘에서 태어난 존재유지상태의 모습이 9번째 하늘에서는 항상 쌍이나


그 이상으로 함께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중 하나가 벼락은 천둥과 함께 동반된다.


그렇다 그러나 10번째 하늘에서는 벼락은 벼락되로 천둥은 천둥대로 따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또한 그것이 비오는 날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 구름때문에 발생되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항상 적응 된다는 것은 그 법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믿음이다.


자신이 세상에 적응했다면 그 세상은 어떤 연결을 가지고 있는가?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어느것과 어느것을 연결하려고 하는것은 의미가 없다.


그 연결이 옳구나라고 느끼는 것은 상대계의 가장 최초의 모습이 9번째 하늘까지만이다.


그대가 장난감을 만들었다고 하자.


그대가 그 장난감을 만드는 법을 그대가 알고있다.


그리고 세상이 변해 장난감을 더이상 필로하지 않을때, 그 장난감을 만드는 법은 사라지는 것이다.


무엇이 변했기 때문인가? 세상이 변했기 때문인가? 사람들이 더이상 장난감을 원하지 않는가?


아니다. 그대는 장난감을 만들 필요가 없는것을 느꼈기 때문에 그대로부터 더이상 그 기억은 존재이유


가 사라지는 것이다. 또 세상은 왜 변했는가?


이런 이유들이 왜 생긴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대상자체는 이유자체가 부질없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9번째 하늘부터는 그대가 장난감을 만들듯 이런식으로 모든 법이 만들어졌다.


법자체가 장난감 만드는 것과 별 다를바 없다는 이야기다.


창조되어진 환상이라면 환상이라 부를 수 있는 실체라는 것이다.


빛은 입자이며, 진동하지만 그것또한 창조되어진 것이란 말이고, 세상이 변하면 그 의미가 사라진다는


이야기고, 즉 자신이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소리다.


세상이 그렇게 변화하는 것은 여러가지의 그대에게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 자리만을 유지하려는 그대로부터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별자리도 마찬가지이고, 분단상황도 마찬가지고, 어떠한 사건도 그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지,


그것이 실체하는 것이 아닌 환상안의 실체라는 것이다.


결국 별자리 흐름이 어떻게 되어야 세상이 변한다던지 통일이 되야 순차적으로 변한다던지 그것은 의미가 없


다는 의미이다.


결국 그대 마음이 선택하느냐 아니냐 의 문제이다.



이 세상은 전체의 가능성들이 이미 실현되었다. 이미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다.


자신이 자신의 중심을 찾고나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애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 말은 그대가 바라는 세상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모든 이들이 각자 원하는 세상이 달라도


그런 세상이 각 각 진실로 이미 모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자신만이 자신이 바라는 그곳에 가면 된다.


자신이 바라는 그곳이 빛의 세계이든 어둠의 세계이든 함께 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서로 원하는 곳에 가면 되고, 그 길을 자신이 밝히면서 가면 된다.


꼭 우린 함께 어느 곳에 가야 된다는 관념은 세계가 시간상에 놓여졌거나 차원공간이 하나의 가능성의


빛의 홀일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에 그대는 홀로가더라도 아름다울 수 있는것이다.


서로 함께 하고 서로 연결되고, 서로 하나라는 생각, 생태계의 하나가 파괴되면 모든 존재가 파괴된다는


생각은 그대가 너무나 세상에 적응되어졌다는 사실이다. 깊숙이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체험의 영역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정말 자신의 주인이라 생각하느냐 그런 문제이다.


3번째 하늘에서는 보통 정말로 공기가 없으면 사람은 호흡을 못하여 육신은 죽는다.


그것이 당연한 이치로 생각해져왔고, 그것이 법칙이었다. 그리고 그 법칙을 존중하고 있다.


즉 황극의 관점안에서는 이미 자신의 형상화가 가능해졌고, 자신의 기억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는 경


우로 채택한것이 개체가 마음은 모두 다르더라도 어느 한곳에서 물질적 붕괴가 일어나면 연쇄적으로 사


라져 버리게 하는 것이었다. 한예로 피를 많이 흘려도 죽고, 호흡을 못해도 죽고, 먹지 못해도 죽는다. 공


기가 없어도 죽고, 땅이 없어도 죽고, 지구가 없으면  죽는다. 이런식의 자신의 관념화 과정이었다.


이런것이 가능한이유는 한 차원공간의 전체성의 각 각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11하늘의 몸이 10하늘의 마음이 되듯 10하늘의 몸이 9하늘의 마음이 되기에 1번째 하늘은 결국 13번째


하늘의 마음이 완전히 물질화 되어진 차원공간이기에 물질 법칙이 서로 연관을 갖는 연결고리를 더 빽


빽히 갖게 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4번째 하늘부터 마음(영혼)과 몸의 분리가 존재하게 된것이고,


또한 12번째 하늘에서 마음(내면)안의 상위자아와 하위자아의 분리가 존재하게 된것이다.


