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의 아름다움은 [분수]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분수대라는 것은 성립될 수 없겠지요.
  여러 다양한 메시지에 혼란을 느끼는 분들은
  아름다운 분수대 앞에서 그 수많은 물줄기들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보다 먼저 느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그 물줄기들의 주체인 자신을 느끼고
  근원에 머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다양한 사고와 관점은 아름다운 우주의 분수대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것이 별로 시원하지도 않고
  상쾌하지도 않은, 별로 아름답지 않은 대상인 듯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사실은,
  그 분수대는 놀이터나 공원 한 가운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특별하고 커다란 의미를 지니지는 않지요.
  대부분 장식용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집착은 강한 소유욕을 불러옵니다.
  그것은 진지한 관찰과 배움 = 기억의 장애물이 되지요.
  무엇인가 눈에 휜히 드러나고, 보다 명확한
  메시지의 물줄기를 원한다면,
  바깥에서 쏟아지는 그것들을 비교하고 의미있는 것과
  무의미한 것을 구분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가지거나 버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메시지를 읽기 전에 먼저 맡으세요.
  우리에겐 진심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감각이 있습니다.  

  그 수많은 물줄기를 쏟아내는 근원이 되어
  자기에게서 뻗어나가는 수많은 물줄기들을 만끽하면서
  균형을 느끼세요. 혼란이란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무엇을 갖고 무엇을 버릴까 고민했던 것이
  얼마나 큰 시간낭비었는지를
  절감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공원에서 [에잇, 몰라]하며
  무엇인가를 단념할 때, 향긋한 풀내음을 맡게 되며
  새소리를 듣습니다.
  산책 중인 창조의 숨결과 아이들의 밝은 웃음소리에
  명랑해지기도 하지요.

  참 이상한 일입니다.
  진리탐구에 열을 올리며, 고뇌의 심각성을 견뎌낼 때는
  그동안 아름답게 느껴졌던 것 마저도 그 생기를 잃는 듯 하였는데,
  간단한 단념의 긴 호흡 하나에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며 행복해지는 순간을 경험하니 말입니다.
  창조의 의지에 가득차 있는 사람은,
  단념하는 법을 잘 압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순간에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체험하기도 하지요.

  달리 말하면, 죽음을 이용할 줄 아는 것입니다.
  또는 환상을 이용할 줄 아는 것이죠.
  죽음의 순간에 잦아드는 환희를 미리 체험하고 싶다면,
  [에잇, 몰라]를 자주 하면 되겠지요.
  그렇다고 매 순간마다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이
  [에잇, 몰라]하며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이러한 말의 느낌은 책임감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책임감]이라는 것을 조금 더 가볍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절제할 수 있고, 조심할 수 있을 정도로만요.

  우주는 우리에게 어떠한 책임감도 실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그 책임감은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책임감은 강요에 의해 있는 것이 아닌
  질서를 위해 있을 때, 의미있는 용어가 됩니다.
  [강요]의 느낌이 묻어나는 용어 속에서 우리의 사고는
  자유롭지 못하고, 무슨 일이든 재미없게 하기 일쑤이지요.

  우리는 메시지와 교류를 즐겁게 잘 하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분수대 앞에서는 어김없이 심각해지지요.  
  또한 어떤 막중한 책임감이나 의무를 느끼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보다 심각해야 하는, 어떤 우주 함대 사령관 같은  
  선 악의 대대적인 결투시즌을 앞두고 치밀한 작전을 수립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또한 치열하게 메시지를 알려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띠고 진격하는 전사들도 아닙니다.

  이러한 관념은
  빛의 일이라 칭하면서도 어둡고 은밀해지는 행동을
  지배하기 마련입니다.
  행동의 조명을 어둡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가 만들어낸
  두 어깨 무거운 책임감이나 의무심 같은 것이죠.

  우주의 시험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꼭 있어야 한다면 이것 역시도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지를
  위해 출제되는 시험범위 정도겠죠.
  더 나은 세계나 그것보다 못한 세계로 떨어지는 결과를 위해
  채점하는 천사들은 없습니다.

  이러한 관념에서 떠나세요.
  보다 쾌활하게 여기의 커뮤니티를 즐기십시오.
  여기는 향긋한 풀내음이 있고 피콜로 음색같은 청명한
  새소리와 산책 중인 창조의 숨결이 있는 곳입니다.

  세상이 어둡게 느껴질 수록 이러한 관념을 돌파하고
  사람들이 더 이상 맡을 수 없다고 규정한 향기를
  전해주는 것이 우리의 책임감 아닌 책임감입니다.
  그 전해주는 것에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나누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돌보며 사랑하는 것은
  어떤 책임감이나 사명 내지 의무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죠.
  
  무엇 때문에, 이 사람들은 마음이 풍요로운 것일까?
  무엇 때문에, 이 사람들은 서로에게 따뜻한가?
  
  이것이 우리들의 아름다운 전염성입니다.
  또한 그 어떤 색향의 지닌 물줄기도 담아낼 수 있는
  근원입니다.

  기쁨 속에 머무세요.
  이 말을 우리는 가장 자주 들었습니다.
  은하연합을 통해 이 말을 들었습니까?
  그렇다면,
  기쁨으로 은하연합을 창조하십시오.
  우리의 온전한 믿음은 그들에게 가장 훌륭한 에너지입니다.
  기쁨과 근원의 의식으로 그들을 풍요롭게 만드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우리가 될 것입니다.
  
  주체가 되십시오.
  무엇에 조정받거나 무엇에 의지하지 않으면 행동할 수 없는
  나약한 관념은 이제 떨칠때가 되었습니다.
  신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이 고귀한 시간에
  근원에 닿아 다음의 성장을 기약하십시오.

  우리는 공원에 있습니다.
  놀이터가 더욱 정감이 가나요?

  어린 시절, 저녁 늦게까지 뛰어놀던 기억이 나십니까?
  오랜지색 노을이 밤하늘에 젖어들어갈 즈음,
  어머니는 우리들을 찾으셨죠.

  그러면 우리는 시원한 저녁 바람에 말라가는 땀을 느끼며,
  어머니의 저녁 밥짓는 냄새를 따라 친구들과 작별을 고하곤 했습니다.

  사랑은 영원히 항상 이렇게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녀가 우리에게 하는 말이라곤 [밥 먹으라]는 말 밖에 없죠.
  우리는 사랑이 차려준 영혼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끼니 조차도 맛있게 잘 먹지 못합니다.

  항상 모든지,
  맛있게 서로 나누는 것에서 시작하십시오.
  남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한 일이며, 자기에게 좋은 일입니다.
  남에게 옮아가는 일은 자연스런 것인데,
  굳이 남을 위한다고 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기쁨 속에 머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