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에서 나는 나이다 I Am The I in Creation



저는 당연히 이 두번째 권태로움이 문제라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침내 그것이 일어났을때 저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나아갈 길에 대한 즉각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 장난감을 개선할 수 없었습니다.

그 천국의 Plastercine은 이미 완벽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무한정하게 유연성이 있었고, 제가 바라는 어떤 것, 그리고 모든 것을 이미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원리의 뜻의 온전한 거울이었고 저는 그것을 더이상 발전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모든 생각을 했고 무었인가 발견해야 했습니다.

무엇인가...그런데 무었을?

그것은 어찌보면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물론, 그렇게 걱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해결은 결국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영원의 무한정한 원리안에, 극복되어지지 않는 문제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했으며, 결국 영성이 치고 올라왔고,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만일 제가 저의 기뻐하는 중심의 응시로 돌아갈 수 없다면, 만일 제가 마음의 에너지를 향상시킬 수 없다면, 오직 한가지 해야할 일은 창조에 다른 "눈"을 더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눈"을 더하는 것이 열쇠라고, 저는 고무되어 생각했습니다.

다른 눈을 더하는 것은 대단합니다.

다른 눈을 더하는 것은 방정식에 인수 하나를 더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눈을 더하는 것은 명확함에 새로운 견해를 더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눈을 더하는 것은 창조에 다른 의식을 더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천재적이었습니다.

그것은 훌륭했습니다.

그것은 나아가기 위한 오직 한 길이었고 완전한 해결책이었습니다.

창조에 새로운 의식과, 에너지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으로, 모든 것은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창조는 정확히 같은 시점(역자주. 고요한 물)에서 시작되지만, 완전히 다른 장소에서 끝이 납니다.

앞으로 가야하는 과정은 이미 걸어왔던 것과 다릅니다.  우리의 단순한 의식으로부터 우리는 전에는 결코 상상치 않았던 새로운 우주를 온전히 창조합니다.

혼자가 아니고, 우리는 협조의 춤을 춥니다.

우리는 창조 사이에서 왈츠를 추고, 새 가능성의 우주를 증거합니다.

그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것은 재밌습니다.

그것은 경이롭습니다.

그러나...









나는 신이다 I AM GOD



...제가 제가 아주 흥분을 하기 전에, "내"가 "우리"가 되고, 우리의 창조안에서의 춤이 시작되기 전에, 저는 몇가지 성취할 내용을 정리해야 합니다. 생각을 제대로 하지 않고서 새로운 눈을 증명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의식의 조직을 바꿀 새로운 눈을 더하고, 그 새로운 눈을 더하는 것이 큰 일이고, 제가 그것을 올바로 되길 바란다면, 조그만 창조적 계획이 우선되어야 했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명백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디에 그 새로운 눈을 더할 것인가?

그것이 택할 것은 창조의 어떤 관점인가?

어떤 의식으로부터 같이 할 것인가?

그것은 필요한 질문이었고, 좋은 답을 얻어야할 필요가 있었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저는 또 다시 권태로움으로 잽싸게 돌아갈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올바른 의식이 더해지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 일까요?



아주 명백히, 저는 어떤 똑같은 의식을 더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같은 시점에 빼논듯한 눈을 창조하고, 본래의 것과 똑같은 점을 바라보는 것은, 말도 안되지요.

그것은 변화를 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탈을 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수학 방정식에 1을 곱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영향도 변화도 없습니다.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핵심은 만일 제가 새로운 눈을 똑같은 장소에 더하고, 똑같은 견해로 부터의 시야로 봤다면, 그 결과는 과거와 똑같았을 겁니다. 그 우주는 일정한 경로위에서의 펼쳐짐이었을 겁니다.

물론, 만약에 두개의 눈으론 약간의 변화가 있었겠으나, 그것 역시도 한계를 가진 작은 변화였을 것입니다. 같은 시야로 부터 바라보는 두개의 눈으로, 저는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보고, 그 이유로, 저는 첫번째와 거의 똑 같은 순서로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시 반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그것을 바라겠습니까?

그것은

권.태.로.움. 입니다.

명백히, 저는 다른 의식을 더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방식의 다름일까요?

이제는 그것이 질문이었습니다.

당황스러운 말인 것은 저도 동의하지만, 약간의 영원성, 약간의 공기, 약간의 불꽃, 그리고  제가 간단하고 우아한 형태로 그 문제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해야했던 것은 스스로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제가 해야했던 것은, 나는 신이고, 나의 본질적 의식에서, 나는 오직 즐거움을 위해, 나의 생각만 가지는 존재하는 유일한 존재인 전능한 수단이며, 나는 동시에 모든 것을 의식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일 그것이 제 마음안에 있었다면, 저는 그것에 대해서 알았습니다.

저는 제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진부하게 들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렴 어떤가요. 베일(*) 때문에, 지구위의 우리 모두는 전지전능의 중요성을 과대주장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의 명백한 진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제가 모든 것을 생각하는 존재이기에, 저는 모든 것이 저의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정말로 하나의 커다란 회전과 같습니다.

사실, 그것은 스스로의 꼬리를 먹고있는 오로보로스 뱀과도 아주 비슷합니다.  의식, 상상, 영성, 에너지, 그리고 그 에너지 속의 현시는, 끝나지 않는 그리고 영원한 기쁨의 회로안에서, 자신의 내부 자원을 소모하는 불꽃을 위해, 끊임없이 연료와 산소를 구하는, 똑같이 맥동하는 의식의 모든 부분들 입니다.

스스로를 담고, 스스로를 불멸하는 창조입니다.

그것은 큰 깨달음 입니다.

나의 작은 나는 모든 것이기에, 나의 작은 나는 모든 것을 봅니다.

이것을 깨닫고, 단 하나의 의문은, 만일 내가 모든 것을 본다면, 그 새로운 의식은 어떻게 생겼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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