단하나의 물음으로 인해 말인다. " 존재하는가?" 라는 자신을 향한 질문으로.


결국 상대계안에서는 그 법칙을 존중함으로써 상대계는 유지되어진다.


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이 되려고 하는 모습은  시간과 공간을 비롯 그 무엇의 영향과는 상관없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자신의 믿음과 선택의 문재이다.


자신이 그 보여지는 현상만을 바라볼게 될때 그것이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그대는 결국 창조주가 창조한 시간과 공간의 우주안에서 사는 하나의 성장하는 존재일 뿐인것이다.




~.~.~.~.~.~.~.~.~.~.~.~.~.~.~.~.~.~.~.~.~.~.~.~.~.~.~.~.~.~.~.~.~.~.~.~.~.~.~.~.~.~.


5차원에 가는 것은 지구이다. 인간이 아니다.

5차원에 가려고 선택한것은 지구 자신의 의지이지, 인간의 의지가 아니었다.

당신이 시초를 지구에 두었기에 어머니 지구가 상승과 함께 가는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4차원인간이 되어야 5차원 지구에 살수 있기에 4차원 형태의 육신을 가진 인간이 되려 할 뿐이다.


그대가 근원이 인간이었던가?


당신이 선택만한다면 그대는 모든 차원의 육신을 그대가 선택할 수 잇고, 어느 장소에도 존재할 수 있다.

시간의 틈은 그대가 그대자신 스스로 일어났을 때 사라진다. 그것은 자신만이 안다.

어느 누가 길을 밝혀주고 결정할 사항이 아니다. 지름길도 없다.

단지 지금 자신부터 먼저 바라보라. 그대의 시간은 그댈 위한 시간이니 그 시간은 그대를 위해 쓰인다.

그러니 아무런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진정 그대의 자신만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정해진 시간은 없다. 단지 그 시간을 자신을 위해 써라.



그대는 죽어도 깨닫고, 살아도 깨닫는다. 결국 어느 시점이든 무조건 깨닫는 다는 것이다.

지금 이 생애는 마지막도 아니고, 깨달음이 이곳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대는 영원안에 존재하고 있다.



중요한것은 지금 그대가 존재하는 그 상태에서 어떤 삶을 살고, 어느 길을 걷는가 이다.

그대가 걸어간 그 길  ,   남긴 흔적이 깨달음이 된다.



그대는 어떠한 삶을 살고 싶은가?



그대가       창조의 근원임을 언제나 잊지 말라.




조회 수 :
1536
등록일 :
2005.08.23
03:09:47 (*.117.84.136)
엮인글 :
http://www.lightearth.net/free0/42198/64b/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www.lightearth.net/42198

날아라

2005.08.23
04:24:16
(*.232.154.215)
제발 출처좀 써주세요
List of Articles
공지 국제정세와 관련하여 실시간 전달되는 중요한 정보를 금일부터 올립니다.
아트만
182348     2020-05-14 2022-03-25 13:02
공지 현재 진행중인 국내, 국제정세에 대하여..
아트만
183118     2020-01-09 2020-01-16 18:33
공지 어보브 메제스틱 (한글자막) -- 데이빗 윌콕, 코리 굿 출연 / "트럼프왕과 기사이야기" 1
아트만
200765     2019-10-20 2019-12-17 04:02
공지 유엔 각국대표부에 보내는 제안서 [2018. 8. 29.]
아트만
189384     2018-08-29 2018-08-29 12:14
공지 우리가 지금 이곳 지구에 있음은 우연이 아닙니다. 1
아트만
270531     2015-08-18 2021-07-14 23:44
공지 [릴루 마세(Lilou Mace)] 포스터 갬블(Foster Gamble)과의 인터뷰 1부/ 2부
아트만
271066     2014-05-10 2015-03-11 07:25
공지 가슴으로 느껴보세요 - '빛나는 꿈들' 2 46
관리자
315605     2013-04-12 2021-12-16 14:02
공지 자본주의 체제가 총체적 사기 임을 알려주는 동영상(한글자막) 67
관리자
346718     2012-12-09 2012-12-09 23:43
공지 각성을 위한 준비 --마이트레야(미륵) 7 57
관리자
384354     2011-08-17 2022-01-10 11:20
공지 자유게시판 글쓰기에 관한 안내 3 54
관리자
499149     2010-06-22 2015-07-04 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