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비루가 오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막연한 표현을 하고 싶군요.
정확히 니비루는 [우리 마음에 오고 있습니다]
우주는 우리의 마음이라는 사실에 근거한 표현이지만,
[막연하다]는 느낌을 우리가 지울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럴 때 좋은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좋다. 아무래도 좋다]이지요.
자, 지금 선언하십시오. 좋다. 아무래도 좋다.

[오고 있다]는 표현에는 바깥에서 안으로라는 방향성이 잡혀있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고 있는 셈이지요. 어디에선가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있는 곳은 특정한 장소가 아닙니다.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말을 명심하세요.

니비루는 우리와 함께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오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니비루]의 존재개념을 우리는 알고 서로
나누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마음 속에서 니비루로 상징될 수 있는
막연한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니비루가 온다는 것은, 이것이 마음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는 것이죠.  
이것의 좋은 쪽과 나쁜 쪽은 우리가 선택하기에 달려있습니다.
우주는 우리를 어느 쪽으로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우주가 우리 주체임을 먼저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강요하는 우주관을 지워버리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유지하세요.  

니비루는 우리의 과거입니다.
이것을 [부모]로 표현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자식]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니비루와 관계된 시간의 이미지를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에서 태어났지만 부모가 영혼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지요.
부모는 우리의 육체에 관계합니다.
닮은 모습, 성격, 그리고 질병성, 재능등도 물려받게 됩니다.
영혼의 관점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부모를 선택하게 됩니다.

우리의 시간의식에 이 과정을 끌어온다면,
우리가 죽고, 환생을 선택하면,
생을 통해 해결하고 추구해야 할 무엇과 업
(이것은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이 선택하게 되겠지요. 영혼의 상태에서는
  모두가 하나라는 것이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의 청산을 위해
우리의 전생과 가장 닮은 부모를 선택하게 됩니다.
부모는 이러한 영혼을 끌어옵니다.
우리는 자석이 책상위에 만들어내는 철가루 그림처럼
삶의 그림을 부모와 함께 그리게 됩니다.

전생을 알고 싶다면, 부모를 먼저 보세요.
당신이 지금 죽는다면 다시 태어나서 어떤 것을 이루고 싶습니까?
    
우리는 엄격한 부모에게 시달리는 때가 있으며
부모에게 반항하는 때와 달아나고 싶은 때가 있었습니다.

서른을 넘긴 사람이 이러한 과거를 돌이키면
[참으로 어렸구나]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될 것입니다.
니비루는 지금까지도 유지해오고 있는 우리 과거의 종교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아니, 모든 것에 걸쳐서 부모의 [씨앗]이라는
것은 존재하지요.

전쟁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비정상적인 행동들의 근원은
종교에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우주와 영혼, 그리고 신을
왜곡시켰으며, 의식성장에 장애물을 설치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이것이 전 우주 사회에 보여주기 매우 부끄러운 사실로 생각합니다.
부끄러움은 자신감을 잃어버릴 수 있기에 올바른 선택이 아닙니다.
또한 우주의 모든 성장한 의식은 이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위대한 사건에 속하지요.
우주의 어떤 위대하고 숭고한 그 무엇을 이루기 위해 더도 없는 조건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부터 이어져 온 종교를 증오할 수 있을까요?
물론 해도 됩니다. 또한 훨씬 많은 우리들이 그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모를 증오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증오는 불필요한 감정이다]라고 얘기해주지 않아도,
언젠가는 증오했던 자신을 후회하며.
때로는 그 시간 속으로 돌아가, 그러한 자신을 말리고 싶기도 하지요.

우리가 어느 날에,
고향에 잠시 들러, 허리가 휘어지고 잘 걷지도 못하는 부모를
보았을 때,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이 마음이 진실입니다.
이 마음이 [부모와 자식]이라는 우주테마의 진실인 것이죠.
편협한 종교를 강요해왔고, 제한적인 우주관을 지닌 부모를
설득할 이유는 없습니다. 설득이라는 것은 그것이 잘 안될 경우,
다투는 결과를 초래하며, 좋지않은 결과의 가능성을 지닌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가 우리의 전생이라 했을 때,
부모의 후생은 우리가 되겠지요.
우리가 강요당하던, 그 무엇을 우리가 이 삶을 통해 청산했다면,
이것이 바로 완전한 설득입니다.

증오와 설득은 부모를 상대로 한 감정이 아닙니다.
니비루는 부모를 증오와 설득으로 대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우주에는 증오와 설득이 팽배하게 되고
전쟁이 끊이지 않았지요.

선조들이 강조해왔던 [효]는 표면적으로 느끼는 것 보다
더욱 진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리하면,
효를 위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우리의 존경심을 표할 때, 우리는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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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비루는 총부리를 겨누고 하늘에서부터 돌진해 오는
우리의 전투적인 마음의 한 부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믿고 싶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예수가 그것을 타고 내려와서 믿는 자 안 믿는 자를 가려내어
천국과 지옥을 양분한다고 믿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이럴 경우엔 위대한 한 성자를 지구적인 차원의 수행이 더욱
  필요한 존재로 축소시킨 것에 대한 보상을
  반드시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영혼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 상태에서 관찰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상태를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삶과 죽음을 초월한 상태의 영혼이라면,
니비루를 어떤 대상으로 설정하겠습니까?

자연재해를 입히기를 바랄 이유가 없으며
천국과 지옥의 양극적인 유치한 개념을 다시 이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의 과거이고
이 과거는 우리와의 위대한 다음 번 창조를 위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관계에 의해
니비루의 출현에 따른 어떤 피해를 입거나
이로 인해 우리가 죽는다고 해도,
이것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 무엇도 영혼의 상태를 바꾸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실패]라는 개념을 우리는 다시 도입해야 하고
이에 대한 진지한 분석과 새로운 시작을 통해,
똑같은 것을 다시 되풀이해야 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은 지구와 관계된, 어쩌면 모든 우주 영역에 걸쳐있는
존재들과 함께 안고 있는 문제이지요.

지금, 우리가 청산해야 하는, 이제는 쓸모었는 감정은
[증오]입니다.
니비루를 [증오]하는 사람이야
아직 이에 대한 정체를 몰라 없겠지만,

바로 눈에 보이는 종교와, 삶의 표정들과, 오락에 빠진
사람들, 공해, 과학과 기술, 정체된 의식,등에 대해
증오심을 갖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인데,
왜 가장 중요한 손익문제에서는 엄청난 손해를 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증오심은 자신이 스스로에게 입히는 가장 큰 손해입니다.

우리가 증오심을 여전히 벗으로 두고 있다면
사랑스런 우주의 벗들과 재회하기가 여전히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는 아직 어리다]라는 것을 진술하는 것입니다.

[니비루는 우리 마음에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것은 증오심입니까? 편협한 종교관입니까?
두려운 미래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까?

한가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우주는 우리의 사랑스런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부모도 형제도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관념이 가능한 곳에서 우리는
살고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