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caremind.com 많은 교사들은 우리가 육체적 경험을 하고 있는 영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성장을 위한 거대한 기회에 참가하기 위해 지구에 온 영혼입니다. 그것은 왜 거대한 기회일까요? 지구는 빛과 어둠의 창조적인 표현에 한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자유의지 지역입니다.
우리는 창조자 신/여신이며 우리자신의 현실을 창조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창조자 신/여신인 영혼이고 우리가 창조한 것들로부터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서 지구에 육신을 입고 왔다면, 지구는 창조자 신/여신들의 궁극적인 놀이터임에 틀림없습니다. 맞지요? 당신을 무얼 생각하나요?

지금 우리의 어둠의 창조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도 그것에 대해 논쟁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 진화해온 우리가 아는 바로는 우리는 우리의 고통스런 경험으로부터 최대로 배웁니다. 사실상 그것은 우리가 키워온 빛의 표현이 아닌 우리의 어둠의 표현으로부터 입니다. 빛의 표현은 어둠의 표현으로부터 창조하고 경험하고 배우기 위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창조한 댓가입니다.

  좋습니다. 이 모든 것이 참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의 창조자이고 우리 세계에서의 모든 표현은 빛과 어둠을 드러내며 그것들은 우리가 배워야 방식이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로써 세계무역센터(WTC)/국방부 공격에 대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3차원 관점에서(사회가 생각하는 방식) WTC/국방부 공격은 무서운 고통스런 사건입니다. 3차원 관점으로는 그 사건에 대한 어떤 좋은 것도 있을 수 없으며 아무런 가치고 없습니다.


그러나 고차원적 관점에서 그 사건들은 거대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면

1) 우리를 극성 통합(빛과 어둠이 통합)이라 불리는 이 영혼 진화의 게임에서 다음 단계로 옮겨 갔으며

2) 우리에게 빛의 일꾼으로서 어둠에 의한 대응조치를 창조하기 위해 지구의 집단의식을 더 높은 단계로 이동시켰음을 나타내며

3) 그 공격이 빛의 일꾼에게 지구에서 그들의 더 큰 임무(5차원 파동으로 이끌어줄 지구주위에 5차원 연민의 그리드를 창조하는 것)를 시작하게 하기 위한 각성을 제공했습니다.

이 경우에서처럼, 항상 무서운 고통은 커다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수준에서는 그런 건물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의 희생이 비행기의 충돌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 하나의 사건이 새로운 단계의 지구 상승을 알려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나는 그런 사건은 어둠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빛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 않는 다면 그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깨달았습니다.
행성적인 상승에서 항상 균형과 균형을 맞추는 대응 세력이 있습니다.  


빛의 세력이 지구를 더 높은 파동으로 옮겨갈 때 어둠의 세력은 대응세력으로 옮겨갑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동의 힘을 반영해주는 우리의 창조입니다. 어둠은 그들을 맞서는 행동을 하지 않은 한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의미가 있습니까?
이것은 영적이고 창조자 신/여신의 수준에서 좋은 일입니다. 왜냐면 그것은 우리를 집합의식의 힘으로 행성을 전환시키는 진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 공격은 게임의 내기가 더욱 커진 수준으로 이동된 완전히 새로운 게임에 있다는 사실을 경고해주고고 있습니다. 우리가 집단의식(사람들의 집단적인 마음)을 더 높은 상태로 이동시킬 때, 말하자면, 어항밖으로 나온 것처럼요. 어둠의 세력은 지구 우리를 얻으려고 어항으로 다시 넣기 위해 행동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 이야기 했듯이 이것은 더 이상 우리 몸을 감금하기 위해 싸웠던 게임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감금하기 위한 게임입니다. 왜냐구요? 왜냐면 우리는 마침내 우리의 집단적 마음을 어항 밖으로 가져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이런 전환을 만들어 낼 만끔  깨어나지 못해서 전에는 일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능합니다.

그래서 연민으로 돌아갑시다. 우리가 이런 최근의 창조자의 신적 경험에 대해 반응하기 위해 3차원 형태의 연민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우리자신을 다시 어항으로 넣어진다는 것을 알수 있을 것입니다. 왜? 우리는 고통이 멈추어지기 원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동정하기 위해서 희생자로서 이런 경험을 바라보도록 선택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행동했을때 우리는 우리자신을 가장 높은 잠재성 즉, 창조자 신/여신으로부터 우리자신을 분리시킵니다. 우리는 이런 창조를 다른 사람의 창조로서 봅니다. 우리는 어둠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우리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봅니다. 우리가 3차원 연민을 사용할 때, 우리는 힘이 없어서 다른 경험을 창조할 수 없으며, 그것으로부터 배울 수 없으며, 이런 최근의 고통스런 창조를 치유하고 균형을 유지시킬 수 없다는 행동들을 말하여 줍니다.  

우리가 3차원 연민을 사용할 때 우리는 동정을 느낍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동정할 때 우리는 누군가가 경험하는 것은 나쁜 것이고 부정적이다 라는 행동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영혼으로서 창조자 신/여신으로서, 옳고 그른 것은 없습니다. 단지 극성의 표현이며 모든 표현은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자 신/여신은 동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은 비판단 상태를 유지하고 단지 존재하는 창조의 모든 표현을 수용합니다. 지금 그것은 신이 비판단적이며 수용하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는 식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신처럼 존재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WTC/국방부 공격의 예에서 처럼 3차원 연민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어항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만약 우리가 5차원 연민을 사용하기로 선택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집단적인 마음을 어항에서 꺼내올 수 있으며, 경계를 벗어난 훨씬 높고 멀리 이동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것을 합니까?

우리는 3개의 창조자 신/여신의 단계를 성취함으로써 합니다.

1. 이 삶의 경험에서 어둠의 행동의 한계를 보고 배우는 것

2. 그런 에너지를 연민으로 느끼고 변형시키는것

3. 우리 세계를 감쌀 정도로 확장된 새로운 현실이나 의식의 격자로 그런 연민을 집중하는 것
   그래서 우리를 어항 밖으로 훨씬 멀리 이동시키는 것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7-12-15 10:14)